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가면의 룰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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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미궁''쓰리'를 통해 한층 가까워진 작가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작품인 이 책은

악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사실 미스터리는 범죄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악당이 등장하여 악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불러 일으킨다.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지독한 범인을 만들어내느냐가

작품의 성패에 상당 부분 영향을 줄 정도로 악역의 비중도 무시 못할 지경인데,

이 책에선 대놓고 악마를 만들어내는 집안 얘기를 그리고 있다.

재계는 물론 정치권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키그룹의 오너 집안은 하나 같이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란 사람은 늦둥이인 막내 아들 후미히로에게

세상을 불행하게 만들 '사'의 존재임을 각인시키고 열 한 살밖에 안 된 아들에게

열 네 살이 되면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자기 아들에게 이런 망언을 서슴치 않고 하는 아버지의 존재부터 예사롭지가 않은데

후미히로는 구키가의 양녀로 들어온 동갑내기 가오리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낀다.

가오리에 대한 감정이 점점 커져 갈수록 그녀를 잃게 될까봐 두려움도 커지는 가운데

아버지가 가오리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미히로는

아버지가 말한 지옥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고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면

가오리를 지킬 수 없겠다는 절박감에 아버지를 죽일 완전범죄를 계획하는데...

 

사춘기 시절 고통스런 경험을 한 후미히로와 가오리는 이후 헤어각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후미히로는 가오리에게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성형수술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살면서도

가오리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지켜주려는 그의 모습은 왠지 애처로운 느낌마저 들었는데

문제는 '사'의 집안 출신이라는 숙명이 후미히로를 계속 괴롭힌다는 데 있었다.

특히 그의 형 미키히코는 이런 후미히로에게 가오리를 망가뜨리지 않으면 자신이 그렇게

만들겠다고 협박하자 후미히로는 가오리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결단을 내린다.

전체적으로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극단적인 설정의 얘기가 펼쳐져 좀 거북한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특히 직전에 읽은 '미궁'처럼 금기시되는 내용이 적지 않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다. 이 책의 여러 등장 인물들을 통해 악의 근원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드는데 타고난 악마들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후미히로도 집안의 전통에 따라 '사'로 길러질 예정이었지만 가오리라는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서

아버지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란다. 물론 환경이 그렇다 보니 정상적인 성인이 되진 못하지만

최악의 범죄자가 되지 않은 건 뭐니뭐니해도 가오리라는 사랑하는 여자의 존재 때문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사이코패스들이 넘쳐나는 소설 속 세계에서(현실도

그리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브레이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었는데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작품 스타일이 어떤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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