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2018.7.8.


《강원도의 맛》

전순예 글, 송송책방, 2018.5.28.



강원도 사투리가 더러 섞인 《강원도의 맛》을 읽으며 생각해 본다. 강원말을 더러 섞기보다는 강원말을 바탕으로 서울말을 곁들이는 얼거리로 이야기를 풀어내어도 좋았으리라고. 글쓴이가 어릴 적부터 혀랑 눈이랑 손이랑 살갗에다가 마음으로 받아들이던 맛을 되새기면서 오늘날에 맞추어 새로 담아는 《강원도의 맛》이란, 시골 아이 입맛이자 시골 할머니 삶맛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엄마 손맛”을 말하는데, 우리는 “아빠 손맛”에다가 “할머니 손맛”에 “할아버지 손맛”에 “언니 손맛”에 “오빠 손맛”을 찬찬히 누린다. 저마다 다르면서 아름다운 맛을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배우고, 이렇게 새로 배운 길은 아이들한테 새삼스럽게 흐르면서 또다른 맛이 태어난다. 배우기에 가르칠 수 있고, 배워서 누리기에 물려줄 수 있다. 시골밥을 차리던 예전 아지매가 미원 같은 조미료를 넣고 싶지 않던 까닭이란, 또 미원 같은 조미료에 일찌감치 빠져들던 까닭이란, 늘 두 갈래이지 싶다. 몸이 먼저 알고, 마음이 속으로 안다. 화학조미료를 안 쓰는 맛이란, 몸을 살리는 맛을 찾고 싶겠지. 화학조미료를 쓰는 맛이란, 달달하거나 짭짤하면서 손쉬운 길로 가고 싶겠지. 어느 쪽이든 맛은 맛이고 삶은 삶이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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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 씨의 말 1 - 하하하, 내 마음이지 요코 씨의 말 1
사노 요코 지음, 기타무라 유카 그림,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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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56



내가 못생겼다고? 거울이나 보고 얘기하시지!

― 요코 씨의 말 1 하하하, 내 마음이지

 사노 요코 글·기타무라 유카 그림/김수현 옮김

 민음사, 2018.4.20.



못생겨도 쾌활하게 남들 눈을 똑바로 봐 가며 살아온 나. “못생겼으니 이쪽 보지도 마.” 소리를 들어도, “거울이나 보고 얘기하시지!” 하고 받아쳐 주던 나. (사람들이 성형) 수술 후에는 다들 애매하고 비슷한 얼굴이 된다. 아아, 세상이 밋밋해진다. 요철이 있고 그래야 비로소 세상살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마음에 안 들어. (32∼34쪽)



  여기 못생긴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못생긴 사람이 아닌, 둘레에서 못생기다고 놀리는 말을 듣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 이때에 못생긴 사람은, 아니 둘레에서 못생겼다며 놀리는 말을 듣는 사람은 어떻게 대꾸하면 좋을까요?


  그림책을 그리던 사노 요코 님은 이제 이승에 없지만, 사노 요코 님이 남긴 이야기는 있어서, 이 이야기에 그림을 새로 붙인 《요코 씨의 말》(사노 요코·기타무라 유카/김수현 옮김, 민음사, 2018)이라는 책이 1·2권 나란히 나왔습니다. 두 권 가운데 첫째 권을 펴면 글쓴이가 얼마나 스스로 씩씩하게 삶을 지어 왔는가를 새삼스레 엿볼 수 있습니다.



숙모에게 “요코, 나이도 그만큼 먹고 아이도 있으면서 엉덩이 딱 붙는 옷이 뭐니. 차도 튀는 노란색. 좀 평범한 색으로 하지 않고.”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하하하, 내 마음이지. 누구 피해라도 준대?” 하고 웃었답니다. 듣는 말은 똑같았는데 어째서 이때는 “하하하, 내 마음이지.”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걸까요. 저는 언제나 “하하하, 내 마음이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54∼55쪽)



  사노 요코 님은 할머니로서 저승으로 가셨으니 저는 “사노 요코 할머니”라 이릅니다. 사노 요코 님 그림책을 좋아하는 우리 집 아이들한테도 이녘은 “사노 요코 그림책 할머니”입니다. 그러니까 사노 요코 할머니는 젊거나 어릴 적부터 둘레 눈치나 눈길이나 말은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대수로운 눈이나 말이란 바로 스스로 마음에서 길어올릴 노릇이라고 여겼대요.


  이리하여 ‘못생겼다’라는 말은 남이 나한테 할 수 없고, 내가 스스로 미워하는 마음일 적에 스스로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누가 아무리 “넌 참 못생겼어!” 하고 혀를 쪽 내밀든 말든 쳐다볼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저 하하하 웃어넘기면서 “너야말로 거울이나 보시지!” 하고 대꾸하면서 제 할 일을 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는 아코와 둘만 있을 때 “왜 테루랑 각각 떨어져 살지 않아?” 하고 물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있지, 그 애가 없으면 살아가는 데에 소소한 탄력 같은 게 없어져서 허전할 것 같아.” 게으른 사람만 있거나 성실한 사람만 있다면 세상은 완벽해지지 않는다. (100∼101쪽)



  일본사람은 흔히 수수한 차림새를 좋아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본 살림살이를 못마땅히 여기는 일본사람이 제법 있다고 합니다. 성형수술을 하면서 사람들이 다들 비슷비슷한 모습이 되기보다는, 저마다 다르게 태어난 얼굴이나 모습 그대로 스스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지요.


  사노 요코 할머니도 이런 이웃 가운데 한 분이지 싶습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맞추어 주지 않고, 스스로 꿀 꿈을 그립니다. 남들이 가는 길대로 좇지 않고, 스스로 짓고 싶은 살림을 생각하면서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게다가 씩씩하게, 또 노래하고 춤추는 신나는 걸음으로, 또 까르르 하하하 활짝 빙그레 웃는 몸짓으로.



“나는 네 큰어미 간병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단다.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진심으로 네 큰어미에게 감사하고 있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모순에 혼란을 느꼈다. 소박한 생활을 해 온 큰아버지가 다다른 경지가 나를 동요시켰다. (172∼174쪽)



  《요코 씨의 말》을 읽다 보면, 예쁜 우표를 모으는 맛에 푹 빠졌다가, 이 예쁜 우표를 침을 발라서 글월을 띄우는 기쁨에 푹 빠진 이야기도 흘러요. 그런데 어느덧 할머니 나이가 되어 머리가 가물가물한 나머지, 그만 사노 요코 할머니는 이녁 스스로도 모르게 ‘사노 요코가 사노 요코한테 편지를 썼다’지요. 우체국 일꾼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사노 요코가 사노 요코한테 쓴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하고요.


  이런 일을 놓고 언뜻 보기에 ‘건망증도 대단하구려!’ 하고 여길 수 있지만, 사노 요코 할머니는 이 또한 대수로이 여기지 않으면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 뒤로도 더러 ‘나도 모르게 내가 나한테 편지를 썼다’고 해요. 나도 모르게 내가 나한테 쓴 편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요? 아마 그 이야기는 《요코 씨의 말》이라는 책에 알게 모르게 깃들었지 싶습니다. 2018.7.1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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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님은 알고있을지도 몰라
아사쿠라 세카이이치 지음, 오주원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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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화책시렁 55


《달님은 알고 있을지도 몰라》

 아사쿠라 세카이이치

 오주원 옮김

 중앙북스

 2010.3.31.



  내가 모르는 일을 네가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어쩌면 알는지 몰라요. 서로 마음을 읽는 사이라면, 네 마음을 내가 읽고, 내 마음을 네가 읽으니, 서로 미처 헤아리지 못한 대목을 넌지시 짚어 줄 만합니다. 동무가 되는 길이라면, 이웃으로 지내는 삶이라면, 바로 마음읽기가 징검돌이지 싶습니다. 《달님은 알고 있을지도 몰라》에는 여러 숨결이 나옵니다. 사람만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닌 여러 숨결은 사람하고 똑같이 말을 섞습니다. 어쩌면 이들 다른 숨결은 사람이 ‘사람말 아닌 숲말이나 별말’을 할 줄 모르기에 이를 조용히 헤아려서 사람말을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어요. 사람은 사람만 생각하느라 바빠서 숲말이나 별말은 도무지 모르거나 배우려 하지 않을 수 있을 테지요. 그나저나 달님은 알까요? 별님은 해님은 꽃님은 알까요? 그리고 우리 마음에 깃든 따사로운 숨님은 알까요? 우리는 서로 무엇을 알면서 말을 섞을까요? 우리는 날마다 무엇을 바라보거나 생각하면서 어깨동무를 하는가요? 바람이 불어 구름이 흐르고, 구름이 흐르며 비를 뿌리고, 비가 내리며 냇물이 불고, 냇물이 불면서 숲이 촉촉합니다. 이다음은 어떤 길일까요?



“실은 바로 바다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치료에 시간과 돈이 좀 든다고 해서 회사를 열게 된 거지. 운전이 적성에 맞기도 했고.” (22쪽)


‘우주로 훌쩍 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37쪽)


‘‘7’은 찾아서도, 기다려서도 안 돼. 끌어와야지!’ (122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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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야샤 19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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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시렁 54


《이누야샤 19》

 타카하시 루미코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2002.7.25.



  아이는 자라는 동안 끝없이 묻고 되묻습니다. 아이가 묻는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는지 몰라 힘들다는 어버이가 있지만, 꼬박꼬박 대꾸하는 어버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 물음에 빙그레 웃음을 짓고는 “그럼 누구보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새로 묻는 어버이가 있어요. 아이는 모든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 수 있습니다. 어버이는 어떻게 여기는지 궁금하기에 물어요. 그래서 어버이라면 먼저 아이 생각을 듣고서, 새로 생각을 지펴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지 싶습니다. 함께 자라는 사이인 아이요 어버이입니다. 《이누야샤》 열아홉걸음에 이르면 이누야샤가 더없이 큰 담벼락에 부딪힌 이야기를 다룹니다. 열여덟걸음까지도 늘 담벼락에 부딪히던 이누야샤이지만, 이제 훨씬 큰 담벼락하고 맞서야 합니다. 다만 둘레에서는 이누야샤한테 토를 달지 않아요. 길을 밝혀 주지도 않습니다. 그 길이 괴롭고 그 담벼락이 높다면 더 파고들어서 스스로 알아내어 새롭게 일어서라는 뜻을 밝힐 뿐입니다. 이누야샤한테는 저를 아끼는 벗님이 둘레에 있으니,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되풀이하면서 틀림없이 제 길을 찾겠지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놈은, 죽일 가치도 없다.” (155쪽)


‘나는 인간을 사냥했을 뿐이야. 내가 되고 싶었던 요괴는, 내가 원했던 힘은, 이런 게 아니야!’ (160쪽)


“그러니까 가볍게 할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거잖아! 뭔가 있지?” “스스로 알아내야지.” (168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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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 늘리는 법 -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땅콩문고
박일환 지음 / 유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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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55



살림을 짓는 삶터에서 말꽃이 핍니다

― 어휘 늘리는 법

 박일환

 유유, 2018.3.24.



말을 안다고 할 때는 말에 담긴 문화나 정신의 뿌리까지 알아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보니 잘못 쓰거나 쓰지 말아야 할 말까지 마구잡이로 쓰는 일이 발생한다. (138쪽)


성희롱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까지는 여성 앞에서 외모에 관해 성적인 표현을 하거나 음담패설을 하는 것,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 정도는 짓궂은 장난일이언정 범죄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26쪽)



  일본 지식인은 1800년대에 서양을 배우려고 무엇보다 말을 곰곰이 살폈다고 합니다. 일본사람한테 영어나 프랑스말이나 독일말을 그대로 책에 찍어서 읽힐 수 없을 테니, 이런 바깥말을 제 나라 사람들이 손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낱말 하나에 온힘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태어난 ‘일본 한자말’ 가운데 하나로 ‘문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를 어느 자리에서나 흔히 쓰지만, 이 낱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하고 살핀 끝에 일본 지식인이 지었는지를 가늠하지는 못합니다.


  《어휘 늘리는 법》(박일환, 유유, 2018)을 읽으면 “말을 안다”고 하려면 “말에 담긴 문화나 정신”이 어떤 뿌리인가를 함께 알아야 한다고 밝힙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문화나 정신, 그러니까 살림하고 넋을 모르고서야 말을 안다고 할 수 없어요. 한 나라나 겨레뿐 아니라, 한 고장이나 마을이 살아온 결이나 넋을 모른다면 껍데기로만 말을 안다고 하겠지요.



방과 후에 모든 학생이 학교에 남아서 학습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 자율이라는 말에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타율 학습’이 아닌 ‘자율 학습’이라는 말을 사용한 까닭은 그렇게 해야 자신의 부당한 처사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40쪽)


학생 보호자로 아버지와 형을 올려놓은 ‘학부형’이라는 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이다. 학부형을 버리고 ‘학부모’를 쓰는 것은 단순히 낱말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낡은 인식과 결별하는 행위이다. (52쪽)



  ‘성희롱’이라는 말이 태어나고, ‘성추행’이라는 말이 태어나며, ‘성폭력’이라는 말이 태어납니다. 이런 말이 태어나기 앞서 가부장제가 휘두르는 폭력이나 권력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어려웠습니다. 말을 새롭게 지어서 쓰면서 우리 마음이 자라고, 우리 삶이 거듭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 갇히거나 묶인 사슬이 단단합니다. 《어휘 늘리는 법》이 찬찬히 짚듯, ‘자율 학습’은 자율이 아닌 타율로 하는 일입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라 해야 옳지, ‘학부형’은 옳지 않습니다. 교사는 ‘교사’일 뿐, 스스로 ‘선생님’이라는 ‘-님’붙이 말을 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얄궂다 싶은 말이 안 사라질까요? 외려 얄궂다 싶은 말은 왜 더 불거지기도 할까요? 지난날 ‘민주정의당’이 민주나 정의를 지켰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명박·박근혜를 내세운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은 참말로 이 나라가 한나라 되도록 하거나, 새로운 누리가 되도록 하거나, 자유로운 한국이 되는 길을 걸었을까요? 정당이 한 일을 섣불리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만, 이름하고는 동떨어진 길을 걸은 발자국이 짙다고 말할 수 있어요. 스스로 잘못하는 일을 가리거나 숨기려고 ‘보거나 듣기 좋은 말’이라는 껍데기를 쓴다고 할 만합니다.



수입 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용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을까?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차원에서 일본말 몰아내기 운동은 열심히 했지만 서양말을 우리말로 바꾸려는 노력은 그에 비해 한가한 편이었다. (117쪽)


어휘 누락은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이 매우 심한 편인데, 전문가도 알기 힘들 것 같은 어려운 전문어는 시시콜콜 찾아 올린 반면 일상어나 생활어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외면하고 있다. (120쪽)



  중국을 섬기던 봉건계급 조선에서 쓰던 중국 한문,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 군홧발로 퍼진 일본 한자말, 뒤이은 군사독재에서 억눌리면서 퍼진 영어, 이렇게 세 갈래 말이 한국말에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치우려는 데에는 조금 애썼지만, 중국 한문은 높임말로 여기는 버릇을 아직 걷어내지 못하며,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영어를 알맞고 쉬우며 즐거운 한국말로 옮기는 일’은 엄두조차 못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휘 늘리는 법》이라는 책은 우리가 말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전을 달달 외우는 길로 말을 알지 말고, 말이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면서 퍼지는가 하는 살림자리를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생각해 보아야지요. 어린이가 중국 한문 말씨를 쓰면 어떻게 보일까요? 푸름이가 일본 말씨를 쓰면 어떻게 보일까요? 그리고 우리 어른이 갖은 영어를 한국말로 안 옮기고 그대로 쓰면 어떻게 보일까요? 우리한테 우리 삶이 제대로 뿌리를 박는다면, 우리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웃이 되는 말을 상냥하면서 쉽고 부드러울 뿐 아니라 즐겁고 사랑스레 쓰리라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말살림은 저절로 넉넉하게 펼 테고요.



청년이건 기성세대건 어휘를 늘릴 필요가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어휘를 늘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양과 질을 늘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양상은 대부분 언어 행위를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2쪽)



  1800년대 일본 지식인이 서양말을 ‘문화’나 ‘사회’로 옮겼다면, 2000년대를 사는 한국사람으로서 이 일본 한자말을 곰곰이 살펴서 새롭게 한국말로 옮겨 보고 싶습니다. 영어 ‘culture’하고 ‘society’를 여러모로 살피면, 또 이를 한자에 담은 ‘文化’하고 ‘社會’를 곰곰이 따지면, 새 한국말로는 ‘살림’하고 ‘삶터’라고 할 만하지 싶습니다. 스스로 지어서 가꾸는 모든 것이니, 이때에는 ‘살림’입니다. 사람이 모여서 이룬 자리이니, 이때에는 ‘삶 + 터’인 삶터가 될 테고요.


  그래서 음식문화·의복문화·거주문화는 ‘밥살림·옷살림·집살림’처럼 쓸 수 있습니다. 언어문화는 ‘말살림·말글살림’이라 할 수 있어요. 책문화라면 ‘책살림’으로, 교육문화라면 ‘배움살림’이 됩니다.


  그나저나 《어휘 늘리는 법》을 읽으며 몇 군데는 좀 바로잡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ㄱ. ‘봄까치꽃’이라는 말도 소개하고 싶다. 이 말은 아직 국어사전에 오르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 … 누군가가 ‘봄까치꽃’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고, 꽃을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이 새 이름이 알음알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67쪽)

ㄴ.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지은이(최종규)는 이오덕 선생의 제자를 자처하여 20여 년 동안 우리말 지킴이로 일해 왔다. 그런 지은이가 우리말을 제대로 살려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전을 펴냈다. (148쪽)



 ‘봄까치꽃’이라는 풀이름은 이해인 님이 쓴 시 때문에 퍼졌는데요 ‘봄까지꽃’이라는 이름을 잘못 받아들여서 퍼지고 말았습니다. 겨울이 저물 무렵 피어나서 봄이 저무는 철에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해서 ‘봄까지꽃’입니다. 다른 봄풀이나 봄꽃은 여름으로 저물어도 한동안 꽃을 피우거나 살지만, 봄까지꽃만큼은 봄이 끝나며 함께 숨이 끊어져요. 이런 결을 살피며 붙은 ‘봄 + 까지 + 꽃’이란 이름인데, 이를 ‘지’ 아닌 ‘치’로 잘못 붙인 시가 퍼지면서 ‘봄하고 까치는 아무 얽힌 일’이 없는데 꽃이름도 얄궂게 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오덕 선생의 제자를 자처하여”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이 대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저는 이오덕 어른이 돌아가신 뒤에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을 갈무리해서 새로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제가 한 일은 “이오덕 유고·원고 정리”이니, 제가 이오덕 어른 제자일 수 없어요. 그리고 저는 “우리말 지킴이”가 아닌 “사전 집필자”로 살았습니다. 2001년 1월부터 세 해 즈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자료조사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는데요, 이 일에 앞서 한 일도 ‘앞으로 새 한국말사전을 쓰려는 길’이었습니다.



  다음 두 대목을 놓고는 박일환 님이 보태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댓글’하고 ‘옆지기’라는 낱말을 다룬 꼭지가 있는데, 두 낱말이 퍼진 까닭을 글쓴이가 잘 모르시는 듯해서 살을 보태려고 합니다.



ㄷ. 언젠가부터 ‘댓글’이라는 말이 쓰이더니 이제는 ‘리플’을 완전히 밀어냈다. 단순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지금 이 순간도 댓글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이들이 처음 ‘댓글’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66쪽)

ㄹ. 요즘에는 ‘배우자’라는 한자어를 풀어 쓴 옆지기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늘고 있다. (141쪽)



  1990년대 첫무렵에 처음 피시통신이 피어났어요. 그때에는 업체마다 하나같이 ‘re’라는 영어를 알파벳으로 썼습니다. 요즈음도 여러 포털은 누리글월에 답장을 쓸 적에 ‘re’가 뜨도록 하는데요, 하이텔·천리안은 좀 더디었지만 나우누리라는 곳은 그때에 사람들 뜻을 널리 받아들여서 ‘댓글·덧글·답글’ 가운데 어느 말을 써야 좋은가를 살폈고, 나우누리가 하이텔·천리안 못지않게 사랑받으면서 포털 이름도 ‘나우누리’처럼 한국말로 쉽고 재미있게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게시판에 붙이는 이름도 훨씬 쉽고 부드러우면서 재미있게 붙일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느껴요. 나우누리 운영관리자는 모임지기라든지 글지기를 퍽 자주 만나서 이름을 어떻게 고치거나 붙여야 좋은지 물었고, 이를 바로 받아들여 주었는데, 참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그무렵 다른 분들은 으레 ‘re’만 쓰셨지만 저는 ‘덧’이나 ‘덧글·댓글’이라고 붙여서 덧글·댓글을 적었습니다.


  나우누리 운영관리자는 ‘댓글’이 ‘對’라는 한자를 넣은 글이냐고 묻기도 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국말에 ‘대꾸하다’가 있습니다. 대꾸하는 글이 댓글이고, “무엇에 대한 글”이 아니니, 한글이자 오롯한 한국말로 ‘댓글’이라 하면 되고, 다른 이가 덧붙이는 글이라는 뜻으로 ‘덧글’을 쓸 수 있다고도 보태어 말했어요.


  ‘옆지기’가 ‘배우자’라는 한자말을 풀어서 쓴 말이라고 《어휘 늘리는 법》이라 나오지만, 풀어서 쓴 말이 아닙니다. ‘배우자’는 부부가 그저 서로 가리키는 말일 뿐입니다. ‘옆지기’는 옆에서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새로 지은 낱말이고, 이 낱말을 누가 처음 지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그물코 출판사 대표님이 2004년에 이 말을 저한테 들려주었을 적에 참 어울리는구나 싶어서, 그때부터 제가 쓰는 글이나 책에 이 낱말을 잔뜩 써서 퍼뜨렸습니다.


  이러다가 ‘옆지기’도 좀 길구나 싶었고 새롭게 말을 지어야겠다고 여겨서 2013년에 ‘곁님’이란 말을 제 나름대로 처음으로 써 보았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은 서로 지킨다기보다 서로 아름다운 님으로서 사랑한다는 뜻으로 곁님이라 지었어요. 옆지기라는 낱말을 널리 퍼뜨린 사람으로서 한결 낫구나 싶은 낱말을 새로 지었기에 이제는 옆지기는 안 쓰고 곁님만 씁니다. 2018.7.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말넋/말삶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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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10-05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지기도 나쁘지 않지만 저도 곁님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

숲노래 2018-10-11 14:44   좋아요 0 | URL
말씀 고맙습니다.
‘곁님‘이란 말을 지은 보람이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