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씻는 마음


 갓 한 밥이 가장 맛있습니다. 그러나 손수 지은 밥이면 식은밥 또한 맛있습니다. 아이 엄마가 해 준 밥도 맛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딸아이가 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밥도 맛있으리라 여깁니다. 딸아이가 맨 처음 손수 쌀을 씻고 밥물을 맞추어 냄비에 불을 붙여 끓인 다음 그릇에 소담스레 담아 차려 줄 밥이란 얼마나 맛있을까요. 밥술을 뜨기 앞서 눈물을 흘리며 웃으리라 생각합니다.

 도무지 밥을 잘 안 먹는 아이를 마주하면서 걱정이 쌓이고 근심이 늡니다. 밥을 얼마나 잘 못하면 아이가 이토록 밥을 안 먹는가 싶어 끌탕입니다. 아이 아빠 입맛에만 맞추어 밥을 하는 탓인지, 아이 아빠 눈높이에서만 밥을 할 뿐이거나 다른 반찬을 제대로 못 차리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런저런 숱한 까닭이 모여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식구가 조그마한 논이라도 손수 모를 내고 심어 피를 뽑고 돌보면서 가을걷이를 한 다음, 낟알을 몸소 훑고 끼니때마다 애써 빻아 쌀알을 얻으면, 이 쌀알을 까부르고 씻어서 밥을 한다면 달라질까요. 아이가 이 모든 흐름을 제 몸뚱아리로 겪거나 치른다면 바뀔까요.

 새벽 서너 시 무렵에 일어나 글을 씁니다. 집식구 고이 잠든 녘에 비로소 글을 씁니다. 새벽 서너 시에서 두어 시간이 지난 예닐곱 시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부엌으로 가서 조용히 쌀을 그릇에 내어 씻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씻은 다음 물을 받습니다. 아이가 깰 무렵까지 불립니다. 아이가 일찍 깨면 기다리고 늦게 깨면 느즈막이 일어나는 때에 맞추어 냄비에 불을 넣습니다. 밥냄비에 불을 넣으면 오늘 아침에 먹을 반찬을 마련합니다. 국을 하나 끓입니다. 부디 잘 먹어 주기를 바라면서, 모쪼록 아이 엄마도 무언가 몸으로 받아들여 새롭게 기운을 차릴 수 있기를 비손하면서, 나 또한 오늘 하루 더 힘차게 살아 보자 다짐하면서 부엌에서 칼질을 합니다.

 쌀을 조용히 다 씻고 불구멍에 얹습니다. 히유 한숨을 쉽니다. 다시금 비손을 합니다. 새근새근 잠든 가운데 잠꼬대를 하는 아이를 바라봅니다. 아이가 신나게 잘 놀다가 잠든 이듬날에는 잠꼬대 소리에 웃음이 묻어 있습니다. 아이가 꾸지람 잔뜩 듣고 울먹이며 잠든 이듬날에는 잠꼬대 소리에 눈물이 어려 있습니다. 아이가 이듬날 첫머리부터 개운한 마음으로 깨어나 살아가는지 찌뿌둥한 마음으로 부시시 지내야 하는지는 오로지 어버이한테 달립니다. 아무리 아이가 말썽을 피우더라도 삭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아이가 놀잇감이며 살림살이며 엉망진창 늘어놓고 안 치우더라도 부드러이 타이르며 함께 치울 줄 알아야 합니다. 아직 사랑하고 사랑받기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임을 헤아리면서, 어버이 스스로 내 살붙이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흐름을 마련해야 합니다. 내가 어버이라면 더 힘써야지요. 내가 아빠이거나 엄마라면 내가 선 자리에 걸맞는 튼튼하며 씩씩한 사람으로 살아내도록 마음을 쏟아야지요.

 마음을 쏟아 글 한 줄을 쓰고, 마음을 바쳐 책 한 권을 읽으며, 마음을 기울여 사람을 사귑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를 마주하는 어버이라면, 아이가 더없이 맑고 밝은 넋을 건사할 수 있게끔 참다이 마음을 들여야 합니다. 이론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삶으로 하는 말입니다. 새벽에 홀로 조용히 일어나 쌀을 씻든, 아이가 깨어나 개구진 짓도 하고 말썽도 피우고 어리광도 부리고 칭얼거리도 할 때이든 싱긋 웃으며 내 살붙이를 사랑하는 몸가짐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덧 동이 틉니다.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동트는 새벽을 보고 까만 밤하늘 달과 별을 올려다볼 수 있으니 기쁩니다. 오늘 동트는 새벽 하늘에는 구름 몇 점 수묵그림 붓질처럼 슥슥 그려져 있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기에 아이한테 ‘하늘’과 ‘구름’이라는 낱말을 일찍부터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하루하루입니다. (4343.10.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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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읽는 마음


 하루하루 고단합니다. 괴롭다고까지 느낍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내어 새로운 하루하루 맞이합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고단할 줄 알았으면 이렇게 살아가려 했을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루하루 고단하기 때문에 괴로우면서 고맙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밤마다 새벽마다 몇 차례 깨어나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서도, 속으로 ‘힘들다, 힘들구나, 힘드네.’ 하고 노래하면서도, 참 이 고달픈 나날을 잇습니다. 왜냐하면 이토록 고단하여 지치는 나날을 보내며 늘 어머니가 떠오르거든요. 예전에는 머리로 뭉뚱그리는 어머니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몸으로, 아니 뼈로 사무치는 어머니 생각입니다.

 어머니하고 깊이 이야기를 주고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하고 두루 이야기를 나누어 본 일 또한 없습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당신 아들하고 느긋하게 이야기꽃을 피워 보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벌써 예순 나이를 넘었고 어머니는 어느새 예순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예순을 맞이하여 예순잔치를 치러 주어야 하는 줄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조차 까맣게 잊으며 아이랑 부대끼는 하루하루를 마감하던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어머니 나이 서른여섯’에 ‘어머니 나이 서른’에 ‘어머니 나이 스물다섯’에 어떤 마음 어떤 삶이었을까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를 낳아 기른 어머니인, 나한테는 할머니인 분이 서른여섯이고 서른이고 스물다섯이었을 적에는 어떤 마음이요 어떤 삶이었을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아마 1920년대였을까요. 아버지 쪽 할머니 얼굴은 알지만 어머니 쪽 할머니 얼굴은 모릅니다. 뵌 일이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 쪽 어머인 내 할머니 1920년대 무렵 삶은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그무렵 할머니들이 넉넉한 살림이었든 가난한 살림이었든 어떻게 지내며 꽃답고 푸른 날을 보내셨을는지 궁금합니다.

 나한테 할머니인 분을 낳아 기른 어머니라면 1800년대 삶이겠지요. 이렇게 하나하나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할머니들, 그러니까 그때로서는 여느 어머니요 여느 색시인 분들 삶을 헤아리며 내 오늘 삶을 돌아봅니다. 나로서는 힘들다 여기지만 참말 나는 내 삶이 힘들다 여길 만한지 알쏭달쏭합니다. 참으로 나는 내 삶을 힘들다고 생각할 만큼 메마르거나 팍팍하거나 슬픈지 깨달아야 합니다.

 엊저녁 책 하나 몇 줄이나마 읽으려다가 그만둡니다. 도무지 힘에 겨워 책을 손에 쥘 수 없습니다. 사 놓고 못 읽으며 책상맡에 쌓아 둔 책들이 상자로 몇이나 됩니다. 흔히 ‘아기다리고기다리’라 하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천야일야》(동서문화사) 1960년대 번역책을 드디어 지난 9월에 장만했습니다. 책꽂이를 꾸민다든지 나중에 비싼값에 되팔려는 속셈으로 산 책이 아닙니다. 저는 장사할 마음으로 옛책을 사 모으지 않습니다. 옛책이든 새책이든 읽으려고 살 뿐입니다. 《천야일야(千夜一夜)》 또한 요즈음 번역(1992년 범우사 판)으로 읽어 보았는데(고등학생 때), 1960년대에 갓 옮겨진 책에는 어떠한 말씨와 말느낌으로 되어 있는지 참 궁금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파 애타게 찾았어요. 그러나 1960년대 ‘첫 완역’이라 할 《천야일야》인 탓에 한 질을 모두 갖추자면 꽤 큰 목돈을 들여야 합니다. 가난한 글쟁이 살림돈으로는 도무지 장만하기 힘들겠다고 느끼며 두 손을 들며 지냈는데, 뜻밖에 몹시 싸게 파는 헌책방이 있어, 이곳 일꾼이 부르던 2만 원에 2만 원을 더 얹어서 장만했습니다. ‘다른 헌책방에서는 한 권에 2만 원씩 팔기도 하지만, 속싸개 종이까지 아주 정갈하게 남아 있을 때에 2만 원이고, 속싸개가 없고 첫판이 아니면 1만 원이나 밑으로 파니까, 나로서는 적어도 한 권에 5천 원씩은 쳐야 내 마음이 받아들여 주니 여덟 권을 이만 원에 가져갈 수는 없고 4만 원은 치러야겠습니다.’ 하는 말씀을 건네며 사들였어요. 그러나 이 고맙고 애틋한 《천야일야》는 아직 건드리지조차 못하고 쌓여 있습니다.

 그나마 어제부터 《초원의 집》 1권을 읽습니다. 올 2010년 3월 23일에 아홉 권 한 질을 마련했으면서 10월이 될 때까지 1권 한 쪽조차 못 넘기며 살았습니다. 다른 읽을거리가 많다는 소리는 핑계이고, 인천에서 꾸리던 도서관을 시골로 옮기려고 책을 싸느니 집을 알아보느니 뭐를 하느니 하는 소리 또한 핑계입니다. 바쁘고 힘들더라도 할 일을 못하는 사람은 없어요. 바쁘고 힘들더라도 읽어야 할 아름다운 책은 읽어야 합니다. 바쁘고 힘들더라도 사랑스러운 살붙이하고 오순도순 재미나게 살아야 할 노릇입니다.

 모든 책은 밥입니다. 모든 글은 삶입니다. 모든 일은 눈물입니다. 모든 삶은 꽃입니다. 지난겨울에 고마운 벗님한테서 《도둑고양이 연구》라는 그림책 하나 선물로 받았습니다. 2008년에 나왔는데 벌써 판이 끊어진 이 그림책을 기쁘게 선물받은 저는 《PONG PONG》이라는 세 권짜리 만화책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만화책 《PONG PONG》은 지지난주까지 열 질쯤 사서 선물했습니다. 나 스스로 읽으며 아주 좋았던 작품인데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는 터라, 언제나 아주 기꺼이 이 만화책 세 권 한 질을 한꺼번에 사서 선물하곤 합니다. 이 만화책을 내놓은 출판사가 판을 끊지 않는다면 저는 앞으로도 한 질을 통째로 장만하여 선물하는 일을 이을 테고, 앞으로 열 해쯤 이 만화책이 살아남는다면 아마 백 질쯤 더 사서 선물하는 책으로 제 가슴에 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새 만화책은 다 비닐로 싸여 있어 속을 다시 들여다볼 수는 없는데, 만화책 《PONG PONG》을 새로 살 때면 늘 이 만화에 깃든 그림을 하나하나 되돌이킵니다. 어느 대목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고, 무슨 이야기에는 어떤 삶이 깃들었으며, 어떤 삶에는 뭔 눈물이나 웃음이 서렸는지 생각합니다. 책값을 치르고 비닐봉지 한 장 얻어 살포시 담아 가슴에 살짝 안아 본 다음 고마운 분한테 “자, 선물이에요. 즐겁게 읽어 주셔요.” 하고 내어 드릴 때에는 내 가슴에 잠자고 있던 작달만한 씨앗 하나 한들한들 옮겨 간다고 느낍니다.

 글을 읽습니다. 날마다 아이랑 치르는 고단한 삶에서 어머니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고 곱씹는 글을 읽습니다. 책을 손에 쥘 기운마저 없어 그예 폭삭 자빠져 잠들어 버리는 밤나절 내가 이날까지 걸어온 길은 무언가 하고 되새기는 글을 읽습니다. 새벽에 아이 오줌 기저귀를 갈아 대야에 담가 놓고 이듬날 빨래할 생각을 하며 깨어나 글 몇 줄 끄적이면서 오늘 아이랑 함께 읽을 그림책이며, 살짝이나마 아빠 가난한 마음을 일깨울 좋은 글책에 담겨 있을 알맹이란 무엇인가 기다리는 글을 읽습니다. (4343.10.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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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읽는 마음


 책읽기이는 삶읽기이고, 삶읽기는 책읽기입니다. 책 한 권 마음을 들여 읽는 사람은 누구나 삶을 마음을 들여 읽을 수 있습니다. 삶 한 자락 마음을 쏟아 읽는 사람은 언제나 책을 마음을 쏟아 읽곤 합니다.

 책을 잘 읽는다거나 삶을 잘 읽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책을 제대로 삭여 삶을 제대로 꾸린다거나, 삶을 제대로 꾸리면서 책을 제대로 삭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을 못 읽는다거나 삶을 못 읽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책을 지식으로 머리에 쑤셔넣는다거나, 삶을 돈바라기로 내팽개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책을 읽었는가는 하나도 따질 대목이 아닙니다. 어떤 삶을 꾸렸는가는 조금도 살필 구석이 아닙니다. 책을 읽은 사람이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울리며 어떻게 지내는가를 헤아릴 노릇입니다.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깨동무하며 어떠한 길을 걷느냐를 돌아볼 일입니다.

 아이한테 읽힐 좋다는 책을 찾아보는 일이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한테 좋다는 책을 읽히기 앞서 우리 어른부터 나한테 좋을 만한 책을 나 스스로 살피고 찾고 골라 기쁘게 읽어내어 삭여야 합니다. 아이와 함께 즐거이 읽을 책을 내 눈썰미와 눈높이에 따라 곰곰이 곱씹으며 찾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책을 왜 읽히려 하는지요. 책은 왜 읽어야 하는가요. 책을 손에 쥐고 싶다면, 책을 손에 쥐어야 하는 까닭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책을 꼭 손에 쥐어야 하는 까닭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책을 읽어 내 삶이 어떻게 거듭나는가를 어김없이 생각해야 합니다.

 5만 평에 이르는 논밭을 일군다고 훌륭한 농사꾼일는지, 다섯 평짜리 텃밭을 일군다고 꾀죄죄한 농사꾼일는지 궁금합니다. 5만 권에 이르는 책을 사들여 읽었다고 훌륭한 책꾼일는지, 다섯 권 겨우 빌려서 읽었다고 형편없는 책꾼일는지 궁금합니다.

 나한테 돈 5만 원이 있으면 이 돈 가운데 책값으로 얼마를 빼시렵니까. 나한테 돈 50만 원이 있으면 이 돈 가운데 책값으로 얼마를 나누시렵니까. 나한테 돈 500만 원이 있으면 이 돈 가운데 책값으로 얼마를 쓰시렵니까. 나한테 돈 5000만 원이 있으면 이 돈 가운데 책값으로 얼마를 더시렵니까. 나한테 돈 5억 원이 있으면 이 돈 가운데 책값으로 얼마를 바치시렵니까. 나한테 돈 50억 원이 있으면 이 돈 가운데 책값으로 얼마를 즐기시렵니까.

 따뜻한 넋, 따뜻한 손, 따뜻한 눈, 따뜻한 몸, 따뜻한 삶, 따뜻한 길, 따뜻한 집, 따뜻한 벗, 따뜻한 꿈, 따뜻한 말, 따뜻한 책, 따뜻한 땀이 반갑습니다. 따뜻한 바람을 맞아들이고픈 구월이요 시월입니다. (4343.8.3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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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 마음


 제아무리 훌륭한 책을 읽었다 할지라도 이 책 하나를 이야기하는 글은 곧바로 써낼 수 없습니다. 고작 쓴다는 글이라고 해 봐야 ‘이 책 참 대단히 훌륭합니다’쯤입니다. 참으로 훌륭하다고 하는 책을 이야기하려는 글이라 한다면 ‘이 책 참 훌륭하다’라고 밝히지 않으면서 넌지시 아름다움이 무엇이요 훌륭함이 무엇이며 참됨이 무엇인가를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책 하나로 내 삶부터 어떻게 거듭나거나 달라지고 있는지를 낱낱이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온누리에 가득한 숱한 책느낌글을 읽거나 살피면서 내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일이 퍽 드뭅니다. 낯이 간지러운 부추김글은 널렸어도, 낯이 환해지는 보살핌글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을 읽은 넋이라면 좋은 삶을 가꾸는 좋은 몸으로 다시 태어나서 좋은 글을 써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좋은 책을 읽고도 좋은 글을 일구지 못한다면, 이이는 좋은 책을 읽지 못한 셈입니다. 좋은 책에 깃든 좋은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노릇입니다. 좋은 책이 왜 얼마나 어떻게 좋은가를 느끼지 못한 탓입니다.

 책느낌글을 쓸 때마다 저 스스로 지나온 내 모습을 모두 내려놓습니다. 백 꼭지에 이르는 책느낌글을 썼다면 백 꼭지째 책느낌글은 첫 꼭지째 책느낌글하고 견줄 수 없는 제 알찬 삶입니다. 왜냐하면 첫 꼭지부터 백 꼭지까지 모두 백 차례에 이르도록 거듭나고 탈바꿈을 해 왔으니까요. 오백 꼭지째 글을 썼다면 오백 차례 새로 태어난 셈이요, 즈믄 꼭지째 글을 썼으면 즈믄 차례 다시 태어난 셈입니다.

 그런데 이냥저냥 대충대충 얼렁뚱땅 글을 쓴다 해서 늘 거듭 태어나는 셈이 아닙니다. 참되고 착하고 곱게 살아가며 글을 써야 비로소 새로 태어나는 셈입니다. 다 읽은 책이라 할지라도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와 제 손가락이 홀가분하게 움직이며 글을 쓸 때까지 기다리고 견디고 삭입니다. 두 번 읽어야 하는지 세 번 읽어야 하는지, 다 읽고 곰곰이 되씹으며 한 해를 보내야 할는지 두 해를 지내야 할는지 가만히 기다리고 참으며 녹입니다.

 자랑하려고 읽는 책이 아닌 만큼, 자랑하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내세우려고 사들이는 책이 아니듯이, 내세우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우쭐거리고자 들먹이는 책이 아니라, 우쭐거리고자 들먹이는 글이 아닙니다. 제 모두를 쏟아 읽으면서 제 모두를 씻어 보듬으려는 책이면서 글입니다. 제 발걸음을 디뎌 생각하면서 제 삶자락을 추슬러 살아내려는 책이면서 글입니다.

 덜 읽었으면 마저 읽어야 하고, 덜 삭였으면 다시금 삭여야 하며, 덜 느꼈으면 더 느끼도록 애써야 합니다. 쌀을 씻어 알맞게 불 때까지 기다리고, 불린 쌀이 알맞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며, 잘 지은 뜨거운 밥이 알맞게 식을 때까지 기다리며 밥술을 듭니다. 한 번 더 마음을 쏟을 줄 안다면, 내 손아귀에 쌀알이 들어오는 길을 돌아볼 터이고, 두 번 더 마음을 쏟을 줄 안다면, 내 손에 낫자루와 괭이자루를 쥐어 땅을 일구어 나락을 얻으려 할 터이며, 세 번 더 마음을 쏟을 줄 안다면, 내 목숨을 이어 주는 고마운 바람과 물과 흙과 해 모두를 사랑하며 엎드려 절을 할 테지요. 책읽기란 삶읽기이고, 삶읽기는 삶쓰기인 글쓰기로 이어집니다. (4343.5.3.달.ㅎㄲㅅㄱ) 

(이런 글을 5월에 진작 써 놓은 줄 오늘 비로소 새삼스레 깨닫다. 써 놓고 곧장 올리지 못한 일이 이제 와서 생각하니 고맙다. 내가 쓴 글이든 남이 쓴 글이든, 그때뿐 아니라 나중에 읽어도 가슴으로 와닿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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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찍는 마음


 내 이웃을 내 삶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이란 언제나 나와 네가 마주하며 이야기하는 문학이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찍는 사진이란 저마다 내 이웃을 어떤 내 마음그릇에 따라 사랑하거나 헤아리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사진기를 든 사람들 마음그릇이 깊고 너르다면 이이가 아무리 풋내기요 값싼 사진기를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따뜻하고 아름다우며 훌륭한 사진을 빚습니다. 사진기를 든 사람들 마음그릇이 얕고 좁다면 이이가 아무리 이름난 사진쟁이요 값비싼 사진기를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차갑고 메마르며 엉터리인 사진을 낳습니다. 사진기를 알아보고 사진기를 갖추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기만 하는 어설프며 가녀린 사람들을 마주해야 할 때에는 더없이 슬픕니다. 사랑나눔 하나 하지 못하면서 사랑이야기 하나 담지 못하는데다가 사랑스러운 눈길 한 번 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글쟁이는 글을 쓰기 앞서 먼저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림쟁이는 그림을 그리기 앞서 먼저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하며, 사진쟁이는 사진을 찍기 앞서 먼저 고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땅한 밑바탕 다지기입니다. 처음을 여는 밑마음 다스리기입니다. 착하지 않고 참되지 않으며 곱지 않은 사람들이 쥐거나 들거나 붙잡고 있는 볼펜과 붓과 사진기는 무시무시한 군화발과 같습니다. 무서운 총칼과 매한가지입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를 떨어뜨리는 못난 주먹힘일 뿐입니다. (4343.5.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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