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 책읽기

 


  도서관은 어디나 무척 조용합니다. 아니, 조용하게 지내도록 하는 데가 도서관이라고 느낍니다. 흔히들, 책이 있는 터는 조용해야 한다고 여기고, 책을 읽는 사람은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아무래도, 다른 시끄러운 소리가 없어야 책 하나에 깊이 마음을 쏟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나는 이제껏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 본 적 없습니다. 도서관에서 일한 적 있고, 도서관에 나들이를 한 적 있으나, 도서관에 갈 적마다 ‘일부러 만든 조용함’ 때문에 외려 몸이 움츠러들고, ‘만들어진 조용함’이 감도는 데에서는 졸음이 쏟아지곤 했습니다.


  책을 읽으려 한다면 자동차 시끄러이 오가는 길가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만나기로 한 누군가를 기다리며 복닥복닥 어수선한 찻집 앞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철이나 버스나 기차를 타고 움직이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당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조용해야 책을 읽기에 알맞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억지로 조용한 터를 만든대서 책을 잘 읽을 만하리라 느끼지 않아요. 책을 읽을 만한 데는 ‘사람이 살아가는 터’라고 느껴요. 곧, 사람이 사람다운 꿈을 키우거나 사랑을 북돋울 수 있는 데가 비로소 책을 손에 쥐어 즐겁게 삶을 누릴 만하다고 느껴요.


  아이들과 숲마실을 합니다. 작은아이는 곯아떨어집니다. 작은아이 곁에 앉아 시집 한 권 읽습니다. 시집을 다 읽고는 나도 작은아이 곁에 눕습니다. 큰아이는 숲속 이곳저곳 어머니와 함께 돌아다닙니다. 이제 작은아이 일어나고 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모두들 숲길을 걸어 천천히 집으로 갑니다. 문득 멧자락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가을숲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을숲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습니다. 가을숲에서 베푸는 빛깔을 봅니다.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좀 다르게 느낍니다. 사람은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살아간다고 느낍니다. 죽으면 숲으로 돌아가는가? 스스로 죽음을 생각한다면 죽음을 맞이하면서 숲으로 돌아간달 수 있겠지만, 숲에서 태어난 사람은 숲으로 돌아간다고 느끼지 않아요. 사람은 스스로 숲이고, 숲은 곧 사람입니다. 새로 태어난 사람은 새로운 숲결 하나요, 새로운 숲결이 목숨을 다해 스러진다면, 가만히 몸뚱이가 녹아들면서 다른 새 숲결로 거듭나겠지요. 나무 한 그루 이천 해를 살며 스스로 숲이 되었듯, 스스로 숲이 되던 나무가 스러지며 스르르 숲결로 녹아들듯, 사람 또한 숲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며 언제나 숲넋을 건사하는구나 싶어요.


  숲을 읽으며 삶을 읽고, 숲에서 삶을 읽으며 책을 빚습니다.


  숲속에 깃들어 ‘나무로 빚은 종이책’을 펼쳐 읽습니다. 숲속에서 ‘나무책(나무가 종이로 다시 태어났기에)’을 헤아리며 내 숨결을 돌아봅니다. 내 둘레에서 온갖 벌레가 꼬물락거립니다. 내 곁에서 온갖 새가 지저귑니다. 내 언저리에서 아이들이 뒹굴며 놉니다. 나를 둘러싼 풀과 흙과 나무와 돌이 가을볕을 듬뿍 받으면서 싱그럽고 푸른 숨결이 되어 내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숲속에 깃들어 책을 읽는 동안 내 가슴속에서 자라는 숲넋 한 자락 곱다시 돌봅니다. (4345.10.2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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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책》 4호와 《사진빛 1》 나왔습니다. 어제(10.23)부터 봉투에 주소와 이름을 적어 우체국으로 가져가서 부칩니다. 집안일을 하면서 봉투에 주소와 이름을 적고 책을 싸서 부쳐야 하기에, 여러 날 걸쳐 천천히 부칩니다. 누군가는 오늘이나 모레에 책이 닿을 테고, 누군가는 금요일쯤 책이 닿을 테지요. 때때로 한 주 건너 다음주 월요일에 책이 닿을 수 있어요.


  《삶책》 4호는 ‘전남 고흥 사진책도서관 함께살기’ 소식지입니다. 《사진빛 1》은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두 아이가 개구지게 부대끼며 뛰어노는 여섯 달 삶자락을 무지개사진으로 담으면서 이야기 한 자락 펼치는 사진책입니다.


  《삶책》 4호와 《사진빛 1》은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 함께살기’가 튼튼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돈을 보내 주시는 분한테만 띄웁니다. 이 책들을 받고 싶으신 분은 언제라도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 지킴이’가 되어 주셔요.

 

 

 

● 《삶말》, 《함께살기》 한 해 받기 (☞ 도서관 한 평 지킴이)
   : 해마다 10만 원씩 (또는) 달마다 1만 원씩
  (두 평 지킴이는 20만 원 또는 2만 원씩, 세 평 지킴이는 30만 원 또는 3만 원씩)
   《삶말》, 《함께살기》 평생 받기 (☞ 도서관 평생 지킴이)
   : 200만 원 한 번 (또는) 사진책 100권 기증


● 돕는 돈은 어디로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손전화 : 011-341-7125
   누리편지 : hbooklove@naver.com
★ 도서관 자리로 쓰는 ‘옛 흥양초등학교’를 통째로 장만할 꿈을 키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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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밟기

 


  양말 안 신은 맨발 고무신차림으로 걷습니다. 누군가는 고무신 꿰고 멧길 오르내리면 미끄럽지 않느냐 묻는데, 미끄럽자면 무얼 신어도 미끄럽고 맨발이어도 미끄럽습니다. 누군가는 발바닥 안 아프느냐 묻는데, 발바닥 아프자면 맨발이건 고무신이건 두툼하거나 폭신한 신이건 다 아픕니다.


  맨발에 고무신으로 흙을 밟으면 발가락마다 흙 밟는 느낌을 물씬 받아들입니다. 풀을 밟으면 풀을 밟았구나 느끼고, 꽃송이 밟으면 꽃송이 밟는구나 느낍니다. 손가락으로 풀잎이나 나무줄기 쓰다듬을 때에 손가락이 풀잎이나 나무줄기를 느끼듯, 맨발에 고무신은 흙을 살가이 느끼고픈 마음입니다.


  길바닥이 시멘트바닥이나 아스팔트바닥이 아니라면 얼마나 즐거울까 꿈꿉니다. 길바닥이 흙바닥이라면 어른도 아이도 모조리 맨발로 다닐 텐데 싶습니다. 흙바닥인 길바닥이라면 누구라도 섣불리 병조각이나 못조각 떨어뜨리지 않을 테지요. 내가 다니는 길은 네가 다니는 길이요, 네가 다니는 길은 내가 다니는 길이니, 흙바닥을 맨 발바닥으로 다닐 수 있도록 서로 아끼고 보듬고 지키고 살피겠지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는 거의 맨발로 흙일을 합니다. 흙을 밟고 흙을 만지며 흙을 돌볼 적에는 으레 맨손이요 맨발입니다. 어버이인 내가 아이를 씻기고 쓰다듬을 적에는 으레 맨손이요 맨발입니다. 내 손길이 아이들 살결에 닿습니다.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 손길이 흙알갱이에 닿습니다.


  자꾸만 도시가 커지면서 자꾸만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바닥이 늘어납니다. 자꾸만 구두며 차린옷이며 늘어납니다. 자꾸만 자가용 늘고 승강기나 손전화 기계 늘어납니다. 흙을 밀어내고 지은 도시에는 시멘트만 어울린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흙과 어깨동무하는 도시일 때에 한결 아름답고 싱그럽구나 싶습니다. 숲을 짓이긴 채 세운 도시에는 아스팔트만 걸맞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흙과 사랑 나누는 도시일 때에 비로소 곱고 맑구나 싶습니다. (4345.10.2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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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신문 책읽기 2 (고흥 나로호 어민 피해)

 


  2012년 10월 26일에 전남 고흥 봉래면 나로도에 있는 우주기지에서 우주선을 쏜다고 한다. 신문이나 방송마다 그날 우주선을 제대로 쏠 수 있는지를 다룬다. 그러나 나는 처음 고흥에 들어와 살려고 할 적부터 우주기지에는 눈길을 안 두었다. 아니, 눈길을 안 두지 않았다. 고흥에서 살아가려 한다면, 우주기지하고는 적어도 20킬로미터쯤은 떨어진 데에 살아야 한다고 여겼다. 더없이 마땅하지만, 우주선을 쏘려고 하면 방사능이라든지 먼지라든지 매연이 얼마나 많이 생길까. 우주기지를 전남 고흥과 같은 외진 시골에 짓는 까닭이 있고, 전남 고흥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있는 봉래면 나로도 맨 끝자락에 세운 까닭이 있다. 그만큼 우주기지는 ‘사람이 살아가는 터’에 나쁘기 때문이다. 우주기지를 일찍부터 세운 나라들은 우주기지를 으레 사막에 세운다. 그만큼 환경피해가 크니까. 그런데, 한국은 우주기지를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둘러싸인 봉래면 나로도에다 세웠다. 이렇게 되면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은 어떻게 될까. 이 국립공원 바다에서 마을 고기잡이(어부)들이 낚아올릴 물고기는 어떠할까. 국립공원으로 둘러싸인 갯벌에서 얻을 갯것은 얼마나 싱싱하거나 푸르다 할 만할까.


  중앙 언론매체뿐 아니라 전라도 언론매체에서는 ‘우주선을 잘 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야기만 다룬다. 어느 언론매체도 ‘우주선을 쏠 때에 일어나는 환경피해’를 다루지 않는다. 더군다나, ‘우주선을 쏘며 고흥 나로도 어민이 입는 피해’는 밝히지 않는다. 나로도 어민은 ‘우주선을 쏘면 여러 날 진동 피해’가 있어, 물고기가 모조리 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진동 피해도 있지만, 우주선을 쏘기 앞서 ‘어업 통제’를 하느라 일을 못한단다(아직 바닷사람들은 ‘진동 피해’만 따질 뿐, 다른 피해는 따지지 않는다). 나라에서는 고기잡이배 한 척마다 하루 30만 원 보상을 해 주겠다 하고, 바닷사람은 고기잡이배 한 척마다 하루 100만 원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밝힌단다는데, 정부 보상규정은 2011년에야 겨우 마련했단다. 고흥군청이든 교육과학기술부이든 누구이든 모두 ‘잔치판’을 벌이려 하지만, 고흥 바닷사람은 나로도 둘레에서 ‘해상시위’를 벌인다.


  시골마을 인터넷신문을 읽는다. 시골신문 가운데서도 시골마을 인터넷신문에서만 ‘고흥 나로호 어민 피해’ 이야기를 다룬다. 아무래도 시골마을 이야기는 시골신문이 아니고서야 안 다루겠지. 서울 이야기는 서울신문이 아니고서야 안 다루겠지. 도시 이야기라든지 정치 이야기 또한 도시신문이 아니고서야 안 다루겠지. 그러나, 가을철 시골마을 사람들 일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시골신문에서조차 다루지 않는다.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 낳고 돌보며 살아가는 이야기 또한 도시신문이든 시골신문이든 다루는 일이 없다. 시골하고는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펴내는 신문은 ‘새로 나오는 책’을 어떤 눈썰미로 바라보면서 다룰까.


  밤바람이 스산하게 분다. 초승달은 차츰 반달로 바뀐다. 별을 노래하던 시인을 우러르지 않을 지식인도 비평가도 기자도 없을 테지만, 정작 지식인이나 비평가나 기자는 스스로 별을 노래하지 않는다. 전남 고흥은 밤별이 아름다운 시골이다. 다만, 고흥 읍내나 면내에서는 밤별을 보지 못한다. 시골 군에서도 읍내나 면내를 벗어나야 비로소 밤별을 누린다. (4345.10.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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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살 먹는 나무가 죽는 삶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고 이야기한다. 참말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 그런데, 사람도 누구나 아주 오래 살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 스스로 ‘백 살을 채 못 산다’고 생각하면서, 또 이러한 생각을 퍼뜨리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제 목숨을 백 살 언저리에서 마감하지 않았으랴 싶다. 그러니까,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고 여기기에, 나무도 스스로 이처럼 생각하고, 나무는 이러한 삶 그대로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셈이라고 느낀다. 다른 목숨들도 이와 같겠지. 사람들 스스로 밝은 생각 아닌 어리석은 생각을 품으면서 지구별 목숨들 삶과 죽음이 엇갈렸으리라 느낀다. 가만히 살피면, 사람들 때문에 숱한 목숨이 아예 똑 끊어지듯 지구별에서 사라진다. 하나하나 따지면, 사람들 때문에 어느 목숨은 갑작스레 끔찍하게 늘어난다.


  사람은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사람은 언제부터 스스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언제부터 걷기만 할 뿐, 하늘을 날지 못하고 물위를 걷지 못할까. 사람은 왜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꿈이 있는 한편, 사랑과 믿음이 있을까.


  요 며칠 나무를 깊디깊이 헤아려 본다. 호젓한 시골마을에서만 지내다가 퍽 먼길을 달려 도시 고등학교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찾아가다가, 나무 한 그루 싱그럽게 자라기 힘든 그 도시에서 이틀을 보내니, 내 몸과 마음이 그리 홀가분하지 못해 자꾸 나무를 헤아려 본다. 이동안 ‘이천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 삶을 떠올린다. 때로는 천오백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을 테고, 어느 때에는 삼천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을 테지.


  나무들은 더 오래 살아갈 수 있을까. 나무들은 그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 할까. 나무들 스스로 그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에, 이녁이 그동안 뿌린 씨앗이 무럭무럭 자란 어린나무가 힘차게 솟아오를 자리를 내어줄 수 있을까.


  유럽 나라는 모르겠지만, 중남미와 북미와 아시아와 호주와 아프리카에는, 또 아시아에서도 중국이나 일본까지, 천 살이나 이천 살을 먹고는 어느 날 문득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으리라 느낀다. 그렇지만, 남녘이나 북녘에는 천 살을 먹은 나무조차 마주하기 힘들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남녘이나 북녘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천 살이나 이천 살을 살아오며 스스로 북돋우고 살찌운 슬기를 둘레에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삶을 마감하고 새 삶으로 나아가는 나무를 만날 수 없다는 소리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슬기를 빛내는 나무를 꾸준히 마주하면서 사람들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지만, 남녘과 북녘은 스스로 슬기를 키우지 못하고, 스스로 슬기를 밝히지 못하며, 스스로 슬기를 누리지 못하는 나날이라고 느낀다.


  이천 살 먹은 나무가 죽는 삶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밝히지 못하곤 한다. 고작 도시에서 톱니바퀴 같은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될 뿐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월급봉투를 은행계좌로 받아서 ‘소비 쳇바퀴’를 돌 뿐이다. 이러는 동안 아이들한테도 똑같은 ‘대학입시 쳇바퀴’를 물려줄 뿐, 저마다 삶을 밝히는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 왜 남북녘 두멧자락까지 폭탄과 미사일을 뿌려대며 잿더미로 만들었을까. 미국은 한국전쟁 때 왜 이 나라 골골샅샅 민둥산이 되도록 모든 숲과 마을을 깡그리 망가뜨렸을까.


  사람들은 ‘수목원’에 가면 마음이 탁 트이고 머리가 환히 열리다가는 생각이 곱게 빛난다고까지 말한다. 과학자 아닌 누구나 이처럼 말한다. 그러면, 수목원이란 무엇인가. ‘숲’이 수목원이다. 숲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다. 농약을 치는 숲이 아닌, 숲결 그대로 흐르는 숲이다. 벌레가 살고 새가 노래하며 짐승들 보금자리가 있는 숲이 바로 ‘수목원’이다.


  나무가 나무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사람들한테 마음과 머리와 생각을 열어 준다면, 가끔 자가용 몰고 찾아가는 수목원 아닌 집 둘레에서 언제나 누리는 숲이 있어야 마땅하다. 고속도로를 내거나 고속철도를 낸다며 멧자락에 구멍을 내거나 아스팔트길을 함부로 늘려서는 안 된다. 고속도로는 더 없어도 된다. 새로운 찻길은 더 없어도 된다. 숲이 있어야 하고, 나무와 풀이 자라야 한다. 발전소를 더 지어서 전기를 늘려야 한다지만, 발전소는 더 없어도 된다. 나무가 설 땅이 있어야 한다. 전자파 일으키는 송전탑이 멧줄기 따라 길게 이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송전탑이 들판 한복판에 우뚝 서서는 안 된다. 송전탑을 세우지 말고, 천 살 이천 살 먹는 나무가 자라도록 해야 한다. 자가용을 몰지 말고 두 다리로 숲길을 걸어야 한다. 버스도 전철도 타지 말고 자전거를 몰며 숲 사이를 달려야 한다.


  미군기지가 떠난 넓은 터에 무슨무슨 시멘트건물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그저 풀과 나무가 스스럼없이 자랄 숲을 일구어야 한다. 우리 삶터 곳곳에 빈터를 마련하고, 빈터가 바야흐로 숲이 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마을 어디나 ‘수목원’처럼 ‘숲’이 되어야 한다. 집집마다 나무를 보살펴야 한다. 어느 집이나 나무그늘을 누려야 한다. 학교도 관공서도 회사도, 무슨무슨 예술쟁이 작품을 건물 앞에 세울 일이 아니라, 씨앗 한 알에서 비롯하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몇 천만 원이나 몇 억 원 한다는 소나무를 나무젓가락처럼 박지 말고, 나무다운 나무로 조그맣게 숲을 일구어야 한다.


  사람은 숲사람이다. 새는 숲새이고, 벌레는 숲벌레이다. 짐승은 숲짐승이다. 모든 목숨은 숲에서 비롯하기에 숲목숨이다.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려는 이들은 도끼로 나무를 찍기 앞서 나무한테 절을 한다지. ‘집지을 재료’ 아닌 ‘맑은 넋 깃든 숨결’을 얻기 때문에 나무한테 절을 한다지. 집을 지으려고 삼백 살이나 오백 살 먹은 나무를 벨 적에 누구라도 절을 했다면, 천 살이나 이천 살 먹은 나무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며 쓰러질 적에는 어떤 기운과 넋과 사랑과 숨결이 흘러나와서 우리한테 드리울까. 오늘 내가 씨앗 한 알 심으면 이천 해 뒤를 살아갈 내 뒷사람은 이 나무가 드리울 사랑과 꿈을 누릴 수 있을까. (4345.10.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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