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327년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황제파와 교황파간의 모임을 주선하는 임무를 맡은 윌리엄 수도사와 그의 제자 아드소는

수도원장의 부탁을 받고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하는데

거기에 숨겨진 진실은...

 

수도원에서 1주일간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다루는 이 소설은 영화로 먼저 본 기억이 난다.

당시엔 이 책의 명성은 잘 몰랐고 이름만 들어봤었는데

윌리엄 수도사 역의 숀 코너리와 아드소 역의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펼치는

나름대로 흥미진진한 스릴러였다.

 

수도사들이 한 명씩 죽어나가자 윌리엄 수도사는

그 원인이 장서관에 숨겨져 있는 어떤 책이 아닐까 의심한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장서관 출입만은 금지시키는데

그럴수록 의혹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법

윌리엄 수도사와 아드소는 장서관에 몰래 잠입하기에 이른다.

완벽한 미로와 밀실이라 할 수 있는 장서관은 그들에게 호락호락 점령당하진 않는다.

몇 번의 도전 끝에야 그들은 장서관의 구조를 파악해낸다.

그리고 장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 가운데서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밀서의 정체도 차츰 드러나는데...

 

이 책에는 14세기 중세사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루트비히 황제와 교황 요한 22세의 갈등과 이들을 따르며 양분된 교회 내 세력들 

프란체스코 수도회, 베네딕트회 등 교회 내 여러 파들

청빈사상과 이단논쟁 등 종교의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당시의 모습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솔직히 크리스찬도 아니고 종교에도 큰 관심은 없어

이러한 서술들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반감시키면서

진도나가는 것을 방해한 면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소설가이기 전에 저명한 학자인 움베르토 에코의

치밀한 조사와 고증에 근거한 노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편 이 책은 추리소설로서의 매력도 듬뿍 담고 있다.

요한묵시록의 예언대로 일어나는 연쇄 살인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의 명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궁과 같은 장서관 속에 숨겨진 밀실인 '아프리카의 꿈'으로

들어가기 위해 벌이는 윌리엄과 아드소의 모험

그리고 장서관의 구조를 밝히는 것은 마치 암호 해독과 같은 재미를 주었다.

또한 범인 등이 그토록 숨기길 원했던 밀서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이나

밀서의 내용을 알아가는 과정도 읽는 내내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범인의 살인방법까지 추리소설의 명작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 없는 최고의 추리소설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수도원장이나 범인이 그토록 감추길 원했던 책의 정체는

정말 어이없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이었다.

이 책은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 책으로 이름만이 남아있다.

웃음을 다루고 있는 그 책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

살인을 저지를만큼 두려웠는지 솔직히 이해가 가진 않았다.

물론 종교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던 중세시대를 생각하면

웃는다는 인간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행위조차도

신의 섭리에 반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장서관은 얼마 전에 읽은 보르헤스의 '픽션들'의

바벨의 도서관에서 영감을 얻었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의 모든 책이 담겨 있는 도서관에서 모든 책 중의 책을 찾는 얘기인 바벨의 도서관은

분명 이 책의 장서관과 밀서의 모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번역한 이윤기씨의 노력도 감탄스럽다.

'그리스 로마신화'로도 유명한 그가 이 책을 몇 번이나 재번역을 했다는 점,

특히 강유원 박사 등 다른 사람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 수정했다는 점은

다른 번역가들이 본받을 점이 아닌가 싶다. 

 

이 책 속의 장서관은 많은 의미를 시사한다.

세상의 가장 큰 지식의 보고이면서도

이에 대한 접근을 철저히 통제하고 독점하여 대중과 공유하지 않으려는 특정세력의 독재가

결국 이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찬 수도사들의 죽음을 낳았다.

하지만 소수의 철옹성같은 통제도 결국 다수의 정당한 힘 앞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법

그리고 종교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어떤 종교를 믿고 안 믿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교를 통해 얼마나 사람들이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종교는 분명 신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일부 광신도(?)들에 의해 자행된 끔찍한 전쟁과 학살들은

인류 역사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종교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들이 과연 신의 뜻일런지...

그런 짓들을 할바에야 신도 종교도 없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싶다.

느닷없이 존 레논의 'imagine'이 듣고 싶어진다.

 

중세의 종교와 사회 등을 사진을 찍은 듯 담아내어

팩션 열풍을 일으키며 요즘 등장하고 있는 아류(?) 팩션들의 원조인 이 책은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뿐만 아니라 

온갖 학문의 집대성으로서 학문적인 가치도 충분해 꼭 한 번 읽어 볼 책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