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신전에 입장하면서 읽은 내용은 ‘그노티 세아우톤GNOTHISEAUTON’으로, 너 자신을 알라는 의미이다." p565
우리 자신. 인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책이 있다. 특히, 우리 인류가 선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책이 있다. 저자 브레흐만은 호모 사피엔스는 악하고 폭력적이고 어리석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정도는 되어야 소란 없이 이끌 수 있다는 지배자의 논리와 그것을 찬양하며 뒷받침하는 실험들과 사건 보도를 하나하나 들추고 진실을 정말 끝까지 추적해서 인류가 그동안 받고 있던 누명을 벗겨내기 위해 7년 동안 작업했다.
파리 대왕. 첫 번째 털기의 대상은 윌리엄 골딩이 노벨상을 받게 해준 파리 대왕이다. 파리가 그 파리 (Flies) 일까라고 생각했다. 맞았다. 그 파리. 하지만 곤충 파리의 대왕은 히브리어로 '바알즈붑(바알제붑)' 이고, 바알즈붑은 '높은 거처의 주인(the master of high dwelling)' 이라고 불린 바알을 낮추어 부르는 멸칭이다. 바알 (Baal)은 고대 가나안 일대에서 숭배받던 신인데, 히브리어 'BI (벨, 발)'은 주인이라는 뜻이고 'al(알)'은 신이라는 뜻으로 신의 주인, 신 중의 신이라는 뜻이지만, 유대인에게는 이민족의 신이었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바알을 멸칭으로 파리 대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바알은 신약 시대 이후에는 사탄과 동일시되었는데,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은 바알제붑 즉 바알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 인간의 '사악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골딩은 비행기가 추락하고 살아남은 몇 명의 소년들이 무법의 악마가 되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이 '바알'과 같이 악함을 이야기한다.
나무위키: 바알세불,
나무위키: 파리 대왕(소설)
브레흐만은 바알의 멸칭인 파리 대왕을 벗겨내고 원래의 명칭인 높은 거처의 주인(the master of high dwelling)을 찾아주려 한다. 브레흐만은 실제로 소년들이 무인도에 남겨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했다. 알코올중독자에 우울증 성향이 있었고, 어린 자신을 때리던 윌리엄 골딩이 지어낸 이 이야기가 실세계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찾아보기로 했다. 유사한 사건을 검색하던 중 1977년 여섯 명의 소년들이 낚시하기 위해 배를 타고 통가를 출발했다가 무인도에 좌초되어 구출된 일을 찾게 되었고, 그 아이들을 구출한 선장과 그 아이 중 한 명을 만난다. 그 소년들은 파리 대왕의 소년들과 다르게 건강했었고 밝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구출 당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최상의 상태였다. 물론 그들도 자신들의 이야기와 비슷한 파리 대왕을 일어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말한다.
"네, 읽었어요. 하지만 실제 일어난 일과는 완전히 달라요!" p79
어쩌면 이 말이 이 책의 전체 주제일지도 모른다. "읽었어요. 하지만 그것을 실제와는 전혀 다른 일이에요".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는 들었던 읽었던 일들은 실제로는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다.
스키너의 <심리 상자 열기>는 그 표지만큼이나 구역질 나고 소름이 돋는 실험들이 가득하다. 스키너가 딸에게 했다는 실험은 거짓이라고 책은 밝히지만, 그 문제는 둘째치고 스키너가 이야기하는 실험들은 '관찰'과는 다르게 의도되고 그 의도됨을 넘어 강제되고 조작되는 '실험'들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브레흐만은 그 무가치함과 유해함을 파헤친다.
유명한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인간은 상황에 따라 사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교도관과 수감자 역할극으로 증거한다. 그리고 그 실험은 짐바르도를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심리학자로 만들어 미국 심리학협회 회장까지 역임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결국 이 실험은 실제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2002년 BBC가 유사한 실험을 리얼리티 쇼 형식으로 방송에 내보냈지만, 4시간 동안 시청자들은 무료함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마지막엔 교도관과 수감자가 친구가 되었다. 왜 짐바르도의 실험처럼 수감자들의 발에 쇠사슬을 채워지고 옷을 벗은 채 15분 동안 서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짐바르도의 실험은 조작되었다. 실험자들은 실험 전날 교도관들을 교육 했고, 수감자들을 더 가혹하게 대하라고 강제되었다.
요구특성 (demand characteristics): 참가자가 실험의 목적과 가설을 눈치채고 적당히 그 실험목적에 부합하도록 맞추어 주는 현상.
나무위키: 요구특성
"과학 시험을 계획적 생산으로 바꾸어버린다" p244
인간은 처한 상황에 따라 선인이나 악인이 된다고 하는데, 특히 그 악인이 되는 상황을 짐바르도의 실험은 계획적으로 생산해냈다. 파리 대왕이 무인도 소년들을 허구의 이야기로 사탄인 바알로 그린 것에 비하면 짐바르도의 교도소 실험은 좀 더 과학적(?) 이다.
우리 호모사피엔스를 억울하게 성악설로 매도한 것은 "이야기"와 "과학적 실험"에 이어 "뉴스"가 또 한몫을 한다.
1964년 3월 새벽 3시 캐서린 제노비스가 38명의 목격자들이 38명의 방관자로 전락한 가운데 칼에 찔려 사망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안전을 주제로 한 방송에서 캐서린 제노비스의 사건을 실례로 들면서, 도움을 요청할 때는 사람을 지목하라고 한다. "거기 뾰족 마스크를 쓰고 까만 마스크 줄을 한 분! 경찰에 좀 신고해주세요"라고 도움을 요청하라고 한다. 그래야 "나는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I didn't want to get involved)"라는 말이 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정말 그럴까? 내 눈앞에서 누군가 죽어 가고 있을 때 나는 수수방관할 수 있을까?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국선변호사 브레흐만은 의문을 품고 파헤치기 시작했다. 톺아보기 시작했다.
톺아보다: [2]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
국립국어원: 톺아보다의 의미에 대한 질문입니다.
유사한 실험에서 사건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록 도움을 주는 비율은 낮아졌지만, 0%는 아니었다. 암스테르담의 운하에 아이와 엄마가 탄 차가 빠졌을 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물에 빠진 차를 본 사람들은 각자의 구조 도구를 들고 운하로 달려가 극적으로 아이와 엄마를 구했다.
그런데 캐서린 제노비스는 왜 칼에 찔려 방관자들 앞에서 죽었을까? 거짓이었다. 제노비스가 죽은 것이 거짓이 아니고 그 죽음을 묘사한 뉴스가 거짓이었다. 이 기사를 1면으로 보도한 뉴욕타임스가 거짓을 말한 것이고, 이것을 밝히려고 했던 기자들은 이제 전 세계 심리학과 1학년이면 모두 수업 시간에 듣는 제노비스의 이야기를 어떻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느냐며 뉴욕타임스로부터 호통을 듣는다고 한다. 제노비스가 칼에 찔려 죽은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뉴스에 의해 조작된 거짓이었다.
방관자라고 했던 사람들은 두 명을 제외하고는 비명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비몽사몽이었고, 술 취한 여자의 술주정으로도 생각할 만큼 취객들이 지나가는 곳이었고, 심지어 두 명은 경찰에 바로 신고했으나 경찰은 오지 않았고, 제노비스는 쓸쓸하게 길바닥에서 혼자 차갑게 죽은 것이 아니고 연락을 받고 내려온 이웃의 품에 안긴 채 죽었다고 한다. 사실은 왜곡되어 자극적으로 신문의 판매 부수를 올렸을 뿐이다. 며칠 후 범인이 잡힌 것에 대해서는 단 한 줄의 기사도 나지 않았고, 제노비스가 죽을 때 안고 있던 여성의 인터뷰는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제노비스의 죽음은 뉴욕타임스의 신문 판매 부수를 단지 늘렸을 뿐만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다시 화자 되었다. 우리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흥미 있는 이야기의 단초라고 말이다.
사실, 브레흐만이 가장 격분한 것은 '뉴스'다. 극소수의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것만 확대해석하고 왜곡해서 대중에게 무차별 살포하는 뉴스가 우리의 '부정편향'이라는 인지적 오류에 인한 비관적인 인간관을 강화시킨다고 목이 터져라 힘껏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악한 뉴스는 우리의 유일한 장점 중의 하나인 '얼굴 붉히기'에도 무너지지 않게 된 지도자들에게 권력 유지를 위한 가장 비열한 수단이 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보다 지능이 높고 신체적으로도 우수한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키고 지금 지구를 지배하고 우주로 나아가고 있을까? 사피엔스는 인지 혁명과 농업혁명 그리고 과학혁명의 단계로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지배를 설명한다. 하지만 브레흐만은 휴먼카인드에서 '은여우 길들이기 실험'으로 묘사한다.
야생의 은여우를 몇십대에 걸쳐 길들인 러시아의 드미트리 벨랴예프 교수와 류드밀라 트루트의 실험은 오직 '친화성이 있는 개체'만을 선택해서 번식 시켜 나갔다. 즉, 우연히 꼬리를 흔드는 은여우가 있으면, 그 개체를 번식시킨 것이다. 수십 대가 지나자 야생 은여우에게 가축의 특징이 나타났다. 귀가 아래로 처지고 꼬리가 말리며 털에 반점이 나타났다. 이 결과가 덜 똑똑하고 덜 강한 호모사피엔스가 더 똑똑하고 더 강한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킨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열쇠는 무엇일까? 열쇠는 유형진화이다.
유형진화는 성체가 되어도 유생 시기의 형질이 남게 되는 계통 발생적 변화라고 하는데, 어른이 되어도 친화성이 높아서 아이 같이 덜 공격적이고 접근하기 좋다는 말이다. 그래서 야생 은여우가 친화성이 발달하자 친화성이 발달한 가축에게 볼 수 있는 특징들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친화성은 왜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친화성이 높으면 모방을 잘 할 수 있다. 즉, 소수의 엘리트와 나머지 덜 친화적인 집단보다는 극소수의 엘리트 집단과 친화력이 뛰어난 나머지가 있는 집단이 더 발전한다는 뜻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아주 뛰어나지만, 호모사피엔스보다 덜 친화적이기 때문에 낚시나 전투 기술이 조직 내에 퍼지는 것이 호모사피엔스보다 느리다는 것이다. 호모사피엔스는 더 작은 뇌와 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혁신적인 기술이 어쩌다 한 번 만들어져도 번개같이 모방해서 조직 전체에 퍼트린다는 것이다.
브레흐만은 '친화력'을 우리 인류의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장점으로 꼽았다. 그리고 그 친화력은 우리가 '선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Human is Kind라는 책을 쓴 것이다. 우리가 승산이 없어 보이는 전쟁에서 이겼고 이만큼 발전한 것은 '선한 본성' 때문인데, 우리 인류의 역사 중 수렵과 채집의 95%가 지나고 나머지 5% 동안 불운하게도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의 비옥한 범람으로 정착을 시작하고 사유재산 제도가 생기면서 우리는 '악해졌다'. 결국, 사악한 지배층은 정착과 사유재산제도로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들은 우리가 모두 지배자 자신들처럼 사악하다고 세뇌하며 말도 안 되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전쟁을 일으키며 진실을 매도하고 있다. 그리고 전시가 아닐 때는 그 지배자들의 최전선에 '뉴스'가 있다.
지배자와 뉴스. 또한, 그사이에는 진실을 왜곡하며 명성을 얻으려는 사악한 지성인들이 제대로 한몫하고도 있다.
나도 덧붙인다.
우리 자신과 같이 우리는 '선하다'라고.
그런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그노티 세아우톤 GNOTHI SEAU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