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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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기억'을 읽은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신간인 이 책을 또 만나게 되었다.

늘 기발한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이지만 이번에는 형식적인 면에서

희곡인 작품을 선보여 새로웠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희곡이어서 읽을 때마다 남다른 느낌을 받곤

했는데 이 책도 프랑스에선 이미 무대에 올려졌던 작품으로 소설과는 색다른 느낌을 맛보게 해준다.


등장인물은 달랑 네 명인데 제목 그대로 천국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는 피고인 아나톨 피숑과 그의

변호사인 카롤린, 검사인 베르트랑, 재판장인 가브리엘이 전부였다. 폐암 수술 중에 사망한 아나톨

피숑은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있다가 천국의 법정에 와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란다.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이미 심판을 받은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책에선 천국에서 다시 환생할 것인지 여부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이는 불교의 윤회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얼마 전 읽었던 '기억'에서

처럼 인간이 윤회를 거듭하는 걸 전제로 얘기가 진행된다. 삶을 충실히 제대로 산 경우에는 더 이상

환생하지 않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만 벌(?)로 환생하게 되는데 심판을 받는 아나톨 피숑은 아이러니

하게도 살아 있을 때 판사였다. 판사 정도 했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열심히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한 거나 진짜 하고 싶던 배우로서의 삶을 살지 않았다는 점 등으로

아나톨 피숑은 불리한 심판을 받을 위기에 처하는데...


천국의 법정에서는 삶 전체를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증거가 없다고 우길 수도

없다. 자기의 재능을 제대로 살리지 않았다거나 운명적인 사랑과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잘못

살았다는 심판을 받게 된다면 제대로 살았다는 심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지 

의문인데 그 정도로 천국의 법정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수준을 충족시키려면 정말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제대로 알고 이를 충실히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판사 출신인 아나톨 피숑은 당연히

이러한 기준에 문제제기를 하며 자신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사유를 주장하지만 자신의

희망대로 되지 않는다. 이후의 얘기가 더 흥미로운데 다시 태어나는 경우에도 어디서 어떤 환경 속에

어떤 사람으로 태어날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설정을 한다. 다만 좋은 조건에 태어나는 것보다 나쁜

조건에서 태어나는 게 나중에 죽고 나서 심판을 받을 때 더 가점 요인이라고 한다. 다시 태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좋은 조건에서 태어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데 유유부단한 아나톨 피숑이 계속

선택을 바꾸면서 짜증이 나게 하자 결국은 엉뚱한(?) 결말을 맞고 만다. 천국의 법정이 이 책에서 그린

것 같은 모습이라면 죽음이나 심판이 전혀 두렵지 않을 것 같은데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죽고 나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심판(?)할 수 있다면 과연

좋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있을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스스로에게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역시 베르나르 베르베르다운 흥미로운 얘기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작품이었는데 언젠가 무대에서도 이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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