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전학생인 에이드리언 핀은 빛나는 총명함으로 토니, 콜린, 앨릭스 삼총사와 가까워진다.

자 다른 대학을 진학하고서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친분을 이어가던 그들.

토니는 자신의 여자친구였던 베로니카와 사귀게 되었다는 에이드리언의 편지를 받고

그들을 축복하는(?) 편지를 보낸 걸로 기억하고 그들을 잊고 지냈는데

느닷없이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40여 년 지나 토니는 베로니카 어머니가 남긴 유산과 함께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 자신에게 유품으로 남겨진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느냐는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 소개되었던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실험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동안 믿을 수 없는 뇌와 기억에 대한 책들인 '뇌의 거짓말', '뇌, 생각의 한계' 등을 통해

남의 기억은 물론 자신의 기억도 무조건 신뢰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이 책의 주인공 토니의 기억도 믿을 수 없는 기억의 전형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어서 무슨 일이든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기억마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과장되게 기억하고 불리한 것은 저장하지 않던가 왜곡시켜 저장하는 경우가 많다.

'각자의 기억은 그의 사적인 문학'이라는 올더스 헉슬리의 말이 기억의 본질을 잘 대변해주는데

화려한 무용담을 늘어놓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지만

이 책에선 토니가 에이드리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었다.

예전 일을 가지고 서로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고, 완전히 다른, 양립할 수 없는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기억을 뒷받침하는 다른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순전히 기억에 의존하는

진술만 있다면 과거의 일을 어떻게 판단하는 게 맞는지 정말 고민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후회할 일들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친구인 베로니카가

자신과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친구인 에이드리언과 사귀자 질투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악담을 쏟아낸 토니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결국 비극을 초래하게 된 책임에선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딱 그 순간만 참으면 될 것을 우리는 늘 어리석게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게 실수를 하는데

책 속의 토니가 그런 안타까운 경우의 전형이었다.

 

기억에 관한 얘기 외에도 이 책에선 역사에 관한 흥미로운 정의가 많이 등장한다.

역사를 승자의 거짓말이라고도 하고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도 하는데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평가가 가장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흔히 승자들의 기록을 역사로 생각하기 쉽지만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승자나 패자가 아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이란 점에서 마지막의 정의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한편 에이드리언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란

정의도 나름 설득력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역사가인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정의한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와도

어느 정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 정의가 아닌가 싶었다. 현존하는 자료와 기억을 바탕으로

최대한 재구성한 게 바로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2011년 영연방 최고의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품답게

많은 의미와 생각할 거리를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단순히 개연성 있는 흥미로운 얘기를 읽는 즐거움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기억과 인류의 역사를 심판대 위에 올려 놓은 작가 줄리언 반스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는데 소설의 매력이 뭔지를 제대로 아는 작가라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을 통해 받은 줄리언 반스에 대한 나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른 작품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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