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생거 사원 을유세계문학전집 73
제인 오스틴 지음, 조선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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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은 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인 조지 오스틴은 당시 스티브틴과 딘의 성공회 교구 목사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양털 모직 상업의 오래된 가문의 출신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녀의 모친인 카산드라 리는 저명한 리 가문의 출신으로 신사 계급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1783년에 제인 오스틴과 여동생 카산드라는 앤 콜리에게 교육을 받기 위해 옥스퍼드로 보내졌고, 앤 콜리는 그해 말, 이 자매를 사우샘프턴으로 데려갔습니다. 같은 해, 가을 두 자매는 갑작스런 발진티푸스에 걸리게 되고, 특히 제인은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그때부터 제인은 집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고, 이후 래딩 애비 여학교에서 언니와 함께 기숙을 하며 수학합니다. 오스틴은 적어도 열한 살 시기부터 자신과 가족을 즐겁게 하기 위해 시와 이야기를 종종 쓰기 시작하는데요. 1790년에 쓴, "사랑과 우정 (Love and Friendship)"이라는 풍자 소설이 그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793년에서 1795년 사이에 쓴 짧은 서간체 소설인 "레이디 수잔 (Lady Susan)"는 그녀의 초기 작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챠톤에 있는 동안 대체로 호평을 받은 네 편의 소설이 출판되기에 이르는데요. 이는 "이성과 감성 (1811)", "오만과 편견 (1813)", "맨스필드 파크 (1814)". "엠마 (1816)" 등 네 편의 작품입니다. 연이어 출판된 그녀의 작품들은 당시 평단과 사람들로부터 적잖은 호의와 평가를 받았지만 끊이지 않은 명성과 작품에 대한 찬사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사후 재조명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가운데 그녀와 여동생 카산드라와 오고간 편지들이 따로 알려져 제인 오스틴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Norhanger Abbey"로 지난 1818년에 출간되었고, 번역된 판본은 2006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한 원서를 참조했습니다. 그리고 을유문화사에서 번역한 이 판본은 2015년 3월, 출간되었고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17년 2월에 나온 초판 2쇄본입니다.

여러분도 짐작하고 있듯이 이 책의 제목인 '노생거 사원'은 작가가 만든 가상의 지명입니다. 오래된 영국 성공회의 기반이 녹아있는 노생거 사원 자체는 '가족 예배당'이 포함된, 대저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작품 후반부에 남 주인공이기도 한 헨리 틸니가 여 주인공인 캐서린 몰란드를 향해, 역사적 이성관이 담긴 영국 교회의 유산을 읊는 대사에서 이 노생거 사원이 내포한 관습적 본질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캐서린 몰란드는 풀러튼에서 목회 생활을 하고 있는 목사의 딸로 태어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두 개의 목사자리를 갖고 있는데다 먹고살 재산이 상당하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인 리처드는 꽤 점잖은 인물이었고 캐서린의 어머니는 현실적인 분별력을 지닌 성격 좋은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비교적 평범하게 자라난 캐서린은 그녀의 짧은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이 닥치게 되는, 바쓰에서의 6주를 시작하게 됩니다. 극중에 등장하는 바쓰는 대체로 중위 계급 이상의 교양과 적당한 지위를 갖고 있는 (소위 구 귀족 계층을 포함한) 사람들의 사교장이자 휴양지로 명성이 높은 곳이었는데요. 그녀의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앨런 부인과 그 남편의 호의로 캐서린을 포함한 세 사람이 함께 바쓰로의 동행을 하게 됩니다. 열 여덟살의 캐서린에게는 비로소 풀러튼 바깥의 세상을 접하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그녀가 바쓰의 사교장에서 처음 만나게 된, 쏘오프 일가는 그녀의 오빠인 제임스 몰란드와 작은 인연이 있던 가족이었습니다. 이 쏘오프 가의 세 딸, 그리고 이들의 오빠인 존 쏘오프와 제임스 몰란드가 같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였던 것인데요. 그래서 극중 캐서린과 중요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자벨라 쏘오프가 캐서린을 보자마자 제임스와 너무나 닮았다고 경탄하고, 그 즉시 이자벨라는 캐서린에게 호감을 표하게 됩니다. 후에 그녀가 친분을 맺게 되는 주요 인물인 헨리 틸니는 캐서린을 보며, 다른 사람의 표정과 감정 표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약간의 이채를 띠기도 하는데요. 닳고 닳은 사교계에 캐서린과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어쩌면 신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타인에게 신실하고 솔직한 면을 갖고 있는 캐서린과 앞서 언급한 이자벨라는 가히 상반된 인물입니다. 이자벨라는 다른 사람의 호의를 자신의 평판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영악하게 이용할 줄 알고 때에 따라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어필하기도 하여, 특히 또래 남자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감을 그저 수용하는 것을 넘어 즐기기까지 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이 쏘오프가의 현실적 사정(재산의 여력이 부족하다는 것)과 다소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는 틸니 가를 캐서린이 겪게 되는, 사건의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이자벨라와 자신의 오빠인 존 쏘오프가 은근히 맺어지길 바라면서, 자신과 캐서린의 우정을 순수한 관계 이상의 이익으로 삼은 셈인데요. 이자벨라라는 인물의 조성은 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가히 노골적인 의도가 있기도 합니다. 일찍이 제인 오스틴은 당시 여성들의 결혼에서 남자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요건에 따라, 선택된 여성들의 삶이 안전한 구조로 이어지는 "결혼관"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이자벨라는 자신의 외모가 갖는 이점과 주위 사람들에게 보다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 어투와 행동들을 통해, 그녀 주변과 여러 인물들을 적절하게 이용합니다. 헨리의 형이자 군인이기도 한 프레드릭에 대한 이자벨라의 어정쩡한 태도는 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캐서린의 오빠인 제임스와 공공연하게 서로의 애정을 밝히면서도 그녀에개 추근대는 프레드릭의 행동에 대해선, 소위 그 시대 '레이디'에 맞지 않는 단호함을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됩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위선'을 정확히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명백히 조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프레드릭과 이자벨라, 이 양 캐릭터의 존재성은 진실된 태도의 캐서린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극의 중후반을 넘어가는 지점에서, 캐서린이 헨리의 여동생인 엘레노어 틸니에게 보이는 호감은 대체로 선명한 모습이기도 한데요. 문제가 있는 부친의 슬하에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자라난 엘레노어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노력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캐서린 - 이자벨라 - 엘레노어" 이 세 캐릭터가 각각의 고유한 개성을 보이면서도 극중 지문과 대화를 통해, 이들의 개별성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장면들은 이 작품의 백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세 여성 캐릭터들 가운데 꽤나 긍정하게 된 인물은 주인공인 캐서린이 아니라 엘레노어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서사 가운데 아쉬웠던 부분은, 제임스와 이자벨라 간의 소위 파혼 (부친인 리처드가 그의 아들에 대한 약혼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에 대한 좀 더 면밀한 후술이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틸니 가의 저택이라고 볼 수 있는 노생거 사원에 체류하고 있던 캐서린에게 제임스와 이자벨라, 양 자가 각기 다른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요. 이 가운데 이자벨라가 틸니 가에 대해 험담에 가까운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후반부에 어떤 반전이 이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내용들은 완전히 다른 측면의 후일담이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결론을 예상하고 있던 저에게는 굉장히 어설프고 함축적인 결과물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래서 이자벨라의 역할과 그녀의 서사적 측면의 중요성은 아쉽게도 금방 사그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지금보다 젊었을 시절에 다른 이성의 눈에 들어 고백 직전의 감정적 끌림만을 추구하는 지인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예전에 지인인 어떤 여성은 다른 이성이 자기에게 고백하는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너무나 좋아한다고 했었죠. 남자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조장하고 진실된 가치와는 상관없는 감정의 오고감을 즐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앞선 사례가 옳다 그르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러한 행위 자체로 인한 진정한 관계에 대한 본질을 인간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이 충분히 숙고하고 성찰하기란 아무래도 어려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제한적이지만 이자벨라와 프레드릭, 이 두 인물과 헨리와 캐서린의 지속적인 교류와 서로간의 이해가 더욱 대비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겠죠. 더불어, 더욱 어리석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틸니 장군과 존 쏘오프의 인물 설정은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얼마나 멍청하고 자기 본위적인 남자를 혐오했는지 짐작하게 했습니다. 극중 존 쏘오프가 터무니 없는 이해로 캐서린을 힘들게 하는 것이나, 그런 자신의 오빠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자벨라의 어리석음 역시, 저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용두사미라고 했던가요. 만약 이 작품이 후반부에서 견고한 서사를 갖췄다면 거의 나무랄데 없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 어떤 사람의 이유 없는 호의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어떠한 지성이나 통찰이 전무하더라도 의도적인 행위와 언행들의 이면을 짐작하고 그 사람의 선함과 악함을 끄집어 내는 것이죠. 그래서 대문호들에게 진정한 순진함이 갖는 의미가 바로 이러한 본성의 분석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리석음과 악함은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몰란드 부인은 귀족과 남작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그들의 일반적인 악행을 헤아릴 수 없었고 그들의 계략으로 딸이 위험에 빠지리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시림들이 말하기를, 기분 좋은 편지를 쓰는 재주는 여성의 고유한 영역이죠. 타고난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일기 쓰기가 도와준게 분명합니다."

사랑의 섬세함이나 우정의 의무에 대한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친구에게 어느 시점에 미묘한 농담을 적절하게 던져야 하는지 또는 어느 시점에 달라고 졸라야 하는지 몰랐다.

만약 캐서린이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더 잘 알고 또 자신의 감정에 덜 몰두했다면 오빠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자벨라의 미모에 반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마음은 순수하고 행동은 잘못이 없는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망신당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우스운 꼴을 보이고 불명예스러워지는 것이야말로 여주인공의 삶이며, 그런 상황에서 발휘하는 용기야말로 여주인공에게 위엄을 주는 법, 캐서린도 용기를 내 버텼다.

남자는 여자의 새 가운에 관심이 없다는 걸 남자나 알지 누가 알까. 남자의 마음이 비싼 옷이나 새로 산 옷에 흔들리지 않는 다는 사실.

"결혼이나 춤이나 남자가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여자는 거절할 자유만 가집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득을 보려고 맺은 약속이라는 점도 같아요."

희생은 고귀하다. 그들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친구를 불쾌하게 만들고 오빠를 화나게 만들고 그 두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계획을 자신이 나서서 망쳤다는 괴로운 자책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국인의 기질과 습성을 보면 정도는 다르더라도 일반적으로 선과 악이 섞여 있다.

그의 분노가 헨리를 경악하게 했지만 위협할 수 없었던 것은 헨리가 자신의 목적에 흔들림이 없었고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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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5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김계영 옮김 / 레모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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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본명이기도 한, 이리나 르보브나 네미롭스카야는 1903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키예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은 부유한 은행가로 이름은 레프 보리소비치 네미롭스카야였습니다. 특히 어머니 파니 요노브나 마리골리스 네미롭스카야와의 불안정하고 불행한 관계는 그녀의 많은 소설에서 중요한 문학적 모티브였는데요. 딸이 자신의 모친을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작가 스스로의 개인사적인 측면에서는 충분히 불행한 일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시작되자 바로 러시아 제국을 떠나, 1918년에 잠시 핀란드에서 체류하게 되는데요. 그렇지만 이들은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에서 보내게 됩니다. 프랑스에 도착한 뒤에 네미롭스키는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게 되었고, 이미 18세 때부터 작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1929년, 그녀의 처녀작이기도 한, [데이비드 골더]가 큰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인 1930년에는 영화화가 되기도 하는데요. 우여곡절 끝에 출판한 데이비드 골더가 그녀에게는 큰 문학적 명성을 안겨주었음은 분명합니다. 이에 그녀가 삶을 지속하던 그 시대의 유럽은 이미 전체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여기에는 삐뚫어진 민족주의가 한 몫을 하게 됩니다. 물론 프랑스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요. 그녀 스스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부각시키지도 않았거니와, 심지어 러시아계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하게 됩니다. 하지만 1942년 7월 13일, 네미롭스키는 비시 프랑스가 고용한 형사들에 의해, "유대인계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딸들 앞에서 체포되었고, 이후 그녀는 피티비에에 있는 임시 집합 수용소에 이송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이틀 후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인 미셸 엡스타인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지만 네미롭스키는 한 달후, 발진티푸스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인 엡스타인 역시, 11월 6일에 나치에 의해 즉시 살해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David Golder"로 지난 192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원제와는 달리 국문으로 번역된 제목이 이 작품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원제인 '데이비드 골더'는 아주 단적으로 전형적인 유대인을 표징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는데요. 데이비드라는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뒤에 "골더"라는 성 역시 셰익스피어 이래로 유대인들의 덧씌워진 부정적 정체성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골더는 자신의 동업자인 시몬 마르쿠스와 함께, 자원 시추와 해당 증권과 채권 거래를 도맡아 하는 일종의 투자 회사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서두에서 오랜 동업자였던 마르쿠스가 앞으로 있을 중대한 계약에서 골더를 사실상 배신하기에 이르고 이들과 난맥으로 얽혀있는 투자자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마르쿠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마지막으로 골더에게 진심 어린 이해를 구하게 되는데요. 이는 마르쿠스 본인의 방만한 생활과 마찬가지로 허영과 과소비에 빠져있던 아내의 본성이 비극적으로 매몰되어, 스스로 삶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다음날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동업자의 갑작스런 죽음과 맞닥뜨린 마르쿠스의 장례식을 통해, 골더 역시 자신의 삶을 천천히 돌아보게 되는데요. 역시나 그에게도 일년에 채 몇 번 보지 않는 아내와 오로지 자신에게 돈만을 요구하는 철부지 딸이 존재합니다. 어려서부터 온갖 고생을 경험하고 오늘날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골더는 극중에서 돈 자체에 대한 탐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는 오랫동안 아내와 딸을 극진히 부양한 인물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요. 저는 작가인 네미롭스키가 이 골더라는 인물상을 누구보다 자신의 부친 통해, 간접적으로 조형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골더의 딸인 조이스와 마찬가지로 네미롭스키 역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극중 조이스에게 자신을 직접적으로 투영했는지는 불분명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더불어 이 시기 여성들이 그 무엇보다 남편이나 아버지의 부양과 보호를 필요로 했음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특히 이 시대 여성들이 여전히 야만의 시대에 노출되어 있었고, 골더와 그의 아내 글로리아가 처음 대면하게 되는 수 십 년 전의 미국 상황 역시, 이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묘사되고 있기도 합니다. 가진 돈이 없는 이민자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말입니다. 매번 끼니 걱정을 하던 어린 시절의 글로리아나, 후반부에서 골더가 더이상 딸에게 돈을 주지 않자, 결국 늙은 남자에게 자신을 바치는 조이스의 모습은 마치 시대의 극명한 서사로 여겨졌습니다. 


골더는 아내와 딸을 만나러 비아리츠로 가는 도중에 의문의 심장 질환을 겪게 됩니다. 후에 병명이 협십증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도 마르쿠스와 마찬가지로 곧 다가올 죽음을 인지하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비아리츠에서 재회한 아내는 여전히 정부와 다름없는 룸펜들을 집에 들이고 있었고, 또한 허황된 사교계 생활을 지리멸렬하게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 비아리츠의 저택과 매매와 관련해 그녀가 자신의 정부와 짜고 골더의 돈을 가로챈 과거의 일화는 골더가 이 집안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미국에서 고철을 주워가며 갖은 고생 끝에 작금의 위치에 오른 골더에게는 그를 그저 '지갑'으로만 아는 아내와 딸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미망인에게 몇 푼의 돈도 남기지 못하는 남자를 경멸하는 이들 여자들의 시선과 유럽 전체에 '돈밖에 모르는 유대인'이라는 혐오가 각색되어, 골더의 삶은 그 자체로 무너져 버린 상황으로 비쳐집니다. 더욱이 여기엔 조이스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 아내와 정부의 자식이라는 사실까지 충격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과 딸의 어처구니 없는 생활을 이어가게 해주는 돈을 대고 있던 남편인 골더에 대한 경멸과 자조는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되묻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요. 단순히 서로에 대한 부족한 이해만으로는 이 모두가 설명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돈 자체에 대한 탐욕과 남을 실질적으로 꺾으면서까지 성취하고 싶었던 성공에 온 힘을 다했던 골더는 끝내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작가의 입을 통해, 글로리아와 조이스가 골더를 모멸적으로 대하는 숱한 언행들과 그저 이 모녀에게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던 일종의 '씁쓸한 자선 행위'가 화자들의 대화 가운데 교차되면서, 과연 돈과 성공 이전의 '비틀린 삶'의 그 처절한 대가는 역시나 비참하고 끔찍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골더에게 사업 파트너이자 경쟁자였던 튀빙겐과의 대화는 "과연 우리가 세상에 무엇을 남길 수 있겠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과 함께, 골더의 희미하게 남은 마지막 숨결마저도 스스로 자청하여 불사르게 만들었습니다. 평생 딸이라고 여기며 자랑스러워 했던 조이스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가졌던 감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고 아주 평범한 사람들일지라도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아주 극명한 교훈과 더불어, 골더 개인의 그 도드라진 비극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극의 서두에서 자살한 마르쿠스의 장례식에 쓰일 관을 놓고, 그저 싸구려 관을 찾는 미망인의 모습과 인적도 드문 허름한 묘지에 그를 묻고자 하는 '그들'을 대면하면서, 정말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특히 싫어하는 몇몇 물건들을 증오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바라보았다. 검은 대리석과 청동으로 된 승리의 여신상 네 개가 받치고 있는 램프, 황금 벌 장식이 달린 거대하고 네모난 빈 잉크병. 이 모든 것을 위해서 돈을 내야 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사업에서 난관을 피하고 어떻게든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는 법인데, 이렇게 죽다니...‘

그는 자신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연애편지 꾸러미를 감추듯 수표책을 급히 숨기던 아내의 모습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딸이 그토록 자주 그에게 불러일으키던 부당한 모멸감이 몰리적 고통처럼 생생하고아프게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그래서 당신은 대체 뭘 바라는 건데?" 글로리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 여자가 바보처럼 가진 걸 다 내주고, 그 인간은 주식이든 어디서든 다시 망하고, 2년 뒤엔 결국 자살하는 거? 그땐 아내에게 땡전 한 푼 안남기고 갔으면 좋겠단 거야, 응? 남자들의 이기심이란! 그게 당신이 원했던 거지, 그렇지?"

난폭하고 늙고 추한, 제대로 지킬 능력조차 없는 더러운 돈 말고는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그를 미워했다.

나중에 의식이 돌아온 후 골더가 처음으로 한 행동은 치료비 명목으로 2만 프랑짜리 수표에 서명한 것이었다.

"이봐, 자네는 자네가 위대한 사업가라고 생각하지만, 자네는 그냥 투기꾼에 불과해. 자네는 사람을 제대로 볼 줄도 모르고, 고를 줄도 모른다고, 평생 혼자일 거야. 주변에 멍청이들 아니면 사기꾼들 뿐일 테고."

"하지만 왜죠?" 조이스는 절망적으로 애원했다. "예전처럼 해주세요. 사업을 해요. 돈을 벌어요...아빠에겐 너무 쉬운 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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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정치 - 분열과 증오의 시대, 한나 아렌트와 함께하는 민주주의 수업
네드 오거먼 지음, 김창한 옮김 / 마농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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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드 오고먼은 현재 일리노이 대학의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수사학, 미디어 연구, 정치 문화의 역사와 관련한 글과 강의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테네시 대학을 거쳐, 펜실베니아 주립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요. 이 시기에 그는 콘래드 아데나워 재단에서 관여하는 '콘래드 인문학 장학생'으로 박사 학위 취득 지원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떤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오고먼은 수사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학문적 방향을 좌우하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인본주의자'로 칭하는 그는 케네디 암살 이후의 미국의 정치 경제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고, 마찬가지로 냉전에 있어 미국 안보 전략의 경쟁적 함의를 다룬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그는 현재의 미국 정치가 바로 '자유주의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에 관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이에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방송 활동과 팟캐스트 등을 통해, 일반 시민들을 향한 정치학 소개와 역사 담론에 대해서도 학문적 저변을 넓히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litics For Everybody"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오거먼의 이 책은 20세기를 거치는 동안 그 누구보다 민주주의자였던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사상을 살펴보고, 현재 우리 정치가 자유' 및 '자유주의'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며, 이 '자유'와 '정치'의 위기를 어떻게 우리가 개선시킬 수 있을지를 모색해 보고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이 글의 후반부인 6장에서,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며, "자유와 정치는 동일하다"고 그 선명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또한 "인간의 자유는 오직 정치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민주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보수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이들 모두가 생각하는 '자유'가 알파이자 오메가임을 오랫동안 인정해 왔고 우리가 왜 지금이라도 현실 정치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바로 이 지점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옛 우화의 실제적 요점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글의 초반부 논증에서 저자인 오거먼이 피력하는 바와 같이 현재의 왜곡된 미디어의 범람 속에서 '정치의 중요한 축'이라고 여겨지는 시민들이 주먹구구식 사고와 편협한 인식으로 매몰되어 각자가 받아들이는 정치의 기본 인식이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탈정치적인 형태에 가까워졌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그저 시민들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미디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점적 자본과 특정한 정치 권력에 예속된 상황하에 벌어지는 일종의 치킨 게임이 주요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우리의 오랜 유산이었던 '수사학의 복귀'를 먼저 떠올리며 여기에 한나 아렌트가 고스란히 남긴 그녀의 사상적 체계를 복기하는 것으로 일종의 '사고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정치적 조건을 먼저 짚어보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를 단순하게 보자면 그녀가 남긴 학문적 궤적을 저자의 해석대로 단순히 짚어나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현시대 정치의 위기에 있어 이런 문제에 대해 효과적인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일종의 사고의 매개에 있어, 한나 아렌트는 그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사상 전반에서, 정치를 정의하는 일들 가운데 무엇보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정치적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이미 2장에서 의미심장하게 인정하는 바와 같이, "대중 매체는 우리를 프로파간다와 여러 형태의 악의적인 영향력의 표적으로 만든다"는 앞선 대중매체의 지배력를 논하면서, 여기에 산업 자동화와 핵무기가 우리의 삶 자체, 즉 정치가 보존하는 자유가 침해될 것을 경고하기도 했는데요. 사실 여기에는 정치적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의 공통된 정치 인식의 부재와 더 나아가 현실 정치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염두해 두고 중요한 기본 가치들을 입맛대로 왜곡해 왔던 것이 사실상 '정치적 혼란'을 나날이 부채질 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한 가운데 '선동과 허위 사실 (혹은 거짓말)'로 무장한 '포퓰리즘'이 정치 무대에 서서히 등장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데요. 지금의 도널드 트럼프를 있게 한, 스티브 배넌의 선동에 기반한 작업도 그렇거니와 2장의 주요 논증은 바로 이런 '의도된 몰락'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옳은 일을 하는 것보다 선거에서 이기는 데 관심이 많다"는 설문조사는 정치가 이미 정치인들과 이들 주변인들이 그저 정치 권력을 획득하는 일종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이런 극명한 상황에서 일반 시민들이 '정치의 복귀'를 위해 실질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여러 학자들의 분석은 지나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정치가 얼마나 삶과 가까운지를 여기서 시급히 논하기 전에, 이어지는 3장 도입부는 아렌트의 말을 빌어, "정치란 공통 관심사를 두고 말과 행위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현상이다"라고 인식됩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수사의 기능 역시 어쩌면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렇게 서로 간의 의견 개진, 결과의 도출, 설득과 수용과 같은 정치 전반의 정상적 매커니즘은 굳이 하버마스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기본적 인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보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너무나 예민하게 받아들였고 모두의 공통된 인식을 규정하기 위해 나누는 토론 내지 대화조차도 철저하게 이론과 현실의 접근 만을 주먹구구식으로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극명하게 무기력했던 어설픈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의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이상주의를 순진한 생각으로 오랬동안 취급해 왔던 것을 고려해 본다면 양자 사이의 기본적 균형이 기울어진 것은 확실히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이론과 실제 현실은 무턱대고 매우 다르다는 식으로 말이죠. 결국 정치의 왜곡은 그 구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가 행해지는 여러 수단과 방법에서도 어느 누군가의 입을 막게 하고 특히 비판의 날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식으로 점철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서 "더 첨예화 된 관료주의가 민주주의가 토대가 됨"으로써 가일층 악화되어 왔다고 판단하는데요. 저자인 오거먼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앞선 인식을 다루고 있지만 정치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관료주의 행태와 유사한 확고한 권위의 문제는 많은 시민들의 입을 막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식으로 간접적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즉, 관료의 권위, 전문가의 권위, 시장의 권위와 같은 우위와 우선에 준하는 체계들이 민주주의 토대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끼쳤다는 부분도 역시 짚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한나 아렌트의 논증대로 "정치가 우리의 정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이런 현실을 끼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 판단에 대한 반대가 어느 부분에 이르러서 저어되거나 검토가 전혀 되지 않는 점은 앞선 관료주의와 더불어, 상이한 측면의 엘리트주의의 증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존의 정치 행위의 주 행위자가 거의 고위 관료 출신이거나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뤄지고, 이들이 보통 시민들의 선택을 받아 권력을 발휘하는 선거 과정 자체가 표면적으로는 어느 사회나 몇 세대에 걸쳐, 지속되어 왔는데요. 저자의 말마따나 "정치적 판단이 사회 전체에 파장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것의 주체가 다수 시민의 공통된 의견 속에 그 최소한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핵심은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정치적 판단이 아무리 파장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누구나 "어떤 의견"에 방해 받지 않는 스스로의 고유한 판단이 마땅히 존중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임과 동시에 우리가 민주 사회에서 수호해야만 하는 "표현의 자유"라고 읽힐 수 있을 텐데요. 물론 이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권리이자 가치이기도 하지만 시민 모두는 자신의 양심과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여, 충분한 숙고와 함께, 이를 주장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표현의 자유가 우리 모두의 정치적 의견을 개진하고 그것이 양심에서 비롯되었을 때, 그 결과로 이어진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법과 시민의 기본 권리, 그리고 양심의 문제가 얽혀 있으며, 이러한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마찬가지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해야만 한다는 그 생각부터 유념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론 이런 인식 가운데, 왜 자유와 평등의 절묘한 균형이 민주주의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지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치 안에 매번 도사리고 있는 거짓의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니 거짓을 이용해 진실을 오도하고 이것을 정치적 이익으로 삼으려는 심각한 정치 왜곡의 단면이라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저 정치 체제 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러한 이익 추구가 어쩌면 개인의 이익 추구를 선(善)으로 여긴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도덕과 공통 가치를 내뱉으면서도 행동은 그것을 전혀 따라가지 않는, 그것마저도 자기 이익으로 삼는 행위 따위를 말입니다. 바로 저자의 주장대로 "정치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가 거짓말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예전부터 진실, 거짓말, 정치의 관계를 면밀히 탐구해 왔습니다.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에 대한 글도 그렇거니와 전체주의에 대한 본성을 규명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우리는 왜 쉽게 거짓에 놀아나는가"라는 질문의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4장에서 보이는 논증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서 인용된 데이비드 니버그는 [윤색된 진실]에서 "들킬 가능성이 크지 않다면, 보통의 상황에서도 거의 모든 사람이 양심의 가책 없이 타인을 속이거나 자신을 속이려 든다"고 진실과 거짓의 대립 가운데서 그야말로 일침을 놓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는 정치가 소위 위험하지 않아 보이는 거짓말들로 윤색되어 왔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일전에 유시민 작가는 "최소한의 위선도 하지 않는 정치 혹은 사회는 위험하다"고 현정치를 빗대어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만큼 앞으로 돌아가 보면 정치에서의 허위를 포함한 기술은 그만큼 익숙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거짓말이 우리 삶에서 재앙이 되는 것은 진실을 훼손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훼손하기 때문이다"는 본질과 더불어, 그렇다면 왜 정치인들은 거짓말을 일삼고 있느냐는 질문에 있어, 이들이 "진실을 해로울 수 있다"는 명백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데요. 트럼프 시대에 발명된 '대안적 사실'이라는 거짓 놀음도 그렇고 거짓으로 오도하여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이런 음모론과 같은 일들이 매일 신문 지상에서 벌어지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이것이 진실과 그것이 아우르고 포함한, 결론이 이끄는 사회적 파장을 단지 우려하는 것으로 보다는 이들 정치인들의 이익과 더 나아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스스로 정치공학적으로 고려해 봤을 때, 이는 필요한 일이라 보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 앞선 표현의 자유와 진실의 문제, 그리고 거짓을 섞어 정치에 투영시키는 일련의 조밀한 작업들은 이렇게 어느 정도 서로 영향을 끼치는 관계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의 분석대로 "표현의 자유란 단순히 표현에 열려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반박이나 검증, 그 밖의 도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는 일종의 본질적 인식을 특히 정치인들은 새겨둘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는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어떤 한 주장에 대해 근거를 들어 비판할 수 있고, 이견에 대해 경청하고 마찬가지로 근거를 들어 재반박 할 수 있는 열린 토대가 무엇보다 정치에 필요한 이유이기도 한데요. 이런 과정 자체는 정치인들이 유념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이것에 정력을 쏟을 이유가 없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막스 베버가 왜 왜 직업 정치인에 대해 쓴소리를 했는지 여기서 새삼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로운 정치는 그 논증 과정에서, 우리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의견을 교환하는 언어의 건전성과 진실성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 역시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는 수사학과 한나 아렌트를 동시에 우리에게 제시하고 설득의 논리를 강화하는 수사학과 민주주의와 현실 정치, 그리고 시민의 권리, 자유와 평등에 천착했던 아렌트의 사상이 많은 시민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결론은 예상대로 다소 이상주의적이긴 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이 이상주의를 너무나 백안시 해 왔기 때문에 여기에 제안된 논의들은 '시민이 갖는 의미'를 우위에 두고 나서, 다시 한번 충분히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정치가 우리 손으로 다시금 갱생시켜 우리의 자유, 이웃의 삶을 위해 봉사할 수 있기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거창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처한 사활적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다소 과소 평가하고 있는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의 발언을 따로 적고 싶습니다. "모든 것을 정치화하려는 시도는 정치를 파괴하는 일이다. 모든 것이 정치와 관련 있다고 여겨질 때. 정친는 정말로 전체주의적인 것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무분별한 정치적 만능주의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구조의 발언이 이미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매번 드러나기도 했는데요. 마찬가지로 저자 역시, 아렌트를 수차례 인용하며 이 시장주의에 있어, 비판적 의견을 첨언하고 있었습니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악, 특히 현대의 악이 단지 "사유하지 않는"죄를 범한 사람들에 의해 그토록 자주 행해진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약 인간 본성이 순응적이고 조건반사와 행동 통제의 지밸를 받는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을 말 잘 듣는 개와 같은 존재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어떤 시점이 되면 사람들은 경제학자와 법률가, 국방 기획자, 기술자들이 운영하는 시스템의 돈벌이 대상 취급을 받는 데 분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문화전쟁" 시대의 미국에서 우리는 정확히 바로 여기에 이르렀다. 소위 "시민적 삶"에서 우리는 먼저 적이 되고, 오직 부차적이고 미심쩍고 잠정적으로만 친구가 될 뿐이다. 분명히 말해두자면, 이런 접근 방식은 나치의 "계관 법학자" 카를 슈미트가 표명한 견해였다.

모든 정치를 선거와 관련된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정치가 너무 쉽게 눈에 보인다고 가정하므로 오히려 정치를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제대로 수행된다면 사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운 행위다. 그것은 인생 경험, 타인의 의견, 상상력, 감정 정서뿐만 아니라 배움에 의지하여 이슈를 만들고, 질문을 던지고, 결론을 내리며, 우리를 오도하거나 탈선시킬 수 있는 공상의 비행을 막는다.

아렌트는 조직적인 거짓말의 궁극적 위험은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현실인지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통찰했다.

지식이나 과학, 이론에 정당성을 의탁하는 정치체제는 체제의 기반을 위협하는 사실들을 숨기고 파괴하고 조작하는데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즉 공화민주주의 국가는 우리의 복수성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려 하고, 권위주의 국가는 이에 저항하려고 하며, 전체주의 국가는 그것을 말살하려고 한다.

실제로 세상에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자유를 조작하거나 강제할 위험이 있는 권력자들이 많다. 아렌트는 이 사실을 매우 걱정했다. 정치가 단순히 자유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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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공화국 - 법은 정의보다는 출세의 수단이었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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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난 강준만은 1980년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2년뒤인, 1982년에 중앙일보에 입사합니다. 하지만 곧 그곳을 그만두고, 학업을 위해 도미를 하게 됩니다. 1984년 미국 조지아대학 대학원 신문방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8년 미국 위스콘신대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이후 한국으로 귀국해, 이듬해인 1989년에 전북대 사회과학대 언론심리학부 (신문방송학) 교수가 됩니다. 그는 이 시기부터 특유의 정치평론과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요. 특히, 1995년에 출간한 '김대중 죽이기'는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미 그는 1988년부터 발간중인 월간, '인물과 사상'의 주필로서, 날카로운 논평과 지식인 및 정치인 실명 비판으로도 유명했습니다. 현재는 한국 사회의 병폐들, 정치 문제, 엘리트주의 비판,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비평으로 이름을 알린 특별한 강단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위의 제목으로 2025년 4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조금 공교로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다음 대선에서 야당의 유력 대선후보의 사건이 대법원 전원 합의체에서 파기환송 되었습니다. 고등법원으로 돌아간 그의 사건은 다음 심리를 통해 유죄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요. (고등법원이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판례를 보면 말입니다.) 그런 연유로 대한민국 정치는 좀 더 고난을 당해야하는 운명과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자신의 이 글 서두에서, 당위의 측면에서 대한민국 사법 제도에 대한 비판이 어느 정도 진영 논리에 인질이 되었다는것을 밝히고, 자신은 그런 진영 논리에 자유로운 검찰과 사법부 및 그런 사법 카르텔 비판하고자하는 취지를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목적성은 상식선에서 충분히 공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책은 크게 2가지 '법조공화국'의 적나라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최근까지 존치했던 '사법고시'와 이를 통해 변호사 자격과 동시에 법조 관리로 등용되는 체계 자체에 매몰된 한국 사회와 이들 사법 관료들이 퇴임후, 얻게 되는 "전관예우"가 얼마나 한국 사회에 병폐가 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논합니다.

강 교수의 언급대로 서울대 법대 출신들 대부분이 소위 천재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1980년대 이전부터 서울대 법학과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마당이 되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대학에 들어간 이 수재들이 고시에 목을 매달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이 있었을 겁니다. 물론 이런 논의에서 강 교수가 확장된 분석으로 이들 사법 관료가 왜 우리의 민주주의에 큰 관심이 없게 되었는지 따로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검찰과 사법부에 소속된 행정적 법률가들이 소위 '신성 가족'이라는 깨뜨릴 수 없는 관념하에,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가족만 챙길 수밖에 없는지 그러한 인식의 저변을 그는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관념적 행태를 전부 인성으로 치부할 수 없지만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이 천재들이 스스로 인격적으로 겸양과 겸허를 갖추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것의 근본적 이유는 이들의 오만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국민들이 이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을 통해 배출된 법률가들에 대한, 특유의 찬사와 동경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이들 법률가들이 갖는 '선민 사상'은 이렇게 구조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법 제도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주요 체제입니다. 시민의 기본권과 자유, 그리고 평등은 견실하고 공정한 사법 제도가 뒷받침 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합리적이고 올바른 정치가 마중물이 되어야 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정치 불신이 극에 달하는 한국 사회에서 의도적이지 않게 사법부의 어떤 판결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강 교수는 이를 '정치의 사법화'로 인용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강교수의 탁월한 선견지명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야 할 것 없이, 이들 법조인들을 선호하는 이면에는 우리 국민이 이들 법조인들을 무척이나 좋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즉, 그 법조 이력에 대한 터무니없는 신뢰에서 말입니다. 어느 지방에서는 검찰 출신이나 판사 출신이 선거로 나오면 그렇게 좋아한다는 사례를 들면서 말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의사와 마찬가지로 변호사와 같은 법률가들에게 지대한 동경과 표면적으로는 공부를 잘해서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로 일부는 폄하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인 걸 고려해 본다면, 오로지 시험 맹신주의만을 비판하기도 어려운 실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이 오로지 자신만의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예전에 유출된 의사들 익명 게시판 글에서, 의사들 대부분이 돈 때문에 아둥바둥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자체를 폄하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더욱이 이들 엘리트 계급들이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삶을 그동안 조소해 왔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는데요. 아주 일차원적으로 개인의 능력에 빗대어서 말입니다.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우리의 엘리트주의는 일방적으로 매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까지 합니다. 본디 자본주의가 계급주의를 용인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이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또한 정치를 온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인원을 선발하는 제도 자체를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여기는 '왜곡된 천재들'도 문제겠지만, 이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 자체도 정상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 역시 이러한 취지의 언급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앞서 언급한 '신성 가족'과 '선민 사상'은 아주 교묘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1990년대부터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전관예우'역시 이 책에서 잘 다루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사법시험 출신자들의 전관예우 뿐만 아니라 다른 고시, 예를들면 행정고시나 고위 공직을 역임한 관료들이 로펌이나 민간 기업에 재취업을 해 고액 연봉을 받는 등의 '전관예우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 믿을 수가 없었던 부분은, 검찰과 판사 출신의 전관이 사건을 정식으로 수임하지 않고, 일종의 로비와 다름없는 "그 사건은 내 사건이다."라고 사건 검사와 판사에게 언질을 주며,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였습니다. 한 달에 1억의 보수를 받는다는 대형 로펌의 전관 출신 변호사의 일례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 의뢰인들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그 판사 아느냐? 그 검사 아느냐?"는 질문을 하는 연유겠지요. 어떻게 이 지경이 된 상황에서, 국민을 위한 공정한 재판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포장된 대의,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철저한 사익 추구는 결코 사법 제도에 걸맞는 문구가 아닙니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를 아주 뒤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강 교수의 이 책을 통해, 이재명 후보가 내뱉은 전관예우에 관한 발언과 그의 아내 김혜경씨의 재판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아내인 김혜경씨의 그 트위터 사건과 관련된 재판에서 전관 변호사들이 대거 변호했다는 사실에서 실망보다 더 착찹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제 개인적인 의견을 더해본다면, 이번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의 전원합의체 판결로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되었지만, 공적인 측면에서 그가 대선 후보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희대 대법의 정당성을 그저 운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피선거권이 박탈된다면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되겠지요) 대선 결과가 무효로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거를 완주해 대통령이 된다면 사법 문제가 임기 내에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겠지만 그러한 임기가 과연 우리 모두가 원하는 정당한 결과인지, 당사자가 숙고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판결의 결과가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그 결과로 인한 정치적 파급을 고려하고 더 나아가 이것이 국가 정체에 어떠한 일이 될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성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이 글의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 문장은 과거 바이든 행정부 당시의 인사 정책을 분석한 것에 기인한 것인데요. 이는 윤석열 행정부와 그의 관료들과 대비되어 더 인상이 깊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아니더라도 저 문장은 제가 존경해 마지 않는 로버트 달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이전에 판검사와 변호사의 관문이었던 사법시험(사법고시)이 한국인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의원들에게 정치는 먹고사는 생계수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의원들이 생계수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벌이는 일은 정치인을 저주해야 할 이유가 된다.

사법고시생들의 이른바 ‘손익분기점‘에 대해 35세니 40세니 하고 말이 많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사회적 증거‘는 많은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갖는 믿음은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한국의 정치는 당파성, 개인 중심, 기회주의성을 보이면서 합리적 타협의 기초를 결여하게 되었다.

법조 특권주의의 동력은 ‘소용돌이 사회‘인데, ‘소용돌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쓴 사람들이 ‘법조 특권주의‘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굽히지 않은 대법관 양병호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으며 강요 끝에 사표를 제출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단호함과 성실함을 탑재한 법조인들이 무언가에 대해 확고한 기준을 갖는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새 어떤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은 무서운 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된 잔디밭을 돌아보았던 생각이 난다."

"민의는 법전처럼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정치는 이미 정해진 규칙에 따라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들은 눈에 보이는 업적을 군사작전 하듯이 속전속결로 해치워 보여주기 위해 공동체 의식, 시민들 간의 신뢰와 협력, 나눔과 돌봄의 문화 등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 아니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무형 인프라를 희생시키는 일을 해온 셈이다.

로펌은 그런 인간 정리나 이기심의 문제를 조직화하고 시스템화해 매끄럽게 처리해주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많은 전관이 로펌을 찾게 만들었다.

2018년 10월 대법원 산하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가 발표한 ‘전관예우 실태조사 및 근절 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조사‘결과에 따르면, 법조 관련 종사자 (법원, 검찰청 직원 포함) 가운데 "전관예우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전체의 55.1퍼센트였다. 판사는 응답자 중 23.2퍼센트, 검사는 42.9퍼센트, 변호사는 75.8퍼센트가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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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기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박지선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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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계 폴란드인이었지만, 바우만은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스스로 폴란드인임을 일찍이 자각했습니다. 1939년에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했을때, 그의 가족은 동쪽으로 탈출하게 되는데요. 이후 바우만은 소비에트 연방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자원하였고, 콜버그와 베를린 전투에 참가합니다.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바우만은 군내 정보 보안대인KBW (Korpus Bezpieczeństwa Wewnętrznego) 에서 복무하고, 당시 KBW는 폴란드 레지스탕스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조직되었습니다. KBW에 복무하는 동안, 바우만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처음 사회학을 접하게 됩니다. 1953년에 바우만은, 그의 부친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목적으로 바르샤바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촉한 이후, 갑작스럽게 불명예 제대를 당하고 맙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부친과는 다르게 시오니즘과 선을 그었고, 오히려 반시오니스트였으나, 자신의 항변은 당국에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실업 상태가 된 그는 이 기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4년부터 1968년까지 바르샤바 대학에 강사로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1년에 영국 런던 정경대 (LSE)에 기회가 닿아 로버트 맥킨지 밑에서 수학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에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포괄적 연구를 진행했고 이것의 그 첫번째 주요 저작이 됩니다. 그는 살아생전에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을 유지했고, 이러한 이행이 초래한 시민들의 삶의 불안정성과 그러한 속에서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체제의 불안과 자본에 종속된 정치의 문제들을 규명하는데 온 힘을 쏟기도 했습니다. 그가 출간한 논저들은 거의 30여권이나 되었으며, 이것들의 공통된 주제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근대성, 소비주의, 도덕의 성찰 등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iquid Fear"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초역은 2009년에 이뤄졌으나, 이번 판본은 사실상 개정판으로 최근인 2025년 4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연세대 김호기 교수와 유명한 모 북튜버의 소개글이 실려 있습니다. 물론 김호기 교수가 지그문트 바우만을 알지 못해서 그런 제한된 인식의 글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바우만의 이 책은 그저 현대인의 불안한 일상에 대한 평범한 논의를 담은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이 쓰여진 2005년 당시 대표적인 뉴올리언스를 비롯, 미국 남부를 휩쓴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촉발된 미국의 재난 안전 대비가 아주 극명하게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는데요. 여기에는 조지 W. 부시의 정실 인사로 볼 수 있는 마이클 D. 브라운이 얼마나 무능력한 인간이었는지 여실히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이 재앙이 어떻게 전세계 성공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의 민낯을 드러냈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데요. 이런 맥락으로 바우만은 서장에서 정치학자 존 던을 인용하면서, 무엇보다 "이기주의적 질서 시스템"을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허리케인에 의해 삶의 터전을 모조리 빼앗긴 사태에서, 미 연방 정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와 더불어, 한 국가에서 참혹한 재해에 이르러서도 왜 백인과 흑인이 구별될 수밖에 없는가를 저자인 바우만도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동시에 많은 사회학자들 역시, 이를 학문적으로 규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능력과 배짱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이 이데올로기"는 반대의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기까지 합니다. 후에 5장에서 바우만은 "현대 민주주의 발전은 불확실성, 불안, 두려움을 유발하는 잇따른 원인을 없애거나 제한거나 길들이려는 노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기심을 추동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거의 '보모 역할'에 그쳐, 오늘날 벌어지는 '병든 사회 국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부나 사회가 더 이상 '보모'로 자임할 수 없다던 과거 마가렛 대처의 발언이 오버랩 되는 것은 그저 지나친 상상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인간성의 발로에서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듯, 두려움은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일전에 토머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사회 계약의 측면에서 증명했기에 오랫동안 역사의 주변에서 불을 지펴온 계몽주의가 비로소 태동하여, 수많은 계몽주의자들의 등장 속에 무엇보다 계급주의적 권력과 사실상 기형적으로 존재했던 과두제가 '다수에 의한 지배'에 의해 어느 정도 타파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의 성과는 몇 문장의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이러한 정치적 진행의 맥락은 평범하고 보편적인 모두가 신변의 안전을 보장 받고, 스스로 삶의 온존을 위해, 가능한 충분히 그 자원을 제공 받을 권리를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바우만이 이 책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좀 더 수월하게 확장될 수 있는 '효과적인 자본주의 이행'의 측면에서 다수의 이익과 그것에 기반한 아이디어 전반은 지금까지 철회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바우만은 5장에서, "그동안 사회가 유발한 두려움에 대항해 오랫동안 투쟁한 결과 실업, 장애, 질병, 노령 등 개인이 겪는 불행을 국가가 집단적으로 보장하는 체계가 마련되었다"고 서술하고, 그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지 국가'라는 미명하에, 그동안의 체계를 뒤엎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폭로하는데요. 일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일방적인 관점을 갖는 것은 다소 불필요하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만, 1980년대부터 전세계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진행된 특히 미국을 필두로 세계 경제 체제의 지배적인 역할과 기능을 한 체제는 결국 소수 계층과 그 주변의 지식인들을 둘러싼, 소위 특별한 이해 관계의 연합으로 '특권화'가 되었다고 여기 그의 논증을 통해, 여실히 비판이 가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은 기존의 노엄 촘스키조차도 비판했던 내용이기도 한데요. 어찌됐든 이 신자유주의적 기법은 사회적 역사라는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이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선 부분과 관련해 여기서 인용된 맥스 헤이스팅스는 "가진 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세계화다"라고 강조하는데요. 일반적으로 세계화에 대한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작업에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여전히 동조하고 있고 (2008년 악몽과도 같은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바우만이 숱하게 경고했던 바대로, 이러한 이행 과정에서 발생했던 '부수적 피해'도 사회가 무조건 감당해야 되는 몫으로 강요 되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이 부수적 피해에 아랑곳 없이, 자본주의로 미화된 자아 실현, 소비주의, 능력에 따른 분배 등은 외형적으로 심지어 노동자들조차 거부할 수 없게 만든 부분이기도 한데요. 사실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에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건전한 제휴는 이미 철회된지 오래이고, 어기서 드러나는 바우만의 평가대로 지식인들이 스스로 역사의 노정에 놓여 있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면 사회학이 밝혀내어 결국 병폐를 개선시키고자 하는 그 일련의 논의들이 그들에게도 역시 중요한 주제여야만 했습니다. 비록 이 글에서도 '사유를 잃어버린 노동자들'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저는 무엇보다 비판 의식을 보이지 않는 지식인들이야 말로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토머스 프랭크가 캔자스에서 규명한 일반 노동 계층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비판적 사고의 실종이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심 반기는 일이 되었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시민들에게는 결국 이러한 사례가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2장에서 보이는 바우만의 일관된 논증은 작금 우리 세계가 보이고 있는 패착과 그로인한 수많은 '시민들의 불안'이 결국 일정 부분 우리가 자초한 일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바우만이 이 역사적 과정의 인과를 무시하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 책임의 다른 주체인 권력과 그것을 맹종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이들에게 이익을 건네주는 신자유주의자들이 함께, 추동한 이 체제의 문제로 말미암아, 이기심이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세상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첨언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바우만이 보기에 우리 시민들이 오래전부터 '사유'를 잃었으며, 인간의 직관이 충분한 사유에서 비롯되지 않고, 나아가 세계의 구성 원리를 탐구하지도 않았기에 어쩌면 한나 아렌트가 숙고한 '진리의 현실적 조건'이라는 철학적 테제가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마찬가지로 떠올리게 만듭니다. 지난 세기의 참혹한 파시즘이 초래한 절망스런 교훈에 대해 후세의 우리가 충분히 반면 교사를 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저변에 깔려 있는 '불안'을 매개로 자신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엘리트 관료들과 나날이 소수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현실적 민주주의의 엄혹한 모습을 짚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연계로 과거 조지 W. 부시가 수행한 '테러와의 전쟁'과 그것을 위해 움직인 정보 당국, 그리고 미국 사법부의 FISA가 법에 근거한 비판적 검토 없이, 비상시기라는 이유 만으로 당국과 협업 했던 점은 무엇보다 법원이 시민의 자유에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시민이 삶을 영위하게 만드는 중요한 가치이고, 이 자유를 무엇보다 보호하고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최후 보루는 체제 내에서 어느 기관보다 사법부라고 지칭할 수 있겠는데요. 법의 기본 원리를 떠올려 본다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4장 이후, 바우만이 짚어내는 바와 같이, '이기심의 권력화'에 있어 과연 우리 사법부는 마지막 방패막이 될 수 있을지, 심히 우려가 됩니다. 바우만의 이런 회의는 안보 불안마저도 이득으로 삼을 수 있는 자들과 구축된 조직이 있다는 점, 그리고 안보 불안과 시민의 자유, 기본권이 대립하게 될 때 과연 민주주의는 시민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하게도 말이죠.

사실상 이 시대의 중요한 맥락인 '현대의 이성'이 바우만의 일관된 평가대로, "독점을 형성하고 배타적 권리를 확립하는 데 특히 적합하고 명민하다"는 것에 쉽게 동의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보편적 규범과 이 현대적 이성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여기에 더해 현대적 이성이 결국 소수의 특권을 옹호하게 되었고 그들의 특권 유지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적용받는 '동일한 규범'이 거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집중된 자원과 권력을 이용하여 사법 제도의 빈틈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즉 바우만의 확장된 논의대로 타인의 고통과 불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을 넘어, 그러한 다수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스스로 '초월적 이성'이 이기적으로 작용되는 세계 체제, 또는 계급적으로 배타적 사회 규범이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전에 일독했던 이안 브레머의 논의와도 아주 유사할 정도의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이어지는 3장 역시, '재난의 계급화'와 함께 불안도 계급별로 재분배된다는 적나라한 논지를 바우만은 펼치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카트리나가 인간 폐기물의 처분을 도운 건 아닐까?"라는 노골적인 질문은 당시 희생된 대다수 흑인을 비롯한 스패니쉬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구축한 체제 - 때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세련되게 표현하는 듯한 - 가 결국의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결과를 지속적으로 강도높게 유인했다고 본다면 이는 그저 과장된 수사일까요. 

인간의 불안이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놓고 본다면 그저 본성 안에 내재된 악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될 것입니다. 결국 C. 라이트 밀즈가 거의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현대 관료제, 혹은 엘리트 관료제의 출현과 더불어 우리는 더이상 사유를 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에 종속된 국가적 체제에 충실히 복종하는 것으로 시민의 비판적 의무를 사실상 제한 받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 르네상스 시기의 도시 국가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의 공화정이 사실상 과두제와 다름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오늘날 민주주의도 경우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곳에서 과두제와 가까워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아주 수월하게 본심과 외면을 포장할 수 있듯, 이 인간들이 구축한 사회 체제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일반적인 정치의 측면에서 권력의 지배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외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과거에 볼 수 없던 후안무치한 정치가 비로소 드러났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인간 정치에 내재되어 있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만 '뉴딜 시대'를 거친 과거에는 결코 꺼낼 수도 없었던 비상식적인 언사와 주장들이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3장에서 바우만은 포괄적으로 이 현대적 관료제와 정치의 세속화 혹은 '자본주의적 이기심의 발로'라는 공익과 도덕의 회피를 마찬가지로 함께 다루고 있지는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엘리트 관료제가 견제 받는 건 고사하고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정치로부터 오히려 보호를 받고 있는 현실을 이미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대적 관료제가 과연 누구에게 봉사해야 하는가를 떠올려 본다면 이런 구조가 어떠한 원리 속에 놓여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다음 4장의 세계화가 초래한 '이 지경의 세계'를 이해하는 이러한 인식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4장 서두에 바우만은 "지금까지의 세계화는 부정적 측면만 있었다"고 단언하고 사실상 그 '긍정적 측면'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마찬가지로 언급합니다. "세계화의 긍정적 측면은 아직 먼 미래의 가능성에 불과하며 일부에서는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예측한다"는 말의 핵심은 거의 확실합니다. 이처럼 세계화가 더 이상 영토 주권과 경계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 반대 급부로 우리는 과도한 개방성과 그것의 알량한 이익이 결코 다수에게 향하지 않는 지난 수십 년간의 시간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구축된 세계화를 마치 부정하는 듯 보이는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나 탈이민 대책은 거의 극명한 인지부조화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데요. 한때는 아니 거의 최근까지 이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적 이상의 결과물이자 전세계 곳곳에서 이익 추구를 가능케하는 아주 합당한 이론이기도 했습니다. 의외로 지젝은 신자유주의가 쇠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만 바우만은 그와는 명확히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계화가 모두의 불안과 불행을 초래했다는 핵심 주장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거의 신자유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실행된 중동에서의 전쟁, 그로인해 파급된 테러 위협은 "겉으로 보기에 선진국은 안전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2001년부터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으로 국가적 안보 함의에 따라,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사법적 대응으로 나타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보는 결코 완벽히 충족될 수 없는 무언가이기도 합니다. 뒤에 나오겠지만 영국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장면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세계화에 따른 자본의 거대한 흐름과 축적, 그리고 그것이 소수에게만 향유되어 국가와 정부를 초월하는 특권 계층의 모멘텀이 되었다는 점과 그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미국의 중동 개입, 911 테러와 전면적인 테러와의 전쟁은 이렇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수 시민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글 말미에 바우만은 앞으로 다가오는 세기가 궁극적인 재앙을 맞이하는 시대가 되거나 혹은 지식인과 이제 인류 전체를 뜻하게 된 대중이 새로운 협정을 맺고 이를 실현하는 제2의 계몽주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간절한 바람처럼 그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미래에 전제 되어야 할 가정은 '우리가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자본주의가 지금의 안정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안정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시장의 인정과 경쟁의 지속은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자본주의는 소수의 특권층과 여기에 연계한 지식인들, 그리고 소수 중산층들만의 체제로 유지된다면, 역시나 제2의 카트리나와 같은 부수적 피해를 넘어서는 '인간 쓰레기 취급'과 같은 격리와 배제로 더 크게 왜곡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바우만의 말대로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 시민, 성찰 하지 않는 노동자, 비판하지 않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맞물려, 이런 왜곡된 체제가 가속화 된다면 이 책의 제목과도 같은 모두의 '불안'으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파시즘과 더 나아가 과두제를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목도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런 디스토피아적 예견은 결코 소설 속의 장면만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그가 죽는 날까지 남아있는 시민들의 미래를 누구보다 걱정하기까지 했는데요. 그 유명한 "우리가 모두 손을 잡고 다같이 무덤에 들어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개선이 없는 체제의 일방향성은 스스로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것입니다. 더 이상 사유와 비판, 성찰이 없다면 말입니다.  

- 제가 그동안 읽은 많은 사회과학,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경제학과 관련된 논저들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언급하는 지식인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에둘러 표현하거나 경제적 기조의 한 방편으로만 해석되었는데요. 이것은 마치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실체를 언급하는 것이 어렵다는 식으로 해석될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글 4장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해 적시하는 듯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두려움은 개별 사례를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할 수 있지만 그에 맞서 싸우는 일은 개인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과거에 생계를 책임지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수입에 의존하거나 빈곤에 직면하게 되었고, 안정적인 평생직장을 다니며 자신감을 가졌다가 노동조합이라는 보호막을 잃고 ‘유연한 노동 시장‘이라는 리스크의 굴욕에 노출되었다.

이처럼 놀라운 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것을 훔치고 자원을 재배치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유혹적이었다.

이성은 인간의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이지만, 이성이 무엇을 다룰 수 있는지는 어떤 도구를 사용해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제 몫을 하는 훌륭한 관료라면 사유할 줄 알아야 한다. 막스 베버의 말처럼 자신의 지적 능력과 판단력을 한계점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그 특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규범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여겼고 실제로 거부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가로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는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의 이성은 다른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에 반대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

편파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지만 아우슈비츠. 굴라크, 히로시마의 가장 무서운 교훈은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괴물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발전‘이란 주로 과거와 현재에 발전 속도를 높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발생한 직접적이거나 ‘부수적인‘ 피해를 복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행복 추구를 보편적 인권으로 선언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적자생존을 외치던 정부의 관심과 정치적 의제에서 변방으로 쫓겨났다.

도덕적 판단을 폄하하고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이를 무관한 것으로 배제하려고 노력한 탓에, 도덕적 판단의 힘은 상당히 약해졌다.

민족주의, 종교적 광신주의, 파시즘, 테러리즘 같은 위험한 부산물을 발전시킨 것은 미국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그램에 발맞춰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를 비롯한 다양한 위성 기구들과 함께 펼친 정책이었다.

따라서 기어티는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사법부가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진보적 이상주의자들과 의도는 좋지만 그와 비슷한 착각에 빠진 사람들뿐이다"라고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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