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여자 밀리언셀러 클럽 137
가노 료이치 지음, 한희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5년 전 헤어졌던 고바야시 료코를 지하철 역 계단에서 우연히 만난 변호사 스모토 세이지는

갑자기 떠나버린 그녀와의 재회가 반가워 얘기를 좀 나누고 싶어하지만

그녀는 뭔가에 쫓기듯 전화번호만 남긴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난다.

그녀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씁쓸한 마음에 빠져드는 것도 잠시

다음 날 아침 경시청의 후지사키 형사로부터 그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는데...


2008년 네이버 일본 미스터리 즐기기 카페에서 최고의 일본 미스터리로 선정된

'제물의 야회' 가 아직까지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데다 제52회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이란

훈장까지 달고 있는 가노 료이치의 이 책은 관심이 가던 작품이었다.

게다가 제목부터 윌리엄 아이리시의 고전인 '환상의 여인'과 유사해 묘한 기대감마저 주던 작품인데

정작 내용은 얼마 전에 읽은 할렌 코벤의 '6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유도 모른 채 헤어졌던 여자친구의 소식을 오랜만에 접하게 되는 거나

자신이 알던 여자친구의 정체가 도대체 뭔지 알아내기 위해

남자 주인공이 동분서주한다는 설정은 비슷한 감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5년만에 만난 옛 여자친구가 바로 다음 날 죽었다는 이 책의 설정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사랑했던 여자와의 추억을 회상하던 순간도 잠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게 된 스모토는

그녀가 도대체 왜 죽게 되었는지에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더 황당한 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녀의 친척들을 수소문하던 중 료코가 왠지 자신이 알고 있는 료코와 다르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스모토는 생업을 잠시 중단하고 그녀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료코가 마담으로 일하던 가게를 찾아갔다가 사요코를 만나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고

흥신소에 의뢰해 료코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그녀의 죽음에 야쿠자가 관련되어

있는 데다 그녀가 료코로 신분 세탁을 한 사실을 밝혀낼 증거가 어디에도 없었다.

심증은 충분히 가지만 료코의 과거를 밝히는 일에 진도가 안 나가던 중

13년 전에 일어난 토지 브로커의 뺑소니 사건과 개발과장의 살인사건에

그녀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스모토는 목숨을 걸고 진실에 다가가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스모토가 왜 그렇게 료코의 과거를 밝히는 데 집착하는지 좀 이해가 안 되었다.

5년 전 만났던 여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았을 수는 있고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을 수도 있지만

야자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발버둥치는 스모토의 모습에 좀 짠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료코가 숨기고 있던 진실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파고들수록 점점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개발 관련 비리나 의료폐기물에 얽힌 비리에 야쿠자 등 폭력 조직까지 연루되어

감당하기 힘든 진실이 조금씩 드러났는데 마지막에 결국 확인되는 진실은 좀 안타까운 느낌도 들었다.

스모토와 료코는 왠지 너무 닮은 꼴이라서 서로 통했던 것 아닌가 싶은데 5년만의 재회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인연이 더욱 안쓰러웠다.

'제물의 야회'때도 충분히 느꼈지만 이 작품도 강렬한 스토리에 많은 사회 문제까지 녹여내고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풍성한 얘기들을 만들어 냈는데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상 풍파에 휩쓸리며 남의 신분을 위장하여 살아야만 했던 여자와

그녀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안간힘을 쓴 남자의 안타까운 사연이 

사회의 거대악 속에 그대로 파묻혀버릴 뻔했다가 겨우 나름의 정의를 찾게 되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불의에 무참히 당할 수밖에 없었던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 

이 책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단순히 픽션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스모토와 같이 끝까지 진실을 추구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기에

상투적인 말이지만 진실은 언젠가는 승리한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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