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여러 분야를 통섭하는 게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다.
각 전문분야의 시각에서는 발견하지 못했을 부분들을 발견하게 되고
상상력과 창조의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다양한 분야들의 융합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이 책도 인문학적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서로 무관할 것 같은 역사 속 인물들의 만남을 주선한다.
먼저 콜럼버스와 이순신이 첫 만남의 주인공이다.
1492년이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던 의미 있는 해라면
그로부터 100년 후인 1592년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이 책에선 임진년 조일전쟁이 바른 표현이라 한다).
100년이란 시간 간격과 동서양의 서로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이
과연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은데 은이 둘을 묘하게 이어준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후 유럽 제국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은을 착취해간다.
약탈한 은으로 중국의 도자기, 비단 등을 구입하는 무역이 활성화되던 와중에
우연히 포르투갈인을 통해 조총만드는 법을 배운 일본이 이를 바탕으로 조선을 침략하게 되는데
이를 물리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니
좀 억지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나비효과의 전형이라볼 수도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와 백남준은 변화와 혁신의 공통점을 가졌는데,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이 지배하던
중세에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흔들었다면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은 이전까지 미술에서 꿈도 꾸지 못한 시간과 동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
다음으론 에밀 졸라와 김지하는 같은 듯 다른 행보를 보인 두 사람의 얘기를 다루는데,
간첩조작사건으로 회자되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용감하게 그가 무죄임을 외쳤던 에밀 졸라와는
달리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었던 김지하의 어색한 행보는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어찌 보면 세상 사람들이 불의에 침묵할 때 용기 있게 이를 고발하기는 결코 쉽지 않지만 에밀
졸라와 같은 살아 있는 양심이 존재해야 세상의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아쉬움이 남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낸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신화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해주었고,
대한민국 축구의 4강 신화의 주역인 히딩크와 거장 렘브란트의 조국인 네덜란드는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신념을 가졌기에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전반적으로 느낀 점은 단순히 인문학적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준다는 점이다.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고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함에 있어서 인문학이 상당한 역할을 하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도
내가 그동안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지 제대로 모르고 있던 부분들이었다.
김홍도의 '씨름도'나 김정희의 '세한도'에 얽힌 다양한 의미와 사연들도 신선했는데
어떤 특정 텍스트에만 매몰되지 않고 마음껏 질문하고
다양한 답을 찾아내는 힘이 바로 인문학의 힘이라 할 수 있었다.
음력 8월 15일인 추석이 종종 이른 9월에 찾아와서 비싼 값에 제수상을 차려야 했던 사람들이
추석 날짜의 변경을 제안했다는 부분은 정말 생각도 못한 점이었는데,
왜 추석이 꼭 음력 8월 15일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암기식의 지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들을 고려하고 검토하는 사고의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만큼 인문학은 저자의 말대로 '내가 묻는 것'에서 출발해서
'물었던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목적이 아닌
질문과 이에 대한 답을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삶과 미래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진정한 실용의 힘이 바로 인문학의 힘임을 잘 가르쳐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