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와 연필 쥔 예쁜 이웃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4] 《山に生かされた日日》(民族文化映像硏究所,1984)



 삶도 사람도 온누리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집니다. 날마다 새로운 물건이 쏟아지고 새로운 소식이 퍼지며 새로운 기계가 태어납니다. 새로운 물건이 쏟아지면서 얼마 되지 않은 물건마저 낡거나 뒤떨어지거나 버려야 할 것으로 삼습니다. 새로운 소식이 퍼지며 지난날 소식은 파묻힙니다. 지난날 소식이 너무 많다 보니, 소식더미에서 허우적거릴 뿐, 무엇을 귀담아듣고 무엇을 눈여겨보며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잊습니다. 새로운 기계가 자꾸 태어나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손과 몸과 마음을 기울여 가다듬는 일거리가 스러집니다.

 제가 쓰는 디지털사진기는 캐논 회사에서 만든 450디입니다. 지난 2010년 여름에 이 사진기가 스스로 목숨을 다해 더는 쓸 수 없어 550디를 장만해 보았는데, 새 사진기는 온갖 솜씨를 더 부릴 만한 기계였으나 제 눈결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되팔았습니다. 망가진 450디를 목돈 들여 고쳐서 다시 씁니다. 어쩌면 2011년 여름에 다시금 덜컥덜컥거려 또 고쳐야 할는지 모르고, 2012년 여름에는 그예 맛이 갈는지 모릅니다. 필름을 쓰는 사진기는 잘 안 망가진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살살 건사하더라도 오래도록 쓰다 보면 자잘히 낡고 닳아 못 쓰기 마련입니다. 필름사진기 한 대가 스스로 목숨을 다해 사진벗한테서 하나 얻어 쓰는데, 이 녀석이 목숨을 다할 때에 고칠 수 있는 가게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새로운 장비와 새로운 솜씨가 나타나면서 새롭게 사진을 찍거나 새롭게 사진이야기 일구는 사람 또한 많이 나타납니다. 바야흐로 사진예술이 흐드러지게 꽃핀다고 느낍니다. 이와 함께,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온누리이다 보니, 나라나 지자체에서 큰돈 들여 ‘지역 생활문화유산 기록 사업’을 곧잘 벌이곤 합니다. 현대 도시 물질문명하고 적잖이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과 동영상과 글로 적바림하는 일을 퍽 자주 봅니다.

 이를테면 소한테 쟁기를 얹혀 논갈이를 하는 농사꾼 삶이라든지, 그물로 고기잡이하는 사람들 삶이라든지, 멧골에서 나물을 캐는 멧사람 삶이라든지, 바다에서 물질하는 사람들 삶이라든지, 나무를 깎고 다듬어 집짓는 사람 삶이라든지, 우리 악기나 그릇을 만드는 사람들 삶이라든지 찾아다니고 살펴보며 적바림하곤 합니다. 글을 쓰는 분은 으레 대학교수나 대학원 석·박사 과정 학생이나 조교나 강사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냥 사진기 쥔 대학교수나 대학생이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마을사람 스스로 마을사람 삶을 담는 일은 드뭅니다. 아주 드물게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서는 ‘마을 이야기책’을 엮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뺀 이 나라 어느 곳에서도 마을사람 스스로 ‘우리 이야기가 참 보배롭지.’ 하고 여기며 적바림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스스로 적바림할 겨를이 없습니다.

 마을사람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을 바깥’에서 살아가며 ‘마을 구경’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을에서 일거리를 찾아 마을사람하고 이웃으로 지내며 스스로 마을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인문학 지식이나 인류학 지식은 빈틈없을 뿐더러 ‘마을 이야기책 엮는 솜씨’라든지 ‘사진기 다루는 재주’는 빼어납니다. 글과 사진은 뛰어납니다. 글과 사진은 훌륭하거나 뜻있다 할 만합니다. 다만, 글이든 사진이든 사랑스럽다거나 살갑다거나 따스하다거나 너그럽다거나 포근하다거나 즐겁다거나 애틋하다거나 좋다거나 하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누군가는 이야기합니다. 딸아이 키우는 어버이가 딸아이를 찍는 사진보다 둘레 사람이나 사진관 사람이 딸아이를 찍는 사진이 한결 ‘객관’이지 않겠느냐고. 내 어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딸아들이 찍을 때보다 낯선 사람이 찍을 때에 ‘객관’을 지키지 않겠느냐고. 인간문화재를 담을 때에 제자가 사진으로 담을 때랑 전문 사진쟁이가 사진으로 담을 때랑 사진기자가 사진으로 담을 때랑 견주면 전문 사진쟁이나 사진기자가 ‘객관’ 테두리에서 찍지 않겠느냐고.

 일본 사진책 《山に生かされた日日》를 봅니다. “新潟縣朝日村奧三面の生活誌”라는 이름이 붙은 ‘민속문화 생활기록’이라 할 만한 책입니다.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에서 장만한 《山に生かされた日日》은 1984년에 1쇄를 찍고 1996년에 3쇄를 찍습니다. 열두 해 만에 3쇄라니 참 더디 팔리는 책일 텐데, 어찌 되었든 깊은 멧골 조그마한 마을사람 이야기책이 3쇄를 찍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멧마을 사람들 삶이야기를 담은 책이 이렇게 사랑받은 적이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이처럼 사랑받기는 힘들다고 느낍니다. 하나같이 도시로만 몰리고 도시 살림만 헤아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민속문화 생활기록’을 왜 하고 어떻게 하며 누가 하는가를 살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 찍은 사진을 담아야 잘 엮은 사진책이 아닙니다. 잘 쓴 글을 실어야 잘 빚은 이야기책이 아닙니다.

 어깨동무하는 삶으로 사진을 담아야 하고, 너나들이 같은 이웃이 되어 글을 실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예쁘장하게 찍은 딸아이 사진이라 한들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초점 어긋나고 흔들린데다가 빛조차 안 맞았을지라도 ‘아이를 사랑하는 어버이가 따사로운 넋과 손길’로 찍은 사진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山に生かされた日日》에 실린 사진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럽습니다. 따스합니다. 좋습니다. 즐겁습니다. 머나먼 도시에서 학자님들이 ‘행차’해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머나먼 도시에서 찾아온 학자님들일지라도 마을사람하고 고이 어우러지면서 저절로 얻은 사진으로 책을 일구었습니다.

 지역문화를 살피든 민속문화를 톺아보든 생활문화를 파헤치든 전통문화를 다루든, 학자나 교수나 학생 된 사람은 ‘사진기를 쥔 예쁜 이웃’으로 마주서야 합니다. ‘연필을 쥔 고운 동무’로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사진기와 연필을 때때로 내려놓고 함께 호미를 쥐는 살붙이’로 두레를 하고, ‘술잔과 수저를 함께 드는 마을지기’로 웃고 울어야 합니다. (4344.1.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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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나누는 기쁨 ㉣ 삶, 사람, 사랑, 사진
 ― 사진이 태어나는 밑뿌리



 제주섬에 가면 꼭 가 보아야 할 만한 곳으로 여러 군데를 들곤 합니다. 이 가운데 으레 손꼽는 자리인 하나, 누구보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거치는 자리는 두모악갤러리입니다.

 두모악갤러리를 찾아가 보면, 제주섬 오름을 담은 김영갑 님 사진이 예쁘게 걸린 채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김영갑 님이 당신 사진을 그러모아 선보인 마지막 터전이 이곳 두모악갤러리입니다.

 지난 2010년 11월 13일, 둘째를 밴 옆지기하고 스물여덟 달째 함께 살아가는 딸아이랑 함께 제주섬 마실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주섬을 찾아가며 올레길을 걷는다든지 바닷가를 거닌다든지 한라산을 탄다든지 합니다. 자가용을 빌려 이곳저곳 쏘다니기도 하겠지요. 우리한테는 자가용이 없고 자가용을 빌릴 돈이 없으며 자가용을 몰 면허증이 없습니다. 그래도 용케 차를 태워 주는 분이 있어 두모악갤러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김영갑 님 사진책 《마라도》가 새판으로 다시 나왔기에 즐겁게 장만합니다. 충주 멧골집으로 돌아와 비닐을 뜯어 책을 펼치니, 앞머리에 사진심리학자 신수진 님 추천글이 달립니다. 신수진 님은 김영갑 님 사진책을 보며 “김영갑의 신작 아닌 신작, 마라도에선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우리를 압도한다.”고 적습니다.

 사진을 찬찬히 살핍니다. 지난날 눈빛출판사에서 나온 《마라도》에서 본 사진이지만, 새판으로 볼 때에는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판짜임과 엮음새가 다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김영갑 님 예전 사진책이든 새 사진책이든 사진은 똑같습니다. 김영갑 님 사진이 베푸는 선물은 매한가지입니다. 제주섬을 사랑하고 사진을 아끼며 삶을 즐기는 가운데 사람을 얼싸안는 따스함은 한결같습니다.

 우리 식구도 제주마실을 하면서 바다를 보기는 했으나, 막상 우리가 거닌 길은 올레길이 아닌 제주섬 골목길이었고, 제주시 이도1동에 자리한 헌책방 〈책밭서점〉에 오래 머물었습니다. 찬바람이 꽤 불어 골목길 마실은 얼마 못했는데, 따순바람이 불 때에 네 식구가 다시금 찾아가 골목길은 골목길대로 거닐며, 올레길이 아닌 여느 시골마을 고샅길을 걷고 싶습니다.

 우리 식구는 어디를 다니든 관광이 아닌 마실이고, 놀러가기가 아닌 나들이입니다. 뜻밖에 우리 식구가 제법 돈을 번다면 일본마실까지 다닐는지 모르는데, 우리 식구들이 일본마실을 한다면 어김없이 일본 헌책방거리와 골목길을 거닐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만 다니면 지루한 만큼, 일본 시골자락을 찾아 고샅길을 함께 거닐어야지요. 우리 식구는 따스한 사람과 포근한 삶과 너그러운 사랑과 싱그러운 사진을 좋아하거든요.

 새로운 사진책 《마라도》에 붙은 추천글을 읽을 다른 분들은 무엇을 느낄까 설핏 궁금하지만, 참말로 사람들은 김영갑 님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 “작가의 시선이 우리를 압도한다”고 느낄까 싶어 알쏭달쏭합니다. 왜냐하면, 김영갑 님 사진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우리한테 어떤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며 내리누르는’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영갑 님 스스로 사랑하는 삶터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매무새를 사랑하는 사진으로 담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내리누르지(압도) 않습니다. 사랑은 내세우지 않습니다. 사랑은 우쭐거리거나 뽐내지 않아요. 사랑은 살가이 껴안습니다. 사랑은 촉촉히 젖어드는 눈물과 해맑게 빛나는 웃음으로 애틋합니다.

 흔히들 김기찬 님이 일군 《골목 안 풍경》이 ‘골목길을 찍은 사진’이라 일컫지만, 김기찬 님이 내놓은 사진책 《골목 안 풍경》은 ‘골목길을 찍은 사진’이라 할 수 없습니다. 김기찬 님은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풍경으로 담은’ 분입니다.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을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꾸밈없이 담은 사진이 차곡차곡 모여 《골목 안 풍경》이 태어났다고 느낍니다.

 골목길 모습 가운데 하나로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은 골목길을 이루는 숱한 모습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골목사람이 골목길 모든 모습이 될 수 없고, 되지 않으며, 될 까닭이 없어요. 그렇다고 골목집 담벼락이나 우체통이나 문패나 꽃그릇이 골목길 모든 모습이 되지 않아요.

 사진을 읽으려면 옳게 읽어야 하고, 사람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려면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며, 사진을 사랑하거나 아끼려면 ‘사진’을 참다이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고 느껴요. 배병우 님 사진을 놓고 ‘소나무’를 찍은 사진이라 하지만, 배병우 님 사진 또한 ‘소나무를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소나무숲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를 찍은 사진’이 배병우 님 사진입니다. 우리들은 사진쟁이 한 분이 어떠한 이야기를 어떠한 사진틀에 담아 어떠한 삶자락을 보여주려 하는가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알뜰살뜰 가슴으로 받아들여야지 싶습니다. 사진읽기를 알맞게 하면서 삶읽기를 살가이 하고, 사람과 사랑이 어우러지는 터에서 어떠한 문화꽃과 예술나무가 자라는가를 느껴야지 싶습니다. 비평을 하는 사진이나 소장을 하는 사진이나 전시를 하는 사진이나 보도를 하는 사진이 아닐 테니까요. 내 사랑하는 삶을 보여주는 사진이고, 내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사진이며, 내 사랑하는 꿈을 꿈을 빛그림으로 아로새기는 사진일 테니까요.

 살아가기에 사진에 이야기를 담습니다. 살아가기에 사진에 깃든 이야기를 읽습니다. 나 스스로 사람인 까닭에 사람을 찍는다 하지만, 사람 몸이나 얼굴을 찍지 않더라도 사람 내음 물씬 묻어나는 사진을 이룹니다. 지팡이나 도마나 옷깃이나 장갑이나 굳은살이나 밥그릇을 찍는 사진으로도 사람을 얼마든지 이야기합니다. 사랑하기에 사진을 즐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담기도 하는 사진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사진에 담아 둘레 사람들하고 사이좋게 나누기도 합니다.

 삶과 사람과 사랑입니다. 사진이란 다른 무엇보다 이 세 가지를 밑바탕으로 단단하고 참다우며 착하게 다스린 다음에 일구는 문화꽃입니다. 사진이란 바로 이 세 가지를 언제나 곁에 놓으면서 예쁘고 따스하며 넉넉히 아우르는 가운데 이루는 예술나무입니다.

 신문사 기자가 되었기에 보도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사진학과 교수가 되었다 해서 사진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갤러리를 열었다고 사진문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사진잔치를 마련한 작가라 하더라도 사진예술을 꽃피우지 않습니다. 마음과 꿈과 눈물과 웃음과 땀방울이 알알이 영그는 삶·사람·사랑이 만나야 비로소 사진이 태어납니다. (4344.1.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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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나누는 기쁨 ㉢ 글읽기와 사진읽기
 ― 좋은 글·사진에 앞서 좋은 내 삶·사랑이어야



 소 귀에 불경을 읽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돼지한테는 문학이나 예술이 부질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나 돼지를 깔보면서 읊는 말이 아닙니다. 소한테는 불경이란 참으로 쓸모가 없을 뿐더러, 돼지한테도 문학이나 예술은 쓸데가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저는 모나리자 그림을 그렇게까지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만, 아무리 아름다운 모나리자 그림이라 할지라도 이 그림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아무 값을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모나리자 그림을 벽종이로 삼을 수 있고, 누군가는 불쏘시개로 삼을 만하겠지요. 벽종이로 삼는 사람한테는 벽종이로 좋다고 느낄 테고, 불쏘시개로 삼는 사람은 불쏘시개로 쓸 만하다고 여길 테니까요.

 주명덕 님 사진이라고 알아보아야 사진이 좋다거나 주명덕 님 사진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개 사진이라고 알아보기에 앞서 사진이 좋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사진이 좋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아무개 님 사진이더라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라키 님 사진책을 장만해야 아라키 님 사진을 헤아릴 수 있지 않습니다. 아라키 님 사진책을 장만하지 않더라도 아라키 님 사진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어야 비로소 아라키 님 사진을 헤아립니다.

 《태백산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해서 《태백산맥》이라는 문학이 내 마음속에 촉촉히 아로새겨지지 않습니다. 한 줄만 읽더라도 이 작품을 내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길 수 있습니다. 《토지》를 읽은 사람이 박경리라는 분을 다 안다 말할 수 있으려나요. 그러나 박경리 님을 곁에서 오래오래 모신 분이라 할지라도 박경리 님을 하나도 모른다 말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 ‘맛나 보이는’ 밥을 먹을 때랑 눈을 감고 ‘누군가 떠 주는’ 밥을 먹을 때에는 어떻게 다르려나요. 눈으로 보면서 먹어야 참맛이고, 눈을 못 뜬 채 자리에 드러누워 밥술을 받으면 거짓맛이려나요.

 사진밭이든 그림밭이든 글밭이든 ‘전문가’란 없습니다. ‘작가’라든지 ‘선생님’이라든지 ‘프로페셔널’이라든지 ‘아마추어’라든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면 그저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면 그예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백만 권이 팔린 책을 하나 내놓은 사람이라 해서 대단하거나 훌륭하거나 뛰어난 글쟁이가 아닙니다. 대학교수라거나 사진잔치를 백 차례 열었다거나 사진책을 열 권 내놓았다거나 나라밖에서 이름을 날린다 하거나 사진상을 여러 차례 탔다고 해서 놀랍거나 멋지거나 아름다운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훌륭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습니다. 다문 한 사람이 읽을 글을 쓰더라도, 아니 남한테 보이지 않고 나 스스로 읽는 글을 쓰더라도 훌륭합니다. 꼭 한 사람한테 선물하는 사진을 찍더라도, 아니 그냥 내 방에 얌전히 붙여놓을 사진을 찍더라도 아름답습니다.

 소한테는 불경이 아닌 여물이 반갑습니다. 여물보다는 들판에 스스로 자라는 풀이 훨씬 반갑습니다. 돼지한테는 피카소 그림보다 정갈한 돼지우리가 고맙습니다. 정갈한 돼지우리보다는 너른 들판과 축축한 웅덩이가 고맙습니다.

 사진쟁이 쿠델카가 훌륭하다면 여러모로 이름나거나 손꼽히는 작품 때문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쿠델카라는 사진쟁이가 내놓은 사진이나 책을 들여다보면서 나 스스로 가슴에서 뭉클하게 움직이는 무언가 있을 때에 훌륭합니다. 사진쟁이 전민조가 좋다면 이렁저렁 좋다 하는 작품이나 바지런한 삶자락 때문에 좋지 않습니다. 전민조라는 사진쟁이가 이룬 사진이나 책을 살피면서 나 스스로 따순 사랑과 예쁜 믿음을 느낄 때에 좋습니다.

 글은 내 삶에 맞추어 내 결에 따라 읽습니다. 사진 또한 내 삶에 걸맞게 내 눈썰미로 읽습니다. 어떠한 비평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나 잣대에 따라 문학을 읽을 수 없습니다. 어느 전문가가 밝히는 이야기나 실마리에 따라 사진을 읽을 수 없어요. 오로지 내 가슴으로 읽는 글이고, 오직 내 마음으로 읽는 사진입니다.

 내 삶을 차분히 읽으면서 글 한 줄 기쁘게 읽습니다. 내 삶터를 곰곰이 읽으면서 사진 한 장 즐거이 읽습니다.

 좋은 글이 있다 해서 누구나 이 좋은 글을 좋게 읽어내지 못합니다. 좋은 글이 아닌 나쁜 글이라 할지라도 내가 일구는 내 삶이 좋은 삶일 때에는 나쁜 글이라 하더라도 따숩게 보듬으면서 좋은 길로 이끄는 한편, 이 나쁘다는 글에서도 좋은 넋을 길어올립니다.

 좋은 사진이 있다지만 누구나 이 좋은 사진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좋은 사진이 아닌 나쁜 사진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꾸는 삶이 좋은 삶일 때에는 나쁜 사진을 보면서도 좋은 사진을 배우는 가운데, 이 나쁘다는 사진이 걸어가면 아름다울 좋은 길을 살피면서 서로서로 오붓하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우리는 이론으로 문학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론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잘 쓴 글이란 없고, 잘 찍은 사진이란 없습니다. 글 잘 쓰기를 가르칠 수 없고, 사진 잘 찍기를 물려줄 수 없어요. 그런데 모든 글은 다 잘 쓴 글이며, 모든 사진은 몽땅 잘 찍은 사진이에요. 사랑스러운 삶을 꾸린다면 누구나 잘 쓴 글이면서 잘 찍은 사진입니다. 믿음직한 삶을 여민다면 언제나 잘 쓴 글이고 잘 찍은 사진입니다. 너그러운 삶을 엮는다면 한결같이 잘 쓴 글이요 잘 찍은 사진일밖에 없어요.

 이론이 아닌 삶으로 문학을 합니다. 이론 아닌 삶으로 문학을 받아들입니다. 이론이 아닌 삶으로 사진을 찍거나 배우거나 말합니다. 평론가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우기 때문에 사진 작품 하나를 천만 원을 들여 장만해서 큰방 너른 벽에 붙이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사진이요 아름다운 작품이기에 조그마한 사진일지라도 책상맡에 붙여놓고 날마다 수없이 들여다봅니다.

 왜 숱한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스러운 님(아이이든 짝꿍이든 어머니이든 동무이든 연예인이든)’ 모습이 담긴 사진을 수첩이나 지갑에 넣고 다닐까요. 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 아이나 손주 사진을 벽에 붙여놓으려나요. 잘 찍은 사진이라서 갖고 다니거나 붙이겠습니까. 훌륭하다는 사진이라서 간직하거나 자랑하겠습니까.

 얼굴이 예쁘장한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삶이 귀여운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얼굴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가꾸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요, 그럴듯한 겉치레 솜씨를 배우면서 선보이려는 사진은 아름다울 수 없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읽을 때부터 겉모습이 아닌 속모습을 읽어야 합니다. 사진읽기부터 옳게 하는 사람이 사진찍기를 신나게 즐기고 재미나게 나눕니다. 사랑을 먹으며 태어나는 글이고, 사랑을 받으며 꽃피우는 사진입니다. (4343.12.2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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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나누는 기쁨  ㉡ 글쓰기와 사진찍기
 ― 기계질 아닌 살림하기가 되어야 할 사진



 어릴 적부터 운동경기를 배우는 아이들은 퍽 어릴 때부터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곤 합니다. 어린 날부터 악기를 다루는 아이들은 꽤 어린 나이부터 뛰어난 재주를 선보이곤 합니다.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까닭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더 일찍 영어를 가르치면 영어를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참으로 맞는 이야기들인데, 이렇게 참말 맞는 이야기를 하는 우리들은 한 가지를 잊습니다. 그러면, 왜 어릴 적에 운동경기이든 악기이든 영어를 가르치면 아이들은 쏙쏙 빨아들이듯이 잘 배워서 빼어나거나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려나요.

 요즈음 아이들은 우리 말과 글을 잘 못합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걸핏하면 틀리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말과 글을 거의 형편없이 뇌까리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배우지 않을 뿐더러 옳게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넋을 건사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아이들 마음이 옛날과 견주어 못되거나 비뚤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린 나날부터 갖가지 지식과 정보를 잔뜩 머리에 집어넣는 바람에, 아이들 스스로 마음결과 마음씨를 착하거나 참답거나 곱게 다스리는 데에서는 자꾸 동떨어지고 맙니다.

 아직 어린 아이한테 글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글을 잘 쓸까 궁금합니다. 무척 어린 아이한테 그림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그림을 잘 그릴까 궁금합니다. 매우 어린 아이한테 사진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사진을 잘 찍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테니스 기계가 아니고, 농구 기계나 탁구 기계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축구 신동이나 야구 신동 또한 아닙니다. 아이들은 앞으로 돈을 많이 벌거나 이름을 높이 얻거나 힘을 세게 부릴 셈으로 피아노를 익히거나 바이올린을 켜거나 노래나 춤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제 삶을 아름다이 살찌우는 길에서 테니스를 배우거나 피아노를 익히거나 사진기를 물려받아야 즐겁습니다.

 잘 쓰는 글도 나쁘지는 않다 하겠지요. 그러나 잘 쓴 글이란 온누리에 수두룩합니다. 잘 쓴 글이란 내 삶에서 무슨 보람이 있으려나요. 내 삶을 담는 내 이야기가 없다면, 제아무리 예쁘장하게 빛난다는 글이라 해도 무슨 쓸모가 있으려나요.

 잘 찍은 사진도 싫지 않다 하겠지요. 그러나 잘 찍은 사진이란 나라 안팎에 숱하게 많습니다. 잘 찍은 사진이란 내 삶에서 무슨 뜻이 있으려나요. 내 삶을 실어내어 내 이웃이랑 동무랑 살붙이랑 오순도순 나눌 이야기가 없다면, 제아무리 멋스러이 보인다는 사진이라 해도 무슨 값이 있으려나요.

 예쁜 얼굴이기에 예쁜 사람이 아니에요. 예뻐 보이는 글이라서 예쁜 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쁘구나 싶은 사진이라서 예쁜 마음을 나눌 수 없어요. 예쁜 삶을 예쁜 손길로 가다듬으면서 한 장 고맙게 얻는 사진일 때에 비로소 예쁜 사진으로 자리잡아요.

 사랑을 담아 글을 쓰고 사랑을 담아 사진을 찍어야 좋습니다.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 아니고, 누구한테 내보이려고 찍는 사진이 아니에요. 작품이 되니까 쓰려 하는 글이 아니고, 작품을 만들려고 만들 수 있는 사진이 아니에요. 돈을 벌려고 쓰는 글이란 글다운 글이 아니에요. 그냥 ­‘돈벌이’랍니다. 돈을 모으려고 찍는 사진이란 사진다운 사진이 아니에요. 그저 ‘돈벌이’예요.

 상업사진이라든지 상업작가라는 말이 떠도는데, 상업사진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돈벌이에 머물지 않습니다. 상업판, 그러니까 누군가한테서 돈을 받고 써 주는 글이나 찍어 주는 사진이라 할지라도, 내 온마음과 온땀을 바쳐 일구는 글과 사진일 때에는 아름답습니다. 좋아요. 빛납니다. 어여쁘지요. 그냥 돈벌이로 여기며 주문에 걸맞게 해치운다면 그냥 돈벌이로 머뭅니다.

 흔히들, 사진관 사진은 사진으로 안 치곤 하지만, 사진관 사진 가운데에도 놀랍도록 아름다우며 빛나는 작품, 곧 사진다운 사진이 있어요. 저는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옛날 졸업사진책을 바지런히 사 모읍니다. 해마다 수천 군데 초·중·고등학교에서 졸업사진책이 쏟아지는데, 이 책들을 보면 그저 그런, 한 마디로 하자면 그냥 돈만 벌려고 만든 졸업사진책이 꽤 많지만, 이 가운데 아주 맑고 밝게 빛나는 졸업사진책이 어김없이 있습니다. 얼마나 땀흘리고 마음쏟아 졸업사진책 하나 빚었는지, 내가 나온 학교가 아니요 내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이 졸업사진책 하나를 넘기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때가 있습니다.

 상업사진을 하든 순수사진을 하든 무슨 사진을 하든, 사진작가가 되고픈 이들은 ‘사진을 하면’ 됩니다. 글을 써서 돈을 벌든 이름을 얻든 뭐를 하든, 참다이 글작가가 되고픈 이들은 ‘글을 쓰면’ 돼요. 이름팔이가 아닌 글쓰기입니다. 돈벌이가 아닌 사진찍기입니다. 장사꾼 노릇이 아닌 살림꾼 몫입니다. 겉치레가 아닌 속가꿈이요 살림하기예요.

 한 가지를 더 생각한다면, 아이를 키우듯이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면 한결 즐거우며 빛이 나고 아리땁습니다. 아이를 돌보듯이 글을 여미고 사진을 여미면 더욱 멋스러우며 뜻이 있고 어여쁩니다. 아이를 사랑하듯이 글을 사랑하고 사진을 사랑할 노릇입니다. 아이를 내 품에 따숩게 꼬옥 안아 주듯이 글을 내 가슴으로 꼬옥 안아 주고 사진을 내 온몸으로 꼬옥 안아 줄 노릇입니다. (4343.12.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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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20일부터 2011년 1월 31일까지, 서울 시립미술관 별관이 있는 '경희궁 한켠'에서 "서울사진축제"가 펼쳐집니다. 이 서울사진축제에서는 '사진책 도서관'이라는 자리가 함께 있는데, 이 자리에는 제가 꾸리는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에서 책 300권을 빌려서 꽂아 놓았습니다. 

 여느 자리에서는 거의 구경해 보기 어려운 책을 많이 내놓고 더 널리 보도록 해 놓았습니다. 틈 나는 분들은 경희궁으로 마실을 해 보소서... (그나저나 행사 안내종이네는 저한테 책을 잔뜩 빌려가 놓고 '협조'나 '후원'이나 '자료제공' 같은 말은 한 마디도 안 적어 놓았더군요. 쓸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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