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배심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억울한 누명을 쓴 아버지가 언론의 마녀사냥으로 자살한 아픔을 가진 소설가 지망생 다카미 료이치는

자신이 존재하지도 않은 여자를 죽인 누명을 쓰고 경찰에 체포되면 나중에 결백을 밝혀줄테니

수사기관과 언론의 부적절한 태도를 고발하는 작품을 쓰자는 후자이 신의 '인공누명' 계획을

제안받고 이에 응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존재하지 않은 줄로 알았던 여자는

실존하던 여자여서 강간살인 및 사체유기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체포되고,

'인공누명' 계획은 흔적조차 사라져 진짜 누명을 쓸 위기에 몰리는데...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어떤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내며

작가와 독자가 치열한 논리대결을 즐기는 지적게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엉뚱한 남자가 누명을 쓰고 그가 누명을 벗게 되는 정반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의 말대로 '역본격'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누명 쓴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선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도 떠오르지만

이 책의 재미는 역시 '인공누명'이란 기빌한 발상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수사기관이나 언론의 마녀사냥식 작태를 고발한다는 취지가 있다고는 하나

스스로 있지도 않은 범죄를 조작해 범인으로 체포된다는 설정 자체가 상식을 초월한다고 할 수 있는데

더 기가 막힌 점은 있지도 않은 사람을 죽인 것으로 위장한다는 계획이다.

여기에는 첨단 과학기술이 동원되는데 아무리 허술한(?) 수사기관이라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살인사건이 성립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계획은 현실이 되고 다카미 료이치는

곧 체포되어 계획대로 진행되는가 싶었지만 피해자가 실존했던 여성이란 사실에 경악하게 되는데...

 

사건의 발단이 되는 '인공누명' 계획도 흥미롭지만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배심재판과정은 법정추리물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책이 나올 당시엔 일본에서도 배심재판이 시행되지 않고 있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배심제도에 대해 상당히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DNA로

빼도 박도 못할 입장이 된 다카미 료이치를 구원해준 사람은 그의 변호사 모리에였다.

너무나도 명백해 보이는 사건이라 그를 누명에서 벗겨내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는데

그를 유죄로 만드는 증거들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집요한 공격으로

검찰측의 공격을 조금씩 무력화시키고 다카미 료이치에게 차츰 희망을 주지만

'인공누명'을 계획한 거대한 음모는 단순히 다카미 료이치를 노린 게 아니었다.

나중에 드러난 비열한 음모는 추악하기 짝이 없었는데

픽션임에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상상은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형사사건에 대해 국민참여재판이 시행되고 있고,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에서

배심제도를 종종 접하기 때문에 결코 낯설지는 않지만

그 제도의 가치가 이렇게 심오한지는 이 책을 통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전문 직업법관이 아닌 일반 국민에 의한 사법적 판단이

결국 주권자가 국민임을 확인시켜주는 제도라는 생각은 그리 하지 않았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에겐 정말 눈엣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배심제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혈액형이 변할 수 있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되었고, DNA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수사 경향이

조작가능성을 생각하면 정말 위험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만큼 과학수사의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려준 책이었다.

전체적으로 창의적이고 세련된 미스터리라는 느낌을 주었는데,

누명을 쓴 다카미 료이치가 억울하게 중형을 선고받을 위기에서 벗어나는

긴박한 과정이 정말 스릴 넘치게 그려진 작품이었다.

그리고 배심제도의 운영과 가치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어주는 의미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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