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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ㅣ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평점 :
보르헤스의 환상적 사실주의를 잘 보여주는 대표작
새내기 시절 수강한 강의 땜에 처음 읽게 되었던 이 책을
10년도 지난 지금 다시금 보게 된 것은
그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 나서이기도 하지만
몇 번 시도하다 덮은 책에 대한 정복욕이 생겨서이기도 하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 보르헤스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그 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보르헤스라는 작가의 위상이 그 정도인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는데 수 차례의 시도와 포기, 수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은
내용의 난해함에도 그 이유가 있지만
수 많은 각주와 역주로 뒤 덮여 정말 책 읽기가 괴로웠다.
또 한가지 어려움은 역시 낯선 남미의 지명, 이름 등이 쏟아져
이 책을 읽는 동안 온통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 같았다.
이 책은 1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과 2부 '기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가 난해한 단편들이 많았던 반면 2부는 상대적으로 이해가 쉬워 수월했다.
허구의 인물이 쓴 허구의 책에 대한 얘기, 또는 실존하는 작가의 허구의 책 얘기 등
소위 가짜 사실주의가 거의 모든 단편들에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작가가 전달하려는 바를 이해하긴 솔직히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허버트 쾌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 등에서
독창적인 창작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상징주의를 잘 표현한 작품들로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치 복권 당첨(?)에 비유한 '바빌로니아의 복권'과
세상의 모든 책을 가진 도서관에 있는 책 중의 책 이야기 '바벨의 도서관' 등이 있는데
재미와 동시에 인간과 삶에 대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마지막으로 추리소설의 형식을 갖춘 단편들이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미스터리 구조의 단편으로는
폭격을 가할 도시를 알리기 위해 도시와 같은 이름의 인물을 암살하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얼굴에 난 상처의 유래와 뜻밖의 반전을 담은(서술트릭의 기원이라 할만한) '칼의 형상'
배신자가 영웅으로 변신하는 '배신자와 영웅과 관한 소고'
정교한(?) 마름모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죽음과 나침반'
사형집행의 순간에 기적적(?)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비밀의 기적' 등
많은 단편이 미스터리 소설이라서 그나마 난해한 단편들에서
소요된 엄청난 시간을 만회할 수 있었다.
보르헤스의 글쓰기에 대한 견해는 서문의 아래 구절에 잘 드러난다.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정신나간 짓이다.
단 몇 분에 걸쳐 말로 완벽하게 표현해 보일 수 있는 어떤 생각을
500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어뜨리는 짓. 보다 나은 방법은
이미 그러한 생각들을 담고 있는 책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
하나의 코멘트, 즉 그것들의 요약을 제시하는 척하는 것이다.'
즉 그는 장황한 묘사나 잡담(?)으로 페이지만 채우는 장편보단
바로 정곡을 콕 찌르는, 그리고 그 방법론으로 기존의 다른 책들을
인용하는(또는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으로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장편, 대하소설을 쓰는 작가들에 대한 모독이랄 수도
있는 그의 자신감에 넘친 주장이 일견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이 책에서 그걸 확인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난해함 속에서도 묘한 희열을 안겨주는 주옥같은 단편들로
구성되어 문학과 사상에 있어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평생의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보낸 보르헤스의 삶 역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