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기억의 예술관 - 도시의 풍경에 스며든 10가지 기념조형물
백종옥 지음 / 반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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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독일 여행을 갔을 때 본의 아니게 쾰른에 오래 머무면서 나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여행 계획을 짤 때 베를린도 넣고 싶었지만 교통편이 좀 불편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는데

독일의 수도이자 분단과 통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베를린을 안 가보고 독일을 제대로 안다고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 책은 베를린에 소재하는 10곳의 기념조형물을 소개하면서 그곳에 담겨져 있는

의미와 함께 역사를 어떻게 공공미술로 승화시켜 국민들이 잊지 않도록 만드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기념조형물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에 설치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예술적으로 형상화되었을 때 훨씬 설득력이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그것은 이른바

'장소 특정적 미술'로서의 기념조형물이라고 말하면서 베를린이 바로 장소의 맥락과 의미에 적합하게

설치된 기념조형물들의 좋은 사례들을 만날 수 있는 도시라고 얘기한다. 일상적인 풍경과 단절되지

않도록 제작, 설치된 방식을 저자는 '도시의 피부에 스며드는 방식'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런 형식이야말로

기념조형물이라는 '예술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적절하고, 도시의 피부 깊숙이 침투하지 못하고 겉도는 기념조형물은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과 무관한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베를린 시내에 산재한 10곳의 기념조형물들을 자세히 소개하는데, 전쟁의 비극을 묵상하는

신위병소인 노이에바헤, 분서의 흔적으로 베벨 광장의 지하의 텅 빈 도서관, 홀로코스트를 추모하는

코라베를리너 거리,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죽음으로 가는 역이었던 그루네발트역의 17번 선로,

베를린 시내 곳곳에 있는 나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석을 만든 슈톨퍼슈타이네 프로젝트, 

탐 크루즈 주연의 영화 '작전명 발키리'로도 유명한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슈타우펜베르크 거리, 유대인 강제이송을 담당했던 아이히만의 반인륜적 범죄를 상기시키는

실슈트라세 정류장, 냉전으로 인한 분단의 상징이었넌 체크포인트 찰리와 추모공원이 된 베를린

장벽 지역, 유명 관광지로 변모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까지 베를린 시내에 있는 독일 현대사의

적나라한 사건들을 기념하는 조형물들의 의미와 가치를 잘 보여주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잘못을 잊지 않으려는 독일의 역사의식이 잘 드러났는데 이웃에 있는

나라와는 참 다른 성숙한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천편일률적으로 우뚝 솟은 

탑을 기념물로 만들곤 하는데 이런 기념물들에 과연 제대로 된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저자의 말대로 기념조형물에는 도시의 역사가 녹아 있어야 하고, 그 역사에 대한 기억이

설명적인 수준을 넘어 특유의 예술적 감성과 형식으로 승화되어 있어야 함에도 우리나라의 기념

조형물들에는 제대로 된 철학과 역사의식, 미적 감각이 부족해보이는 건 애초에 기념조형물을 만드는

단계에서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 사실 체크포인트 찰리부터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까지 마지막에 등장하는 삼총사는 나름 유명 관광지라 베를린 갈 기회가 있으면 들를 수도

있겠지만 나머지 장소들은 일부러 마음 먹지 않으면 가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베를린

시민들의 일상 속에 역사적인 기념조형물들이 함께 존재하면서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과거는 반복된다'는 조지 산타야나의 말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는데 우리도 기념조형물들을 만들 때 이 책에서 소개된 베를린의 사례들을 참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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