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지 않는다기보다 잊을 수 없는 일인데 굳이 떠올리지 않고 살던 일 가운데 1998년 어느 한 가지를 적어 본다. 그무렵 나는 한겨레신문을 돌리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으나, 주마다 두세 가지 ‘우리말 소식지’를 엮어서 내 돈으로 복사해서 돌리며 살았는데, 뜬금없달까 뜻밖에 어느 자리에 부름을 받아 두 시간 동안 강사 노릇을 했다. 그날 그 자리는 나로서는 첫 강의였다. 그런데 그 강의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이나 단체 우두머리 이백 사람이 모였고, 그때 편 온갖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님’이었다. 어느 분이 “우리 회사에서 회의를 하다 보면, 부하 직원들이 자유롭게 토론이나 발언을 하지 못하고, 그냥 ‘네네’ 하는 분위기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게 걱정되세요? 그러면 왜 걱정일까요? 제가 그 회사 대표라면, 서로 직함으로 부르지 않고 ‘아무개 님’이라 부르면서 말하자고 할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냥 말을 놓고서 서로 이름으로만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말을 놓지 않으면서 ‘님’으로 높이기로 할 수도 있어요. 서로 높이기로 하는 말씨로 이야기를 펴도록 한다면, 대표님이 계신 그 회사에 있는 누구라도 처음에는 낯설어 하겠으나, 회의를 하루이틀 하다 보면 어느새 자유로울 뿐 아니라 훌륭하고 아주 새롭게 생각을 뻗어서 멋지고 알찬 자리가 될 만하리라 봅니다.” 하고. 내가 나를 스스로 낮출 까닭이 없다. 서로서로 ‘님’이라 말하면서 서로 들려주는 말을 귀담아듣겠다는 마음이랑 몸짓으로 거듭나면 된다. 이러면 이야기도 술술 흐르고, 참으로 훌륭하고 멋지게 피어날 수 있다. 그나저나, 그때 내가 이런 말을 들려준 뒤 그 대표라는 분이나 다른 분들이 어떤 낯빛이었는가를 적고 싶다. 그야말로 아주 싸늘했다. 나를 그지없이 미친 놈으로 보는 느낌이더라. 서로서로 ‘님’으로 여기자는 말이, 그때에는 하나도 받아들여질 수 없었나 보더라. 2019.2.28.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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