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와 책읽기

 


  아이 어머니는 여러 날 바깥마실을 나갔다. ‘람타’ 공부를 하려고 바깥마실을 나선 지 나흘 밤이 지났다. 닷새째 되는 오늘 두 아이와 복닥거리는 하루를 돌아보면, 아이들과 지내는 나날이란 밥하고 빨래하며 씻기고 쓸고닦는 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새삼스레 느낀다. 내가 먼저 어버이인 나 스스로를 사랑할 노릇이요, 어버이인 나 스스로를 나부터 사랑할 적에 아이들은 스스로를 믿고 즐겁게 뛰놀 수 있다.


  밥만 차려 줄 수는 없기에 고구마를 잔뜩 삶아 준다. 고구마를 먹으면 밥을 안 먹지만, 고구마를 배불리 먹으면 끼니를 넉넉히 잇는 셈이라 생각해 본다. 작은아이는 껍질을 아버지가 먹고 알맹이만 작게 잘라서 하나씩 입에 넣어 준다. 큰아이는 앞뒤 꽁댕이만 잘라서 건네면 껍질째 맛나게 먹는다. 그런데, 큰아이는 그림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고구마를 먹는다. 책도 읽고 고구마도 먹고, 그렇구나, 재미나게 읽고 놀며 하루를 지내자. (4345.1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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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빛, 책은 밝은 데에서 읽자

 


  내 눈은 나쁘지 않았다.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내 눈은 1.5였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고부터 학교에서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을 시키는데다가 운동장에서 뛰놀 겨를이 몽땅 사라지고 보니, 차츰 내 눈이 나빠진다. 빽빽한 감옥과 같은 교실에서 형광등 불빛만 받으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시달리기를 여섯 해 하면서 내 눈은 아주 나빠진다.


  어떤 아이는 이런 곳에서 지내더라도 안경을 안 쓰고 눈알이 똘망똘망 살아남기도 한다. 용한 노릇일까. 집에서나마 눈을 쉬었기 때문에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까.


  곰곰이 돌아보면, 나는 새벽버스나 밤버스를 타고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에도 책을 읽었다.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려고 바둥거리며 살았다. 어두운 새벽녘 버스 등불이나 길가에 켜진 등불에 기대어 책을 읽었기에 눈이 나빠졌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눈뿐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 차가운 시멘트교실에서 지나치게 짓눌렸기에 몸뚱이와 마음 모두 깊이 아프면서 고달팠구나 싶다.

  사내라면 모두 끌려가는 군대에서는 강원도 양구 비무장지대에 있었으니 눈길이 확 트이는 멋스러운 터전이라서 눈이 맑아진다고 여길 만한데, 군대 내무반은 학교 교실이나 감옥이랑 똑같다. 어느 모로 보면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더 어둡고 더 무서우며 더 끔찍하달 만하다. 늘 죽음이 감도는 군대에서 나 스스로 삶을 얼마나 생각했을까. 아니, 모든 것이 온통 죽음인 곳에서 ‘그래,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고 생각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다섯 살 큰아이가 그림책을 펼칠 때면 으레 가만히 바라본다. 넌지시 한 마디 한다. “벼리야, 책을 보려면 밝은 데에서 보자. 몸을 밝은 곳으로 돌려서 책을 보자. 엎드려서 읽어도 좋고 누워서 읽어도 좋아. 다만 밝은 데에서 보면 돼.”


  밝은 빛은 밝은 빛이다. 밝은 빛에 수많은 이야기가 감돌며 찾아든다. 가을날 밝은 빛살을 느낀다. 새롭게 열린 아침에 환하게 흐드러지는 빛줄기를 느낀다. 햇빛은 내 가슴속 빛을 깨운다. 햇빛은 아이들 가슴속 빛을 함께 깨운다. 햇빛은 종이책에 서린 나무 기운을 살그마니 건드리면서 책빛으로 다시 태어난다. (4345.11.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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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루비아 책읽기

 


  작은아이가 잠들어 큰아이만 데리고 자전거마실을 하다가 이웃마을로 살짝 에돌아 집으로 돌아오던 날, 맞바람이 너무 모질어 도무지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기에 마을 안쪽길을 달리며 바람을 긋는데, 이웃마을 끝집 시멘트벽 한켠에 사루비아가 소담스레 꽃을 피운 모습을 본다. 사루비아가 이맘때쯤 꽃을 피우던가? 아무튼 반갑다고 인사하며 자전거를 세운다. 큰아이가 왜 자전거 세우냐고 묻기에 빙긋 웃고는, 사루비아 꽃술을 석 장 따서 둘을 아이한테 내밀고 하나는 내가 쪽 빤다. 아이더러 빨아 보라고 한 다음, 나는 꽃술을 잘근잘근 씹어 본다. 아이는 처음에는 못미덥다 하는 눈치였으나, 이내 나더러 “더 줘.” 하고 말한다. 더 뽑아서 내민다. 또 “더 줘.” 하고 얘기하지만, 우리 집 꽃도 아니니 더 뽑을 수 없기에, 이제 그만 먹고 집으로 가자고 얘기한다.


  어릴 적부터 사루비아 꽃술은 많이 뽑아서 빨았는데, 씹어 보기는 처음이다. 꽃술을 빨아 단물이 나오면 꽃술도 먹을 만하지 싶어 씹는데, 처음에는 달달하다가 나중에는 꽤 쓴맛이 돈다. 먹으면 안 되는 꽃술인가? 그래도 다른 푸성귀랑 섞어서 밥이랑 함께 먹으면 이런 쓴맛은 없으리라 느낀다. 외려, 밥을 먹을 때에는 쓴맛 나물도 즐거울 수 있겠지. 씀바귀가 쓴맛인데에도 나물로는 즐겨먹으니까.


  다시 모진 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자전거를 달린다. 맨 처음 누가 사루비아 꽃술을 쪽 빨아먹는 맛을 알았을까. 사루비아 꽃술은 왜 뽕 하고 뽑아서 쪽 빨아서 먹도록 생겼을까. 다른 짐승은 사루비아 꽃술을 어떻게 먹을까. 그냥 통째로 우걱우걱 씹어서 먹으며 단맛도 즐기고 쓴맛도 즐길까. 벌이나 나비는 사루비아 단물을 어떻게 빨아먹을까. 꽃술을 잡아뽑지 않더라도 단물을 먹을 수 있을까. (4345.11.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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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사람들

 


  나를 취재하고 싶다는 전화를 가끔 받는다. 충청북도 멧골에서 살 적에도 “취재하시는 일은 좋은데, 여기까지 오셔야 하는데요.” 하고 말하면 으레 전화를 뚝 끊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라. 전라남도 시골에서 사는 요즈음도 “취재하시려는 뜻은 고마운데, 예까지 오셔야 해요.” 하고 말하면 슬그머니 전화를 뚝 끊고는 입을 스윽 씻네.


  시골서 살아가는 하루는 조용하니 좋다. 서울서 충청북도조차 멀다고 여기는 서울사람들이, 서울서 전라남도까지 오겠나. 충청북도나 전라남도 아닌 부산이나 광주라면, 또는 대전이나 마산이라면, 또는 안동이나 구례쯤만 되어도 좀 달랐으리라 싶은데, 어찌 되든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다.


  서울사람들은 숲이 얼마나 좋은가를 모른다. 숲에서 안 태어나고 숲에서 안 자랐으며 숲에서 일 안 하기에 숲이 얼마나 좋은가를 모를까. 아마 그러하리라. 언제나 아파트 둘레에서 살고, 언제나 자동차한테 둘러싸여서 살며, 언제나 숱한 신문과 방송과 잡지와 책과 영화와 언론과 연예인과 스포츠와 주식과 뭣뭣에 휩쓸린 채 살아가는 서울사람으로서는, 숲을 숲 그대로 느끼기란 아주 어려우리라 본다.


  나를 취재하고 싶다는 분한테 늘 똑같이 말한다. “휴가라고 생각하며 놀러오셔요. 여러 날 출장 간다고 생각하며 나들이하셔요. 시골집은 작지만 방 하나 비니 여러 날 묵으셔도 돼요. 밥은 제가 차리니 밥값도 안 들어요. 숲이 예쁘고 들이 아름다우며 바다가 멋져요. 밤에는 미리내를 보고, 낮에는 나뭇잎 살랑이는 파랗고 맑은 바람 쐬며 냇물을 마셔요.” 그런데 아직 이런 말에 마음이 이끌리는 서울사람, 그러니까 서울에서 일하는 글쟁이(기자·작가·편집자)는 없는 듯하다. 하기는, 시골사람 스스로 시골을 떠나 서울로 가겠다는 마당인데, 서울사람이 제발로 시골로 찾아오기란 몹시 힘들 만하리라.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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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찍기
― 누구나 즐겁게 찍는 사진

 


  즐겁게 찍기에 사진이 됩니다. 즐겁게 찍지 않으면 사진이 못 됩니다. 즐겁게 찍지 않는 사람은 작품이나 문화나 예술을 빚는다고 할는지 모르나, 작품이나 문화나 예술이 되도록 할 생각일 때에도 즐겁게 찍어야 비로소 작품이든 문화이든 예술이든 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어느 사진은 작품이고 어느 사진은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작품이라고 여기면 스스로 찍은 사진은 모두 작품입니다. 스스로 작품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스스로 찍은 어떤 사진이든 작품이 되지 못합니다.


  안 흔들리거나 황금분할을 이루거나 빛이 곱거나 틀이 반듯하대서 잘 찍은 사진이라 하지 않습니다. 기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기에 좋은 사진이라 하지 않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란, 잘 쓴 글처럼 ‘즐겁게 누리며 찍는 사진’을 가리킵니다. 좋은 사진이란, 좋은 글처럼 ‘즐겁게 누리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깃든 사진’을 가리켜요.


  누구나 즐겁게 찍는 사진입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와야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누구나 즐겁게 읽는 사진입니다. 비평가나 평론가쯤 되어야 읽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누구나 즐겁게 나누는 사진입니다. 여럿이 나들이를 다녀온 다음 사진관에 필름을 맡겨서 찾든, 인터넷으로 파일을 보내 사진을 받든, 누구나 즐겁게 나눌 만한 사진입니다. 이야기를 즐기는 사진이기에, 흔들리건 안 흔들리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둡건 밝건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까르르 웃음을 짓고, 서글피 눈물을 흘릴 만한 이야기가 감돌 때에 비로소 사진이라는 이름이 어울립니다. 어떤 공모전에서 상을 탄다거나, 어떤 이름난 이한테서 이래저래 이론을 배워야 사진을 찍지 않아요. 스스로 마음이 가는 대로 찍을 때에 사진이에요. 스스로 삶이 즐겁다고 느끼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를 때에 사진입니다.


  사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여기에 사진이 있어요. 내가 숨을 쉬고 사랑을 나누며 꿈을 꾸는 바로 여기에 사진이 싱그럽게 있어요. 누군가는 먼먼 나라까지 나들이를 다니며 사진을 찍겠지요. 누군가는 작은 보금자리에서 작은 아이들 돌보면서 사진을 찍겠지요. 한국에서 아주 먼 어느 두멧자락이나 시골마을을 찾아가서 찍어야 놀라운 사진이 되지 않아요. 스스로 가슴속에서 ‘놀랍게 여기는 눈길’이 있어야 놀랍게 여기는 사진을 찍어요. 느끼는 가슴이 있어야 하고, 바라보는 눈썰미가 있어야 하며, 사랑하는 넋이 있어야 해요.


  연필이 글을 쓰지 않듯, 사진기가 사진을 찍지 않아요. 붓이 그림을 그리지 않듯 메모리카드나 필름이 사진을 찍지 않아요. 내 손길이 타면서 사진이 태어나요.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손길로 사진을 빚어요. 새해(2013년)에 여섯 살이 될 우리 집 큰아이는 돌이 되기 앞서부터 아버지 사진기를 만져 버릇했고, 아버지한테 수없이 사진을 찍혔으며, 아버지가 일 때문에 사진을 흔히 찍다 보니, 곁에서 이래저래 보고 배운 나머지, 아이 인형을 책에 앉혀서 사진 한 장 찍으며 놉니다. 처음에는 아버지 사진기로 찍더니, 아버지가 동생을 가만히 재우고 옆방으로 건너오니, 아버지한테 아버지 사진기를 건네주고, 아이는 아이 사진기로 다시 사진을 찍습니다. (4345.11.1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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