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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교실 - 제4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묘지 위에 세워진 아오바가오카 중학교의 3학년 A반.
그곳에선 학생들을 숙청(?)하고 공포신문으로 위협을 주는 은밀한 일들이
벌어지다 결국에는 학생의 자살 등 갖은 사건이 일어났다.
20년이 지난 후 그당시 3학년 A반의 반장이었던 아키바는 동창회를 개최하려 하지만
기억을 잃은 동창생(?)이 나타나는 등 이상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데...
서술 트릭의 재미를 잘 보여줬던 '도착의 론도'로 처음 만났던 오치하라 이치의
일본 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으로 학교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일들의 상흔이
20년이 지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먼저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가 자신의 정체를 찾아가는 과정과
20년전 아오바가오카 중학교 3학년 A반에 담임으로 새로 부임했던 교사의 교무일지를 통해
당시 3학년 A반에서 있었던 일들을 번갈아 보여주는데 여기서도 교묘한 서술트릭이 사용되고 있다.
즉 직접적으로 얘기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게 바로 오치하라 이치의 주특기가 아닌가 싶다.ㅋ
20년전 3학년 A반에선 요즘은 흔한(?) 일이 되어 버린 왕따가 극성이었다.
반 아이들을 교묘하게 괴롭히는 세력이 있고 이들의 눈치만 보는 아이들.
초보 교사는 의욕만 앞섰지 실수 연발이고 스탈린이나 독재사회에서나 들어보던 숙청이란 단어가
공공연히 사용되면서 마치 지령을 내리는 듯한 이름도 무서운 공포신문이 발행되는 그런
3학년 A반에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결국 중간고사에서 부정행위를 의심받던 학생이 급기야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기말고사에서 시험지 유출 의혹을 받던 여학생은 양호실에서 성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렇게 진저리처지는 사건의 연속인 반을 맡은 교사는 여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까지 의심받아
도망치듯 떠나게 되지만 그마저 사고를 당하게 되는데...
한편으로 현재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은 남자는 자신이 아오바가오카 중학교 3학년 A반의
동창생임을 여러 정황상 알고 동창회 사무국에 연락을 취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의 수첩에 쓰여진 3학년 A반 동창회에서 수행할 살인계획을 보면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것조차 두려운 상태다. 과연 그는 누구일까?
이렇게 유쾌하지 못한 기억들로 가득했던 아오바가오카 중학교 3학년 A반의 동창회를
굳이 열겠다는 당시의 반장 아키바의 마음도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일인지라 시간이 약이라고 모든 게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끔찍한 기억을 간직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겨진 응어리는 결코 시간이 약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되새김질하면서 상처는 곪아 터지게 된다.
게다가 꿈에 볼까 두려운 인간들이 뻔뻔하게도 동창회나 하자고 하면
속이 뒤집어지고 순간적으로 살의를 느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동창회 소식은
다 꺼져 가던 불에 기름을 들이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발 뻗고 못잔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정반대가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전혀 모르고 설사 처벌을 받거나 손해배상을 하게 된다 해도
재수 없었다고 생각할 뿐이지만 피해자가 겪는 고통과 상처는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요즘 트라우마라는 용어가 대중화되었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고통스런 기억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가해자들의 아무런 반성도 없는 동창회는
그동안 잠복해 있던 분노를 야기시키고 또다른 비극을 낳게 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에서의 왕따 문제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작가가 정체를 교묘하게 숨긴 인물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밝혀가는 과정이
정말 숨 가쁘게 진행된다. 무려 6백 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의 책이지만 과연 범인이 누군지,
동창회는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 순식간에 다 읽게 되었다.
기억을 잃은 인물의 정체나 동창회를 초토화시키는 범인, 그리고 과거에 아이들을 괴롭혔던
인물의 정체들이 모두 충격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는데
역시 자신의 잘못은 결코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사악함에 치를 떨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추억들로만 가득했으면 좋겠지만 우리의 학창시절이 항상 무지개빛일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마냥 그리운 시절이 누군가에겐 상처투성이의 악몽일 수도 있음을 처절하게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끔찍한 일들을 근원이었던 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해
좀 찜찜한 기분을 남겼지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하기에
손색이 없는 흥미만점의 괜찮은 작품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