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펴내는 "동화읽는어른"이란 모임책에 싣는 글입니다.

모임책에는 몇 대목을 줄여서 싣고, 누리집에는 통으로 올립니다. ㅅㄴㄹ


+ + +


우리말 이야기꽃
두걸음 ― 치마 두른 사내


  저는 하루에 글종이로 500쪽쯤 글을 씁니다만 글종이 500쪽이 무엇인지 어림을 못 하는 분이 있어요.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으니 고분고분 이렇게 얘기합니다만, 쓰는 글이 이쯤이라면 읽는 글은 훨씬 많습니다. 스무 살부터 서른 살 무렵까지는 ‘한 줄을 쓰려면 백 줄을 읽어야 한다’고 여겼어요. 참말로 그 나이에는 그렇게 읽고 썼어요.

  요새도 이 다짐은 그대로인데, 종이책으로 치자면 ‘한 줄을 쓰는 사이 스무 줄을 읽는다’고 할 만해요. 그리고 종이책을 적게 읽기로 하면서 다른 읽기를 합니다. 이를테면 열 줄은 바람읽기로, 열 줄은 풀읽기로, 열 줄은 나무읽기로, 열 줄은 벌레읽기로, 열 줄은 별읽기로 갑니다.

  아이읽기로도 가고, 살림읽기랑 사랑읽기로도 가고요. 예전에는 종이책을 읽는 데에 온마음을 썼다면, 이제는 종이책은 매우 조금 읽고, 삶책하고 숲책하고 넋책을 읽는 길에 한마음을 쓰는 길입니다. 종이책을 거의 못 읽을 수밖에 없이 바깥일을 하는 날이면 ‘다른 숱한 책’을 신나게 읽어요.

치마 (숲노래, 2019.1.29.)

정강이까지 드리워 긴치마
허벅지 훤히 깡동치마
무릎 언저리 무릎치마
속에 따로 속치마

바람에 나비처럼 팔랑치마
한 땀씩 곱게 넣은 꽃치마
가지런히 줄 잡아 주름치마
머리 덮는 쓰개치마

치마를 둘러 시원하면
너도 나도 입어 보자
옛날 옛적엔
누구나 치마차림이었다지

속에 덧입는 치마바지
얌전히 치마저고리
어머니 누나는 치마순이
아버지 나는 치마돌이

  2017년 늦가을부터 치마를 두릅니다. 저는 사내라는 몸으로 태어났으니 겉보기로는 “치마 두른 아저씨”입니다. 이런 차림을 보고는 거북하다고 여기는 분이 있고, 재미있다고 여기는 분이 있으며, 아랑곳하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둘레에서 어떻게 보든 저는 스스로 살아가려는 결을 생각합니다. 스스로 마음에 드는 옷을 걸칠 뿐이니 대수롭지 않습니다.

  언젠가 바깥마실을 하는 길에 서울에서 전철을 타는데, 어느 할머니가 저를 보며 “무슨 남자가 치마를 입어?” 하시기에, “어머나, 할머니! 바지 입었네. 왜 여자가 바지를 입어?” 하고 대꾸했어요. 할머니는 낯빛이 싹 바뀌면서 허둥지둥 다른 칸으로 건너갑니다.

  생각해 봐요. 바지를 꿰고 싶으면 바지를 꿰면 되어요. 치마를 두르고 싶으면 치마를 두르면 되지요. 가시내이든 사내이든 마음껏 즐거이 신나게 홀가분히 재미나게 웃음으로 사랑스레 꽃답게 별처럼 노래하면서 옷을 갖추면 아름답습니다. 이런 뜻으로 ‘치마’라는 동시를 썼어요. 앞쪽에는 여러 가지 치마 이야기를 다루고, 이 치마란 옷을 예전에는 모든 사람이 입었다는 대목을 밝힌 다음, ‘치마돌이’란 말을 살그마니 넣었습니다.

  자, 더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이제 뭇 가시내는 즐겁게 머리카락을 짧게 칩니다. 머리카락을 박박 밀기도 합니다. 적잖은 사내는 즐겁게 머리카락을 기릅니다. 노래하는 몇몇 사람이 아니어도 치렁치렁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는 멋사내가 많아요. 바야흐로 멋이든 아니든 마음 가는 결로 삶길을 짓습니다.

늑대 (사름벼리, 2019.1.10.)

왜 옛날이야기 그림책에선
늑대가 나빠?
‘빨간 모자’ 그림책에서도
늑대가 나쁘게 나와!

언제나 미움 받다가
책끝에서는 물에 빠져죽거나 그래.
‘아기 돼지 삼형제’라는 책에서도
늑대가 나쁘게 나오잖아.

이렇게 저렇게 되다가
마지막엔 불에 타죽어.

난 늑대 이야기가 그런 건
아주 반대야!!!!

  늑대가 얼마나 똑똑하면서 착한 짐승인가를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이제는 늑대가 얼마나 대단하면서 사랑스러운 짐승인가를 또렷이 아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 어느 사람은 늑대를 외눈으로 바라보고, 어느 사람은 늑대를 마음눈으로 바라볼까요?

  2011년에 전남 고흥이라는 시골로 보금자리를 옮겼습니다. 우리 곁님은 아이를 아이답게 돌보는 어른다운 어른으로 함께 살아가려면 숲에서 살림자리를 가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숲집을 가꾸는 길을 이루리라 여기며, 이때부터 시골에서 사는데요, 인천을 떠나던 이해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란 책을 썼습니다. 누구보다 우리 집 아이들이 열 살 즈음 되면, 우리가 쓰는 말이랑 글을 찬찬히 짚고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뜻으로 썼어요. 2015년에는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을 썼는데요, 네 해 사이에 ‘바로쓰기’란 이름에서 ‘새롭게 살려낸’이란 이름으로 거듭났습니다.

  첫째, ‘바로쓰기’란 우리가(또는 나부터)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굳거나 길든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슬기롭게 가다듬자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살려쓰기’란 우리가(또는 나부터) 앞으로 나아갈 길을 스스로 즐겁게 꿈꾸면서 사랑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두 가지 이야기는 바탕은 같되, 풀어내는 결이 살짝 달라요.

  ‘바로쓰기 = 옛버릇을 털고 새몸짓으로 거듭나기’인 셈이요, ‘살려쓰기 = 새살림을 짓는 사랑으로 노래하기’인 셈입니다.

  2003∼2007년에 이오덕 어른 책하고 글을 갈무리하면서 어른이 남긴 글을 모조리 읽어 보니, 이오덕 어른은 ‘우리글 바로쓰기’란 이름으로 쓴 책을 몽땅 ‘우리말 살려쓰기’로 고쳐쓰고 싶어하셨더군요. 그런데 ‘우리글 바로쓰기’를 낸 출판사는 옛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니 새 이름으로 고치면 책장사를 하기 어렵겠다고 밝혔대요.

  바르게 가다듬는 틀을 세워도 훌륭하지만, 고장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새 말씨를 즐겁게 가꾸면 한결 아름답게 자라지 싶어요. 고장말·마을말·집말, 이 갖가지 사투리가 눈부시게 피어나는 말꽃이라면, 손수 짓는 말길을 노래한다면, 참 곱겠지요.

 고르다. 가지런하다. 판판하다. 반반하다 ― 편평하다. 평평하다
 배우다. 익히다 ― 공부하다. 학습하다

  ‘편평하다’로 적어야 맞는지, ‘평평하다’로 적어야 맞는지 헷갈리는 분이 꽤 있는 줄 압니다. 이때에는 둘 다 안 쓰면 됩니다. 한국말 ‘판판하다·반반하다’를 쓰면 되어요. 때로는 ‘고르다·가지런하다’를 쓰면 되고요.

  아이들은 ‘공부·학습’이 지겨울 만합니다. 어른도 그래요. 그런데 ‘배우다·익히다’는 달라요. 아직 몰라서 새롭게 찾거나 살펴서 받아들이려고 하기에 ‘배우다’입니다. 새롭게 찾거나 살펴서 받아들인 살림을 몸에 잘 붙도록 애쓰면서 살기에 ‘익히다’입니다.

  한자말을 굳이 한국말로 걸러야 하지는 않아요. 이 대목을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어느 말을 누가 어떤 뜻으로 썼는지 곰곰이 헤아리면 좋겠어요. ‘배우다’하고 ‘익히다’라는 수수한 낱말 하나에 깃든 너른 숨결을 냠냠짭짭 받아먹으면서 새롭게 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배우는 사람, 곧 ‘배움이’입니다. 서로 배우니 ‘배움동무’입니다. 오래도록 같이 배우니 ‘배움벗’으로 거듭나요. 사랑스러운 배움벗이기에 따로 ‘배움님’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배우는 길에 든든한 이웃이니 ‘배움지기’이기도 합니다. 한국말이란 끝없이 가지를 치면서 생각을 새로 뻗도록 북돋웁니다. 왜냐하면 한국이라는 터에서 태어나서 자란 말이 한국말이거든요. 다른 나라 말도 그 나라 그 터에서 죽죽 뻗고 자라요.

  아이는 ‘배움아이’요, 어른은 ‘배움어른’입니다. 배우는 모든 곳이 ‘배움터’입니다. 학교에서만 배우지 않기에, 우리 집은 언제나 ‘배움집’입니다. 마을도 학교라는 뜻으로 ‘배움마을’이 되고, 온나라가 배우는 터이기에 ‘배움나라’예요. 슬기롭게 배워서 환하게 빛나는 사람한테는 ‘배움빛’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어쩌면, 우리를 가르치는 슬기로운 사람은 ‘스승’이자 ‘배움빛’이기도 하겠지요. 스승이란, 가르지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배울 수 있도록 하면서 스스로 새롭게 배우는 사람을 가리킬 테니까요.

  치마를 놓고서 동시를 한 자락 썼습니다만, 치마를 입으면서 여러모로 배웁니다. 치마란 아주 홀가분하면서 즐거운 옷이더군요. 다리에 햇볕하고 바람을 쪼이려고 할 적에 참으로 좋은 옷이고요.

  울타리란 남이 쌓지 않고 우리 스스로 쌓는구나 싶어요. 남녀나 여남이라는 울타리를 걷어내는 길에 치마 한 벌은 매우 재미난 징검돌이 될 만하다고 봅니다. 가시내가 바지를 꿰면서 어깨동무란 길에 씩씩하게 징검돌을 놓았다면, 이제 사내는 치마를 두르면서 어깨동무란 오솔길에 살뜰히 징검돌 하나를 더 놓을 수 있구나 싶어요.

  전철에 ‘쩍벌사내’가 제법 있지요? 모든 쩍벌사내한테 깡동치마를 입히면 좋겠어요. 애써 다그치지 않아도 저절로 달라지지 않을까요? 대통령 시장 군수도 한겨울에 깡동치마를 입도록 하면 좋겠어요. 이래야 이 나라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스스로 겪을 적에 비로소 생각합니다. 스스로 할 적에 바야흐로 배웁니다. 스스로 생각할 적에 비로소 살림을 짓는 길로 가고, 스스로 배울 적에 바야흐로 사랑을 가꾸는 몸짓으로 달라져요.


최종규(숲노래) : 한국말사전 짓는 사람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리고, 한국말사전을 새로 쓰는 길을 걷는다.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내가 사랑한 사진책》,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자전거와 함께 살기》, 《책빛숲》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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