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
거의 안 울리던 집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웬 미친놈이 얼근한 목소리로 대뜸 막말을 한다. 누굴까? 내가 아는 텃마을 동무라면 이렇게 막말부터 하면서 전화하곤 한다면, 내가 아는 목소리가 아니다. 한동안 듣고 보니 이 녀석은 아무나 붙잡고 퍼붓는 분이로구나 싶다. 이분이 퍼붓는 막말에 한술을 얹어서 갖은 화살말을 쏜살같이 퍼붓는다. “○★☆♡♤” 이러니 어느새 전화가 툭 끊긴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가늘게 한숨을 고른다. 히유. 내가 군대에 가서 배운 하나라면 삽질이요, 다음은 막말질이요, 다음 하나는 주먹질이다. 천 삽을 뜨고서 허리를 펴는 길을 배웠고, 한국에서는 언제 어디에서나 대뜸 막말을 퍼부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길을 배웠고, 막말로 안 되면 쥐어패라는 길을 배웠다. 삽질은 군대를 떠난 뒤에도 쓸모가 있더라면, 막말질이나 주먹질은 그야말로 쓸데가 없을 뿐 아니라 싫다. 누구한테 막말질을 하고 싶지도, 누구를 주먹질하기도 싫다. 그토록 막말을 듣고 군대에서 지냈으면 되었고, 그토록 주먹질로 얻어맞으며 군대에서 살아남았으면 되었다. 이 두 가지는 부디 이 땅에서 안 써먹고 살기를 빌 뿐이다. 배워서 좋을 것이 없다고 여기는 두 가지를 군대에서 내내 길들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만, 두 가지 가운데 막말질을 오늘 처음으로 써 보네. 막말전화를 한칼에 끊어냈으니 개운하지만 그리 개운하지 않다. 군대란 어떤 곳인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도록, 더구나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제 목숨까지 버리면서 해내야 하는 데이다. 이러니 군대에서는 막말질하고 주먹질을 길들일 뿐 아니라 가르친다. 계급이 올라가면 계급 낮은 사람한테 아무렇지 않게 막말질에 주먹질을 하라고 시킨다. 이렇게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안 하는 내가 막말질에 주먹질로 피멍이 든다. 내가 나보다 계급이 낮은 이들한테 막말질이나 주먹질을 안 하면, 그 짓을 할 때까지 나를 두들겨패고 갖은 막말질을 퍼붓는다. 모르는 사람들은 군대가 평화를 지키는 노릇을 맡는다고 말하지만, 그런 분들한테 으레 한마디 여쭙는다. “소총 한 자루 쥐고 총알받이로 지내는 철책에 이등병으로 들어가서 몇 해를 살아 보시고도 ‘군대가 평화를 지킨다’는 말을 그대로 하실 수 있는지 궁금하군요. 군대란 곳이 갖은 막말질하고 주먹질로 사람을 종으로 부리는 데가 아닌가요?” 이렇게 물으면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모두 입을 다물더라. 이 나라에 군대가 버젓이 있거나 버틴다면, 이 나라에는 어떠한 평화도 민주도 평등도 뿌리내리거나 퍼질 수 없다고 온몸으로 사무치게 느낀다. 남·북녘 모두 애먼 젊은이를 군대에 밀어내는 참으로 불쌍한 나라. 남·북녘 모두 군대에서 쌈박질로 스스로 피멍이 들어 어디에서나 똑같이 쌈박질인 더없이 가엾은 나라. 이제 그만하자. 아까 사온 책을 읽자. 책으로 마음을 씻고, 막말질을 퍼붓느라 더러워진 내 입을 씻자. 2001.9.14.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