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후회망상 아가씨 1 -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도쿄 타라레바 아가씨
히가시무라 아키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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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56



‘마흔 노처녀’ 아닌 ‘빛나는 마흔’

― 도쿄 후회망상 아가씨 1

 히가시무라 아키코 글·그림

 최윤정 옮김

 학산문화사 펴냄, 2016.11.25. 4500원



  도쿄에서 혼자 살며 오랜 술동무하고 푸념을 늘어놓는 재미로 하루하루 보내는 아가씨가 있다 합니다. 이 아가씨는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스스로 좋아하는 동무하고 어우러지면서 날마다 아기자기한 삶을 짓는다고 해요. 때로는 잔뜩 풀어지거나 어수선하기도 하지만요.


  이러던 어느 날입니다. 이 아가씨는 언제나처럼 술동무하고 온갖 푸념을 풀어놓으면서 저녁을 보냅니다. 그때 그 술집에는 혼자 찾아와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모델 같은 젊은 사내가 있었대요. 나중에 알고 보니 모델 같은 젊은 사내가 아닌 참말 모델인 젊은 사내였다는데, 이 젊은 사내가 ‘술에 절어 마구 떠드는 아가씨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날렸다고 합니다.



20대 때는 당연히 멋진 가게에서 모였지만, 28살 때 카오리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왠지, 좀더 빨리 취하고 싶어. 아니, 벌컥벌컥 내 마음대로 마시고 싶어. 이제 샐러드니 파스타니 그딴 거 필요 없어, 난.” “솔직히 너무 비싸. 와인도, 음식도.” (19쪽)



  만화책 《후회망상 아가씨》(학산문화사,2016)에 나오는 아가씨는 참말로 만화책에서만 볼 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둘레에서 퍽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이웃일 수 있어요.


  서른이 넘고 마흔이 가깝도록 굳이 혼인을 안 하면서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서른 언저리나 마흔 가까운 나이에 꼭 아이를 잘 키워서 학교에 보내는 데에 온 하루를 써야 하지 않아요. 마흔으로 다가서는 아가씨들이 툭하면 단골 술집(이 술집은 술동무 아가씨 가운데 한 아가씨가 아버지하고 함께 일하는 곳입니다)에 모여 푸념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어요. 꼭 사내하고 짝꿍을 맺어 집에서 밥하고 살림해야 하지 않아요. 사내도 꼭 가시내하고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아 살림을 지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가장 좋아할 만한 일을 찾아서 기쁘게 하루를 누리면 되어요.



후회망상만 해 봤자 소용없다는 건 알지만, 10년 전 그때 그를 받아들였다면, 내 마음이 좀더 넓었다면,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둥, 오늘도 또, 술이 덜 깬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한다. (46∼47쪽)


올림픽까지 앞으로 6년. 그무렵이면 우리는 40세. 만일 6년 후에도 지금 이대로 혼자라면, 올림픽으로 축제 분위기인 도쿄 거리를, 우리는 어떤 얼굴로 걷고 있을까. (64∼65쪽)



  만화책 《후회망상 아가씨》에 나오는 아가씨는 귀가 얇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귀가 얇지는 않았대요. 예전에는, 이를테면 서른을 넘어가기 앞서만 해도 둘레에서 무어라 하든 콧방귀를 뀌었대요. 서른을 넘기까지는 스스로 믿고 스스로 사랑하며 스스로 제 일을 찾아 마음껏 날갯짓을 펼쳤대요.


  어쩌면 나이가 든 탓에 귀가 얇아질 수 있어요. 나이가 들며 둘레에서 가시내는 하나같이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아 돌보는구나 싶으니 그만 ‘이런 내 모습은 잘 산다고 할 만할까?’ 하고 돌아볼 수 있겠지요. 이러면서 ‘후회망상’에 사로잡히며 스스로 일을 그르칠 수 있을 테고요.


  저는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가씨가 스스로 좋아하는 길로 앞으로도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혼인하는 다른 가시내가 부러우면 부러워하지 말고 짝을 잘 찾아서 혼인을 하면 됩니다. 오랜 술동무가 살가우면서 즐거우면 이 술동무하고 앞으로도 재미난 늘그막을 누리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면 돼요.



설마,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새파란 신참의 육탄 공세에 당할 줄이야. 연예계가 더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각본은 전체 작업의 핵심이라, 좋은 작품만 쓰면 문제없을 거라 믿었는데, 아아 혹시, 그 아이, 젊어서 좋은 각본을 쓸 수 있는 건가. 내겐 없는 감각으로, 젊은 여자이기에 가능한 시점으로, 그 녀석이 납득할 만한 구리지 않은 각본을. (142∼143쪽)



  글을 쓰면서 혼자 잘 사는 사람이 있어요. 흙을 일구면서 혼자 잘 사는 사람이 있어요. 여느 회사 일을 하면서 혼자 밥 잘 지어 먹고, 혼자 책도 즐겁게 읽는 사람이 있어요.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하며 온누리를 여행하며 혼자 사는 사람이 있어요. 좋아하는 노래와 함께 혼자 사는 사람이 있고, 다른 눈치를 안 보며 혼자서 춤을 즐기는 사람이 있어요. 혼자 바느질을 하며 조용한 살림에 웃음짓는 사람이 있어요.


  가만히 보면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고 나서 ‘후회망상’에 사로잡힐 수 있어요.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았기에 ‘가장 나은’ 삶이 되지 않습니다. 혼인을 여러 번 했으나 다시 갈라서는 사람도 있어요. 이쪽이 더 좋지 않고, 저쪽이 덜 좋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르면서 저마다 즐거움을 찾는 길이에요.



거리에는 이렇게 멋진 남자들이 많은데, 왜 우리 상대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걸까. (131쪽)



  만화책에 나오는 아가씨는 방송 대본을 쓴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 대로 젊은 숨결을 빛내는 글을 쓰겠지요. 나이를 먹은 사람은 나이를 먹은 대로 겪은 삶을 담아서 글을 쓸 테고요. 스물에는 스물다운 글이 나오고 서른에는 서른다운 글이 나와요. 마흔에도 쉰에도 저마다 다른 삶결이 묻어나는 즐거움을 노래할 만해요.


  어느 모로 보면 ‘후회망상’도 썩 나쁘지 않습니다. ‘아, 그때 왜 그랬을까?’ 하고 되새기면서 앞으로는 그와 비슷한 일을 맞이할 적에 슬기로울 수 있어요. ‘이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오늘부터 새롭게 하루를 열 수 있어요.


  후회를 하거나 망상을 하는 동안 하루가 그냥 지나갑니다. 후회와 망상만 붙잡으면 어느새 나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잊습니다. 후회도 망상도 술 한 잔에 털어내고 앞으로 내딛을 꿈과 사랑으로 씩씩하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기를, 이 만화책에 나오는 아가씨뿐 아니라, 우리 모두한테 힘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마흔 살 노처녀”가 아닌 “빛나는 마흔”입니다. 2017.1.1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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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 거북이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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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66



쳇바퀴 도는 서울에서 그림으로 부르는 노래

― 을지로 순환선

 최호철 글·그림

 거북이북스 펴냄, 2008.2.27. 18000원



  한국에서 서울은 그야말로 커다랗습니다. 모든 고장에서 모든 길은 서울로 이어집니다. 전국 어디에서나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고, 서울에서는 또 전국 어디로든 가는 버스길이 있어요.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바로 이웃한 다른 고장으로 가는 버스길조차 없기 일쑤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사는 전남 고흥에서는 보성이나 장흥으로 가는 버스길이 없다시피 합니다. 고흥에서 보성하고 장흥은 바로 이웃입니다만, 벌교를 거쳐서 돌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이쪽 시골에서 저쪽 시골로 가는 길은 무척 멀어요. 이를테면 전남 고흥에서 충북 음성으로 가는 길은 아홉 시간 남짓 걸려요. 이리저리 돌고 돌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고흥에서 서울로 가고서, 다시 서울서 음성으로 가면 외려 ‘고흥에서 음성으로 바로 가려는 길’보다 몇 시간 적게 듭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한국은 서울공화국일 수 있습니다. 모두 서울로 모이고, 모두 서울하고 얽히며, 모두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셈이거든요. 최호철 님이 만화 또는 그림으로 빚은 《을지로 순환선》(거북이북스,2008)은 바로 이 서울공화국 언저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 사는 땅] 도시는 자신을 세워 준 이들의 터전을 숨기며 자란다. 더 커지면 아예 바깥으로 밀어내 버린다. (23쪽)

[3월의 초등학교 앞] 아직 새싹이 돋지 않는 아직 잎사귀 하나 없는 앙상한 나무 아래 햇병아리 신입생들을 목빼고 기다리는 어른들. 사랑으로, 걱정으로, 장삿속으로. (26쪽)



  처음부터 우람한 몸뚱이는 아니었을 서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다가 시나브로 우람한 몸뚱이가 되었을 테지요. 커지는 도시 서울은 차근차근 ‘이 커다란 도시를 세워 준 이’를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이른바 재개발이요, 철거입니다.


  오늘날 서울이나 둘레 도시에서는 초등학교 마칠 무렵 수많은 사람과 버스와 자동차가 학교 앞에 모인대요. 아이를 데려가려는 어버이가 있고, 학원버스가 매우 많아요. 아이들한테 군것질거리를 팔려는 이도 많고요. 학교 앞은 엄청난 ‘장사판’이 된답니다. 학교를 둘러싸고 수많은 학원이랑 가게가 얽힙니다.



[청계천 복원공사] 이제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물 없는 개천에 지하수를 끌어다 흐르게 할 때쯤이면 주변의 오래된 것들은 모두 떠밀려 가겠지. 저 떠나가는 노점상처럼. (50쪽)

[을지로 순환선] 끊임없이 거대한 도시의 일터와 쉼터 사이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맴도는 을지로 순환선. (55쪽)



  군사독재 정권이 올린 청계천 고가도로가 헐렸습니다. 가난한 집들을 가리려는 속셈으로 세웠다는 높직한 고가도로인데, 이 고가도로가 헐린 자리에 ‘전기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을 마련했다지요. 숲에서 숲다이 흐르는 냇물이 아닌, 발전소를 돌리고 전기를 끌어들이는 돈으로 땜질한 냇물입니다. 그래도 이만 한 냇물이 어디랴 싶으니, 청계천 둘레는 새로운 공원 구실을 합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은 빙글빙글 돈다고 해요. 어느 모로 보면 쳇바퀴처럼 돌아요. 그래도 지하철 2호선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오기는 하지요. 다른 지하철이나 전철을 탔다가 졸아서 잠들면 그만 다른 끝까지 가 버리고 말아 큰일이 나요.



[도시의 함박눈] 네모난 도시에 동글동글 눈이 내린다. 쌓일 곳도 스며들 땅도 없이 지저분하게 질척대다 하수구로 녹아 내릴 눈이 예쁘게 흩날린다. (60쪽)

[안국동 일본 대사관 앞 663번째 수요집회] 할머니들의 소리가 빗속의 눈물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그날까지. (108쪽)



  눈은 시골에만 내리지 않습니다. 눈은 숲이나 바다에만 내리지 않습니다. 눈은 아스팔트 찻길에도 내리고, 높다란 아파트나 주상복합에도 내립니다. 비록 도시에서는 눈을 몹시 성가시게 여겨서, 눈이 내리기 무섭게 몽땅 녹여 없애야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맞이하는 눈은 학원과 입시로 지친 아이들한테 한 줄기 숨통을 틔워 줍니다. 이 겨울에 맞이하는 눈은 ‘때로는 조금 천천히’ 가자는 생각을 북돋아 주어요.


  최호철 님이 《을지로 순환선》을 그릴 무렵만 해도 일본 대사관 앞 수요집회는 663번째였다는데, 어느새 1000번을 넘겼습니다. 이동안 ‘소녀상’이 일본 대사관 둘레에 서기도 합니다. 비록 제대로 뉘우치는 정치권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대사관 앞 소녀상을 몹시 거북하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할머니들 작은 손길이 모이고 퍼져서 ‘소녀상’이 섭니다. 평화로운 삶과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따사롭고 너른 마음이 뿌리를 내리려 합니다.



[마을버스 종점]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어도 여기가 종점인걸요. 자, 빨리 내려서 올라가셔야죠. 내일 새벽 또 일하러 나오려면요. (126쪽)

[공부] 책상보다도 작은 하늘이지만 이렇게라도 잠깐씩 맛을 보면 몇 시간 버티는 건 문제없다구. (132쪽)



  만화책하고 그림책 사이를 가만히 넘나드는 ‘그림이야기’인 《을지로 순환선》입니다. 우리네 살림이, 서울살이가, 이 나라 이 삶터가, 또 을지로 순환선 같은 도시 얼거리가, 여러모로 만화와 같고 그림과 같지 싶어요. 마치 만화에서 보는 듯한 이야기가 흐르는 삶이요, 그리고 참말 그림으로 그리는 듯한 따사롭거나 아름답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웃음이 피어나거나 즐거운 수많은 이야기가 넘실거리는 나날입니다.


  먼발치 아닌 곁에서 지켜보면서 붓을 쥐는 만화쟁이 또는 그림쟁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구경꾼 아닌 이웃이나 동무로서 바라보는 눈길로 붓놀림을 펼치는 그림쟁이 또는 만화쟁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없이 많은 사람이 복닥거리는 서울 한복판이나 한켠에서 태어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하고 가까운 시골이나 서울하고 매우 먼 시골에서 피어나거나 샘솟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더 높거나 낮은 자리가 없이, 더 크거나 낮은 사람이 없이, 서로 어우러지는 마을이 되고 고장이 되고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서울은 서울대로 아름답게 맞이하는 하루가 되고, 시골은 시골대로 사랑스럽게 피어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이 아닌, 아침마다 기쁜 웃음으로 깨어나는 삶이 되면 좋겠어요. 《을지로 순환선》은 바로 이 같은 꿈을 품으며 붓을 쥔 아저씨 한 사람이 따사롭고 살가운 손길로 들려주는 노래가 담긴 만화그림책 또는 그림만화책이리라 봅니다. 2017.1.1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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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귀야행 4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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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69



넌 귀신이 무섭구나

― 백귀야행 4

 이마 이치코 글·그림

 서미경 옮김

 시공사 펴냄, 1999.5.24. 5000원



  아이들은 어릴 적에 아무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아주 깜깜한 곳에 있든 아주 조용한 곳에 있든 아이들은 무엇이나 즐겁고 새롭게 누려요. 이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무서움’을 배우기 때문에 무섭다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어른이 무엇을 보고 무서워하니 ‘아, 저럴 때에 무서워해야 하는구나’ 하고 배우지요. 어른이 무엇을 보고 싫거나 안 좋다고 말하면 ‘아, 저런 것은 싫거나 안 좋아해야 하네’ 하고 배워요.



“리쓰! 보면 안 된다 보니까 따라오는 거야.” “보이는걸 어떡해.” “무서워하면 안 된다. 무서워하니까 따라오는 거야.” “무서운걸 어떡해.” (7쪽)


“인간 따위 무섭지 않아. 진짜 무서운 것은…….” (12쪽)



  만화책 《백귀야행》 넷째 권을 읽습니다. 너덧 살 어린 리쓰가 할아버지하고 나들이를 가면서 마주치는 ‘귀신’이나 ‘요괴’를 무서워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할아버지는 리쓰더러 무서움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으니 무서울 뿐이라고 알려주지요.


  그런데 어린 리쓰는 이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해요. 벌써 다른 어른한테서 ‘무서움’을 배워서 몸에 붙인 탓입니다. 삶을 배우기 앞서 무서움을 배웠고, 사랑을 알기 앞서 무서움에 익숙해졌거든요.



“나는 어렸을 때 겁쟁이여서 그런 녀석들을 무서워했지만, 너무나 쉽게 안주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는 사람의 마음이 정말로 무서운 거야.” (63쪽)


“네가 외로운 것은 언제까지나 그런 곳에 혼자 있기 때문이야. 이젠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 벚꽃은 매년 피고 있는데도, 너는 자신의 외로움만 생각해서 보려 하지 않았어.” (65쪽)



  스스로 무서워하기에 무섭듯이, 스스로 외로워하니까 외롭습니다. 그러면 달리 생각해 볼 수 있을 테지요. 스스로 즐겁기에 즐겁습니다. 스스로 웃기에 웃음꽃이에요. 스스로 노래하기에 노래잔치이지요. 스스로 춤을 추기에 춤꾼이에요.


  학원을 다니거나 전문가한테서 배워야 노래나 춤을 잘하지 않습니다. 작가한테서 배워야 글을 쓸 수 있지 않습니다. 화가한테서 배워야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가한테서 배워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아아, 그것은 당신에게 드릴게요. 당신의 손을 거쳤으니 그건 이미 당신의 것입니다.” (73쪽)


‘그것을 부처님 말씀이라고 믿다니, 하지만 그 낙천적이고 순수한 마음이 깃든 꽃이라면 정말로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태어날지도 모르겠다.’ (116쪽)



  맑은 마음에서 맑게 흐르는 노래가 태어납니다. 맑게 다스릴 줄 아는 마음에서 맑게 살림을 짓는 손길이 태어납니다. 이 마음은 바로 우리 스스로 빚습니다. 남이 빚어 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은 여러 모습을 보여줄 뿐이에요. 우리 둘레에서 우리한테 보여주는 모습 가운데 ‘내가 배워서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모습’은 언제나 우리 스스로 골라요.


  무서움을 배우니 무섭고, 두려움을 배우니 두려워요. 기쁨을 배우니 기쁘고, 넉넉함을 배우니 넉넉하지요. 귀신이 무섭다면 ‘귀신은 무서워’라고 하는 마음을 배웠기 때문이에요. 귀신이나 요괴는 사람하고 다른 테두리에서 살아가는 다른 넋이라는 대목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귀신이나 요괴를 꽃이나 풀이나 나무나 돌이나 모래나 바람이나 구름처럼 ‘그저 우리하고 조금 다른 자리에서 다르게 사는 이웃’으로 받아들이며 살 수 있어요. 2017.1.7.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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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쇄 미정 - 말단 편집자의 하루하루
가와사키 쇼헤이 지음, 김연한 옮김 / 그리조아(GRIJOA)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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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68



작은 출판사는 책을 어떻게 짓는가?

― 중쇄미정

 가와사키 쇼헤이 글·그림

 김연한 옮김

 그리조아 펴냄, 2016.12.12. 9900원



  자그마한 출판사가 꾸준하게 늘어납니다. 한두 사람이 일하면서 책을 짓는 출판사가 차츰 늘어납니다. 몇 억 원에 이르는 돈을 선인세로 치르고 온갖 곳에 광고를 수없이 하면서 책을 수십만 권씩 파는 커다란 출판사도 있지만, ‘책을 판 만큼’만 글쓴이한테 글삯을 치르고 광고 한 번 안 하면서 책손을 찾는 작은 출판사도 있습니다.


  《중쇄를 찍자》라는 만화책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만화책은 일본에서 연속극으로도 나왔다고 해요. 어느 ‘대형 만화책 출판사’에 들어간 새내기 편집자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 만화책(중쇄를 찍자)은 ‘책마을 속내’를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 출판사 이야기와 편집자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준다고 합니다. 다만 《중쇄를 찍자》는 ‘커다란 출판사가 판을 키워서 돌아가는 흐름’이 고갱이입니다. 커다란 출판사나 잡지사 얼거리를 그 만화책이 아기자기하게 다룬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작은 출판사에서 작게 책을 짓는 사람들 이야기하고는 사뭇 동떨어진다고 할 수 있어요.


  이에 작은 출판사에서 작게 책을 짓는 사람들 이야기가 조그맣게 만화책 한 권으로 나옵니다. 바로 《중쇄미정》(그리조아,2016)입니다.



“너, 무슨 생각 하면서 이 책을 편집했어?”“오로지 일정에 맞추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럼 OK. 보내.” (20∼21쪽)


“회사에서 잘까? 이 책 다 끝나면 목욕하러 가야지.” 야근을 하든 회사에서 잠을 자든 야근수당은 보통 안 나온다. 마감 직전에 늦게까지 일하는 모습은 편집자에겐 흔한 일상이다. (23쪽)



  만화책 《중쇄미정》을 그린 일본사람 가와사키 쇼헤이 님은 작은 출판사 편집자 일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이이는 《중쇄를 찍자》라는 만화책을 좋아하며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는데, 이 만화책에 못 담은 작은 출판사 이야기를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싶다는 뜻으로 《중쇄미정》을 그렸다고 해요. 그래서 책이름도 ‘중쇄미정’입니다.


  2쇄나 3쇄나 4쇄를 찍을 수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다는 ‘중쇄미정’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책을 꾸준히 엮어서 펴내려 합니다. 이름나거나 손꼽히는 글쓴이를 만나서 잘 팔리는 책을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 사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만지고 종이를 고르며 책 한 권 묶습니다.



“오자 없는 책은 없어. 오자는 책의 꽃이야. 그러니 마음에 담지 마.” (29쪽)


“유능한 편집자란 게 뭔데?” “중쇄를 팍팍 찍는 책을 편집하는…….” “술 한잔 하러 가자. …… 중쇄를 못 찍는 책은 나쁜 책일까?” “한 잔 더 주세요.” “중쇄를 찍고 돈을 벌면, 그게 뭐지? 만 명을 위한 책을 편집하면 천 명을 버리게 돼. 그럼, 그 천 명은 대체 어떻게 책을 즐겨야 할까? 만 명 안에 들어가야 할까? 만 명과 같은 취향을 가지라고?” (38∼40쪽)



  작은 출판사라고 해서 큰 출판사처럼 책을 잔뜩 파는 일을 못 하지는 않습니다. 작은 출판사라고 해서 책을 못 팔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만, 큰 출판사하고 작은 출판사에서는 무엇보다 한 가지가 달라요. 큰 출판사는 ‘일하는 사람’이 많고 ‘매출액’이 큽니다. 큰 출판사에서는 한 해 동안 1쇄를 판다든지, 여러 해에 걸쳐 1쇄를 파는 일은 어림도 없습니다. 큰 출판사에서는 이런 책은 쳐다보지 않아요.


  작은 출판사에서는 한 해에 1쇄를 찍을 수 있는 책을 낼 수 있습니다. 작은 출판사라고 해서 팔림새를 안 살피지는 않으나, ‘아주 많지 않은 독자’라 하더라도 ‘이 이야기를 사랑해 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으로 책을 펴내요. 한 해에 1쇄씩 열 해 동안 팔면 열 해에 걸쳐 10쇄를 찍으면서 ‘독자를 꾸준히 늘려’ 주는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어요.


  큰 출판사에서는 ‘매출이 떨어지는 책’은 이내 절판이나 품절이 됩니다. 다른 책을 얼른 찍어서 불티나게 팔려는 얼거리예요. 큰 출판사는 도서목록만 해도 두툼한 책입니다. 큰 출판사 편집자는 ‘편집자 스스로 엮은 책’이 아닌 ‘같은 출판사 다른 편집자가 엮은 책’을 읽을 겨를이 없습니다. ‘큰 출판사에서 그동안 펴낸 책’을 읽을 틈조차 없어요. 게다가 너무 많아요. 이러다 보니 큰 출판사에서는 ‘그동안 큰 출판사에서 펴낸 모든 책을 독자한테 알리면서 팔 수 있는 얼거리’가 없습니다.



“이 책에 독자는 있어?” “있습니다. 제가 독자입니다. 팔리든 말든 알 바 아니에요. 제가 읽고 싶습니다.” “좋아, 하자.” (55∼56쪽)


“간이 부었구나.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해 주마.” “해 보시지. 전부 직거래로 돌리거나 아마존에서 팔 거야.” “그럼, 돗토리 현의 별모래 북스에 너희 책 배본 안 해도 되는 거지?” “거래처 바꾸라고 할 거야.” (68쪽)



  작은 출판사에서 도서목록을 꾸린다면 작은 종이 한 장이 될 수 있습니다. 쉰 가지나 백 가지 책을 냈어도 종이 몇 장이면 넉넉합니다. 작은 출판사에서는 이곳에서 내는 모든 책을 품습니다. 어느 만큼 팔아 보다가 안 팔린다 싶으면 절판이나 품절로 돌리지 않아요. 머잖아 ‘독자가 이 책에 깃든 값어치와 이야기’를 알아보리라 하는 믿음으로 고이 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은 출판사는 ‘책 한 권을 고이 품으려는 손길’로 책을 지어요. 이른바 ‘밀어내기’ 책을 내지 않는 작은 출판사입니다. 매출 크기를 늘릴 생각으로는 책을 내지 않는 작은 출판사예요. 모든 책을 우리 아이로 여기면서 알뜰살뜰 여미는 작은 출판사이지요.


  그렇다고 큰 출판사가 ‘모든 책을 밀어내기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큰 출판사는 너무 많은 책을 너무 자주 내놓아야 하는 얼거리이다 보니, 큰 출판사에서 낸 책들이 골고루 알려지기 어려워요. 큰 출판사에서는 ‘대표 도서’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낸 책도 새로 낼 책도 너무 많거든요. 이와 달리 작은 출판사는 ‘대표 도서’를 두지 않고 ‘모든 책이 저마다 사랑스럽다’고 하는 이야기를 독자한테 들려주려고 합니다.



“저기 말야, 믿고 기다리는 게 잘못은 아니지만, 믿는 데는 애정이 필요해. 애정이 없으면 상대방은 네 믿음을 받아주지 않아.” (90쪽)


“뭐, 쓰긴 하겠다만, 자네는 정말 내 원고를 읽고 싶은가?”“네? 읽는 건 독자입니다. 선생님은 독자를 위해 쓰시는 거예요.” (111쪽)


“소제목을 멋지게 단다고 별점 하나 더 주지 않아. 무엇보다 소제목이란 건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일 뿐이야. 비위 맞춰서 키운 독해력은 결국 우리가 대가를 치러야 해. 편집자가 그런 걸로 애써 봤자 독자는 미아가 될 뿐이야.” (127쪽)



  만화책 《중쇄미정》은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와 영업자와 관리자가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책을 지으려 하는가를 익살을 살짝 보태어 들려주려 합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너무 들뜨지 않게, 그렇지만 너무 가볍지 않게, 또 너무 어둡지 않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요.


  앞날을 알 길이 없지만, 3쇄나 4쇄는커녕 2쇄를 찍을 수 있는지조차 까마득하다고 할 수 있는 ‘중쇄미정’이지만, 책을 아끼고 싶은 숨결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큰 출판사는 ‘공장’이에요. 같은 물건(책)을 더 많이 찍어내어 더 많이 팔아서 회사(커다란 몸집)를 버티어야 하는 얼거리입니다. 작은 출판사는 ‘수공예’예요. 같은 물건(책)을 더 많거나 빠르게 찍어낼 수 없는 얼거리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좋아할 책을 다 다른 손길로 빚는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는 살림입니다.


  사회 한쪽에 커다란 공장이 있으면, 마을 한쪽에 작은 지음방(공방)이 있을 만합니다. 꼭 높다란 아파트만 올라서야 하지 않아요. 마당이 있고 텃밭을 두는 자그마한 골목집을 지을 수 있어요. 만화책 《중쇄미정》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마을마다 다 다르’고, ‘마을에 사는 사람도 다 다르’다고 하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비록 팔림새가 대단하지 않고, 언론에서 눈여겨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참 이쁜 책이로구나’ 하고 사람들이 느낄 만한 이야기가 흐른다면, 이러한 책을 짓는 작은 출판사가 도시와 시골 곳곳에 상냥하게 깃들 수 있으면 우리 삶자리는 한결 너르고 넉넉하며 아름다울 만하지 싶습니다.


  만화책 《중쇄미정》이 2쇄를 찍고 3쇄를 찍으면서 이 작은 이야기에 서린 사랑이 곱게 씨앗을 퍼뜨릴 수 있기를 빕니다. 2017.1.3.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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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7-01-0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홍철의 책을 읽다가 작은 출판사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작은 출판사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궁금했는데, 이 만화 참 인상적이네요.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 다르게 좋아할 책을 만들어내는 것... ^^

숲노래 2017-01-04 17:54   좋아요 0 | URL
몇몇 유명작가를 키우고 홍보해서 수십만 수백만 베스트셀러를 키우는 책마을 아닌, 다양성과 개성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작가로 태어나서 더 너르고 깊은 이야기를 골고루 펼치는 길이라고 하는 작은 출판이 될 때에 사회도 문화도 달라질 만하리라 생각해요. 재미난 만화책이었어요 ^^
 
백귀야행 3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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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665



귀신한테도 마음이 있으니

― 백귀야행 3

 이마 이치코 글·그림

 강경원 옮김

 시공사 펴냄, 1999.3.15. 5000원



  오늘날 아파트에는 ‘지킴이’를 안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늘날 아파트에는 ‘지킴이’를 둘 자리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부터 어느 겨레이든 집이나 마을에는 ‘사람’뿐 아니라 ‘사람 아닌 다른 넋’이 함께 있다고 여겼어요. 한겨레는 ‘사람 아닌 다른 넋’ 가운데 사람을 보살핀다는 ‘지킴이’를 헤아렸고, 집이나 마을 곳곳에 ‘사람 아닌 다른 넋’을 기리거나 모시거나 섬기거나 아끼는 ‘무언가’를 두었어요. 이러면서 먹을거리를 조금씩 덜어서 함께 나누었고요.


  지난날 한겨레를 비롯해서 지구별 여러 겨레는 다 다른 모습과 몸짓으로 ‘사람 아닌 다른 넋’을 기리거나 모셨어요. 어느 모로는 두려워하기도 했고, 어느 모로는 포근히 여기기도 했어요. 어느 모로는 깍듯이 생각하기도 했고, 어느 모로는 살가운 동무나 이웃으로 삼기도 했어요.


  그러고 보면 짚과 풀과 나무와 돌로 지은 한겨레 옛집에는 개구리도 지네도 풀벌레도 거미도 개미도 같이 살아요. 이뿐인가요. 서까래에는 참새 둥지도 있고, 처마 밑에는 제비 둥지도 있지요. 더구나 구렁이까지 한집에서 살고요. 흙에는 지렁이랑 두더지가 함께 살고, 수많은 풀벌레랑 딱정벌레가 집이며 마을에 함께 있어요. 여기에 온갖 새가 함께 살지요.



“깜짝 놀랄 테니 보러 와. 사실은 어제 저녁 우리 집 정원에 갑자기 …… 연못이 생겼다고 친구한테 전화했는데, 어떻게 하룻밤만에 없어진 거야?” (52쪽)


“사실은 우리들, 이 집에서 굉장히 외롭거든요. 좀 제멋대로긴 하지만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모두들 당신이나 후유키 같으면 좋을 텐데.” (75쪽)


‘도대체 수호신이란 뭘까? 그 집은 (수호신이던) 그녀들의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어.’ (95쪽)



  이마 이치코 님 만화책 《백귀야행》 셋째 권을 읽으며 이 많은 ‘다른 넋’을 하나하나 그려 봅니다. 이 만화책에는 “온갖 귀신(백귀)”이 다 나오는데, 이 “온갖 귀신”은 그야말로 ‘저승’에서 살다가 ‘이승으로 와서 사람하고 함께 사는’ 요괴나 마물이 있다고 해요. 사람을 괴롭히고 싶은 요괴나 마물이 있다 하고, 사람을 돕고 싶은 요괴나 마물이 있다 하며,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요괴나 마물이 있다 해요. 그리고 이승에서 목숨이 다했으나 미처 저승으로 건너가지 못한 채 ‘몸 없는 넋으로만 이승에 남아’서 넋씻이를 받아야 하는 “죽은 사람”도 있대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어느새 이런 곳에 문이.” “할머님, 여기에는 옛날부터 문이 있었어요. 다들 보지 못했던 것뿐이에요. 전 이 집에 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사람들은 진짜로 있었던 거예요.” (100쪽)


‘아버님께서는 요괴와 인간 사이에서는 아이가 생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그건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그녀들을 보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통하기만 한다면, 자식을 낳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저는 작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내년 봄에는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에요.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아내에게 호적이 없기 때문에…….’ (116쪽)



  ‘귀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는 무 자르듯이 섣불리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느껴요. 그런데 꽤 많은 사람들은 깜깜한 곳을 무서워해요. 밤을 무서워한다든지 사람 없는 깊은 숲을 무서워하기도 해요. 아무도 없는 지하실이나 창고를 무서워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왜 무서워해야 할까요? 혼자이니까? 귀신이 있으니까? 아니면 그냥? 귀신이 있다면 귀신은 왜 무서워해야 할까요? 겉모습이 여느 사람하고 달라서 무서워해야 할까요? 무시무시하거나 끔찍해 보여서 무서워해야 할까요?


  영화 〈식스 센스〉를 보면 ‘죽은 사람’이 나오고, ‘죽은 사람을 보는 아이’가 나와요. 죽은 사람을 보는 아이는 ‘죽은 사람’ 때문에 늘 무서워서 떨어요. 더욱이 ‘죽은 사람을 보는 아이’를 제대로 헤아리면서 이 아이를 돕는 어른이 없어요. 왜냐하면 거의 모든 어른은 ‘죽은 사람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저 애는 사물을 뚜렷이 가려내는 것이 두려운 거예요. 자신에게 익숙한 모습을 보고 안심하고 싶었던 거지요. 하지만 덕분에 당신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187쪽)


“왜,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지? 분별없는 말을 입에 올리면, 그대로 된다잖아.” (203쪽)



  만화책 《백귀야행》에 나오는 주인공 가운데 고등학생 남학생 리쓰는 어릴 적부터 ‘수많은 귀신과 요괴와 마물’을 보면서 괴롭습니다. 게다가 학교나 마을이나 집에서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을 보는 사람이 없어요. 할아버지는 늘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을 보지만 일찍 돌아가셨어요. 주인공 남학생은 어릴 적부터 학교 공부는 도무지 할 수 없는데다가 집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일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수많은 귀신과 요괴와 마물을 느끼고 보기 때문이에요.


  이 만화책에서 다른 주인공인 여대생 사촌 즈카사도 리쓰처럼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을 봅니다. 그러나 즈카사는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냥 말을 걸거나 그냥 지나칩니다. 그래서 다른 주인공인 리쓰네 사촌 누나는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을 보더라도 아무렇지 않은데, 때때로 소스라치게 놀라지요.



“잘 보라구. 이건 즈키사 누나 때문에 생긴 거야. 다 누나가 불러들인 거란 말야! 이런 것들은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엄마가 돌아가실 리 없잖아! 즈카사 누나의 불안과 공포가 저급의 요마들을 불러모은 거야. 영능력이 어중간하기 때문에 대처하는 게 미숙해서 그래.” (215쪽)



  만화책에 나오는 고등학교 남학생은 학교 공부는 도무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동무를 사귀지도 못합니다. 다른 아이들은 ‘귀신을 볼 줄 아는’ 이 아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놀리거나 괴롭힐 뿐입니다. 귀신은 못 보고 ‘사람만 보는’ 다른 아이들은 막상 ‘사람을 보기’는 하지만, 저희하고 ‘똑같은 사람’인 리쓰라고 하는 아이를 따사로운 마음으로 맞아들이지 않아요.


  학교에 동무는 없으나 사촌 누나가 거의 동무와 같습니다. 두 사람이 ‘귀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이보다는 ‘마음을 헤아리면서 아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리쓰라는 아이는 ‘귀신이나 요괴나 마물이 어떤 마음’인가를 읽으려 합니다. 귀신을 보기만 할 뿐 아니라 ‘귀신이 어떤 마음’인가를 읽고서 넋씻이를 도와주지요.



“에미의 소행을 그만두게 하고자 잠자리를 바꾸고 숨어 있는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는 꿈에도 모르고 죽여버린 겁니다. 저는 슬픔에 못 이겨 산속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자신이 한 일조차 잊고 있었나 봅니다. 단지 슬프고 미련이 남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남아 있었던 거죠. 왜 이렇게 중요한 걸 잊고 있었을까. 제가 기억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아이는 다시 한 번 저를 찾아온 거예요. 미안, 미안하다, 용서해 주렴. 혼자서 쓸쓸했지. 같이 가자꾸나. 용서해 주렴.” (222∼223쪽)



  사람하고 사람 사이에서도 마음을 못 읽으면 서로 동무나 이웃이 못 됩니다. 우리가 서로 동무나 이웃이 된다면, 우리가 서로 마음을 읽고 나누며 아낀다는 뜻이에요. 귀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또는 귀신을 볼 줄 알거나 볼 줄 모르거나, 이런 여러 가지는 대수롭지 않아요. 서로 마음을 볼 줄 아느냐가 대수롭지 싶어요. 서로 마음을 바라보면서 아낄 줄 아느냐를 살펴야지 싶어요.


  만화책 《백귀야행》은 귀신과 요괴와 마물 이야기를 엮으면서 이 자리에 ‘마음’을 가만히 얹습니다.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어떤 마음인가를 돌아보도록 넌지시 이끌어 줍니다.


  그러고 보니, 이 만화책에 나오는 리쓰네 어머니나 할머니는 리쓰가 어릴 적에 ‘산수 시험 5점’을 받아도 걱정하지 않아요. 시험종이에 이름을 썼으니 잘했다고 여겨요. 공부가 시원치 않더라도 마음을 쓰지 않아요. 아이가 튼튼하면서 씩씩하게 잘 자라는 데에만 마음을 써요. 아이가 스스로 꿈을 찾고 제 길을 생각하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여요.


  어쩌면 바로 이런 마음이 흐르기 때문에 ‘귀신을 보든 말든’ 또 ‘귀신을 믿든 말든’, 만화책에 나오는 아이가 아름다운 마음에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차츰차츰 거듭날 수 있구나 싶기도 합니다. 2016.12.31.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만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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