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글쓰기
아는 것만으로는 아는 데에서 그치지 싶다. ‘아는’ 사람은 ‘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는 사람은 그저 ‘아는’ 사람일 뿐이다. ‘안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하는’ 사람도 있으나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알면서 하지 않는다면, 이이가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 이와 맞물려, ‘하는’ 사람이 있다. ‘알’지는 못하나 그냥 ‘하는’ 사람은, ‘하다’ 보니까 어느새 ‘알’기도 한다. 하면서 스스로 배우고, 차근차근 익혀 가는 동안 저절로 아는 셈인데, ‘한다’고 해서 다 ‘알’면서 하지 않을 뿐더러, 꾸준히 배우거나 익히더라도 ‘잘 하는’ 몸짓에서 그칠 뿐, ‘아는’ 길에는 접어들지 못할 수 있다. 누구나 ‘알’ 수 있고, ‘알’려고 ‘배우’는 길을 걸을 만하다. 그런데 알기만 한다면, 배우기만 한다면, 익히기만 한다면, 이때에 우리는 무엇이 될까? 아는 채로 끝나고 배우는 채로 끝나며 익히는 채로 끝날 테지. 그래서 앎과 배움과 익힘을 함으로 녹이는 길도 늘 함께 걸을 노릇이지 싶다. 옛말에 “낫 놓고 기역 글씨 모른다”고 하는데, 이는 앎 하나만 다룬다. 낫을 놓고 기역이란 글씨를 읽을 줄 ‘알’면 무엇이 달라질까? 낫이 있으면, 이 낫으로 풀이나 나락을 베는 ‘함’을 스스로 누리도록 움직여야 비로소 앎은 앎대로 살아나지 않을까? 그리고 낫을 쥐어 풀이나 나락은 벨 줄 알되, 낫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 이때에는 늘 무엇을 하기는 하되, 어떤 길을 가는가를 바라보기 어렵겠지. 배워서 알든, 들어서 알든, 읽어서 알든, 익히면서 알든, 안 다음에 할 일이나 갈 길이란, 스스로 즐겁게 꽃을 피울 삶을 짓는 몸으로 무엇이든 ‘하는’ 하루이지 싶다. 무엇이든 ‘하면’ 된다. 밥을 하든, 빨래를 하든, 소꿉놀이를 하든, 이야기를 하든, 글쓰기나 책읽기를 하든, 돈을 버는 일을 하든, 나들이를 하든, 참말로 ‘하면’ 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