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판으로 다시 읽은 작품. 오래전에 읽어서 그런지 처음 읽는 기분이었다. 단편들이 다 좋았다.

"두번다시 여기로 돌아올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 P71

"문제는 당신이 나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는거예요.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의 내부에는 나한테 주어야 할 게 아무것도 없단 말이에요. 당신은 다정하고 친절하고 멋있지만 당신과의 생활은 마치 공기덩어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건 당신만의 책임만은 아니에요. 당신을 좋아하게 될 여성은 많이 있을거에요. 전화도 걸지 마세요. 남아 있는 내 짐은 모두 처분해 주세요." - P17

"하지만 그런 일들은 어딘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게 아닐 까?" - P29

"어쨌든 모닥불이 모두 꺼질 때까지 다다리자. 애써 피운 모닥불이잖아. 최후까지 같이 있고 싶어. 이 불이 꺼지고 칠흑같이 어두워지면, 같이 죽자." - P72

오른쪽 귓볼이 없었는데, 어릴 때 개한테 물어뜯겼기 때문이라고 했어.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본 적도 없는 커다란 검은 개가 넘벼들어 귀를 물어뜯었다는 거야. 그래도 귓볼만 뜯긴 게 다행이라고 그 사람은 밀하더구나. 귓볼이 없어도 사는데 지장은 없다고. 코라면 그렇게는 안 되겠지. 확실히 그말이 맞는다고 나도 생각했지. - P87

신이 인간을 시험할 수 있다면 왜 인간은 신을 시험해선 안 되는 거지? - P100

내가 뒤쫓고 있었던 건 아마도 내가 안고있는 암흑의 꼬리 같은 것이었다. 나는 우연히 그걸 봤고, 추적했고, 매달리려 했고, 최후에는 더욱 깊은 암흑 속에 팽개쳐져버린 것이다. 내가 그것을 보게 되는 일은 이제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 P101

가슴속에 있는 상념을 상대방의 손에 전달하려고 했다. 우리의 마음은 돌이 아닙니다. 돌은 언젠가 부너져 내릴지 모릅니다. 모습과 형태를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마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형태가 없는 것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디까지고 서로 전할 수 있습니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을 추는 겁니다. - P107

지금까지지와 다른 소설을 쓰자, 하고 준페이는 생각한다. 날이 새어 주위가 밝아지고, 그 빛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꼭 껴안고 누군가가 꿈꾸며 애타게 기다리고있는 것 같은 그런 소설을. 하지만 지금은 우선 여기에 있으면서 두 여자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상대 가누구든, 영문 모를 상자속에 넣어지게 해선 안된다. 설사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대지가 소리를 내며 갈라진다 해도.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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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8-12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은 한 번도 못 읽어봤는데, 새파랑님이 남겨주신 글을 읽으니, 관심이 가네요? 기웃기웃

새파랑 2025-08-12 14:22   좋아요 1 | URL
저는 곰돌이님 글 보고 박솔뫼 작가님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하루키 팬으로써 모든 작품이 다 좋습니다~! 아직 한번도 안읽으셨다니 부럽네요~!! 하루키 소설은 장편 단편 다 좋습니다~!!

곰돌이 2025-08-12 15:05   좋아요 1 | URL
박솔뫼 작가님 작품 중에서 <미래 산책 연습>을 가장 좋아해요. 처음에는 조금 갈 길을 잃은 사람처럼 막막해했었거든요? 그러다가 빠져버렸어요. 새파랑님에게는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궁금하네요. 자신의 결과 맞든 잘 안 맞든 여러 작품을 접한다는 그 자체가 좋은 것 같아요. ㅎㅎㅎ

새파랑 2025-08-12 15:12   좋아요 1 | URL
곰돌이님 평이 좋아서 미래산책을 우선 구매했습니다 ㅋ 땡투도 했어요~! 이제 50장 정도 읽었습니다~!!!

곰돌이 2025-08-12 15:29   좋아요 0 | URL
저 같은 사람을 믿고 구매를 하신 게 뒤에서 자꾸 누가 옷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불편은 하지만 좋은 시간 되시길요. ㅎㅎㅎ 땡투는 감사합니다. 그런 일이 거의 없는데 말이죠. 제가 즐겨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호불호가 있는 박솔뫼 작가님의 작품은 확실히 독특한 편이어서 처음엔 친해지려고 노력이 필요하더라고요. 말이 점점 길어지네요. 늦었지만 저 이만 가볼게요. 휘리릭
 
추락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6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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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71

"어쩌면 가끔씩 쓰러지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죠.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지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볼 때마다 안정적인 나라라는 생각을 했었었다. 왠지 아프리카 이지만 아프리카가 아닌듯한 나라, 왠지 다른 아프리카 대륙 보다는 괜찮아 보이는 나라라는 인상이 있었다. 아무래도 백인의 비율이 높다는 것 때문에 그런 선입견이 생긴것 같은데 쿳시의 <추락>을 읽고 내가 정말 무지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인종차별주의 시각이 있었다는걸 반성했다.


<추락>은 크게 세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수도인 케이프타운에서 노년의 대학교수이자 백인인 루리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이용해서 여러 여자들과 난잡한 성생활을 하다가 결국 자신의 여제자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대학교에서 쫓겨나는 추락이다. 사실 이런 난잡(?)한 이야기는 소설속에서 많이 봤었기 때문에 별 거부감은 없었다. 나쁜놈이긴 하지만...백인사회의 도덕적 몰락...

["우리가 당신들 손에 아이들을 맏기는 건 당신들을 믿을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대학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딸을 독사의 소굴로 보낸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어요. 루리 교수님. 당신이 고매하고 권력있고 온갓 학위를 다 갖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당신이라면, 하느님 맙소사, 나는 나 자신이 이주 부끄러울 거에요. 민약 내가 상황을 잘못 짚었다면, 이제 당신이 얘기할 차레입니다. 하지만 당신 얼굴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P.58



두번째 이야기는 대학에서 쫓겨난 루리가 딸 루시가 살고 있는 이스턴케이프의 시골농장을 방문하면서 겪게 되는 추락이다. 수도인 케이프타운과 다르게 흑인의 권력이 우세하던 지역이었던 이스턴케이프는 백인 여성인 루시가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무척 힘든 곳이었다. 루시가 왜 그곳에서 혼자 살아가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진 않았다. 루시는 그곳에서 흑인인 페트루스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데, 어느날 루시의 집에 흑인 강도일당이 나타나 루리는 폭행을, 루시는 강간을 당한다. 하지만 가해자가 밝혀지는데도 루시는 사건을 묻으려고 한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려고 한다...백인사회와 흑인사회의 역전...

[그는 생각한다. 이것은 매일, 매시간, 매분, 이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살아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이 순간, 속력을 내며 달리는 차 안에 포로로 잡혀 있거나 머리에 총알이 박혀 협곡 밑에 있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루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 P.139



세번째 이야기는 루리와 루시 사이의 갈등을 통해 드러나는 인권의 추락이다. 과거 백인사회의 우월함을 대표하는 루리, 그리고 지금 백인사회의 추락을 대표하는 루시. 루리는 루시에게 그곳에서 탈출하라고 설득하지만 루시는 떠날수 없다고 어쩔수 없이 굴복해서 살아야 한다고 반박한다. 부모 입장에서는 딸이 저러고 있으니 속이 타겠지만 어쩌면 이건 부모세대가 저지른 인과응보일지 모른다...흑인사회의 복수...

["루시. 너는 정말 날 놀라게 만드는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너도 그걸 알고 있다. 페트루스에 관해서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는데, 만약 네가 이번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이번에 실패한다면, 넌 제대로 살 수 없을 거야. 네게는 네 자신과 네 미래와 네 자존심에 대한 의무가 있어."] P.188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이 있었다. 백인 노년 교수 루리의 여성에 대한 태도도 별로였지만 특히 딸인 루시의 흑인사회에 대한 굴욕적인 태도는 거북하기까지 했다. 왜 저렇게 까지 비굴하게 구는건지, 왜 저러면서도 흑인사회에서 도망가지 않는건지 의야해 했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는 작가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극단적으로 그리긴 했지만 말이다. 만약 루시가 백인 여성이 아닌 흑인 여성이었다면, 그리고 흑인 강도들이 아니라 백인 강도들이었더라도 내가 불편함을 느꼈을까?

["그건 너무 개인적이있어요. 그들은 제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처럼 그 일을 했어요. 무엇보다도 그것이 저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어요. 나머지는.. 에상되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저를 왜 그렇게 중오했을까요? 저는 그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 P.219



인종차별에 대한 나의 편협한 시각을 다시한번 반성하고 고쳐야 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리고 화해와 용서는 쉽지 않다는 것을, 화해와 용서 이전에는 반드시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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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0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인상적으로 읽었어요. 오랫동안 지배자였고 엄청난 폭력을 행사했던 자들과 한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제대로 된 사과도 없었고 처벌도 없었죠.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았던거 같고.... 그런 남아공의 현재를 잘 묘사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새파랑 2025-08-11 14:34   좋아요 1 | URL
남아공의 혼란스러움이 책에 잘 담겨있더라구요.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쿳시 작품은 많이 무거운거 같아요 ㅡㅡ
 
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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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70 10년전 아내를 잃고 혼자 살아가는 바움가트너의 이야기. 아내를 그리워하면서도 아내가 남겨놓은 추억 덕분에 사랑을 하기도 하고, 새로운 인연에 들뜨기도 한다. 사람의 관계는 가지처럼 계속 이어질뿐 사라지지 않는다. 끝맺음이 없어서 여운이 더 강하게 남은 작품.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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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04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때 폴 오스터를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왠지 이 책을 읽으면 마침표를 찍는 느낌일거 같아 미루는 중이에요

새파랑 2025-08-05 10:48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폴오스터 팬이셨군요. 전 달의 궁전하고 이것만 읽어봤다는..
근데 내용이 슬프지는 않습니다 ㅋ 안미루셔도 될거 같아요~!!

바람돌이 2025-08-05 10:57   좋아요 1 | URL
내용 말고 폴 오스터 작가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그게 막 실감 날거같아서요
 
노랑무늬영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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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69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한강작가님의 작품을 읽을때는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절대 가볍게 읽을수 없기에, 읽고나서 한동안 우울감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왜 힘들걸 알면서도 읽느냐고 묻는다면, 한강 작가님의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강 작가님의 작품은 고통스럽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하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게 해준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이번에 내가 읽은 작품은 한강 작가님의 세번째 단편집인 <노랑무늬영원> 이다. 특징이라면 우울함은 여전하지만 더 짙어졌고, 기존의 단편집과 비교할때 서사가 복잡하며 좀더 인간 내면을 파고들었다는 점을 꼽고 싶다.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모두 너무 좋았다. 완벽했다. 그중 몇 작품만 감성평을 적어보자면...



1. 회복하는 인간

주인공은 발목이 삐어서 한방 치료를 받다가 화상을 입는다. 그리고 화상에서 회복하는 과정에서 죽은 언니를 떠올린다.


통념속에서 살아갈수 없는 주인공과, 반대로 통념속에서 살아갔던 언니. 생각의 차이로 인해 주인공과 언니는 친해질수 없었고, 언니가 부탁해서 알게된 언니의 비밀 때문에 이후 언니와의 사이는 더 멀어진다. 그 간극은 언니가 투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가까워 지지 않았다. 언니의 사망은 그녀에게마음의 큰 상처로 남는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있는지,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당신에게 등을 돌린 채 화장을 지우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서 얼핏 어두워졌다. 거울을 통해 당신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P.57


하지만 인간은 상처에서 치유된다. 마음이든, 몸이든 말이다. 발목의 상처가 나아지는것과 동시에 언니에 대한 마음의 상처도 점차 회복한다. 의지만 있다면 어떤 아픔도 언젠가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회복할 수 있다. 그게 인간의 강점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당신은 모른다. 목이 말라서 눈을 뜬 차가운 새벽, 기억할 수 없는 꿈 때문에 흠뻑 젖은 눈두덩을 세면대 위의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당신의 손이 거푸 떨리리라는 것을 모른다. 한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병을 찌르리라는 것을 모른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P.62




2. 에우로파

여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이해해주는 여자사람 친구 인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성 정체성이 있음에도 나는 인아에게 왠지 모를 감정을 느낀다. 그리움이려나.

[잊을수 없는 여름밤의 한순간 이었다. 인아의 노래가 아름 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청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순간 인아를 사랑하게 된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P.76


인아가 해준 여장을 한 나는 인아와 함께 밤거리를 걷는다.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인아가 나의 손을 잡고 걸어줬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님은 분명한데 어쩔수 없는 끌림. 어쩌면 여자인 인아에 대한 동경 인지도 모른다.


나와 인아의 관계는 영원하진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이상한 관계를 포기하고 싶진 않다. 지금 두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결코 이성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나직이 소리 내어 인아가 따라 웃는다.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허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P.93




3. 훈자

누구에게나 떠나고 싶은 이상향이 있을 것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에게는 '훈자'가 그곳이었다. 주인공은 만년설이 에워싸고 있고 살구꽃이 끝없이 피어 있다는 '훈자'라는 곳을 우연히 알게되고, 시간이 날때마다 그곳에 대한 정보를 찾아본다. 그리고 현실의 갑갑함을 느낄 때마다 '훈자'로의 탈출을 꿈꾼다, '훈자'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그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 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P.117


하지만 직장과 가정과 육아라는 현실앞에서 주인공은 '훈자'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대신 과거의 인상적이었던 순간들이나 잠시 떠올릴 뿐이었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 도망치고 싶은 '훈자'. 주인공이 느끼는 고통을 누가 이해줄까? 타인의 고통은 타인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무슨 말이든 해줘봐, 그 여자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계속 가야하는 건지, 당신이 대답해봐. 대답을 듣기 위해 눈을 감은 순간, 비틀어진 마른가지들을 통과한 주황색 햇빛이 그여자의 눈꺼풀을 찔렀다. 눈꺼풀이 홧홧 달아오르기 전에 그 여자는 눈을 부릅 떴다.] P.123




4. 파란돌

<바람이 분다 가라>가 연상되는 작품이었다. 아마 <바람이 분다 가라>의 뼈대가 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화자가 어린시절 사랑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친구의 외삼촌이였던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작품인데, 문장 하나하나에 그리움이 가득하다. 화자는 이제 그를 처음 만났을때 그의 나이인 서른 일곱살이 되었고 첫사랑이었던 그를 떠올린다.

[내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의 목소리는 언제나 낮고 부드러웠지요. 실은, 일부러 못 들은 척 해 두 번 부르게 한 적도 여러 번 이었습니다. 그 목소리에 처음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하기 된 것이 언제 인지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 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있고, 놀라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플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그 느낌이 강한 슬픔과 닮아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P.145


결혼한적은 없고, 무언가에 부딪히지 않아도 피멍이 들곤했던 나약했던 그사람, 아파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지만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던 그사람, 하지만 나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은연중에 고백했던 그사람. 화자는 그사람과 어린시절 잠시 인연이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몇십년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 그 순간들과 그의 말들은 선명하다. 나는 지금의 현실이 고달퍼 죽고싶기도 하지만, 삶에 대한 그사람의 희망이 떠올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한다. 그사람은 그곳에서 잘 살고 있을까?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는 꿈속의 당신, 부풀어 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축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겨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P.154


그런 기억이 있다. 어떻게는 잊혀지지 않고, 어느순간 선명하게 떠오르며, 그때 그 순간 만으로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기억. 어떤 시간은 흐르지 않고 그시절에 멈춰 있기도 한다. 좋은 기억이든, 안좋은 기억이든 간에.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 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때문입니다.] P.154




5. 노랑무늬영원

노랑무늬영원을 아시나요? 표제작인 이 단편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작품이기도 했다. 회복하는 인간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화가인 나는 출근길에 차를 몰다가 길에서 개를 만나고, 개를 피하려다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한다. 왼손은 으스러지고 오른손도 못쓰는 상태가 된 나는, 병원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누워서 지내만 하는 신세가 된다. 몸이 아프기 전에는 몰랐으나 아프고 나니 모든게 망가졌다. 다정했던 남편은 병수발에 지쳐나가고, 엄마는 더이상 엄마가 아니었다.

[나는 이제 그 말을 이해한다. 남편이 사랑스럽지 않아진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 메말랐다. 내 사랑이 마르자 삶이 사막이 되었다. 내 사랑이 말라서, 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P.290


이년이 지난 후 퇴원했지만 상태는 더 안좋아졌다. 남편의 지친 모습에서는 사랑이 없었고, 나의 전부였던 그림은 이제 더이상 그릴 수 없게 되었다. 더이상 사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밑바닥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그중 하나는 아주 예전에 잠시 스쳐간 인성이라는 남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진관에 찍힌 나의 사진을 보고 소진이라는 친구가 연락을 줘서 떠올린 인성. 그는 내가 병원에서 재활하는 동안 낯선 타국에서 죽어갔지만, 그에 대한 연민때문인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모르는 남자의 이미지가, 십 년이 지난 지금 되살아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다. 만일 내가 그 남자와 수작을 나눴다면 이렇게 밝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와 나눈 것은 침묵이었다. 비장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그저 침묵.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진 몸의 따스함.] P.270


다른 하나는 친구인 소진의 집에서 본 도마뱀 노랑무늬영원. 앞발이 잘려나갔음에도 다시 새발이 자라서 살아가는 노랑무늬영원을 본 나는 삶의 의지를 다시한번 느낀다. 영원이란 단지 학명일 뿐이지만, 그 단어가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거, 이름 있니? 나는 묻는다. 영원이요. 영원? 네.노랑무늬영원.] P.274


다시 작업실에 간 나는 다시 한번 그림에 대한 의지를 다진다. 인간은 회복할수 있기 때문에 나약하지 않다. 의지만 있다면 영원할 수 있다. 인간은 강하다.

[어디까지 왔나, 하고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나는 미간을 모은다. 물감이 빳빳하게 굳은 두손을들어 올려 석양에 비추어본다. 뚜렷한 손가락뼈와 관절들 사이로 늦은여름의 플라타너스 잎들이 소리없이 몸을뒤집고 있다. 저것은 빛인가. 저것은 아름다움인가. 생명인가. 다만 그렇게 나는 서있다. 말없이.] P.295




매번 읽을때마다 바뀌는 거 같은데, 한강작가님 단편집 중 <노랑무늬영원>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한강작가님 전작읽기 중 <그대의 차가운 손> 한작품만 남았다. 이런 위대한 작품들을 원어로 읽을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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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04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항무늬 영원이 최고의 단편이라굽쇼? 눈이 번쩍 귀가 번쩍입니다.^^

새파랑 2025-08-05 10:51   좋아요 0 | URL
한강작가님 작품중 안좋은게 없는거 같아요~! 순서대로 읽는걸 추천합니다~!!!

페넬로페 2025-08-04 2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요.
한강 작가의 작품은 읽기 쉽지 않은데 곱씹어 읽으면 어쩜 이리 글을 잘 쓸까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계속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새파랑 2025-08-05 10:52   좋아요 0 | URL
한강작가님 존경합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다 좋습니다. 깊이가 남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ㅋ 내용은 우울하지만 행복합니다~!!

자목련 2025-08-05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집, 정말 좋죠? 새파랑 님의 리뷰는 더 좋고요.
저도 천천히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새파랑 2025-08-05 10:53   좋아요 0 | URL
완전 좋습니다 ㅋ 평생 소장각에 재독 삼독 사독 해야할 작품인거 같아요~!!

독서괭 2025-08-05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제 한권 남으셨어요? 대단합니다.
‘회복하는 인간‘은 다른 소설집에서 읽었는데요 -에디션이었나? 좋았던 기억이 나네요. 노랑무늬영원이 새로 갱신된 최고 작품이라니 읽어보고 싶습니다 ㅎㅎ

새파랑 2025-08-06 09:33   좋아요 1 | URL
강추합니다. 한강작가님 단편은 장편만큼 좋은거 같아요~!!
이번달 안에 한권 읽으려고 합니다~!!!
 

개정판이 나왔길래 다시 읽었다. 여전히 너무 좋다.

토요일에는 여자와 만나고, 일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사흘동안 그 추억에 잠겼다.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의 절반은 다기올 주말의 계획을 세우는데 썼다. 수요일만이 갈 장소를 잃고 허공을 방황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수요일. - P112

많은 꿈이 있었고, 많은 슬픔이 있었고, 많은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 P104

"난 이상한 별자리에서 태어났어.그래서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반드시 손에 넣었어. 하지만 뭔가를 손에 넣을 때마다 다른 뭔가를 짓밟아왔지.무슨 말인지알겠어?" "조금은요.
"아무도 믿지 않지만사실이야. 3년 전쯤에 그걸 깨달았어.그래서 이젠 아무것도 원하지 말아야 겠다고생각했지" 그녀는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평생그렇게 살아갈 생각이에요?"
"아마도그럴 거야.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신발장 속에서 살면 되겠네요" - P133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물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아주 오래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되는 그 따스한 추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허 방항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집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때를 니는 그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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