"동화읽는 어른" 2019년 10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우리말 이야기꽃

여섯걸음 ― 마음을 읽고 쓰다


삶을 노래하면서 살림을 짓는 마음으로 이오덕 님 책을 새로 읽어 보았습니다. 꿈을 그리면서 생각을 짓는 손길로 이오덕 님 책을 하나하나 되읽었습니다. 사랑을 지피면서 책을 짓자는 꿈으로 이오덕 님 책을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가슴에 품어 봅니다. 《이오덕 마음 읽기》 9쪽


  제가 나고 자란 고장은 인천입니다. 이 인천은 예부터 바다가 아름답고 고개가 가득한 조그마한 바닷마을입니다. 한자를 새기면 ‘어진내’라고도 하는데, 높은 멧자락은 없어도 구백아흔아홉 고개가 있다고 할 만큼 고개나 언덕이 많아요. 그런데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군수공장이 들어서야 했고, 서울로 보내는 물건을 실어나르는 길목이 되어야 했습니다. 해방 뒤에는 아주 공장도시로 바뀌었어요. 저는 ‘아름다운 바닷마을’인 모습이 자취를 감추고 ‘매캐한 공장도시’일 적에 이 고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은 골목집이되, 마을 둘레는 어디를 보아도 겹겹이 공장이었어요. 여름에도 창문을 열기 어려웠는데 때때로 매우 새로운 한 가지를 느꼈습니다. 제법 커다랗기에 동무들하고 타고 오를 만한 나무 곁에 있으면 한여름에 안 덥더군요.


  어른 눈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은 대목일 수 있고, 교과서나 방송에서 한 마디로도 안 가르친 대목일 텐데, 나무그늘은 선풍기는 저리 가라 할 만큼 시원했고, 늘 바람이 감돌았어요. “야! 나무 곁에 앉으면 되게 시원해!” 하는 말이 늘 절로 터져나왔어요. 나무그늘이 아닌 곳에서도 바람이 화악화악 화라라락 들어오면 어찌나 시원하던지, 바람이야말로 불볕을 식히는 멋진 동무라고 느꼈습니다.


  한여름에 선풍기를 틀고 마루에 앉아서 수박을 먹다가도 그랬어요. 열어 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면 “바람이 아주 시원하다!” 하고 어느새 외쳤습니다. 다만 이 바람결에 매캐한 기운이 늘 묻어났는데, 그래도 바람이 반가워 회오리바람이 치니 밖에 나가지 말라고 타이르던 때에도 몰래 밖에 나가서 회오리바람을 실컷 맞으면서 놀곤 했습니다.


  오늘날 새롭게 태어나서 자라는 어린이는 어떤 터전을 누릴까요? 어릴 적에 나무그늘에 감도는 바람을 누릴까요, 아니면 선풍기도 그닥 안 쓰는 채 에어컨 바람을 누릴까요? 나무그늘에 감도는 바람은 숲이 거저로 베풀 뿐 아니라 전기도 발전소도 송전탑도 아무것도 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줄 몸으로 얼마나 받아들이는 삶터일까요?


  《이오덕 마음 읽기》(자연과생태, 2019)라는 책을 써내는 동안 내내 나무를 떠올렸습니다. 멧골에서 멧노래를 부르는 멧새로 다시 태어나고 싶던 이오덕이란 어른을 ‘어른’으로 여기기보다는 ‘마음동무’로 만나려고 이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이오덕 어른 유족은 저더러 ‘아버지(이오덕) 평전이나 전기’를 쓰면 어떻겠느냐고 물으셨으나, 저는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하고 책을 갈무리하는 데까지만 일하겠다고, 평전이나 전기는 다른 사람 몫이 되도록 하겠다고 손사래쳤습니다.


  다만, 떠난 어른을 책으로 만날 이웃을 헤아리자면, 어른이 책에 남긴 마음은 조금 짚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말 우리 얼〉 1999년 2월호에 “책도 보기는 해야 하겠지만 그 속에 빠져 버리지는 말라(20쪽)” 하고 말씀하셨어요. 곧, 이오덕 어른이 글이며 책을 쓴 바탕이라면, 에어컨도 선풍기도 아닌, 더구나 부채조차 아닌, 집이며 마을에 나무가 우거져서 ‘숲이 베푸는 바람’을 언제나 누구나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이 마음을 밝혀 보자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틀 ← 기반. 기초. 여건. 조건. 요소. 요건. 토대. 근간. 베이스. 포인트


  제가 쓰는 말은 제가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들이 쓰던 말이면서, 저 스스로 삶을 가꾸어 살림을 짓는 길에 새롭게 익힌 말입니다. ‘기틀’은 어릴 적부터 둘레 어른들이 으레 쓰던 말이라 귀에도 손에도 눈에도 익어요. 아무렇지 않게 ‘기틀’이란 말을 쓰는데, 어느 날 어느 분이 ‘기틀’이란 말을 저한테서 처음 듣는다고, 그런 한국말이 있느냐고 갸우뚱해 하셨습니다. 그때에 저도 갸우뚱했어요. ‘아니, 이 말을 모르는 분이 있네?’ 이러다가 다시 생각했어요. 강원도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어느 이웃님은 인천이나 충남 바닷가에 처음 찾아가던 때에 ‘밀물썰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그분이 서른 살에 이르도록 그분 고장에서는 ‘밀물썰물’이란 말을 듣지도 못했다고 한 적이 떠올랐습니다.


  삶자리에서 흐르는 말은 그 삶자리에 있는 사람한테는 매우 익숙하면서 마땅합니다. 삶자리에서 보기 어렵거나 못 보는 살림하고 얽힌 말이라면, 서른 살이나 쉰 살이 되더라도 그러한 말을 알기도 힘들지만, 문득 소리로 들어도 알아차라기 어렵습니다.


  ‘기틀’이란 낱말을 어느 자리에 어떻게 쓰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니 여러 한자말하고 영어가 떠오릅니다. 온갖 말을 재미나게 쓰고자 여러 한자말하고 영어를 끌어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어쩌면 ‘기틀’이란 말을 어릴 적부터 못 듣고 자란 터전이라서 ‘기틀’을 홀가분하면서 즐겁게 쓰는 길을 아직 익히지 못한 셈일 수도 있습니다.


  삶 아닌 책으로 글을 읽으며 말을 배우다 보면, 글이나 책 아닌 삶으로 말을 배운 이웃하고 멀어질 수 있습니다. 책이나 글 아닌 흙살림으로 말을 편 시골 할배는 ‘기둥·뿌리·줄기·나들이’ 같은 말을 으레 쓰지만, 책이나 글에서는 ‘근간·근본·맥·외출’ 같은 낱말이 흘러요.


  반드시 이쪽 낱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저쪽 낱말을 꼭 이쪽 낱말로 고쳐서 써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모든 밑바탕은 오롯이 하나, 삶에서 피어난 말을 즐겁게 쓰며 기쁘게 나누는가이지 싶어요. 돌개바람을 느끼고, 빗물을 마시고, 흙내를 맡는 말씨를 새로우면서 즐겁게 가꾸어 오늘에 맞게 산뜻하게 북돋우면 참으로 넉넉하리라 봅니다.


  《이오덕 마음 읽기》라는 이름으로 책을 내기까지 얼추 열다섯 해쯤 걸렸지 싶습니다. 지난 열다섯 해가 길었다면 길지만, 새롭게 배우며 걸어온 나날로 본다면 알맞춤하게 흐른 하루하루였다고 느낍니다. 책이름에 ‘마음’이란 낱말을 굳이 넣었는데, “이오덕 읽기”라고만 하지 않은 까닭이 있어요. “이오덕을 읽는” 데에서 그쳐도 나쁘지 않지만 “마음을 읽는” 길로 뻗어 본다면 한결 즐겁거나 기쁘게 마음동무를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떠난 어른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이든, ‘동시하고 동화’이든, ‘교육·사회 비평’이든, ‘권정생 님하고 나눈 글월’이든, ‘긴긴 해를 채운 일기’이든, ‘어린이문학 비평’이든, ‘숲을 그리며 쓴 수필’이든, 어떤 마음을 글로 그려내어 우리한테 어떤 빛을 건네거나 물려주고 싶어하셨나 하고 ‘마음’을 돌아본다면, 새삼스레 나무그늘 바람 한 줄기가 후욱 끼친다고 느껴요.


  어느 모로 본다면, 어른 한 사람은 ‘우람한 나무’라기보다는 ‘아이들이 신나게 타고 노는 나무 한 그루’요, 이 나무 한 그루는 예닐곱 아이들쯤이 나무그늘을 누리면서 땀을 식힐 적에 후욱후욱 싱그럽고 푸른 바람을 일으켜서 살살 어루만져 주는 셈일 수 있습니다.


마음동무 : 1. 마음이 맞거나, 마음을 나누거나, 마음을 서로 읽거나, 마음이 같이 흐르는 사이 2. 낯설거나 어려운 일을 마음으로 헤아려 주면서 차근차근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주어 기운이 나도록 이끄는 사이.


  여느 한국말사전에 아직 ‘마음동무’란 낱말이 없습니다. 제가 새로 쓰는 한국말사전에는 ‘마음동무’라는 낱말을 넣을 생각이고, 뜻풀이를 붙여 보는데, 얼핏 새 낱말 하나가 가슴으로 스칩니다. 마음동무가 되는 사이가 있다면, ‘마음어른’으로 곁에 모시면서 삶이며 살림을 배울 분이 있을 만하겠다고. 마음에 빛이 될 만한 어른이라면 ‘마음어른’이겠구나 하고.


  ‘절친’이나 ‘소울메이트’ 같은 말도 쓸 수 있지만, ‘마음동무’를 써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정신적 지주’나 ‘멘토’ 같은 말도 쓸 수 있는데, ‘마음어른’을 써도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ㅅㄴㄹ


제 나름대로 길을 찾았습니다. ‘즐겁게’입니다. 쉽게 읽지도 않되 어렵게 읽지도 않는 길이란 ‘즐겁게’ 읽는 길이지 싶습니다. 이오덕 님을 함께 읽을 이웃님도 늘 마음자리에 ‘즐겁게’를 씨앗으로 놓아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오덕 마음 읽기》 153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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