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5080,  N25081

˝나는 분명히 살아있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음을 확실히 느낀다. 그것으로 충분치 않은가.˝


인생작을 만났다. 반전문학하면 떠오르는 작가로 대부분의 사람이 레마르크를 떠올릴거다. 나는 <서부전선 이상없다>와 <사랑할때와 죽을때> 두 작품을 읽고 <개선문>을 세번째로 읽었는데, <개선문>이 단연 최고였다. 두권으로 구성된 압박 때문에 쉽게 손이 안갔었는데 이제서야 읽다니 후회하면서도 그나마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재미와 교훈이 완벽한 작품이었다.

[두어 시간 전에도 그는 지금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그동안 한 인간이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순간순간 몇천명씩 죽어 나가지 않는가, 거기에 대한 통계도 있다. 그런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죽은 그 인간에게는 그 순간이 전부이며,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는 온 세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1권 39p



<개선문>은 1차 세계대전 종료 후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파리를 배경으로, 독일 출신 의사이자 피난민인 라비크의 이야기이다. 패전국인 독일에서도 쫓겨나고, 프랑스에서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야 했던 라비크는 어느곳에서든 이방인이었다.

[˝이전에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던 것이 지금은 파괴되고 말았소. 우리는 이제 줄 끊어진 유리알처럼 산산이 흩어져 있어요.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요.˝]  1권 120p



의사였던 그는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어서  파리에서 대리수술을 하면서 살아간다. 다른 피난민들보다는 경제적으로 상태가 좋았지만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불안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고 그에게는 허무함만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배우 지망생인 조앙 마두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하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 신분운 숨겨야만 하고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라비크, 반면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조앙 마두는 잠시는 몰라도 영원할 수는 없었다. 결국 라비크는 신분이 밝혀져서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게 되고, 조앙 마두는 그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린다고 그에게 말한다.

[그는 다시 담배를 한 개비 꺼냈다. 내 형편만 달랐다면 그 여자를 붙들어 둘 수 있었을까?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붙잡아 둔단 말인가? 오직 환영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환영이라도 충분하지 않은가? 언제 그 이상의 것을 얻기라도 했던가? 그 누가 이름도 없이 감각의 밑바닥에서 넘쳐흐르는 생명의 시커먼 소용돌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단 말인가?] 2권 1p



조앙 마두를 찾기 위해 라비크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보고 흔들린다. 사랑과 안정적인 삶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흔들릴 수 밖에 없는 두사람의 사랑은 지속될 수 있을까?

[˝전 억제할수가 없어요, 라비크. 무언가가 나를 몰아 가요. 마치 무언가를 늘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것을 붙들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그리고 내 것으로 만들고 나면 그걸로 끝이에요. 그래서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해요. 그렇게 해도 결국 이전과 마찬가지라는 것도 이미 알아요. 하지만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어요. 그것이 나를 몰아가고 어딘가로 내동댕이처요. 그러면 한동안은 그것이 나를 가득히 채워 줘요. 그리고 다시 그것이 놓아주게 되면, 나는 다시 굶주린 것처럼 팅 비어 버려요. 그리고 같은 짓을 반복한다고요.˝]  2권 228p



게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온 라비크는 자신의 원수인 하케를 우연히 만난다. 라비크는 독일에서 게슈타포에 쫓기는 친구를 숨겼다가 체포된 적이 있는데, 이 사건으로 그는 하케에게 고문을 당하고 연인이었던 시빌은 그 과정에서 자살을 하였으며, 그는 강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파리로 망명한 것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평생의 원수였던 하케는 라비크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케에게 라비크는 많은 고문 대상자 중 한명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라비크는 하케를 유인하여 그를 처단한다. 오랜시간 동안 꿈꿔왔던 복수를 이룬것이다. 하지만 라비크는 여전히 소용돌이 속에 있을 뿐이었다. 전쟁의 기운은 고조되고 여전히 이방인으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머무를 곳을 찾을 수 있을까?

[그는 한 인간을 사랑했고, 그 인간을 잃었다. 그는 또한 한 인간을 미워했고, 그 인간을 죽였다. 두 인간이 다 그를 해방해 주었다. 한 사람은 그의 감정을 다시 살아나게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과거를 씻어 주엇다.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소망도 미움도 비탄도 없었다. 새로운 시작이라면, 바로 이런 것이다.]  2권 336p




이 작품이 사랑만을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다. 레마르크는 전쟁이라는 비극속에서도 사람들은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국적을 넘어서는 우정이 있다는 것을, 절망속에서도 작은 행복이 있다는 것을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다.

전쟁의 폭력 앞에서 사람들은 괴물이 되고, 무력해지며, 헤어지고, 비참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사랑과 우정을 계속해야 한다. 그게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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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름
체사레 파베세 지음, 이열 옮김 / 녹색광선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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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79

"그 시절의 삶은, 마치 끝도 없는 축제 같았다. 집을 나서 길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곧잘 제정신을 잃었다.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특히 밤은 더욱 그러했다."


어떤 사랑은 깊어질수록 외로워진다. 내가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기 때문에, 계속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더 좋아할수록 비참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사랑의 대표적인 예가 첫사랑이다.


지난 주말에 이름도 낯선 이탈리아 작가인 체사레 파베세의 작품인 <아름다운 여름>을 읽었다. 언제나 믿고 구매하는 녹색광선 출판사의 신간은 나올때마다 재빨리 구매해서 읽는데 이번 작품역시 나오자 마자 구매해서 읽었다. 작품도 좋았지만 표지가 너무 아름답고 내가 좋아하는 민트색이어서 그런지 더 좋았다.


아름다운 표지와 아름다운 제목과는 다르게 내용은 엄청 아름답진 않았다. 16세 소녀인 지니아의 성장과 첫사랑은 풋풋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이. 지나고 나면 그 여름을 아름답게 떠올릴 수 있을까?

[그해 여름은 너무나 뜨거웠기에, 매일 저녁 집을 나서야만 했다. 지니아는 여름이 어떤 것인지 지금껏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았다. 밤마다 가로수 아래를 거니는 일이 그저 황홀했다. 때로는 이 여름이 영원할 것만 같다가도, 계절이 바뀌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서둘러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 P.39



옷가게에서 일을 하는 소녀 지니아에게 하루하루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10대들이 그렇듯 사소한것에도 웃고 별것 아닌 일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성에 대해 설렘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지니아 앞에 미술모델을 하고 있는 아멜리아가 나타난다. 지니아는 자신보다 성숙했고 자유로운 영혼인 아멜리아를 동경하게 된다. 그녀처럼 미술모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니아는 귀도의 그림을 다시 보고 싶었다. 낮의 햇빛 아래서만 색이 제대로 드러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로드리게스가 없다는 확신만 있었다면 용기를 내어 혼자 찾아갔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리고 군복 바지 를 입은 귀도가 나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그에게 농담을 하고 미소 짓는 장면까지.] P.70



비오던 어느날 지니아는 아멜리아와 함께 화가인 귀도의 집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귀도와 로드리게스를 알게 된다. 지니아는 군인이자 화가인 귀도에게 반하게 되고 첫사랑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귀도와 아멜리아의 관계를 의심하고, 귀도에 대한 상상을 펼치며, 그의 한마디 한동작에 기뻐하고 슬퍼하며 그리워 한다.

["넌 절대 여름이 아냐, 넌 그림을 그린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 내가 널 사랑하게 되어야 비범한 화가가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시간을 낭비하겠지.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예술가는 자기 작업을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어야 일할 수 있어."] P.120



결국 지니아는 귀도에게 자신을 허락한다. 하지만 귀도는 지니아가 사랑하기에는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지니아는 그토록 원했던 귀도의 모델이 되지만 환멸감을 느끼고 그렇게 첫사랑은 끝난다. 하지만 첫사랑이 끝났다고 인생이 끝난건 아니다.



이 작품은 첫사랑에 빠진 10대 소녀인 지니아의 감정기복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해설에 써있는것처럼 남성작가가 이정도까지 그렸다는데 대해 놀라웠다.



불꽃같은 첫사랑과 여름은 어딘가 닮았다. 한참 뜨겁다가도 어느순간 끝나 있으니까. 그리고 첫사랑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해보다는 동경이라는 감정이 앞서는 시기이니까. 그럼에도 첫사랑의 경험은 성장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작가는 첫사랑을 아름다운 여름으로 표현했나 보다.


아직도 여름인것 같은 요즘 시기에 읽기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는데 찾아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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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9-29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께서 딱 좋아하실 내용 같습니다. 표지가 여름에 어울립니다.

새파랑 2025-09-30 11:1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ㅋ 제 취향의 작품이었습니다. 제목에 여름이 들어간 작품중 두번째로 좋은거 같아요~! 첫번째는 김연수 작가님의 너무나 많은 여름이 ㅋ

그레이스 2025-09-30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녹색광선은 표지가 맘에 들죠!
내용을 보니 4부작으로 이탈리아 소설이 생각나는데,,, 제목이,,, ㅠㅠ

새파랑 2025-09-30 11:15   좋아요 1 | URL
모아놓고 보면 알록달록 예쁩니다. 혹시 옐레나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 아닌가요? ㅋ 전 아직 못읽었습니다...

그레이스 2025-09-30 12:3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저자랑 작품이 생각나지 않았는데,,, 새파랑님은 바로 기억하시네요.
제겐 조금 충격적인 작품이었어요.
 

사랑에 빠지면 그렇게 변덕스럽게 된다.






그해 여름은 너무나 뜨거웠기에, 매일 저녁 집을 나서야만 했다. 지니아는 여름이 어떤 것인지 지금껏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았다. 밤마다 가로수 아래를 거니는 일이 그저 황홀했다. 때로는 이 여름이 영원할 것만 같다가도, 계절이 바뀌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서둘러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 P39

그 시절의 삶은, 마치 끝도 없는 축제 같았다. 집을 나서 길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곧잘 제정신을 잃었다. 모든 것 경이로웠다. 특히 밤은 더욱 그러했다. - P16

잠든다는 건 바보 같은 것이고, 그 잠이 기쁨을 누릴 시간을 앗아 갈까 두려웠다는 것이다. - P17

토요일 밤은 특히 더 찬란했다. 춤을 추고, 다음날 늦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작은 기쁨으로도 충분했다. 어떤 날 아침은 일하러 가는 길에 만나는 작은 길모퉁이에도 충분히 행복했다. - P17

지니아는 귀도의 그림을 다시 보고 싶었다. 낮의 햇빛 아래서만 색이 제대로 드러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로드리게스가 없다는 확신만 있었다면 용기를 내어 혼자 찾아갔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리고 군복 바지 를 입은 귀도가 나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그에게 농담을 하고 미소 짓는 장면까지. - P70

"넌 절대 여름이 아냐, 넌 그림을 그린다는 게 어떤 건지 몰라. 내가 널 사랑하게 되어야 비범한 화가가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시간을 낭비하겠지.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예술가는 자기 작업을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어야 일할 수 있어."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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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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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78

나는 고전을 좋아해서 알라딘 우주점에 가면 민음사, 문학동네, 열린책들 세계문학 코너를 먼저 구경한다. 그러다보면 수량이 많은 작품이 눈에 띄는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의 거리>다. 우주점 어딜 가든 항상 네권 이상은 있던거 같은데,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산거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소장하고 싶은 작품은 아니어서 판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직까지 구매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작가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북플에서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라는 작품이 괜찮다는 리뷰를 읽었고, 이후 우연히 간 동네 서점에 이 책이 있길래 구매를 해서 읽었는데, 딱 내 스타일이었다. 책을 읽는동안, 그리고 읽고 난 후에도 안개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기억하고 싶지 않는 기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기억은 완벽하게 진실하지 못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노년의 소설가인 장 다라간이다. 그는 은둔하면서 사람 만나는걸 싫어하는 사람인데, 어느날 자신이 잃어버린 연락처가 기록된 수첩을 돌려주겠다는 의문의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그 수첩을 돌려받기 위해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잊고 살았던,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 어린시절의 나를 찾아가게 된다.


장의 어린시절은 기억과 망각으로 가득차 있다. 어린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것으로 보이는 장은, 낯선 사람에게 보호를 받게 되고, 그중 장의 기억에 강렬히 남아있던 사람은 아니 아스트랑이라는 여자였다. 장의 기억으로는, 장은 아니 아스트랑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함께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아니 아스트랑은 장을 남겨두고 혼자 사라진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장은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어떤 범죄와 연관되어 감옥에 갔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럼에도 장은 자신을 버리고 간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녀를 찾기 위해 자신과 그녀만 아는 이야기를 자신의 작품속에 써놓는다. 그리고 십오년 후에 그녀를 다시 만난다. 장은 그녀에게 진실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수 없었고, 장은 그녀와의 추억을 그녀에게 이야기 하지만 그녀는 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옛일은 생각 안하고 산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후 장은 파리 근교를 다니면서 그녀와의 기억을 찾아나선다. 상대방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기억에 중요한 의미라도 있는것처럼.

[퐁텐가를 다 내려가면 밤이 걷히고 날이 밝아오며 7월의 태양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아니는 쪽지에 주소만 덜렁 쓴 것이 아니라 이런 말도 덧붙어 썼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그 큼직한 글씨는 구식 필체여서 생뢰라포레의 학교에서는 이미 쓰지 않는 것이었다.] P.152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의 이야기는 명확하지 않다. 뭐 하나 확실한건 없고 흐린 기억 속에서 방황할 뿐이다. 이야기도 순서없어 현재와 과거를 왔다갔다 하면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기억의 특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잊을수 없지만 누군가에겐 잊혀진 기억, 누군가에게는 진실이지만 누군가에겐 거짓인 기억.


기억은 불확실하다. 어쩌면 망각이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망각속에서는 정체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기억해야 한다. 그게 괴로운 일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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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산책 연습
박솔뫼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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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77

˝어째서 자신이 지금 어떻다는 것을 단지 이야기하는 것 만으로 두통이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지고 무언가를 시작할 의욕이 생기는지 늘 조금은 놀라웠고 조금은 안도하게 되었다.˝


나는 현재에만 집중해서 살아서 그런지 미래를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미래라는 걸 현재의 다음일 뿐이라고 단정하고 미래를 추상적인걸로 여겼었다. 하지만 <미래 산책 연습>을 읽고 나서 미래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됐다.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시간들은 뭉처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에요.] P.91



이번에 박솔뫼 작가님의 책을 처음 읽어봤다. 김연수, 한강, 최진영 작가 전작 후 전작할만한 한국작가를 찾다가 선택한게 박솔뫼 작가님이다. 일단 평이 가장 좋아서 <미래 산책 연습>을 골랐다. 부산에 있는 미문화원이라는 건물과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현재의 작가인 나와, 과거의 학생인 수미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1. 나

서울에 사는 작가인 ‘나‘는 가끔씩 부산에 내려온다. 부산 남포동, 미문화원, 용두산 아파트, 온천장 등 옛 부산중심지 일대를 산책한다. 산책을 하면서 과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떠올린다. 자주 내려오다보니 차라리 전세를 얻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집을 얻는다. 그러면서 부동산을 하는 최명환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고 최명환을 통해 부산의 다른 사람들과도 친해지게 된다. ‘나‘에게 부산 산책은 안정을 주는, 사유하게 하는,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수단이다.



2. 수미

또다른 화자 수미. 그녀에게는 이모지만 언니라고 불렀던 윤미가 있었다. 윤미는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인해 감옥에 간 경력이 있는 대학생이었다. 어린 수미는 그런 윤미언니를 신기하게 여기고, 윤미언니 출소 후 그녀를 따라 광주에 가기도 하고 그녀를 감시하라는 선생님의 지시도 받는다. 수미는 성장할수록 윤미와 자연스럽게 조금씩 멀어지게 되지만 그래도 언니 윤미에 대한 친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커나가면서 윤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녀의 과거를 공유하면서 현재를 살아간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특별한 사건은 없어 보이는데 실제로도 그렇다. <미래 산책 연습>에서 ‘나‘와 수미에게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특별한 사건은 그들에게 일어난게 아니고 과거에 일어난 일이었다.(미문화원 방화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게다가 보통사람 기준으로 주변 인물들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악한 사람도 영웅도 없다. ‘나‘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그리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사유와 다르지 않다. 수미는 과거에서 부터 현재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겪은 일과 느낀점들을 표현하지만 특별하진 않다.



그렇다. 미래는 특별한 게 아니다. 과거를 끊임없이 복기해서 내가 원하는 현재를 살아간다면 그것이 미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가 그냥 오는 것은 아니다. 올것이라고 믿는 미래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준비해야만 내가 생각한 미래가 온다. 그런 사람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도 나는 미래를 산책하면서 연습하고 있는 중이다.


Ps1. 처음 읽었을때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두번째 읽었을때는 너무 좋았다. 특히 미래에 대한 문장들이 인상적이었다.


Ps 2. 이 책을 읽고 나서 ‘나‘가 계속 가지고 다니던 <티보가의 사람들>을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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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9-27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솔뫼 작가님 다른 책에도 <티보가의 사람들>이 언급되어 궁금했었는데, 이렇게 새파랑님 서재에서 만나네요~!!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날, 들여다본 건물과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과거의 역사를 떠올리고 그 시절의 사람들을 기억한다는 게 좋은 느낌으로 다가왔던 책이에요. 이따금 맛있는 것들도 많이 나와서 좋았고요 ㅎㅎ

새파랑 2025-09-27 13:39   좋아요 1 | URL
곰돌이님 덕분에 박솔뫼 작가님 책을 처음 읽었습니다. 최근에 부산에 출장갈 일이 있어서 부산 투어도 했네요 ㅋ <티보가의 사람들> 구매는 했는데 언제 읽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향장육 먹어보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5-09-27 17: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에세이 같았는데
장편 소설이군요.
책을 읽다보면 거기서 만나는 다른 책이 또 궁금해지고요.
이래저래 독서는 계속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5-09-29 09:11   좋아요 1 | URL
에세이로 읽히기도 합니다ㅋ장편소설이지만 연작소설 느낌도 듭니다~! 연결독서는 페넬로페님이 최고죠~!!

그레이스 2025-09-28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두께에도 불구하고 읽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요?

새파랑 2025-09-29 09:13   좋아요 1 | URL
전 일단 구매는 했는데...
두꺼워서 시작하기가 겁납니다ㅋ 일단 사야 읽을 확률이 생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