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자전적 소설,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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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키의 자전적 소설, 첫번째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이어 두번째 소설인 <1973년의 핀볼>을 읽었다. <1973년의 핀볼>은 예전에 읽었던 책이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나는 예전에 이 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키의 모든 소설이 상실에 대해 이야기 하듯이, 이 책 역시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깊은 상실의 경험이 없이는 이 책을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사랑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사랑이야기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상실의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인식은 지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과 감각또한 인식의 주된 주체이다. 우리는 경험하지 않은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은 주인공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핀볼기계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핀볼기계와 재회한다. 그리고 대화를 나눈다. 낡은 전선의 장례식을 치룬다. 나는 예전에는 하루키 책을 읽으면서도 상징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는 많은 상징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의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제 그 상징들을 이해한다. 마치 내 이야기인양.

 

 고마운 소설이었다. 정말 고마운 소설이었다. 아픔이 치유되는 듯했다. 이 책을 통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상실'은 나의 정체성의 한 축이 되어버렸다. 땔래야 땔 수 없다. 거부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다. 숨길 수도 없다. 그것은 항상 엄연히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나의 '상실'을 마주하게 하고, 치유한다. 따뜻한 위안을 준다. 춥고 어두운 곳에서 나를 꺼내주고 담요를 덮어준다. '상실'을 밖으로 꺼내어 장례식을 치뤄준다.

 

 하루키의 소설이 참 고맙다. 하루키씨가 참 고맙다.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 대부분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 우체통, 진공청소기, 동물원, 양념통.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쥐덫. -p20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입구와 출구가 있어야 한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p21

우리는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아주 예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때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p231

<1973년의 핀볼>은, 삶은 우리가 주인이 되어 전원의 스위치를 올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암시하는 소설이다. 입구는 출구요, 절망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굳은 시체에 열정 불어넣기를 반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썩어가는 몸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환상을 끝없이 다르게 반복한다. 마치 핀볼 이야기를 반복하듯이. -작품해설, 권택영,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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