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 바스티유의 포성에서 나폴레옹까지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5
한스울리히 타머 지음, 나종석 옮김 / 북캠퍼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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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에 태어난, 한스-울리히 타머는 독일의 저명한 역사학자로 특히,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와 유럽의 파시즘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지식인입니다. 그는 1962년 언어 학자이자 동화 수집가인 야콥 그림을 기념한 야콥-그림-슐레를 졸업한 후, 헤센의 마르부르크 대학과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역사, 고전 문헌, 정치학을 공부했습니다. 1971년 유럽의 파시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에른스트-헤르만 놀테에게서 지도를 받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80년 역사적인 대학으로 일컫는 뉘른베르크 에르랑겐 역사 연구소에서 미하엘 슈튀르머의 지도로 교수 자격을 얻게 됩니다. 이후 1983년부터 2011년 은퇴할 때까지, 그는 뮌스터 대학의 현대사 정교수로 일했고 은퇴후에는 동대학에서 명예 교수로 재직합니다. 지금도 왕성한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는 앞서 설명한 국가 사회주의와 파시즘 연구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 프랑스의 지적 역사와 사회 연구로도 꾸준한 지적 연구에 힘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Die Französische Revolution"으로 지난 200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가 글 말미에 언급하고 있듯, 이 프랑스 혁명이 유럽인들에게 왜 '대혁명'으로 자리잡고 있는지는 그만큼 혁명이 후세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일겁니다. 특히나 프랑스는 1830년, 1848년, 1871년의 혁명을 거치며, 공화국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복잡한 심상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현실 정치와 시민들의 이상 사이에서 '어떤 정치적 균형점'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하고 어려운 일인지 대혁명 이후의 복잡하고 치열한 역사적 전개가 이를 여실히 증명하기도 했는데요. 이전의 혁명을 뒤로 하고 단순한 왕정복고를 위해 움직인 프랑스 주변의 절대 왕정 국가들과의 불협화음은 공화국 프랑스와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에 이르렀고, 이를 단순한 카이사르-보나파르티즘의 군사-혁명적 준동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전유럽에 혁명의 이상을 확산시킨 것도 사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시대의 프랑스인들이 자신들이 요구했던 만큼의 자유와 경제적 자립이 이뤄졌는지는 그만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발발 요인에 제일 먼저 추가해야 될 사항은 당시 군주였던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함과 정치적 무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구한말 고종과 이 루이 16세를 자주 비교해 보기도 하는데요. 물론 세세한 정치적 작업에서 이 두 군주의 차이는 극명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목이 잘린 왕과 외세에 의해 강제로 퇴위 당한 다른 왕의 역사에서의 퇴장이 여러모로 학자들의 호기심을 이끄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루이 16세는 당시 프랑스가 처한 '조세 위기와 국정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법복 귀족'에 힘을 실어다 주었지만 결국에는 저들 신흥 귀족들에게 무참히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프랑스의 주요 세력 이었던 구귀족 세력들을 제어하지 못했고, 역설적이게도 구귀족들과 이해관계가 여러면에서 일치한 신흥 부르주아지에 대해서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베르사유 궁의 왕"으로만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미 다른 혁명사를 작성한 윌리엄 도일의 분석대로, 밀의 1788년의 대규모 흉작과 1788년과 1789년의 혹독한 겨울은 '수확량 감소'로 이어졌고 농민들은 자신들의 입을 건사하기는 커녕, 다음 농작을 위해 가축용 사료도 비축할 기회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왕과 국가에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는 농민들이 몇년 간의 혹독한 시련을 맞게 되었지만 왕과 귀족들은 전혀 해결책을 내놓지 못한 점이 결국 혁명의 불씨를 잉태하게 됩니다. 물론 왕은 '삼부회'를 소집하여 세금 부족에 따른 국가 운영 위기를 어떻게든 해소해 보려고 노력해보지만 앞선 그의 '정치적 무능'이 극단의 위기로 스스로를 몰아넣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루이 14세 시절, 자신들을 프랑스 자체로 여겼던 그 귀족들이 여전히 국왕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 매몰되어 있었던 점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한 지방의 정치가 베르사유의 그것과는 확연히 괴리되어 있었고 왕이 파견한 소위 '지방관들'에게만 그 지역의 정치적 안정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프랑스 정치가 큰 위기로 내몰렸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렇게 제3신분의 혁명적 발걸음은 이미 상징적으로 확인되었고 더욱이 성직자들기 근소한 표차이로 이 혁명에 가세함으로써, 혁명 대표들이 왕의 테니스 코트에서 소위 역사적인 '선언'을 하게 만드는 토대가 됩니다. 후세에 의해 이러한 왕립 회의의 인사들이 결과적으로 '제헌 의회'의 기초가 되었다고 후술되지만 왕은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특권과 권력 유지에 몰두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후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대로 주저하다 군사력을 동원하지만 결국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국왕 고유의 특권과 권력 제한의 움직임은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대세였던 것 같습니다. 이미 파리에서 도시 빈민들의 식료품 구입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자 쉽게 폭동에 휩싸인 것과 더불어, 이를 지켜본 국민의회는 "봉건제를 완전히 폐지한다"는 선언에 다수 시민들의 갈채를 받는 장면은 그만큼 의미심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는 '인권선언'으로 이어지고 "인민주권, 개인의 자유권, 법 앞에 평등, 자유로운 소유권, 대의 헌법의 원칙들"이 그곳에서 개념적으로 도출되기에 이릅니다.

1791년 10월 파리에서 새로운 입법 의회가 선출되어 그 즉시 소집됩니다. 이들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은 지방과 지역의 선출로 일정 수준의 정치 경험을 쌓은 인물들로, 여기에는 자크 피에르 브리소, 콩도르셰, 가데와 베르뇨와 같은 명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코뱅 당과 같은 의회 내의 정치 세력들은 이합집산의 결행 등을 통해, 1792년 9월 21일, 새로 소집된 국민공회가 역사적인 조치인 "왕정 폐지와 공화국 선포"를 역사적인 장면으로 등장시키긴 하지만 이 이후의 프랑스 정치는 그야말로 피와 폭력으로 점철된 내부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들은 프랑스의 경제적 상황을 호전시키고 동시에 사회 재건을 시작해야 될 당위를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을 위해, 역사의 소중한 기회를 허무하게 소모시키기에 이릅니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절대로 부패할 수 없는 자', 로베스피에르를 역사 전면에 등장시키게 됩니다.

1791년 6월,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곳을 탈출을 시도 (바렌 사건) 하다 실패하면서 그에게는 사실상 정치적인 사형 선고가 내려지게 됩니다. 이 당시 전투적 언론과 각 구의 총회는 '반역자 루이 카페'의 처형을 촉구합니다. 더욱이 11월 20일에 튈르리궁에서 왕의 비밀 금고가 발견되면서 여론은 더욱 거세집니다. 이에 왕에 관대했던 '지롱드파'는 8월 10일 사건으로 왕이 폐위당해 이미 그 죗값을 치렀다고 보고 왕의 처형을 반대했지만 끝내 이런 시도는 무산됩니다. "왕의 처형은 민중의 이름으로 결의"되었고 그의 죽음으로 앙시엥레짐과 그 지지 세력은 최종적으로 갈 곳을 잃게 됩니다. 이는 프랑스 정치에서 중요 지위를 차지하던 세력이 공중분해됨과 동시에 정국을 위기로 이끄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5장까지의 진술을 토대로 그 이전의 다른 역사가들은 쉬이 언급하지 않은 "혁명의 테러리즘 (물론 현대적인 표현이긴 하지만)"에 주목합니다. 1794년 7월 27일 그 공포의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지만 이 시기 동안 프랑스 정치에서 유혈이 낭자했던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특히 자코뱅과 상퀼로트의 존재는 단순히 정치적 의미를 넘어, 테러에 대한 소위 그들만의 합법적 의미로 승화되기까지 합니다. 저자의 입을 통해, "테러는 엄청난 인적 고통을 초래했고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언급되는데요. 여기에는 단순한 정치적 수준의 오해나 아무런 죄도 없는 무고한 자들까지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혁명의 이상이라든가 공화주의라는 숭고한 이념에 사회가 아무리 전도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조적 공감대를 갖추고 있지 않은 이상, 각자의 의견 대립이나 충돌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들 혁명파들은 이것의 해소를 위해 손쉬운 폭력과 테러를 사용함으로써 후에 보수주의자들의 우려를 갖게함과 동시에, 정치적 대결에서의 잔혹한 범죄 행위를 스스로 용인하게 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사실상 로베스피에르의 그 유명한 '혁명적 처형'은 1789년 이후의 혁명 동인이 사실상 몰락하게 된 상징적 사건이 됩니다. 1799년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의 군사적 재능 뿐만 아니라 혁명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프랑스는 그의 손아귀에 놓이게 됩니다. 물론 무능한 총재 정부는 차치하더라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정치 세력이나 권력은 프랑스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육군의 강성함을 보유하고 있던 프랑스의 군사적 확장까지 조장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외부에서의 요인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요. 그럼에도 프랑스가 유럽의 열강과의 대결에서 연이어 승리하고 유럽 전체를 자유의 깃발로 해방한 것이 아니라, 육군 프랑스의 깃발로 점령했고, 더 나아가 나폴레옹 자신이 '제위'에 올라, 혁명을 과거로 돌린 점은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결국에는 이 나폴레옹이 남긴 유산,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나폴레옹 3세까지 이 나폴레옹 일가가 미친 영향력이 지금까지 프랑스의 공화주의에 일정 부분, '이 세포적 계승'이 여러모로 미쳤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저자인 한스-울리히 타머는 이 프랑스 대혁명이 후세에 끼친 영향을 무엇보다도 수시로 행해지는 '정치적 문화의 변화'를 들고 있는 것은 이처럼 단순한 변용이 아니라 그것이 수단 이상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점일 겁니다. 이 점은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저자를 통해 파악한 놀라운 부분은 "1790년 1월에는 보르도와 아비뇽의 세파르디 유대인 (디아스포라 이후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한 유대인의 후손, 프랑스 유대인은 거의 세파르디)에게 그리고 알자스의 세파르디 유대인에게 완전한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한 사건"이었습니다. 

 



부르주아 엘리트는 지주 귀족이 소유한 것과 동일한 지위와 권리를 얻고자 노력했다.

대개 계몽주의는 국민의회의 위원회나 정치 클럽에서 정치 실천을 위한 구상과 근거를 마련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서 비로소 열렬히 수용되었다.

오히려 금융과 경제 위기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앙시엥레짐이 드러낸 기능적 무능함과 개혁에 대한 무능함이 문제가 되었다.

1788년의 흉작과 1788/1789년의 혹독한 겨울은 수확량 감소로 이어졌고 농민은 시장에서 곡물을 팔거나 가축용 사료를 충분히 비축할 기회를 잃었다.

귀족 신분의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0명의 귀족이 계몽적,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제1신분의 경우 3분의 2가 하위 성직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혁명 의회 대표들은 6월 20일 실내 테니스 코트에서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혁명적 행위였다.

공황과 자발적 포기, 과장된 몸짓이 난무하는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상위 두 신분의 자유주의적 대변인들은 애국적 희생과 상징적 행위로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고 봉건적 부과조를 폐기했다.

이는 시장 지향적 농업 경제를 운영할 수 있는 이들의 입장을 반영하며 사유재산적, 농업 자본주의적 질서의 사회적 이해관계와 구조를 명확히 드러낸다.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적 사회라는 이상은 조합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예고하는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종속을 예고하는 또 다른 결정을 낳았다.

국민공회가 소집되고 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의 40일은 전쟁과 국내의 학살 및 잔혹 행위로 점철되었다.

오히려 로베스피에르는 부르주아혁명은 "열정과 보복 폭력"(퓌레)의 혁명, 즉 두 번째 혁명의 지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학살을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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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자유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2
나이절 워버턴 지음,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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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나이젤 워버튼은 현재 철학의 대중화에 앞서고 있는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브리스톨 대학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1989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다윈 칼리지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노팅엄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잉글랜드 버킹엄셔 밀턴 케인즈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오픈 대학에서 선임 강사직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명성을 가져다 준 유명한 작업인 "철학 : 기본 (Philosophy : The Basics)"과 "철학 : 고전 (Philosophy: The Classics)"은 지금까지도 영국에서 철학 입문서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철학 전문 웹로그인 Virtual Philosopher 를 운영하고 있으며, 같은 철학자인 데이비드 에드먼즈와 함께, 정기적인 인터뷰 팟캐스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Free Speech : A Very Short Introduction, First Edition"으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의 요약된 주장대로 저 역시, 이 언론의 자유가 "개인의 자유 및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위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이 언론의 자유를 상징하는 여러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이 언론의 자유를 다시금 고찰하게 된 시점이 바로 "제국의 위안부"의 저자가 검찰에 의해 불구속 기소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에 소설가 장정일, 연세대 국문과 김철 교수, 유시민 작가 등 국내 지식인 190여명이 박유하 교수의 형사 기소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는데요. 이 사건에 대해 아무리 고찰을 해봐도 저자인 박교수의 역사관에 쉬이 동조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약간의 첨언이지만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조선총동부가 엄청난 통치 자료와 해당 사료 및 문서들을 광범위하게 소각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일제의 잔혹한 식민 통치 행위는 문서만 없을 뿐이지 우리 민족을 수탈 했던 역사는 거의 자명한 사실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박유하 교수의 (상이한) 개인 의견이 만천하에 피력될 수 있는 자유는 무엇보다 보장되어야 하며, 설사 거기에 허위나 왜곡이 의심된다 하더라도 이것은 법정에서 밝힐 문제가 아니라, 같은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들과 지식인들과의 토론과 논쟁에서 판단될 수 있는 사항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만큼 여기에 침잠해 있는 '사상의 자유'라든지 '발언의 자유'는 한낱 농담이나 소문에 지날지라도 개인의 그런 발언들이 보장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 글의 2장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절대적 무오류'에 대한 해석의 기반에서, 왜 나와 다른 사람의 의견이 비록 일치하지 않아, 그 사람의 입을 막기 위해, 그 자신은 무오류성을 견지한다고 비판합니다. 이는 지구상의 양대 종교라고 볼 수 있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우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될 수 있는데요. 이들 모두가 자신이 믿는 신의 존재가 정확히 규명되지는 못했지만 일단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존중하고, 그 신성을 주장하는 것도 종교의 영역으로 두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정교 분리 사회에서 이러한 종교계의 주장은 어떤 규명의 대상이 아니라, 쉽게 말해 그냥 그렇다는 식으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일종의 공감대 혹은 사회적 합의일 겁니다. 이 언급된 진술이 약간 거친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종교의 자유'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는 면모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종교가 당신 자신에게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당신의 신이 인정하지 않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의미"라고 볼 수 있겠죠. 뿐만 아니라 저자인 워버턴은 앞서 언급한 존 스튜어트 밀의 다소 이상향적인 진술에서, "(단순한 장소에서 뿐만 아니라) 대토론의 장에서 의견 대립이 있는 자들이 공개적으로 토론하여 그것의 진위 여부는 물론, 진리까지 규명한다는 밀의 이상"은 지금의 시대에서 아무리 허황된 논법이라 하더라도 그 맥락은 충분히 공감이 될 만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이 언론의 자유가 상대방의 입을 막게 하지 않는 최소한의 장치"라고 여겨졌습니다.

언론의 자유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지금도 서유럽에서 끊임없이 논쟁되고 있는 '홀로코스트 논쟁'입니다. 독일의 네오 나치나 영국과 프랑스의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이미 한참이나 규명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터무니 없는 거짓 내지는 날조라고 보는 경우가 근래 들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홀로코스트를 날조라고 보는 자들의 문제를 그냥 '지능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영국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웃지 못할 희극이 발생되기도 했습니다. 영국 작가인 데이비드 어빙이 미국의 사학자 데버라 립스탯을 중대 명예 훼손으로 고발한 사건은 바로 이 홀로코스트 날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사건은 2016년 믹 잭슨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기도 했습니다. 이 고소 사건은 어빙이 최종적으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로 밝혀졌고, 그에 따라 학계나 방송에서도 거의 매장된 단계로 귀결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 문제와 관련된 첨예한 대립 사항을 과연 법정에 세워도 될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그렇거니와, 저자는 "만일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그를 침묵시킨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근거에 대한 이해도 갈구도 없는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즉, 어빙과 같은 사람은 법적인 처벌이 아니라 논쟁으로 낱낱이 논박 당해야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터넷 미디어와 가짜 뉴스의 범람으로 이러한 왜곡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적지 않을 것인데요. 이런 자들이 권력을 쥐었을 때, 국가와 사회를 구렁텅이로 이끌 수 있다는 우려는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 벼룩을 잡으려고 초가 삼간을 다 태울 수는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은연중에 밝히기도 했지만, 우리와 같은 모든 시민들이 결코 철인이 될 수 없는 점은 자명합니다. 그는 2장 후반부에서, "노 플랫폼' 논증과 언론의 자유를 구분하고, 앞선 홀로코스트가 거짓이고 이것이 음모라고 믿는 자들에게 어떤 연단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과 이들의 발언을 보장하는 등의 입을 막지 않는 자유인 언론의 자유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매번 완벽한 정치적 변별력과 정신적 구분을 갖지 못하고 소위 시민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의견 피력이라는 명목으로 진실로 규명되지 않는 의견을 말할 자유는 분명히 보장 받아야 하지만, 그것을 기화로 상대방과 다른 종교, 다른 인종에 대한 아주 무분별한 혐오와 증오를 조장하는 발언은, 언론의 자유와는 다른 방법으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반 1장에서, 저에게는 약간 어정쩡한 논의로 '방만한 자유가 아닌 어떠한 선에 이 제한을 그어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견제 역시도 사회적인 통념에서 보장 받아야만 하는 정당성이 요구됩니다. 일전에 네이딘 스트로슨은 네오 나치나 극우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해, 이들의 입을 막을 것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로 조롱하고 피식거리며, 저들을 웃음거리고 만드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저자 역시도 이와 비슷하게 '대항 발언'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몹시 불쾌하고 짜증나는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언론 자유도 보장해야만 한다"는 3장의 서두나, 존 스튜어트 밀을 통해, "아주 조장된 폭력의 선동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언급 역시, 궁극적으로는 상대방의 발언 보장, 그리고 나의 반론을 이어, 이 언론의 자유가 어떤 위법 사태나 오도된 권력에 의해 침해받지 않게 하는 것이, "귀에 싫은 소리를 듣지 않는 것"보다 중요하고 엄중한 가치라고 우리는 이렇게 분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논증된 내용들이 4장에서, "자유와 평등은 늘 함께 달성할 수는 없다"는 점과 앞선 대립들은 발언의 자유를 언급할 때, 숱하게 머리를 스치는 내용들로, 어떤 메시지에 불쾌감이나, 역겨움, 노여움, 폭력성, 모멸감을 느끼게 될 때, 여기에는 유익과 균형이 고도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대항 발언이나 그런 상대방의 발언을 조소하고 굴복시킬 수 있는 역량을 만든다거나, 한나 아렌트의 분석대로 양심이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하고, 굴복시키는 작용을 한다면, 우리는 저들이 양심도 없는 자들이라는 모욕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 광범위한 초고속 인터넷 시대를 맞이한 요즘에서 저런 수많은 발언들이 소위 자정 작용을 통해 걸러질 수 있을지가 앞으로 몇 세대의 민주주의를 위해 시급한 요청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우리 시대의 이런 획기적인 '통신 방식'의 발전은 수많은 화자들의 의견 개진을 '관리한다'는 말보다 우선 '자정 작용'이 무엇보다 적용될 수 있는 시험대가 될 것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다른 의견'으로 개명된 문제의 발언들이 (인종이나 종교, 성차별과 관련된) 혹여 지독한 혐오에 근거한 폭력으로 촉발된다면 그것은 큰 재앙이 될 것임은 분명한데요. 현재의 기득권 정치 무대가 이들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는 극우 정치와의 연계를 통해서 저들이 뭔가 실익을 얻을 만한 것은 전무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작금의 독일 정치가 제2의 아돌프 히틀러는 안된다는 경각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적 토대와 언론의 자유를 아주 마음껏 이용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 세력과 배타적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아주 실효적인 제어가 필요한 점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맥락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분문 40페이지, 172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즉 언론의 자유는 듣기 싫은 말을 들을 때조차 열렬히 옹호할 가치가 있다. 내 발언뿐 아니라 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발언을 보호하는 것도 언론자유의 책무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 또는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구체적 사례를 이해하려면 해당 표현이 언제, 누구에게, 무슨 의도로, 적어도 예측 가능한 어떤 효과를 노리고 행해졌는지 파악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는 픽션 작가와 논픽션 작가 모두에게 특히 중요한데 사상을 공개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그들 활동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부가 때로는 언론의 자유보다 국가의 기밀을 더 중시한다는 사실이 이 민주주의 정부가 종국에는 전체주의 체제로 변질되리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 시대의 화급한 언론 자유의 쟁점 하나는, 종교인이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는 표현을 제재하라는 요구에 민주주의 사회가 귀를 기울여야 하느냐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그를 침묵시킨다면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는 근거에 대한 이해도, 갈구도 없는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다.

‘노 플랫폼‘ 논증은 관용적인 사람만이 관용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달리 말해 타인의 발언을 제한하는 사람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줄 필요가 없다는 견해와도 구별되어야 한다.

앞서 보았듯 존 스튜어트 밀은 폭력 선동이 언론의 자유를 제약하기 위한 적절한 간섭 시점임을 분명히 했다.

당신이 언론의 자유에 진심인지 아닌지는, 당신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몹시 불쾌한 예술도 당신이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를 보면 안다.

민주국가가 언론의 자유로부터 얻는 유익은 대중이 아주 다양한 발언자와 의견을 접할 수 있다는 데서 일정 부분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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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17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국민연금 입금되면 구매하려구요.

베터라이프 2025-11-17 03:50   좋아요 0 | URL
언론의 자유에 대한 기본적인 저자의 기본적 생각이 잘 녹아 있습니다. 물론 개론서로 생각하시고 일독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
 
책임과 판단
한나 아렌트 지음, 서유경 옮김 / 필로소픽 / 201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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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1906년 독일 니더작센 주의 주도인 하노버의 자치구인 린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으로, 부친은 그녀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습니다. 모친은 열렬한 사회민주당원으로 매우 진보적인 인사였습니다. 베를린에서 중등 교육을 마친 아렌트는 독일 마르부르크에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그 유명한 마르틴 하이데거의 지도를 받았고 특이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지도 교수인 하이데거와 연애를 시작합니다. 1929년이 되자, 그녀는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하이델베르크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 당시의 지도 교수는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카를 야스퍼스로, 그에게도 역시 많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4년 뒤인, 1933년에 아렌트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혐의로 당시 비밀 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 투옥되기는 했으나, 곧 풀려나왔고 이때 그녀는 독일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향하게 됩니다. 유럽의 급격한 정치적 변화로 말미암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고 이때 바로 독일군에 의해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구금되지만, 곧 그녀는 탈출하게 됩니다. 그녀가 수용되어 있던 강제 수용소는 프랑스 남부의 캄프 베르네로, 당시 프랑스 남부 지역에 들어선 비시 정권의 혼란으로 그녀는 극적인 탈출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툴루즈와 몽토방을 거쳐, 1941년 5월 22일 그녀는 거의 맨몸으로 미국 뉴욕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곤궁한 생활을 경험한 그녀는 계속 글쓰기에 매진하고 싶어서 독일계 유대인 공동체에서 활발히 활동을 하게 되는데요. 이런 활동으로 1941년 11월, 뉴욕의 독일어 유대인 신문인 아우프바우 (Aufbau)에서 일하게 됩니다. 1950년대에 들어서자, 아렌트는 1951년에 '전체주의의 기원'을, 1958년에는 '인간의 조건'을 출판하고, 1963년에는 '혁명론'을 연이어 내보냅니다. 이 즈음에 아렌트는 우연히 마르틴 하이데거와 재회하게 되고 이로부터 2년 동안, 그를 만나게 됩니다. 1961년에는 그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뉴요커 (The New Yotker)에 실린 그녀의 보도 기사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1970년에 심장마비로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한나 아렌트는 미국 사회에서 독특한 이방인으로 이는 독일인과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한데 섞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제3자의 입장에서 그녀는 미국 사회를 비평할 수 있었고, 또한 신대륙에서조차 유대인이라는 이방인의 정체성은 스스로 학문적 성취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Responsibility And Judgement"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에 초도 번역되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22년에 출판된 3쇄본입니다.

서두에 소개된 옮긴이의 설명대로 한나 아렌트의 이 논저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은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유 불능'에 대해, 그녀 스스로 오랫동안 숙고하고 성찰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뒤에 본격적으로 나오겠지만 어떤 한 인간이 자발적으로 성찰하지 못하는 그런 '도덕적 불능'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누구보다 큰 관심을 기울였던 철학자였습니다. 그런 이 책은 한나 아렌트 생전의 열렬한 조교였으며, 현재 미국 뉴스쿨 대학의 한나 아렌트 센터 소장인 제롬 콘이 그녀의 생전 마지막 10년의 시기, 여러 강연록과 논문 등을 묶은 일종의 선집이기도 합니다. 이 선집은 아주 단순하게, 1부 '책임'과 2부 '판단'으로 구분되어 있지만 여기에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소위 '서구 사회의 도덕적 성찰'의 부재와 그것의 역사철학적 연유, 그리고 그러한 배경에서 독일 제3제국의 나치즘과 유대인들에 대한 잔혹한 인종 살해는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가를 고찰해보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미리 약간의 개인적 감상을 늘어놓자면, 이 책의 후반부인 7장인 '심판대에 오른 아유슈비츠'와 8장 '자업자득'에서 드러난 '히틀러 졸개들'에 의한 잔혹하고 충격적인 유대인들의 학살 증거들이 낱낱이 드러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말았는데요. 저는 이 대목에서 악인들은 보이는 대로 멸절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어느 유명인의 언급이 떠올라 복잡한 심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인류의 죄악인 아우슈비츠를 비롯, 이들 '절멸 수용소'의 동시대 독일인들은 역사에서 결국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이러한 크나큰 죄업이 어떤 연유로 비롯되었는지 명확히 알고자 하는 노력이 전무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는데요. 여러분이 이 글의 7장을 끈질기게 일독하다보면 제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알게 되실 겁니다. 아렌트의 이 글로 인해 일전에 읽었던 하랄트 얘너의 서사는 그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잔혹한 독재 정권에서 삶을 영위한 일반 사람들에게 어떠한 책임도 물을 수 없다는 인지적 가능성은 어디에서나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일 겁니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자신들의 '게르만주의'를 분리한다면 특히 슬라브인들과 여타 유대인들, 이들이 분류한 국적 불명의 수많은 무고한 피해자들에게는 순수한 악(惡) 그 자체였을 겁니다. 이 대목에서 한나 아렌트는 1장의 논증들을 통해, 사실상 수많은 독일인들이 '도덕의 붕괴' 상태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증명합니다. 이때의 많은 사람들이 "나치의 성공에 감명을 받았고 자신들의 판단을 스스로 독해한 역사의 평결"을 고려해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이를 명확히 드러내는 부분이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도덕의 총체적 붕괴'는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글에서 좀 더 첨언되지는 않지만, 이는 나치 수뇌부와 소수인 그들을 추종하는 독일의 일반 시민들을 모두 포함하는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제 개인적인 의견을 보태자면, 나치에 부역했던 마르틴 하이데거나 카를 슈미트와 같은 엘리트 지식인들이 나치즘 자체를 어떤 정치적 돌파구로 여겼고, 이러한 민족적 범주 안의 배타적 인식을 방패 삼아, 국가와 민족 그리고 나치즘이라는 삼위일체를 최소한의 양심 없이, 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나치즘 이전의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이질적인 뼈대와 그것이 초래한 모든 사회정치적 이행 - 혹자들이 자유주의의 역겨운 껍데기 라고 말한 - 이 앞선 이들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개개인의 '양심의 자유'라는 것이 근본적인 사유와 성찰이 배제된 채, 그저 사전적인 의미나 단편적인 심상으로만 이해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음 2장에서, 저자인 한나 아렌트에 의해서 충분히 고찰 되지만 인간의 이성을 발견한 근대 유럽의 몇 세기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그 역사가 결국에는 도덕적 성찰의 황무지와 다름 없었다는 결과물은 시대와 인종을 넘어 뼈아픈 진술로 이해됩니다. 저는 이를 마약과도 같은 합리주의의 산물이라고 싸잡아 몰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유를 하지 못하는' 인간의 본체는 어쩌면 합리성이라는 단어가 아우르는 손쉬운 개념 하에 더욱 조장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후반부인 7장에서 여실히 논증 되겠지만 아우슈비츠에서의 조직적인 독일군이 그 과학적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체계적이고 실용적인 유대인 절멸이 여러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진술은 그만큼 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를 갖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자는 "2500년씩이나 된 서구의 문학, 철학, 종교 사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양심이라는 것이 현존한다는 사실에 관해서 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모든 과장된 구절들과 설교들"이 세대를 거쳐 이어져 왔다는 것을 분명한 목소리로 밝히고 있었는데요. 오래전에 소크라테스가 "불의를 행하는 것보다 불의를 당하는 게 낫다"는 소위 말하는 '실재적 악'을 거부했던 의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면밀히 성찰하지 못한 자들이 이룩한 정부라는 것이 어떤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짐작할 만합니다. 이를 달리 해석해 보자면, 바로 양심이 누구에게나 실존한다는 그 허구성을 애써 대변하는 듯 보이는, "상당수 인간에게 양심은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극적인 메타포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누군가에 의해, 예를 들면 히틀러와 같은 자들과 같이, "인간종의 생존" 혹은 "자신을 포함한 민족의 생존"을 위해, 유럽의 암세포와 같은 유대인들을 멸종시키겠다는 그런 생각이 실제로 실행되었다는 점에서, 유럽에서의 허울 뿐인 양심이라는 문제를 아주 근본적으로 고찰하게 만드는 대목이었습니다. 특히 4장에서, "그 전체주의의 통치자들이 서구 도덕의 기본 계명들을 뒤집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이었던가"라고 진술하는 장면은 그만큼 몰락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역시나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한나 아렌트는 그 당시를 돌아보며, 소위 독일 사회의 주요 엘리트들이라 볼 수 있는 지식인들과 경제인들, 혹은 사법 관료들이 자신들의 숙고된 성찰이나 의견 없이, 오로지 "총통이 원하시는 것", "총통이 일관되게 내리는 명령"이라는 전제 하나 만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2장 도입에서 추동되는 이 "도덕적 질서의 총체적 붕괴'를 과거 유럽 철학의 근간에서 찾아봐야 하는지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습니다. 도덕의 총체적 붕괴를 거의 온 몸으로 표상하는 이 신종 살인자들이 일반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며, 같은 동기에서 일반적인 척 행동하고 말을 하고 있다는 전범 법정에서의 증명은 어쩌다 20세기의 유럽이 그렇게 되었는지를 되내기에 만듭니다. 아렌트의 분석처럼 오로지 참혹한 범죄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이들 '살인마들'에게만 향하는 것은 면밀한 분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덕 법칙 내에서, 행위의 일관성과 충분한 근거 이유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에 그녀는 "정치 질서는 도덕적 고결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 만을 필요로 한다"는 전제와 함께, 이마누엘 칸트의 입을 빌어, "한 국가를 조직하는 것의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와 상관없이 악마와 씨름을 하는 형국에서라도 그들이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었는데요. 이는 전반적인 사유에서 철저하게 이성에 기댔던 칸트의 학문적 결과물들을 차치하더라도 저 최소한의 지적 능력이 기반이 되는 전제 조건이 존재한다면 설사 악마 뿐만 아니라 국가가 패망하는 순간에 놓이더라도 최소한 대안을 찾아볼 수는 있을 겁니다. 그래서 종교가 국가의 도덕적 질서의 구축에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실패한 연유에는 이것이 지식이나 진리와는 상당히 다른 조건이기 때문일 겁니다. 유럽의 가톡릭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한 장면을 대입해 본다면 히틀러의 제국이 전유럽에 확장하고 그와 더불어 유대인들이 곡소리를 내며 죽어갈 때, 로마 교황청의 주인인 비오 12세의 행적은 아침 호숫가의 뿌연 안개처럼 유럽과 가톨릭에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물론 아렌트가 평생 연구한 칸트의 내력을 빌려서, 히틀러의 나치즘이 어떤 종교적 신봉과 같은 비이성적 귀결에 이르렀다고 아주 직접적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총통'이 당시 독일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종교이든 정치이든 간에, 거의 거스를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그녀가 진술하는 칸트의 철학이 무엇보다 '올바른 이성'에 근거한 도덕적 법칙을 어느 정도는 옹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합리성 유형, 즉 과거 칸트가 말한 바 있는 그 도덕법칙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고 가정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물론 자신을 "졸개"와 다름없다고 밝힌 아이히만과 같은 나치의 졸개들은 이를 현실에서 여실히 부정 당했지만 어찌됐든 이들 살인자들의 예는 오로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이 대목에서 칸트가 말하는 양심의 기능이 "자기 경멸의 형태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한다"는 해석은 실로 놀랄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는 명백히 자기 기만에 빠진 인사가 아니라면 도덕적 문제에 대한 소위 "인식과 결단"에 있어, 이 양심이 작용하는 바는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선 나치 졸개들과 이들에게 전무해 보이는 도덕적 법칙 내지는 양심의 결여가 단순하게 설명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내포하고 있는 바는 결국 정치적 질서 혹은 법칙과 도덕과 양심의 문제는 여실히 다르게 작용한다는 진실입니다. 아렌트는 이에 대해 "아무리 나치 정권이 합법적이라고 해도 그들의 죄는 남는다."고 밝히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 대목에서 왜 유럽의 정치적 유산과 그에 반하게 되는 도덕적 법칙 내지는 견제가 왜 함께 갈 수 없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매번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정치와 도덕은 다르다고 말하는 그 내심을 어느 정도는 스스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매번 도덕적 기만 위에 정권과 정부가 세워져 있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을 차치하더라도 "정권의 개"가 되는 저들. 그러니까 부역자들의 양심이 왜 보이지 않는지는 이로써 명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자인 아렌트는 앞선 논증들을 기반으로, 왜 진정한 성찰과 사유를 하지 않는 인간들이 왜 그토록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4장에서, 밝혀내고 있었습니다. 흔히 작금의 시대에도 "철학과 형이상학이 죽어버렸다"고 자주 언급되기도 하지만 칸트를 반증하여 언급되는 "사유함이라는 정신 능력"의 결과가 불확실하고 입증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어떤 인생의 책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저자인 그녀 역시 이미, "사유가 소수만의 특권이 될 수 없다"고 명백히 진술하고 있었는데요. 아렌트의 말마따나, 자신이 철학자임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이미 사유하고 있다는 고백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이 고백이 담겨 있는 대목에서, "모든 시민이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그저 권리 만을 요구하는 것은 그저 자가당착을 넘어, 이런 자들을 시민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유가 없는 자칭 시민"이라는 어구에 저는 존 듀이와 로널드 드워킨을 떠올렸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이는 사유를 하지 않는 자들에게 도덕적 양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거의 확신하게 만듭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지점에서, 왜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이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깊이 숙고하지 않아 보이는 인상에 왜 그토록 의문을 갖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죄악의 유산'을 이어 받은 당시의 독일인들의 그 특유의 행태를 보면서, 마찬가지로 2차 대전 이후의 일본인들의 의식 구조를 떠올려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후반부 7장은 바로 그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연합군에 항복하여 탄생한 독일의 아데나워 정권은 태생적으로 나치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나치에 복무한 적지 않은 자들이 정권의 구성원이 되기도 했는데요. 이점은 아렌트가 명확히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가장 충격적으로 여겨진 부분이 뉘른베르크 재판과 이어지는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에서 수많은 독일인들이 그 재판 과정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이것이 그저 역사의 그늘 안으로 묻혀지기를 바랐다는 대목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평생 자신이 독일인과 유대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여겨 왔는데요. 그렇다면 이 장면을 목격한 그녀에게 있어 이 "독일인들"이라는 집단에 갖는 복잡한 심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즉각적인 가스 주입에 죽음을 맞이하거나, 몇 달이나 지나 지독한 육체 노동에 이르러 죽음에 이르는 사례" 이외에, 역시나 모두가 짐작하듯이, 그저 재미로 사람을 살해하는 "나치의 졸개들"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진실입니다. 아마도 적지 않은 분들은 이들 나치의 졸개들 가운데 그래도 양심을 갖고 행동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는데요. 하지만 양 재판에서 드러난 자들 가운데 그런 자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 7장에는 무고한 유대인들이 어떻게 재미와 성적 추동에 의해 순식간에 살해되었는지 역사적 증거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과 어린 소년, 소년들에 대한 충동적이고 쾌락적인 살해 동기에서,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과 동시에, "정교하게 구축된 송장 제조 공장"을 운영한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들은 그야말로 악마들 그 자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서류에 싸인을 했던 자와 그런 명령을 여지없이 수행하는 부속품과 같은 그런 자들로 구분해 볼 수도 있겠지만 저 부속품과 같은 자들이 태연히 인간의 탈을 쓰고 있었다는 점에서, (대전 중이나 종전 이후에도) 인간이 어디까지 죄악을 범할 수 있는지 이들은 생생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렌트는 양 재판(뉘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에서 마치 판사들이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듯 보이는 여러 장면과 저 나치의 졸개들이 자신들의 무고를 스스로 증명을 해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히틀러 부역자들이 별다른 제재 없이 무사 방면 되었다는 점은, 이 재판의 복잡하고 난해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여실히 드러난 참혹한 전쟁 범죄조차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하는 그 정교하게 고안된 사법 체계가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재판이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나치 독일의 그 철저한 합리성과 자신들이 스스로를 추앙하는 게르만 민족 이외의 다른 인간을 그저 절멸의 대상과 도구로 삼은 것은 이제는 역사의 과오, 그 이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시대의 역사적 유산을 작금의 독일인들이 직간접적으로 이어받았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판단한다면 참혹한 전쟁 범죄의 파급물을 단순히 정치적으로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데나워 이후의 독일 정권이 역사를 뼈저리게 반성했는지는 여전히 불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장의 철학적 논증들은 꽤나 놀랄만한 부분들이 있었는데요. 도덕적 양심을 큰 틀로 놓고 왜 과거의 유럽이 '반유대주의'와 같은 도덕과 양심을 거스르는 뿌리 깊은 증오로 귀결되었는지. 쉽게 말해, '인간의 배신'을 철학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유약한 영혼을 위해, 철저하고 근본적인 사유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사유가 만능이 아님을 아렌트는 밝히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사유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인간들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 우리가 처한 씁쓸한 '현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 20세기 "국제적 인사들" 가운데 어느 누구 한 사람도 1930년대의 연대성에 대한 자신들의 집합적인 기대치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벌거벗은 악마성에서 비롯된 공포 자체가 나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모든 도덕적 범주들을 초월하고 모든 사법권의 기준들을 파괴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새로운 형태로서의 현대적 독재 양태들을 알고 있는데, 그것의 우선적인 양태는 군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민간 정부를 무너뜨리며 시민들에게서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박탈하는 경우다.

이제 국가의 통치 행위 공식의 이면에 놓인 그 이론은 주권 정부들이 비상시국하에서 국가의 존립 자체와 권력 유지가 달려 있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범죄적 수단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비합법성은 눈이 멀지 않고 심장이 돌처럼 굳지 않고 부패하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명확하게 보이며 그의 심장에는 거부감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도덕적 행위가 비합법적이고 모든 합법적인 행위가 모종의 범죄가 되는 조건 아래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와 정반대로 우리의 모든 경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나의 시대 초기 단계에서 지적, 도덕적 대변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존경할 만한 사회 구성원들이 제일 먼저 굴복한 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무제약적인 양심의 자유라는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데, 이유는 그것이 모든 공동체 조직의 파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20세기 초입까지도 여전히 "영구적이고 필수적"일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많은 것들 중에서 도덕적 이슈를 택하여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 보려고 한다.

본래 양심은 모든 언어에서 옳고 그름을 알고 판단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 즉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또 자각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껏 들어왔던 바에서 추론하건대 도덕적 처신은 일차적으로 사람이 자신과 더불어 수행하는 상호작용에 좌우되는 듯하다.

양심은 인간이 자신의 말보다 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기관으로서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의 구체적인 도덕적 성격을 획득했다.

그 결과 그는 다른 이들을 좀 더 "도덕적"으로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도덕을 손상시키고 절대적인 신념과 무조건적인 복종 양자를 산산조각 내버린다.

소크라테스는 지금 우리가 도덕적으로 부르는 것이 정말로 단독성 상태에 놓인 인간과 관련이 있으며 또 한 시민으로서의 인간을 향상시킨다고 믿었다.

누구든 사유하는 일 없이 그리고 그 사유하는 과정 자체에 진입하지 않은 채로 소크라테스식의 검토 내용을 경청한다면 그는 당연히 [기존 도덕의 관점에서] 타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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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5-11-11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늑대의 시간]을 생각나게도 하고, ‘합법적인데 뭐가 문제냐?‘라는 자기기만의 우리 사회도 돌아보게 하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위 글의 내용과 별개로 한나 아렌트와 하이데거가 연인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받았던 충격(?)이 생각나네요. 아직 소녀였던 한나 아렌트에게 하이데거는 철학의 신으로 보였을까요. 물론 나치 입당 전의 이야기라 할 수도 있고, 학문적 교감이 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장차 ‘부역‘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하이데거와 나치로 인해 온갖 고초를 겪은 한나 아렌트 커플을 상상하란 여전히 어렵네요.

베터라이프 2025-11-11 19:44   좋아요 0 | URL
유감스럽게도 한나 아렌트와 마르틴 하이데거 이 두 사람은 명백히 불륜 관계였습니다. 물론 야스퍼스와도 그녀는 긴밀하고 가까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특히 야스퍼스가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것도 익히 알려진 내용이죠 ^^; 어찌됐든 하이데거의 철학적 결과물은 거의 인정하는 분위기이니 아렌트 역시 적지않은 감화를 받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나치 부역과 그에 따른 개인적 책임은 나치가 패망한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은 부분은 그의 과오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카를 슈미트에 비하면 하이데거는 조그만 양심이라도 있던 인물이었죠.

이 책을 일독하고 나서도 하루 종일 독일인들이 진정 과거사를 성찰했는지에 고민을
해보게 됩니다. 총리가 무릎을 꿇은 그 유명한 사진을 떠올려 본다면 국가와 국민의 과거사를 대하는 태도가 어쩌면 다를 수도 있을 겁니다. 국가 사회주의라는 괴물을 앞세우고 뒤에 죄다 숨을 수도 있겠구요. 참 많은 생각이 드는 글이었던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맨스필드 파크 시공 제인 오스틴 전집
제인 오스틴 지음, 류경희 옮김 / 시공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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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 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익히 알려진 대로 당시를 대표하는 문호였습니다. 그녀의 부친인 조지 오스틴은 스틴븐턴과 딘의 성공회 교구의 목사로 재직했으며, 모친인 카산드라 리는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옥스퍼드 올 소울스 칼리지의 목사이기도 했습니다. 스티븐턴에 정착한 이들 오스틴 가족은 대체로 친족들의 후원에 의지했고 그에 따라 수많은 친척과 친족들의 방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1783년이 되던 해에, 오스틴과 그녀의 여동생 카산드라는 앤 콜리에게 교육을 받기 위해 옥스퍼드로 보내졌으나 그 해 가을, 제인은 발진티푸스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그녀는 집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고 1785년이 되어서야, 라 투르넬 부인이 운영하는 레딩 기숙 여학교에서 여동생과 함께 본격적인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후 1793년에서 1795년 사이에 제인은, 짧은 서간체 소설인 '레이디 수잔'을 쓰게 되었고 이 작품은 그녀의 정교한 초기 작품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1796년이 되자 그녀는 자신의 두 번째 소설이라 볼 수 있는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을 쓰기 시작해, 1797년 8월에 초고를 완성합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평단과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이 오만과 편견을 시작으로 소위 제인 오스틴의 4대 작품이 큰 명성과 더불어, 평단에 연이어 히트를 치게 됩니다. 이런 문학적 성공 이후, 1804년에 오스틴은 바스에 살면서, 소설 '왓슨 가족'을 쓰기 시작했지만 아버지의 사망 때문인지, 끝내 완성을 하지 못합니다. 바스와 차우튼에서의 생활을 거쳐, 1816년이 되자 몸이 상당히 좋지 않았지만 그녀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게 되는데요. 그녀가 최종적으로 목숨을 잃게 된 원인으로 후에 전문가들이 '림프종'으로 판단했지만 얼만간 그녀의 건강은 상당히 악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1817년 7월 18일, 그녀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게 되었고. 동생인 헨리가 그녀의 유해를 윈체스터 대성당 본당 북쪽 통로에 안장하게 됩니다. 그녀의 사후, '설득'과 '노생거 사원'이 세트로 출판되었고, 그녀의 동생인 헨리 오스틴은 자신의 누나가 이 두 소설의 저자임을 공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세번째 작품인 맨스필드 파크는 1814년, 토머스 에저튼이 초판으로 출간했고, 오스틴 생전에 1816년, 존 머레이가 재출간했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Mansfield Park"로 국문 번역이 된 판본은 2014년에 펭귄 출판사에서 출간한, '펭귄 고전 시리즈'의 본으로 여러가지 주를 포함해, 2016년 10월 초판이 발행되었으며, 제가 구입한 판본은 초판 6쇄로 2022년 4월에 출판되었습니다.

헌팅던 출신의 마리아 워드 양은 정말 운이 좋게도 노샘프턴 주 맨스필드 파크의 주인인 토머스 버트럼 경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녀에게는 다른 둘의 자매가 있었는데요. 하지만 이들 둘에게는 맏언니의 행운이 함께하지 않아, 적당히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특히 막내인 프랜시스 양은 소위 말하는 '경솔한 결혼'에 저당 잡혀, 떨어지는 사회적 지위로서나 궁핍한 경제적 환경에서 혹독한 시련을 맞게 됩니다. 프랜시스 양은 이런 운명에 스스로 인질잡힌 결혼으로 말미암아, 두 언니로부터의 한동안 '관계 단절'을 경험하게 되고 그 세월의 시간은 꽤나 모진 세월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날이 경제적 궁핍에 빠졌으면서도 프라이스 부인(결혼한 프랜시스 양의 정식 이름)은 아홉 번째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처제의 형편을 안타깝게 여긴 토머스 경은 프라이스 가의 장녀인 패니 프라이스를 자신의 성(城)인 맨스필드 파크로 이끌게 됩니다. 그는 어린 프라이스 가의 장녀를 분별있고 존경받을 수 있는 레이디로 키워주겠다는 호언과 함께, 패니를 가부장적인 결정을 통해, 비로소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미 짐작했듯이 패니가 맨스필드 파크에 받아들여진 이후부터, 그녀의 하루하루는 녹록치 않았을 겁니다. 특히나 10세 언저리의 어린 소녀가 그와는 애초 환경이 다른 사촌들과 같은 집에서 살아가기가 정신적인 면에서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굳이 아동 심리학자의 발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시기의 패니의 정서와 그렇게 형성된 내면과 본성은 확실히 다른 또래와는 확연히 달랐을 겁니다. 귀족 출신의 유산을 몸소 체득한 이모부인 토머스 경은 본래의 근엄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패니에게는 이 집안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으로 각인됩니다. 그럼에도 이런 패니가 온전히 이 집안에서의 조그만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촌 오빠인 에드먼드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그는 버트럼 가의 차남으로 토머스 경이 장남인 톰 보다 내적으로 그리고 그의 신중한 내면에 대한 신뢰로 의지할 수 있는 아들로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주변과 다른 사람의 품성과 본질을 신중하고 집요하게 살펴보는 성격으로,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결코 일희일비 하지 않는 나이에 맞지 않게 진중하고 속이 꽉찬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미 패니가 '자신의 집'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절감하고, 이렇게 왜 매사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지 그는 파악을 했으며, 이런 시간들에서, 패니의 "섬세한 취향, 정신, 감정 등"을 확신하게 됩니다. 유서 깊은 매스필드의 고택에서 홀로 고독과 싸우고 있는 사촌 여동생 패니에게 그는 선선히 책을 권해주고 유일한 친구이자, 의지할 수 있는 오빠로 십 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이는 에드먼드에게 있어서도 패니의 조언을 구하는 경우도 종종 생기게 되는데요. 뒤에 등장할 메리 크로퍼드에 대한 그의 고민 역시, 그러했습니다.

역자의 의도대로 이 작품을 총 3권의 분량으로 구별해 본다면 제1권은 이런 패니의 놀라울 만한 감수성과 비교할 수 없는 분별력, 그리고 신중하고 조심스런 내면으로 이어지는 본성과 그에 따른 성장으로 축약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이 1814년 출시되고 나서, 해당 장편을 접한 많은 독자들은 작품 자체에 대한 코멘트를 하는 것을 넘어, 주인공인 패니 프라이스에 대한 평가를 (아마도) 쉽게 내리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당시 시대 상의 분위기로서 뿐만 아니라, 이런 소극적이고 내면에 침잠한 여성 캐릭터가 글을 읽는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했던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이는데요. 그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성격을 완성시키고 더 나아가 추구하는 야망까지 가질 수 있는 점진적이고 두려움 없는 인물을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성의 굴레'라는 측면에서는 터무니 없는 양가 감정과 같은 기대까지도 허용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2권 후반부까지 이어지는 패니 프라이스에 대한 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인물 조성은 충분히 고유한 서사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패니와 같은 예민한 감수성과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내면의 고차원적인 취향과 동시에 부각되는 그런 신중한 성격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스틴은 패니와 의도치 않게 맞물리면서도 본질적인 측면에서 섞일 수 없는 인물인, '메리 크로퍼드'를 여기에 배치합니다. 맨스필드 교구를 이끄는 그랜트 박사의 부인과 친자매지간인 메리는 오빠와 자신에게 남겨진 적잖은 유산과 어릴 때, 가까운 친족 어른의 지도를 받지 못해, '자유'와 '누구에게도 개입 받지 않는 삶의 주도'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쟁취하는 인물입니다. 저는 이 메리 크로퍼드라는 인물이 이 작품에 투입된 것이 매우 극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의 본성과 자기 이익에 따른 행위와 욕망을 현대의 관점으로 재해석할 생각은 없지만 남의 마음을 교묘히 이용하고, 또한 책임을 지지 않는 비교적 화려한 언설을 갖추고 있기에, 애초에 진정성이라는 단어와는 아주 거리가 먼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지난 날 여러 작품에서 구현해 놓은 상기 모습의 인물들로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보였던 모습이기도 합니다.  
 
헨리 크로퍼드 역시, 후견인인 숙부의 간섭을 어느 정도 배제하며, 런던과 여러 도시의 사교계를 섭렵하는 인물인데요. 제인 오스틴은 무엇보다 그를 '자만의 화신'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자기애는 지나칠 정도로 확고했고 바로 그것이 본성의 기반이 되었기에, 애초에 진중하고 몰입된 애정 자체보다, 여성을 자신의 도구로 삼을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이용한 여성의 감정을 '환희와 만족의 수단'으로 환치하는 아주 거릴 것이 없는 자입니다. 그랜트 부인의 초청을 통해, 겪게 된 맨스필드 파크에서의 분위기와 결국 실패하게 되지만 즉흥적으로 구상한 연극 무대가 자신의 욕망을 위한 전초기지로 삼은 점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꽤나 불쾌한 인물이기도 한데요. 그는 이미 근처의 명문가인 러시워스 가와 약혼을 맺은, 버틀럼의 장녀인 마리아에게, "약혼한 여자는 늘 약혼하지 않은 여자보다 매력적"이라는 가차 없는 심상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마치 여자의 마음을 얻는 행위 자체를 요샛말로 두근거리는 '게임'처럼 취급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그는 몇 차례의 전력을 갖고 있었는데요. 1권 중후반부, 토머스 경이 부재한 맨스필드 저택에서 스스로 궤멸에 가까운 짧은 열정에 사로잡혀, 이에 모두를 충동으로 이끄는 연극의 모험에서, 마리아의 약혼자인 러시워스를 의도적으로 무시했고 더욱이 마리아를 헛된 충동으로 교묘히 충동질하는 그의 저열한 일면은 저로서는 몇 번이나 작품에서 분석을 시도해볼 정도였습니다.  

이런 전력의 헨리 크로퍼드가 패니에게 시작했던 구애는 마찬가지로 일종의 '게임'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신중한 언행과 더 나아가 주변인들의 대화까지 일일이 챙기는 패니는 그에게 있어 흡사 요즘 말로 '외계인'과 다름 없었는데요. 자신의 여동생인 메리와의 대화에서, 그는 그녀를 어느 의미에서든 정복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오로지 자신의 흥미 거리를 위해서 말이죠. 여기에 동생인 메리 역시, 앞선 패니에게 큰 영향을 끼친 에드먼드에게 그가 확연히 자신과 다른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안락한 남은 생애와 그런 취향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를 원했던 메리는 '고결한 삶'과 귀족의 의무를 알고 있던 에드먼드의 삶의 지향을 사교계에서 풍월로 여럿 접했던 것처럼 가치들을 이해하는 척하면서도 끝내는 에드먼드를 반쯤, 경멸하기에 이릅니다. 가문의 유산을 제대로 승계할 수 없는 차남이라는 지위를 일찍이 수용한 에드먼드에게 자신의 욕망보다는 형인 톰의 장래와 더불어 가문의 화목을 위해, 얼마간의 재산을 담보로 성직을 자청하게 됩니다. 메리에게는 그에게서, 맨스필드의 유서 깊은 명문가라는 지위와 마찬가지로 노후를 유복하게 보낼 수 있는 재산이 보일 듯 했으나, 끝내 에드먼드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기는 커녕, 교묘하게 이용하기만 합니다. 여기에는 패니와의 우정까지도 그런 구실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후반부 가장 심각한 파문으로 나타나는 막장의 그 사건에서 그녀는 교묘한 변명만을 늘어놓게 되는데요. 한 사람의 인성이라는 것이 주어진 환경에서 이를 어떻게 주도적으로 행할 수 있겠는가라는 당위에서 거듭 정해진다면 삶의 무대와 그 주변인들을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인간에게는 그 인성의 발현이 극적으로 선하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작품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지명인 '바스'만큼이나 분별력을 재차 강조했습니다. 분별력이 없는 인간이 과연 온전한 인간일 수 있겠느냐라는 물음은 아마도 오스틴의 중대한 과제였던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인간의 분별력이라는 소재를 아주 극대로 활용한 소설로 생각됩니다.


다른 어느 작품의 전개 과정보다도 이 장편의 제3권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합니다. 거듭 구애하는 헨리 크로퍼드의 의도된 행위를 초기에 제대로 읽지 못했던 에드먼드에게 실망했던 것 만큼이나, 집안과 집안의 결합을 차치하더라도 그만한 재산과 그 정도의 상식과 예의를 갖춘 젊은이의 청혼을 거절하는 패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계도'하는 토머스 경의 태도도 역시, 입이 절로 벌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가 패니를 향해 내뱉은 "이기적이고 배은망덕"이라는 표현은 이 시대의 젊은 여성들이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거듭된 형태로 오만했던 토머스 경의 이런 '양식'은 후반부에 이르러 참혹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딸들인 마리아와 줄리아의 전형적인 행태 자체가 그저 모성의 유전이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워드 가의 세 자매와 오버랩 되기도 합니다. 특히 노리스 부인의 인물 조성은 극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악랄한 부인의 인성까지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어떤 한 사람의 본성과 그 내면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진실된 눈으로 바라본 한 사람의 판단이 그렇지 못한 인간들의 터무니없는 비아냥과 취급을 받을 부분인지는 지금의 인간 사회에서도 충분히 고민이 될 만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패니는 유년 시절부터, 오랫동안 겪어 왔던 고립된 생활에서 사촌 오빠인 에드먼드를 제외한다면, 독서와 사색으로 자신을 조각한 인물입니다. 내면은 충실하고 견고하게 구축했고, 자신의 눈은 본질을 보기 위해 노력했고,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도 쉽사리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따뜻하고 정 많은 심성을 갖추었습니다. 통찰이 그녀의 고유한 본성이었다면,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그리고 자신의 이익으로 가는 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인물들의 조소와 비아냥이 패니와 같은 인물에게 향하는 단계의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을 완독하기 전까지는 패니에 대해, 여자가 아닌 한 인간의 자유와 선택의 문제를 대변하는 인물로 절반쯤 이해했으나, 거대한 파국 이후의 조금 성급한 결말을 맞이하고 보니, 그녀는 남들과 다른 조건에서 내면을 충실히 쌓아온,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서사 중간에, 마치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말하는 듯 토해내는 "여자가 누군가의 구애를 받았으면 무조건 그것에 화답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너무나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헨리 크로퍼드의 패니에 대한 '구애 작전' 자체가 한 나르시스트의 자기 만족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의 결과는 아주 혹독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제1권 중후반부터 진행된 맨스필드 파크에서의 연극 시도와 그에 따른 복잡한 양상의 연습과 마찰은, 대미 자체를 이미 구축한 바와 다름 없었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제인 오스틴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메리 크로퍼드와 같은 인물은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접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의 일독을 통해 얻어진 그와 같은 교훈적인 정신 자체는, 우리 같은 현대인들에게는 더없이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문 195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본문 560페이에도 띄어쓰기 오류가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더 많은 잘못된 띄어쓰기가 상당히 많이 보였습니다.)


-본문 602페이지에 등장하는 '에드먼드'는 페니와 포츠머스로 동행하는 오빠인 윌리엄을 

 고려했을 때, 윌리엄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그녀는 이 사촌 오빠가 선하고 위대한 온갖 것들의 본보기이고, 그녀 외의 어느 누구도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어떤 감정으로도 충분히 보답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자신의 고마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혹은 상대방이 교양과 훌륭한 성품을 갖고 있겠지 하고 철석같이 믿었다가, 자신이 완전히 기만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래서 그 정반대의 상황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을 제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데요!"

에드먼드 오빠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착한 성품을 드러내 보이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또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자제력이라든가 타인에 대한 올바른 배려, 자신의 속마음에 대한 정확한 인식, 도의의 원칙 같은 것이 그녀가 받은 교육의 필수적인 내용은 아니었으니, 그녀는 그런 심성을 갖고 있지 못한 관계로 자신이 처한 상황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예의범절은 아마 훌륭한 행동 원칙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품행‘이라고 불러도 될 겁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이 바로 저런 태도야. 부탁하거나 선택권을 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저런 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일을 억지로 하게 만들려고 접근하는 걸 보면, 다른 어떤 일보다도 더 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니까."

"다른 여자들이 무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만큼, 너는 주목받고 칭찬받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던가."

토머스 경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이들을 위한 일일지라도 가능한 한 가장 득이 되는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책략을 세운다거나 머리를 짜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사람이었고, 그런 일에 재바른 태도를 경멸했다.

"인간의 본성에는 일주일에 한 번의 설교로 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도덕적 교훈이 필요하다는 걸 에드먼드도 알고 있으니까요."

"정말 그렇소. 패니가 있는 앞에서 칭찬하고 있으니, 우리가 자신을 얼마나 착한 아이로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셈이군. 지금은 우리가 정말 소중한 말동무가 됐지. 그동안은 우리가 저 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면, 지금은 저애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주고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만일 이 세상에서 어떤 야심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아가씨가 있다고 한다면, 그게 바로 패니 프라이스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사실 그녀는 이모부처럼 통찰력이 뛰어나고, 지극히 존경스럽고, 훌륭한 분이라면, 그녀 쪽에서 그를 싫어하는 마음이 확고하다는 걸 단순히 인정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리라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예전에 그토록 큰 충격과 혐오감을 주었던 모습, 다른 사람들을 세심히 배려하거나 존중하는 마음이 결핍된 모습이 다시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호감 비슷한 감정을 품고 크로퍼드를 대해왔다고 여기기는커녕 항상 그 반대라고 믿어왔었고, 나아가 그녀가 마음의 준비도 전혀 안 된 상태에서 급습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패니, 내 동생들의 훌륭한 자질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싶긴하다만, 나는 그 애들이 단독으로 그랬든 같이 그러했든 크로퍼드 씨의 호감을 얻으려는 바람을 과도하게 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패니는 그토록 이른 나이에 올바른 분별력을 행사할 수 있는 타고난 밝은 정신에 대해 찬탄하고픈 마음이, 그런 정신이 초래하는 잘못된 행동을 가혹하게 비난하고픈 마음보다 더 많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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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시공 제인 오스틴 전집
제인 오스틴 지음, 최세희 옮김 / 시공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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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스셔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스티븐턴과 딘에서 성공회 교구의 목사로 일한 부친과, 세습 작위의 남작 가문이자 유서깊은 리 가문 출신의 모친 밑에서 겸허한 교육을 받으며,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1783년이 되자 오스틴과 그녀의 여동생 카산드라는 앤 콜리에게 교육을 받기 위해 옥스퍼드로 보내졌고, 앤 콜리는 그녀들을 사우샘프턴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해 가을, 예상치도 않게 두 자매는 발진티푸스에 걸리게 되는데요. 이때 제인은 거의 죽을 뻔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후 제인은 집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1785년이 되어서야 라 투르넬 부인이 운영하는 레딩 기숙학교에서 여동생과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1787년부터 1793년까지 오스틴은 29개의 초기 작품을 집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790년에는 '사랑과 우정'이라는 짧은 분량의 서간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즈음에 오스틴은 스스로 전문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1800년이 되어, 그녀의 부친이 은퇴를 결심했고 그동안 머물던 스티븐턴을 떠나, 바스로 온 가족이 떠나게 됩니다. 1804년, 오스틴은 바스에 지내면서 소설 '왓슨 가족'을 쓰기 시작했지만 완성은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많은 여성 작가들처럼 그녀 역시도 익명으로 책을 출판하기에 이르는데요. 동생인 에드워드의 손에 이끌려 이주한 차우튼에서, 그녀의 소위 4대 작품이라고 일컫는 소설을 성공적으로 출판합니다. 이 작품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었고 당시 젊은 귀족들이 여론을 주도하여 크게 유행을 타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이성과 감성'으로 당시로서는 꽤나 많은 수입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816년에 이르러 일시적으로 건강이 나빠졌지만 이를 무시하고 집필활동에 정력을 쏟았지만, 1817년 7월, 그녀는 갑작스레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의 유해는 윈체스터 대성당 본당의 북쪽 통로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녀의 비문에는 오빠인 제임스가 글을 작성했고, "그녀의 뛰어난 지성"에 대한 언급이 있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할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Emma"로 지난 1816년에 출간되었고, 이 번역본은 2016년 시공사에 의해 출판되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번역본의 추천사에는 주한 영국 대사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스틴의 이 작품은 런던 인근의 가상 마을인 하이버리와 그 주변 영지인 하트필드, 랜달, 돈웰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장편의 주인공인 '에마 우드하우스'는 하트필드의 터줏대감인 유서 깊은 우드하우스가의 차녀로, 과거 귀족 가문의 유산을 바탕으로 지역의 다른 여타 인물들과 교류하는 모습을 세속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스틴의 이 소설은 일종의 '풍속 소설'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더해, 주인공인 에마의 약간의 좌충우돌식 숙녀 성장기와 이 시대의 (성을 가진) 특별한 여성들이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려내는 적지 않은 분량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제인 오스틴이 추구하는 특유의 문학적 방향성과 더불어, 숨기지 않는 현실적 모습을 이어지는 여러 사건들과 절묘하게 배치함으로써, 다양한 서사를 따라가는 일독 그 자체로는 매우 즐거운 편이었습니다.

여느 노인들과 비교해서도 상당히 예민하고 거기에다 건강염려증까지 보이고 있는 부친을 지근거리에서 보살피고 있는 에마는 이 작품에서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극 중에서 에마의 외모를 소개하는 오스틴의 묘사 역시도 한 눈에 봐도 매우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요. 그녀 자신의 지위로서 뿐만 아니라, 우드하우스 가(家)의 실질적인 안주인의 위상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녀 자신이 지역 내의 상당한 존중을 받고 있음을 드러내는 설명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녀를 하트필드의 주변을 통틀어 마치 '여왕벌'처럼 노골적으로 칭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중심이 되어 벌어지는 주변 관계들 간의 교류와 그 와중에 과거 테일러 양이었던, '웨스턴 부인'과 안쓰러운 사생아이기도 한 헤리엇 스미스를 배치해, 이들 사이에서 무엇보다 '분별력을 갖춘 숙녀의 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특히 이 시대의 '고귀한 여성들'에게 있어, 변함없는 숭고한 애정과 그로인한 가문 간의 혼인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한 화두였으며, 시대를 표상하는 전반적인 결혼관, 그리고 그 실상에 대해. 오스틴은 특유의 관찰자적 시점으로 이를 가감 없이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기본적 이해는 시대극이 갖는 장점이기도 하며, 각 시대별로 살아간 인물들의 내밀한 모습을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펴볼 수 있게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그녀의 가정 교사였던 '테일러 양'이 인근의 웨스턴 가에 시집을 가게 된 연유에는 바로 에마의 공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혼기에 이른 훌륭한 여성이 마찬가지로 명예로운 신사에게 향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지난 에마의 행적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는데요.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만남과 관계라는 일종의 구시대적 관습은 여전히 소설 속 사회의 중요한 가치였고, 이는 해리엇 스미스를 통해서도 대비되어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극 후반부에 오스틴 답지 않은 '부실한 결론'을 감안하더라도 해리엇이라는 여성의 인물 조성 자체는 독자들에게 뿌리 깊은 영국 왕국의 신분적 단면을 엿보게 만듭니다. 여기에는 그녀가 사생아라는 측면의 제약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남 부러울 것이 없는 에마가 해리엇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살뜰하게 챙겼던 연유에는 같은 여자로서의 무던한 이해가 배경이 되었을 겁니다. 소녀의 시기를 지나 숙녀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던 해리엇에게 지워진 신분상의 제약 만큼이나 '숙녀의 기본 자세'를 중요시하는 에마에게는 무엇보다 그녀를 관리할 스스로의 명분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어설픈 숙녀를 노리고 있는 결격 사유의 남성들이 있을 수 있다고 에마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버트 마틴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물론 극 중에서 에마와 해리엇의 우정에 대해 한치도 경멸할 수 있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데요. 다만, 이 두 사람의 우정이 에마의 경솔한 '사랑의 작대기'로 시험 받았다는 측면과 일전에 경험한 테일러 양의 성공적인 사례로 말미암아, 유독 에마 자신의 결혼 문제는 부친의 존재로 멀찍이 밀려났지만 역설적이게도 작가는 후반부의 극명한 서사로 말미암아, (인물 조성에 공들인) 해리엇을 결국 '조기 결론'으로 이끌게 됩니다. 이 부분 역시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에마를 둘러싼 일종의 소란들이 '겹겹의 풍속'으로 나타나고 이 가운데 이런 숙녀들이 어우러진 통속적 연애 소설로서, 이 이야기 자체로 당시 일부 계층에게는 상당한 교훈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작품에서 묘사된 '신분에 걸맞는 결혼' 즉, 에마의 친언니인 이저벨라와 신흥 가문이라고 볼 수 있는 나이틀리 가의 결합은 여기서 중요한 설정이기도 했는데요. 즉, 제인 오스틴이 당시의 풍속을 어떠한 거름망 없이 여실히 묘사하면서도 '신분에 맞는 결합'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을 아낀 것은 어느 정도 복합적인 요인에 기반하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시대상 그 자체 일수도 있고 그런 '신분의 보수성'이 당시를 살아간 제인 오스틴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요소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뒤이어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인, 제인 페어팩스 역시, 가볍지 않은 비중으로 에마와 쉽게 비견되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에마와 비교해서 빈한한 가정사(3만 파운드의 유산을 받을 에마와 비교해서는)와 수양 딸과 비슷한 상황으로 인해, 내면이 아래로 침잠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저의 이런 표현이 약간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제인이라는 인물 자체는 에마와 비교해서도 충분히 인정 받을 만한, 훌륭한 숙녀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솔직하고 다양한 루트의 감정 표현을 서슴없이 하는 에마와는 달리 제인은 스스로의 감정과 기분을 타인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 상반된 인물인데요. 이 지점에 있어 어느 정도는 극의 반전을 위해 작가인 오스틴이 설정한 측면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녀 자신은 '타인의 호의'에 본능적인 의심을 내비치는 인물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숙녀들 간의 오고감이 단순히 사교계에서의 질의 응답과 전형적인 화답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소설의 주제와 맞물려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각자가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적절한 예의와 그에 따른 화법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절제된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나름 인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마치 현대의 극단적인 직접 화법과 다름없는 날 것의 '감정 분출'과는 달리, 이 소설의 사회에서 보여지는 적절한 신분을 배경으로 한, 남녀 간의 그 예의의 문답은 어느 정도 고풍적인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이와 별개로 주요 남성 캐릭터이기도 한, 조지 나이틀리와 (웨스턴씨의 사연 많은 아들인) 프랭크 처칠은 서로가 매우 구별되는 인물들입니다. 치안 판사로 재직 중인 조지 나이틀리는 에마의 남편인 존 나이틀리와 친척 관계로 극의 1부 전반에서, 에마에 의해 약간의 '별종'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그는 숙녀들에게 일절 '넉살을 부리지 않는' 신사로, 하이버리에 있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있어, 어느 정도 주변을 맴도는 인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거의 존재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극 후반부인 3부에 가서야, 조지 나이틀리의 진정한 인물됨이 드러나게 되는데요. "나는 진실만을 말한다"는 그의 의미심장한 대사와 '견실하고 섬세한 원칙주의'로 설명하는 그의 인생 자세는 몇 마디 말로도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와는 다르게 웃는 낯과 언변을 갖춘 프랭크 처칠은 극 전환의 주요 키워드로 읽혔으나 다른 연유로 제게 충격을 준 인물입니다. 그는 꽤나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열정에 쉽게 사로잡히는 인물로, 극 중에서 "책을 읽고 교양을 쌓는 일반적인 신사들"에 비하면 송곳처럼 대비되는 인사입니다. 극의 중후반부에서 에마와 매우 가까운 웨스턴 부인을 상상의 나래로 이끌고 마는 그의 성급한 감정 기복은 오래지 않아 이 작은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2부 이후의 큰 두 가지 사건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요. 특히 프랭크 처칠이 관여 되어 있는 그 의미심장한 사건에 있어,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서사의 장구한 계획이라는 일환에, 개연성을 가히 인질로 사로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비틀린 극의 전개가 그 대목을 읽을 당시에는 쉬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 지점의 프랭크 처칠은 여지없이 여러 숙녀와 얽히기도 했고 오스틴이 극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분별력을 갖춘' 인물로는 설명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프랭크 처칠의 쓰임새가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렇게 대립되어 나타나는 조지 나이틀리와 프랭크 처칠의 구분은 마치, 제인 오스틴이 '오만과 편견' 그려낸 이야기와 흡사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누군가의 진정한 인물됨은 그저 몇 마디의 말과 도드라진 행동으로 판단될 수 있는 계재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얼마전의 자신과 다른 성장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에마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하트필드의 주변에서 반쯤은 스스로 자초한 일들로 인해, 내면과 가치관이 성장하기에 이르렀고 끝내 진정한 사랑에 대해, 자발적으로 눈을 뜨게 되는데요. 전반적으로 이 작품이 어떤 '맹렬한 주제 의식'을 답보하고 있는 여타의 그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단순한 시대상을 배경으로 삼아 그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세간의 재미 정도로 이해해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주인공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을 통해, 신분의 조건과 단순한 삶의 양태를 넘어서는 그 사람의 '순수한 의지'에 대해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단순히 프랭크 처칠이라는 인물을 그저 조소하려는 것이 아닌, 사람의 진정한 내면과 귀감이 될 수 있는 본성 자체는 쉽게 타인에게 드러나지 않는 법이며, 그간 제인 오스틴이 그려낸 다른 소설과는 다르게 이러한 베일 속에, "조급하고 무분별한 애정"에 대한 분명한 의심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꽤나 유쾌하게 이 소설을 일독할 수 있었는데요. 작품 초반에 어설프게 얽혀 있던 조지 나이틀리의 (오해를 방치한) 대사들과 그의 행동됨을 다시금 돌이켜 볼 수 있는 부분은 나름 즐거운 복기였습니다. 그리고 엘턴 부인으로 극대화 된 유일한 희화화를 제외한다면 오스틴이 만들어 놓은 인물들은 대부분 개연성 있는 조성으로 본래의 내면과 그것이 엿보이는 어투와 행위 등이 보다 사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는 제인 오스틴 특유의 생생한 인물 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극의 결말이 다소 성급하게 마무리되어 이 부분은 논외로 하더라도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극 후반부를 이끄는 주요한 두 가지 사건도 따로 언급해야 했으나 이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상세한 분석은 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엘턴 부부에 대한 서사적 분석 역시, 극중 주요한 사건이 혹여 그 과정에서 드러날 가능성이 있기에 아쉽게도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엘턴 부부에 대한 설정 자체는 제인 오스틴이 거리를 둔, '부분별한 결혼, 무분별한 애정'의 집합체로 이 부부 자체가 편협한 시대상 그 자체에서 젊은 남녀가 경계해야 할, 분명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본문 388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가, 본문 626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또한 651페이지에 문장 중간에 뜬금없이 마침표가 들어가 있었습니다.


- 개인적으로 보기에 번역은 전반적으로 훌륭하다고 볼 수 있었으나, 편집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실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더할 나위 없는 양장본으로 출시된 작품이 저런 오류들을 수정하기 않고 급급하게 내놓은 것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남편은 그녀가 아름다운 미덕을 발휘해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니 그 보답으로 결혼 생활에서 모든 것을 아내애게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마음씨가 따뜻하고 기질이 상냥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부분의 여자들에게서 예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자신의 상황에 잘 대처했으며, 작은 곤경과 시련을 잘 참아내고 순조롭게 헤쳐나갈 만한 분별력과 활력과 정신력을 갖고 있었다.

하이버리에서 우드하우스 양의 입지는 대단한 것이었으므로, 그런 사람을 소개받는다는 것은 스미스 양에겐 기쁜 일이면서 동시에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해리엇은 획실히 영리하지 않았지만 다정하고 유순하며 고머워할 줄 아는 성품이었고, 자만심은 조금도 없었으며 다만 자신이 우러러보는 사람을 귀감으로 여겨 따르고자 했다.

"내가 일반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는 건, 해리엇, 만약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 남자를 거절해야 한다는 거야."

"만약 당신을 비롯한 남자들 대부분이 그런 아름다움과 그런 기질을 여성이 갖출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자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제 착각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겠죠."

그리고 잦은 사교 활동과, 그런 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형부의 성향은 다름 아닌 철저할 정도로 가정에 충실한 습성, 자신에겐 가정만으로 족하다고 여기는 태도에 기인한 것으로 어딘지 모르게 존경스럽고 가치 있어 보였다.

에마가 툭하면 혈색이 나쁘다고 흠잡았었던 제인의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섬세해서 가히 활짝 피어 절정에 이른 꽃과 같았다. 그런 만큼 에마는 나름의 원칙이 있음에도 도의적으로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런 우아함은 용모 면에서나 정신 면에서나 하이버리에선 좀처럼 드문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에마는 자신과 그의 만남에 대해 사람들이 품을 만한 기대, 예전부터 그녀의 마음을 강렬하게 지배해왔던 생각을 그도 한적이 있을지, 그래서 그의 찬사를 동의의 표시로 봐야 할지 아니면 반항의 증거로 봐야 할지 궁금해졌다.

에마는 숙녀를 대하는 그의 정중한 태도에 다소 아집이 섞여 있음을, 그리고 그녀와 춤을 추는 즐거움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그녀에게 반대하는 쪽을 택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떤 일이 있어서도 아버지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확고히 결심하긴 했지만, 사랑의 감정이 강렬하다면 지금의 감정에서 예견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심란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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