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시집을 한 권 사서 읽는데



  헌책방에서 시집을 한 권 사서 읽는데,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집을 처음으로 사서 읽은 사람 자국이 맨 뒤에 있다. 고등학교 1학년에 처음으로 책방마실을 했던 아이가 그날 겪은 일을 애틋하게 적었다. 아마 학교에서 모든 학생들한테 ‘학교 앞 책방’에 가서 책을 사는 ‘체험 교육’을 시킨 듯하다. ‘체험 교육’ 뒷이야기를 적었다고 할 수 있고, 이 글은 어쩌면 ‘숙제’일는지 모르는데, 숙제이건 아니건 퍽 상큼하다. 빨간 색연필로 빈 종이에 네모난 테두리를 그린 뒤 정갈하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은 글이다.


  처음 시집을 살 적에는 이런 글이 적힌 줄 몰랐다. 예전에 읽은 시집이지만 다시 읽어 보자는 생각으로 아예 책을 새로 장만했을 뿐이다. 삼현여고라는 학교는 어디에 있을까. 2003년에 4쇄를 찍은 시집이니 이 아이는 2003년에 여고 1학년 학생으로서 이 시집을 사서 읽었을까.



.. 처음 서점으로 들어갈 때, 정신이 없었다. 학교를 마치고 간 터라, 삼현여고 학생들로 북적댔다. 원래 나는 도서관의 분위기처럼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원했었지만, 학교 앞 서점인지라 무지 시끄러웠다. 좀 크고 조용한 서점으로 가서 여러 가지 책들을 보며 여유롭게 책을 사려고 했는데, 책을 사야 하는 날이 다가오니 여유로울 시간이 없었다. 처음 책을 사려고 교실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놓았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 제목이 진짜 맘에 들었다. 서점에 들어가면서 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앞 서점이라서 그런지 추천도서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둘러볼 틈도 없이 《아내에게 미안하다》라는 책을 잡았다. 아주 얇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속을 보니 시집이었다. 난 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책을 살려고 고민을 시작했다. 긴 고민 끝에, 난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잡았다. 왠지 감동스러울 것 같은 제목!! 그런데 지갑을 보니, 돈이 없었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난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집으로 갔다. 그 다음날, 학교를 마치고 다시 서점으로 향했다. 역시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난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를 사려고 했는데, 책이 다 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긴 고민 끝에 《아내에게 미안하다》를 잡았다. 왠지 시집이 읽고 싶어졌기 때문에. 난 계산을 하고 나니 기분이 가뿐해졌다. 이 책을 꼭 다 읽고 싶다. 꼭! 다 읽을 것이다! ..  (1학년 ㅎㅎㅈ)



  고등학생이 스스로 책방에 가도록 이끌고, 책방에서 《아내에게 미안하다》 같은 시집을 골라서 읽도록 하는 학교는 몇 군데쯤 있을까. 중학생이, 또 초등학생이 ‘학교 앞 책방’을 드나들도록 이끌면서, 아름다운 책을 만날 수 있게끔 책을 이야기해 주는 교사는 몇 사람쯤 있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때에 학교에서는 ‘우체국 가기’라든지 ‘은행 가기’라든지, 여러 가지를 시켰다. 그런데, 그때에 ‘책방 가기’를 시켰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안 시켰지 싶다.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책방 가기’를 시킨 일은 없다. 더욱이,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보내면서 학교에서 우리한테 ‘어떤 책을 책방에서 찾고, 책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가르친 교사를 만나지 못했다.


  마음이 푸르게 빛나는 아이들이 책방으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겨, 푸른 숨결 깃든 책을 사랑스레 고르면서 삶을 밝히는 길을 스스로 찾는다면 참 아름답겠다고 생각한다. 4347.6.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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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 안경



  안경을 쓴다. 잔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안경을 쓴다. 책방지기 할배와 할매 모두 잔글씨를 보려 할 적에는 돋보기 안경을 쓴다. 잔글씨를 보기 어려운 만큼 책을 펼쳐 읽기에도 어렵다고 할 만하다. 그렇지만, 책방을 찾는 손님이 바랄 만한 책을 하나둘 건사해서 책시렁에 둔다. 예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나오고 새로 나오는 책들 가운데 책손한테 기쁨과 웃음과 보람을 베풀면서 책방살림 꾸릴 돈을 벌도록 해 줄 책을 고른다.


  책방지기가 돋보기 안경을 쓸 무렵, 책방을 오래도록 찾던 책손도 안경을 쓴다. 안경 없이 척척 책을 알아보아 갖추던 책방지기도, 안경 없이 척척 책을 골라내어 읽던 책손도, 다 같이 안경을 쓰고 새롭게 만난다. 4347.6.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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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을 까는 헌책방



  헌책방지기 할아버지가 콩을 깐다. 책손을 기다리면서 콩을 깐다. 처음 헌책방이 문을 열 적에 어떤 책손이 찾아왔고, 오늘은 어떤 책손이 깃드는가를 헤아리면서 콩을 깐다. 콩깍지는 책방 바닥에 놓는다. 콩알은 자루에 담는다. 푸른 빛깔로 잘 익은 통통한 콩알은 헌책방지기 할아버지 손을 거쳐 자루로 들어가는데, 헌책방을 그득 채운 책을 가만히 둘러본다. ‘우리는 어느 곳에 와서 무엇을 구경할 수 있을까?’ 하고 콩알이 서로 속닥속닥 이야기꽃을 피운다.


  콩내음이 책방에 퍼진다. 콩빛이 책시렁에 번진다. 콩을 까던 손길로 내가 고른 책을 받으시고, 콩내음이 묻은 손길로 책값을 셈하신다. 내가 고른 책마다 콩내음과 콩빛이 서린다. 4347.6.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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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아벨서점 전시관



  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 〈아벨서점〉은 2002년부터 ‘아벨 전시관’이라는 곳을 꾸렸다. 헌책방지기 일삯을 조금씩 떼어 모은 돈으로 전시관을 열었다. 시청에서도 구청에서도 동사무소에서도 ‘책 전시관’이나 ‘사진 전시관’이나 ‘그림 전시관’ 같은 곳을 마련하지 않았으나, 헌책방지기가 이런 전시관을 손수 나무질까지 해서 열었다.


  2014년을 돌아보아도 시청이나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살림돈을 들여 조촐한 ‘마을 전시관’을 꾸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전시관 하나 여는 돈은 얼마나 들까? 수십 억이나 수백 억이 들까? 아니다. 십 억쯤 들인다면 참 멋지면서 재미난 곳을 새로 지을 수 있을 텐데, 십 억까지 아니어도 해마다 일 억씩 들여 동네마다 아름다운 전시관을 하나씩 꾸밀 수 있다. 동네 한복판에 있는 작은 빈집을 고치면 된다. 문화와 삶이 늘 하나인 줄 깊이 헤아리면서, 문화와 삶을 가꾸는 고운 책터와 쉼터를 사랑하려는 마음을 품으면 된다.


  인천마실을 하면서 ‘헌책방 아벨서점 전시관(배다리, 작은 책, 시가 있는 길)’에 한 발 들여놓으면 언제나 마음이 푸근하면서 즐겁다. 살그마니 휘 둘러보면서 마음속으로 우러나오는 빛이 있다. 전시관은 예술 작품을 보는 곳이 아니다. 전시관은 삶을 보고 사랑을 읽으며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곳이다. 4347.5.2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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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명함



  책방 명함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책방이 사라지니까. 아니, 자그마한 책방이 사라지니까. 커다란 책방에 명함이 있을까? 이를테면 교보문고 명함이나 영풍문고 명함이 있을까? 누리책방인 알라딘이나 예스24에 명함이 있을까?


  책방 명함은 자그마한 책방에서 쓰던 쪽종이이다. 작은 책방은 책갈피(책살피)에 책방 이름을 조그맣게 박아서 나누어 주곤 했다. 커다란 책방도 커다란 책방 이름을 큼직하게 박아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커다란 책방은 커다란 종이봉투까지 있다. 작은 책방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종이봉투 또는 종이가방이다.


  아주 작지는 않고 아주 크지도 않은 책방에서는 ‘책방 비닐봉투’를 쓰기도 한다. 웬만한 책방은 책방 이름을 새긴 비닐봉투를 ‘책방 명함’으로 삼기도 한다.


  동네마다 있던 작은 새책방에서는 명함을 거의 안 썼다. 왜냐하면, 동네 새책방이라 하더라도, 전화를 걸어 책을 주문하고, 책방에 앉아서 새책을 받으니까.


  책방 명함은 으레 헌책방에서 썼다. 헌책방은 새책방과 달리 ‘책을 사려면 집집마다 돌아야’ 하거나 ‘책을 찾으려고 고물상이나 폐지수집상을 돌기’도 한다. 그러니, 헌책방으로서는 명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동네를 돌면서 책방 명함을 뿌린다. 만나는 사람마다 명함을 건넨다. 집안에서 책을 치워야 한다면, 부디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해 주기를 바란다.


  지난날에는 동네마다 새책방이 많았고 헌책방도 많았다. 지난날에는 동네에서 읽은 책은 으레 동네에서 돌고 돌았다. 동네 새책방이 새로 나오는 책을 먼저 팔고, 동네 헌책방이 이 책들을 받아들였으며, 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이 책들을 사고 팔며 읽고 되읽으면서 마음을 살찌웠다.


  돈이 제법 넉넉하면 새책방을 찾는다. 돈이 좀 모자라면 헌책방을 찾는다. 비매품이라든지 도서관에서 버리는 책을 헌책방이 건사하기에, 돈이 제법 넉넉해도 ‘새책방에 없는 책’을 찾으려고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한다. 미군부대나 외국인학교에서 버리는 외국책을 만난다든지, 나라밖으로 떠나는 사람이 내놓는 값진 책을 만나고 싶어 헌책방으로 마실을 한다.


  이래저래 책방 명함은 쓸모가 많다. 아직 헌책방이 있다면, 아직 헌책방이 씩씩하게 동네마다 책삶을 밝히고 책빛을 가꾼다면. 4347.5.1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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