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공화국 - 법은 정의보다는 출세의 수단이었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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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난 강준만은 1980년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2년뒤인, 1982년에 중앙일보에 입사합니다. 하지만 곧 그곳을 그만두고, 학업을 위해 도미를 하게 됩니다. 1984년 미국 조지아대학 대학원 신문방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8년 미국 위스콘신대 신문방송학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이후 한국으로 귀국해, 이듬해인 1989년에 전북대 사회과학대 언론심리학부 (신문방송학) 교수가 됩니다. 그는 이 시기부터 특유의 정치평론과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요. 특히, 1995년에 출간한 '김대중 죽이기'는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미 그는 1988년부터 발간중인 월간, '인물과 사상'의 주필로서, 날카로운 논평과 지식인 및 정치인 실명 비판으로도 유명했습니다. 현재는 한국 사회의 병폐들, 정치 문제, 엘리트주의 비판,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비평으로 이름을 알린 특별한 강단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위의 제목으로 2025년 4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조금 공교로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다음 대선에서 야당의 유력 대선후보의 사건이 대법원 전원 합의체에서 파기환송 되었습니다. 고등법원으로 돌아간 그의 사건은 다음 심리를 통해 유죄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요. (고등법원이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판례를 보면 말입니다.) 그런 연유로 대한민국 정치는 좀 더 고난을 당해야하는 운명과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자신의 이 글 서두에서, 당위의 측면에서 대한민국 사법 제도에 대한 비판이 어느 정도 진영 논리에 인질이 되었다는것을 밝히고, 자신은 그런 진영 논리에 자유로운 검찰과 사법부 및 그런 사법 카르텔 비판하고자하는 취지를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목적성은 상식선에서 충분히 공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책은 크게 2가지 '법조공화국'의 적나라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최근까지 존치했던 '사법고시'와 이를 통해 변호사 자격과 동시에 법조 관리로 등용되는 체계 자체에 매몰된 한국 사회와 이들 사법 관료들이 퇴임후, 얻게 되는 "전관예우"가 얼마나 한국 사회에 병폐가 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논합니다.

강 교수의 언급대로 서울대 법대 출신들 대부분이 소위 천재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1980년대 이전부터 서울대 법학과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마당이 되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대학에 들어간 이 수재들이 고시에 목을 매달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이 있었을 겁니다. 물론 이런 논의에서 강 교수가 확장된 분석으로 이들 사법 관료가 왜 우리의 민주주의에 큰 관심이 없게 되었는지 따로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검찰과 사법부에 소속된 행정적 법률가들이 소위 '신성 가족'이라는 깨뜨릴 수 없는 관념하에,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가족만 챙길 수밖에 없는지 그러한 인식의 저변을 그는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관념적 행태를 전부 인성으로 치부할 수 없지만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이 천재들이 스스로 인격적으로 겸양과 겸허를 갖추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것의 근본적 이유는 이들의 오만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국민들이 이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을 통해 배출된 법률가들에 대한, 특유의 찬사와 동경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이들 법률가들이 갖는 '선민 사상'은 이렇게 구조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법 제도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주요 체제입니다. 시민의 기본권과 자유, 그리고 평등은 견실하고 공정한 사법 제도가 뒷받침 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합리적이고 올바른 정치가 마중물이 되어야 하는 것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정치 불신이 극에 달하는 한국 사회에서 의도적이지 않게 사법부의 어떤 판결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강 교수는 이를 '정치의 사법화'로 인용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강교수의 탁월한 선견지명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야 할 것 없이, 이들 법조인들을 선호하는 이면에는 우리 국민이 이들 법조인들을 무척이나 좋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즉, 그 법조 이력에 대한 터무니없는 신뢰에서 말입니다. 어느 지방에서는 검찰 출신이나 판사 출신이 선거로 나오면 그렇게 좋아한다는 사례를 들면서 말입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의사와 마찬가지로 변호사와 같은 법률가들에게 지대한 동경과 표면적으로는 공부를 잘해서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로 일부는 폄하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인 걸 고려해 본다면, 오로지 시험 맹신주의만을 비판하기도 어려운 실정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들이 오로지 자신만의 능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예전에 유출된 의사들 익명 게시판 글에서, 의사들 대부분이 돈 때문에 아둥바둥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자체를 폄하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더욱이 이들 엘리트 계급들이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삶을 그동안 조소해 왔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는데요. 아주 일차원적으로 개인의 능력에 빗대어서 말입니다.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우리의 엘리트주의는 일방적으로 매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까지 합니다. 본디 자본주의가 계급주의를 용인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이지만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또한 정치를 온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인원을 선발하는 제도 자체를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여기는 '왜곡된 천재들'도 문제겠지만, 이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 자체도 정상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 역시 이러한 취지의 언급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앞서 언급한 '신성 가족'과 '선민 사상'은 아주 교묘히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1990년대부터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전관예우'역시 이 책에서 잘 다루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사법시험 출신자들의 전관예우 뿐만 아니라 다른 고시, 예를들면 행정고시나 고위 공직을 역임한 관료들이 로펌이나 민간 기업에 재취업을 해 고액 연봉을 받는 등의 '전관예우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 믿을 수가 없었던 부분은, 검찰과 판사 출신의 전관이 사건을 정식으로 수임하지 않고, 일종의 로비와 다름없는 "그 사건은 내 사건이다."라고 사건 검사와 판사에게 언질을 주며,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였습니다. 한 달에 1억의 보수를 받는다는 대형 로펌의 전관 출신 변호사의 일례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 의뢰인들이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그 판사 아느냐? 그 검사 아느냐?"는 질문을 하는 연유겠지요. 어떻게 이 지경이 된 상황에서, 국민을 위한 공정한 재판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포장된 대의,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철저한 사익 추구는 결코 사법 제도에 걸맞는 문구가 아닙니다. 이는 민주주의 체제를 아주 뒤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강 교수의 이 책을 통해, 이재명 후보가 내뱉은 전관예우에 관한 발언과 그의 아내 김혜경씨의 재판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아내인 김혜경씨의 그 트위터 사건과 관련된 재판에서 전관 변호사들이 대거 변호했다는 사실에서 실망보다 더 착찹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제 개인적인 의견을 더해본다면, 이번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의 전원합의체 판결로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되었지만, 공적인 측면에서 그가 대선 후보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희대 대법의 정당성을 그저 운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피선거권이 박탈된다면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되겠지요) 대선 결과가 무효로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거를 완주해 대통령이 된다면 사법 문제가 임기 내에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겠지만 그러한 임기가 과연 우리 모두가 원하는 정당한 결과인지, 당사자가 숙고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판결의 결과가 무조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그 결과로 인한 정치적 파급을 고려하고 더 나아가 이것이 국가 정체에 어떠한 일이 될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성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이 글의 문구가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 문장은 과거 바이든 행정부 당시의 인사 정책을 분석한 것에 기인한 것인데요. 이는 윤석열 행정부와 그의 관료들과 대비되어 더 인상이 깊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아니더라도 저 문장은 제가 존경해 마지 않는 로버트 달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이전에 판검사와 변호사의 관문이었던 사법시험(사법고시)이 한국인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의원들에게 정치는 먹고사는 생계수단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의원들이 생계수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벌이는 일은 정치인을 저주해야 할 이유가 된다.

사법고시생들의 이른바 ‘손익분기점‘에 대해 35세니 40세니 하고 말이 많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사회적 증거‘는 많은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갖는 믿음은 진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한국의 정치는 당파성, 개인 중심, 기회주의성을 보이면서 합리적 타협의 기초를 결여하게 되었다.

법조 특권주의의 동력은 ‘소용돌이 사회‘인데, ‘소용돌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쓴 사람들이 ‘법조 특권주의‘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굽히지 않은 대법관 양병호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으며 강요 끝에 사표를 제출해야 했다.

"기본적으로 단호함과 성실함을 탑재한 법조인들이 무언가에 대해 확고한 기준을 갖는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새 어떤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은 무서운 일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된 잔디밭을 돌아보았던 생각이 난다."

"민의는 법전처럼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정치는 이미 정해진 규칙에 따라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들은 눈에 보이는 업적을 군사작전 하듯이 속전속결로 해치워 보여주기 위해 공동체 의식, 시민들 간의 신뢰와 협력, 나눔과 돌봄의 문화 등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 아니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무형 인프라를 희생시키는 일을 해온 셈이다.

로펌은 그런 인간 정리나 이기심의 문제를 조직화하고 시스템화해 매끄럽게 처리해주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많은 전관이 로펌을 찾게 만들었다.

2018년 10월 대법원 산하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가 발표한 ‘전관예우 실태조사 및 근절 방안 마련을 위한 연구조사‘결과에 따르면, 법조 관련 종사자 (법원, 검찰청 직원 포함) 가운데 "전관예우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전체의 55.1퍼센트였다. 판사는 응답자 중 23.2퍼센트, 검사는 42.9퍼센트, 변호사는 75.8퍼센트가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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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기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박지선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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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계 폴란드인이었지만, 바우만은 어려서부터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스스로 폴란드인임을 일찍이 자각했습니다. 1939년에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을 당했을때, 그의 가족은 동쪽으로 탈출하게 되는데요. 이후 바우만은 소비에트 연방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자원하였고, 콜버그와 베를린 전투에 참가합니다.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바우만은 군내 정보 보안대인KBW (Korpus Bezpieczeństwa Wewnętrznego) 에서 복무하고, 당시 KBW는 폴란드 레지스탕스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조직되었습니다. KBW에 복무하는 동안, 바우만은 바르샤바의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처음 사회학을 접하게 됩니다. 1953년에 바우만은, 그의 부친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목적으로 바르샤바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촉한 이후, 갑작스럽게 불명예 제대를 당하고 맙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부친과는 다르게 시오니즘과 선을 그었고, 오히려 반시오니스트였으나, 자신의 항변은 당국에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실업 상태가 된 그는 이 기간에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54년부터 1968년까지 바르샤바 대학에 강사로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71년에 영국 런던 정경대 (LSE)에 기회가 닿아 로버트 맥킨지 밑에서 수학하게 됩니다. 그는 당시에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포괄적 연구를 진행했고 이것의 그 첫번째 주요 저작이 됩니다. 그는 살아생전에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강한 비판을 유지했고, 이러한 이행이 초래한 시민들의 삶의 불안정성과 그러한 속에서 복합적으로 발생하는 체제의 불안과 자본에 종속된 정치의 문제들을 규명하는데 온 힘을 쏟기도 했습니다. 그가 출간한 논저들은 거의 30여권이나 되었으며, 이것들의 공통된 주제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근대성, 소비주의, 도덕의 성찰 등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iquid Fear"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초역은 2009년에 이뤄졌으나, 이번 판본은 사실상 개정판으로 최근인 2025년 4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는 연세대 김호기 교수와 유명한 모 북튜버의 소개글이 실려 있습니다. 물론 김호기 교수가 지그문트 바우만을 알지 못해서 그런 제한된 인식의 글을 쓰지는 않았겠지만 바우만의 이 책은 그저 현대인의 불안한 일상에 대한 평범한 논의를 담은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이 쓰여진 2005년 당시 대표적인 뉴올리언스를 비롯, 미국 남부를 휩쓴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촉발된 미국의 재난 안전 대비가 아주 극명하게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는데요. 여기에는 조지 W. 부시의 정실 인사로 볼 수 있는 마이클 D. 브라운이 얼마나 무능력한 인간이었는지 여실히 증명되기도 했습니다. 이 재앙이 어떻게 전세계 성공적인 신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의 민낯을 드러냈는지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데요. 이런 맥락으로 바우만은 서장에서 정치학자 존 던을 인용하면서, 무엇보다 "이기주의적 질서 시스템"을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허리케인에 의해 삶의 터전을 모조리 빼앗긴 사태에서, 미 연방 정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와 더불어, 한 국가에서 참혹한 재해에 이르러서도 왜 백인과 흑인이 구별될 수밖에 없는가를 저자인 바우만도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동시에 많은 사회학자들 역시, 이를 학문적으로 규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능력과 배짱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찬양하는 이 이데올로기"는 반대의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되기까지 합니다. 후에 5장에서 바우만은 "현대 민주주의 발전은 불확실성, 불안, 두려움을 유발하는 잇따른 원인을 없애거나 제한거나 길들이려는 노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기심을 추동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거의 '보모 역할'에 그쳐, 오늘날 벌어지는 '병든 사회 국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부나 사회가 더 이상 '보모'로 자임할 수 없다던 과거 마가렛 대처의 발언이 오버랩 되는 것은 그저 지나친 상상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인간성의 발로에서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듯, 두려움은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일전에 토머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사회 계약의 측면에서 증명했기에 오랫동안 역사의 주변에서 불을 지펴온 계몽주의가 비로소 태동하여, 수많은 계몽주의자들의 등장 속에 무엇보다 계급주의적 권력과 사실상 기형적으로 존재했던 과두제가 '다수에 의한 지배'에 의해 어느 정도 타파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의 성과는 몇 문장의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이러한 정치적 진행의 맥락은 평범하고 보편적인 모두가 신변의 안전을 보장 받고, 스스로 삶의 온존을 위해, 가능한 충분히 그 자원을 제공 받을 권리를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바우만이 이 책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좀 더 수월하게 확장될 수 있는 '효과적인 자본주의 이행'의 측면에서 다수의 이익과 그것에 기반한 아이디어 전반은 지금까지 철회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바우만은 5장에서, "그동안 사회가 유발한 두려움에 대항해 오랫동안 투쟁한 결과 실업, 장애, 질병, 노령 등 개인이 겪는 불행을 국가가 집단적으로 보장하는 체계가 마련되었다"고 서술하고, 그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지 국가'라는 미명하에, 그동안의 체계를 뒤엎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폭로하는데요. 일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일방적인 관점을 갖는 것은 다소 불필요하다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만, 1980년대부터 전세계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진행된 특히 미국을 필두로 세계 경제 체제의 지배적인 역할과 기능을 한 체제는 결국 소수 계층과 그 주변의 지식인들을 둘러싼, 소위 특별한 이해 관계의 연합으로 '특권화'가 되었다고 여기 그의 논증을 통해, 여실히 비판이 가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은 기존의 노엄 촘스키조차도 비판했던 내용이기도 한데요. 어찌됐든 이 신자유주의적 기법은 사회적 역사라는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이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선 부분과 관련해 여기서 인용된 맥스 헤이스팅스는 "가진 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세계화다"라고 강조하는데요. 일반적으로 세계화에 대한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작업에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여전히 동조하고 있고 (2008년 악몽과도 같은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바우만이 숱하게 경고했던 바대로, 이러한 이행 과정에서 발생했던 '부수적 피해'도 사회가 무조건 감당해야 되는 몫으로 강요 되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이 부수적 피해에 아랑곳 없이, 자본주의로 미화된 자아 실현, 소비주의, 능력에 따른 분배 등은 외형적으로 심지어 노동자들조차 거부할 수 없게 만든 부분이기도 한데요. 사실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에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의 건전한 제휴는 이미 철회된지 오래이고, 어기서 드러나는 바우만의 평가대로 지식인들이 스스로 역사의 노정에 놓여 있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면 사회학이 밝혀내어 결국 병폐를 개선시키고자 하는 그 일련의 논의들이 그들에게도 역시 중요한 주제여야만 했습니다. 비록 이 글에서도 '사유를 잃어버린 노동자들'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저는 무엇보다 비판 의식을 보이지 않는 지식인들이야 말로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토머스 프랭크가 캔자스에서 규명한 일반 노동 계층에게 있어 정치적으로 비판적 사고의 실종이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심 반기는 일이 되었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시민들에게는 결국 이러한 사례가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2장에서 보이는 바우만의 일관된 논증은 작금 우리 세계가 보이고 있는 패착과 그로인한 수많은 '시민들의 불안'이 결국 일정 부분 우리가 자초한 일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바우만이 이 역사적 과정의 인과를 무시하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 책임의 다른 주체인 권력과 그것을 맹종하는 지식인들, 그리고 이들에게 이익을 건네주는 신자유주의자들이 함께, 추동한 이 체제의 문제로 말미암아, 이기심이 효과적으로 발휘되는 세상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첨언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바우만이 보기에 우리 시민들이 오래전부터 '사유'를 잃었으며, 인간의 직관이 충분한 사유에서 비롯되지 않고, 나아가 세계의 구성 원리를 탐구하지도 않았기에 어쩌면 한나 아렌트가 숙고한 '진리의 현실적 조건'이라는 철학적 테제가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마찬가지로 떠올리게 만듭니다. 지난 세기의 참혹한 파시즘이 초래한 절망스런 교훈에 대해 후세의 우리가 충분히 반면 교사를 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저변에 깔려 있는 '불안'을 매개로 자신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엘리트 관료들과 나날이 소수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현실적 민주주의의 엄혹한 모습을 짚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연계로 과거 조지 W. 부시가 수행한 '테러와의 전쟁'과 그것을 위해 움직인 정보 당국, 그리고 미국 사법부의 FISA가 법에 근거한 비판적 검토 없이, 비상시기라는 이유 만으로 당국과 협업 했던 점은 무엇보다 법원이 시민의 자유에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시민이 삶을 영위하게 만드는 중요한 가치이고, 이 자유를 무엇보다 보호하고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최후 보루는 체제 내에서 어느 기관보다 사법부라고 지칭할 수 있겠는데요. 법의 기본 원리를 떠올려 본다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4장 이후, 바우만이 짚어내는 바와 같이, '이기심의 권력화'에 있어 과연 우리 사법부는 마지막 방패막이 될 수 있을지, 심히 우려가 됩니다. 바우만의 이런 회의는 안보 불안마저도 이득으로 삼을 수 있는 자들과 구축된 조직이 있다는 점, 그리고 안보 불안과 시민의 자유, 기본권이 대립하게 될 때 과연 민주주의는 시민을 보호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하게도 말이죠.

사실상 이 시대의 중요한 맥락인 '현대의 이성'이 바우만의 일관된 평가대로, "독점을 형성하고 배타적 권리를 확립하는 데 특히 적합하고 명민하다"는 것에 쉽게 동의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보편적 규범과 이 현대적 이성은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여기에 더해 현대적 이성이 결국 소수의 특권을 옹호하게 되었고 그들의 특권 유지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적용받는 '동일한 규범'이 거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집중된 자원과 권력을 이용하여 사법 제도의 빈틈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즉 바우만의 확장된 논의대로 타인의 고통과 불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을 넘어, 그러한 다수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특권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스스로 '초월적 이성'이 이기적으로 작용되는 세계 체제, 또는 계급적으로 배타적 사회 규범이 사회에 뿌리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전에 일독했던 이안 브레머의 논의와도 아주 유사할 정도의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이어지는 3장 역시, '재난의 계급화'와 함께 불안도 계급별로 재분배된다는 적나라한 논지를 바우만은 펼치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카트리나가 인간 폐기물의 처분을 도운 건 아닐까?"라는 노골적인 질문은 당시 희생된 대다수 흑인을 비롯한 스패니쉬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구축한 체제 - 때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세련되게 표현하는 듯한 - 가 결국의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결과를 지속적으로 강도높게 유인했다고 본다면 이는 그저 과장된 수사일까요. 

인간의 불안이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놓고 본다면 그저 본성 안에 내재된 악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될 것입니다. 결국 C. 라이트 밀즈가 거의 비판적으로 분석했던 현대 관료제, 혹은 엘리트 관료제의 출현과 더불어 우리는 더이상 사유를 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에 종속된 국가적 체제에 충실히 복종하는 것으로 시민의 비판적 의무를 사실상 제한 받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과거 르네상스 시기의 도시 국가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의 공화정이 사실상 과두제와 다름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오늘날 민주주의도 경우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곳에서 과두제와 가까워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아주 수월하게 본심과 외면을 포장할 수 있듯, 이 인간들이 구축한 사회 체제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일반적인 정치의 측면에서 권력의 지배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외형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함께 과거에 볼 수 없던 후안무치한 정치가 비로소 드러났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인간 정치에 내재되어 있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만 '뉴딜 시대'를 거친 과거에는 결코 꺼낼 수도 없었던 비상식적인 언사와 주장들이 이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3장에서 바우만은 포괄적으로 이 현대적 관료제와 정치의 세속화 혹은 '자본주의적 이기심의 발로'라는 공익과 도덕의 회피를 마찬가지로 함께 다루고 있지는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엘리트 관료제가 견제 받는 건 고사하고 스스로 책임지지 않는 정치로부터 오히려 보호를 받고 있는 현실을 이미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대적 관료제가 과연 누구에게 봉사해야 하는가를 떠올려 본다면 이런 구조가 어떠한 원리 속에 놓여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다음 4장의 세계화가 초래한 '이 지경의 세계'를 이해하는 이러한 인식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4장 서두에 바우만은 "지금까지의 세계화는 부정적 측면만 있었다"고 단언하고 사실상 그 '긍정적 측면'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마찬가지로 언급합니다. "세계화의 긍정적 측면은 아직 먼 미래의 가능성에 불과하며 일부에서는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예측한다"는 말의 핵심은 거의 확실합니다. 이처럼 세계화가 더 이상 영토 주권과 경계를 인정하지 않기에 그 반대 급부로 우리는 과도한 개방성과 그것의 알량한 이익이 결코 다수에게 향하지 않는 지난 수십 년간의 시간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까지 구축된 세계화를 마치 부정하는 듯 보이는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나 탈이민 대책은 거의 극명한 인지부조화를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데요. 한때는 아니 거의 최근까지 이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적 이상의 결과물이자 전세계 곳곳에서 이익 추구를 가능케하는 아주 합당한 이론이기도 했습니다. 의외로 지젝은 신자유주의가 쇠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만 바우만은 그와는 명확히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세계화가 모두의 불안과 불행을 초래했다는 핵심 주장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거의 신자유주의를 이식하기 위해, 실행된 중동에서의 전쟁, 그로인해 파급된 테러 위협은 "겉으로 보기에 선진국은 안전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은 2001년부터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으로 국가적 안보 함의에 따라,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사법적 대응으로 나타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보는 결코 완벽히 충족될 수 없는 무언가이기도 합니다. 뒤에 나오겠지만 영국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장면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이렇게 세계화에 따른 자본의 거대한 흐름과 축적, 그리고 그것이 소수에게만 향유되어 국가와 정부를 초월하는 특권 계층의 모멘텀이 되었다는 점과 그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미국의 중동 개입, 911 테러와 전면적인 테러와의 전쟁은 이렇게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수 시민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글 말미에 바우만은 앞으로 다가오는 세기가 궁극적인 재앙을 맞이하는 시대가 되거나 혹은 지식인과 이제 인류 전체를 뜻하게 된 대중이 새로운 협정을 맺고 이를 실현하는 제2의 계몽주의 시대가 될 수도 있다고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간절한 바람처럼 그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대한다는 말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미래에 전제 되어야 할 가정은 '우리가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공교롭게도 자본주의가 지금의 안정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안정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시장의 인정과 경쟁의 지속은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자본주의는 소수의 특권층과 여기에 연계한 지식인들, 그리고 소수 중산층들만의 체제로 유지된다면, 역시나 제2의 카트리나와 같은 부수적 피해를 넘어서는 '인간 쓰레기 취급'과 같은 격리와 배제로 더 크게 왜곡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바우만의 말대로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 시민, 성찰 하지 않는 노동자, 비판하지 않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맞물려, 이런 왜곡된 체제가 가속화 된다면 이 책의 제목과도 같은 모두의 '불안'으로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파시즘과 더 나아가 과두제를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목도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런 디스토피아적 예견은 결코 소설 속의 장면만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그가 죽는 날까지 남아있는 시민들의 미래를 누구보다 걱정하기까지 했는데요. 그 유명한 "우리가 모두 손을 잡고 다같이 무덤에 들어가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개선이 없는 체제의 일방향성은 스스로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것입니다. 더 이상 사유와 비판, 성찰이 없다면 말입니다.  

- 제가 그동안 읽은 많은 사회과학,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경제학과 관련된 논저들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언급하는 지식인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에둘러 표현하거나 경제적 기조의 한 방편으로만 해석되었는데요. 이것은 마치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해 실체를 언급하는 것이 어렵다는 식으로 해석될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 글 4장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해 적시하는 듯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괴롭히는 두려움은 개별 사례를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할 수 있지만 그에 맞서 싸우는 일은 개인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과거에 생계를 책임지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수입에 의존하거나 빈곤에 직면하게 되었고, 안정적인 평생직장을 다니며 자신감을 가졌다가 노동조합이라는 보호막을 잃고 ‘유연한 노동 시장‘이라는 리스크의 굴욕에 노출되었다.

이처럼 놀라운 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것을 훔치고 자원을 재배치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유혹적이었다.

이성은 인간의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속성이지만, 이성이 무엇을 다룰 수 있는지는 어떤 도구를 사용해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제 몫을 하는 훌륭한 관료라면 사유할 줄 알아야 한다. 막스 베버의 말처럼 자신의 지적 능력과 판단력을 한계점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그 특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규범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여겼고 실제로 거부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대가로 자신의 고통을 덜어내는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의 이성은 다른 사람이 치러야 할 대가에 반대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한다.

편파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언제나 있었지만 아우슈비츠. 굴라크, 히로시마의 가장 무서운 교훈은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괴물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발전‘이란 주로 과거와 현재에 발전 속도를 높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발생한 직접적이거나 ‘부수적인‘ 피해를 복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행복 추구를 보편적 인권으로 선언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주요 수단으로 적자생존을 외치던 정부의 관심과 정치적 의제에서 변방으로 쫓겨났다.

도덕적 판단을 폄하하고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이를 무관한 것으로 배제하려고 노력한 탓에, 도덕적 판단의 힘은 상당히 약해졌다.

민족주의, 종교적 광신주의, 파시즘, 테러리즘 같은 위험한 부산물을 발전시킨 것은 미국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프로그램에 발맞춰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세계무역기구를 비롯한 다양한 위성 기구들과 함께 펼친 정책이었다.

따라서 기어티는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사법부가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진보적 이상주의자들과 의도는 좋지만 그와 비슷한 착각에 빠진 사람들뿐이다"라고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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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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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그레이엄 그린은 1904년 영국 허트퍼드셔의 버크햄스테드 기숙학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이 이곳에서 사감으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섯 자녀 중 넷째로, 남동생 휴는 BBC의 사장이 되었고, 위의 형인 레이몬드는 저명한 의사이자 산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부친인 찰스 헨리 그린과 모친인 메리언 레이먼드 그린은 사촌 지간으로, 그린 킹 양조장 소유주 및 은행가, 정치가를 아우르는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린은 캠브리지셔에 있는 삼촌 그레이엄 그린 경의 스턴 하우스에서 보내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그는 독서에 대한 흥미와 본격적으로 책을 읽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1910년 부친인 찰스 그린이 버크헴스테드 기숙 학교의 교장이 되자, 그레이엄 그린 역시, 이곳의 학생으로 수학하게 되는데요. 그의 기숙 학교 생활은 최악에 가까워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의 발리올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학부생 시절 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지만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이 시기의 그린은 주기적으로 우울증을 겪었고 대체로 혼자 지내는 고독한 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잠시 저널리즘에 관심을 갖다가 1929년 첫번째 소설인 '내면의 남자 The Man Within'를 출간합니다. 이 작품이 비교적 호평을 받으면서 그는 작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게 되는데요. 이후 그를 대표하는 문학적 성격인,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내면의 갈들이 상충하는 주제들과 그것을 바탕으로 그려내는 시대적 자화상, 특히 냉전과 이데올로기 갈등에 대한 문제"를 써 나가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이게 됩니다. 이런 작품 활동을 기반으로 그린은 1961년 노벨 문학상 최종 후보 3인중 한명이었으며,1967년에도 동일한 기준에 올랐고, 1974년과 1980년에도 후보에 고려되었으나 끝내 무산된 바가 있습니다. 그는 1991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20세기 가운데 주요한 소설가들 중 한 명으로 꼽혔고, 25편이 넘는 소설을 포함해, 도합 67년간의 집필은 현대 세계의 인간들이 보여온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특유의 해학과 냉소를 바탕으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 '권력과 영광'은 1941년에 영국,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작가에게 매년 수여되는 문학상인, 호손든 상을 수상했고, 다른 작품인 '사건의 핵심'은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그리는 1968년에는 셰익스피어 상을, 1981년에는 예루살렘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The Quiet American"으로 지난 1955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의 바탕이 된 본은 2004년에 출판된 제이드 스미스 판본입니다. 이에 국내 번역은 2023년 4월에 이뤄졌고, 번역은 안정효 선생이 맡았습니다.

극 중에 몇 번이나 '한국 전쟁'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 이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더 엄밀히 말하자면, 베트남 독립 전쟁의 시발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극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적 배경으로 읽혔습니다. 극의 주요 화자이자 주인공인 토머스 파울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 대한 야욕, 즉 철지난 제국주의의 허상을 부여잡은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에 파견된 종군 기자입니다. 그는 영국 런던 출신으로 지난 대전에서 간신히 국체를 지킨 프랑스 공화국의 현실을 이 베트남에서 여실히 목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당시 유럽 지식인들에게 큰 화두였던, '사회참여적 지식인 담론'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자신의 마음 내부에는 현실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각과 그리고 삶과 스스로의 모습을 무척이나 냉소하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결혼의 실패'라는 문제와 그 귀책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었는데요. 소위 '자유 연애'라는 말이 이 작품에서 여러 사람의 입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유 연애 이면에는 도덕적 비난이 함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본국과는 멀리 떨어진 베트남에 파견을 나온 상황에서도 그는 '후엉'이라는 미모의 베트남 여성과 동거중이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시기를 살던 베트남 여성들은 무엇보다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했는데, 그녀를 만난 초기에 파울러는 이것을 고민합니다. 과연 그녀가 원해서 자신의 곁에 있는지를 말이죠. 이 때의 베트남은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토호 군벌, 그리고 반군 등 '중앙 정부의 치안 유지'라는 것이 거의 전무했기에, 수많은 민간인들은 스스로의 안위를 어디에서든 보장받을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후엉과 같은 베트남 여성은 이 혼란스런 시기에 무엇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안전할 수 있는 '보장'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요. 여기에 경제적 보장이 불확실하고 또한 정치적 불안기였기에 프랑스 식민 정부와 그 군대의 존재는 베트남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 주변을 맴도는 유럽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이죠.


극을 이끄는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올든 파일은 명목상 미국 영사관에서 베트남 지원과 상무 관련 일을 하고 있는 관료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정체는 CIA 요원입니다. 그는 저명한 서구 지식인들 가운데 동아시아에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갖고 있던, 극 중에서 허구적 인물인 '요크 하딩'의 추종자이기도 했는데요. 파일은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는 프랑스의 패착이 바로 이 지역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인식하고, 이런 정치적 혼란이 결국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그 시대 여타 지식인들의 공통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파일은 특유의 이상주의적이면서 사람들에 대한 사려 깊은 면모, 매사를 신중하게 말하는 언행을 보이는 등, 그레이엄 그린이 이 미국인이라는 캐릭터에 들인 노력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일독한 매큐언의 '이노센트'에서 보였던 영국인 특유의 미국인들에 대한 서사는 그린의 이 작품에서도 분명히 접할 수 있었는데요. 당신들 유럽인들과 우리 미국인들은 다르다는 차별화된 인식과 자신들이 전세계를 위해 분명 일을 할 수 있다는 일련의 자신감 등이었습니다. 그렇게 파일이 프랑스와 같은 구대륙 국가들이 보이는 철지난 인식과 보수주의적 관념을 비판하듯, 마찬가지로 여기에 등장하는 프랑스인들과 앞선 파울러 역시, '아메리카', '아메리칸'이라는 극명한 단어로 이들에 대한 이질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파일을 가리키는 '조용한'이라는 수식어는 이례적으로 이 작품에서 5번 이상이나 등장하는데요. 이는 미국인들이 스스로 조심하고 때론 겸허한 태도를 보이지만 결국에는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한발 물러선 채로 객관적인 듯 아니면 중립적인 듯 말하지만 뒤로는 무언가를 획책하고 있다는 식의 서사들 말입니다. 이는 "말을 잘 꾸며내는 미국인들을 쉬이 믿지 말라"는 금언이 생각날 정도라고 해야 할까요.

이미 작고한 그린이 쉽게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작품에서 파일이 벌이는 그 '수작'을 보자마자, '통킹만 사건'이 바로 뇌리에서 떠올랐습니다. 역사적 배경으로 보자면 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결과는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베트남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는 베트남 내부의 권력 공진을 꺼낼 필요도 없이, 그 이전 시기의 베트남은 파울러의 말마따나, "봉건시대'와 다름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돈에 따라 베티밍(혹은 베트민)과 정부군에 오가는 '테'장군의 존재나 카톨릭과 여러 종교를 뒤섞어 만든 토착 종교의 소위 교황이라는 자 역시, 정치적 술수를 부리고 심지어 사적인 군대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미 파울러와 같은 종군 기자들은 베트남에서 거대한 내전이 벌어질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 가운데서 '제3의 세력'을 만들고자 한 파일의 계획(아니면 미국의 작전)은 그저 민간인의 희생만 초래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는 미국이 파트너를 고르는 능력은 극히 평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고, 혼란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거의 확신하는, 이상주의자의 순진하고 나약한 '정의'는 결국 이 베트남에선 전혀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이런 파일의 인물상은 작가 자신이 명백하게 의도한 인물 조성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 시대의 역설은 바로 이런 인간들을 낳는다는 오래된 옛 이야기들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처칠의 제2의 대영제국 건설이 사실상 루스벨트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영국은 종래의 식민지 운영이라는 모험을 하기가 더 곤란해 집니다. 프랑스 4공화국 역시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요. 곧 이어지는 수에즈 침공 사건으로 말미암아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그레이엄 그린은 여기에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차례 등장시키며 베트남인들에게 왜 저런 구호가 하등 쓸모가 없었는지, 바로 이어지는 서사와 프랑스 식민지 군과 베트남 반군과의 전투를 통해 여실히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그동안 미국이 이 민주주의라는 대의명제를 들어, 타국에 사실상 개입해 왔던 역사를 고려해 본다면,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국내법 조차 어기는) 불법적 행위가 얼마나 인위적이고 명분이 없는 일인지 다시 한번 이 작품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린이 폭로하는 동양에 대한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에 가까운 편견과 그것을 내면화 해 느끼는 우월감은 결국 베트남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삶과 역사, 종교, 문화를 통틀어) 전형적인 식민지주의적 폭력성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느 민족과 국가를 미개하다고 인식하는 점은 그 저변에, 이 지역 전체를 관리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 자체가 그저 최선의 길이며, 이들의 삶에 자신들이 개입할 수 없다는 식민지 경영의 참모습과 같은 유럽인들의 이중성을 그린은 여실히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뒤에 나오는 역자의 후기에서 당시 베트남 여성들의 기구한 운명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저 역시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후엉과 하이 자매의 거의 매매혼과 다를바 없는 모습에 작가 자신의 몰이해에 가까운 극단적인 서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도 민간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설명에 이르러 어느 정도 그 근거를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더욱이 많은 베트남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놓인, 어쩌면 성 노리개로 불러야 될 정도로 이들이 처한 상황이 실로 녹록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한 북베트남인들과 남베트남인들이 기질이 다르다는 점도 이 작품을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요. 특히 저는 "베트남이 무너지면 태국과 인도네시아도 위태롭다"는 극중 서사에 얼마간 집중해 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냉전이 과연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 말이죠. 아마도 그런 연유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나서게 된 것이겠지만 "중국인들이 베트남 반군을 돕고 있다"는 묘사도 그렇거니와,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은 단순히 문맥상에만 이해될 평범한 일만은 아님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념적 대립 한 가운데 놓인 민족의 안위는 물론, 이들의 일상의 삶조차, 정말로 위태로운 지경에 놓일 수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을 글 말미에 다시금 고민하게 되는데요. 극 중에서 빵 한 조각을 미처 먹지 못하고 죽은 소년의 시체를 적은 문장을 더듬어보니, 전쟁의 원인은 결국 누군가의 탐욕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그가 단골로 삼는 또 다른 주제였는데 - 아메리카 합중국이 세계를 위해 하는 일에 대하여 그가 일갈하는 확고한 관점들은 정말로 사람을 짜증 나게 했다.

그보다 살해되기 전에 적어도 쉰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이었던 그의 진짜 활동 배경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저질러 온 일들에 대하여 사실대로 자세히 알렸다가는 영국과 미국의 외교 관계가 크게 틀어질 터이므로 공사로서는 매우 언짢아할 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났고, 단골 코카콜라 가게와 휴대용 의료 장비와 지나치게 큼지막한 자동차와 별로 신식이 아닌 총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 아메리카 패거리 모두에 대하여 짜증이 치밀었다.

베트남은 중세 유럽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족들의 반란이 준동하는 나라였다.

이 전쟁에서 유럽인의 얼굴이란 일종의 혜택이었으므로, 일단 유럽인이라면 적의 첩자이리라고 의심 받지 않았다.

아이의 시체 밑으로 한입 물어뜯었지만 미처 먹지 못한 빵 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생각했다. ‘난 전쟁이 정말 싫어.‘

그러면 파리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프랑스인들은 아메리카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지만 아메리카는 중고품 헬리콥터조차 보내주지 않는다.‘라고 떠들어 대겠고요.

그 질문은 민주주의와 명예에 대한 개념을 영국과는 다른 시각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물려받는 미국인들의 대단히 단순한 심리 세계에나 어울리는 명제였다.

독일군 공습이 벌써 증명한 바이기는 하지만 사람이란 항상 겁에 질린 상태로 살아갈 순 없으므로 일상적인 직장 생활과 우연한 만남과 막연한 불안감이 폭격처럼 이어지는 와중에도 누구나 개인적인 두려움을 잠깐 잊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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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푸른빛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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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는 1897년 9월,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의 빌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조제프-아리스티드 바타유로 그 지역의 세금 징수원이었고, 모친은 앙투네트-아글라 투르나르드로 비교적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1898년이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은 랭스로 이사하고 그곳의 유서 깊은 랭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부모님이 행한 세례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별한 종교적 자각 없이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요. 하지만 1914년부터 약 9년 동안 누구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됩니다. 이때 바타유는 잠시 사제가 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고, 실제로 가톨릭 신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후 바타유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 École Nationale des Chartes PSL를 다니기 시작해, 1922년 2월 학업을 마치게 됩니다. 이때에 바타유는 러시아 실존주의자인 레프 셰스토프와 교류를 시작했고 동시에 학문적으로는 니체, 도스트예프스키, 플라톤에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학업을 마친 그는, 여러 저널과 문학 그룹 창립에 관여하고 경제, 시, 철학, 예술, 에로티시즘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동시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비록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신비주의 옹호자로 비웃기도 했지만 미셸 푸코, 필립 솔레르, 자크 데리다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Le Bleu du ciel "로 초고는 1935년에 완성했지만, 프랑스 내 출간은 1957년되어서야 시도됩니다. 또한 국내 번역은 2017년 3월에 이뤄졌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앙리 트로프만은 어느 정도는 작가인 조르주 바타유의 젊은 시절을 투영한 캐릭터입니다. 그렇지만 극에서는 상당히 자기파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실제 조르주 바타유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면 여기의 트로프만은 비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등, 지식인의 터울을 두르고 있긴 하지만 세상에는 아예 담을 쌓고 사는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트로프만은 화류계 여성이나 평범한 여성을 가릴 것 없이, 여자들을 희롱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나락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가 걸핏하면 내뱉는 '죽음'이라는 단어,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심각한 자기 비하에 빠지는 점도 어떻게 보면 극단적인 인물 조성을 통해, 마치 시대적 허무를 냉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스페인으로부터 카탈루냐가 독립을 시도하는 1934년 10월, 그 즈음으로 여겨지는데요. 다만 소설의 극적인 요소를 위해, 바타유는 나치 독일의 시기를 후반부에 앞당겨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소설의 분위기는 매우 음울하고 어두운 편이며, 여주인공인 도로테아(약칭으로서 디르티)가 유럽에서의 전쟁 분위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물이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수위 높은 성적 묘사와 앙리와 디르티 간의 아주 노골적인 섹스신은 어떻게 보면 에로티시즘 자체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절망적인 서사 가운데, 시대를 개인의 타락과 대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극중에서 칼 마르크스가 투영된 소년이 몇몇 장면에서 의미심장한 의미로 등장하고 다른 여주인공인 라자르가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에서 혁명의 투사로 그 본신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트로프만으로 규정되는 개인의 타락과 시대와 철저히 괴리된 인물상은, 아마도 조르주 바타유 본인이 실제로 겪은 시대적 절망과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디르티는 트로프만으로 하여금 '순수함 속의 방탕함'을 드러내는 인물로 끊임없이 과도한 욕망에 몸을 맡기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극단으로 몰고가는 인물입니다. 이런 그녀와 트로프만은 끊어지지 않는 서로 간의 유대로 연결되어 있고 특히 디르티는 트로프만의 불확실한 내면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평범한 사람들을 분절시키는 그러한 '악'의 가운데, 그야말로 내쳐진 인물의 자포자기함과 극도의 자기파괴적 행동은 작품을 읽는 내내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그를 둘러싼 또 다른 두 여인이 등장하는데요. 앞서 진술했듯이, 라자르는 공산주의와 혁명에 전도된 여성으로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혁명을 부르짖는 자들은 전부 유대인들'이라는 전형적인 인종적 요소가 마찬가지로 '혁명을 이해하는 한계'로 대치시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특히 트로프만이 라자르를 향해, 그녀야말로 '프랑스 대혁명'을 직접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문 삶의 지향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트로프만은 그런 라자르를 향해, 육체적으로 끌리는 매력이 없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었는데요. 그런 연유로 그는 오늘날 애정이 전혀 없는 남녀간에 나눌 수 없는 진실한 고백들을 라자르에게 만큼은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내 자신이 라자를 사랑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언급하기도 하는데요. 이것이 서사 속의 의도된 진술이라 할지라도 이 두 사람의 관계 역시, 디르티와의 그것 만큼이나 트로프만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라자르와는 다른 의미로 트로프만에게 중요한 여인이 된, 크세니는 가진 돈이 많은 상당히 부유한 여성이지만 따로 하는 일이 없이 바깥을 전전하는 여성입니다. 특히 여기 크세니는 작가인 바타유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희생제의'라는 측면에서 자기 희생과 헌신적 사랑을 표징하는 인물입니다. 트로프만이 특유의 비틀림과 자기 혐오로 일관해, 보통 평범한 여자들이라면 분명 질색할 남자지만, 아마도 여성 특유의 모성애와 아픈 그를 병간호하고 싶은 선한 의도와 일관된 애정을 견지하는 캐릭터입니다. 더욱이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혁명의 기운이 오를대로 오른 바르셀로나로 찾아와, 개인적 비극을 겪게 되는데요. 결국 서사의 분명한 전환이 되는 그녀의 희생을 통해, 디르티와 트로프만은 재차 연결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무엇보다 누군가가 필요할 때, 디르티와 트로프만은 그 짧은 시간동안 서로만을 향하게 됩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바타유의 이 작품에는 노골적인 성애 묘사와 여성의 성적 부위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다만, 이러한 구조적 요소는 극단적인 두 남녀의 파괴적 행위에 반하는 내면의 자기 연민과 처연함을 드러내는 쓰임을 갖고 있어, 단순히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의 전형으로 국한지어 여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사회 부조리와 악에 대한 트로프만의 자기 혐오적 이해와 그런 시대의 혁명과 계급 투쟁이 결국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작가의 자기 고백과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했습니다. 절정을 치닫는 디르티와 트로프만의 무덤에서의 섹스 장면은 죽음과 새로운 삶이라는 서로 대비되는 요소를 드러내는 것 이상의 엄청난 충격이기도 했는데요. (트로프만의 충격적인 성적 취향은 서사의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니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크세니를 통해 '아방가르드'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프랑스 아방가르드 문학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어느 정도 이 작품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설명해줘야 할 것 같군요." 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눈물이 뺨 위를 지나 입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내가 런던에서 디르티와 함께 저질렀던 온갖 추잡한 짓을 최대한 노골적으로 라자르에게 설명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라자르처럼 추하게 생긴 처녀들을 비웃고 경멸했다.

"그래요 방탕함이 그것으로 먹고사는 창녀들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그 방탕함 때문에 그 여자를 고귀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난 이해할 수 없어요......"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과, 죽음과 관련되는 것을 혐오한다던 라자르를 결합시켜줄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너무 부자라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처녀일 뿐이었다. 크세니의 접시 앞에는 그녀가 늘 들고 다니는 녹색 표지의 아방가르드 잡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녀가 미처 말릴 겨를도 없이 서둘러 그녀의 넓적다리에 입을 갖다대고는 흐르는 피를 빨았다.

난 역겹지는 않지만 파멸한 인간이었다. 원했던 대로 지금 당장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신열과 극도의 두려움에 지쳐서 그녀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사실 나 자신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쓰레기였고, 내 자신의 악의에 운명의 악의가 덧씌워져 있었다. 언제나 불행을 내 머리 위로 불러들였고, 이제 여기서 죽어가고 있었다. 외로웠고 비겁했다.

나는 앓는 내내 그녀를 그럭저럭 참아냈지만,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는 일이라면 별로 사랑하지 않는 여자 쪽이 더 견딜 만하다. 매춘부들과 잠을 자는 데는 진저리가 나 있었다.

그녀는 소름 끼치는 여자이지만, 프랑스대혁명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스페인 노동자들 역시 대혁명을 이해하고 있다고.

결국 라자르와 관계를 맺고 있던 카탈로니아 무정부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 뭉쳤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

파리에서는 내가 사태의 핵심에 위치해 있었는데 바르셀로나에서는 사태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투를 벗어버리고 내 품에 안긴 디르티는 나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의 붉은색을 연상시키는 진홍색 실크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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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경제적 결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 지음, 박만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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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883년 6월, 영국 케임브리지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인 존 네빌 케인스는 경제학자이자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문 과학 강사였고, 모친인 플로렌스 에이다 케인스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진보적 사회 개혁가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메우 사려깊고 세심했으며, 케인스 본인은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받기도 했는데요. 더구나 그가 이튼에서, 장학금 프로그램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적인 코칭 프로그램의 지원도 부친이 도맡아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수학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면서, 1897년 케인스는 영국 버크셔 주의 이튼에 소재한 13세에서 18세 사이의 남학생들을 위한 수준 높은 기숙 교육을 제공하는 이튼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수학하게 됩니다. 그는 이 시기에 수학, 고전, 역사 등 다양한 분양에서 특별한 재능을 드러냅니다. 또한, 1901년에 그는 수학 부문에서 톰라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1902년이 되자, 케인스는 좀 더 수준높은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로 진학합니다. 물론 이곳에서도 장학금을 받게 되었는데요. 당대 가장 영향력있던 경제학자인 알프레드 마셜이 그에게 강력하게 경제학자가 되라고 조언하지만, 반대로 그는 조지 에드워드 무어의 윤리 체계를 포함한 철학에 끌리게 됩니다. 이후 학업을 마치고 케인스는 1906년, 런던에 소재한, 인도 행정을 총괄하는 인도 사무소의 공무원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같은 시기에 알프레드 마샬과 아서 세실 피구가 개인적으로 지원한 경제학 강사를 역임하면서 '확률론'을 연구하게 됩니다. 더불어 그는 1909년에 더 이코노믹 저널에서 세계 경제 침체가 인도에 미친 영향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기사를 발표하고, 이곳의 산하에 '정치경제 클럽'도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연유로 1911년 케인스는 더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자가 되고, 1913년에는 자신의 첫번째 논저인, "인도 통화와 금융"을 출간하게 됩니다. 이후 요동 치는 유럽 정세속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1월에, 영국 재무부에서 공식적인 정부 직책을 맡습니다. 1919년이 되자 비로소 대전이 종식되고 이어지는 전후 처리와 관련된 영국 재무부 재정 대표로 케인스는 임명되는데요. 바로 그의 이 논저는 베르사유 평화 회의와 연합국에 대한 독일의 전쟁배상금과 관련된 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Economic Consesquences of the Peace"로 지난 1919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을 위해 쓰인 판본은, 1973의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본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번역본의 출판은 2024년 11월에 이뤄졌습니다.

서두에서 혹여 글이 장황해질 수 있어, 케인스의 1920년 이후의 이력은 따로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평론과 해당되는 비평에 따라, 케인스의 이 글은 꽤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가 개인적으로 크게 인상받은 부분은 케인스를 향해, "당신 노골적인 친독파 행세를 하는거냐"라는 거의 인신공격과 다름 없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 베르사유 평화 회의의 결과로 나온, 독일의 징벌적 전쟁 책임은 사실상 카이저의 퇴임과 시작된, 독일 민주주의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소멸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저 오스트리아인에 불과했던 아돌프 히틀러가 (유화적으로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일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대다수 국민의 증오를 정치적으로 부채질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전을 다시 한번 답습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베르사유 회의가 비이성적인 측면으로 치달은 원인을 꼽는다면,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의 독일 제국을 향한 프랑스인을 대표하게 되는 그 증오와 혐오의 감정, 그리고 계속 파행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우물 안의 이상주의자'였던 미 연방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정치적 무능이 대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870년 보불 전쟁 이후, 프랑스인들의 마음 속에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베르사유 궁전에서 카이저와 비스마르크를 포함한, 독일 제국의 선포는 이 시점의 클레망소에게 독일을 짓밟는 매우 중요한 명분이 되었을 겁니다. 물론 연합국의 한 축으로서의 프랑스의 지위, 특히 군사적으로 역할을 한 국가의 총리라는 인물을 중재하지 못한 것은 유럽의 권력의 역학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전후 처리가 모두에게 패착이 되었던 점은 분명합니다. 이를 과거 역사에서 도출해 본다면 이런 평화는 결국, 케인스의 말마따나 "카르타고식 평화'라는 수식 자체는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에 와서 우드로 윌슨으로 대표되는 고결한 학식이라든지 종교적 신념 혹은 원초적 국제주의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의 원천으로 몰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유럽의 막대한 채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미 연방 대통령이라는 신분이라면 본인이 그리는 유럽의 미래가 미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유럽(특히 서유럽)이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국가적 이익을 따질 계재는 분명 필요했을 겁니다. 이것을 현실적인 측면이라고 본다면 윌슨이 주창했던 민족자결주의는 그야말로 현실과 이상, 어느 지점에 있는지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판단해야만 합니다. 물론 주요 강대국의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수사가 매번 이성적이지는 않겠지만 특히 윌슨의 그 우유부단한 본성 자체로 말미암아, 실질적인 유럽 평화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점은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는 다른 여타 민족들에 대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관점을 주장한 인물이 도덕을 부르짖지만 스스로의 웅변에 빠져, 현실을 도외시하는 태도로 일관한 것은 엘리트 정치인의 전형적인 무능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베르사유 회의로 도출된, 소위 14개조 조항은 일반적인 맥락에서 '전쟁 방지'를 추인하고 있습니다만 명시적으로 알자스-로렌 지역과 관련한 1871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가한 잘못을 바로잡는 것과 육상, 해상, 공중에서 연합국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에 가해진 모든 피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연합국의 '추가 주장'이 반드시 더해져야 한다는 조항 문구 등은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폴란드의 독립이 공인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와 폴란드가 왜 동맹 관계(물론 서류상의 동맹이지만)에 이르렀는지, 어느 정도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과거 나폴레옹 전쟁 당시, 곳곳에 넘치는 혁명의 기운이 폴란드인들에게 자신들의 독립이라는 목표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역사적 변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프랑스와 폴란드의 연대, 그리고 이들의 동맹이 추후에 자신들에게 어떠한 여파를 끼치게 될지 고민한 영국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조항은 그저 허망한 정치적 결과로 남은 국제 연맹 창설의 의의였습니다.


케인스가 이 글 4장에서, 전면적으로 논하고 있듯, 독일은 과거 농업 생산국이었으나 나중에는 영국을 위협할 정도로 2차 산업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루르 지역, 고지 실레시아, 자르 분지의 풍부한 탄전을 기술적으로 훌륭하게 개발하여, 놀라운 산업적 성취를 얻은 것인데요. 조약에 따라 앞서 언급된 루르 탄전이 15년 간의 국제연맹의 관리 끝에, 프랑스에 완전히 할양된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석탄과 철광이 기반이 된 산업이 국가 경제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독일 역시, 탄광을 통해 비약적으로 산업 개발을 달성한 후발국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석탄은 국민들의 난방과 취사를 위해 필수적인 자원으로 케인스는 무엇보다 '독일의 내부 수요'에 대해 주목합니다. 이는 독일 국내의 석탄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연합국 배상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밝히는 주요 논점은, 앞서 대전에서 독일이 끼친 연합국의 민간인 재산 피해에 대해 이것을 연합국이 피해 배상에 나선다면, 이미 경제적 붕괴에 이른 독일 경제가 끝내는 독일인들의 사유 재산을 통해 이를 갚을 수밖에 없다고 피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사유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주의적 연원을 갖고 있는 서유럽을 떠올려 본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게 일반적인 정의의 입장에서 독일인들에게 합당한 것이냐는 점을 되물어 보게 됩니다. 

이러한 독일을 향한 모호한 전쟁 배상 책임은 '독일과 그 동맹국'의 공격이라는 문법을 내세워, "오스만 제국이 수에즈 운하에 입힌 피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이 아드리아해에서 입힌 피해와 관련해 과연 독일이 배상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케인스는 이렇듯 주장합니다. 결국 그는 이런 요망한 전쟁 배상 책임이 "독일이 그 지급 능력의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고 이 청구 총액에 대한 과학적이고 정확한 추산의 기초가 될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프랑스의 의도대로 이 사악한 독일이 후에 더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이참에 아예 이들을 회생불능의 상황으로 내몰아야 한다는 숨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물론 법학자들이나 관료들에 의해, 국가가 전쟁을 통해 감당해야 될 '배상'이 국민들에게 어떠한 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와 그렇다면 국민들 모두가 이 배상 책임에 자유로울 수 없는가에 대한 법적, 정치적 책임의 한계를 명시할 어떠한 이유가 있는지 거의 무지와 가까운 관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일반 독일 국민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을 윌슨 뿐만 아니라, 여기에 참여한 다른 정치인들도 갖고 있었겠지만 결국 그것은 그저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케인스는 여실히 밝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소극적인 정치적 접근은 당시 로이드 조지 총리가 선거를 앞두고 있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인스는 로이드 조지 총리가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무능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지적하고 있었는데요. 전쟁 배상과 조약 협약에 따른 영국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도 그 여론과 다음 권력을 위해, 다시금 표를 얻어아먄 하는 결단 사이에서 로이드 조지 역시, 무능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케인스가 당시 영국의 국내 상황이 어느 정도는 '총리가 자초한 문제'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즉, "다른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독일로부터 전쟁의 전반적 비용을 확보하겠다는 선거 공약은 역사상 영국의 정치인들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가장 심각하고 무모한 정치적 행동 중 하나"라고 케인스는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영국 수상은 이러한 국내외적 기대감과 이를 조정하는 정치적 무능에 빠져, 독일과 체결할 조약에 불공정하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경제적 근거를 내세우고, 윌슨 대통령과도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한 당시 엘리트 정치권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관되게 독일의 배상금 지급의 불가능성을 강조한 케인스는 현재의 붕괴된 독일 경제와 산업 기반 시설이 실질적으로 회복되기가 어려운 정치적 환경, 이런 상황에서 독일 국민의 사유 재산까지 쥐어짜내야 하는 문제에, "독일은행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독일 마르크화는 평가절하될 것이고, 이 평가절하는 독일의 미래 배상 전망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독일의 신용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독일 마르크화가 적정 수준 이하로 평가 절하된다면 그 자체로 유럽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는 독일 경제를 회생불능으로 만드는게 미국과 서유럽에 결코 이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추정되는 독일이 갚아야 할 배상금이 50억 파운드로 일부 제시되기도 하지만, 케인스는 이를 총체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연합국 측이 독일에 요구할 배상금이 실제적으로는 80억 파운드가 초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합니다. 이것은 독일이라는 국가의 경제 붕괴를 자의반 타의반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수치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은 이전과는 다른 산업 발전의 규모로 시민들에게 있어 삶의 풍요로움이 증대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이 미래에 대한 낭만주의적 사고가 점차 대세가 되기도 합니다. 인류의 이런 진보가 서로간에 더이상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긍정론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생산 수단의 발전과 그로 인한 소비의 증대, 시장의 발전은 이러한 경제적 관계를 통해, 평화를 촉진시킨다는 경제학자들의 완고한 아이디어와도 꽤 맞닿아 있는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참혹한 대전은 많은 사람들의 순진함을 깨뜨렸고 전후 유럽인들의 사고관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대전 가운데 정치지도자들의 아주 지독한 인명 경시는 몰론이거니와 자신들이 겪은 전쟁이 이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케인스는 과연 앞으로의 세대가 살아갈 유럽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고 예견하고 그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다시 주지되는 결핍과 분노,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와 교묘한 정치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미래의 유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전후의 대책에 있어 그만의 해법을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기도 하는데요. 일종의 '처방'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7장은, 전반적인 이 '평화조약 개정'을 제시하고, 최소한이나마 독일 산업에 기반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생계 수단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그는 조언합니다. 특히 이러한 관계 개선을 위해 민주주의 국가들의 서로간의 이해와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어느 정도 바라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당시 요건으로도 꽤나 이상적인 해법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과연 정치적 이합집산에 놓인 유럽 정치가 이를 수용할 수 있을지는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요. 조약이 철저하게 이행되었던 그 결과는 그것이 주된 요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음 대전을 초래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당시 독일인들이 바랬던 연합국의 최소한의 배려는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렇게 독일의 패전 책임은 불행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는 정치인들의 허위와 다름없는 발언과 국가간 이해관계에 매몰된 국제관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안일주의에 기반한 전후 체제는 다시금 인간을 배반하게 만듭니다.


-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독일 국내의 식량 수요에 따른 식품 수입이 연합국에 의해 전면적으로 용인되지 않아 대다수 독일 국민들이 기아 상태에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충격적인 진술이었습니다. 전쟁의 범위 그 자체를 치열한 전투 속에서 이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종전이 급박하게 이뤄졌다 하더라도 패전국의 시민들이 하루하루 먹고 자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현실이 누구보다 권력자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는 점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시대를 다른 모든 시대와 구분하는 특징은 고정적 부와 자번 개선이 대규모로 축적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부의 분배에서 존재한 불균등이었다.

다만 지금 나는, 불평등에 근거한 자본 축적의 원리는 전쟁 이전의 사회질서에서, 그리고 그 당시에 우리가 이해하던 의미의 진보 개념에서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원리가 불안정한 심리적 상태에 좌우되며 이 심리적 상태를 다시 살려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독일인은 협박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협상에서 어떤 관용이나 후회도 보이지 않고, 상대방을 기회 삼아 이득을 얻을 수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하며,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일도 서슴지 않고, 명예나 자존심이나 자비심이 전혀 없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프랑스와 클레망소의 정책은, 구질서는 항상 똑같은 인간 본성에 기초해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 그러므로 국제연맹으로 대표되는 원칙은 모두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최대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놓는 것, 1870년 이후 독일이 발전하면서 이뤄놓은 것은 모두 원상 복귀시키는 것이 프랑스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워싱턴에서 효과를 보았던 초연함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비정상적일 만큼 내성적인 그의 성격 때문에 도덕적으로 자기와 동등하기를, 또는 자신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기를 원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주요 연합국 및 관련국 사이의 조약에서 확정될 국경의 범위 안에서,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엄격히 존중한다. 독일은 국제연맹이사회의 동의가 없는 한 이 독립이 양도 불가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에 더해 독일은 연합국이 요구하는 경우 향후 5년 동안 매년 최대 20만 톤의 선박을 연합국이 지정하는 형태로 건조해 연합국에 양도하며, 이 선박들의 가치는 독일이 지급해야 할 배상금 총액에서 차감된다.

왜냐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채무 권한을 실현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게 자신들의 이익에 절대적으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이드 조지는 여러 조언자의 의견 사이에 존재하는 넓은 간극 뒤에 자신을 숨긴 채, 독일이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의 정확한 크기는 자신이 조국의 이득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다뤄야 할 미해결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이전에 영국이 엄숙하게 선언한 약속, 바로 그 적국이 무기를 내려놓을 때 믿고 있던 약속과는 다른 배상을 받아내는 것을 자신과 영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만들었다.

독일의 재정적 파탄이 너무 심해서 독일은행의 금을 제외하면 당장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양이 상당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독일을 한 세대에 걸쳐 노예 상태로 격하하고, 수백만 인간의 삶을 퇴화시키며, 한 나라의 모든 국민에게서 행복을 박탈하는 정책은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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