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온 여인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정란과 함께 고아로 어려운 삶을 살아왔던 성악 전공의 음대생 성표는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외딴 곳에 있는 푸른 저택을 찾아간다. 

그 집에서 새침한 영희와 묘한 분위기의 까칠한 오부인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입주 가정교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지만 복잡한 인간관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되는데...

 

'토지'로 한국 대표작가의 반열에 오른 박경리 작가의 작품 중 내가 읽은 작품은 '김약국의 딸들'밖에

없는 상태라 박경리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역시 대표작인 '토지'를 안 읽고는 감히 뭐라 얘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토지'는 쉽게 도전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이기에 항상 '언젠가'라며 미뤄둘 수밖에 없고

만만한(?) 다른 작품을 찾던 중 이 책과 인연이 닿게 되었다.

 

전에 읽었던 '김약국의 딸들'은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걸쳐 김약국 집안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역사드라마 느낌이 짙었다면 이 책은 전형적인 로맨스, 멜로드라마였다.

그것도 우리 드라마에서 늘 논란의 대상이 되는 막장드라마에 가까워 좀 예상밖이었다.

푸른 저택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 얼키고 설킨 구질구질한 인간관계의 포로들이라 할 수 있었는데

애정이 아닌 애증이 엮인 강사장과 오부인. 그 사이에서 강사장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영희까지

안 그래도 일그러진 애정관계가 판을 치는 그곳에 들어간 성표는

어느새 영희와 오부인사이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입장이 된다.

게다가 강사장과 오부인이 숨기고 있는 과거는 요즘 욕하면서 본다는 막장드라마들 못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애정의 대상이 영희에게서 오부인으로 서서히 넘겨갔던 성표는 강사장의 제수씨이자

자신이 가르치는 찬이의 엄마 나의화가 등장하자 다시 한 번 마음을 빼앗기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강사장과 오부인의 기이한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주인공격인 성표의 우유부단한 애정의 변화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60년대라는 답답한 시대적 배경과는 달리 자유분방함을 넘어선 막가는 애정사는 요즘과 못지 않았는데

결국 이들의 부적절한 관계들은 비극으로 치닫고 만다.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정말 파격적인 결말이라 할 수 있었는데

전반적인 분위기가 60년대의 느낌이 들지 않은 작품이었다.

사랑에 상처받고도 여전히 사랑을 갈구하는 불쌍한 영혼들의 몸부림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저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감정이라는 게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사랑이 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감정에 휩쓸려 삶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맡기는 느낌이 들었다.

암튼 여러 인물들의 복잡 미묘한 애정전선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건의 전개,

그리고 드러나는 과거와 충격적인 결말까지 좀 뜻밖이었지만

능수능란한 박경리 작가의 힘을 여실히 느끼게 해준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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