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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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이라는 제목과 젤리 사진이 들어간 표지를 봤을 때 딱 감이 왔다.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낙지 살인사건과 비슷한 내용이 아닐까 싶었는데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 낙지 살인

사건에 대해 별 관심이 있진 않아서 보도된 막연한 내용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저자는 낙지를

젤리로, 피해자와 범인의 성별을 서로 바꾸었을 뿐 기본적인 스토리는 유사한 내용의 얘기를 들려준다.

 

도진기 작가의 책들은 거의 다 봤는데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나 백수 탐정 진구 시리즈 모두 내가

좋아하는 본격 추리소설 스타일이어서 항상 믿고 보는 작가였다. 그가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가

되어 쓴 첫 번째 작품인 이 책은 예상 외로 판사가 주인공인 법정소설인 데다 실제 사건을 거의 그대로

가지고 와서 과연 어떤 얘기가 담겨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연인사이인 남녀가 모델에서 술을 마시다가

남자가 젤리가 목에 걸려 질식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고 사고라만 여겨졌뎐 사건은 여자가 남자에게

거액의 생명보험을 들어 수령하면서 살인사건으로 변모한다. 이 사건을 맡은 1심 재판부 재판장인

현민우 부장판사는 직접증거가 없고 정황증거만 있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심하다가 

배석판사들과의 합의과정에서 두 배석판사가 무죄 의견임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형사소송법상 대원칙 중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유죄의 증명은 이 책의 제목처럼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의 증명을 요한다. 이런 형사소송의

원칙들은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냈던 인류의 과거 역사를 반성하는 측면에서 만들어진 법조인이

지켜야하는 기본 원칙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무고한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 않기 위해서

유죄여야 할 범인들에게 법의 단죄를 피할 구멍(?)을 만들어준 셈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원칙을

철저하게 관철시키다 보면 종종 국민의 법감정과는 괴리된 판결들이 나오게 된다. 이상적으로는

당연히 이런 원칙들을 준수해야 억울한 사람이 발생하지 않지만 현실에선 악랄한 범인들이 이를

악용하다 보니 원래 이런 원칙들을 도입된 취지가 무색한 경우들이 발생하고 만다. 이 책에서

현민우 부장은 배석판사들과 합의에서 무죄 2 : 유죄 1로 무죄를 선고해야 함에도(재판부의 판사는

모두 동등한 표결권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감정이 시키는 대로 피고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재판부의 합의는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에 배석판사들이 얘기하지 않아서 대충 무마되긴 했지만

엄연히 법률 위반이고 판사로서의 자질 자체가 문제가 될 엄청난 사고를 친 것인데 결국 항소심에서

1심이 파기되고 무죄가 되어 그대로 대법원에서 확정되고 만다. 여기까진 어떻게 보면 좀 튀는 판사가

자신의 소신(?)대로 부장판사로서의 권한을 남용했다가 상급심에서 바로 잡혀진 사건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자신의 판결이 맞다는 확신을 가진 현민우 부장판사는 피고인이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세상을 활보하는 걸 두고 보지 못하고 피해자의 누나에게 접근해 피고인을 단죄할 다른 방법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이런 그의 돌발행동은 피고인에게 덜미를 잡혀 오히려 협박을 당하게 되는데...

 

판사 출신이라 실제 법원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외부 사람들은 잘 모르는

판사라는 직업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그려지는데 막중한 권한을 가진 판사지만 인간으로서의 한계도

분명히 있기에 결코 쉬운 직업이 아니고 아무나 해서도 안 되는 직업인 것 같다. 특히 형사사건에선

여러 증거법적인 제한이 있다 보니 이 책에서와 같은 사건을 맡게 되면 정말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엄청난 고민을 할 것 같다. 사실 진실이 뭔지는 신이 아닌 이상 알기 어렵지만 인간으로서 가지는

보편적인 감정을 무시하고 냉철한 법리적인 판단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피고인은 물론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결정을 한다는 게 판사가 짊어져야 할 숙명인 것 같다. 기존에 만났던 

작품들과는 사뭇 스타일이 다르고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뻔한 스토리 전개로도 볼 수 있어

약간 실망할 수도 있는데 법정을 벗어난 후반부의 스토리와 반전은 진실을 찾고 정의를 구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도진기 작가가 변호사로 변신한 후 첫 작품이라 기대가

컸는데 뜻밖에 과거에 이미 써놓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사실 실제

사건이 있다 보니 저자도 분쟁에 휘말릴까봐 직접적으로는 언급을 하진 않지만 그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들에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듯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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