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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히 살아있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음을 확실히 느낀다. 그것으로 충분치 않은가.˝
인생작을 만났다. 반전문학하면 떠오르는 작가로 대부분의 사람이 레마르크를 떠올릴거다. 나는 <서부전선 이상없다>와 <사랑할때와 죽을때> 두 작품을 읽고 <개선문>을 세번째로 읽었는데, <개선문>이 단연 최고였다. 두권으로 구성된 압박 때문에 쉽게 손이 안갔었는데 이제서야 읽다니 후회하면서도 그나마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재미와 교훈이 완벽한 작품이었다.
[두어 시간 전에도 그는 지금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그동안 한 인간이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순간순간 몇천명씩 죽어 나가지 않는가, 거기에 대한 통계도 있다. 그런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죽은 그 인간에게는 그 순간이 전부이며,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는 온 세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1권 39p
<개선문>은 1차 세계대전 종료 후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파리를 배경으로, 독일 출신 의사이자 피난민인 라비크의 이야기이다. 패전국인 독일에서도 쫓겨나고, 프랑스에서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야 했던 라비크는 어느곳에서든 이방인이었다.
[˝이전에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던 것이 지금은 파괴되고 말았소. 우리는 이제 줄 끊어진 유리알처럼 산산이 흩어져 있어요.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1권 120p
의사였던 그는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어서 파리에서 대리수술을 하면서 살아간다. 다른 피난민들보다는 경제적으로 상태가 좋았지만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불안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고 그에게는 허무함만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배우 지망생인 조앙 마두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하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신분운 숨겨야만 하고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라비크, 반면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조앙 마두는 잠시는 몰라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결국 라비크는 신분이 밝혀져서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게 되고, 조앙 마두는 그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린다고 그에게 말한다.
[그는 다시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 내 형편만 달랐다면 그 여자를 붙들어 둘 수 있었을까?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붙잡아 둔단 말인가? 오직 환영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환영이라도 충분하지 않은가? 언제 그 이상의 것을 얻기라도 했던가? 그 누가 이름도 없이 감각의 밑바닥에서 넘쳐흐르는 생명의 시커먼 소용돌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단 말인가?] 2권 1p
조앙 마두를 찾기 위해 라비크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보고 흔들린다. 사랑과 안정적인 삶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흔들릴 수 밖에 없는 두사람의 사랑은 지속될 수 있을까?
[˝전 억제할수가 없어요, 라비크. 무언가가 나를 몰아 가요. 마치 무언가를 늘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것을 붙들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내 것으로 만들고 나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래서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해요. 그렇게 해도 결국 이전과 마찬가지라는 것도 이미 알아요. 하지만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어요. 그것이 나를 몰아가고 어딘가로 내동댕이처요. 그러면 한동안은 그것이 나를 가득히 채워 줘요. 그리고 다시 그것이 놓아주게 되면, 나는 다시 굶주린 것처럼 팅 비어 버려요. 그리고 같은 짓을 반복한다고요.˝] 2권 228p
게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온 라비크는 자신의 원수인 하케를 우연히 만난다. 라비크는 독일에서 게슈타포에 쫓기는 친구를 숨겼다가 체포된 적이 있는데, 이 사건으로 그는 하케에게 고문을 당하고 연인이었던 시빌은 그 과정에서 자살을 하였으며,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파리로 망명한 것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평생의 원수였던 하케는 라비크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케에게 라비크는 많은 고문 대상자 중 한명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라비크는 하케를 유인하여 그를 처단한다. 오랜시간 동안 꿈꿔왔던 복수를 이룬것이다. 하지만 라비크는 여전히 소용돌이 속에 있을 뿐이었다. 전쟁의 기운은 고조되고 여전히 이방인으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머무를 곳을 찾을 수 있을까?
[그는 한 인간을 사랑했고, 그 인간을 잃었다. 그는 또한 한 인간을 미워했고, 그 인간을 죽였다. 두 인간이 다 그를 해방해 주었다. 한 사람은 그의 감정을 다시 살아나게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과거를 씻어 주엇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소망도 미움도 비탄도 없었다. 새로운 시작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다.] 2권 336p
이 작품이 사랑만을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다. 레마르크는 전쟁이라는 비극속에서도 사람들은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국적을 넘어서는 우정이 있다는 것을, 절망속에서도 작은 행복이 있다는 것을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다.
전쟁의 폭력 앞에서 사람들은 괴물이 되고, 무력해지며, 헤어지고, 비참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사랑과 우정을 계속해야 한다. 그게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