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의 종말 - 국제 질서의 몰락 이후 다가오는 파국적 미래의 예언
로버트 D. 카플란 지음, 이영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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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D. 카플란은 1952년, 미국 뉴욕에서 유대인 부모에서 태어났습니다. 특히 그의 부친인 필립 알렉산더 카플란은 트럭 운전사였습니다. 모친의 이름은 필리스 쿠아샤입니다. 특히 부친은 그의 아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기도 했는데요. 카플란은 장학금을 받고 코네티컷 주, 스토어스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코네티컷 대학에 진학합니다. 당시 코네티컷 주 언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던 에반 힐에게 뉴스 작성 수업을 들으며, 이후 1973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는 졸업하자마자 여러 대도시의 뉴스룸에 지원하지만 결국 채용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렇게 진로를 바꾸게 된 카플란은 버몬트의 러틀랜드 헤럴드에서 기자로 경력을 쌓게 됩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이스라엘에 살면서 이스라엘 군대에 입대했고, 동유럽과 중동을 여행하며 취재 활동을 하다, 그리스 아테네에 정착하여 결혼을 하게 됩니다. 현재는 아내와 함께 메사추세츠 주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언론 경력 이외에 미 육군 특수부대, 해병대, 공군의 자문위원을 역임했고, 군사 대학, FBI, NPR, C-SPAN, 폭스 뉴스 등의 방송에도 출연했습니다. 이런 경력들을 바탕으로 현재 그는 외교 정책연구소 (Foreign Policy Research Institute)의 로버트 스트라우스-후페 지정학 석좌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2026년에는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석좌교수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 내의 저명한 지정학 관련 분석가로 이와 관련해, 2011년과 2012년에 외교정책 (Foreign Policy) 지의 "세계 100대 글로벌 사상가"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간혹 신보수주의자인 로버트 케이건과 혼동되기도 하는 그는, 인구증가, 도시화, 자원 고갈에 직면한 많은 개발도상국의 취약한 정부들을 분석하여, 서아프리카와 같은 지역 내의 국가들이 '체제 붕괴'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가오는 무정부 상태 The Coming Anarchy)에 대해 큰 우려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대표적인 네오콘의 비판자로 특히, "군사력에 의한 민주주의 증진"에 대해 환멸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그는 도널드 트럼프의 외교 노선과 동시에 미국의 소프트파워 축소에 대한 정책 비판을 병행하기도 했는데요. 다만, 이와 관련해, 기존 학계에서 카플란의 여러 주장들이 비판을 받기도 했고 특히 그의 논저인, 『지리학의 복수』는 '암울한 읽을거리'라는 조소를 받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aste Land"로 지난 202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가 글 말미에 밝히고 있듯, 여기에 실린 글들 가운데 일부는 "월스트리트 저널", "뉴크리테리언",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 "뉴 스테이츠먼"의 실렸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카플란의 이 글은 전체적으로 3장의 주제로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1장은 오늘날 '실질적 질서'의 부재 혹은 붕괴를 다뤘고, 2장은 강대국의 쇠퇴라는 제목하에 러시아와 미국의 쇠퇴를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 3장은 '성찰하지 않는 군중이 주도하는 군중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와 함께, 이러한 측면에서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엘리아스 카네티의 사상을 기준으로 현재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대부분의 서사가 회의주의적이고 비관적이면서, 전세계 정치경제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다가오는 가까운 미래 내지는 문명을 무턱대고 긍정했다가는 세계가 작금의 군벌 독재와 잦은 권력 교체에 놓여 있는 서아프리카 국가들과 유사한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을 저자는 특히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어, 굴욕적으로 맞이한 당시 독일은 튀링겐 주, 바이마르에서 극적으로 고안된 독일식 자유주의 체제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저자는 바로 이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이 바이마르에 대한 분석은 대부분 비판적인 논조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히틀러의 집권에 이르는 15년 간의, 약하고 불안했던 통치"가 작금의 러시아, 중국, 미국, 그리고 중소국가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고 저자인 카플란은 거듭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합스부르크 가로 대표되는 유럽의 전제 왕정이 참혹한 대전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소멸함에 따라, 이후 등장한 히틀러가 원인이 된 '전체주의'가 전 유럽을 다시금 두 번째 대전으로 이끌고 말았다는 역사적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유구한 역사의 과거 전제 왕정이 시회에 최소한의 질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에 대한 긍정적 기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인 카플란이 과거 전제 왕정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갖고 것은 아닙니다. 저자가 어느 정도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바와 같이,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오늘날의 형식으로 세련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었는지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합스부르크로 대표되는 전제주의적 왕정이 입헌제를 통해, 시민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기대할 수 있는 체제적 질서가 있었고, 어느 정도는 당시 군중들이 이러한 입헌주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치적 통제가 유지될 수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 가운데, "초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인플레이션이 있었고, 말기에는 거의 재앙이라 부를 만한 공황"이 있었다고 저자가 언급하는 부분은, 당시 전체주의의 폭력적 부상이 어떠한 환경들로 발생하게 되었는지,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오늘날 전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이 '바이마르적 혼란'이 무엇보다 세계화의 영향임을 밝히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현재 다시금 '민족주의 대 민주주의'라는 폭력적 대결 구도를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인 카플란이 이 글을 통해, 경고하는 바는 아주 명확합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왜곡된 정치 권력은 언제든 체제를 위협할 수 있으며, 이것의 노골적인 조장은 점진적이고 누적된 '세계화의 실패'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진단 내지는 진실에 가까운 현실입니다. 1장에서 이미 저자는 히틀러가 민주주의 체제를 통해 권력을 잡고, 독일 국민을 조종하기 위한, 나치즘을 확고히 만들었듯, 지금 세기에서도 극단주의 세력에게 민주주의는 하나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일견의 진술은 우리가 깊이 새겨 들을 만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분석의 아주 극명한 서사는, "이 세상은 복잡한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소셜미디어 구호와 취약한 금융 도미노 때문에 불안정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단언은, 1장 중반에서의 오늘날 '신기술'에 대한 회의적 이미지로 점철됩니다. 이미 데이빗 코츠, 리민치를 비롯한 세계화 비판의 이론가들은, 신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영합할 수 있었지만 이들이 추동한 체제의 결과물은 약간의 앞뒤 맥락을 제하고 언급하자면, "극우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설 정치적 토양을 제공한" 심각한 불평등의 확산과 그로 인한, 시민들의 삶이 위협 받는 체제의 불안정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 가운데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더욱 확산시킨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1장의 서두에서, "개발도상국에는 상당히 많은 바이마르식 민주주의 체제가 존재한다"는 역설 아닌 역설은, 이들의 표면적인 불안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기본적으로 폭로하는 동시에, 이후 독재로 이어질 가능성이나, 이미 권위주의 독재나 다름없는 상태임을 은연중 드러내는 냉혹한 현실 인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저자는 1장의 논증 가운데,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확실히 다른 가능성 등도 존재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이를 지금의 현실에 빗대어 해석해 본다면 "체제를 불식시킬 수 있는 현저한 위기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저자의 현실 인식 자체는 그저 비관주의로 몰고 갈 문제는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논증을 통해서, 과거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정치인의 거듭된 실패처럼, 뒤에 언급되겠지만 엘리트들과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무능이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극단주의 내지는 독재 권력이 목소리를 높이는 기회가 되었다는 잠정적 분석도 그저 부정할 수 없는 지점입니다. 더욱이 오로지 국익 만을 앞세우는 행태인 "우크라이나, 대만, 가자 지구'에서의 군사적 행동이 더욱 세계를 불안정성으로 내모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인데요.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또한 사활적 이익이라 포장된 군사적 행동에 나서는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강대국의 지도자가 충분한 성찰이나 깊은 사고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등의 편협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것의 부정적 시너지는 저자가 우려하는 바대로, 질서 없음 즉, 전세계의 '바이마르화'로 조장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이런 바이마르화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분한 것이어서, 기존 체제에서의 엘리트들의 무능, "지식이 거의 없는 부분에서 자신들이 지식이 있다고 믿는 엘리트 계층 전반"과 전혀 감사를 모르는 "중산층의 존재"는 그저 표면적인 요인으로 치부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극단주의 정치의 부상 자체가 이런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초래된 결과물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가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는 전자의 "엘리트의 실태를 폭로"하는 것은 이들로 인해, 체제가 오도될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동시에, 곧 후술 되겠지만 이들 엘리트들이 쉽게 집단적 무능 혹은 무지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유념하고 더 나아가 이를 경계하는 지식인의 책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왜 노엄 촘스키가 자기 이익에 함몰된 무능한 지배 엘리트 계급을 비판하고 진정한 각성을 요구했는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2장의 강대국의 쇠퇴에 대한 논증은 특히, 푸틴의 치하에 놓여 있는 현재의 러시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금의 러시아를 과연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뿌리내린 국가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푸틴의 체제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요. 더군다나 푸틴 자신이 정적들로 규정한 '올리가르히'를 어떠한 법적 근거 없이 사적으로 권력을 동원해, 이들을 축출한 것만 봐도 명확히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영향권에 놓거나 최소한 나토와 상관없는 중립 지대로 만드는 것이 러시아의 이익이었기에 푸틴이 그 즉시 군사력을 투입한 것은 유럽의 안보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초기에 유엔이 조직되어 안정 보장 이사회를 구성할 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이 5개국이 다른 국가를 군사적으로 침략할 수 없다는 도덕적 함의를 몇 번이나 무시한, 이런 행태들이 결국에는 국제 정치의 소위 바이마르화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런 강대국들이 존재하는 전쟁 직전의 세계는 유엔을 작아지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극명한 서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국제 정치에서 어떤 일관된 질서를 기대하는 것이 다소 무리한 시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국제 정치 전반이 노골적인 세계화가 완료된 시점에서, 이러한 긴박한 연결성이 각국의 이해 관계가 보다 첨예하게 부딪칠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환경의 서사는 충분히 설득적입니다. 이러한 서사 가운데, 저자가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강대국들이 보유한 핵무기들이 지구를 몇 번이나 원시 시대로 돌려놓을 수 있고 (MAD라는 미명하에), 이러한 불안정한 평화가 정치 군사적으로 거듭 지속될 수 있는지 규명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분명 러시아가 내부적으로도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외부적으로도 쇠퇴에 이르고 있지만 '핵을 보유한 강대국의 쇠퇴'는 좀 더 다른 관점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지점은 어떻게 보면 저자의 분석 한계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는 푸틴의 존재 자체는 어떻게 보면 독재 정권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자의 일관된 논증을 저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푸틴 혹은 푸틴 현상은 질서를 찾아 볼 수 없는 바이마르화에 따른 어떤 결과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푸틴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는 핵보유국 러시아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국제 질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푸틴의 독주가 러시아를 더욱 쇠퇴에 이르게 한다는 저자의 논리는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데요. 다만, 러시아의 쇠퇴처럼 지금의 중국이 쇠퇴에 이르고 있는지는 아직 단정하기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저자는 앞선 강대국의 쇠퇴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강대국의 쇠퇴는 아무리 점진적이고 불균등하더라도 2, 3차적 파급 효과로 개발도상국과 국제 체제에 더 많은 불안정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어쩌면 이 부분의 진술은 1인에게 집중된 독재 권력으로 강화된 러시아와 중국의 기본 이해로, 이 독재적 강대국이 그저 시간이 흘러, 자연의 한 과정처럼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오판을 통한 국제정치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힘에 의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면, 가깝게는 주변국과 멀게는 이들과 별 상관없는 일반적인 개도국들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이 서두에 언급한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의 연결성 때문일 겁니다. 

이와는 별개로 2장에서, 시진핑 정권이 이른 시일 내에, 1000여개에 이르는 핵무기를 확보하려는 시도 자체가 단순히 미국을 견제하는 목적 하나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장 말미에 "고립주의는 과거"라는 최종 논법에 저 역시, 동의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형태의 트럼프식 고립주의는 '질서 없음'의 국제 질서을 더욱 부채질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 미국의 우방과 동맹, 모두를 민주주의 진영의 (함께 가는) 동반자식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미국이 지난 전쟁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무리한 민주주의 이식 (다른말로 신자유주의적 질서 이행)은 결과론적으로 군사적 모험으로 귀결된 점은 교훈으로 삼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인 카플란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에둘러 표현하거나,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일전에 브레진스키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들이 9. 11을 정치적 셈법을 위해 이용했다는 점을 명확히 했었는데요. 나중에 여러 전문가들 (예를 들어 게리 거스틀이나 브레진스키 등)이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 패권 쇠퇴를 촉진한, 한 갈래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일관되게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게리 거스틀의 진술은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 더욱 구체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백악관이 이라크의 종교와 민족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민주주의를 강요하게 만든 군정과 관련해서도 말입니다. 이제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모험주의가 남아 있지만 이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미국은 자신이 이끄는 자유 진영의 신뢰와 그 자신이 바라는 자유주의적 번영을 위해서, 적절한 개입과 균형 전략, 및 질서의 회복에 나서야 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에 국내의 전문가들은 미국이 중국과 같은 지역 내 패권국을 제대로 견제하지 않고 그저 역외 균형자의 입장에 국한된다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서태평양 지역은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곳이기에 그럼에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어지는 3장의 주된 맥락처럼, 미국의 지식인들은 과거 이데올로기 대결과 후쿠야마식의 종말, 그리고 신자유주의화에 따른 기득권 엘리트 계층의 노골적인 사익 추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토머스 프랭크와 같은 학자들처럼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보다 비극적으로 오스발트 슈펭글러를 통해 현재 우리의 정치를 조망하고 있었습니다. 슈펭글러는 정작 유럽의 종말과 다름 없는 비참한 전쟁을 목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럽 문명의 몰락에 대한 매우 중요한 예언적 통찰을 보인 지식인이었습니다. 슈펭글러와 관련해서 저자는 그가 여러 방면에 있어 매우 박학다식했고 따라가기 어려운 담론들에 대한 특유의 이해를 보이면서,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심지어 나치에 이르기까지 그들 나름의 논란을 일으킨 인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 3장에서, 슈펭글러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이를 아주 간단히 축약하자면, 슈펭글러는 유럽 문명의 거의 모든 지접에서의 쇠퇴를 예견한 인물이라고 강조됩니다. 18세기를 거쳐, 도시의 확장과 그곳에서의 교육과 자원 집중을 통해 성장한 엘리트들이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게 됨으로써, 소위 정치문화적 위계가 강화됩니다. 물론 슈펭글러의 비판처럼 이들 초기 엘리트 계급들이 제대로 된 성찰과 많은 독서를 등한시 함으로써, (자신은 주도하는 엘리트 계층이기 때문에 책 따위는 필요없다는 식으로 자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전혀 지식이 없으면서 지식이 있는 척 하는' 계급의 단면을 폭로하게 됩니다. 이는 단적으로 "이런 형편없는 판단이 인구 전체, 특히 엘리트들에게 퍼지면 셀 수 없이 많은 나쁜 결정의 잔해가 감지하기 힘들 만큼 조금씩 문명을 악화시킨다"는 슈펭글러식의 결론을 마주하게 됩니다. 정치가 왜 어리석고 우둔한 측면으로 왜곡되는지는 버틀란드 러셀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앞선 진술은 그 결과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이렇게 정치가 일반 시민들이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서 곧 등장하게 되는 소셜미디어가 결국에는 민주주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현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새삼 '군중'을 언급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는 군중 혹은 패거리들에 대한 저자의 일침은 가혹합니다. 이런 군중들이 주도하는 정치란 가히 민주주의 정치를 병들게 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무리지어 있는 군중들의 위협을 예견한 귀스타브 르 봉도 그렇거니와 여기에서 언급되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 뒤이어 나오는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론 또한 이렇게 연결됩니다. "나치와 공산주의는 군중속에 있을 때, 안정감과 순수성에 대한 열망을 공유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것은 작금의 나르시시즘적 도취에 빠져 있는 포률리스트들에 대한 강한 지지를 외치고 있는 현재의 군중에도 해당되는 논법일 텐데요. 스탈린이 군중을 소와 개처럼 관리해야 되는 대상으로 여겼던 것처럼, 극단주의 정치 그 정상에 있는 이 포퓰리스트들이 과연 성찰이 없는 이들, 즉 군중들을 위해 뭔가를 할 것이란 기대는 허구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자들은 오직 자신의 사익 추구만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에 이르는 모든 수사와 행위들은 "선한 민주주의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저자 역시, 과거의 에드먼드 버크처럼, 군중의 광기와 저항할 수 없는 극단주의적 힘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들 군중들이 '외로운 개인'을 무리에 끌어들이고 쉽게 광기에 휩싸이는 등의 통제력 상실의 광분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지독할 정도로 회의적인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를 목도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이러한 심각한 메커니즘에서 우리가 구축한 자유 민주주의 자체는 최종적이고 그것의 대안을 찾을 수 없을 일종의 이데올로기인 것은 분명하기에, 앞선 군중이 상식적인 대중, 문화를 이해하는 대중,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시민, 그리고 의무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진정한 시민에 이르게 될 수 있는 "자신을 위한 혁명"이 필요한 것도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3장 말미에, 과거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자유주의를 저자가 언급하며, "개인의 주체성과 열린 마음을 옹호하면서 대중에게 궁극적인 비판을 가하는" 일종의 합리적인 사고의 전통이 다시금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보수주의적 인상을 떠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는 군중들의 선택이 최종적으로 정치를 붕괴하게 만들고, 그 자리에 노골적인 테크노크라시와 조지 오웰식의 감시 사회로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붕괴했다"는 서사를 체념하게 될 것입니다.
               

- 카플란의 이 글은 첨예한 역사를 바탕으로 국제 질서에 대한 냉혹한 서사처럼 예견되었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이보다 더 비관적입니다. 전혀 성찰하지 않고 더이상 글을 보지 않는 엘리트 계급이 (그 무능에서 분화되어) 기술 엘리트들에 의한 야만 (예를 들어 AI에 의한 인간지배)과 그 과정에서 군중에 의한 정치 붕괴, 그리고 그런 정치 붕괴에서 테크노크라시에 의한 다수를 향한 폭력적 지배 내지는, 여기에 더해, 국제 정치에서 예견되지 않은 푸틴의 몰락이 초래할 혼돈의 무질서를 경고하고자 쓰여진 글로도 해석됩니다. 독재 국가 러시아의 정치적 쇠퇴가 마냥 기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자는 논증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역사와 정치가 혼합된 이런 식의 수많은 인용들이 이어지고, 그 흐름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된, 그 '경고할 만한' 미래는 마치 지그문트 바우만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저자는 분명하게 정치 질서와 군중이 아닌 시민의 정치를 기대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와 그것이 바탕이 되어 '통제'가 될 수 있는 세계를 원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솔제니친은 정책 결정권자나 지식 엘리트들이 때때로 피하고 싶어하는 구체적제니친은 정책 결정권자나 지식 엘리트들이 때때로 피하고 싶어 하는 구체적 실상의 가장 명백하고 필연적인 측면에 집중한다.

민족주의자인 솔제니친은 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러시아 군대의 참해에 슬퍼했겠지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있는지 예상하는 데 있어 과연 지금의 우리가 1917년의 러시아인들이나 1914년의 유럽 전체,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의 독일인들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팔라비 왕조가 왕좌에 남아 있었다면 이란은 20세기 후반에 친서방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하고 경제적으로는 중동판 한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본질적으로 국가의 감시 밖에서 국가의 허락 없이는 인간의 모든 행동, 심지어는 생각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전체주의는 근대의 산물이다.

그런 무기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그의 언급만으로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무기의 종류에 극도로 신중을 기했으며, 궁지에 몰린 푸틴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전쟁을 끝낼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했다.

러시아는 의도적으로 대규모 유럽 민간인을 상대로 하는 한계가 거의 없는 전쟁을 추구했고, 이는 안타깝게도 조직적 대량 살상의 성향이 여전히 인간 종의 특성임을 보여주었다.

아이젠하워는 속도가 훨씬 느렸던 1950년대에도 대만이 점유하고 중국 본토가 영유권을 주장했던 대만 해협의 금문도와 마조도의 운명을 두고 중국에 핵공격을 감행할 뻔했다.

세계가 바이마르 공확국과 같은 상황으로 축소되면서, 점점 긴밀히 연결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아프리카의 이른바 오지들이 과거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목표는 실제로는 지식이 거의 없는 부분에서 지식이 있다고 착각하는 엘리트들의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서구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가 그 어떤 실질적인 경쟁자의 도전도 없는 미국의 비호 아래 전 세계를 장악하는 과정에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러시아의 극심한 약세와 중국의 거대한 해군이 향후 10년 동안은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간인을 대상으로 삼은 하마스의 잔혹한 공격과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대응은 원초적인 힘이 유엔이나 G20과 같은 단계에서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정기적으로 내놓은 미온적인 결의안보다 얼마나 더 강렬한 것인지 보여주는 징후다.

국가들, 특히 민주주의 국가들은 어느 정도 국민의 수준을 반영하는 지도자를 얻는다. 인쇄물과 타자기 시대에 미국은 잘 기능하는 대중 민주주의 국가였다.

푸틴 자신처럼 개인의 자유보다 민족 정체성을 중시하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과 프랑스의 마린 르 펜과 같은 유럽의 포퓰리즘 지도자들을 부추겨 유럽을 분열시켰다.

푸틴의 궁극적인 몰락은 안정적인 민주주의보다는 무정부 상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며, 혼란스럽고 규정하기 힘든 정치 상황으로 번질 가능성은 그보다 크다.

완전한 진실이 드러나기에 앞서 거짓말이나 반쪽짜리 진실이 군중 속에서 확산되어 진실이 밝혀졌을 때는 이미 명성을 회복하고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극도로 편협한 시각을 가진 전문가, 때문에 폭넓은 독서를 한 슈팽글러보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나치즘과 공산주의는 두 가지 결정적인 요소를 공유했다. 군중속에 있을 때의 안정감과 순수성에 대한 열망을 말이다.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오웰과 헉슬리가 묘사하는 세계는 슈펭글러가 말하는 서구의 쇠퇴이며 카네티가 말하는 군중의 폭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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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신하는가 - 우리가 법을 믿지 못할 때 필요한 시민 수업
신디 L. 스캐치 지음, 김내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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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디 L. 스캐치는 1967년 생으로 미국 시카고 근처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녀는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마친 후, 컬럼비아 대학과 명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수학했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하버드 대학에서 10년간 강의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비교정치학 및 법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볼로냐 대학 교수이자, 킹스 칼리지 런던의 법학 명예 교수입니다. 특히 스캐치는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법률 이론가이면서 비교정치학과 헌법학의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쌓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How to be a citizen"으로 지난 202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우리에게는 꽤 유명한 정치인과 모 정치 유튜버의 짤막한 소개가 실린 이 책은 역시나 기존 원제와는 맥락이 완전히 다른 자극적인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는데요. 본문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원제가 취하는 본래 의미는, "극단주의 시대에 어떻게 우리는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있는가"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저자는 글의 결론에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수칙"을 담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었는데요. 물론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자리매김이 필요하다는 점과 더불어, 저자인 스캐치는 그 과정에서 헌법과 시민의 삶에 뿌리 내린 법의 의미와 그 한계에 대해서도 명확히 하고 있었습니다. 저자와 같은 학자가 지난 자신의 경력에서 오래도록 헌법을 연구한 학자가 법에 대한 어떤 고유한 인식을 갖고 있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많은 헌법학자들이 평범한 시민들이 주도하는 정치나 권력 체제에는 상당히 불신을 갖고 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정치 엘리트들에 의한 '위에서 밑으로의' 정치를 선호하며, 이와 같은 일종의 엘리트 지배 체제를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저들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식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여기에 더해 헌법이 민주주의의 조력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헌법이 민주주의 정치에 우선하느냐, 이런 첨예한 논란이 있는 점도 부정할 수 없을 텐데요. 하지만 이 글의 저자는 아주 명확하게 민주주의에 있어, 헌법의 한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회 문제나 정치적 이슈, 혹은 시민들의 삶과 관련하여" 법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사실상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제가 글을 쓰기도 했던 벤 앤셀의 논저에서, 앤셀 역시도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과도한 신뢰 내지는 의존"은 우리들의 정치를 병들게 할 수 있다고 첨언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스케치도 이 부분을 정확히 반복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1장과 2장의 본격적인 논증 가운데, 저자가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들이 정치 엘리트들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나머지, 대다수 시민들이 그저 방관자적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으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그런 연계로 오래된 체계로 성문화 된 법이 나날이 변질되는 세속의 체계를 매번 따라가기란 당연히 쉽지 않은 문제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이 주도하느냐 아니면 우리 시민이 주도하느냐"에 있어서는 당연히 법이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평범한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를 주도하고 (위임된 정치인들을 철저히 규명하는 것에서부터) 체제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주요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도 거의 분명합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이런 일관된 논점을 보이고 있는 저자에 대해선 확실히 그녀 스스로 민주주의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법으로 돌아와, 우리가 이미 인지하고 있듯, 헌법이 민주주의 사회에 갖는 의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텐데요. 2장의 서두에서, "법이 시민을 죄 없는 방관자로 만든다"는 분석을 우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선 1부의 결론에서, 코로나 확산의 시점에서, 일부 사람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법률과 헌법은 항상 토론과 논쟁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지점의 맥락은 저자의 말마따나 "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법에 너무 의존해 왔다"는 저자의 성찰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법이 왜 많은 시민을 죄 없는 방관자로 만들고 있는지도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법은 시민들을 죄 없는 방관자로 만드느냐에 대한 질문의 근본적 원인은 "시민의 개인주의화 혹은 사회 내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의 무분별한 양태"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시민을 그저 개인에 국한된 소비자"로 몰고 갔다는 평가와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의 대미에서 저자는 이 글이 "신자유주의나 무정부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을 긋기도 했는데요. 다만, 전자의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시민들의 어떤 자발적 질서에 의존한다고 평가한 것은 다소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신자유주의적 사회라고 하더라도 신자유주의 자체가 정치까지 전부 아우르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신자유주의 경제 기반의 조력을 제공하는 제도적 기반으로 이해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공개 석상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입으로 민주주의를 말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강고한 신념을 가졌다고 볼 근본적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마땅한 개인의 이익과 선택의 자유라든지, 삶에 있어 그 누구가 아닌 자신이 '주인'이라는 거창한 정당성을 추종했을 뿐이지, 이러한 관념들을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이익에 수렴한 무언가로 포장할 필요도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미 이 글의 1장에서, 공동체적 삶을 기반으로 좋은 세상을 만드는 선결 조건들 가운데, "삶의 극심한 사유화와 이기적인 태도를 파괴하는 것"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반하는 신자유주의의 밝혀진 관념들은 그것을 추종하는 자들이 반복하는 '합리적 기반의 사고'임이 명확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도 드러나지만 1장에서,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발생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거의 폐허로 만들 때, 부시 행정부의 정실 인사가 어떠한 무능을 드러냈는지 여실히 목도한 바가 있습니다. 오히려 저자의 언급대로 그때 이름 모를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들의 이웃을 구한 사례는 2장에서 은연중 언급되는 '개인주의적인 극단의 사회'와 절묘하게 대비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민주주의 체제 하의, 노골적으로 뿌리 내린 무엇보다 우선하는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념이 그토록 두려운'홉스주의적 세계'로 근접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사실상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는 아무리 확고한 헌법의 체계가 가능한 세계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이익과 그것에 바탕을 둔 권리의 이행이 엄연한 민주주의 체제에서, 속세적으로 (저자의 표현에 따라) 불평등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사소한 자유, 혹은 선택의 기로에서 중요한 삶의 전환이 되는 그 '선택의 자유'에서조차 매우 권력적인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결국 헌법의 한계라는 점은 다의적인 측면에서 이렇게 적지 않은 규모의 불편한 인식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연유에서, 2장에 등장하는 '조슈아 사례'와 더불어, "헌법은 질서와 정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설득력이 왜 그렇게 충분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례들과 시의적절한 논증 가운데, 저자가 밝히는 오늘날 쇠퇴한 집단의 권리, 모두의 이익이라는 중요한 가치의 재인식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지 가늠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자유 만큼이나 타인과 이웃의 자유도 중요하고, 마찬가지로 타인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는 자신의 이익 추구, 그리고 그런 이익 추구가 집단과 공통된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 기반에 머무르는 것이 무슨 괴랄한 이상주의의 등장이 아니라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치 마사 누스바움의 유사한 논리처럼 말입니다.

다시금 공공의 의미를 되살려 보자는 사회의 움직임 속에서, 저자 역시 일반 시민들의 연대, 혹은 연대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것의 일례로 3장에서, 한때 영국 런던의 낙후된 지역이었던 노팅힐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어진 어떤 '연대'를 소개합니다. 당시 정치권과 공권력의 다분한 의도로 벌어진 경찰과 낙인이 찍힌 주민들의 대립은 공권력을 두려워 하지 않고 서로가 연대한 시민들은 무고한 기소로 이어진 55일간의 재판에서 끝내 무죄를 선고 받게 됩니다. 이 재판은 런던 경시청의 노골적인 인종 차별에 따른 무리한 기소로 시작되었는데요. 당국은 영국의 예전 식민지 출신들에게 "위법하고 반사회적인 행동이 있었다"는 누명을 씌우기에 이릅니다. 만약 지금이었다면 런던 시민 사회가 들불처럼 일어났을 법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글에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월가의 경제 엘리트들이 도덕적 해이로 인한 방만한 금융 투자 및 무분별한 증권화로 인한 붕괴의 책임을 그 누구도 지지 않았다는 사실 (오바마 정권이 이들에 대한 사실상의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에)에 '월 가를 점령하라'는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 자발적 시민 연대에 대해 노엄 촘스키도 자신의 글을 통해 평가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때의 시민들 역시 모두가 동등하고 능동적인 의지로 사실상의 '개방된 연대'에 나선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글의 후반부에서 저자인 스캐치가 이 사건을 잠시 망각해, 그저 '신자유주의의 이상'을 내뱉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모든 시민들이 연대에 이르게 될 때, "함께 공유된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을 넘어서게 되고, 인종, 종교, 성별 등 분열을 초래하는 차이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장 중요한)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중요한 맥락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물론 앞선 강력한 연대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광장'의 역할이 중요할 텐데요.이 광장이 시민들에게 실효적인 의미를 갖기 위해 저자는 바로 2장에서, "열린 소통과 공동의 지식을 형성하는 공적 토론과 숙의, 참여에 필수적인 정보의 자유롭고 정확한 공유를 장려하는 공공의 물리적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토론과 숙의라는 민주주의가 견실해 질 수 있는 조건의 문제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고민한 이래로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를 강조해 왔습니다. 하지만 마누엘 카스텔이 예견했던 바와 완전히 다른 측면으로 앞선 '오프라인 공론장'과는 복합적으로 변질된 양상의 '온라인 공론장'은 극단주의의 온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전에 일독했던 재런 러니어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개인 정보의 무분별한 유출, 그리고 이를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인터넷 기업들의 행태 등은 온라인 상에서의 인종 차별과 구별짓기 및 이를 통한 증오 확대와 맞물려, 거의 조장되어 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3장의 논증처럼 우리에게는 완전히 다른 '광장'이 필요한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이는 하버마스가 "모든 시민들의 접근권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선제적 선언이 민주주의적 광장의 실제 항유할 수 있는 계층이 저자의 말마따나 '백인 남성들'에게 국한되었던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광장은 모든 인종과 성별, 종교를 초월한 완전히 열린 광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다양성의 원칙에 부합되는 것이고 시민성과 시민의 자정 능력이라는 것이 이러한 원칙 하에 재배치 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토론과 타협이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의 급을 정해 놓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민성이라는 부분에서 모두가 평등한 단계에서 서로의 의견을 묻고 듣는 과정이 이 광장이라는 공론장에서의 중요한 원칙이며, 시민 모두에게 광장이 편안함과 안정감을 줄 수 있어야만 사적 영역의 분리든 공적 영역의 재정립이든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고유한 정체성이 타인에게 폭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법보다 먼저 타인과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바로 4장에서 인용된, "홀로코스트를 통해 인간 생명이 경시되는 장면을 목격한 후, 독일의 법률 제정자들은 전후 정치 구조의 최상위 가치를 인간의 존엄성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의미심장해 보였습니다. 즉, 다른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사회에 주지시키고 우리가 편협한 정체성 정치에 빠져, 스스로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에 나서게 됨을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저자는 '관용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지만, 나르시스트 정치인과 그 기반의 폭력적 정체성에 완전히 세뇌된 일부 시민들이 스스로 개심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명확합니다. 그럼에도 각자가 각자의 음식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처럼 만약 평범한 시민들이 타인과 이웃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면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완전히 이론적이고 상아탑의 논리와는 그 궤가 약간 다르지만 저명한 '헌법학자'가 자신의 입으로 내뱉는 제안들과 그동안 민주주의에서 잊힌 고유한 가치들을 스스로 손을 세워가며 제시하는 장면은 그래도 인상적이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총기를 든 트럼프 지지자들이 도널드 트럼프와 스티브 배넌에 의해 획책된 미국 의회 난입 사건과 같은 반란에 헌법학자인 저자가 다소 의뭉한 태도를 보인 점은 글의 오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거의 반동이나 다름 없는 폭력적 행위를 일삼는 무리들을 수치화된 관용의 잣대보다는 법의 자비없는 일관된 판결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헌법학자가 이런 속세에서의 관용과 법의 적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나날이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현실은 그녀 역시, 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민성의 부재라든지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시민의 '아노미 상태' 따위가 아니라, 극단주의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 엘리트들과 여기에서조차 쏠쏠히 이익을 얻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책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큰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69, 198, 199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의 계약, 즉 국정을 운영하도록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권력을 가진 자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시민들 사이의 계약으로 이해된다.

어쨌거나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부 형태 가운데 그나마 가장 덜 나쁜 체제며 군중 통치보다는 낫지 않냐고들 한다.

다만 필요한 것은 두려움과 소외, 계급과 인종적 장벽, 그리고 삶의 극심한 사유화와 이기적인 태도를 파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타인의 권리가 보호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자신의 권리 행사를 언제 제한할지 그 시점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된다.

민주주의의 성패가 근본적으로 의회 의원들의 역량이나 제도의 질이 아닌, 시민들 사이의 수평적 유대의 수준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과 캐나다, 스페인에서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까지, 모든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하위 집단들 간의 긴장으로 인해 일어난다.

이러한 시민적 덕목과 선의, 특히 나와 다른 방식으로 쌀을 짓거나,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 등 이민자와 같은 타자에 대한 태도는 항상 가장 까다로운 문제였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영국에서 진행된 300여 명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 95퍼센트가 사법 시스템에서 인종적 편견이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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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왜 실패하는가 - 분열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문제 제기
벤 앤셀 지음, 박세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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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팔로알토에서 태어난 벤 앤셀은 유년시절은 영국 켄트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2000년 영국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UC 버클리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 후 앤셀은 하버드 대학으로 옮겨 박사 학위를 통과하고 그의 논문은 미국 정치학회 정치경제학 분과에서 수여하는 2011년 윌리엄 라이커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습니다. 2006년부터 2013년까지 미네소타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던 그는 2013년 7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너필드 칼리지에서 비교민주제도학 교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또한 미국의 정치학자인 데이비드 사무엘스와 함께 『비교정치학 연구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의 공동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영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다양한 논문을 발표했고 그의 주된 관심사는 교육 정책의 정치학, 불평등과 민주주의 관계, 그리고 자산 가격 인플레이션이 정치적 선호에 미치는 영향 등에 있습니다. 근래에 그는 영국 재무부와 영국 정부의 장기 교육 정채 자문을 담당했던 레이치 기술 검토 위원회에서 학술 컨설턴트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hy Politics Fails"로 지난 202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벤 앤셀의 이 글은 약간의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구성되어 논증 전반은 꽤나 평이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책에 등장하는 사례 대부분이 근래의 정치 동향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읽는 재미를 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자인 벤 앤셀은 아주 명백하게 확고한 민주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겠는데요. 그는 전반적으로 민주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드러내는 동시에,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그로 인한 정치적 실패 및 노골적인 불평등 상황이 지속되게 된다면 사회가 과두제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일전에 접한 가렛 존스와는 완전히 다른 의견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결국 민주주의 자체는 결함이 많은 체제이지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정치 체제는 현재 전무하다는 점에서 다수 시민들의 이익과 생활상의 안전, 삶의 지속성을 위해서는 이 민주주의 체제가 거의 최선임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의 실패', 즉 다른 말로 민주주의의 약화는 정치적 혼돈과 불평등의 심화로 비롯되었습니다. 이에 앤셀은 정치적 혼돈과 관련하여, 현재 전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극단주의의 발호, 혹은 극우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근본적 원인은 건전한 시민들이 분별력을 갖고 어느 정치 세력을 지지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 정치 세력이 싫고 증오하기 때문에 소위 "저쪽이 싫어 이쪽을 지지하는" 형태의 정치 기반이 현실 정치를 사실상 수렁으로 몰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의 사례에서도 현제 20대에서 30대의 남성들이 그저 민주당이 싫어서, 상대당인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양상과 아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글의 서두에서 이러한 지지 혹은 선거에서의 투표 행위가 사실상 현재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저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1부를 규정하는 전체적인 맥락인,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 과제"라는 저자의 평가에도 역시 긍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는 정치 상의 여러 선택지의 선후 문제보다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가 추동한 '개인의 이기심'을 기반으로 이 정치를 분석해야만 한다고 저자는 거듭 강조합니다. 여기의 미국 정치를 엄밀하게 분석해 본다면 작금의 미국 민주주의가 의회나 행정부를 거치는 정치인들의 '정치적 이익'과 '당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여기에는 자본가들이나 부유층의 이익, 그리고 사회 선두에 있는 엘리트 지배 계급의 이익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자인 벤 앤셀은 이러한 구조적인 측면에 놓여 있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좀 더 규명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는 다수 시민들의 슬기롭지 못한 선택과 지향성에 대해서도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현재 인터넷 공론장을 비롯 개인 소셜미디어가 자정 능력을 아예 상시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고, 또한 여기에 자신들의 이익이 결부되어 있는 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사실상 민주주의에 반하는 기업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은 미국이 왜 신자유주의 국가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로 생각합니다. 여기에 첨예한 "양극화는 혼돈과 더불어 교착 상태를 유발하고 증오를 불러 일으킨다"는 1부 3장의 분석은, 미국 정치의 일반적인 일상을 넘어,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될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일전에 일독했던 프리데만 카릭 역시, 2018년 이후에 전세계에 불어닥친 극단주의의 범람에 우리의 정치적 환경이 어떠한 문제에 놓여 있는지를 심각하게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1부 후반부에 도출되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전반적인 민주주의 내의 갈등, 의견 불일치, 실질적 자율 통치의 회복 불가 등을 개선시킬 수 있는 해결책으로 읽힙니다. 또한 시민 모임을 통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페이스 투 페이스'로 간극을 좁히는 노력 역시, 매우 시급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결과는 서로를 약화한다"는 2부의 테제는 저자의 다른 말로, '평등의 덫'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14년에 미국 전체 소득과 관련하여, 상위 1퍼센트가 전체 소득의 20퍼센트를 차지했고, 하위 50퍼센트가 12퍼센트를 차지했다는 지표는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 내의 불평등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한 데요. 일전에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를 독려하기도 했던 노엄 촘스키와 여기에 참여한 이들이 '우리가 99퍼센트다'라는 슬로건은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정치권과 경제 엘리트들을 향한 목소리였습니다. 일반적인 부유층들과 기득권 세력들이 토머스 홉스의 불편한 무대처럼, 국가가 나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짓밟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들은 몇 세기에 걸쳐, 민주주의를 지지해 왔습니다. 더욱이 미국 건국의 기초를 쌓은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의 세밀한 국가 조직은 이러한 기반에서 잉태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현실 인식에서 조차 우리는 '무엇의 평등'인가를 개념화 하여, 수많은 지식인들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분명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양 날개로 현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평등의 인식'자체는 거의 부정되어 왔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평등을 추동하는 경제적 평등의 실패, 즉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2부 6장에서, "소득 수준 만을 놓고 본다면 대부분의 부유한 국가들에서 높은 수준의 불평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분석은 실로 문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불평등의 기조가 계속 지속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결국은 '과두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두제 상황에서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들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을 예견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반대로 다수 시민들은 권력과 유리 되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겁니다.

물론 2부 후반부의 논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란 어려울 것이라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이하의 논증에서 경제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을 사실상 압도하기란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가진 자들의 부를 정부의 힘으로 빼앗아 소득을 평등하게 만드는 일도 역시 어려울 것입니다. "평등한 경제적 결과를 위해서는 자본주의 수혜자들이 이익을 포기하도록 강제해야 하고, 잠재적으로 그들의 평등한 경제적 권리를 제한해야 하지만 민주주적인 자본주의의 핵심은 이처럼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긴장 자체가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는 메커니즘 자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예로, 우리는 그저 평등의 신성함을 말로만 고수하면서, "자본주의가 멋대로 움직이도록 방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철저한 승자 독식의 경제에 직면하게 되고, 이로 인해 소수 경제 엘리트들이 지속적인 로비 활동과 언론 통제, 부패를 획책하는 등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왜곡하면서, "과두 정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연유 때문에 각 사회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텐데요. 부유층을 향한 실질적인 부유세는 물론, 사회 기반에 대한 투자와 특히, 레이건 시대 이래로 왜곡되어 온 조세 제도를 정상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엘리트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누려온 막대한 이익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붕괴시켜, 그 법적인 책임을 어느 누구도 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절호의 기회를 미국 정치는 잡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장의 결과'를 정치의 잣대나 법의 수단으로 단죄할 수 없다는 일종의 대마불사와 같은 관념은 여전히 타파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니 로드릭의 제안처럼 시장이 민주주의의 통제를 받게 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2부 8장의 지면은 경제의 실패 및 점증하는 불평등 상황에서 '부의 불평등을 줄이는 방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삶의 기준에서 드러나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투명한 조세제도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나름대로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억만장자들이 그들의 관할권을 쉽게 옮기지 못하도록 제한하기 위한 국제적인 협조가 필요하다"는 부분도 눈여겨 볼만한 진술이었습니다. 여기에 더 첨언을 하자면, 2부 8장에서, "민주주의가 분명 뭔가를 갖춰야 한다면 대다수가 소수의 부를 억제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니겠는가"라고 저자는 에둘러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앞서 언급한 조세 제도의 혁신도 그렇거니와, 우선적으로 저자는 "시장과 기술의 마법이 불평등을 줄여줄 것이라는 기대는 무모한 것"이라 일축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장했던 맥락과는 완전히 상반된 의견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사람들이 시장에서 더 높은 자유를 누릴수록 시장의 먼 꼭대기에 있는 이들은 더 많은 보상을 차지한다"는 숨겨진 진실을 은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기에 더해, 교육 기반의 개선과 모든 국민들이 실질적으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도 그것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가 유인했던 개인의 이익과 능력주의의 확대라는 기존의 철저한 관념을 재정립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고, "시스템 안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승자들은 일자리가 개인의 기술과 노력을 상징한다는 능력주의 주장을 자기 정당화나 설득의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 체제를 구조적으로 축소시키는 능력주의에 대한 재인식과 시민들의 인식 전환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다수 시민들의 연대는 매우 중요합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그것의 대책 마련을 위해 당시 시민들이 결집하여 연대했던 이유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는데요. 여기에 더해 '자신들의 삶의 지속성'을 위해서도 뉴딜 시대의 복지 국가 정체성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마틴 길렌스를 통해 언급되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가난에 검은색을 더해, 복지 자체를 터부시한"공화당 정치와 거기에 매몰된 미국 시민들의 맨 얼굴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후에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더욱 조장 되었지만, 이는 단순히 '복지'를 악으로 규정한 것 이상의 사회적 파급을 초래합니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서 거리를 둬야 한다는 저들의 논법이 결국은 "모든 책임은 그 자신이 져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언 명령을 확산 시켰습니다. 1980년대를 가로지르는 미국의 가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같은 철저한 개인주의의 숭배와 "모두의 삶이 이와 같아야 한다"는 폭력성은 결국엔 보통 시민들의 험난한 인생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 사회는 병리적으로 인종 차별 문제와 성차별 인식이 '자연 상태'의 그것으로 인지 되었고, "너희는 너희대로 살고 우리는 우리 식으로 살겠다"는 사회가 구조적으로 분리되고 결합되지 못하는 파쇄적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 '시민 연대'가 필요했지만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가능성 조차, 현실이 거부하는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저는 저자가 조심스럽게 언급하는 시민들이 자신이 필요할 때만 연대하게 된다는 일종의 제한적인 인식에 반대하는 편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연대를 통한 보상 심리의 기계적 작용 따위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시민들이 단합하고 연대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의 이상과 어긋나는 현실 조건으로 거부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선상에서 극단주의 정치가 이익을 얻게 되는 구조로 이어지게 된 연유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벤 앤셀의 이 책은 민주주의가 스스로 가능성을 펼쳐내, 자연스럽게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실패를 다룬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제 발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의 실패'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양한 참여자의 노력도 필요하고 견실한 제도의 구축은 물론 충분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단순히 인도와 같은 '선거제 전제국가'로 국한된, '무늬만 민주주의'로 떨어지지 않게 면밀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시민의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 여전히 모호하기는 하지만 건전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자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앞선 민주주의를 병들게 만드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나 이것이 원인이 되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극단주의의 대두는 '인식의 연계'처럼 모두를 살펴봐야, 그것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겠습니다. 민주주의의 중심축인 시민들은 물론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과 정치를 좀 더 투명하게 만드는 정치 제도의 개선, 그리고 이러한 기반 하에, 시민들이 주축이 된 올바른 여론 형성과 그것에 신경을 쓰는 정치인들, 이들 모두가 함께 삶의 안정을 기대할 수 있도록 경제적 보장에 힘쓰는 '공익에 힘쓰는 경제 엘리트들 (물론 어감상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로 더해져야 하겠지만 이는 어찌됐든 저의 터무니 없는 기대에 불과합니다.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저로서는 다소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우리가 서로를 증오하는 데 골몰하여, 그저 기득권의 밥그릇을 지키는데 이용되고, 극단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으로 스스로의 지위를 '제한'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그만큼 암울할 것입니다. 

- 극단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기존 엘리트들을 "높은 교육 수준의 부유한 자유주의 엘리트 카르텔"이라고 공격해 왔는데요. 일전에 신보수주의자들은 단숨에 신자유주의자들과 타협했지만 극단주의자들은 기존 체제를 불신하기 때문에 또한 이런 목적을 위해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능수능란하게 거짓과 허위의 외피를 두르고 철저히 체제와 인간을 이용하는 기술로 보건대, 인류의 역사에서 쉽게 볼 수 없던 자들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비록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여전히 우리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하고 있지만, 사람들을 구조적으로 불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이는 거의 없다.

최고의 방법은 정치적 제도(공식적인 규칙과 원칙)와 사회적 규범(행동 방식에 대한 비공식적인 기대)을 구축함으로써 약속을 영구화하는 것이다.

부유한 이들은 일반적으로 낮은 세금과 낮은 공적 지출을 선호한다. 반면 가난한 이들은 높은 세금과 높은 공적 지출을 선호한다.

오늘날 우파와 좌파 진영의 포퓰리스트들은 기존 정치인들을 모두 제거해야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늪에서 물을 완전히 빼내야 한다고 말이다.

전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부유한 이들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 국가가 전제주의 국가보다 부자의 재산권과 자유로운 발언권을 더 효과적으로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쪽 극단에는 사람들에게 평등한 경제적 권리를 허용하고 시장이 가능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거대한 경제적 불평등과 자기영속적인 엘리트 집단의 위험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있다.

민주주의 불평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민주적인 정부는 대중에 의한 통치, 구체적으로 말하면 앞서 민주주의의 덫에서 살펴본 ‘중위투표자‘에 의한 통치를 뜻한다.

민주주의가 분명 뭔가를 갖춰야 한다면, 아마도 대다수가 소수의 부를 억제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닐까?

모든 기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로봇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만으로는 기업이 근로자 교육에 매진하도록 설득할 수 없다.

시스템 안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승자들은 일자리가 개인의 기술과 노력을 상징한다는 능력주의 주장을 자기 정당화나 설득의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다.

20세기 동안 연대주의 국가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뛰어들었던 이유는 바로 그 가난한 이들이 정부를 구성하는 일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집단 내부의 행동에서 외부 민족 집단에 대한 태도로 시선을 돌려보자, 민족적 다양성이 연대를 약화하는 한 가지 간단한 이유는 민족 집단끼리 서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시적인 차원에서 다양성을 바라볼 때, 사람들을 서로 다른 집단으로 분류하는 이런 행태의 ‘구조적인‘논의는 인간을 평등하게 바라봐야 하는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이들보다 중산층에 특히 관대한 (실질적으로 더 나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사회복지제도는 정치적으로 더 안정되고 연대는 더 단단해진다.

미국은 흔히 말하듯 오롯이 혼자 힘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나라가 아니다. 다만 그 방안은 더 높은 정부 지출이 아니라 더 낮은 세금으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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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의 귀환
샹탈 무페 지음, 이보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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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6월 17일, 벨기에의 샤를루아에서 태어난 샹탈 무페는 세계적인 정치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로, 당대 지식인들 가운데 급진 민주주의 모델을 가장 옹호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1964년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이후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영국의 국립대학인 에식스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MA) 과정 이수를 거쳐, 평생의 학문적 동지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만나게 됩니다. 현재 그녀는 영국의 공립 연구 대학인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데리다와 그람시를 비롯, 포스트구조주의 정체성 이론을 바탕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했습니다. 또한, 급진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좌파 정치를 재정의하기도 했는데요. 지금까지 그녀의 이름을 가장 잘 알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은 전세계에서 많이 언급되고 인용되는 저서이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할 이 책의 큰 골자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롤스와 드워킨을 비롯한 숙의 민주주의의 비판적 분석, 그리고 칼 슈미트를 인용하며, 자유주의가 갖는 한계, 그런 인식 속에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The Return of the Political"로 지난 199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7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상탈 무페의 이 글은 소위 자유주의의 승리로 일컬어지는 '냉전의 종식'에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극우의 준동 및 전체주의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떤 길을 가야만 하는가"라는 시대적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페의 논증을 통해 드러난, "자유주의가 시민의 도덕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는 결론에 깊게 수긍하면서, 앞선 전체주의의 재구축 혹은 부활을 막기 위해서는 8장의 도출된 해답처럼, "진정한 민주적 다원주의를 창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물론 여기까지 이르는 일관된 주제 의식과 관련된 여러 의견 교환과 분석 전반의 논증 들은 독자들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정치학과 정치 이론 및 정치 철학의 기본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쉽게 일독할 수 있는 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무페가 이미 1990년대에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세계가 안고 있는 인식과 환경의 불일치, 사회 각각의 심각한 갈등 요소, 그리고 시민들의 도덕성 결여가 자유주의가 기본적으로 안고 있던 노골적인 개인주의화에 따른 파급으로 비롯된 문제라는 점을 밝히고 있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첨언을 하자면, "더 이상 자유주의가 사회의 아우르는 만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시민들이 빠르게 인정하고 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페가 그녀의 다른 논저들을 통해, 밝힌 '급진 민주주의의 모색'은 그런 연장선 상 안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무페가 거듭 인정한,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분리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런 이론적 획책은 이들의 이익을 위해 손쉽게 이행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등의 문제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있어 핵심 요소였음에도 불구하고, 평등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조장을 확산시켜 왔습니다. 이미 무페는 이 글에서 카를 슈미트를 빗대어, 자유주의자들이 모든 시민을 동등하고 평등하게 대할 것을 어떤 선언적 의미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사회는 사실상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는데요. 물론 존 롤즈의 주장을 끌어들여 자유 만을 강조했던 자유주의의 노골적인 개인주의화가 결국에는 입에 발린 사회 정의조차도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우리가 홉스 시대를 거치면서 인식하고 있던 공동선의 문제에 있어서도 사실상 민주주의 체제가 이런 공동선, 공동 이익에 대한 실질적 안배에 실패하게 됨으로써, 결국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제한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선 무페의 분석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분리하려고 했던 움직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가렛 존스와 같은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과잉'이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미국 자유 민주주의의 소산이라 수식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다른 말로 존 롤즈가 추동한 그의 학문적 작업이기도 한 자유주의적 철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미국 사회의 자유주의적 방향성을 먼저 선점하고 싶었던 롤즈의 열망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됐든 그의 작업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과 반대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무페 역시 존 롤즈와 드워킨, 매킨타이어를 인용하며 결정적으로 '자유주의 관점의 한계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롤즈는 자신이 살아있던 거의 직전까지 '정의론'이 도덕철학에 속한다고 주장하기는 했으나 엄밀히 따지면 정치학과 정치철학 및 인간철학에 관여된 복잡한 양상의 논의였습니다. 자유로운 다수의 시민들이 자유주의적 관념 내에 합리적 이익 추구를 바탕으로 사회를 정의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막연한 주장은 그것의 진위 여부를 떠나, 확실히 이런 논리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총아라고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예로 '복지 국가'를 아예 퇴출하고 싶었던 (물론 성공했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지와 관련된 담론에 대해서도 저런 유사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물론 무페가 간접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이 장의 비판적 논의들이 '자유주의자 대 공화주의자'의 형태로 롤즈의 주장을 섭렵하여 확대된 사회 정의로 나아가는 가능성이 왜 자유주의적 관념에서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지를 공화주의적 세계관이 이에 반대하는 모습은 어느 정도는 꽤 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일전에 읽었던 필립 페팃의 '공화주의적 자유'를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공화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자기통제적인 공동체"라는 선결 조건은 그만큼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마키아벨리에게 시민덕의 실천과 공동선에 대한 봉사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목적 추구를 허용해 줄 인격적 자유의 정도를 우리가 보증하기 위해서다"라는 2장 말미의 인용은 그만큼 현실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능 정도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스스로 가늠하게 만듭니다.

이어지는 3장의 논증에서도 그렇지만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적 다양성, 즉 민주주의 체제 내의 다원주의적 토대의 확대는 자유주의가 거의 용인했다고 봐도 무방한 공동선의 추방에 따른 그 결과로 정치와 도덕의 배제가 치른 대가를 최소화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시민 사회 내의 갈등 문제나 정치적 문제를 종교의 교리처럼 이해나 화해의 수단으로 덮어나가는 것이 세간의 다원주의의 요구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은 모두가 알 것입니다. 저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바로 다원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를 좀 더 확대해 본다면 개인의 도덕적 본성과 민주적 다원주의는 서로 밀접할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계몽주의 시대에서 강조한 도덕의 본성이라는 것이 이처럼 각각의 맥락에 서로 얽혀 있다고 판단됩니다. 다시 롤즈로 돌아와서, 그가 강조한 정의의 문제가 진실로 도덕의 문제라고 이해했다면 옳음과 정의의 우선적 실행은 양자 모두가 도덕적 목표들 가운데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덕적 본성에 추동한 시민들이 정의의 문제에 눈을 감지 않게 되는 것은 옳은 결정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정의관을 무페의 제언처럼. "엄격한 정치적 지반 위에 둘 수 있게 하는 조건들을 확립"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거의 2세기에 걸쳐, 자유주의자들이 구축한 국가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중립'의 문제 등 이러한 배경에서 오랫동안 선으로 여겨져 왔던 개인의 선택과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덕적 본성을 구축한 시민들의 자기 제한적인 결정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립처럼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런 정의의 물음조차도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거의 시녀로 거느리게 됨으로써 발생된 가치 정복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유주의에 있어 '자유'가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원래 자유 민주주의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 두 가지의 정치적 원리를 긍정하고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2장에서, "평등이 우리에게 핵심 목표인 이유는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이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적 시민관이 문제가 많다는 점은 무페의 일관된 논증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시민관이 사회 내부에 제대로 뿌리 내린 것을 차치하더라도 우리 시민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가 2세기나 이어진 시민 사회의 건전성을 요구하고 다양성의 논리를 중요하게 개념화시킨 점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4장의 "다원주의의 옹호, 개인적 자유의 관념, 교회와 국가의 분리, 시민사회의 발전, 이 모든 것이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구성 요소"라는 일련의 열거들이 이 체제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깨닫게 되는데요. 이런 진술을 토대로 저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협력해야 하는 서로 동등한 개체이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종속시키고 자신의 원리를 위해, 상대를 부속으로 만드는 것은 특히 시민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페가 아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유주의가 오늘날 나날이 축소되고 있는 다원주의 관념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거의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무페는 자유주의에 반하는 다수 공동체주의자들이 바라는 "민주주의의 정치 공동체가 단일하고 실체적인 공동선의 관념을 중심으로 조직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에 "개인적 자유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강한 참여를 주장하는 시민권의 관념을 회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대한 요구를 자신이 자유롭게 삶을 조직하고 자유를 누리는 권리에 있어 훼방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개인의 도덕성이 그 자체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 자체는, 자유주의가 공동체주의와 타협을 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저자인 무페는 4장에서 이 부분의 진술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지만 개인적 권리에 대한 과도한 특권화라든지, 자신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를 함께 고려하지 않는 행위 전반을 편파적인 관념화로 이어지는 사고 과정은 분명 지양해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현대 자유 민주주의 세계에서 일반 시민들은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부분의 권력 차이를 심각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공적인 영역에 대한 개인주의적 시민들의 태도는 다소 분명해 보입니다. 있지도 않은 '나의 권리 침해'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에 그만큼 민주 체제에서의 시민들이 인식하는 공적인 영역의 존재감이 옅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페가 이번 장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자유주의가 축소 시킨 정치의 영역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지 말고, 우리는 "일련의 윤리-정치적 가치들을 공통으로 인정하면서 서로 유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동안 많은 정치학자들이 애써 개념화한 시민권의 의무를 인식하는 데 중요하고 이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공적인 일이 만인을 위한 평등과 자유라는 자유 민주주의 채제의 정치적 원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물론 시민 사회 전반이 인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눈치를 챈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자유 민주주의에서 평등이 자유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평등의 제반 원리들이 민주주의의 다양성과 다원주의와 쉽게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의 2장과 4장의 전반적인 분석적 논조와 그에 따른 논증들이 단순히 민주주의를 강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외와 공동체주의가 대결하는 가운데 서로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다시금 살펴보는 것처럼, 결합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역시 놓치고 있는 부분을 생각해보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권력 관계의 구조를 이제는 적절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수많은 진술 가운데 드러나는 진면목이라고 여겨집니다. 결국 이는 체제와 이를 떠받치는 시민 사회를 새롭게 구축하여 분열되고 단절된 각각의 시민 사회 그룹의 연결성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극단주의의 파국에서 공론장의 확대나 혹은 정치적 편향, 혹은 과도한 정체성 정치를 제어하는 것 이전에 "왜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 기반이 강조하고 있는 기본 원리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런 범주 안에 우리의 행동 양식이나 각자의 관념 체계를 먼저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끝으로 샹탈 무페는 자신의 급진 민주주의 이론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적지 않은 분량에서 카를 슈미트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역겨운 이력 때문에 특유의 정치적 대결주의와 결단주의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무페는 슈미트의 이론은 오만하고 멍청한 자유주의의 과오를 돌아보고 이것을 토대로 견실한 민주주의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습니다. 슈미트가 불완전한 민주주의에 대해 냉소를 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민주주의를 부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 텐데요. 이에 8장에서, 저자는 "슈미트가 주로 반대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점은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고 첨언합니다. 여기에 슈미트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 자체로 자유주의가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단언과 이러한 연계에서 오늘날 자유주의가 침투한 정치 환경이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듭 반복하지만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정치 현상의 본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진술은 슈미트를 매개로 무페가 분석하는 우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적 사고가 그 개인주의로 말미암아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일맥상통한 부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페가 왜 급진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는지 이 대목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었는데요. 극단주의 세력이 아무런 지식 없이 자신들의 자유를 내세우며, 민주주의가 병들었다는 주장을 펼치는 대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교묘하게 이 자유 민주주의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무능한 자유주의와 그런 자유주의의에 종속된 민주주의가 작금의 극우 포퓰리즘과 극단주의 세력의 확대를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신물나게 들어온 기존 엘리트 체제의 극도의 혐오와 무능이 여기에 부채질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아마도 그렇기에 무페는 7장에서, 민주주의가 다원주의라는 외피를 둘러야만 한다고 강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저자인 무페의 중요한 생각들을 제 마음대로 재단하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에게  7장부터 9장의 내용들 만큼은 충분히 숙고하면서 일독해 보셨으면 합니다. 카를 슈미트를 쉽게 용서할 수 있을지는 개인의 몫이지만 그를 통해 바라보는 자유주의와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길잡이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페에게 있어, 자신이 사실상 고안한 '접합'이라는 용어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한 세기 가까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접합된 상태로 공존해 왔는데 그녀는 또 다른 의미로 접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가 다양성, 즉 다원주의와 접합하는 것을 긍정하면서, 여기에 과거의 공동선이 회복될 수 있느냐 (근본적이든 표면적이든 간에)는 이 접합의 기술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글에서도 등장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자유주의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접합한 문제를 무페는 어떤 사조의 구분 정도로만 짧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존의 자유주의가 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철저히 왜곡되었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단순한 서술의 기법이 놓여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슈미트는 우리가 친구와 적의 관계라는 정치학의 중심에 관심을 두도록 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적의의 요소와 연결된 정치적인 것의 차원을 알아차리게 한다.

근래에 신자유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은 자유 및 평등과 같은 개념들을 다시 정의하고 자유의 관념을 민주주의 관념으로부터 탈접합하려 하는데, 이런 시도들은 자유민주주의 전통에서 서로 다른 유형의 친숙성들을 활용하게 해 주는 서로 다른 전략들이 어떤 식으로 추구될 수 있는지를 입증한다.

마키아벨리에게, 사람들이 시민적 덕을 행사해야 하고 공동선에 봉사해야 하는 이유는, 자기 고유한 목적의 추구를 허용하는 특정 정도의 인격적 자유를 스스로에 보증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거의 동시에 ‘신자유주의자‘집단은 [존슨 대통령이 추진한] ‘위대한 사회‘의 재분배 정책을 공격했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의 늘어나는 간섭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들은 밀턴 프리드먼과 더불어 자유 시장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설교했다.

이 저자들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 사회가 겪는 위기는 사회적 유대의 파과에 있으며, 그렇게 된 이유는 개인들에게 자기 이익만 돌볼 줄 알고 자기 자유를 구속할지도 모르는 의무는 모두 거부하라고 자유주의적으로 선동했기 때문이다.

평등이 우리에게 핵심 목표인 이유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인데,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이 가치가 깊이 스며들어 잇는 제도와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가치를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반대로 공화주의 언어에서 자유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을 통해서만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는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관과 연결되어 국가의 통치에 참여한다.

여러 공동체주의자들은 인간 주체의 본성에 관한 특정 교리인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곤리의 옹호, 다원주의의 인정, 국가 역할의 제한, 권력 분립 등 ‘법치국가‘의 특징을 이루는 일련의 제도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자유주의를 구별하지 못한다.

물론 몇몇 자유주의자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자유 시장경제가 없이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유주의의 한 조류에 불과하다.

"정치적 정의관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종교적 교리나 철학적 교리, 도덕적 교리에 의해 정식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 사회의 공적인 정치 문화 내에 잠재되어 있다고 보이는 일정한 기본적 직관들로 정식화 된다."

롤즈가 공리주의자와는 반대로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들이 일반 복리를 위해 희생될 수 없으며, 개인들이 추구해도 무방한 가치관들이 무엇인지를 제한하는 역할을 정의 원칙들이 수행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급진 민주주의적 접근은 우리가 시민으로 행동하려면 끊임없이 조화해야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소실점‘이 바로 공동선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내가 주장하고 있는 접근 방식에서 급진 민주주의 시민권의 목표는 공동의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하여, 새로운 평등주의적인 사회관계들, 실천들, 제도들을 통해 접합되는 어떤 새로운 헤게모니의 살립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절대적 인간 평등, 즉 불평등이라는 필수적 상관물이 없는 평등은 그 가치와 실체를 강탈당한 것이어서 아무 의미 없는 평등이기에, 인류의 민주주의 관념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도전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정치 현상의 본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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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사회의 정치사상 - 루소와 스미스로 읽는 18세기 지성사
이슈트반 혼트 지음, 김민철 옮김 / 오월의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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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1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이슈트반 혼트는 헝가리 태생의 영국 경제사상 및 정치사상을 연구한 역사가였습니다. 그의 부친인 혼트 야노시는 1949년에 수립된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농무부 차관을 지냈으며, 모친인 케메니 클라러는 헝가리 최초의 여성 공학 교수였습니다. 1965년 일 년 정도의 군복무를 마친 혼트는 아버지의 남다른 조력에 힘입어 역사학과 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1974년 '데이비드 흄과 스코틀랜드'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곧 헝가리 학술원의 연구관으로 부임합니다. 그에게는 안정된 직장과 안락한 삶이 보장되었지만 스코틀랜드 정치경제사 연구에 대한 열망으로 말미암아 1975년 부인 안나와 함께 단기 일정으로 영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영국의 망명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근대사 석좌 교수였던 휴 트레버-로퍼의 지도 하에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혼트는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그는 1988년에 컬럼비아 대학의 정치사상 교수로 초빙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다른 역사가들과는 다르게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18세기 근대 국가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그는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와 같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상업, 민족주의, 국가 부채, 사치 사회 및 정치경제학과 같은 주제들로 여러 학술 논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litics in Commercial Society : Jean-Jaques Rousseau and Adam Smith"로 지난 201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혼트의 이 글은 자신이 탐구한 필생의 연구 실적과 마찬가지로, '근대 정치사상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을 학문적으로 통과해야 한다는 서문의 믿음으로 출간의 목적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저자인 혼트는 애덤 스미스 (1723-1790)가 장 자크 루소 (1712-1778) 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일독해, 추후 소감을 남긴 것에 주목하고, 당시 18세기에 비약적으로 경제 발전을 이뤄냈던 소위 '상업 국가'에 따른 루소와 스미스의 생각을 비교하여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책은 크게 두 개의 장으로 구분할 수 있겠는데요. 일반적으로 당시 대두하고 있던 상업사회에 대한 정치 및 사회에 대한 분석의 장은 1장부터 4장까지, 그리고 경제와 관련된 루소와 스미스의 논의는 5장과 6장으로 나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제 서평을 논외로 하더라도 5장과 6장은 여러분이 꼭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관련해, 5장과 6장에서는 스미스를 끊임없이 오독을 하고 있는 교조화 된 자본주의자들과 이데올로기와 다름 없는 경제학계의 그를 향한 편협한 해석의 원류를 간접적으로나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혼트가 6장에서, 사람들이 여전히 국부론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점을 꼬집고 그것의 일례로 "스미스가 국가의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식민지 체제를 이용하는 것에 반대했다"는 진술 자체는 작금의 학계가 이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퀜틴 스키너가 이미 밝혔듯이,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시작점은 아마도 홉스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홉스의 사상에 반대하려는 목적 그 자체 뿐만 아니라, 협소하게는 홉스가 펼친 국가론 (내지는 정부론)에 대한 명백한 이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정치와 정부에 대한 인식의 '다른 의견'은 소위 계몽주의의 초석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홉스 사상의 영향력은 여전히 지대하여, 1장에서 저자가 "일부 정치사상가들은 영어권 정치사상사 서술에서는 홉스에게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탄한다는 내용으로 갈음하고 있었는데요. 홉스는 아주 간단히 말해, 자연 상태의 인간들은 서로에게 늑대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모두를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홉스는 '인간의 원천적 사회성'이라는 관념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는데요. 여기에 고전 그리스 철학에 대한 당시 유럽의 맹신에 대해서도 반대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 아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는데요. 그러므로 앞선 계몽주의의 맥락은 이런 홉스의 사고와 완전히 상반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혹여 계몽주의가 후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영감이 되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그 당시 스코틀랜드의 사상은 "인간은 자기애에 기반하여 남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며 그런 욕구가 사회 내에서 남을 존중하고 규칙을 지키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인간이 자신 말고 타인을 신경 쓴다는 것 자체는 뒤이어 존 스튜어트 밀을 필두로 자유주의적 사상의 기반이 되기도 했는데요. 이에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사회 내에 합리적 가치 책정에 따른 효용에 대한 감각을 가진 시민들이 적절한 용역을 교환하는 행위를 통해 유지"되는 맥락의 '효용에 기초한 사회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스미스가 생각하는 사회의 규범과 질서 유지 및 도덕성의 관철에 이러한 시민들의 효용에 대한 가치 유지가 일정 부분 기여할 것으로 여겼는데요. 또한, 대표적인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저자인 혼트가 분석하는 바대로, 그것이 신의 전능과 그 영역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자들이 이 보이지 않는 손을 어떤 식으로 왜곡해 이에 "전지전능한"이미지를 부여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상업사회의 구조적인 안정은 "정념과 이익의 대조보다는 효용과 자존심의 상호작용이야말로 근대 상업사회의 안정화 요소"라는 부연 설명으로 개념화 할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이 점은 애덤 스미스의 남다른 통찰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렇게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18세기 상업사회의 정신적 기반은 바로 효용과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관련된 자존심의 발현이 그 근간이 되었습니다. 혼트는 이 점을 명확하게 밝히고 우리가 18세기의 상업사회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조언합니다. 다만, 애덤 스미스가 상업사회를 도덕성의 원천으로 분석하고 있었다면 (도덕감정론에 근거하여) 홉스주의자나 혹은 에피쿠로스주의자로 분류될 위협을 무릅쓰고 있었던 셈입니다. (스미스와 같은 계몽주의자에게 홉스주의자라는 타이틀은 분명 상당히 모욕으로 여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물론 홉스가 상업과 그 이익에 관련된 이해를 분명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상업사회의 확장 가운데 '도덕철학의 역사' 또한 이 시기에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의 '도덕감정론'이 요약하기 어려운 논저라는 인식은 모두의 불만을 사듯, 스미스는 분명하게 도덕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사상가였습니다. 현재까지 자유 세계의 이론가들과 경제학자들이 스미스를 소위 '자본주의의 시조'쯤으로 여기며 자신의 논리대로 스미스를 잘 써먹고 있는 현실은 반대로 그를 도덕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철저히 배제시키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와 공화국에 관련된 아이디어를 제공한 유력한 사상가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 역시도 상업사회에 따른 사회의 전반적인 이기심 추구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그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이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논저이기도 했고, 그 가운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공감과 이입의 본성'이 어떻게 '이기심의 본성과 그 체계'에서 양립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왔던 것인데요. 바로 이 부분의 내용에서 루소는 애덤 스미스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저자인 혼트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방향성의 단초를 루소에게서 얻었던 것으로 첨언하고 있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저는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육문사 판으로 1998년쯤에 읽을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어떠한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또한, 스미스의 도덕감정론 역시 따로 접하지는 않고 부분적으로 발췌한 적은 분량의 텍스트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혼트가 간단한 주석으로 요약하고 있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의 일부 내용들이 이 글의 2장에서도 인용되고 있어 계급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루소의 기본적인 생각들을 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루소와 스미스 이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공감의 세계'로 비롯되는 공감의 내용은 뒤이어 5장에서, 이 두 사람이 완벽한 현실주의자임을 저자의 입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에도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스미스가 "인간은 타인의 의견과 비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이것은 그 자체로 인간의 근원적 본성이라는 분석은 그가 얼마나 상업사회의 기반에서 조화로운 사회를 추구하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요. 인간 심리 분석의 대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스미스 역시, "사회화, 수치심, 위선"등을 어느 정도는 중요한 의미로서 탐구했다는 면모가 일련의 사고에서 중요한 증거로 도출되기도 합니다. 이에 스미스의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사고인 "우리 자신의 이기심을 다른 이기적인 행위자들이 용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감소시켜, 원초적 이기심과 그것의 자기강화를 완화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였습니다. 홉스는 인간의 이기심을 그저 필수 불가결한 어떤 필연적인 문제로 봤지만 스미스는 이 이기심을 어떻게 타인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는지에 대해 면밀한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루소 역시도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오독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였고 악과 부패를 초래하는 것은 오직 상업사회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자기애, 즉 자존심에 기반을 둔 사회)일 뿐이라고 주장했다"는 오독이 대표적인데요. 루소와 스미스 양자가 그런 면에서, "상업사회란 선천적인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 이기적인 존재들이 서로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모든 것을 (정의상으로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만들어내는 사회 형태라는 도출된 결론을 크게 인정했다"는 분석은 앞선 효용과 인정에 대한 맥락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즉, 이 둘은 상업사회가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해 공통적으로 인식했으며, 이렇게 불안한 요인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것을 안고 나아간다면) 홉스주의적 결과인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혁명'을 방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둘 다 혁명이 일어나선 안된다고 강조했는데요 그럼에도 2장에서 스미스가 인간이 내적으로 심리적 균형을 추구하면서도 외부로부터는 인정을 추구함으로써 이것이 불평등의 씨앗이 되었다고 진술합니다. 즉, 이 불평등의 문제가 홉스주의적 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스미스는 꽤나 진지한 어조로 상업사회에서 종래의 계급적 분화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양립하며, 사회에 넘치는 부로 인한 현격한 상황에서 가난한 자들이 평범한 소비생활을 통해, 전반적으로 나아진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나아진) 삶의 조건이 어느 정도는 상업사회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기에 그는 대두하는 불평등의 문제를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런 완화를 위해 스미스는 자신이 도덕적이지만 이론에 가까운 토대를 마련하고자 고민을 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자애와 타애라는 감정의 적절한 성립 가능성을 너무나 쉽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인간의 인정 추구라든지, 사회 내에서 스스로 기여하거나 단독으로 쟁취할 수 있는 영광 추구가 엘리트를 포함한 모든 계급의 고통이 되었고, 그것에 지배당하게 되었다는 서술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5장 이후에 등장하는 기본적인 가계 경제에 따른 상업사회의 진면목이 "가장이 주도하는 권위"와 이에 대한 가족 구성원의 복종이라는 기본적 행태가 이러한 문제를 애초에 내포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본질적으로 루소와 스미스 모두는 이런 상업사회의 이행 가운데, 원초적으로 인간이 사회성과 도덕성을 타고났다는 점을 부정했습니다. 3장 도입의 이와 같은 저자의 단언은 그동안 논증 가운데 예견될 만했는데요. 루소는 과거 가혹해진 전제정과 삶의 유지가 어려워진 빈자층에 대한 일종의 제한적인 배려에서 평등에 대한 관념이 잠깐 솟아나기도 했지만 중앙 집권이 미약했던 과거 봉건 정치에서 획기적인 권력 집중의 전제정치가 나아갔던 방향과 그 면모가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가혹했다는 점을 먼저 명시해두고 싶습니다. 루소는 이미 이렇게 권력 집중을 통한 중앙 집권적 전제정이 무력을 통한 타국의 침략에 거의 무방비한 상황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요. 점차 살을 붙여가는 진술 가운데, 저자가 14세기의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그 나름대로는 진보적인 체계를 갖고 있었지만 이웃의 프랑스나 신성 로마 제국의 군사적 공격에 취약했던 것은 전제 군주들의 탐욕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없었던 연유일 겁니다. 아니 동원령을 내려 (귀족과의 타협이든 간에) 대규모 원정을 꾸릴 수 있었던 '왕권'에 실효적으로 대항하기란 어려웠을 겁니다.그런 의미에서 몽테스키외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대한 스미스의 "전체 역사에서 보면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평가는 단순한 감상 정도는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앞의 진술로 돌아가서, 상업사회의 의도치 않은 이면이 스미스가 예견했던 대로 이것이 인간의 자유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고 여기에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들과 타인의 이익까지 고려할 수 있는 합리적 이기심의 추구와 같은 전제가 중요한 요소로 함께 실현되었다면 (그저 도덕적 맥락이 아니라) 이 상업사회는 그 파란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공익에 가까워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숱한 전쟁들로 말미암아 기존의 봉건 국가가 낱낱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후로 이어지는 18세기의 상징적 단상은 공화주의의 발견이 아니라 어쩌면 더 가차 없는 개인들의 이익 추구의 사전 작업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스미스의 이런 노력은 거의 실패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오늘날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이 유명무실해진 이유에는 스미스의 순진함과 더불어, 그의 다른 측면을 세인들이 전혀 인정하지 않은 그 의도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부론이 그만큼 편파적으로 이해된 측면 말입니다. 수세기에 걸쳐서 말이죠. 루소를 일정 부분 받아들인 스미스가 지위 추구에 여념이 없는 문화를 거대한 기만이라고 인식한 것처럼 지위와 타인의 인정 추구에 매몰되어 이것이 심각한 불평등을 유발할 때, 루소나 스미스 양자 모두가 특별한 강구책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을 너무 만만하게 본 연유일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측면의 무모함과 저열함을 너무나 우습게 본 것이죠. 아주 늦은 판단이긴 하지만 루소 역시도 "애초 사치와 불평등 위에 세워진 절대주의가 사치를 멈추거나 바로 잡을 수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했습니다. 스미스와 달리 루소는 인간에 대해 사회성을 촉구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을 해본 것 같지만 그 역시도 현실의 조건을 가볍게 본 것 같습니다.또한, 루소는 경제에 관여할 수 있는 정부의 재량권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으나 이는 근본적으로 개혁의 의미가 아니라 단순한 사회 조정에 불과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애덤 스미스와 루소 역시, 이들의 최종 목표는 상업사회가 주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법치와 경제적 번영"이었으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 역사에서 이 양자는 쉽게 양립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끝으로 국가의 번영을 위해, 인간이 갖고 있는 시기심과 질투를 조정해, 좀 더 진보한 단계까지 나아가려 했던 스미스는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건설과 그에 따른 제국주의의 출현을 전부 목도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때의 절대 왕정은 과거 로마 제국의 그것과 유사하게 단일 패권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것의 파급은 스미스나 루소조차 제대로 예견하지 못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즉, 방대한 생산 시설과 그에 따른 자원 보유를 통해 이러한 메커니즘이 국내의 복리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패권과 국가적 위신을 위해 영국을 포함한 절대 왕정들에게서 직간접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국왕과 귀족들의 지향과 스미스와 같은 계몽주의자들과 그 궤가 확연히 달랐다고 볼 수밖에 없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스미스는 어쩌면 대의로서 상업사회의 일면과 그것을 점차 개선해, 시스템과 인간의 모순을 조정하고, 요즘식으로 다음 단계로의 건설적 이행을 바랬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속이 검은 왕들과 자신의 이익에 골몰한 귀족들에게는 국가는 그저 자신들의 위신과 이익을 채울 수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의 구귀족들이나 나폴레옹 전쟁에서 부역한 영국이나 오스트리아의 귀족들 역시, 함께 갖고 있는 공통된 이익은 일차적으로 현상 유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스미스의 아이디어들은 몇세기를 거치며, 오용되어 금세기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공익에 대한 자신들의 허구성을 철저하게 숨기는 데 있어 여실히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루소는 이 점을 몇 세기 전에 신랄하게 비판한 바가 있는데요. 물론 이들에게는 과거 극심한 이념 대결에 따른 배경적 이익도 한몫했고, 정치인들을 구워 삶는데 교조주의적 수단도 서슴치 않은 이유도 있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스미스가 절대 왕권을 설득할 수도, 또한 그런 위치에 있지도 않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에 영합하는 정치인들을 손쉽게 다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세계와 우리 시대의 지향성이 이처럼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글의 후반부인 6장에서, 저자는 "18세기 근대국가의 군사-상업 복합체"라는 문구를 드러냅니다. 저에게는 저자의 표현이 기시감을 불러일으켜 소수의 그룹이 사회적 헤게모니를 손쉽게 획득하기 위한 그런 일련의 작업이 국가를 불법적으로 통제하게 된다는 서로 중첩된 의미를 의도치 않게 도출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루소가 경고한 대로 이 시점에 혁명은 없을지 모르겠지만 이기적으로 조직된 사회 구조가 결국은 과두제와 형식적 민주주의를 번갈아 반복하거나 아니면 시민들이 권력에서 배제된, 변형된 과두제로 진행될 수 있는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는 듯 느껴졌습니다. 


상업사회가 지칭하는 대상은 실제로 이뤄지는 물질적 거래가 아니라 해당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지닌 도덕적 성질이었다.

일부 정치사상가들은 영어권 정치사상사 서술에서는 홉스에게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볼 수 없다며 한탄하곤 한다.

사회성 개념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지점은 사회가 ‘욕구‘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정념과 이익의 대조보다는 효용과 자존심의 상호작용이야말로 근대 상업사회의 이른바 안정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스미스가 정말로 상업사회를 도덕성의 원천으로 분석하고 있었다면, 그는 홉스주의자나 에피쿠로스주의자로 분류될 위협을 무릅쓰고 있었던 셈이다.

‘애덤 스미스 문제‘를 해명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연민의 본능을 이처럼 도덕성의 원형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유의미한 도덕이론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을지, 아니면 그저 잘못된 토대에서 출발한 실패에 불과한지 평가해야만 한다.

스미스는 루소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모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의 불평등을 유지시키는 정의의 법칙은 본래 타인에 대한 비자연적이고 부당한 우월성을 유지하거나 얻으려 하는 교활하고 힘 있는 자들의 발명품이다."

서구에서 논의되는 ‘근대 대의제 상업공화국‘의 사상적 기원을 살펴보면 그것이 루소와 스미스의 작업을 종합한 결과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스미스)는 근대 도덕철학 논쟁이 홉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후 홉스와 플라톤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을 거쳐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루소가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였고 악과 부패를 초래하는 것은 오직 상업사회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자기애, 즉 자존심에 기반을 둔 사회)일 뿐이라고 주장했다는 오독이 그 단적인 예이다.

상업사회란 선천적인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 이기적인 개인들이 서로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모든 것을 (정의상으로는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만들어내는 사회 형태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즉각적인 관심은 사회적 자아에 대한 루소의 이론적 역사 서술과 스미스의 그것이 나아가는 궤적이 아주 비슷하거나 동일한데도 어째서 그 사실이 그토록 오랫동안 독자들의 눈에 띄지 않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루소는 이러한 사회가 홉스주의적 결과를 피할 수 없으며 일단 사회가 상업적으로 조직된 뒤에는 홉스주의적 장치들조차 그 사회를 안정시킬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끝없는 혁명의 파괴적인 반복과 순환 속에서 유럽에 카이사르주의와 민주주의가 번갈아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부를 경배하는 마음, 그리고 물질적인 화려함을 통해 개인의 영광을 외적으로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은 모두 철저하게 부패한 정서로서,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발휘했다.

루소는 자신이 18세기 ‘정치의 걸작‘이라고 불렸던 사상, 즉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행위자들의 행동이 사회적 응집력 혹은 적어도 안정된 사회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기적 행위들 자체의 효과로 인해 공익에 기여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사상을 비판했다.

스미스는 중상주의가 경제정책의 한 형태로서 국제적으로는 타국을 향한 민족적 적개심에, 국내적으로는 국가의 권력 확장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애초 사치와 불평등 위에 세워진 절대주의가 사치를 멈추거나 바로잡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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