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린네 23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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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화책 즐겨읽기 673



활짝 웃는 얼굴을 바라는 살림

― 경계의 린네 23

 타카하시 루미코 글·그림

 서현아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6.10.25. 4500원



  우리가 살아가는 까닭을 찬찬히 생각해 보면 ‘웃음’에 닿지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뜻은 바로 ‘웃음’에 있지 싶습니다. 웃음지을 삶을 헤아리면서 하루를 열고, 웃음꽃이 될 살림을 바라면서 서로 만나지 싶어요.


  웃음이 피어나는 자리란 즐거운 자리입니다. 웃음이 터지는 자리란 기쁜 자리예요. 그러니까 즐거운 삶이나 기쁜 살림을 바란다고 할 적에는 언제나 웃음을 꿈으로 그린다는 뜻이 되지 싶습니다.


  설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에 다 같이 웃는다면, 함께 일하고 함께 쉬거나 놀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 때문이지 싶어요. 설이나 한가위 같은 명절에도 다 같이 못 웃는다면, 누구는 고되게 일하고 누구는 멀뚱멀뚱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기 때문일 수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마음으로 아끼지 못한다면, 다 같이 웃는 자리가 되지 못할 테고요.



“로쿠도, 너! 문제를 질질 끌어서 시급만 올려 받을 셈이지!” “무슨 소리야? 로쿠도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20쪽)


‘훗, 잠시나마 좋은 꿈을 꿨어, 라고 생각해야지. 아니면 …….’ (42쪽)



  만화책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2016) 스물셋째 권에서는 ‘웃음’을 이야깃감으로 다룹니다. 마음에 걱정이나 근심이 깃드는 사람한테는 웃음이 가십니다. 걱정이나 근심을 마음에 안 두는 사람한테는 웃음이 피어납니다. 슬프거나 아프니까 안 웃기도 하지만, 슬프거나 아프더라도 마음에 새롭게 꿈을 씨앗처럼 심으면 환하게 웃을 수 있기도 해요.



“3세가 뭘 부쉈냐고? 글쎄, 광 안은 엉망진창이니 짐작도 안 가는데.” “네에? 그럼.” “왜 화가 나셨는지 분명히 가르쳐 주세요.” “뭐 굳이 말하자면, 그 다음이 괘씸했다고 할까.” “그 다음?” “도망갔습니다!” (51∼52쪽)


“타마코 씨, 그것도 사신의 업무인가요?” “속사정이 있는 여관이군.” “그래, 하지만 여관 경영자가 유령일 뿐이지. 각종 노천온천에 그 지역의 신선한 재료로 만든 맛있는 요리가 나오고, 숙박료는 물론 사신조합에서 부담하지.” “완전히 꿈 같은 얘기잖아!” “경영자의 소원은 손님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 그게 이루어지면 성불할 거야.” (98∼99쪽)



  웃으려면 스스로 바라는 길을 가야 합니다.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을 하며 웃기란 어렵습니다. 웃으려면 스스로 좋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가는 길을 좇기만 한다면 웃기가 힘들어요.


  이른바 혼자 으뜸이 되려고 할 적에도 즐겁게 못 웃어요. 혼자만 잘살려고 하면서 웃음을 짓는 이는 찬웃음이나 비웃음이 되기 일쑤일 뿐 아니라, 이녁 둘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풀이 죽거나 괴로워요.


  어느 모로 본다면 ‘혼자만 웃는’ 자리는 웃음이 아니지 싶습니다. 허울좋은 웃음이라고 할까요. 씨앗처럼 둘레로 퍼뜨리는 웃음이 될 때에 비로소 참웃음이지 싶어요. 한바탕 잔치처럼 웃도록 북돋아야 웃음이라고 할 만하지 싶어요.



“한 번이라도 제대로 손님을 접대하고, 웃는 얼굴을 보기 전까진 절대 못 그만둬!” “그렇군.” “이 원숭이떼의 위협 속에서 웃으라니, 지금 장난해?” “하지만 안 그러면 이 사람들은 성불을…….” (106∼107쪽)


“훗, 너하고 같은 수준으로 취급하면 곤란하지.” “뭐야?” “너는 밤낮 책상만 끼고 앉은 공무원이지만, 나는 날마다 현장을 달리며, 영과 맞서는 사신! 경험의 차원이 다르단 말이다!” (159쪽)



  웃지 못한 삶이니 이승을 떨치지 못합니다. 웃지 못했다는 생각에 저승에서도 제자리를 못 찾습니다. 웃지 않는 삶이니 동무나 이웃한테 손길을 따스히 내밀지 못합니다. 웃지 못하는 삶이니 동무나 이웃을 사랑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참말 우리 삶에서 웃음처럼 크고 멋지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은 없구나 싶습니다.


  혼자만 잘살며 혼자만 웃는 삶이 아니라, 함께 잘살며 함께 웃는 삶을 바랄 때에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일하며, 함께 놀거나 쉬고, 함께 걷고, 함께 꿈을 지을 수 있는 마을이요 보금자리이기에, 우리는 즐겁게 웃을 만하리라 생각해요. 2017.1.29.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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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5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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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70



미련하게 어둠을 헤매는 넋

― 백귀야행 5

 이마 이치코 글·그림

 서미경 옮김

 시공사 펴냄, 1999.8.26. 5000원



  어둠은 어둡습니다. 어두우니 어둠입니다. 더없이 마땅한 말입니다만, 이 마땅한 말을 잊거나 놓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어둠은 어둠일 뿐 무서움이 아닙니다. 어둠은 어둠일 뿐 죽음이 아닙니다. 어두운 곳에 있기에 두려워야 하지 않아요. 그저 어둠이에요.


  우리는 어두운 곳에 있기 때문에 별을 봅니다. 어둡지 않은 곳에서는 별을 못 봐요. 어둡지 않은 곳에서는 빛도 못 보지요. 환한 낮에 불을 켜 보셔요. 불은 거의 안 보이거나 아예 눈에 뜨이지도 않습니다.



“병실에 누워 있을 땐 이 거울 속이 내 세계였는데,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부터 거울은 필요 없게 되었지요. 더 즐거운 생활을 당신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31쪽)


“즈카사! 그 아인 살아 있지 않아.” “거짓말! 이렇게 뚜렷이 보이는데?” (64쪽)



  《백귀야행》 다섯째 권에 흐르는 어둠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어둠에 갇혔다는 생각에 그만 이승을 못 떠나는 넋이 있습니다. 어둠이 너무 싫어서 저승으로는 건너가지 않는 넋이 있어요. 그리고 이승에서 가슴에 아픔이나 생채기가 많이 쌓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어둡게 바뀌고 어둠을 키우려는 넋이 있습니다.



“죽이는 것보다 같이 즐기는 걸 원한다.” “낙천적인 요괴구만.” (113쪽)


“재미없다. 인간은 왜 이다지도 빨리 죽는 것일까? 이 아이는 섭취할 만한 생기도 거의 없었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야.” (124쪽)



  우리는 어둠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면서 살는지 모릅니다. 어둠이나 밝음이 무엇인지, 밝음하고 어둠은 서로 어떻게 잇닿는지, 어둠하고 밝음이 왜 따로 있는가를 하나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는지 몰라요.


  낮에 일어나서 움직이고 밤에 잠들며 꿈꾸는 얼거리를 생각합니다. 꿈을 꾸려고 잠드는 밤을 생각합니다. 무서워서 잠이 못 드는 밤이 아니라, 온통 깜깜한 곳에서 비로소 몸을 누이고 쉬면서 꿈을 꾸어요. 몸을 내려놓고 꿈을 꾸면서 쉬는 밤, 곧 어둠이에요.



‘증오심에선 아무것도 생길 수 없어. 자신이 그걸 깨달을 무렵에는 상당히 인생을 허비한 후겠지.’ (143쪽)


“불쌍한 녀석이야. 어두운 풍경만 보고 자라서 검은 생명체로 변하고 있어.” (206쪽)



  어둠을 고이 받아들이기에 새롭게 피어납니다. 어두운 곳에서 꿈을 지피기에 새롭게 자라납니다. 씨앗이 싹을 트고 애벌레가 나비로 깨어나는 곳은 언제나 어둠이라는 품이에요. 그런데 이 어둠을 제대로 못 살피면서 미움이나 싫음이나 짜증을 가슴에 담는다면? 이때에는 그야말로 바보스러운 미움이나 싫음이나 짜증만 쌓일 테지요.


  고이 쉴 노릇입니다. 어둠에 잠기며 꿈을 꿀 적에는 기쁨도 내려놓고 슬픔도 내려놓을 노릇이에요. 미운 누군가 있었다 하더라도 어둠에 잠기며 꿈을 꿀 적에는 살며시 내려놓을 노릇이에요. 언제까지 미워해야 할까요? 이제 그만 미워하고 우리 삶을 스스로 새롭게 찾아야지요. 꿈을 꾸어야지요. 2017.1.19.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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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후회망상 아가씨 1 -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도쿄 타라레바 아가씨
히가시무라 아키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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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56



‘마흔 노처녀’ 아닌 ‘빛나는 마흔’

― 도쿄 후회망상 아가씨 1

 히가시무라 아키코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6.11.25. 4500원



  도쿄에서 혼자 살며 오랜 술동무하고 푸념을 늘어놓는 재미로 하루하루 보내는 아가씨가 있다 합니다. 이 아가씨는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스스로 좋아하는 동무하고 어우러지면서 날마다 아기자기한 삶을 짓는다고 해요. 때로는 잔뜩 풀어지거나 어수선하기도 하지만요.


  이러던 어느 날입니다. 이 아가씨는 언제나처럼 술동무하고 온갖 푸념을 풀어놓으면서 저녁을 보냅니다. 그때 그 술집에는 혼자 찾아와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모델 같은 젊은 사내가 있었대요. 나중에 알고 보니 모델 같은 젊은 사내가 아닌 참말 모델인 젊은 사내였다는데, 이 젊은 사내가 ‘술에 절어 마구 떠드는 아가씨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날렸다고 합니다.



20대 때는 당연히 멋진 가게에서 모였지만, 28살 때 카오리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왠지, 좀더 빨리 취하고 싶어. 아니, 벌컥벌컥 내 마음대로 마시고 싶어. 이제 샐러드니 파스타니 그딴 거 필요 없어, 난.” “솔직히 너무 비싸. 와인도, 음식도.” (19쪽)



  만화책 《후회망상 아가씨》(학산문화사,2016)에 나오는 아가씨는 참말로 만화책에서만 볼 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둘레에서 퍽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이웃일 수 있어요.


  서른이 넘고 마흔이 가깝도록 굳이 혼인을 안 하면서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서른 언저리나 마흔 가까운 나이에 꼭 아이를 잘 키워서 학교에 보내는 데에 온 하루를 써야 하지 않아요. 마흔으로 다가서는 아가씨들이 툭하면 단골 술집(이 술집은 술동무 아가씨 가운데 한 아가씨가 아버지하고 함께 일하는 곳입니다)에 모여 푸념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어요. 꼭 사내하고 짝꿍을 맺어 집에서 밥하고 살림해야 하지 않아요. 사내도 꼭 가시내하고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아 살림을 지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가장 좋아할 만한 일을 찾아서 기쁘게 하루를 누리면 되어요.



후회망상만 해 봤자 소용없다는 건 알지만, 10년 전 그때 그를 받아들였다면, 내 마음이 좀더 넓었다면,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둥, 오늘도 또, 술이 덜 깬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한다. (46∼47쪽)


올림픽까지 앞으로 6년. 그무렵이면 우리는 40세. 만일 6년 후에도 지금 이대로 혼자라면, 올림픽으로 축제 분위기인 도쿄 거리를, 우리는 어떤 얼굴로 걷고 있을까. (64∼65쪽)



  만화책 《후회망상 아가씨》에 나오는 아가씨는 귀가 얇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귀가 얇지는 않았대요. 예전에는, 이를테면 서른을 넘어가기 앞서만 해도 둘레에서 무어라 하든 콧방귀를 뀌었대요. 서른을 넘기까지는 스스로 믿고 스스로 사랑하며 스스로 제 일을 찾아 마음껏 날갯짓을 펼쳤대요.


  어쩌면 나이가 든 탓에 귀가 얇아질 수 있어요. 나이가 들며 둘레에서 가시내는 하나같이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아 돌보는구나 싶으니 그만 ‘이런 내 모습은 잘 산다고 할 만할까?’ 하고 돌아볼 수 있겠지요. 이러면서 ‘후회망상’에 사로잡히며 스스로 일을 그르칠 수 있을 테고요.


  저는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가씨가 스스로 좋아하는 길로 앞으로도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혼인하는 다른 가시내가 부러우면 부러워하지 말고 짝을 잘 찾아서 혼인을 하면 됩니다. 오랜 술동무가 살가우면서 즐거우면 이 술동무하고 앞으로도 재미난 늘그막을 누리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면 돼요.



설마,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새파란 신참의 육탄 공세에 당할 줄이야. 연예계가 더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각본은 전체 작업의 핵심이라, 좋은 작품만 쓰면 문제없을 거라 믿었는데, 아아 혹시, 그 아이, 젊어서 좋은 각본을 쓸 수 있는 건가. 내겐 없는 감각으로, 젊은 여자이기에 가능한 시점으로, 그 녀석이 납득할 만한 구리지 않은 각본을. (142∼143쪽)



  글을 쓰면서 혼자 잘 사는 사람이 있어요. 흙을 일구면서 혼자 잘 사는 사람이 있어요. 여느 회사 일을 하면서 혼자 밥 잘 지어 먹고, 혼자 책도 즐겁게 읽는 사람이 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하며 온누리를 여행하며 혼자 사는 사람이 있어요.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혼자 사는 사람이 있고, 다른 눈치를 안 보며 혼자서 춤을 즐기는 사람이 있어요. 혼자 바느질을 하며 조용한 살림에 웃음짓는 사람이 있어요.


  가만히 보면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고 나서 ‘후회망상’에 사로잡힐 수 있어요.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았기에 ‘가장 나은’ 삶이 되지 않습니다. 혼인을 여러 번 했으나 다시 갈라서는 사람도 있어요. 이쪽이 더 좋지 않고, 저쪽이 덜 좋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르면서 저마다 즐거움을 찾는 길이에요.



거리에는 이렇게 멋진 남자들이 많은데, 왜 우리 상대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걸까. (131쪽)



  만화책에 나오는 아가씨는 방송 대본을 쓴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 대로 젊은 숨결을 빛내는 글을 쓰겠지요. 나이를 먹은 사람은 나이를 먹은 대로 겪은 삶을 담아서 글을 쓸 테고요. 스물에는 스물다운 글이 나오고 서른에는 서른다운 글이 나와요. 마흔에도 쉰에도 저마다 다른 삶결이 묻어나는 즐거움을 노래할 만해요.


  어느 모로 보면 ‘후회망상’도 썩 나쁘지 않습니다. ‘아, 그때 왜 그랬을까?’ 하고 되새기면서 앞으로는 그와 비슷한 일을 맞이할 적에 슬기로울 수 있어요. ‘이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오늘부터 새롭게 하루를 열 수 있어요.


  후회를 하거나 망상을 하는 동안 하루가 그냥 지나갑니다. 후회와 망상만 붙잡으면 어느새 나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잊습니다. 후회도 망상도 술 한 잔에 털어내고 앞으로 내딛을 꿈과 사랑으로 씩씩하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기를,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가씨뿐 아니라, 우리 모두한테 힘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마흔 살 노처녀”가 아닌 “빛나는 마흔”입니다. 2017.1.1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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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 거북이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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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66



쳇바퀴 도는 서울에서 그림으로 부르는 노래

― 을지로 순환선

 최호철 글·그림

 거북이북스 펴냄, 2008.2.27. 18000원



  한국에서 서울은 그야말로 커다랗습니다. 모든 고장에서 모든 길은 서울로 이어집니다. 전국 어디에서나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고, 서울에서는 또 전국 어디로든 가는 버스길이 있어요.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바로 이웃한 다른 고장으로 가는 버스길조차 없기 일쑤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사는 전남 고흥에서는 보성이나 장흥으로 가는 버스길이 없다시피 합니다. 고흥에서 보성하고 장흥은 바로 이웃입니다만, 벌교를 거쳐서 돌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이쪽 시골에서 저쪽 시골로 가는 길은 무척 멀어요. 이를테면 전남 고흥에서 충북 음성으로 가는 길은 아홉 시간 남짓 걸려요. 이리저리 돌고 돌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고흥에서 서울로 가고서, 다시 서울서 음성으로 가면 외려 ‘고흥에서 음성으로 바로 가려는 길’보다 몇 시간 적게 듭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한국은 서울공화국일 수 있습니다. 모두 서울로 모이고, 모두 서울하고 얽히며, 모두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셈이거든요. 최호철 님이 만화 또는 그림으로 빚은 《을지로 순환선》(거북이북스,2008)은 바로 이 서울공화국 언저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 사는 땅] 도시는 자신을 세워 준 이들의 터전을 숨기며 자란다. 더 커지면 아예 바깥으로 밀어내 버린다. (23쪽)

[3월의 초등학교 앞] 아직 새싹이 돋지 않는 아직 잎사귀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 아래 햇병아리 신입생들을 목빼고 기다리는 어른들. 사랑으로, 걱정으로, 장삿속으로. (26쪽)



  처음부터 우람한 몸뚱이는 아니었을 서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다가 시나브로 우람한 몸뚱이가 되었을 테지요. 커지는 도시 서울은 차근차근 ‘이 커다란 도시를 세워 준 이’를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이른바 재개발이요, 철거입니다.


  오늘날 서울이나 둘레 도시에서는 초등학교 마칠 무렵 수많은 사람과 버스와 자동차가 학교 앞에 모인대요. 아이를 데려가려는 어버이가 있고, 학원버스가 매우 많아요. 아이들한테 군것질거리를 팔려는 이도 많고요. 학교 앞은 엄청난 ‘장사판’이 된답니다. 학교를 둘러싸고 수많은 학원이랑 가게가 얽힙니다.



[청계천 복원공사] 이제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물 없는 개천에 지하수를 끌어다 흐르게 할 때쯤이면 주변의 오래된 것들은 모두 떠밀려 가겠지. 저 떠나가는 노점상처럼. (50쪽)

[을지로 순환선] 끊임없이 거대한 도시의 일터와 쉼터 사이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맴도는 을지로 순환선. (55쪽)



  군사독재 정권이 올린 청계천 고가도로가 헐렸습니다. 가난한 집들을 가리려는 속셈으로 세웠다는 높직한 고가도로인데, 이 고가도로가 헐린 자리에 ‘전기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을 마련했다지요. 숲에서 숲다이 흐르는 냇물이 아닌, 발전소를 돌리고 전기를 끌어들이는 돈으로 땜질한 냇물입니다. 그래도 이만 한 냇물이 어디랴 싶으니, 청계천 둘레는 새로운 공원 구실을 합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은 빙글빙글 돈다고 해요. 어느 모로 보면 쳇바퀴처럼 돌아요. 그래도 지하철 2호선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오기는 하지요. 다른 지하철이나 전철을 탔다가 졸아서 잠들면 그만 다른 끝까지 가 버리고 말아 큰일이 나요.



[도시의 함박눈] 네모난 도시에 동글동글 눈이 내린다. 쌓일 곳도 스며들 땅도 없이 지저분하게 질척대다 하수구로 녹아 내릴 눈이 예쁘게 흩날린다. (60쪽)

[안국동 일본 대사관 앞 663번째 수요집회] 할머니들의 소리가 빗속의 눈물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그날까지. (108쪽)



  눈은 시골에만 내리지 않습니다. 눈은 숲이나 바다에만 내리지 않습니다. 눈은 아스팔트 찻길에도 내리고, 높다란 아파트나 주상복합에도 내립니다. 비록 도시에서는 눈을 몹시 성가시게 여겨서, 눈이 내리기 무섭게 몽땅 녹여 없애야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맞이하는 눈은 학원과 입시로 지친 아이들한테 한 줄기 숨통을 틔워 줍니다. 이 겨울에 맞이하는 눈은 ‘때로는 조금 천천히’ 가자는 생각을 북돋아 주어요.


  최호철 님이 《을지로 순환선》을 그릴 무렵만 해도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는 663번째였다는데, 어느새 1000번을 넘겼습니다. 이동안 ‘소녀상’이 일본 대사관 둘레에 서기도 합니다. 비록 제대로 뉘우치는 정치권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대사관 앞 소녀상을 몹시 거북하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할머니들 작은 손길이 모이고 퍼져서 ‘소녀상’이 섭니다. 평화로운 삶과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따사롭고 너른 마음이 뿌리를 내리려 합니다.



[마을버스 종점]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어도 여기가 종점인걸요. 자, 빨리 내려서 올라가셔야죠. 내일 새벽 또 일하러 나오려면요. (126쪽)

[공부] 책상보다도 작은 하늘이지만 이렇게라도 잠깐씩 맛을 보면 몇 시간 버티는 건 문제없다구. (132쪽)



  만화책하고 그림책 사이를 가만히 넘나드는 ‘그림이야기’인 《을지로 순환선》입니다. 우리네 살림이, 서울살이가, 이 나라 이 삶터가, 또 을지로 순환선 같은 도시 얼거리가, 여러모로 만화와 같고 그림과 같지 싶어요. 마치 만화에서 보는 듯한 이야기가 흐르는 삶이요, 그리고 참말 그림으로 그리는 듯한 따사롭거나 아름답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웃음이 피어나거나 즐거운 수많은 이야기가 넘실거리는 나날입니다.


  먼발치 아닌 곁에서 지켜보면서 붓을 쥐는 만화쟁이 또는 그림쟁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구경꾼 아닌 이웃이나 동무로서 바라보는 눈길로 붓놀림을 펼치는 그림쟁이 또는 만화쟁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없이 많은 사람이 복닥거리는 서울 한복판이나 한켠에서 태어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하고 가까운 시골이나 서울하고 매우 먼 시골에서 피어나거나 샘솟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더 높거나 낮은 자리가 없이, 더 크거나 낮은 사람이 없이, 서로 어우러지는 마을이 되고 고장이 되고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은 서울대로 아름답게 맞이하는 하루가 되고, 시골은 시골대로 사랑스럽게 피어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 아닌, 아침마다 기쁜 웃음으로 깨어나는 삶이 되면 좋겠어요. 《을지로 순환선》은 바로 이 같은 꿈을 품으며 붓을 쥔 아저씨 한 사람이 따사롭고 살가운 손길로 들려주는 노래가 담긴 만화그림책 또는 그림만화책이리라 봅니다. 2017.1.1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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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4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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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69



넌 귀신이 무섭구나

― 백귀야행 4

 이마 이치코 글·그림

 서미경 옮김

 시공사 펴냄, 1999.5.24. 5000원



  아이들은 어릴 적에 아무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아주 깜깜한 곳에 있든 아주 조용한 곳에 있든 아이들은 무엇이나 즐겁고 새롭게 누려요. 이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무서움’을 배우기 때문에 무섭다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어른이 무엇을 보고 무서워하니 ‘아, 저럴 때에 무서워해야 하는구나’ 하고 배우지요. 어른이 무엇을 보고 싫거나 안 좋다고 말하면 ‘아, 저런 것은 싫거나 안 좋아해야 하네’ 하고 배워요.



“리쓰! 보면 안 된다 보니까 따라오는 거야.” “보이는걸 어떡해.” “무서워하면 안 된다. 무서워하니까 따라오는 거야.” “무서운걸 어떡해.” (7쪽)


“인간 따위 무섭지 않아. 진짜 무서운 것은…….” (12쪽)



  만화책 《백귀야행》 넷째 권을 읽습니다. 너덧 살 어린 리쓰가 할아버지하고 나들이를 가면서 마주치는 ‘귀신’이나 ‘요괴’를 무서워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할아버지는 리쓰더러 무서움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으니 무서울 뿐이라고 알려주지요.


  그런데 어린 리쓰는 이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해요. 벌써 다른 어른한테서 ‘무서움’을 배워서 몸에 붙인 탓입니다. 삶을 배우기 앞서 무서움을 배웠고, 사랑을 알기 앞서 무서움에 익숙해졌거든요.



“나는 어렸을 때 겁쟁이여서 그런 녀석들을 무서워했지만, 너무나 쉽게 안주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는 사람의 마음이 정말로 무서운 거야.” (63쪽)


“네가 외로운 것은 언제까지나 그런 곳에 혼자 있기 때문이야. 이젠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 벚꽃은 매년 피고 있는데도, 너는 자신의 외로움만 생각해서 보려 하지 않았어.” (65쪽)



  스스로 무서워하기에 무섭듯이, 스스로 외로워하니까 외롭습니다. 그러면 달리 생각해 볼 수 있을 테지요. 스스로 즐겁기에 즐겁습니다. 스스로 웃기에 웃음꽃이에요. 스스로 노래하기에 노래잔치이지요. 스스로 춤을 추기에 춤꾼이에요.


  학원을 다니거나 전문가한테서 배워야 노래나 춤을 잘하지 않습니다. 작가한테서 배워야 글을 쓸 수 있지 않습니다. 화가한테서 배워야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가한테서 배워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아아, 그것은 당신에게 드릴게요. 당신의 손을 거쳤으니 그건 이미 당신의 것입니다.” (73쪽)


‘그것을 부처님 말씀이라고 믿다니, 하지만 그 낙천적이고 순수한 마음이 깃든 꽃이라면 정말로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태어날지도 모르겠다.’ (116쪽)



  맑은 마음에서 맑게 흐르는 노래가 태어납니다. 맑게 다스릴 줄 아는 마음에서 맑게 살림을 짓는 손길이 태어납니다. 이 마음은 바로 우리 스스로 빚습니다. 남이 빚어 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은 여러 모습을 보여줄 뿐이에요. 우리 둘레에서 우리한테 보여주는 모습 가운데 ‘내가 배워서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모습’은 언제나 우리 스스로 골라요.


  무서움을 배우니 무섭고, 두려움을 배우니 두려워요. 기쁨을 배우니 기쁘고, 넉넉함을 배우니 넉넉하지요. 귀신이 무섭다면 ‘귀신은 무서워’라고 하는 마음을 배웠기 때문이에요. 귀신이나 요괴는 사람하고 다른 테두리에서 살아가는 다른 넋이라는 대목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귀신이나 요괴를 꽃이나 풀이나 나무나 돌이나 모래나 바람이나 구름처럼 ‘그저 우리하고 조금 다른 자리에서 다르게 사는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살 수 있어요. 2017.1.7.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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