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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1월
평점 :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문열 작가의 책은 직접 읽어본 게 하나도 없었다. 영화로 만들어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을 본 적이 있지만 일반 소설들은 물론 삼국지 등 번역본도 만나지 못했는데 김삿갓
으로 유명한 김병연의 삶을 그린 이 책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평생을 떠돌이 방랑시인으로 살았던
김삿갓에 대해선 전설처럼 전해지는 얘기들만 대략 알고 있는 상태인데 이 책에선 과연 그의 삶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궁금했다.
얘기는 김삿갓의 집안이 몰락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역적이 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나게 되는데 김삿갓의 부친은 그와 형을
황해도 곡산에 사는 면천노비 김성수의 자식들로 위장시켜 목숨이라도 구하게 한다. 하루 아침에 세도가
도련님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 노릇을 해야 했던 김삿갓은 그나마 멸문의 처분이 거두어져 부친이
형제를 데리러오면서 조금은 삶이 나아질 것 같았지만 한 번 대역 죄인의 집안이란 주홍글씨가 새겨진
이후로는 체제의 보복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의 부친이 재기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보지만 허사로
돌아가면서 일찍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와 형제들은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게 되는데
어딜 가나 그들의 정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져 곤혹을 치르곤 했다. 형이 일찌감치 모든 걸 체념하고
농사꾼이 된 반면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김삿갓은 계속 글공부를 하며 입신양명의 기회를
노리는데 시골 백일장에 응시했다가 자신의 조부에 대한 시제를 받고는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토로하는
글을 썼다가 얼떨결에 장원이 되고 만다. 일반적으로 김삿갓이 조부인 줄 모르고 비방하는 글을 썼다가
나중에 알고 충격을 받아 방랑생활을 시작했다가 보고 있는데 작가는 김삿갓이 조부인 줄 알면서도
잘못된 선택을 한 조부로 인해 쌓인 원망과 분노를 쏟아낸 것으로 보고 있다.
암튼 이 사건을 계기로 그가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는데 그가 방랑생활을 하던 중
취옹과의 만남이 온전한 시인으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핵심 지역인
다복동에서 그의 조부를 알던 원명대라는 남자를 만나 그동안 자신이 알던 조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알게 되자 그동안 대역 죄인의 자손이란 벗어날 수 없던 굴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다.
이런 중요한 국면들마다 그의 작풍도 변화를 겪게 되는데 심지어 산 속에 숨어 큰 일을 도모하는
집단에게 잡혀 그들의 선동가를 만드는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헛된 선동
만으로는 부질없음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고 이후 시인의 아들 익균과 시인의 마지막 사랑 얘기로
마무리를 한다. 김삿갓에 대해선 방랑시인으로만 막연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니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시인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작가는 김삿갓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고도 볼 수
있었는데 입신양명을 꿈꾸다 좌절하고 문학의 길로 들어서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한 점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마지막에 작품 해설이 상세하게 되어 있어 놓치고 지나쳤던 부분들을 다시 되새겨볼 수
있었는데 30년 전에 나온 작품이지만 이문열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장식하기에는 충분한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