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쁜 사마리아인들'로 불온서적의 영예(?)를 누렸던 장하준 교수가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선진국들의 과거를 고발하는 또 다른 버전인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먼저 사다리를 이용해 위로 올라간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 등이 따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걷어찬 사실을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현재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이 지금의 위치에 있기 위해서 자신들은 적극적으로 자국의

유치산업을 보호하는 정책을 쓰면서 외국의 숙련된 노동 인력을 빼돌렸으며,

선진국들이 수출을 금지한 기계를 밀수입하거나 산업스파이를 고용하면서

다른 국가들의 특허권 및 상표를 계획적으로 도용하였다. 그러다 '따라잡기'에 성공하여

선진국 대열에 오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올챙이 적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유 무역을 주장하고,

숙련된 노동 인력 및 기술 유출을 금지하기 시작했으며, 특허권 및 상표를 강력하게 보호하기 시작한다.

이 책의 표현대로 '한때 도둑질을 일삼던 이들이 하나씩 차례로 파수꾼이 된 것이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선 다양한 역사적인 증거를 제시하면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시작으로 관료 제도와 사법권, 재산권 보호 제도, 기업 지배구조 제도, 금융제도와

사회 복지제도 및 노동 제도에 이르기까지 소위 선진국들의 발전과정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는데

이들 나라들이 마치 자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의 제도를 갖추고 있던 것처럼 굴지만 대부분

현재의 제도를 갖춘 건 최근의 일이었다. 직접 비교하긴 좀 무리가 있을지 몰라도

완전한 보통선거권이 주어진 시점을 비교해 볼 때 자칭 민주주주의 수호자(?) 미국의 경우

다른 선진국들보다 한참 늦은 1965년인데 그 당시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3,316달러인데 반해

현재 개발도상국들은 이보다 시기적으로 빠른 경우도 많고, 소득수준도 훨씬 낮은 단계에서

보통선거권을 부여한 점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개발도상국의 민주주의 보급 속도가 훨씬 빠르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현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현 개발도상국들과 유사한 발전 단계에 있을

때엔 갖추지 않고 있던 제도들을 강요함으로써 이들에게 이중 잣대를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있으며,

불필요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제도를 강요함으로써 개발도상국들을 궁지로 몰아가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한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국제사회에서 개발도상국들이 선진국들이 요구하는 제도나 기준들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마치 현재 자신들이 갖춘 각종 제도들이 절대선인양

개발도상국들에게 이를 강요하는데 궁극적으론 그렇게 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아직 걷지도 못하고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에게 달리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자신들이 수십 년 내지 수세대에 걸쳐 이룩한 결과를 하루 아침에 달성하라고 하는 선진국들의

태도는 눈앞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소탐대실하는 우를 범한다고 볼 수 있다.

개발도상국의 발전과 성장이 당장은 일부 손해가 될지는 몰라도 결국 자신들의 무역과 투자 기회도

확대되어 동반 성장하는 윈윈 전략이 될 수 있음을 모른다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선진국도 아닌, 그렇다고 개발도상국도 아닌 '박쥐'같은 중간자적 입장에 있는 우리로서도

이중적인 입장을 보이는 게 당장에는 이익이 될지 몰라도 오히려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국제적 '왕따'를 자초할지도 모른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중재자적 역할을 하면서

올바른 국제질서 형성에 노력하는 게 옳은 길이라는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의 내용이

정답이 아닐까 싶은데 그런 역량을 발휘하기엔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논지의 책이라 할 수 있었는데

자신은 이미 사다리를 이용했다고 다른 사람들은 이용하지 못하도록 걷어차버리는

그런 야비한 행태를 버리고 손을 내밀어 잡아당겨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