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씁니다 ― 14. 동시
저나 곁님은 이 나라를 믿지 않습니다. 정부도 학교도 안 믿습니다. 정부나 학교라는 데가 여태 무엇을 했고, 오늘 무엇을 하는지 아리송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2018.12.1.) 전남교육감을 고흥에서 만나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 어찌할까 하고 망설이다가 찾아가기로 합니다. 저 혼자서 찾아갈 수 없는 외진 바닷가 볕바라기집에서 모임이 있다고 했는데, 자동차로 태워 주시는 분이 있어서 함께 갔습니다. 처음에 10분 남짓 전남교육감이 들려주는 지난 넉 달 했던 일을 풀어내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런 일은 여태 누구나 했으니까요. 나흘 동안 몸살을 앓다가 오늘 비로소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데, 이 아름다운 낮나절이 이렇게 아깝게 흐르는가 싶더군요.
이러다가 생각을 바꾸기로 합니다. 새로 일하겠다는 새 전남교육감이 아직 엉성한 걸음걸이라면, 부디 앞으로 어떤 걸음걸이를 바라는가를 동시로 써서 건네자고 말이지요. 어제 쓴 동시를 옮겨적어서 건넬까 하다가, 불현듯 큰아이 궁금덩어리가 떠올랐습니다. 큰아이가 무척 궁금하다고 여기는 ‘사랑·별·노래’가 무엇인지를 단출하게 풀어내고, 이를 아울러서 이야기를 짓자고 생각했습니다. 전남교육감 입에서 자꾸 “학교 밖”하고 “학업 중단” 같은 말이 튀어나와서 꾹 참고서 동시를 마무리지은 뒤 손을 들어 한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교육감님, 오늘 따가운 말은 안 하고 싶었습니다만 한 마디는 해야겠습니다. 아이들은 집도 마을도 학교입니다. 졸업장을 주는 시설만 학교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학교를 다닙니다. 그런데 자꾸 ‘학교 밖, 학교 밖’이라면서 어린이하고 청소년을 가르려 하면, 이 말이 얼마나 언어폭력인지 아십니까? 졸업장을 바라지 않을 뿐인 아이들이 어디에서나 배우는 삶을 생각하지 않으니 언어폭력입니다. 긴 말씀을 여쭈기 어려워서 따로 글을 써 왔으니 조용한 자리에서 이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는 ‘학교 밖 청소년’이 아니라 새 이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감님이 ‘학교 밖 청소년’한테 무엇을 지원한다거나 또 무슨 교육지원 같은 사업을 말씀하시는데요, 저희는 두 아이, 열한 살 여덟 살 두 아이를 집에서 배우도록 하면서 아무 시설도 안 보냈는데, 이렇게 하면 여덟 살까지는 10만 원을 주더군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닌다고 하면 ‘머릿수마다 50만 원씩 유치원에 준다’고 하대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집에서 배우는 아이하고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받을 교육비가 10만 원하고 50만 원으로 갈릴까요? 요새 한창 불거지는 유치원 비리는 바로 이런 데서 비롯하지 않았을까요? 처음부터 모든 아이 어버이한테 똑같이 50만 원을 주면, 어버이가 알아서 집에서 아이를 돌보든, 알맞은 유치원을 골라서 그 유치원에 치러야 할 돈을 내든, 그렇게 해야 유치원 비리가 사라지겠지요? ‘학교 밖 청소년’한테 무슨 교재이니 시설이용이니 지원한다면서 예산을 쓰시지 말고요, 직접 ‘학교 밖 어린이·청소년’ 은행계좌에 50만 원씩이라도 주는 길이 가장 좋다고 느낍니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피시방에서 게임만 하든, 책을 사서 읽든, 자전거를 사서 타든, 목돈으로 모아 여행을 다니든, 어린이와 청소년 스스로 결정권을 누려서 생각하고 쓰도록 하면 된다고 느낍니다. 이런 게 교육 아닐까요? 고맙습니다.”
이런 말을 마치고서 ‘동시’란 이름을 붙인, 이 자리에서 새로 쓴 동시를 전남교육감한테 건넸습니다. 이 동시도, 함께 건넨 책하고 글도 모쪼록 찬찬히 읽어 주시기를. ㅅㄴㄹ
동시
사랑이라면
즐겁고 밝게 속살이면서
곱게 돌볼 줄 아는
슬기로운 숨결이야
별이라면
해도 지구도 별이고
우리도 메뚜기도 별이고
마음에 씨앗으로 빛나며 별이야
노래라면
문득 터져나오는 기쁨이
웃음으로 눈물로 춤으로 꿈으로
피어나는 말이면서 가락이야
동시라면
사랑을 담은 글이지
별처럼 빛나는 글이지
노래가 되는 글이지
(숲노래/최종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