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좀 생각합시다 49


 온걸음이


  1988년에 중학교 1학년이 되어 영어를 처음 배우는데, 그때 배운 새로운 말 가운데 하나가 ‘걸어다니는 사전’입니다. 영어에서는 새로운 낱말을 지을 적에 예전부터 쓰던 낱말을 더하기도 한다며 ‘a walking dictionary’를 가르쳐 주었어요. 한국말 아닌 영어를 처음 듣고 배우며 매우 낯선데, ‘걸어다니는 사전’이라는 영어 낱말도 참 낯설었습니다. 굳이 ‘사전’이란 말을 쓰지 않고도 ‘똑똑이’나 ‘슬기꾼·슬기쟁이’ 같은 말을 쓰면 되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는 사전을 지은 발자국이 꽤 깊어 ‘걸어다니는 사전’ 같은 낱말을 지어서 쓴 지 제법 오래이지 싶어요. 한국은 아직 사전 발자국이 짧기도 하지만, 사전이라고 하는 책을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나 마음이 얕다고 할 수 있을 테고요.


  다만 낱말이 좀 기니 살짝 줄여 ‘걷는사전’처럼 쓸 만합니다. 또는 ‘걷는책’ 같은 말을 지어 보아도 어울려요. 걸어다니는 사람을 ‘걷는이’라 해도 어울립니다. 굳이 ‘보행자’ 같은 한자말을 일본에서 끌어들여야 하지 않아요. 걷는 사람을 두고 ‘걷는님·걷는벗’ 같은 말을 새롭게 더 지을 수 있습니다. ‘걷는길’이나 ‘걷는마실’ 같은 말도 좋아요.


  ‘걷는사전·걷는책’을 놓고 더 헤아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잘 알거나 똑똑하거나 슬기로운 사람은 사전이나 책 같다고만 할 수는 없어요. 온삶이 알차기에 잘 알거나 똑똑하거나 슬기롭다고 할 만합니다. 그래서 온삶이나 온살림을 잘 알면서 이 길을 간다는 뜻으로 ‘온걸음·온걷다(온걷기)’를 생각해 보면, 이를 바탕으로 ‘온걸음이·온걸음벗·온걸음님’ 같은 낱말을 얻습니다.


  어떤 일을 맞닥뜨리더라도 찬찬히 풀거나 맺을 줄 알기에,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아름답거나 슬기로이 지낼 줄 알기에, 어느 때에 이르러도 참답고 착하게 살림을 지을 줄 알기에,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온걸음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고 싶습니다. ‘온똑똑이’나 ‘온슬기님’이라는 이름도 좋습니다. 2018.4.13.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