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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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상실은 많은 소설, 영화, 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단기 또는 장기 기억 상실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이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 때문에 진부한 소재임에도 사골처럼 계속 우려먹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기존에 종종 사용되던 설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알고 보니 이 책의 저자인 

고바야시 야스미는 전에 만났던 '앨리스 죽이기'의 작가로 고전이라 할 수 있던 '앨리스 죽이기'를  잔혹 미스터리로 재탄생시켰던 바 있어 이번에는 과연 어떤 솜씨를 보여줄지 기대가 되었다.


이 책에선 인류 전체의 기억이 단 10분 정도만 유지된다는 설정으로 얘기가 진행된다. 딱 영화 '메멘토'가

연상되는 설정인데 '메멘토'와는 달리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상황을 겪게 돤다는 점이 확실히 다른 

부분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혼란이 발생하는데 여고생 유키 리노는 자신의 상황을 계속 기록으로 남겨

나름의 현명한 대처를 한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근무하는 리노의 아버지도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몰라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여러 사람들이 지혜를 모아 위기를 간신히 넘긴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는 이 책에서의 인류 전체의 단기 기억 상실 사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 적응의 동물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이런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외부

기억 장치를 활용하기 시작한다. 쉽게 말하면 뇌가 잃어버리는 단기 기억을 반도체 메모리에 저장시켜

놓는 방식이었는데 요즘 우리가 흔히 쓰는 USB나 외장 하드에 기억이 저장되어 언제든지 몸에서 뺏다

꽂았다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대두하기 시작한다. 메모리 

속에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 담겨 있다 보니 이를 다른 사람 몸에 꽂으면 남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되고 심지어는 메모리만 옮겨 심을 육체를 확보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몸과 기억이 따로 노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이용한 각종 범죄도 벌어지게 된다. 남의 기억을

빌려 시험을 본다거나 하는 사소한(?) 일부터 메모리 제조사의 실수로 쌍둥이의 메모리가 잘못 복제

되어 발생하는 혼란, 교통사고를 당한 일가족 중 살아남은 몸에 다른 가족의 메모리를 꽂아 대신 삶을

살아가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메모리를 돌려 사용하거나 잠시 몸을 빌려줘서 죽은 사람의 메모리를

꽂게 해주는 사업이 번성하는 등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얘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기억을 이 책에서처럼 메모리에 저장해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세상이 언젠가 올 지도 모르겠지만

단기 기억 상실이라는 흔한 소재를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변주해내는 저자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게

되었는데 기억이 10분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 미리 엿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상상력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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