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牛) - 김진선 사진집
김진선 사진 / 사진과예술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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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곁에서 찾는 사랑스러운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96] 김진선, 《소(牛)》(사진예술사,2008)

 


  마당 한쪽에서 스스로 자라는 풀꽃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뒤꼍에 마련한 뒷밭에 첫째 아이와 함께 물을 주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분들은 봄날 어떤 봄꽃을 구경하고 사진으로 담는지 모르나, 나는 내가 살아가는 시골마을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들꽃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새로 돋는 풀이 어여쁩니다. 자운영 꽃빛이 예쁘다 느낍니다. 모과나무에 맺힌 앙증맞은 꽃송이를 쓰다듬습니다. 감잎 푸른 사이사이 막 몽글려고 하는 몽우리를 봅니다. 뽕나무는 오디가 맺히는데, 오디가 되기 앞서 피어난 꽃송이는 뽕잎 빛깔하고 같습니다. 느티꽃은 느티잎하고 꽃빛이 같은데, 뽕꽃도 뽕잎하고 꽃빛이 같습니다.


  봄꽃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봄날 들판과 멧자락을 오르내리며 사진을 빛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봄빛을 사진책으로 살며시 옮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봄날 봄빛을 사진으로 옮기는 이들 가운데 ‘사진쟁이 보금자리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봄내음’을 누리면서 사진길을 걷는 이는 드문 듯합니다. 여름날 여름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가을날 가을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겨울날 겨울빛을 사진으로 옮기든, 스스로 뿌리내려 살아가는 터에서 사진빛을 나누는 이는 퍽 드물지 싶어요.

 

 


  가난한 사람들 찾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터에서 마주하는 이웃 삶자락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가멸찬 사람들 찾아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더라도, 또 내로라하는 이들 찾아 인물사진을 찍더라도, 언제나 내 삶터에서 가장 가까운 데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마주하며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꼭 어느 호텔 어느 전시장에서 마련하는 잔치마당에서 패션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패션쇼라는 이름이 붙는 곳에서 모델을 앞세워야 패션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도 패션사진은 태어납니다. 내 작은 집 작은 방에서도 패션사진은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생각할 때에 내 사진이 태어납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결을 살피거나 살릴 때에 내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사진책 《소(牛)》(사진예술사,2008)는 강원도지사로 일하던 김진선 님이 내놓았습니다. 김진선 님은 “사진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제시해야 하는 사진, 누구보다 자신있어 그 내밀한 진실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내 사진은 어떤 것일까? 그런 고심의 시간, 살아오면서 체험하고 인식한 내 기억을 모두 꺼내놓고 샅샅이 뒤져 보았다(4쪽)” 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스스로 물은 다음 “그러고 보면 강원도 사람, 소, 사진이 갖는 기본적 공통점이 ‘정직’이다. 강원도지사가 소(牛)를 테마로 한 사진작품을 내놓는 이유다(5쪽).” 하고 스스로 밝힙니다.

 

 


  소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으나 아주 없지 않습니다. 소를 사진으로 찍되, 일소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훨씬 적습니다. 이와 함께, 싸움소를 사진으로 찍는다든지, 농장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로 팔릴 소를 찍는다든지, 좁은 우리에서 사료만 먹으며 젖을 내놓다가 머잖아 고기로 팔릴 소를 찍는다든지 하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어쩌면, 고기소 될 소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 남녘땅 곳곳을 돌며 일소를 사진으로 담는 분은 있다 할 테지만, 남녘땅 곳곳 소우리를 찾아다니며 가엾게 갇힌 소를 사진으로 담는 분은 몇 사람쯤 될까요. 젖을 내놓다가는 고기소가 될 젖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으로 담는 분은 몇 사람쯤 있을까요.


  김진선 님이 내놓은 사진책 《소(牛)》에는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소로 팔릴 날을 기다리는 소’가 나옵니다. 김진선 님은 소 가까이 다가서기도 하고, 소 멀찍이 떨어진 채 바라보기도 합니다. 소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는 사진이 있고, 소가 어떤 생각을 품는지 가늠하는 듯한 사진이 있습니다. 쉬는 소가 있고 움직이는 소가 있습니다. 무리지은 소가 있고 외따로 떨어진 소가 있습니다.

 

 


  사진책 《소(牛)》를 빚은 김진선 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었을까요. 사진책 《소(牛)》는 우리들한테 무슨 삶을 보여줄 만한 이야기밭이 될까요. 김진선 님이 어린 나날 보던 소와 사진책에 담긴 소는 서로 얼마나 떨어진 채 ‘같은’ 소라는 목숨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까요. 사진책으로 소를 마주하는 오늘날 사람들은 밥상에 오르는 소고기와 사진책에 나타나는 소를 어떻게 맞대어 생각을 북돋울까요.


  김진선 님은 소 아닌 돼지를 사진으로 찍으면서도 당신 꿈을 보여줄 수 있나요. 돼지 아닌 메뚜기를 찍거나, 메뚜기 아닌 개구리를 찍거나, 개구리 아닌 뱀을 찍거나, 뱀 아닌 갈매기를 찍거나, 갈매기 아닌 오징어를 찍는다면, 이때에도 당신 사랑을 보여줄 수 있나요.


  사람들은 마른오징어도 먹고 물오징어도 먹습니다. 오징어 잡는 고깃배가 바다를 넘실넘실 가로지릅니다. 누군가는 오징어잡이배에 올라타고는 오징어 낚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겠지요. 누군가는 바닷속으로 풍덩 들어가서 바닷속 헤엄치는 오징어 모습을 사진으로 옮기겠지요.


  양식장에서 넙치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갯벌에서 조개 캐는 할머니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굴을 까고 조개를 까는 아줌마들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을까요. 스쳐 지나가는 사진이 아니라, 곁에서 오래오래 지켜보거나 함께 일하면서 찍는 사진으로 빚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이들 모습을 예쁘게 찍자면,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가며 예쁘게 웃는 어른으로 지내면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난하게 살아가는 힘겨운 나날을 찍어 온누리에 알리자면, 나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하고 한 마을에서 가난하게 살아가며 힘겨운 나날을 몸소 겪으면 됩니다. 사진책 《소(牛)》를 내놓은 김진선 님은 ‘들판에서 풀을 뜯다가 고기소로 팔릴 날을 기다리는 소’를 바라보면서 어떤 넋이었고 어떤 얼이었으며 어떤 빛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소를 바라볼 때에 왜 ‘올바르다(정직)’고 여길까요. 흙에 기대어 흙을 일구는 사람이 아주 드문 오늘날에도 소는 옛날처럼 ‘올바르다’고 여길 짐승으로 삼을 만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 소는 참말 무엇이고, 김진선 님이 사진으로 아로새긴 소에 서린 이야기와 꿈은 이 땅에서 참말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까 궁금합니다.


  해거름에 둥지로 돌아오는 처마 밑 제비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제비들은 새벽 일찍 깨어나 노래하며 먹이를 찾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지런히 먹이를 얻어 새끼들을 먹입니다. 시나브로 새끼들은 어른이 되겠지요. 어른이 된 제비는 날갯짓을 바지런히 익혀 가을날 무르익는 들판을 바라보며 더 따스한 곳으로 날아가겠지요. 그러고는 이듬해 따사로운 새봄에 옛 둥지로 찾아오겠지요. 문득,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처마 밑 제비를 사진으로 담으며 이야기 엮는 사진쟁이는 한국에 몇 사람쯤 될까 궁금합니다. (4345.5.21.달.ㅎㄲㅅㄱ)

 


― 소(牛) (김진선 사진,사진예술사 펴냄,2008.5.28./3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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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네 삼남매 - 그리고 세상의 아이들 한치규 사진집 1
한승원 글, 한치규 사진 / 눈빛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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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빚고픈 사랑을 담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95] 한치규, 《한씨네 삼남매, 그리고 세상의 아이들》(눈빛,2012)

 


  세 아이 삶자리를 사진으로 찬찬히 돌아본 사진책 《한씨네 삼남매, 그리고 세상의 아이들》(눈빛,2012)을 읽고 나서 사진쟁이 한치규 님 해적이를 살피다가 흠칫 놀랍니다. 한치규 님은 1979년부터 ‘보안사’에서 대령 신분으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직업군인일 뿐 아니라 여느 직업군인, 이를테면 하사관이나 소위·중위가 아니라 보안사 직업군인이라니, 적잖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어떤 신분이나 계급을 앞세우며 찍을 수 없습니다. 어떤 신분이나 계급은 외려 사진을 사진다이 찍는 길을 가로막거나 흐트린다고 느껴요. 이런 이름이 있거나 저런 겉모습이 있대서 사진이라 하거나 사진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오직 사진으로 바라보며 누리거나 느낄 뿐이에요. 대통령도 이녁 아이를 사진으로 찍고, 여느 흙일꾼도 이녁 아이를 사진으로 찍어요. 신문기자도 동네 아이를 사진으로 담고, 여느 공무원이나 교사도 동네 아이를 사진으로 담아요.


  사진책을 찬찬히 넘깁니다. 한치규 님이 박정희 군사정권 때에 보안사에서까지 직업군인으로 일한 까닭에 한치규 님네 세 아이 사진은 퍽 남다르다 할 만합니다. 한치규 님네 세 아이는 지난날을 어떻게 느꼈을는지 모르지만, 사진으로 드러나는 세 아이 살림살이는 그무렵 여느 아이들 살림살이하고 견주면 ‘매우 가멸찹’니다. 1960년대인데, 집에 텔레비전이 있고 전화기가 있어요. 1960년대인데, 막내아이 생일선물로 세발자전거를 새것으로 받아요. 아이들은 군인옷을 걸친 채 놀기도 합니다.

 

 

 


  사진책을 살짝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1970년대도 아니고 1960년대에 집안에 텔레비전과 전화기와 아이 세발자전거가 있습니다. 여느 집살림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한치규 님네 집에는 ‘사진기’까지 있어요. 이무렵 여느 살림집 살림살이로 사진기를 갖추기란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이때에 갖춘 사진기부터 퍽 대단하다 여길 만합니다.


  사진책을 다시 넘깁니다. 집안에 텔레비전이며 전화기가 있지만, 서울 내수동에 있었다는 살림집 벽종이나 장판이 참 수수합니다. 창호종이 바른 나무문입니다. 아이는 창호종이에 구멍을 큼지막하게 내고는 얼굴을 들이밀며 웃습니다. 마당 있는 기와집이지만, 마당이래 봤자 개수구 구멍을 막아 아이들 몇이 물놀이를 할 만큼 아주 조그맣습니다. 아이들 어머니가 아이를 씻기는 통은 여느 살림집에서 어머니들이 아이를 씻기는 통하고 같습니다. 따순 물을 받아 방에서 아이를 폭 담그며 씻깁니다. 나 또한 내 아이들을 이렇게 씻겼어요. 우리 아이들이 어머니젖을 먹고 자랐듯, 한치규 님네 아이들도 어머니젖을 먹고 자랍니다.


  주말이면 이곳저곳 신나게 나들이를 다녔다 하는데, 나라안 곳곳을 다니기는 했어도 나라밖으로 비행기 타고 나가지는 않았겠지요. 어느 모로 보면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집안이라 할 테지만, 어느 모로 보면 ‘좀 먹고살 만하다’ 싶어도 ‘먹고살기 팍팍한 달동네 이웃’보다 ‘아주 넉넉하게 살림을 꾸리는 나날’은 아니로구나 싶어요. 무엇보다, 한치규 님 사진에는 아이들과 즐거이 누리던 사랑이 살포시 묻어납니다. 사진기를 들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일 뿐, 직업군인이라든지 보안사 대령이라든지 하는 허울이 사진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손에 사진기를 쥔 채 아이들을 살가이 복닥이는 어버이일 뿐, 제법 먹고살 만한 살림이라거나 무언가 더 움켜쥔 사람이라는 껍데기가 사진에 스미지 않습니다.

 

 

 


  “1959년에 카메라를 처음 장만한 아버지는 일본의 카메라 상점에 우리 나라 김을 사서 보내시곤 했다. 그러면 상점 측에서는 그것을 환산한 액수만큼의 필름과 현상약품을 보내 왔다. 외환 사정이 어려웠던 시절, 일종의 물물교환 형식의 교류였으리라(7쪽/둘째 딸 한승원).” 하는 말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며 사진을 즐길 수 있던 사람은 흔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한편, 이렇게 하며 사진을 즐겼다는 이야기를 적바림하기에, 우리 나라 사진 발자취 한쪽 모습을 환하게 밝히며 기쁘게 사진읽기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 삼남매는 행복한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 갔다. 주말이면 가족 모두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변하는 세상 모습도 찍었다. 아버지는 그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셨다(8쪽/둘째 딸 한승원).” 하는 말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한치규 님은 당신이 거머쥔 어떤 이름(신분이나 계급)으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한치규 님은 그저 아버지로서, 어버이로서, 어른으로서, 사람으로서 사진을 찍습니다. 한치규 님은 당신이 누리던 어떤 돈(이무렵 여느 사람들보다 퍽 넉넉한 살림)으로 사진을 빚지 않습니다. 한치규 님은 사랑으로, 믿음으로, 꿈으로, 이야기로 사진을 빚습니다. 사진마다 이야기 한 자락 가득 담습니다. 세 아이한테는 세 아이대로 지난 한때를 즐거이 그리는 사진이 되고, 세 아이하고 딱히 이어지지 않는 여느 사람한테는 ‘참 사랑스러운 삶을 담은 사진’이로구나 하고 느끼도록 이끕니다.


  아이들이 놉니다. 아이들이 다툽니다. 아이들이 잠듭니다. 아이들이 먹습니다. 아버지 한치규 님은 이런 모습 저런 웃음 그런 빛깔을 사진으로 알록달록 담습니다. 그지없이 싱그럽고 참으로 보배롭습니다. 다만, 사진책 《윤미네 집》(전몽각 사진,포토넷 펴냄,2010)처럼 주말 아닌 여느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하고 복닥이는 모습이 찬찬히 담기지는 않아요. 세 아이를 낳아 돌보던 어머니는 하루하루 어떠한 살림이요 삶이며 모습이었을까요. 하루 내내 세 아이가 어머니하고 복닥이던 모습은 어떠한 웃음이며 눈물이었을까요. 《한씨네 삼남매》이든 《윤미네 집》이든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남자(아버지)’입니다. 집에서 살림을 꾸리는 여자(어머니)가 사진기를 손에 쥐는 일은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기 일쑤입니다.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다가, 씻는방에서 빨래를 하다가, 마루에서 걸레질을 하다가, 방에서 아이들 기저귀를 갈고 토닥토닥 재우다가, 살짝살짝 사진기를 손에 쥘 때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가 하는 이야기는 담기지 못합니다. 마당에 빨래를 너는 아침, 마당에서 빨래를 걷는 한낮, 걷은 빨래를 곧장 개지는 못하고 저녁이 되어 겨우 개면서 아이들한테 노래를 들려주며 하루를 마감하는 삶 들이 사진으로 소록소록 스미지는 못합니다.

 

 

 

 


  1960∼70년대에 사진기를 누릴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터이나, 그렇다고 아예 없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게 사진기를 누리더라도 사랑을 담지 못한 사람이 있고, 가멸차게 사진기를 누리면서도 사랑을 담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사진기는 아주 손쉽게 참 많은 사람들이 누립니다. 이제 ‘돈이 없어 사진기를 못 누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그마한 손전화로도 사진을 찍어요. 자그마한 손전화로도 아이들 어여쁜 빛깔을 사진으로 빚어요.


  곧, 한치규 님이 조금 더 넉넉한 살림이었기에 사진을 찍을 수 있지는 않았습니다. 한치규 님이 조금 더 가난한 살림이었다 하더라도 사진을 찍으며 예쁜 넋을 누렸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으로 내 한삶 어떻게 즐기거나 누릴 때에 더 빛나는가를 일찍부터 깨달은 한치규 님이라고 봅니다. 사진으로 서로서로 어떠한 사랑을 어떠한 꿈결로 따사로이 이루는가를 오래도록 느낀 한치규 님이구나 싶어요.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날을 사진으로 찍는 어버이는, 사진에 ‘아이들 웃음’을 담지 않습니다. 아이들 어버이는 사진에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 마음’을 담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웃음이 아니라, 아이들과 활짝 웃으며 살아가고픈 마음을 담습니다. 아이들과 떠들며 놀다가 사진을 찍는 어버이는, 사진에 ‘아이들 어떤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습니다. 아이들 어버이는 사진에 ‘아이들과 얼크러지며 이루고 싶은 어버이 사랑’을 담습니다.

 

 

 

 


  마음을 기울이기에, 골목길에서 동네 꼬마들을 이녁 아이하고 나란히 세워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랑을 쏟기에, “한씨네 삼남매”에 이어 “세상의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빚습니다.


  좋은 꿈과 맑은 사랑과 따사로운 이야기를 엮은 사진을 떠올리며, 우리 집 두 아이와 살아가는 나날을 되새깁니다. 내가 빚고픈 사랑을 담는 사진입니다. 내가 누리고픈 삶을 싣는 사진입니다. 내가 즐기고픈 꿈을 갈무리하는 사진입니다.


  사진책 《한씨네 삼남매》를 여러 차례 더 읽습니다. 사진책에 실린 사진이 더없이 맑습니다. 사진책에 못 실린 사진이 퍽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살아온 모든 나날을 자그마한 사진책에 몽땅 담을 수 없어, 알맹이만 간추렸을 테니까요. “한씨네 삼남매”와 “세상의 아이들”을 따로 낱권으로 묶어 두 권으로 냈으면 더 좋았겠다 싶습니다. 《한씨네 삼남매》에 실린 사진으로도 흐뭇하지만, 무언가 더 이야기가 있겠구나 싶어요. (4345.5.18.쇠.ㅎㄲㅅㄱ)

 


― 한씨네 삼남매, 그리고 세상의 아이들 (한치규 사진,눈빛 펴냄,2012.5.8./25000원)

 

 

 

 

..

 

이 밑은 "세상의 아이들" 사진입니다.

<한씨네 삼남매>는 두 갈래로 나눈 사진을 보여줍니다.

 

..

 

 

 

 

 

 

내 아이들 아끼는 마음은

이웃 아이들 헤아리는 마음으로 이어져

고운 사진으로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맨발로 달리기 하는 모습입니다

 

 

 

 

학부모인 어머니들도 맨발이나 양말바람으로 달리기를 하셨어요

 

모르는 분은 '시골 학교'로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이 사진 두 장은 '인천 주안초등학교 1960년대 운동회' 사진입니다

 

 

 

 

이 사진 또한 시골마을로 여길 분이 있을는지 모르나,

'서울 태능'에서 신문배달 하는 아이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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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작은 마을 - 앙증맞고 소소한 공간, 여유롭고 평화로운 풍경
서순정 지음 / 살림Life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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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같은 사진은 어떤 내음일까
 [찾아 읽는 사진책 94] 서순정, 《일본의 작은 마을》(살림Life,2009)

 


  2009년 11월에 처음 나온 서순정 님 여행사진책 《일본의 작은 마을》(살림Life,2009)을 내가 언제 장만했는가 곰곰이 떠올려 봅니다. 지난해였는지 그러께였는지 가물가물합니다. 이 여행사진책을 애써 장만한 그무렵 내 보금자리를 새 곳으로 옮겨야 했기에, 이 책은 다른 책들하고 한데 묶이며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새 곳으로 옮긴 보금자리에서 날마다 조금씩 책짐을 끌르며 갈무리를 하다가 뒤늦게 알아보고는 뒤늦게 천천히 읽습니다.


  서순정 님은 “도쿄에만 빠져 있다 교토를 알게 되니 단박에 그 엄격하고 단정한 모습에 매료되었다. 도쿄가 일본의 전부인 양 도쿄밖에 몰랐던 내가 새로운 일본을 알게 된 것이다(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도쿄가 ‘모든 일본’이라 할 수 없지만, 도쿄마실만 하면서 ‘일본마실’을 했다고 여긴다 해서 잘못되거나 틀리거나 어긋났다 할 수 없습니다. 꼭 도쿄부터 훗카이도와 류우큐우까지 골고루 돌아야 ‘모든 일본마실’을 다 했다 하지는 않거든요. 나 스스로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곳을 내가 다닐 수 있는 만큼 다니면 가장 좋은 마실이 돼요.


  한국에서 마실을 다닐 때에도 이와 같습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며 서울마실만 해도 즐겁습니다. 인천에서 살아가며 서울마실을 해도 즐겁고, 춘천에서 살아가며 서울마실을 누려도 즐겁습니다. 누군가는 서울에서 살아가며 인천마실을 즐길 테고, 춘천마실이나 대전마실이나 부산마실을 즐기겠지요. 그런데, 서울마실을 하더라도 서울 시내 모든 구와 동을 골고루 다닐 수 있지만, 어느 구와 동 한두 군데를 더 샅샅이 돌아다닐 수 있어요. 어떻게 다니든 ‘내가 좋아하는 다리품을 팔면서 내가 사랑하는 하루를 누리’면 가장 좋은 마실입니다.

 

 


  그래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잘 정비되지도 않은 허름한 배경에 흐르는 물은 풍성하지 않지만, 그 깨끗하고 말간 물빛은 감동이다(16쪽).”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 곳은 이런저런 시설을 잘 갖춘 모습이 좋다고 느낄 만합니다. 어느 곳은 이래저러 허름하거나 허술해 보이는 모습이 좋다고 느낄 만합니다. 어느 곳은 푸른 들판 넓게 펼쳐진 숲과 멧자락이 좋다고 느낄 만합니다. 어느 곳은 아기자기한 골목동네가 좋다고 느낄 만합니다.


  다 다른 삶터는 다 다른 결로 다 다른 아름다운 빛입니다.


  다 다른 삶터를 돌아다니는 ‘다 다른 사람 가운데 하나’인 나는, 내 나름대로 내 사진빛을 마음껏 누리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그래서, “관광지의 유람선은 시시하다. 시답잖은 유람선을 타고 슬쩍 돌아본 후나야 마을의 진가는 마을을 걸어다녀 봐야 알 수 있다 … 여행자에게는 창이 되는 이 공간이 주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이다. 그늘진 거리보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이곳에 빨래를 널기도 하고, 오징어나 생선을 말리기도 하고, 가을이면 예쁘게 깎아 둔 감을 껍질과 함께 걸어 두기도 한다. 이 마을에서는 당연하고 의례적인 광경이지만 여행자에겐 아기자기한 감동이다(108, 110쪽).” 하고 느끼며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내가 아기자기하게 가슴 뭉클히 느끼면 즐겁습니다. 내가 햇살 고운 하루를 느끼면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감알 마르는 내음을 느끼면 기쁩니다. 내가 천천히 걸어다니며 이 길을 아끼고 저 길을 어루만질 수 있으면 어여쁩니다.

 

 


  다만, “사실 나는 자전거를 타지 못해 전체 일정을 자동차로 움직였다. 자전거를 타고 비에이의 초원을 달리는 이들을 볼 때마다 무척이나 부러웠다 … 그 아쉬움은 튼튼한 두 다리로 메운다. 자동차보다는 자전거가, 자전거보다는 두 발로 걸어다니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게 한다(247쪽).” 하고 읊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갸웃갸웃합니다. 자동차로 움직인다고 나쁠 까닭은 없습니다. 자전거로 움직인다고 더 좋을 까닭은 없습니다. 두 다리로 걸어 본다고 가장 좋을 까닭은 없어요.


  자동차로 달릴 때에는 자동차로 달리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내 깜냥껏 내 빛으로 누리면 됩니다. 자전거를 탈 때에는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내 깜냥껏 내 빛으로 나누면 됩니다. 두 다리로 걸을 때에는 두 다리가 느끼는 삶을 내 깜냥껏 내 빛으로 삭히면 돼요.


  좋고 나쁨을 가를 수 없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일본으로 갈 때에 헤엄을 쳐서 바다를 건너야 가장 좋을까요. 어쩌면, 헤엄을 쳐서 바다를 가르며 일본으로 건너간다면, 그 누구도 겪거나 느끼지 못한 새삼스럽거나 놀라운 사랑을 느낄 테지요. 조각배 한 척 스스로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널 때에도 대단히 새삼스럽거나 놀라운 사랑을 느낄 만합니다. 그러니까, 헤엄을 치든 배를 젓든 비행기를 타든, 온 하루를 내 삶으로 받아들여 즐기면 넉넉합니다. 자동차로 달릴 때에는 자동차로 달리는 길을 누리면 됩니다. 굳이 꺼리거나 숨기거나 싫어할 까닭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달리고, 얼마든지 쉬며, 얼마든지 다시 달리고, 얼마든지 다시 쉬면 좋아요.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거세게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드세게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아주 보드랍게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봄에는 봄내음 가득 묻은 꽃빛과 풀빛을 싣고 붑니다. 바람이 붑니다. 여름철 싱그러운 푸른 빛깔 온통 실으며 붑니다. 여름바람에는 따스한 날씨를 찾아 한국으로 날아온 제비들 노랫가락이 살포시 실립니다.


  나는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도, 보드랍게 부는 바람도, 꽃내음 실은 바람도, 나뭇잎 간질이는 바람도, 아주 조용한 바람도, 햇살을 살포시 실은 바람도 좋습니다. 구름을 움직이는 바람도 좋고, 빗줄기를 흔드는 바람도 좋아요. 어느 한때 가장 좋다거나 가장 빛난다 하는 바람이란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바람 같은 사진은 어떤 내음일까 생각해 봅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스치는 바람’과 같다고 하는데, 알래스카에서 ‘바람 같은 이야기’를 느끼며 글이랑 사진으로 적바림한 호시노 미치오 님은 어떤 삶을 어떤 이야기로 적바림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서순정 님이 두루 돌아보았다 하는 일본땅 작은 마을은 어떤 삶 어떤 이야기로 아로새겨지는가 곱씹어 봅니다.


  ‘더 많은 작은 마을’을 더 오래 더 자주 더 깊이 더 넓게 돌아다닌다 해도 즐겁고 좋습니다. 몇몇 작은 마을을 한두 번 슬쩍 들렀다 해도 즐겁고 좋습니다.


  굳이 이 마을 저 마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아요. 꼭 이 마을 저 마을 맛집 밥집 멋집을 알려주거나, 차편을 밝혀야 하지 않아요. 이 마을에서 느낀 고운 사랑을 곱게 적바림하면 넉넉합니다. 저 마을에서 나눈 맑은 꿈을 맑게 아로새기면 흐뭇합니다.

 


  작은 마을 이야기를 왜 적어야 할까 생각합니다. 작은 마을 이야기는 왜 작고 얼마나 작으며 어떻게 작을까 헤아립니다. 작은 마을 이야기가 애틋하거나 살갑거나 푸근하면 내 가슴으로 어떻게 스며들어서 애틋하거나 살갑거나 푸근할까 곱씹습니다. ‘총정리’가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으나, ‘표준 교재’나 ‘표준 지침서’ 같은 이야기는 사진으로도 글로도 그닥 어여쁘지 않아요. 해맑은 날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더라도 사진기를 들어 바라보는 각도와 손짓과 몸짓에 따라 셔터값이랑 조리개값은 그때그때 달라지고, 사진으로 담기는 모습 또한 그때그때 바뀌어요. 서순정 님은 서순정 님 나름대로 ‘어느 한길로만 곧게 다니지’ 않았을 테고, 서순정 님처럼 또는 서순정 님과 다르게 일본 작은 마을을 사랑하며 돌아다닐 사람들은 ‘서순정 님이 다닌 길을 똑같이 또는 비슷하게 다닐’ 까닭이 없겠지요. 그러니까, 스스로 가장 좋았다고 느끼고 가장 사랑스럽다고 여긴 대목만 기쁘게 들려주면 아기자기하게 빛나겠지요.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분 스스로 가장 즐기며 누린 이야기가 그닥 드러나지 않고, ‘길잡이책이 되려는 매무새’가 짙게 보여 퍽 아쉽습니다. (4345.5.14.달.ㅎㄲㅅㄱ)

 


― 일본의 작은 마을 (서순정 글·사진,살림Life 펴냄,2009.11.16./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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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선 사진집 - 사진으로 남은 1950-60년대
이해선 지음 / 눈빛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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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마다 고마운 삶, 즐겁게 사진찍기
 [찾아 읽는 사진책 93] 이해선, 《이해선 사진집》(눈빛,2005)

 


  1905년에 태어나 1983년에 숨을 거둔 이해선 님이 빚은 사진들로 꾸린 《이해선 사진집》(눈빛,2005)을 읽습니다. 오랜 나날 사진과 함께 살아온 이해선 님이지만, 막상 당신 이름 석 자를 아로새긴 사진책은 1980년에 처음 냈습니다. 이때에 내놓은 사진책 두 가지는 ‘비매품’이었고, 2005년에 이르러 비로소 누구나 쉽게 찾거나 만날 수 있는 판으로 태어납니다.


  사진일을 하거나 사진공부를 하는 이라면 여러모로 ‘이해선 님 비매품 사진책’을 구경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사진일을 하거나 사진공부를 하더라도 ‘이해선 님 비매품 사진책’을 구경하기는 쉽지 않으며, 따로 누가 건네어 보여주지 않는다면 살펴보거나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느낍니다.


  2005년에 빛을 본 《이해선 사진집》에 실린 머리글을 읽습니다. “백오 선생께서는 흑백사진은 사물이 지닌 모든 고유색을 흑백만의 추상세계로 바꾸어 표현하기에 좋다며 흑백사진만을 고집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호도 ‘백오(白烏)’로 지으셨습니다(5쪽/안준천).”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새깁니다. 이해선 님이 사진을 하던 지난날 한국에서는 무지개빛 필름을 쓰기 아주 힘들었습니다. 매우 비쌌거든요. 비싸다고 못 쓸 무지개빛 필름은 아닙니다만, 매우 비싼 필름을 함부로 쓰기는 참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무지개빛으로도 찍고 흑백으로도 찍는데, 어느 빛을 살펴 찍더라도 내 빛을 헤아리며 찍을 수 있어야 이른바 ‘빛그림’이라 하는 사진을 이룹니다. 돈이 있어 무지개빛 사진을 찍는다 하더라도 내 눈으로 스며드는 빛살을 내 마음으로 아로새기며 새 빛으로 엮으려는 사랑이 없다면 사진을 이루지 못해요. 이때에는 빈 껍데기 복사품만 만들어요. 돈이 없기에 까망하양 빛깔로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스스로 제 까망하양 빛깔을 빛살과 빛무늬와 빛결과 빛내음과 빛소리와 빛느낌을 살리지 않는다면, 애써 사진기를 놀린다 하더라도 사진을 이루지 못합니다.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누리는 빛입니다. 햇볕을 먹는 민들레는 스스로 민들레로 자랍니다. 햇볕을 받는 제비꽃은 스스로 제비꽃으로 자랍니다. 햇볕을 누리는 엉걸퀴는 스스로 엉겅퀴로 자랍니다. 햇볕을 즐기는 해바라기는 스스로 해바라기로 자랍니다. 햇볕을 머금는 벼는 스스로 벼로 자랍니다. 저마다 다른 씨앗은 저마다 다른 삶에 맞추어 햇볕을 받아먹으며 스스로 자랍니다. 저마다 다른 나무는 저마다 다른 목숨에 걸맞게 햇볕을 나누어 받으며 스스로 자라요. 같은 졸참나무라도 생김새와 키와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다릅니다. 같은 뽕나무라도 잎사귀와 꽃과 열매가 달라요. 한 형제나 자매라 하더라도 사진을 배워 사진을 찍을 때에는 다른 이야기를 빚을 테지요. 한 학교에서 같은 교수한테서 사진을 배우더라도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눈길과 손길로 사진을 보여줄 테지요.


  사진은 무지개빛으로 이루지 않습니다. 사진은 까망하양으로 이루지 않습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으로 이룹니다. 무지개빛으로 바라보며 담겠다면 무지개빛 무늬와 결과 소리와 내음을 살포시 내 느낌으로 담습니다. 까망하양으로 바라보며 싣겠다면 까망하양 무늬와 결과 소리와 내음을 가만히 내 느낌으로 실어요.


  이해선 님은 이해선 님이 받아들이는 빛을 이해선 님이 사랑하는 사진으로 빚습니다. 누군가 이해선 님하고 똑같은 기계와 필름을 쓴다 하더라도, 누군가 이해선 님하고 똑같은 셔터값과 조리개값으로 사진기 단추를 누른다 하더라도, 이해선 님이랑 다른 사람은 다른 사진을 빚어요. 다른 빛그림을 이루어요. 다른 빛살과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이해선 사진집》 끝자락에 실린 붙임글을 읽습니다. “선생께서는 성의없이 찍어 온 사진은 용서하지 않았다. 육십대의 제자가 가져온 사진이라도 생각없이 쉽게 찍어 온 사진은 집어던지며 호통을 치곤 하셨다(150쪽/안장헌).” 하는 이야기를 곰곰이 새깁니다. 이해선 님은 사진모임 지도위원이라든지 사진공모 심사위원 자리를 으레 맡았다고 하지만, 사진학과 강의를 펼치며 수강생을 모은다든지 사진교재를 빚는다든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아마추어 사진길’을 걸었다 할 텐데, 사진에 아마추어와 프로가 따로 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글쓰기에 아마추어와 프로가 따로 없고, 집살림에 아마추어와 프로가 따로 없습니다. 언제나 나 스스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삶이면서, 날마다 새롭게 누리는 고마운 삶입니다. 더 솜씨있게 펼치는 사진이라든지 더 빼어나게 선보이는 살림은 없어요. 더 재주있게 찍는 사진이라든지 더 훌륭하게 쓰는 글은 없어요.


  언제나 내 삶만큼 이루는 사진이요 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삶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삶 그대로 사진이나 글을 이룹니다. 내가 못마땅해 하거나 나 스스로 어딘가 어수룩하거나 모자라다고 여긴다면, 내 사진과 글은 나부터 느끼기에 어수룩하거나 모자랍니다. 내가 즐기면서 내가 기쁘게 받아들이는 삶이라면 내가 즐기면서 기쁘게 받아들일 만한 사진과 글이 돼요.


  다른 사람 생각이나 눈길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비평이나 비판이나 평가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 이루는 삶이듯, 내 생각으로 이루는 사진입니다. 내 마음에 따라 누리는 삶이요 하루이듯, 내 마음에 따라 누리는 사진이요 빛입니다.

 

 


  사진책 《이해선 사진집》을 찬찬히 되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1950∼60년대 모습’을 아련히 떠오르도록 이끈다고 합니다. 아마, 어느 대목에서는 이런저런 옛모습을 되새기도록 이끌리라 봅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이해선 님이 1950년대를 살아가며 1950년대 한삶을 사진으로 갈무리할 때에는 1950년대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곳 삶을 사랑하며 찍은 사진이지, 쉰 해나 예순 해 뒤에 살아갈 사람들이 ‘옛모습을 되새기도록(추억하도록)’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1960년대에는 1960년대대로 이무렵 삶을 사랑하고 즐기며 찍은 사진입니다. 그날그날 하루를 즐깁니다. 그때그때 삶자리를 누립니다.


  우리 집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는 제 손길은 오늘 하루 이 아이들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진으로 담는 손길입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고 자라 앞으로 스무 살이나 서른 살이 될 무렵 ‘옛다, 네 옛모습(추억)이다. 잘 보렴.’ 하고 갑작스레 툭 던지는 선물이 아니에요. 어버이로서 이 아이들과 하루하루 즐겁고 사랑스럽다 느끼기에 찍은 삶, 곧 ‘현실’이자 ‘현장’이며 ‘웃음빛’입니다.


  웃음빛을 눈빛으로 느껴 사진빛으로 앉힙니다. 눈물빛을 마음빛으로 되새겨 글빛으로 영글어 놓습니다. 날마다 고마운 삶이라 웃습니다. 날마다 즐겁게 웃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날마다 재미난 삶이라 춤춥니다. 날마다 신나게 춤추며 사진을 찍습니다. 날마다 빛나는 삶이라 노래합니다. 날마다 흐뭇하게 노래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4345.5.13.해.ㅎㄲㅅㄱ)

 


― 이해선 사진집 (이해선 사진,눈빛 펴냄,2005.10.21./35000원)

 

 

 

 

이해선 님 사진책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셔요.

 

 

 

아이들 놀이를

잘 담은 사진들이

아주 좋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좋아하는 모습을

담으면 모두 사진입니다.

 

 

 

가난한 삶이든 넉넉한 삶이든

스스로 좋아하며 누리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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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부시 - 나를 사로잡은 아프리카의 눈빛, 김경상 사진집
김경상 사진 / 세상의아침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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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웃이 되어 사진을 찍습니까
 [찾아 읽는 사진책 92] 김경상, 《라이언 부시》(세상의아침,2007)

 


  종교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찍는다는 김경상 님 사진책 《라이언 부시》(세상의아침,2007)를 읽다가 아프리카 땅금을 생각합니다. 김경상 님은 서양사람이 아프리카 땅에서 식민지 전쟁을 일삼으며 죽죽 금을 그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듣고 아프리카 땅덩이에 죽죽 그어진 ‘반듯한 금’을 떠올립니다. 참말, 지구별 어느 나라 땅금도 반듯하게 죽죽 그어지지 않습니다. 남과 북을 가르는 휴전선이란 얼마나 구불구불합니까. 한국과 일본을 가르는 바닷길 금이라 하더라도 반듯한 금이 아닙니다. 한국과 중국을 가르는 바닷길 금 또한 반듯한 금이 아니에요. 뭍에서도 물에서도 반듯하게 쪽쪽 가를 만한 금이란 없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을 가르는 금이든, 덴마크와 스웨덴을 가르는 금이든, 베트남과 라오스를 가르는 금이든, 냇물과 멧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 휘어집니다. 아프리카 땅덩이에서도 나라와 나라를 가르는 금은 구불구불해야 올바릅니다. 사막을 가로지르든 무얼 가로지르든 반듯하게 금을 그어서 이루는 땅금은 있을 수 없어요.


  그러고 보면, 지난날 1945년에 미국과 소련이 함부로 그은 38선이란 얼마나 끔찍한 땅금이었을까요. 한겨레는 몹시 끔찍하며 매우 슬픈 땅금을 겪어야 했는데, 1945년에 오늘날까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모질며 아픈 땅금을 자꾸 잊을까요.

 


  사진책 《라이언 부시》에 실린 ‘에이즈 걸린 사람’ 모습을 바라봅니다. 끝내 목숨을 잃고 땅속에 묻히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돌이켜보니, 에이즈 걸린 사람을 땅속에 묻고는 장례를 치르는 사진까지 본 일은 퍽 드물구나 싶습니다. 이들은 나와 내 이웃하고 똑같은 목숨이요 사람인데, 막상 ‘에이즈 걸린 사람’ 이야기를 다루는 사진들은 병원 침대에 드러누운 모습 틀거리에서 벗어나지 않는구나 싶습니다. 이들 벗과 살붙이와 이웃을 찬찬히 돌아보는 사진은 꽤 드물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에이즈라 하는 병은 언제 왜 생겼을까요. 에이즈라 하는 병은 어떻게 생겼고, 이 병을 고치는 길이란 무엇일까요. 아프리카땅 사람들이나 한국땅 사람들은 에이즈라 하는 병을 얼마나 깊이 알고, 얼마나 깊이 살피며, 얼마나 깊이 깨우칠까요.


  《라이언 부시》를 내놓은 김경상 님은 “카메라와 필름을 챙기면서도 내가 무엇을 찍을 수 있을지 겁이 났습니다. 그러다, 그곳에서 나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아프리카의 누렇게 마른 사바나에 한 그루 서 있는 나무처럼 내 눈에는 아이들이 초록의 나무처럼 보였습니다(1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학문으로 파헤치려 한대서 파헤칠 수 있을 에이즈가 될는지, 전쟁이 될는지, 식민지가 될는지, 아프리카가 될는지 궁금합니다. 학문으로 파헤치고 나면 앙금이나 아픔이나 고름이나 생채기가 말끔히 걷힐 에이즈가 될는지, 전쟁이 될는지, 식민지가 될는지, 아프리카가 될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들여다봅니다. 사진책에 실린 살결 까만 아이들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른들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집을 보아도 흙으로 이루어지고, 길을 보아도 흙으로 이루어집니다. 푸른 빛 가득한 너른 들판이 보입니다. 하늘은 파랗고, 들판은 푸르며, 길과 집은 누렇습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맨발로 들과 길과 집을 누립니다. 한국 선교사나 사진쟁이나 의사나 예술쟁이가 아프리카를 찾아갈 때에는 비행기를 탈 테고, 자동차로 갈아타서 먼길을 달릴 테지요. 한국사람은 선교사나 사진쟁이라 하더라도 아프리카땅 사람들처럼 맨발과 가벼운 옷차림은 아닐 테지요. 천 하나만 걸친다든지, 때로는 맨몸이 된다든지 하면서, 함께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는 한국사람은 있을까 궁금합니다. 서양 사진쟁이 가운데에는, 일본 사진쟁이 가운데에는, 아프리카땅에서 아프리카 겨레와 나란히 보금자리를 이루어 살아가면서 어깨동무하는 나날을 사진으로 담는 이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이보다 아프리카 겨레 가운데 스스로 저희 모습을 담으며 나누는 이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짐바브웨 삶을 짐바브웨땅 사람 결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나누는 사진쟁이가 있을까요. 잠비아 삶을 잠비아땅 사람 빛으로 찬찬히 보여주며 나누는 사진쟁이가 있을까요. 우간다 삶을 우간다땅 사람 꿈으로 따스히 보여주며 나누는 사진쟁이가 있을까요.


  김경상 님은 “아프리카 아이들은 참 잘 웃는다. 나이 많은 아이가 자기보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정글을 달리거나 노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 아이들에게는 게임기 같은 값비싼 장난감은 없다. 대신에 대자연이라는 놀이터가 있다(25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김경상 님도 잘 웃는 분인지 살짝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참 잘 웃는다는 아프리카 아이들이라 할 때에, 이렇게 참 잘 웃는 아이들 손마다 사진기가 있어 저희끼리 저희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하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궁금하거든요. 아이들이 저희끼리 웃고 떠들며 놀 적에, 정글에서 어떤 사진을 찍을까 궁금하거든요. 아이들이 너른 자연을 품에 안고 살아가며 어떤 사진을 빚을까 궁금하거든요.

 

 

 

 


  한동안 머물고 떠나는 손님이 아닌, 태어나서 밥을 얻고 밥을 일구며 살아가는 붙박이 삶으로 바라보는 아프리카 땅덩이와 너른 자연과 들판과 하늘과 이웃이라 하면, 사진으로는 어떤 꿈과 사랑이 깃들까요. 가슴이 파르르 떨립니다. 얼마나 푸르고 얼마나 파라며 얼마나 누런 빛깔로 곱게 물들까 싶어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사진은 그야말로 나 스스로 어떤 이웃이 되어 이루려는 삶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진은 그야말로 나 스스로 어떤 사랑이 되어 어깨동무하려는 삶인가에 따라 새롭습니다.


  “대지는 아이의 맨발이 닿을 때 기뻐하고 바람은 아이의 머리칼과 놀기를 간절히 바란다(29쪽).”고 하는군요. 한국에서도 이와 같아요. 한국에서도 너른 땅과 들판은 아스팔트나 자동차를 바라지 않아요. 한국에서도 너른 땅과 들판은 아이와 어른 모두 맨발로 살포시 밟고 누리기를 바라요. 군화발이나 장갑차 쇠바퀴를 바라지 않는 너른 땅과 들판입니다. 왜 군화발이나 장갑차 쇠바퀴로 군사훈련을 하며 이 나라 너른 땅과 들판을 짓이겨야 할까요. 왜 미사일을 쏘고 총알을 쏘며 이 나라 너른 땅과 들판을 망가뜨려야 할까요. 저쪽에서 군대를 키우니까 이쪽에서도 군대를 키워야 하나요. 저쪽에서 핵무기를 만드니까 이쪽에서도 핵발전소를 새로 지어 핵연료를 갖춘 다음 핵무기를 거느려야 하나요.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기쁨과 냉엄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마음가짐과 지혜를 배운다(36쪽).”고 하는군요. 한국에서도 이와 같아요. 사랑으로 살아가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으로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고 가르칩니다. 돈벌이에 매인 어버이는 아이한테 돈벌이에 매인 굴레를 물려줍니다.


  입시지옥은 아이들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제도권사회는 아이들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썩은 정치나 구린 정치 모두 아이들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청소년범죄라 말하지만, 어른들이 범죄를 저지르니 청소년도 어른들 꽁무니를 따라 범죄를 저지릅니다. 어른들 스스로 어른으로서 이녁 삶을 사랑하지 못하기에, 아이들 또한 아이들 스스로 저희 삶을 사랑하지 못해요. 어른들 스스로 어른으로서 이녁 삶을 아끼며 빛낼 때에, 아이들 또한 아이들 스스로 저희 삶을 아끼며 빛낼 수 있어요.


  한국땅에서는 ‘맑게 웃는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에 만만하지 않습니다. 한국땅에도 환하게 웃거나 기쁘게 웃는 아이들은 있으나, 이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아요. 이 웃음이 곱게 이어갈 만한 삶터가 줄어들어요. 푸른 들판이 사라져요. 너른 숲이 사라져요. 시원한 냇물이 사라져요. 우거진 숲 깃든 멧자락이 사라져요. 갯벌이 사라지고 티없이 맑은 바다가 사라져요. 섬이 사라지고 시골이 사라져요. 온통 도시가 생기고, 온통 시멘트 건물이 생기며, 온통 자동차투성이가 돼요.


  한국땅 사진쟁이는 아프리카땅으로 찾아가 《라이언 부시》 같은 사진책 하나를 빚습니다. 잠비아나 케냐나 탄자니아에서 사진쟁이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이 한국땅에 찾아와서 어떤 사진책 하나 빚을 수 있을까 알쏭달쏭합니다. 이들이 한국땅에 찾아올 적에도 ‘맑게 웃는 아이 모습’이나 ‘기쁘게 땀흘리는 푸른 어른 삶’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을까 아리송합니다. 아니, 너른 자연을 마음껏 누리는 아프리카땅 사람들이 굳이 한국땅까지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으러’ 찾아올까 모르겠습니다. (4345.5.10.나무.ㅎㄲㅅㄱ)

 


― 라이언 부시 (김경상 글·사진,세상의아침 펴냄,2007.6.30./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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