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없는 사회 - 무한한 욕망의 세계사
다니엘 코엔 지음, 박나리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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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코엔은 1953년 6월, 튀니지의 튀니스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약사인 어머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프랑스 중남부의 오트루아르 주의 생디디에앙벨레에서 기초 교육을 수료한 후, 1973년에 프랑스에 소재한 그랑 제꼴 가운데 가장 명문이라고 볼 수 있는 노르말 쉬페리외에 입학합니다. 이후 1976년에 수학 전공으로 학위를 수여 받고, 3년 뒤인 1979년에는 경제학으로 프랑스 국립 박사 학위 (DND)를 취득합니다. 또한 그는 1986년에도 파리-낭테르 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데요. 동시에 1981년부터 1982년, 1983년부터 1984년까지 미국 하버드 대학의 방문 교수로도 재직했습니다. 그는 앞선 교수 이력 이외에도, 1997년부터 2012년까지, 총리와 함께 경제 분석 위원회 (CAE)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국가 부채 전문가로서 라자드 은행의 고문으로 그리스 총리와 에콰도르 대통령에게 국가 부채 협상에 대한 조언으로 유명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아 올랑드의 지지자로서, 프랑스 내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사회적 족적을 남긴 코엔은 2023년 7월, 혈액 질환으로 한창 활동할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e monde est clos et le désir infini"로 지난 201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일독했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현대'에서 다니엘 코엔이 수차례 인용되었기에 이번에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논저 가운데, '악의 번영'은 꽤 많은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는데요. 이번에 소개할 이 글은 인류와 함께 시작된 생산과 그 수단의 증대 그리고 그로 인한 비약적 인구 증가를 바탕으로 한 경제사의 개요로, 경제학이 익숙치 않은 독자들이 보기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비교적 수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코엔은 자신의 논증을 위해 '인간의 역사' 가운데 시기 별로 요약하고 있고, 더욱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로베르 카스텔과 같은 많은 학자들의 글을 직접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책을 단순히 광범위한 경제사나 혹은 사회사를 축약한 내용으로만 보기에는 어폐가 있기도 한데요. 단지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주제로 경제적 사회발전사에 국한되지 않고, 계몽주의가 어떻게 경제적 인간에 기여했는지를 논하면서, 인간이 이룩한 생산의 발전과 사회적 부의 증대의 과정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상세히 고찰해 보는 것이 주된 출판 의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합리성의 체계적 경쟁으로 말미암아, 저자인 코엔의 분석대로 서양과 동양의 격차는 소위 칭기즈 칸의 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여기서 그는 이 '유목민 제국'의 이상하리 만큼 비정상적인 영토적 야욕과 서쪽으로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중국의 경제를 초토화 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유목민의 약탈 경제에 그동안 중국 왕조가 구축해 왔던 농경 경제를 비롯, 사회적 경제가 가히 뿌리 뽑혔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더욱이 유럽의 경제 변혁을 이끌어 낸 주요 사건들 가운데, 14세기의 흑사병은 당시 봉건제도에 기반한 유럽의 사회 경제를 대혼란에 빠뜨렸다고 진단하는데요. 일종의 흑사병이 유럽의 임금 노동 체계를 아예 재설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급격한 노동 인구의 감소는 그런 여파를 초래할 수 있겠죠. 즉, "흑사병의 위기는 유럽 전역에서 임금 인상을 촉발했고 평균 임금은 평소 수준에 비해 두 배로 뛰어올랐다"고 그는 뒤이어 서술합니다. 또한 저자는 이렇게 수세기에 걸쳐, 인간의 노동 가치라는 소위 임금 상승이 영국의 산업 혁명에 영향을 끼쳤다고 논의를 확장하여,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단편적으로 대부분 당시의 산업 혁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 혁명'으로 비롯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그 이전의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생산 발전에 이바지했던 분명한 기여와 이러한 체계적 시스템이 기존의 변화된 신념과 함께, 전세대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급격한 인구 증가에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도 중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 연유로 토머스 멜서스의 기존 연구들이 이러한 맥락에서 한때 주목을 받은 이유일 텐데요. 그렇게 알려진 인식은 뒤이어 등장하는 '서구 유럽의 급부상'과 매우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의 논증은 꽤나 정교해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전통적 자본이 관여하게 되는 막대한 생산물의 증대는 그전에 볼 수 없었던 기계와 그것이 성공적으로 조합된 산업 혁명의 폭발적 확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노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흔히 '러다이트 운동'이 영국에서 발생한 극명한 사회 운동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기술 발전에 대한 저항'은 사실상, 러다이트를 끝으로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정적인 세계사적인 측면에서는 말이죠. 이는 한참 후에 등장하는 포드주의에 이르러, 인간의 노동이 사회적 협상과 기업의 권력 경쟁을 통해, 그 사회적 의의가 점차 축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많은 사회학자들은 그저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른 문명의 과실과 삶의 조건이 비약적 개선되었던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는 역설적이에도 인간의 원초적 노동력에 대한 하향적 재평가로 수정될 수밖에 없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차츰 산업 전반에 도입되었던 '기계'들의 존재로 말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이행은 평범한 인간들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파고였고, 이 지점에서 저자인 코엔은 직접 인용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뉴딜 시대의 극적인 사회적 타협을 제외한다면 전통적인 노동 자체는 과하게 말해서, 종속적 지위로 격하당했다고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코엔은 자신의 이 글에서 꽤 신중하면서도 특별한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데요. 과거 프로테스탄트 혁명을 거치면서, 전유럽 사회는 기존의 종교가 분리되는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계몽주의가 세속화와 함께, 세계는 그 전과 다른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이는 인류에게 있어 본격적인 '진보'의 조건에 대한 사실상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확장된 논증에서 인류가 종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계몽주의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이러한 변화된 상황이 소위 생산 수단의 발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진보'에 대한 감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종교 혁명이 거의 노예 상태에 다름 없었던, 인간에게 종교의 억압을 걷어내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막스 베버가 인식한 프로테스탄트 혁명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뒤이어 나오는 "계몽주의는 전반적으로 물질적 진보 개념을 경계하는 태도를 유지했다"는 코엔의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흔히 (경제적) 합리성과 계몽주의와의 상관 관계를 논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인식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분석이기도 한데요. 더욱이 코엔은 후에 등장하는 걸물인, 애덤 스미스가 이 '진보'의 개념을 정신적 의미로 받아들일 생각을 못했다는 평가에 꽤나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애덤 스미스는 일의 전문화가 노동자들의 도덕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해, 이들을 향한 도덕 교육이 사회적으로 지원되어야 한다고 여겼는데요. 이처럼 스미스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작은 면에서조차 상반된 인식이 존재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굳이 '도덕 감정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스미스에게는 노동이 인간을 예속하게 만드는 여느 '진보'에 대한 도덕적 쇠퇴를 우려했던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코엔은 일종의 동어 반복일수도 있겠지만 후기 자본주의가 구축한 약육강식, 승자독식과 같은 불평등적인 분배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에 놓인 중산층이 과연 '민주주의 이상'에 있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표합니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 이후, 녹록하지 않은 사회 환경에 따라, 점차 중산층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들의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온전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과 동일한 맥락으로 여겨지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핵심 사항으로 발전된 후기 자본주의 이후의 모습이, 시장에서 소비를 해나가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식비, 주거비, 의복비, 교통비"가 소비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에 시민이자 소비자인 우리가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가 있었는데요. 이에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를 인용한, 코엔은 "초고소득을 올리는 소수의 인원이 빈민층의 소비재를 무료로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식으로 만사가 진행된다"는 문장으로 '시장의 구매'가 본질적으로 새로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은, 실질적 소비에 대한 허황된 전망으로 가늠해 볼 수 있겠는데요. 이처럼 소비에 대한 진정한 차별, 시장에서의 그런 소비들이 단순히 판매를 넘어,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는 일자리 창출로 매번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일종의 진실을 드러내게 만듭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허망한 구호에 익숙한 현대 사회와 그 양태에 대해, 저자는 르네 지라르를 인용하며, 소위 이중 구속 double blind 을 바탕으로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벌이는 모순된 명령 체계로, 우울하게도 이런 측면의 모순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인간의 욕망과 자아 실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치로도 읽힙니다. 아버지나 아들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일방적 상황을 자초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결코 앞선 양자를 만족 시킬 수 없는 현실을 콕집어 냉소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진술이 오늘날 사회적 인정을 바라는 개인들의 욕구, 그리고 그것이 기반이 된 정체성 실현에 속지 않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를 달리 언급해본다면, "서구 사회를 가로지르는 정치적, 도덕적 위기는 성장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사실에 많은 빚을 지고 있거니와, 시장이 기반이 된 자본주의의 명백한 한계, 이를테면 돈과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코엔은 덴마크 모델을 일종의 검토할 만한 대안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바로 덴마크에 거울처럼 프랑스를 비춰, 자신의 조국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고찰해 보고 있습니다. 과거 프랑스는 유구한 역사에서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국가였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하고, 마치 "보수주의자들이 경제자유주의와 동맹을 맺어 좌파에 대항했던 것"처럼, 프랑스 역시 거듭된 세계화의 주축 국가로 나아갔다고 증명하고 있었는데요. 이들 프랑스인들이 남들과 비견했을 때, 스스로 평등하기를 원하지만, 다른 이기적인 측면에서 남들과 진정 평등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역설 자체는 세계화 시대의 개인주의적 욕망과 이기심의 추구가 그리는 세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저자는 글 후반부에서 프랑스의 퇴직연금제도의 불확실성과 빈민층을 게토화시키는 일련의 사회화 과정, 그리고 '족내혼'이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비슷한 계급 간의 동질혼을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후기 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분리'를 타파하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프랑스의 과제는 서구 선진 국가들의 거의 동일한 (어두운) 유산으로 시민 사회가 계층과 계급으로 분리되는 상황을 더욱 고착화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파급은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몇 세대에 걸쳐, 그저 자본주의의 당면한 모순만으로는 국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파국'은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정치 또한 한 묶음으로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앞선 '게토화'와 철저히 분리된 계급 간의 영역 고착은 바로 음울한 전망을 대변하는 소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래할 진정한 정치의 위기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예측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최종적으로 코엔이 후반부에 논증하는 소위 '과제들'은 분명 중대한 의미 내지는 의미심장한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지속적인 고성장을 기대하지 않는 자기암시 요법보다는, 장기간의 성장 변화를 예측하는 일은 단 10년의 단위로도 불가능함을 받아들이고, 경제의 파란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자 행동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은 우리 모두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과거 68혁명의 여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르주 바타유에 대한 향수는 흡사 진보적 프랑스 지식인들의 전형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바타유가 그동안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 이 책을 통해서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변화에 떠밀려온 인류는 이런 유의 노력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며, 변화의 실질적 의미를 언제나 나중에야 깨닫곤 했다.

18세기 말에 멜서스는 인류 역사를 ‘식량이 풍부할 때 인간은 그 수를 불린다‘는 극도로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요약했다.

수치심의 지배를 받는 사회는 타인의 시선이 가하는 외부적 압력에 속박되기 마련이다.

금리 또한 추락하고, 득을 보는 것은 금융 혹은 부동산 자산뿐이다. 따라서 임금 디플레이션이 자산 가치 상승을 야기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첫 번째 변천은 막스 베버가 말하는, 사회의 주요 조직 원칙으로서 주술 혹은 신앙이 이성에 자리를 내주는 ‘세계의 탈마법화‘에 해당된다.

두 번째 근대성, 탈물질주의적인 근대성을 향한 희망은 더더욱 혹독한 현실에 격파당할 처지에 있었으며, 과거 모욕당했던 산업사회를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더는 과거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 계획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처럼 스스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순전히 인간만의 능력, 그리고 세상을 개선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 루소는 ‘개선 가능성‘이라고 일컬었다.

경영자와 피고용자 간의 이익 담합을 일체 막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거버넌스를 제정했다. 경영자를 임금노동자에서 제외한 뒤 그의 보수를 기업의 주식 성과에 연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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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 현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필로소픽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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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 제2공화국의 포즈난에서 유대교를 맹신하지 않는 폴란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939년에 폴란드가 기습적으로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의 가족은 동쪽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바우만은 소련이 통제하는 폴란드 제1군에 스스로 입대하여 정치 간부로 일하기도 했는데요. 그와중에 바우만은 콜베르크 전투와 베를린 전투에도 참전하게 됩니다. 이런 군사적 공로로 1945년 5월, 바우만은 용맹십자훈장을 받습니다. 폴란드 국가기록연구소 (IPN)에 따르면, 그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우크라이나 반군과 폴란드 국토군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군사 정보 부대인 내부 보안대 (KBW)의 정치 장교이기도 했는데요. 이때의 이력은 평생동안 그를 따라다니게 됩니다. 이미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에도 자신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고 밝혔는데요. 이때의 이력은 어느 정도 베일에 가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가 내부 보안대에 근무하는 동안 부친이 이스라엘로 이주하기 위해 바르샤바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근한 후, 갑자기 불명예 제대에 이르게 되는데요. 바우만은 부친의 시오니즘적 성향을 공유하지 않았고, 실제로 강한 반시오니스트였기 때문에 갑자기 군에서 쫓겨난 이후,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이 시기 동안, 그는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54년에는 바르셔바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68년까지 대학에 머무르게 됩니다. 언급된 1968년에는 폴란드에서 큰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게 되는데요. 결국 같은 해, 3월 바우만은 교수직을 잃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1968년에 그는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조국인 폴란드를 떠나게 됩니다. 2년 뒤인, 1970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리즈 대학에서 석좌 교수로 임용되고, 몇 차례의 논문 발표로 인해 영국 학계에서는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런 그의 학문 활동으로 말미암아 199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반세계화 운동과 그의 대안으로써의 정치철학적 요구에 바우만은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바우만은 평생에 걸쳐, 금융 자본주의에 따른 노동자 계층의 붕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 공동체 개념의 공동화, 전반적 사익 추구에 따른 사회의 식민화에 큰 사명을 갖고 연구를 지속해 나갔는데요. 바로 그의 사상적 원류가 된 '액체 근대', 혹은 '유동하는 근대'를 잇게한 이 논저는 원제, "Liquid Modernity"로 지난 200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초도 번역은 같은 해인 2000년에 이뤄졌으나 현재는 절판되었고, 최근인 2022년, 다른 출판사에 의해 개정판이 나오기에 이릅니다. 다만 개정판 역시, 역자는 동일합니다.


2012년에 나온 개정판 서문이 실려 있는 이 논저는,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본질적 고찰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계몽주의적 함의가 포함되었던 예전의 '단단한 근대' 혹은 '고체 근대'가 상실한 사회적 기반 등을 설명한, '액체 근대'라는 설명은 당시 어느 사회학자들조차 개념화하지 못한 이론이기도 한데요. 예전의 근대가 어느 정도 인간 해방의 목적성을 자의반 타의반 갖고 있었다면 보다 추상적이고 복잡해진 인간 해방의 담론과 더불어, 자본주의가 우리 일상으로 녹아들면서, 스스로 노예가 되는 삶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적 접근은 충분히 우리 시민들에게 깨달음을 전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점은 앞선 자본주의적 이행 내지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의 구축이 도출한 "모든 책임은 개인의 문제다"라는 전지구적 엘리트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원했던 사회 체제적 이행에 이익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반적 인식은 그 자체로 불행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총체적인 사익화 과정과 그에 따른 개인주의와 개인화가 뉴딜 이후의 복지 국가를 철회하면서 더 많은 자본의 이익을 거두기 위해, 국가에 로비를 한 자본가의 책임인지 아니면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와 결탁해,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라는 변형된 자유주의의 맥락 때문인지는 단언을 내릴 수는 없는데요. 다만, 오늘날의 이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모순과 이것의 대안이 원천적으로 '개인'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막혀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바우만의 집중적이고 누군가 보기에 따라 편집증적으로 느껴지는 대다수의 진술들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고 있는지 누구나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빈 토플러의 축약된 주장처럼, 이런 거대한 흐름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과거의 유산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인식했던 것처럼 근래의 '액체 근대'는 가벼움과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뉴딜 시대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결합을 유기적으로 더 강화한 큰 정부의 존재도 그렇거니와, 기존의 체제가 차츰 후퇴하게 됨으로써, (경제적 요소를 포함한) 사회적 우위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명확해 졌다고 봐야 합니다. 즉, 바우만의 분석대로라면 부와 권력을 가진, 소위 상위 계층 혹은 지배 계급은 여전히 자신들의 자원을 바탕으로 '딱딱하고 균질한, 거의 흔들리지 않는 근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다른 계급과 일반 시민들은 과거 근대가 약속했던 사회적 이행과 그에 따른 공동체적 이익, 그리고 삶의 온존이 전반적으로 철회된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앞선 엘리트들의 면모는 2장의 '개인성'에서, "자원을 갖춘, 선택의 기술에서는 가히 장인이라 할 엘리트들의 사는 방식"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던 밀턴 프리드먼이 보기에도 저런 모습은 가히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바우만은 1장에서, "개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당신이 인생을 살고 일을 수행할 때 따를 만한 범례를 다른 개인들에게서 가져올 수 있을 뿐이며, 다른 예들이 아닌 바로 그 예를 신뢰하여 선택함으로써 얻은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온전하게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고 에둘러 증언하고 있는데요. 바로 이 지점에는 1장에서 주요한 관점으로 논증되어, "오늘날의 현대는 해방 작업을 중간 계층과 밑바닥 계층에게 넘겨주는 의무 말고는, 그 어떤 '해방' 의무도 짊어지지 않은, 일종의 머리가 가벼워진 근대이다."라고 설명하는 이유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사회적 지배 계급은 인간 해방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철저하게 자신들의 자원을 유지하고 사용하여, 자본주의가 원치 않게 초래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유동성을 방지하는 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금 여기서 강조할 만한 것은 개인화는 하나의 정해진 운명이지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본주의가 만든 일종의 신념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물론 이 진술은 어느 정도 디스토피아적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법률상으로 개인이 된다는 것은 그 개인의 비극에 책임을 질 다른 사람이란 없고, 개인의 실패는 오직 그 자신의 방만함과 태만에 원인이 있으며, 죽어라 노력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뼈저린 깨달음"으로 귀결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개인성과 개인화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합리주의이며, 근본적으로 강고했던 이런 메커니즘은 지금도 역시, 흔들림이 없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뒤이어 나오는 '사익에 의한 공익의 식민지화'라는 표현이 실질적으로 크게 와닿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2장에서 보여지는 액체 현대의 진면목이자 큰 본질인, '마거릿 대처의 저 악명 높은 구호'도 빼놓을 수가 없을 텐데요. 그녀의 '사회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은 바우만의 분석대로, 변화하는 자본주의 속성에 대한 기민한 통찰인 동시에 의도성이 있는 선언이자 자기 실현적 예언이라는 목적에 비로소 이어지게 됩니다. 우스개 소리로 과거 마거릿 대처가 얼마나 루퍼트 머독의 영향력 하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선 논리들을 그저 정치적 풍문으로만 치부될 수는 없을 겁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이 대처와 레이건에게 얼마나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바우만의 통찰대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결탁'임은 거의 분명해 보이니까요.


이미 슬라보예 지젝도 예견했던 바대로 우리가 지나온 이 시대는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강력한 자본주의적 소비 사회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바우만의 유작으로 여겨지는 '레트로토피아'에서도 그랬고, '소비하는 삶'을 비평한 다른 논저에서도 그렇듯, 이미 시민으로서의 삶과 소비를 하는 개인으로서의 소비 중심주의의 양 경계가 무너졌고 오로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가치 실현과 소비적 덕목에만 집중하는 오늘날 개인들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앞서, 침중한 의미의 "공익이 사익의 식민지화'에 이르렀다는 것을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도 여겨지는데요. 이를 다른 시선에서 봤을 때, 콜린 크라우치가 경고했던대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의 시녀가 되었다는 점은 명백하고, 이렇게 도출되는 결론도 앞선 진술과 거의 일맥상통합니다. 이런 소비적 시대의 메타포이기도 한, "소비적 세상에서는 인간에게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고, 매물로 나와 있는 매력적 목표들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메시아적 일례들과 연결된 이 다음의 논증들은 우리가 얼마나 일방적이고 무비판적인 시대에 몸을 담고 있는지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데요. 우리가 겪는 삶의 경주에서 소비가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더 강한 권력을 유지한다는 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본이 이익을 산출하고 있다는 부분은 앞으로 미래의 수십 세대가 여전히 맞이할 세계로도 읽힙니다. 일전에도 바우만 소비와 개인의 자아 실현이 자본주의 하에서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논증한 바가 있었는데요. 이처럼 사적인 영역에서의 자아 성취가 삶의 주요 목표가 되었으며, 이러한 맥락의 발전 과정은 시대를 넘어 더욱 강화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소비 그 이상으로 말이죠.


이처럼 정복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근대, 그것이 주가 된 근대의 유동성은 그저 외연을 가진 허울 좋은 실체로만 작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수의 개인들에게는 역설적이게도 쫓고 쫓기는 게임이 되는 것은 분명 예정된 일이고, 2장과 3장에 걸쳐, 증명되는 가운데, 소비와 소비주의가 이끄는 일종의 '게임의 룰'이 인간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하는 것을 넘어,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매달리게 된다는 점은 꽤나 두려운 모습입니다. 원칙적으로 이렇게 점철되어 왔던 체제의 확고한 이행은 아마도 정치가 제자리를 지키고 제 역할을 해내었다면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공익에 대한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여 인간이 그저 소비 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재교육에 나서는 등의 여러가지 대안을 토론할 수는 여지는 충분했는데요. 그렇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의 회의적 시선처럼, 심지어 "우리 주변에는 이미 자신의 지갑 사정에 따라 투표를 했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이는 자본주의 하에 놓여진 민주 정치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지표이자, 액체 근대가 왜 현실 정치를 붕괴시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 뒤이어 나오는 공동체와 민족주의에 대한 진술에서조차 오늘날 힘을 얻고 있는 '극단주의 정치', 그 예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오늘날 정치가 예전만큼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점도 우리는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우만의 말대로 개인과 개인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교조주의화와 이것을 아우르는 사익 추구와 함께 맞물린 소비주의 전반의 결합이 자본주의의 필연적 요소로 몰고 가는 것은 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사회적 이행이든 간에 비판을 막을 것은 없고, 또한 마땅한 비판이 있어야만 기본적 사회라든지 혹은 공동체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공익에 대한 관념이 제자리를 찾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사회 전반에는 무엇보다 '비판의 성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시금 불행한 모멘텀이긴 하지만, 우리가 동굴 안의 원시인처럼, 스스로 자기 혐오에 빠져 이러한 액체 근대가 초래한 실상에 눈을 감게 된 것은 하나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대처가 이러한 사회적 현실에 몸을 담고 있는 시민들을 보고 무덤에서 크게 웃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대가 추구했던 건전한 공동체주의가 근본적으로 내파되었다는 진술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엘리트들이 오로지 자신만 잘살면 된다는 이데올로기를 확신하며, 그러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비웃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공동체 관념이 무너졌기 때문일겁니다. 과거 데일 카네기의 언급대로 돈을 가진 부유층들이 도덕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그 자신에게는 불행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이것이 드러나는 일상을 원천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일부 계층들의 태도는 순진할 정도로 위험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소수의 지역에 거대한 장벽과 무장한 경비를 세워, 또 다른 사회를 만드려는 계획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안위에 도움이 될지는 거의 자명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행동들이 이미 선진국의 여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고 이렇듯 바우만의 경고대로, 빈민층을 과거 게토로 몰아내는 식의 파시즘이 사회 곳곳에서 대두할 가능성도 그만큼 배제할 수 없을 겁니다. 이는 액체 근대가 드러내는 가장 파멸적인 측면의 모순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어지는 5장의 도입부이기도 한, "결국 민족국가의 성공은 자기 주장을 하는 여러 공동체들을 억압한 덕택이다"는 문장은 액체 근대에서 도드라진 민족주의의 어긋난 면을 드러내는데요. 이에 바우만이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역사의 뒤안길에 놓인 공동체주의는 현대 삶의 가속화되는 '액화'에 대한 지극히 예상 가능한 반응, 개인의 자유와 안정 사이의 깊어만 가는 부조화에 대한 반응"으로 사실상 귀결되었습니다. 그동안 액체 근대화의 상황에서 인간 사이의 유대는 가혹하리 만큼 유리되어 왔는데요. 단순히 같은 이웃인 시민에 대한 책임의 부재를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개인화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다시금 공동체주의가 주목 받고 있는 현실 자체는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를 캘리니코스식으로 풀어보면, 예를 들어 인종과 종교와 같은 교집합으로 구성된 공동체, 그리고 이를 기조로 확산된 민족주의가 유럽에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부터, 심각한 변화를 맞게 되었습니다. 물론 과거 세계 2차 대전 중에 보였던 참혹한 전체주의적 망령은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지속적으로 보여지는 저들의 모습은 우려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기존 사회에 이민으로 촉발된 이질적인 공동체의 등장과 더이상 공화주의적인 공동체 담론으로 섞이지 못하는 한 국가 내의 성질이 다른 여러 개별 공동체의 등장은 캘리니코스의 말마따나, 자본주의의 모순이자 심각한 문제였던 경제적 불평등의 분노를 다른 집단에게 돌리게 되는 폭력이 되었는데요. 만약 우리에게 몇 세대에 걸쳐 이식된 근대성이 유동하는 그것이 아니라, 사유하고 행동하는 삶이 기반이 된 고체의 근대성이었다면 어느 정도 조정과 분별이 가능했을 겁니다. 저는 개인주의와 그런 개인화로 촉발된 사회 체제의 변혁이 마치 사익에 의한 공익의 식민지화를 맞은 것처럼, 공동체주의 자체가 철지난 이상주의로 취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신자유주의자들이 읊듯, 타인을 위한 공동체나 그런 인식 전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것을 넘어, 자유 시장에 해가 되지 않는 자본의 유연성을 위한 '사회 대개조'에 전자가 확연히 방해가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일전에 읽은 한스베르너 진의 '카지노 자본주의'의 비평대로 바우만 역시, 소위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카지노 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가볍게 말한다면 인생을 한방의 잭팟에 맡기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세계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가 인간을 그저 소비의 주체로 몰아간다면 흥청망청 살아가며 이상을 잃은 삶의 자체는 누구에게는 천국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지옥과 다름 없을 겁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1장 말미에서, "진보주의자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그 진정한 해방에 '공적 영역'과 '공적 권력'이 더욱 요청된다고"고 강조했는데요. 이제는 사적 영역 만큼이나 공적 영역을 되살리는 일에 시민들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요청되고 이를 지원하는 것이 정치의 새로운 사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지리멸렬했던 진보주의를 여기서 새삼 꺼내고 싶지는 않지만, 과거로부터 이어진 진보주의 운동 자체가 공적인 영역의 책임을 잃어버린 점이 진보가 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 연유일 겁니다. 이와는 별개로 바우만은 우리에게 한 가지 경고를 하고 있었는데요. 전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는 전지구적 엘리트들이 국가의 경계나 사회의 다양성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소유한 돈과 권력의 힘으로 세계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5장 이후의 현실적 논증들은 중대한 정치적 의미로 여겨집니다. 자유 진영의 필연적인 세계화 운동은 바로 이러한 이면을 애초에 내포하고 있던 게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처럼 바우만의 핵심 사상이 잘 담겨 있는 이 논저는 문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파헤치는 동시에, 우리에게 진지한 각성을 요구하고, 이후 정치가 붕괴되어 발생하는 배타적 민족주의 다음의 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들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그가 바라보는 현실 인식은 대체로 암울한 측면이 있지만 그만큼 더 많은 시민의 각성과 권력과 시스템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후반부의 요지는 충분히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액체 근대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스스로 현실을 숙고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설명한, 자본주의적 대안 찾기에 바우만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근본 이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점점 더 공급이 부족해지는 것은 우리가 순응하고 안정적 지향점으로 선택할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인도해줄 수 있는 행동 유형들, 규약들, 규칙들이다.

우리는 영토권과 정착의 원리에 가해지는 유목주의의 복수를 목격하고 있다. 유동적 근대 단계에서는 다수의 정착한 사람들이 유목적이고 탈영토적인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을 근심케 하는 더욱 암울한 예감은, 자유를 실행하는 데 야기될 법한 여러 곤경을 놓고 볼 때, 사람들이 자유로움 자체를 싫어하고 해방의 전망에 오히려 분노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에밀 뒤르켐은 그러한 홉스주의적 관점을 하나의 포괄적 사회철학으로 발전시켰는데, 그 철학에 따르면 가장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만든, 가혹한 형벌체제가 뒷받침하는 ‘규범‘이, 가장 끔찍한 두려움과 대상이었던 노예 제도로부터 인간을 진정으로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사적인 것들‘을 식민지화하여 ‘공적인 것‘이 시작된다는 말은 이제 옳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적인 것들이야말로, 사적 관심과 사적 걱정, 사적 추구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내몰아버리면서 공적 공간을 식민화하고 있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 영역‘과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 사적인 것들이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호가 절실해진 쪽은 이제 공적 영역이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라는 것이 감정적 영향들과 또 그만큼 비합리적인 성향 때문에 끊임없이 침식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목적에 대한 이의 제기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의혹을 던질 수도 있겠다.

정체성의 헐겁고 ‘연합적‘인 위상, ‘쇼핑하고 다닐‘ 기회,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고르고 나눌 수 있는 기회,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오늘날 소비자 사회에서는 자유를 의미하게 되었다.

타인의 악의적 의도와 사악한 음모를 탓하며 자신들의 불행과 수치스러운 패배, 삶의 좌절을 설명하는데 열심인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늘 넘치도록 많았다.

동질성에 대한 지향이, 차이를 척결하려는 노력이 효과적일수록, 이방인들에 대할 때 편안함을 느끼기 어렵게 되고 차이는 더욱더 위협적이 되며 이것이 낳는 불안은 더욱 깊어지고 강렬해진다.

사회 분화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 영구적이고 파괴할 수 없게 된 사회 분화의 핵심적 토대는 즉시성에 접근하는 데서의 차별성이다.

계몽주의 유산을 자유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태를 잘못 파악한 것이거나 오도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은 언제나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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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20대는 학교와 동기들, 그리고 술 보다는 오로지 '헌책방'에 있었습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는 서울에도 제법 많은 헌책방들이 존재했습니다. 제가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좀 특별한 사연이 있는데요. 당시에 헌책방 모임에서 만난 어느 분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중으로 저보다도 그저 몇 살 위였지만 정말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아주 다방면의 지식을 갖고 있었죠. 그래서 그때는 "저 형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헌책방을 다니기 시작한 초기에는 다 읽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책을 사 모았습니다. 알바비와 용돈의 거의 대부분이 책을 사모으는데 쓰였죠. 덕분에 옷도 면 티셔츠 한장과 면바지 딱 하나로 충분했고, 돈 천원도 귀한 그 시절에 매우 궁핍한 시간을 웃으며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끔찍합니다. 후후.


갓 성인이 된 무렵부터 책을 잡다보니 쉽게 그만 둘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책을 읽으셨던 것도 아니고 가정 분위기도 책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때 친구들이 책 좀 그만 읽고 밖에 좀 나가라고 핀잔을 주던 기억도 나고, 군 입대를 했다가 훈련 중 부상으로 군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조정래의 아리랑 전권이 눈에 보여 반가운 나머지 미친듯이 읽었던 기억도 납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럼에도 책은 항상 저와 함께였습니다.


얼마전 부산 여행을 갔을 때, 보수동 책방 골목을 들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헌책방은 20대의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바친, 집보다 가까운 존재였죠. 그렇게 퀘퀘한 냄새와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책방의 서가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책 주인장 분들께 몇 권의 책을 보여주며 책값을 여쭤보니, 알라딘 중고서점의 책값과 별반 차이가 없더군요. 보수동을 처음 방문했던 2003년만해도 만원이면 몇권이나 살 수 있었는데,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판매하는 책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예전에 경험했던 헌책방의 모습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비즈니스적 측면의 그 자체였기 때문일겁니다. 그러니까 그 돈이면 그냥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주문을 해야겠다는 현실적 절충이라고 해야할까요.


예전에 주변 지인들이 저에게, "그렇게 많은 책을 읽어 너의 삶이 바뀌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제법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무엇보다 세상에 눈이 떴다고 해야할까요. 누군가에 이익으로 이용당하는 지식과 그 본질에 대해 이제는 그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머리가 명민하고 영리한 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익히 알게 되었죠. 무엇보다 어느 사람의 기름칠이 된 언변에 쉽게 넘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교적 친밀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중하고 겸손을 표명하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일겁니다. 요약하자면 그동한 읽었던 글줄 때문에 저는 그야말로 음흉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SNS를 하지 않으니 카페에서 책을 읽던 중에,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들이 있어 제 서재에 몇자 적어 보게 되었습니다. 글을 다 쓰고 읽어보니 얼핏 부끄러운 마음도 듭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지금보다 더 낯뜨거운 생각이 들면 글을 없애 버릴 수도 있지만 옛 추억을 떠올리는 기분으로 올려 봅니다. 저의 20대가 따뜻하고 아름다웠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헌책방을 다녔던 기억 만큼은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기억을 반추하며 오랫동안 단물을 빠는 것이 인간의 고집적인 측면이라고 하지요. 저 역시 그런 범주에 하등 벗어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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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5-09-06 0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을 참 좋아하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긴 힘들더군요. 책은 읽었으되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의지도 능력도 없으면서 주절주절 말만 앞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적벽의 제갈량 앞에서 넌 무슨 책을 읽고 뭘 배웠길래 그다지도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냐고 몰아붙이는 백면서생들 보는 느낌입니다.

베터라이프 2025-09-06 15:10   좋아요 1 | URL
간혹 글을 많이 읽는 사람들중에는 오만한 경우도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책과 가까운 분들은 대부분 겸손한 편이었습니다. 쓰신 내용보다는 현대 사회에서도 부와 권력을 가진 계급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책과 깊은 사고를 경험하는 것을 별로 원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이행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뿌리깊은 지식과 그 활용에
대한 폐쇄적 사고가 저들에게 있는 것이죠. 그래서 책을 읽는 사람들과 그런 연유로 통찰에 가까워지는 비권력층에 대한 분노는 단순히 음모론과 같은 것이 아닐겁니다. 저도 우드로 윌슨의 사례를 알고 있어 책만 읽은 편협한 이상주의자들에 대해 연민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성찰, 그리고 이 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글을 읽으셨으면 합니다 ^^

Comandante 2025-09-07 12:01   좋아요 1 | URL
전 앞으로도 책을 꾸준히 읽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세상을 단 한치도 낫게 바꿀 순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 굶는 사람들, 나이 들어 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실천이지요. 본인이 뭘 말하고 쓰는지도 모르면서 나불거리는 사람들은 정말 혐오스럽습니다.

베터라이프 2025-09-07 19:24   좋아요 0 | URL
모두가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으면 이 세상은 그나마 살만 했겠죠. 인식과 행동의 괴리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내가 남들과 더 많이 알아서 그런 지적 우월 보다는 글이 분명 마음을 두텁게 만들고 눈을 개안시키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교육한 사람이 더 많아지고 이제는 행동해야겠다는 결심이 많아지면 세상은 좋아지는 거겠죠. 그런 연유로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아야하는 시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옮김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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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는 1956년 2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헝가리계 유대인과 러시아계 유대인 혈통으로 특히, 외할머니 가계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모친은 정통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보수주의자가 되었고, 부친은 개혁주의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데요. 어린 시절 버틀러는 히브리 학교에서 유대교 윤리와 연원을 배웠고, 그곳에서 최초의 철학 교육을 받게 됩니다. 버틀러는 청소년기 교육을 거쳐 예일대에 편입하기 전, 버몬트주 베닝턴에 위치한 사립 리버럴 아트 칼리지인 베닝턴 칼리지에서 수학합니다. 이후 그녀는 예일대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영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대략 1년간, 독일 관념론과 현상학을 공부했습니다. 1993년 버클리 대학의 교수진에 합류하기 전에 웨슬리언 대학,조지 워싱턴 대학,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미국 내에서 저명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젠더 연구학자로, 정치 철학은 물론, 제3세대 페미니즘, 퀴어 이론, 문학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런 그녀의 작업 전반은 보수주의적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판과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전환과 권리 보장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버틀러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법적으로 레즈비언의 삶을 살고 있고, 파트너 역시 저명한 학자이자 교수인 웬디 브라운입니다. 이들은 현재 버클리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What World Is This?"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3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는 본문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질문입니다. 이 글의 주요 배경이 되는 지난날 전세계 팬데믹 사태와 그 세대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당시의 전염병 상황을 주디스 버틀러는 철학적으로 풀어내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러한 논증 가운데 가장 와닿았던 물음은, "과연 처분가능한 인구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라는 소위 비극적 논답이었습니다. 그동안 국제정치학에서 자주 언급된 '부수적 피해'(물론 지그문트 바우만이 자주 인용했던 구조적 문구이기도 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수많은 부수적 피해와 맞물려서 말이죠.)와 오버랩되는 팬데믹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분석과 그 영향을 철학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에 대해 저 역시 동의하는 편인데요. 여기에 저자인 버틀러는 이러한 '극명한 몰락'에서 과연 우리의 삶이 어떻게 살만한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숙고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현상학의 계보 가운데, 특별히 메를리퐁티를 인용하며, 우리 인류에게 몰아닥친 팬데믹 사태를 앞선 수단으로 고찰해 보고 있는데요. 바로 1장에서 이러한 작업이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꼭집어 언급한 '처분 가능한 인구'에 대해서도 '용인 가능한 죽음'이라는 매개로 이를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 국가 의료 보험 체계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의료보험의 유무로 위태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버틀러의 가정은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아주 명확히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녀의 말마따나 이 펜데믹 사태가 그동안 인류가 겪어온 수많은 역사적 부침들과 같이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어떤 맞이한 현상에 가까운 것이라면, 결국에는 이렇게 마주치는 현실에 있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삶을 온존할 수 있을지 무엇보다 그 부분을 숙고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버틀러는 우리가 거쳐가고 있는 현 세계를 어떤 계층들은 만족스럽고 살만하다 느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삶의 절망을 몸소 체험하여 흡사 대비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그레이스 블레이클리가 언급한 것처럼, 코로나는 인간 사회의 격차와 차별을 뚜렷이 드러냈고, 이는 자본주의의 무비판성과 맞물려,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수면 위에 떠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후설이 인용되기도 하지만 그의 특별한 개념인 '시간화'는 팬데믹 사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됩니다. 뒤이어 도출되겠지만 인간과 인간의 상호 연결성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연결된 사회에서 개인이 다른 개인과 접촉하게 되는 시간화의 과정은 펜데믹이 왜 쉽게 근절되지 못했는가를 밝혀주는 주요 수단입니다. 그런 연유로 여러 현상학의 개념들이 메를리퐁티의 현상에 이르러,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태를 (현상학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현상을 우리 인류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것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모든 것들을 우리는 분석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적이든 사회학적이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등장한 "행복한 자들의 세계는 불행한 자들의 세계와는 다뭇 다른 세계이다."라는 문장은 우리에게 좀더 비상한 철학의 유용을 마련하고 제공해야 한다는 당위를 마치 요구하는 것 같은데요. 이것을 단순히 격차가 있는 삶을 표징하는 문장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혹은 계급주의적 논리로 그저 비하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처럼 이제는 체제와 세계를 그런 식으로 돌이켜 볼 시기라고 여겨집니다. 


이미 버틀러는 철학이란, "세계를 더 정밀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후반부 논증에서 밝히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우리가 이러한 비극적 사태를 겪고 난 후, "무엇이 우리가 살만한 세계인가, 무엇이 살만한 삶의 조건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이것은 투박한 공리주의의 겉핥기식 논법 만은 아닙니다. 버틀러가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세계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집중하고 있지만, 2장에서 다시 인용된, 메를리퐁티의 '상호 얽힘'과 같이, 세계는 우리가 만지고 접촉해야만 인식할 수 있는 그런 매개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단순히 수용하거나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세계가 이런 현상학적 과정 자체로 작용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타당해 보입니다.

이러한 현실세계의 대체적인 관조에도 불구하고 저는 2장에서 언급된 하나의 모습에 비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를 죽게 하더라도 나는 생계를 유지하게 위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한시도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망각하지 못하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는데요.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보험 유무를 체크할 계재는 없는 것이고, 그렇게 삶을 이어가는 생계 수단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 자본주의 체제의 도드라지는 단면일 겁니다. 따라서 버틀러는 우리가 살만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삶의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반복적인 논법으로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이미 1장에서, 우리는 수많은 도덕적 책무를 감당하고 이행해야 하는 존재이고, 이것이 자유주의적 토대 위에 있는 관념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이런 도덕적 책임, 타인에 대한 관심, 세계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 우리 삶에 대한 분명한 확신 등은 결국 우리가 비극을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바라봐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1장의 철학적 도출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팬데믹은 저자의 분석대로 우리 세계를 더 정밀하게 볼 수 있는 현미경과 같은 기능을 제공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는 '자본주의'와 '경제'를 더 우선하는 자들이 소위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와 같은 단면을 언급하며 그저 "어떤 이들"이라고 명확히 언급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티브 배넌과 도널드 트럼프를 그 범주에 포함하고 싶습니다. 혹자들은 팬데믹 시기의 도널드 트럼프를 과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언스의 조지 W. 부시로 빗대어 말하기도 하지만 팬데믹 시기의 트럼프는 그 태도와 결과물은 완전히 상이했습니다. 거의 최악으로 말이죠. "어떤 이들은 죽어야만 한다고 여기고 그러한 위험성을 계산하고 있는 이들은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경제를 위해서 결국 인간의 생명이 희생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는 소위 언론 기사적 평가는 지난 2019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평등이 팬데믹 시기에 차별적인 죽음을 부채질했다는 사실을 놓고 봐도 말입니다.  비록 저자가 지면을 따로 할애하여,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가 인도한 이 '위대한 사회'를 복합적으로 비평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찌됐든 신자유주의가 팬데믹 시대에도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경제적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인간의 정체성이나 존엄한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교 우위에 놓여 있는데요. 아마도 이러한 사활적인 분위기에서 저자는 우리의 삶과 살만한 환경을 위해, 3장 이후의 논증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포용"으로서의 사회적 유대라는 이상주의적 관념을 다시금 소개하고 이것이 더 나은 삶과 살만한 사회를 위한 새로운 방향타가 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2장 이후로, 버틀러는 작금의 세계가 진정한 '공동의 세계'라고 볼 수 없고 명확히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의 삶과 집단적 가치와 욕망을 실행함으로써 저항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미 얼마 전에 읽은 패트릭 J. 드닌 역시, 종래의 개인주의 만으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언급한 점은 새겨들을 만합니다. 아니, 스스로 지각이 있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시장의 자유'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공동의 삶을 목표로 수많은 개인들이 복잡하게 상호 얽혀 있는 사회의 본질을 인식하고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가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될 겁니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그 대안을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이전에 성소수자들의 권리와 인류애를 강조했던 저자 답게, 현상학에서 말하는 이런 얽혀듦을 매개로 우리의 본성과 더 나아가 세계와 지구의 안전을 모색해보는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4장은 바로 이러한 대안 제시로 이어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남성 주도성의 문화'에 대해 완벽히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동안의 사회가 이런 성적 우월주의에 입각한 기계적 합리성에 전도되어 왔고 여기에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여, 어떻게 보면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과 공동을 위한 삶을 몇십 년에 걸쳐, 상실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의 제안대로 펜데믹 시기에 뜻하지 않게 희생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깊은 애도와 주변에 하나하나 모인 이런 개인의 삶이, 곧 사회적 삶의 집합체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우리는 사적인 삶의 중요성을 과거보다 강하게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전부 '살아남은 자들'이지만 '여기 그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얽혀든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바로 이러한 비극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교훈을 찾는다는 말이 역시나 비정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지난 사람들을 맘 깊이 애도하고, 또한 개인성과 무비판적인 합리성을 극복하여, 우리 스스로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필요한 방법들을 모색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입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 세계가 대체 어떤 세계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도 이런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삶이 "그저 견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삶이 우리에게 필요한가에 대한 논증 가운데 들어가 있는 문장이지만, 이것의 의미는 비극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지분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공정한 수단은 결코 없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만일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변화시킨다면, 그것은 그저 세계의 한계들만을 변화시킬 뿐 사실이나 언어로 표명될 수 있는 사물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세계가 우연한 접촉에 의해서도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바이러스 전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임을 깨닫지 못한 채 세계를 거쳐왔는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것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 단수적인 것의 문제이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의 구성 자체에도 관계되어 있다."

국가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주장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으며, 기본소득 보장과 단일 의료보험 부과체계 법안에 대한 심리 가능성은 보다 더 높아졌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그 어떤 제한도 없이 자유롭게 인간의 삶을 살아간다면, 살 만한 삶을 버리는 대가로 자유를 즐기는 것이 된다.

우리는 오히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우리의 삶 자체가 그저 견딜 만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기를 바란다.

마치 나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타자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혼자 지내고 있는 개인들은 가장 위험에 처한 이들에 속한다.

무엇이 삶을 살만하도록 만드는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결코 배타적으로 우리만의 것이 아니며,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삶들, 즉 보다 일반적인 삶의 과정들을 위해 살만한 삶을 만드는 조건들이 보장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달리 말해, 팬데믹 상황하에서 노동자는 살기 위해 일하러 가지만 바로 그 일이 바로 노동자의 죽음을 재촉한다.

여기서 확실해 보이는 것은 바로 우리가 더이상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할 수 없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신체로 체현된 자아는 이미 사회적으로 자리매김 되어서 주위 환경 및 타자들 안에서 그 자신을 벗어나 영향받고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역할은 감추어진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보다 정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매우 가까운 것, 매우 근접한 것, 우리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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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패트릭 J. 드닌 지음, 이재만 옮김 / 민들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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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J, 드닌은 1964년 7월 21일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 카운티에 있는 윈저에서 태어났습니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코네티컷 주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드닌 가(家) 역시, 아일랜드에서 도래했습니다. 아일랜드 인들 특유의 가톨릭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난 드닌은 1986년, 뉴저지 주의 공립 연구 대학인 럿거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박사 학위를 마치기 위해 다시 모교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는 시카고 대학의 '존 U, 네프 사회 사상 위원회'에서 대략 1년 동안 수학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빌 클린터 대통령이 임명한 미국 정보국 정보국 (USIA) 국장인 조셉 더피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특별 고문으로도 일하는데요. 2년 뒤인 1997년부터 2005년까지 프리스턴 대학에서 조교수로 강의했고, 2005년에는 조지타운 대학의 정교수에 합류하여 2012년까지, 차코풀로스-코우날라키스 정부학 부교수를 역임합니다. 또한 같은 대학의 정부학과에 소속된 '미국 민주주의의 뿌리에 관한 토크빌 포럼'의 창립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는 노트르담 대학 교수진에 합류했고, 2018년에는 대학측으로부터 그는 정교수로 채용되기에 이릅니다. 드닌은 포괄적으로 민주주의, 자유주의, 여러 고전 및 현대 정치 사상, 그리고 미국 정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인데요. 정치적 지향으로 미국 내에서 저명한 보수주의 지식인 중 한 명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는 5권의 논저를 집필했고, 3권의 주요 공동 저자이며, 등재된 수많은 학술 논문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여름 독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던, 이 책 "자유주의는 왜 실패했는가"는 2018년에 미국 내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요. 2019년에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국 보수주의 대회 (National Conservatism Conference)에서 그는 주요 연사로 나서, 국가적 보수주의를 부분적으로 비판하고 그에 반하여 미국적 민족주의가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의 주요 목표이자 성취였다는 주제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드닌은 2020년에도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과 두 차례나 공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hy Liberalism Failed"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이듬해인 2019년에 번역이 되었고, 지금 서평을 쓰는 판본은 2025년 6월에 새롭게 나온 2판인자 개정판입니다.

개인적으로 2019년에 처음 번역된 판본을 통해, 서평을 남기기도 했지만 당시 부족한 이해와 그에 따른 낯 부끄러운 내용으로 말미암아, 이번에 다시 개정판을 잡게 되었습니다. 앞서 저자인 패트릭 J. 드닌의 이력을 짧게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는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보수적 지식인으로 규정되는 인물입니다. 이는 특히 미국 사회에서 종래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여러 측면에서 혼용 되어 쓰이고 있고, 일반 미국 시민들이 '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고려해 본다면, 그의 이 논저 자체는 꽤나 논쟁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저 몇 마디 말로 이 책을 쉬이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점은 저자가 바라 본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자유주의가 그 유구한 전통의 옆 길로 벗어난지 오래되었으며, 수많은 미국의 (정치학자들을 비롯) 사회학자들이 자유주의의 목표에 헌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유주의가 초래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밝히는 부분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집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목이기도 했던, "자유 의지가 배제된 인간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는가"가 던지는 질문은, 마치 그동안 자유주의가 걸어온 노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미국은 지난 1776년, '자유주의적 공화국'을 기치로 건국해, 마치 구시대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선망하는 국가가 비로소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율성과 권력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들'이라는 기치로 새롭게 목도한 '자유주의 국가'의 탄생이기도 했는데요. 이런 국가적 체제 하에 자유주의가 증명한 부분은, "실정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사회 계약의 의미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3장에서 상세히 논증되겠지만, 이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구축했던 것은 '법을 통한 자유'였습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혹자들에 의해 존 스튜어트 밀이 마치 보수주의자의 기원으로 오역되기도 하지만 그가 원했던 자유와 그것이 보장된 사회는 지금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공동체와 관련된 부분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그 당시 단순한 상업 발전과 그로 인한 부의 증대가 시민의 자유에 이바지하게 되는 점을 중심으로 두고,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하는 규약들을 밀은 논했던 것처럼,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사회적 통제가 필요했다고 이해됩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미리, "공화주의적 자유"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회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타인들의 자유를 좀 더 인식하는 자유"와 혹은 "타인의 자유는 얼마나 보장되는지"에 대한 협력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공동체 인식에 대한 전반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반부 논증에서 알렉시스 토크빌이 과거 타운에서 보았던 미국인들의 공동체적 가치와 그런 협력에 대해 다소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이 자유주의가 초래한 병폐의 기본적 사항은 무엇보다 이런 '가치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특별한 개인주의의 강조, 그리고 이기심과 내재되어 있는 욕망을 긍정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정치 질서가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 놓여 있기도 했는데요. 물론 권력에 제약받지 않는 개인주의적 토대는 어느 정도 중요한 얼개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기심이 자본주의적 자아 실현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는 대목 역시, 쉽게 긍정할 만한 부분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저자가 2장에서 확인하고 있듯, "보수주의자들이 그 목표를 국가가 비교적 적게 개입하는 가운데 시장의 힘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시장보다 더 공정하게 이익을 분배하고 자원을 지원할 수 있는 정부 프로그램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표면적인 대립에 있습니다. 아마도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양자의 힘의 차이는 기울어졌다고 봐야 할 텐데요. 비록 이 책에서는 '신자유주의'가 그저 단 한 차례만 등장하지만 이 신자유주의가 오로지 "제약받지 않는 시장 자유'와 반대로 '정치적이면서 가치 지향적인 대다수 시민의 자유'에 대해서는 사실상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구분할 필요가 있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어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결국 정치적 우위를 선점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규제 완화, 세계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이행에 자유주의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굳이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애초부터 한 몸과 다름없는 상태였다고 언급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이행과 그 기조 위에 올라탔고, 그에 따라 자유주의는 아주 특별하게 '변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20년대 세계 대공황 그 이전과 혼란이 사그라드는 이후, 미국 자본주의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거나 그에 비견되는 성취를 얻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사용하기 위해, 자유라는 관념이 무엇보다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저자의 논증 가운데 7장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두고,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변경할 뿐 아니라 유구한 정체를 사실상 정반대되는 정체로 즉 인민들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사적 개인(혹은 사사주의)으로서 물질적으로 안전한 삶을 누리는 데 만족하는 정체로 재구성한다는 분석"과 묘하게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이는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민주주의가 메디슨이 그 실체를 드러낸 소수의 공화주의로 덧씌워졌거나, 혹은 자유주의에 부분적으로 예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1980년대 자유 진영의 모멘텀이 되었던 신자유주의 역시,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위해,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정치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이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즉, 이러한 자유주의 하에 몇 세기에 걸쳐, 함양되고 심지어 강조된 개인주의와 그 토대 위에 발현된 이기심, 욕망 추구, 남들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감정 등은 전면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보수주의자적 정체를 보이고 있는 저자 역시, 시민 사회에서 만연된 이 경제적 불평등이 어떠한 파국을 일으키게 될지 우려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자유 지상주의자들의 핵심 목표이기도 한, "관습과 심지어 법까지 제거하여 우리들 개개인의 자유를 확대할 수 있다"고 믿는 관념 역시, 비틀린 시야를 많은 시민들에게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자유'라는 접두사가 붙은 이데올로기와 가치 지향 등이 시민들에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일성을 주입하고, 그동안 자유주의적 유산이 사회와 시민들에게 끼친 병폐 및 문제점을 백안시하게 된 주요 원인이기도 했는데요. 저는 과거 지그문트 바우만의 비판과 같이, "그저 2~3세기에 불과한 경제학이 우리 삶에 강력하게 스며들어, 우리를 주인처럼 부린다."는 서사가 마땅히 자유주의에도 해당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판할 수 없는 자유주의"는 그만큼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 하에, 점진적인 인문학의 쇠퇴와 비판적 시민성을 잃은 현 체제를 일찍이 샹탈 무페도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저자 역시, 5장에서 현재 미국의 교육 현실과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은 소위 대학 교육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저자가 언급하는 '자유학예' 자체는 학문의 틀을 옥죄지 않는 인문학적 토양과 전문 분야의 교육과 함께 더불어 상생해야만 그것이 직간접적으로 고착화된 엘리트 지배체제의 보다 큰 개선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여기서 '능력 만능주의'나 '독식주의'를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주의가 개인의 능력과 그에 따른 능력주의를 긍정해온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지향이 정치적 체제 이전에 주요 관념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개인들을 능력의 여부에 따라 서열을 나누는 것,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용인하지 않는 새로운 계급주의를 강화시켜온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역시,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편이었고 삶의 통제력을 상실한 다수의 개인들을 오로지 그들의 책임으로 치부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부조에 대한 일부 계층의 지독한 반발심과 증오는 바로 이러한 점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6장의 '새로운 귀족정'이라는 제목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증진시켜온 자유주의가 어찌됐든 배타적인 '새로운 계급'의 출현을 긍정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의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 하에서 사회적 상향 이동과 하향 이동이 세계화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많은 계급이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저자의 분석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많은 시민들이 이런 세계화 상황에서 심각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인지하고 있어야 할 부분일 텐데요. 더욱이 소위 지유주의적 지배 계급이 다수 시민들의 경계에서 거리를 두고 그들만의 요새를 쌓고 있으며, 힘과 부를 가진 소위 엘리트 지배 계급이 자신들은 그렇게 잔인한 인간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이 체제의 불안성과 부실한 토대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고 있지 않은 점은 몹시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즉, 국가가 체제의 뒷편에 있는 하층 계급과 지원이 필요한 시민들에 대한 부조 자체를 이들 엘리트 계급들이 표면상으로는 나서서 거부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위 신자유주의가 작은 정부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다수의 부유층과 경제 엘리트들의 안위와 무엇보다 직결되어 있던 2008년 시장에 대한, 막대한 공적 자금 지원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고 있는 점은 희극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정치적 포퓰리즘이 기존 정치 무대에 등장한 시점에서 이러한 논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은 저 역시,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이처럼 우리가 자유주의와 그것이 추동한 체제에 대해, 사실상 어떠한 성찰도 없었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가해진 가혹한 현실은 일정 부분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저자의 점진적 평가대로 오늘날 자유주의가 초래한 많은 병폐와 문제들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성공했기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그것이 드러내는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적 가치와 그로인해 부정할 수 없는, 체제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오로지 법에만 의존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의 조언대로 도덕이 시민들의 덕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내에서 덕과 이기심의 배치는 실로 교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한쪽이 기세를 잃어야만 다른 한쪽이 살아갈 수 있는 전제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도 도덕감정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 조차 현대에 이르러 귀결된 이런 체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아예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제학자들이 절로 떠오를 정도입니다.) 결국 저자는 7장에서 지목된, 정치에 있어 대중의 관여를 받아들이지 않는 '예속된 민주주의' 앞에서, 간접적으로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에게 있어서도 투표는 하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시민을 옹호하는 현상을 밝히고 있었는데요. 사실 저 역시도 시민 정치를 긍정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존 듀이조차도 시민들이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점은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존 듀이를 반민주주의자라고 깎아 내릴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의 처절한 노력을 고려해본다면 이는 억측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자유주의 이후에 과연 무엇이 나타날 것인가는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이 책의 결론에서, "자유주의 이후 시대로 걸음을 옮기려면 우선 자유주의의 호소력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자유주의가 대개 약속만 했던 감탄스러운 이상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를 변론하는 이들은 "심각한 불만, 정치적 기능 장애, 경제적 불평등, 시민간 단절, 포퓰리즘적 거부 반응 등을 체제의 원인과 무관한 부수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면모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마찬가지로 결론에서,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완성해갈수록, 고질적인 병폐를 감추기 위해 미봉책과 장막을 만들어내는 역량 이상으로 빠르고도 광범위하게 병폐를 유발한다"고 대미를 장식합니다. 아주 의미심장하게 말입니다. 그동안 자유주의가 겉으로 내세우는 주장과 이론들이 결국은 과거의 공동체 관념과 덕을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 것도 사실이고, 스스로 자유주의의 대변자라고 하는 자들 마저, 오로지 장밋빛 전망만 내세우는 데 급급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식으로 도출된 역설적 이해에서, 우리의 자유주의는 어쩌면 대적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회를 '야만'으로 몰아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저자의 대안과 같이, 사적 목적이 더불어 공적 목적과 함께 갈 수 있을지 의문이고 막대한 불평등은 어떻게 개선시킬 것이며, 낱낱이 깃들어 있는 시장 자본주의의 냉혹한 속성은 어떤 식으로 개선시킬 수 있을지, 이는 지배 체제(사회의 주가 되어버린)의 논리에 거듭 반하게 되는 양상이니, 어떠한 전환이 가능할지 지금으로선 의문이 들 따름입니다. 이미 저의 뇌리에 박힌 인용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시초인 하이에크가 이 자유주의 사회가 기존 질서 못지 않은 끊임없는 불평등, 어쩌면 더 심각한 불평등을 낳겠지만, 끊임없는 변화와 진보를 약속함으로써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모두의 지지를 얻을 것이며, 거의 초월적인 양적 성장이 앞으로 초래될 불평등 문제를 해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아주 순진하게 기대했다는 부분은 기존의 자유주의 내지는 신자유주의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글 말미에 질베르 리스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저자는 글에서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의 한계를 갖는 의제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저 규제 완화와 세계화, 그리고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 등을 포함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뿐"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 지점에서 이익에 매몰되는 것이 그저 인간의 본성인지, 아니면 금권 정치에 편승한 보수주의 정치인들의 그런 행태가 부정적인 모습의 최대치인지 아니면 더 무엇이 남아 있을지 궁금한 편인데요. 이러한 현실 모습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미력하지만 지금도 해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존 듀이의 익히 그 '좌절'을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듯 보이는 '퇴화된 시민들'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현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시의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이는 노엄 촘스키의 '분절된 시민들'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었는데요. 이것은 단순히 교육이나 성찰의 '퇴화'로는 설명되지는 않을 겁니다. 과연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러한 수많은 위협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요. 저자인 드닌 역시, '자유주의 실패' 이후,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쇠퇴 뒤에 실질적인 '과두제'가 나타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는 미리 구상한 정치적 계획에 순응하도록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뜯어고치려 시도한 최초의 정치적 구조물이었다.

오늘날 대학 캠퍼스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나타나는 정치적 견해는 널리 퍼져 있는 이런 신념과 공명한다. 교육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실용적이어야 하고, 사고방식이 비슷한 대학 졸업생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고소득 직업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신념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힘겨운 과제는 자유주의 사회의 병폐를 더 많은 자유주의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신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없다는 신념은 비록 언제나 한결같이 인정되고 실천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중세 유럽의 철학적 성취였다.

인간의 욕구를 다스리거나 제한하려 애쓰기보다 근절할 수 없는 이기심과 물욕을 인정함으로써 그런 욕구를 활용할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자유주의의 성공 자체가, 현재 자유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요인이 자유주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을 가능성을 성찰하기 어렵게 만든다.

세계시장은 비인격적 거래의 가치 없는 논리, 이제껏 자본주의의 위기를 불러왔고 오늘날 세계시장 자체를 파탄 내고 있는 논리를 강요함으로써 다양한 경제적 하위문화들을 대체한다.

하지만 인간 본성의 이기적이고 소유욕 강한 측면을 유익하게 활용할 경우 경제적, 과학적 체제의 발전을 촉진하고 자연현상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인간의 역량을 키움으로써 자유를 확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홉스와 로크 모두 우리가 사회계약을 맺는 까닭은 단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더 안전하게 행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국가 팽창에 불굴의 적대감을 보이면서도, 공동체의 삶에서 시장의 역할을 제한할 수도 있는 지역적인 통치 형태나 전통적인 관습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 시장과 국제 시장을 보호하는 국가의 능력에 줄곧 의지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의 의제 가운데 그들이 근래에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동안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실행한 의제는 규제 완화, 세계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 등을 포함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치질서가 우위를 점하는 경우에만 역사의 시간 차원을 온전히 경험하는 삶이 쇠퇴하고, 사회에 만연한 현재주의가 삶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다시 말해 특히 소비와 쾌락주의, 단기적 사고를 특징으로 하는 인간 의지를 해방한다는 명목으로 성적 규범과 경제적 규범을 해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겨우 10년 뒤에 생명공학과 ‘인류 이후의 우리 미래‘에 관해 쓴 책에서 후쿠야마는 동일한 과학적 논리가 인간 본성 자체까지도 바꿀 수 있고, 그 결과로 이 논리가 지탱해 온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가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인정했다.

로크처럼 하이에크도 급속히 발전하며 현저한 경제적 불평등을 낳는 사회는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미 빠른 데다 가속까지 하는 발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18세기 메디슨의 견해에서 정부는 개인의 이익 추구와 그런 추구의 결과를 ‘보호‘하기 위해, 특히 불균등하고 다양한 재산 획득 정도로 나타나는 개인 간 차이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결국 퇴화된 시민들마저 자유주의 질서의 계몽된 족쇄를 벗어던질지라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원인은 특히 정부와 경제, 기술, 세계화 세력의 힘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시민들의 병폐가 자유주의 질서의 성공에서 비롯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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