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


 저녁을 먹은 뒤 쉬하러 앞밭에 나갔습니다. 앞밭이라고 하지만 제가 사는 집 앞에 있는 밭이지 제가 가꾸는 밭은 아닙니다. 다른 분이 가꾸는 밭입니다. 저는 하루에 한 번쯤, 밭두렁이든 산기슭이든 논두렁이든 자리를 옮겨 가며 한 번씩 쉬를 합니다. 한 자리에서 자꾸자꾸 쉬를 보면 안 좋겠지만, 어쩌다가 한 번 누면 괜찮겠지요.

 부지런히 글을 쓰고 사진을 긁다가 등짝이 너무 아파서 불을 끄고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스캐너가 돌돌돌 굴러가는 소리, 잠깐 켜 놓은 노래테이프 소리. 드러누운 채 내다 보이는 초승달. 아, 그렇구나, 아까 쉬하러 나갈 때에도 초승달을 보았지. 내일부터 다시 추워진다는데, 이렇게 그믐으로 다가갈수록 날이 추워지는가? 이제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헌책방 나들이를 하러 서울에 갈 참인데, 꼭 시골집을 비울 때만 날이 추워지네. 그러면 시골집 물이 다시 얼어붙을 수 있는데, 참, 안 맞네.

 깊은 밤, 둘레에는 아무 불빛이 없고, 제가 깃들인 자그마한 집 작은 방 작은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이웃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만이 있습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초승달빛도 밝습니다. 참 밝아서 시골길이 훤히 보입니다. 별자리를 읽어내지는 못하지만 이런저런 별자리가 하늘에 새겨져 있는 듯합니다. 마침 저 멀리까지도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고요한 밤이군요. 거룩한 밤이군요.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밤이군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켭니다. 멈춘 스캐너에 필름을 다시 얹고 돌립니다. 열린 창문으로 밤바람이 솔솔 들어옵니다. 책으로만 가득한 이 조그마한 방에 꾸역꾸역 머물러 있을 책먼지도 열린 창문으로 빠져나갈까요. 싱그러운 바깥바람이 이 자그마한 방으로도 스며들까요. 어느덧 동지를 지났으니, 이제부터 하루하루 밤은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겠네요.

 동지만 지나면 겨울이 다 갔다고 생각합니다. 날 춥기는 그대로이거나 더 추워지기도 하지만, 밤이 짧아지니까요. 낮이 길어지니까요. 또다시 새해가 밝아오네요. 밤이 길어지고 낮이 짧아질수록 어서어서 한 해 갈무리를 해야겠다고 바지런을 떨게 되는데, 다시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질 때면, 다가오는 새해를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바뀝니다. 요사이 내린 눈은 이제 다 녹았습니다. (4339.12.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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