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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의 땅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2년 9월
평점 :
국민작가라 할 수 있는 조정래 작가의 작품 중 읽은 책은 얼마 전에 읽었던 '황토'가 유일하다.
그의 대표작들은 감히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니기에
솔직히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번에 만난 이 책은 그의 작품 중 비교적 현대물이라 할 수 있는 1970~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나도 조금이나마 경험했던 시절의 얘기라 그런지 작품 속 얘기가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사약'에서는 술상무를 하다 간경화로 일찍 세상을 떠난 친구의 죽음을 통해
경제성장의 주역이지만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돌볼 틈도 없이
가족과 직장을 위해 헌신해야 했던 우리네 아버지 세대의 죽음과 비애를 잘 보여주었다.
'장님 외줄타기'는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너도 나도 부동산투기에 나서자 동참했다가
큰 손해를 보고 자살에 이른 엄마와 그런 엄마를 용서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부동산 투기로 부를 축적하는 일그러진 한국 사회의 단면을 그려냈다.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여 자수성가한 후 고향을 찾은 남자의 얘기를 그린 '자연 공부',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어느 줄에 서야 살아남을지 고민하는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껍질의 삶'까지
오로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 온 우리사회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래탑'과 '사량의 벼랑'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었는데,
그 시대엔 사랑도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사랑의 시작은 요즘 찾아보기 힘든 순수함과 풋풋함이 묻어났지만 그 결말은 현실 앞에서
비굴해진 상대에 대한 실망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서운함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무래도 조정래 작가하면 대하 서사시가 딱 제격인데, 이 책에도 '길이 다른 강'과
'유형의 땅'이란 두 작품이 실려 있다. 묘하게 닮은 듯한 두 작품 중
특히 '유형의 땅'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태백산맥' 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양반들의 학대를 받으며 복수의 칼을 갈던 만석에게 공산당의 간부 감투는
그야말로 날개를 달아준 것이라 할 수 있었는데 자신의 세상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와 정부를 살해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유형의 삶을 살아간다.
세월이 한참 지나 다시 여자를 만나 정착을 하는가 싶었지만 아들과 함께 버려지는 만석의 모습을 보면
이 땅에서 고난의 세월을 살아간 수많은 민초들의 모습이 투영된 게 아닌가 싶었다.
이 책에서 만난 8편의 단편들은 우리의 현대사를 적나라하게 담아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만 했지만
남은 건 허망함밖에 없는 우리 부모 세대의 애환이 잘 담겨 있었는데,
산업화의 격변기를 살아간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생생하게 그려낸 것 같다.
조정래 작가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대하서사시는 비록 아니지만
그의 작품의 진가를 충분히 맛볼 수 있는 단편집이라 할 수 있었는데
왜 그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인지를 실감하게 해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