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 버려야 안다
써서 버려 보지 않을 적에는 값어치를 제대로 모를 수 있다. 처음부터 깨어난 넋인 숨결이라면, 써서 버리지 않았더라도 값어치를 제대로 알아서 슬기로이 다스린다. 그러나 처음부터 깨어나지 않은 넋이라면, 처음에는 깨어난 넋이었으나 차츰차츰 길들면서 빛을 읽어 흐리멍덩해진 넋이라면, 써서 버리고 나서야 시나브로 값어치를 느낀다. 하루를 마구 써서 잔뜩 흘려보내고 나면 하루가 얼마나 아름답고 값진가를 깨닫는다. 쌈짓돈을 생각없이 써서 몽땅 흘려보내고 나면 푼돈조차 얼마나 아름답고 값진가를 깨닫는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메마른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고 나면 나무 한 그루란 얼마나 아름답고 값진가를 깨닫는다. 그러나 써서 버리고 나서도 못 깨달을 수 없다. 앞으로도 뒤로도 꽉 막히고 말아, 도무지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몸이 된다면, 이때에는 어떤 삶을 겪어도 그만 마음을 꾹 닫은 채 일어날 줄 모르기 마련이다. 2018.7.3.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