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돈
케빈 필립스 지음, 이건 옮김 / 다산북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케빈 프라이스 필립스는 1941년 11월 30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습니다. 필립스 가(家)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및 잉글랜드 혈통으로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으로 온 이민자 집안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공화당에 매료되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런 유년 시절을 거쳐, 뉴욕시의 브롱크스에 소재한, 공립 특수 고등학교인 브롱크스 과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미국 뉴욕 주의 해밀턴에 위치한 사립 인문대학인 콜게이트 대학에서 정치학 전공으로 졸업했고,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공립 연구 대학인 에든버러 대학에서 유학을 하기도 했습니다. 1964년에는 하버드 대학의 로스쿨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필립스는 초기 경력에서 뉴욕 출신의 변호사이자 자유주의 정치인이었던 폴 앨버트 피노의 보좌관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합니다. 1968년에는 리처드 닉슨의 선거 캠프에서 유권자들의 투표 패턴에 대한 전략가로 일했고, 여기서 미국 정치 내에서 보수주의 정치의 변화를 예측해 미국 정치학 분야의 영향력 있는 논저인, 『떠오르는 공화당 다수』의 초안을 만들게 됩니다. 선거 이후, 그는 닉슨 행정부 시절 법무부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지만 정치와는 선을 긋고, 나중에 작가와 평론가로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몸담았던 공화당에 환멸을 느낀 필립스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 당시, 더욱 확대된 부의 불평등에 대해 비판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의 여러 평론과 주지된 논점들 가운데 미국 정치가 현재 기독교적 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정주의적 행태로 변질되고 있으며, 일부 정치 가문들이 대를 이어 의회를 세습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이외에 그의 개인적 삶은, 1968년에 마사 헨더슨과 결혼을 했고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뉴욕을 떠나 플로리다 주 네이플에 요양차 내려왔던 필립스는, 2023년 10월 9일, 알츠하이머 합병증으로 인해,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Bad Money"로 지난 200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9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출판사의 사정에 의해 절판된 상황입니다.

저자인 케빈 필립스의 지난 이력으로 보건대, 공화당 주류 정치에 있던 인물이 노선을 바꿔 정권과 지지 세력을 비판하기란 쉽지 않은 일임은 분명합니다. 그의 이 논저는 바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글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저자가 6장에서, 과거 스페인 제국의 몰락을 언급하며, 당시 마드리드에 있던 귀족들이 부패와 사치에 빠져, 그 신대륙으로부터 축적된 그 많은 금과 은에도 불구하고 세력을 잃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미국이 처한 투기적 금융 경제와 정치의 무능으로 결합된 지속 불가능한 체제를 과거 스페인과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의 사례들에서 분석하고, 2008년 즈음의 미국 경제의 몰락의 요인이 되었던 '주택 시장의 붕괴'를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현격한 사례들에 앞서, 저자는 "경제 엘리트들의 도덕적 해이"라는 개념이 2007년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었는데요. 즉, 철저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이뤄진 미국 금융 시장에서 과거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볼 수 없으며, (어쩌면) 시장이 합리적으로 탐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에둘러 예측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필립스의 분석을 토대로 이 도덕적 해이라는 개념이 그 이전에는 생겨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본다면, 2008년의 뉴욕 발 금융 붕괴의 일차적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파리드 자카리아나 마틴 울프 등과 같은 이들이 2008년의 '대위기'에 대한 수많은 분석서를 세상에 내놓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언급된 내용 중 우선 미국 정치 역사에서 남북 전쟁 전후로, 동북쪽의 금융 엘리트들을 견제하기 위해 나섰던 민주당의 정당사가 인상 깊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저자는 1장에서, 찰스 긴들버거를 인용하며, "경기 순환과 절정기의 위기에서 발생하는 투기 열풍이 우려되며, 특히 금융 부문이 걱정스럽다. 경기과열이 모두 광기와 공황으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이런 패턴이 매우 자주, 그리고 매우 비슷한 형태로 발생하므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금융 부문의 투기적 성격에 대해 논하기도 했습니다. 일전에 전문가들은 의회 로비로 집중된 '글래스-스티걸 법'의 무력화를 제일 먼저 끄집어 내기도 했는데요. 저자의 관점은 이와는 약간 다르게 당시 FRB의 책임자 앨런 그린스펀이 실리콘 벨리의 IT 거품을 직면하자 금리를 내리며, 시장의 거품을 만들어냈듯이, 이 주택 대출 (서브프라임)의 과도한 투기적 증권화에 있어서도 역시나 전과 마찬가지로 실질적 대책 없이, 그저 거품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연연했다고 강조합니다. 그린스펀은 알려진 바대로 강고한 '통화주의자'로서, 거품이 마냥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기존의 입장과 만약 시장이 위기에 처한다면 버블을 더 부채질하는 방법의 소위 탈출 전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2008년의 대위기는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으로 당시 미국 시민들이 중국 발 자금으로 너무나 과도한 신용 생활을 영위했고, 더 나아가 은행 대출로 자신의 소득 규모와 맞지 않는 주택 구입에 나섬으로써, (물론 당시 정부가 이를 획책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정치와 경제의 무능과 맞물려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장에서도 이미 드러지만 당시 미국 금융 업계의 무분별한 대출 관행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음 4장에서, 저자는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 영어권 국가들의 주택 소유 열망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당시 미국에서 다수 시민들의 은퇴 계회과 주택 보유를 위한 소위 '은행의 조력'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부채의 증권화'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특히, "주택 시장이 붕괴하고도 경기 침체가 발생하지 않은 경우는 1951년과 1967년 단 두 번이었다"는 사실과 이 때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때문에 국방부와 전쟁 호황이 시장과 미국 경제를 구한 것이라고 분석됩니다. 이러한 논리적 배경은 충분히 설득적이고 우리가 2012년 경의 중국의 주택 시장 거품을 우려했던 것처럼 굳이 2008년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시장의 과도한 거품'은 결국 다수에게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미국은 기축통화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로 사실상 미국 경제의 견실한 체제 유지는 세계 경제를 뒷받침하는 최우선 선결 과제이기도 했습니다.

과거 런던이 기초를 마련했던 금본위체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수습과 세계 경제 재편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 영국이 갖고 있던 권력이 점차 뉴욕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저자는 1949년의 런던의 패착과 파운드화의 몰락을 다루면서 '강대한 산업 국가'였던 미국의 일면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 대전 내내 석유가 새로운 에너지 원으로 부상하고 이 석유의 수급이 국가와 경제를 지탱하는 자원임을 깨달은 미국은 석유 수출국 기구 (OPEC)에 압력을 가해, 거래 통화를 달러로만 할 것을 사실상 강제합니다. 이 때의 중동 산유국들은 석유 거래 화폐가 달러에 연동됨으로써, 환차손에 따른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더욱이 미국 경제의 부침에 따라 달러화가 변동을 띠게 됨에 따라, 이란과 같은 국가는 석유 수출 대금을 달러가 아닌, 엔화나 유로화로 변경합니다. 물론 이란은 이슬람 혁명 이후, 제재를 당한 국가이기 때문에 달러가 아닌 주요국의 통화로 거래하는 것이 분명 이익이었을 겁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5장은, "중국 기업들의 경우, 이란 석유 구입량 세계 1위인 국영기업 주하이젠롱트레이딩을 포함해서 대부분이 이미 유로화 결제로 전환하였다"고 첨언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인 필립스는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동안 이란 경제가 버틸 수 있었던 주요 요인에는 바로 이러한 전환이 배경이 되었을 겁니다. 이는 미국 당국의 허를 찌르는 약삭빠른 대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논의된 5장의 '피크오일' 즉, 2010년을 기점으로 전세계 원유 생산이 감소로 들어설 것이라는 예측은 이후 현실과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셰일 가스의 혁명과 각 산유국들이 생산 설비의 현대화로 지속적인 증산이 이뤄지게 됨으로써, 2006년 이전의 예측들은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저자는 조지 W. 부시의 제2차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개입이 중동의 정치적 위기를 심화시켜, 사우디를 비롯한 국가들의 원성을 미국이 들어야만 했다고 강조합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가 이라크 전쟁에 앞서 에너지 관련 회의를 했던 것처럼, 조지 W. 부시의 후세인 축출은 결국 '이라크의 석유'가 원인이었음이 기정사실이었습니다. 당초 부시의 기대대로 후세인을 제거하여 중동의 정치적 분위기를 완화시킨다는 가정이 일전에 게리 거스틀의 분석대로 실패로 끝난 것이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저자는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가 과연 무엇을 위해 전쟁에 나선 것인가"를 마찬가지로 꼬집고 있었습니다.

이 글을 출판하고 난 뒤에도 포퓰리즘 정치를 목격한 필립스가 앞으로의 미국 정치를 어떻게 예견했을지는 불명확하지만 그는 6장 이후의 논증을 통해, '희망이 없는 미국 정치'를 직시한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는 맨슈어 올슨을 인용하여, "특수 이익집단에 의해 정치 및 경제 동맥이 막혀서, 생명줄에 해당하는 아이디어와 엘리트가 순환하지 않기 때문"에 1945년 이후, 성공을 거듭했던 미국의 정치경제가 쇠락에 들어선 연유를 (정치권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는 종래의 노엄 촘스키와 크리스티안 마라찌가 비판적으로 주장했던 바와 상당히 유사한 논리적 연계이기도 합니다. 앞서 제가 언급하기도 했지만 "남부와 서부는 토머스 제퍼슨, 앤드류 잭슨, 루스벨트, 트루먼의 지도 아래 민주당 진영을 형성하여 북서부 금융 엘리트에 대항했다."는 민주당의 이력은 현재 월가 엘리트들과 적극적으로 야합한 현실과 대비되기도 합니다. 힐러리 클린턴을 넘어서는 정치 자금을 월가로부터 거둬들인 버락 오바마의 사례는 일전에 CDO를 만들어낸 "금융의 현대화" 만큼이나 노골적이고 기술적입니다. 이어지는 6장에서, "미국의 공화정체와 민주주의를 저해하면서 가문을 중시하는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저자의 예견은 마치 그 유명한 '코크 형제'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본문에서 '족벌주의'가 딱 한번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 단어로 인해, 현재 미국 정치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여실히 짐작하게 하는데요. 이런 정치에 대한 전반적인 멸시와 거부의 풍조는 민주당과 공화당 이 양당을 모두 거부하는 시민들과 이들을 통해, 세력을 포집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극우 포퓰리즘 정치의 급격한 성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2008년 대위기의 원인 제공자인 월가의 금융 엘리트들이 뒤이어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에 의해 그 누구도 기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새로운 엘리트들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가 어떤 식으로 보호 받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데요. 여기서 소개된 것처럼 과거의 민주당이 설사 신자유주의와 협력을 했지만 이런 이행의 결과로 촉발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정치권이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제겐 뭔가 아이러니하기도 했습니다. 금융 시장의 현대화와 기존의 경제 체제를 뒤바꾸게 만든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명암은 분명합니다. 저는 "시장이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확언을 정치권이 반쯤 수용하기 이전에,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무능의 반복된 설계와 권력과 돈이 지금처럼 유지될 수 있는 체제가 보장된다면 그 외 다른 정치와 다수의 삶은 상관없다는 미국 부유층의 소위 '복음'을 제도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움직임이 동반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건전한 민주 체제의 우선적인 기반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시민 다수의 삶의 조건'에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융 공학이 도를 넘어서게 되었다"는 이 책의 경고를 미국 시민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과도한 금융 공학은 저자의 제목대로, 정치를 뒤흔드는 '나쁜 돈'을 양산하고 결국에는 민주주의 기반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여겨집니다. 과거 "월스트리트가 '오염된' 주택저당증권 및 파생상품 판매로 오명을 뒤집어썼고, 결국 이익과 명성에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고 반복하는 내용은, 여전히 금융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가 필요함을 깨닫게 만듭니다. 분명 세계와 미국은 2008년 이전으론 돌아갈 수 없는 점은 거의 명백해 보입니다.


- 6장에서 저자는 "일본, 한국, 타이완 등 미국으로부터 군사력 보호를 받는 나라들은 미국 국채와 정부기관 부채를 외환보유고로 대량 보유함으로써 비용을 간접적으로 분담하면서 달러 가치를 떠받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미국의 동맹국인 우리 나라가 그저 안보와 군사적 수혜국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진실은 이처럼 우리와 미국이 서로 얽혀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비종교적인 유럽인들과 국제 엘리트들은 미국의 독실한 기독교 우파들이 부시 행정부의 대내외 정책에 지나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을 "나쁜 돈 Bad Money"으로 지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부가 과거나 현재나 금융 부문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해서 ‘돈‘에 부정행위가 발생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케인즈를 따르면서 일부는 슘페터도 따랐던 하이먼 민스키는 금융시스템이 투기와 위험에 취약하다는 주장으로 매우 유명해졌는데, 숭배자들은 8월의 공황을 ‘민스키 시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금융 부문은 강력하고도 지속적으로 금융부채를 확대하여, 결국 모기지 부채를 비우량 고객과 무자격 고객들에게까지 확산시킴으로써 금융지배를 완성하였다.

틀림없이 이런 민간부채의 홍수가 금융 부문의 팽팡, 차입운영, 야심에 고효율 연료를 제공해주었고, 그 덕에 금융 부문은 1990년대 중반에 GDP 기준으로 제조업을 추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달러를 지켜보는 수십 개 국가들 때문에 다른 종류의 위험이 미국에 일어나고 있다. 이들은 자국통화를 달러에 연동시키는 나라, 석유판매대금을 달러로 받는 나라, 중앙은행 금고에 달러가 가득 찬 나라, 1000억 달러 이상의 국부 펀드를 자랑하는 나라들이다. 이들은 인플레이션을 우려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 규제당국은 효율적시장이나 규제완화 이론에 사로잡혀서, 진행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시장의 현실을 외면하려 했다.

그린스펀이 2001-2003년 점진적으로 금리를 낮춘 것은, 같은 맥락에서 정부가 후원하는 두 거대 모기지회사인 페니메이와 프레디맥을 구제하려는 뜻도 있었다고 일부에서 추측했다.

미국 및 세계의 중간층 및 중상층은 평등주의에서 멀어져 사치로 기울고 있으며, 공직을 구하는 자들도 이런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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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즈 웨이워드파인즈 시리즈
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변용란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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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윌리엄 블레이크 크라우치는 1978년생으로 2015년에 TV 드라마화 된 작품인, 『웨이워드파인즈』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그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스테이츠빌 인근에서 태어나, 같은 주의 올린에 소재한 공립 고등학교인 노스 아이레델 고등학교와 채플힐에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이런 그의 재능은 중학생 시절부터 발휘되어 이 당시에 단편 소설 및 글쓰기 준비를 하게 됩니다. 크라우치는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첫 소설인 『사막의 장소』와 『잠긴 문』을 출간합니다. 그리고 2011년에는 『런』을 자비로 디지털 출판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최근작인 『30일의 밤 Dark Matter』역시, TV 드라마화가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이외에 그의 개인사로는 1998년 6월, 레베카 그린과 결혼했으나 두 사람은 2017년에 이혼했고, 2019년 당시에는 재클린 벤-제크리와 교제중이었습니다. 또한 팬들을 위해 자신의 개인 사이트를 운영중이고 이곳에서 글과 방송에 대한 소통에 나서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ines"로 지난 20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4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출판사의 사정으로 절판된 상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015년 당시 이 작품이 TV 드라마화가 되었을 당시, 시즌 2까지 접한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고 해서 기대를 하고 찾아보게 되었는데요. 에단 버크 역을 맡은 맷 딜런의 다소 부족한 연기와 극의 진행에 따라 일부에서 보이는 개연성 실종에 어느 정도 실망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당시로서도 서사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류의 완전히 다른 끔찍한 진화"는 꽤나 보기 드문 주제이기도 했는데요. 이 소설의 맨 끝에 인용되어 있는 마이클 크라이튼의 종래의 태도와는 별개로, 작가인 크라우치는 "인간이 지구에 저지른 짓거리"에 따라 인간 게놈이 변형되었고 더 나아가 오염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는 경고를 이 작품을 통해, 밝히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과학적 연계의 설득적 근거는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주인공인 에단 버크는 2012년, 미국 재무부 비밀 요원으로 (통칭 시크릿 서비스) 이 극의 흑막인 젠킨스가 이때 벌이고 있던 일을 수사하던 중, 실종됩니다. 결국 모종의 연유로 그는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아이다호의 외진 지역인 웨이워드파인즈였습니다. TV 드라마에서는 에단 버크와 관련된 과거 행적 가운데, 제2차 이라크 전쟁에서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알카에다에 의해 포로가 된 사항을 삭제했습니다. 아예 나오지가 않는데요. 원작을 읽어보니 영상에서 보았던 '에단 버크'의 정신적 문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보통 전쟁 포로를 경험한 끔찍한 기억은 삶을 지속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심각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공화당 대선 후보이기도 했던 존 매케인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5년 6개월 동안 전쟁 포로로 억류된 경험이 있기도 합니다. 그는 그동안 많은 언론을 통해, 그때의 경험들을 진심으로 토로하며, 미국 시민들에게 나누기도 했습니다. 극의 에단 버크 역시, 회상하는 장면을 통해, 그가 전쟁 포로로 어떠한 참혹한 경험을 겪게 되었는지 접할 수 있었는데요. 이러한 기억은 그의 행동 전반에 미치고 있었습니다. 특히 부정적인 측면에서 말이죠.

물론 그 전쟁 포로의 기억이 아니더라도 그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웨이워드파인즈라는 작은 마을이 본능에 있어서도 가히 정상이 아닌 곳임을 직감합니다. 마을에 실제로 통용되는 지폐가 1950년대에서 1960년대에 쓰이던 달러화였고 서술되는 마을 사람들의 일견 모습들이 억눌려 있거나 부자연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를 내부의 사람들이 무슨 괴물 보는 듯한 시선은 차치하더라도 작가인 크라우치는 이 사람들을 어쩌면 "자유에 대한 기본적 욕구"가 거세된 어떤 군중상, 혹은 집단성을 그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극 후반부의 에단과 젠킨스와의 대화에서, 에단은 젠킨스에게 "당신은 이 마을을 거의 폭력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일침하고 그것을 비판하고 있지만, 이에 화답하는 젠킨스는 "자유란 그저 21세기에 나온 관념" 정도로 일축합니다. 지금은 자유가 아니라 시급한 대책이 필요한 시기라고 언급하면서 말이죠.

적지 않은 작가들은 예를들어, 핵전쟁 이후의 아포칼립스적 시대상을 그려내면서, 자유주의적 질서를 잃어버린 인간 군중의 폭력적 상황을 서사의 주제로 삼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작품 역시, "거부할 수 없는 폭력적 질서에 일방적으로 노출되고, 심지어 무비판적으로 순응한 인간들"에 대해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었는데요. 후반부에 젠킨스가 말하는 아주 중대한 시기의 인간종의 보호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계획의 전반은 그가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했듯이, 최소한 '계획의 대상자'들에게 앞으로의 문제를 위해, 많은 토론과 대화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시간 낭비일지라도 말입니다. 자신의 삶이 통째로 날아가고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그 이전의 삶에 대한 대부분을 재조정해야만 하는 시점에서, 9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을 감행하거나 탈출을 해서 목숨을 잃었다면, 기존의 체제를 넘어서는 일부 혹은 전반적인 대안이 필요했습니다. 그저 생물학적인 인간종을 유지시키기 위한 아주 본능적인 수준의 대처, 그리고 인간성 말살에 가까운 억압과 폭력, 그리고 프로파간다가 주가 된다면 그것은 수단이 목적을 배반하고 말살시키는 행위에 가까울 것입니다. 극중 어린 아이들이 아무런 도덕적 제재 없이 폭력에 물들어 있는 장면은 역겨운 부분이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매몰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작가의 주제 의식이 어느 정도는 엿보여서, 답답한 주인공의 행보를 어느 정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 보게 되었습니다.

아직 드라마를 못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시즌2와 시즌3으로 이어지는 미성숙의 어린 소년들의 인간성 말살의 전체주의적 개조화도 충격이지만 주인공의 비참한 몰락 역시 보는 내내 음울하고 이후에는 한동안 불쾌한 상념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저는 이번에 원작에 있던 요소를 드라마가 제대로 연출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이후 절판된 시리즈의 나머지 작품들을 구해서 읽고 싶지만 그것이 쉽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있어, 자유 의지와 선택의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결정이 아닌 외부의 개입 같은 것이 얼마나 인간 사회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외부 세계가 처참히 무너지는 소위 아포칼립스 상황이 인류의 직접적 위협이 된다기보다 그런 '비상 상황'을 이유로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기본적 가치와 권리를 무참히 압살하는 어떤 권력이라든지 맹목적 믿음과 같은 일련의 폭력적 과정들이 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심히 경고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웨이워드파인즈 바깥세상에 대해선 서로 이야기 하지 않아요. 그게 하나의 규칙이죠."

"바로 그거야, 1971년에 데이비드 필처라는 젊은 유전학자는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네. RNA 재배열이나 DNA 다형성 같은 개념이 생겨나기도 전의 일이라는 걸 명심하게. 그 친구는 우리 인간의 유전적 정보가 담긴 근본적 총체이자 세포의 성장을 담당하는 인간 게놈이 변형되고 있으며, 점점 오염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네."

"한동안 여기서 지낸 후에는 사람들이 빠짐없이 현실에 동조하는 게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뭔지는 나도 몰라요. 물어본 적도 없고요."

에단은 컴퓨터 모니토를 흘끔 쳐다보았다. 아주 크고 오래된 고물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쓰던 것 같은. 그렇게 육중한 모니터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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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스 세계문학의 숲 52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시공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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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프랑스를 살다 간, 스탕달은 1783년 1월 23일,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태어났습니다. 원래 본명은 마리-앙리 벨 (Marie-Henri Belye)로 부친은 고등법원 변호사였던 세뤼벵 벨이었고 모친은 앙리에트 가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스탕달은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매사 강압적이고 몰이해적인 부친과의 생활은 그로 하여금 "억압적인 유년 시절"이라는 혹독한 기억을 새기게 했습니다. 이는 모친과의 관계가 끔찍했던 이렌 네미롭스키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스탕달 역시,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자신의 아버지를 경멸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혼란스런 프랑스 혁명기에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자, 보수왕당파인 부친이 반혁명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됩니다. 그 유명한 로비에스피에르의 공포 정치기에 그는 몇 차례의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한 가정사를 뒤로하고 스탕달이 16세가 되던 해에 나폴레옹 군에 입대하게 되었으나, 1814년 나폴레옹이 권력을 잃게 되자, 군대를 떠나게 됩니다.그는 이 시기에 정렬적인 이탈리아의 문화와 국가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데요. 자신과 같이 어떤 구속도 없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그러한 가운데 애정을 포함한 감정을 따라가는 인물에 대한 본인의 굳건한 지향을 수립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적과 흑』과 『파르마의 수도원』의 주제 의식이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821년 6월, 그전까지 지내던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27년에 그의 첫 장편인 『아르망스 Armance』를 출간했으나, 그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1830년 무렵에 다시 이탈리아로 떠난 스탕달은 이듬해인 1831년 파리로부터 교황령 치비타베키아 주재 영사로 임명되어, 4월에 부임하게 됩니다. 그는 이때에 영사직을 수행하면 로마와 밀라노 등지를 여행하면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1939년 후반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나폴레옹에 관한 전기 등을 쓰기 시작하며 소일을 하다, 뇌병변이 발생해 1940년 1월 1일에 갑자기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병의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던 그는 결국 1942년 3월, 뇌출혈로 사망하기에 이릅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연유로 그의 묘비에는 다른 수식어보다 "밀라노인"이라는 단어가 함께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rmance"로 지난 1827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는 출판사에 사정의 따라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빈 체제에 의해 프랑스에 다시 왕정복고가 이뤄지는 시점으로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여기에 혁명기를 온몸으로 경험한 스탕달이 구체제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그의 다른 작품으로 충분히 짐작할 만합니다. 과거 루이 16세 시절에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드 말리베르 후작가의 유일한 아들인 옥타브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이제 갓 20세를 넘긴, 홍안의 청년으로 고결하고 분별력을 갖고 있으며, 후반부 부친인 드 말리베르 후작의 평가대로 "그저 평범을 넘은 비범한 청년"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이 말리베르 가문은 과거 루이 7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시점에 왕과 함께 종군했던 조상을 유산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는 가문의 역사에 대한 충분한 자긍심을 갖게 만들었을 겁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말리베르 가는 매우 중대한 고비를 앞두고 있었는데요. 프랑스 대혁명 기간에 망명했던 귀족들의 재산 피해를 보상해주기 위한 일종의 '배상법'이 의회 통과를 앞두고 있던 즈음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남다른 감수성을 갖고 있던 옥타브는 차라리 이 법이 부결되기를 온 몸으로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법이 정당하지 않고 그로인해 발생한 재산의 일부 복귀가 자신을 결혼에 내몰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반부에 별일 아닌 듯 드러나지만, 옥타브는 그가 아직 "소년일 적에 했던 그 무모한 맹세"가 자신의 삶을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이대로는) 어떤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자신에 대한 맹세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옥타브에게는 러시아 계 혈통을 갖고 있는 사촌 누이인 아르망스 드 조일로프와의 만남과 그녀와의 우정이 한 가닥의 위안이 됩니다. 옥타브는 모친의 명예로운 사촌인 드 보니베 후작 부인을 비롯, 배경이 되는 앙디이의 사교계의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에게 경멸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한때 몰락한 귀족들이 다시 왕정이 돌아오자 이제는 기댈 것이 '돈에 대한 욕망'밖에 없이 그저 하릴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어쩌면 과도한 감수성의 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자신을 겉으로나마 이해해주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바로 아르망스였습니다. 작가인 스탕달이 옥타브의 그 가치관을 언급하면서, 그가 인간에 대한 혐오와 지극한 염증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르망스에 대한 우정을 깊이 생각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진행되는 서사 도중에 언급하는 부분은 어쩌면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극중에서 옥타브가 자신에 대한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르망스가 옥타브를 향한, 진지한 눈빛과 진정한 태도는 누구보다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옥타브에게는 자신의 충동과 폭력성을 자기도 모르게 제어하게 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이처럼 작가인 스탕달이 이 작품을 왜 '아르망스'로 정하게 되었는지는 해석에 대한 극명한 부분이 있겠습니다. 옥타브와 아르망스 이 두 사람이 겪게 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뜻하지 않게 주변인들이 불러들이는 파국들로 인해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를 짐작하게 만듭니다. 스탕달이 옥타브의 입을 통해 브루투스의 비극을 언급했던 것처럼, 앞으로 이어질 옥타브의 뜻하지 않은 불행은 이를 예견하는 것으로도 읽혔습니다.    

이 때의 아르망스는 부모와 그 친지가 거의 남지 않은 상황으로, 그녀 자신이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것처럼, 이제는 거의 '평민 계급'이나 다름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런 그녀는 자신이 현재 아무런 배경이나 귀족가의 여식에게 으레 있어야만 하는 선의의 조력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항상 내면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그때 그때 만나게 되는 인물들과 상황을 조심스럽게 분석할 수밖에 없던 그 나름의 치열한 삶을 살고 있던 소녀였습니다. 즉, 이 둘은 가치관의 동일 선상에서 옥타브가 돈을 쫓는 소위 몰락한 귀족들을 경멸하는 것처럼, 아르망스 역시, 자신이 남자의 돈으로 안락한 결혼생활을 '따내려는' 주변의 시선을 일견 증오합니다. 그래서 스탕달은 서사에서 아르망스가 어떠한 '교태'도 몸에 익지 않았고 그것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는데요. 아르망스와 달리, 남편이 있던 아니면 그저 부인으로 불리는 소위 귀부인들이 옥타브와 같은 전도유망한 청년에게 어떠한 교태와 눈웃음을 흘리는지 장면 장면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옥타브가 반쯤 자신의 치기 어린 결정으로 만남을 지속하게 되는 도말 백작 부인의 인물 조성 자체가 아르망스와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도말 백작 부인의 처음 등장에서, 중후반부 이후의 전개에서 극을 갈등으로 이끄는 어떤 원인이 될 인물로 짐작하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자기애적인 인물의 표상이자, 더 나아가 주변의 시선을 온몸에 받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아는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녀에게서 의심의 냄새가 풍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예민한 감수성이 충만한 옥타브를 매개로 작가인 스탕달은 극중에서 구 귀족들의 행태와 여전히 놓여 있는 프랑스 사회의 폐해와 논란 등을 여실히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옥타브의 부친과 모친을 통해 드러내는 18세기 계몽주의에 대한 이들 계급의 거부감, 그리고 후반부 서술에서 은연중 나타나는 귀족 계급의 "자유주의에 대한 뜻 모를 배격"은 혁명 시기의 자코뱅의 행적을 몸에 새긴 그들이 알아채는 거부감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작가인 스탕달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코뱅과 같은 공화주의자들을 완벽한 극단주의자들로 묘사하고 있는 몇몇의 설정들은 그 시대가 남긴 흔적들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즉, 이런 측면에서 옥타브가 느끼는 시대가 불러일으키는 아픔은 단순히 구 귀족 계급이 여전히 답습하는 하등 쓸모없는 인간 관계 내의 '부질없는 거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이 귀족들이 지난 과거의 유산을 더 역겨운 것으로 대체하려는 몰염치한 의도 때문일 것입니다. 아르망스 역시, 자신의 몸과 젊음을 어떤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두려워하는데요. 저는 당시의 왕정이 돌아온 의회의 철지난 귀족 정치와 그 속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계급 내부의 정치 투쟁 같은 것이, 일말의 자유주의가 스쳐간 프랑스 사회의 흔적들을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워내는 동시에, 명예와 상관없는 아주 완벽히 다른 돈과 이익의 추구라는 모습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귀족 여성들이 보이는 계몽주의 철학에 대한 혐오도 그렇거니와, '철학을 하거나 배우는 사람들'에 대한 일관된 의구심도 그런 일련의 모습 속에 당시 프랑스 사회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관념의 혼란'과 계급의 몰락 속에서도 이들이 기득권적 이익을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을 이 소설을 통해,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귀족 계급의 철지난 유산이라는 명예의 불필요한 존재 때문에, 옥타브가 반쯤 자초하고 반쯤 받아들이게 되는 드 크레브로슈 후작 과의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치명적인 사건은 그와 아르망스 사이를 좀 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옥타브는 비로소 어리석은 자신의 감정을 반성하고 진심으로 아르망스와의 사랑을 받아이들이게 됩니다. 아르망스 역시, 다시금 옥타브가 없는 삶이 자신에게 지옥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게 되는데요. 이런  두 사람을 향한 옥타브 모친의 조력과 점차 이들의 사랑을 인정하게 되는 어쩌면 순진한 과정이 앞선 '과거의 명예를 그저 수단으로 삼고 오로지 개인의 이익'에 혈안이 된 모친의 오빠이자, 외삼촌인, 드 수비란 기사단령원장은 결국 이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고 맙니다. 통과된 귀족 재산 배상법을 바탕으로 이 기사단령원장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하찮은 이익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은 옥타브를 구슬려서 자신이 원하는 증권에 돈을 투자하게 만드는 것으로 노년의 안락을 쟁취하려고 하는 무책임한 시도였습니다. 물론 이런 노망난 늙은이를 그럼에도 존중했던 아르망스의 노력을 비웃을 필요는 없겠지만, "다른 이들의 교활함을 확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르망스의 순진무구함을 확인한다"는 감정이입된 스탕달의 언급과 함께, "어떤 계층이든 간에 어리석은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라는 절로 피부를 따갑게 만드는 잔인한 교훈 때문에 이어지는 결말을 곱씹게 만들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알량한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분명한 경고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르망스는 몇 번이나 옥타브를 향해, 자신의 주저하는 마음을 돌려보고자 재차 그에게 확인 받고 싶어했고, 그 역시 이런 아르망스를 사랑한다고 확신했으나 이들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순진함과 분별을 동시에 지닌 저들 연인에게처럼 그 미세한 틈조차 칼로 찌를 수 있는, 무분별하고 양식이 없는 자들의 그야말로 충동적인 행동이 어떠한 파국을 이끌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등장했던 인물들 중에, 지극히 오만하면서도 아무런 양식이 없고 그러면서도 의도대로 주변을 조종하고 더 나아가 극명한 파국의 사건을 나름대로 조롱해 마지 않던 도말 부인의 캐릭터 성에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이 인물은 한편으론 교활한 인물의 전형이면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로, 그동안 스탕달이 추구했던 리얼리즘 (물론 후세의 평가이지만) 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이해될 수 있었습니다.           

-극중에서 스탕달이 옥타브와 아르망스를 가리켜, '우리의 두 사람'이라고 난입해(?) 일컫는 부분은 웃음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특히 서사 가운데, '독자들'을 운운하며,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일말의 애정을 드러내기까지 합니다. 그런 면에서 스탕달의 이 작품은 여러모로 인상적인 소설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식견 높은 의사들은 드 말리베르 부인에게 말하기를, 그녀의 아들이 앓는 병은 다름 아닌 그 나이 때 그와 같은 신분의 청년들을 특징짓는 증상이라고 했다.

맙소사! 나는 거만하게도 스스로 우월하다고, 한 인간을 덮칠 수 있는 온갖 위험, 온갖 종류의 불행을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도, 눈앞에 닥친 이 고통을 향헤 빌고 있구나. 이 고통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주기를,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되기를.

러시아 제국 끝자락에서 태어난 드 조일로프 양은 더 없이 온유한 외양 아래, 유년 시절을 함께한 그 매서운 기후에 어울리는 굳은 심지를 감추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라도 겉으로는 친근한 태도를 꾸며 보이면 좋으련만, 드 조일로프 양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가 그와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으려고 그토록 조심했던 것은 마음을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지 그를 경멸하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신은 스물여섯 살이 되기 전까지는 단 한 여인만을 찬미해야 하는 일을 삼가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화려한 나의 친척은 명문가 출신이라든가 대단한 재산 같은 것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야. 나무랄 데 없는 처신과 신중한 두뇌, 선행의 능란한 과시가 뒷받침이 되어 내로라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당당한 삶도 부인에게는 수단일 뿐 목표가 아니야.‘

인생의 정수는 가슴을 느끼는 감정에 있으며, 사랑은 숭고한 만큼 숭고하지 못한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터라, 우리는 긴 세월 속에서보다 단 얼마간의 순간 속에서 더 많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족 내에서 서로 터놓고 지내다 보면, 게다가 큰 고통을 당해 걱정에 잠겨 있다 보면, 행동을 조심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 경우 겉치레를 위한 엄격한 예절에는 다 소홀해지면서 인격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될 때가 많다. 드 수비란 기사단령원장은 이 친척 아가씨가 가난하다는 점과 외국 이름이어서 발음할 때 매번 애를 먹는다는 점 때문에 그녀를 한 수 낮춰 대하곤 했다. 그 점은 때때로 드 말리베르 씨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지키는 극도의 예의, 오늘날에는 18세기의 유산으로, 증오할 게 없던 저 행복한 시대의 유물로 취급되는 이 예절 바름을 두고 건조하다고 트집을 잡을 것인가?

민중이 감히 이것을 읽다니 말도 안 될 일이지요! 민중이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할 눈이나 있다는 건지! 우리 왕당파의 신문들조처 이런 식인데 자코뱅 신문들에 무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귀부인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매사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고, 또 이를테면 불쾌한 말에 더욱 깊이 상처받고 돌이킬 수 없이 감정이 격해지곤 한다.

"어떤 사람이 가문이 좋고, 프랑스 의회 의원이고 게다가 꽤 부유하기만 하다면 궁정의 호의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시대가 이제 곧 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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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의 밤
블레이크 크라우치 지음, 이은주 옮김 / 푸른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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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스테이츠빌 인근에서 태어난 블레이크 크라우치는 같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올린에 있던 노스 아이레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채플힐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채플힐 캠퍼스)에서 영어학을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마칩니다. 그는 어린 나이인 중학교 시절부터 여러 단편 소설을 창작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그에게 명성을 안긴 작품은『웨이워드 파인즈 3부작』시리즈로 이 연작물은 영화 감독인 나이트 샤말란에 의해 TV 드라마화가 됩니다. 그리고 2004년과 2005년에는 두 소설인 『사막의 장소』와 『잠긴 문』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소설 역시, Sony Pictures의 텔레비전 시리즈로 각색 하기 위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고, 이 시리즈는 2024년 5월 8일, Apple TV+에서 공개되기에 이릅니다. 그의 개인적 삶으로는 1998년 6월 20일, 레베카 그린과 결혼을 했으나,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2017년 두 사람은 이혼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Dark Matter"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크라우치의 이 작품이 정식으로 TV 드라마화 되자마자, 다시 표지만을 바꿔 내놓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지금 알라딘 메인에서 팔리고 있는 판본에는 드라마의 두 주인공인 배우 조엘 에저튼과 제니퍼 코넬리의 얼굴이 들어가 있습니다. 다만, 제가 구입한 판본은 표지 갈이(?)를 하기 전의 번역본으로 추정됩니다. TV 드라마화 관련한 제 개인적 감상은 소설의 분량이 드라마를 제작할 정도의 긴 내용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영상화에 나섰으니 원작을 좀 수정하고 보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작가인 크라우치는 이 작품의 서사를 위해, 양자역학과 다중 우주, 그리고 뇌과학의 일부 작용 등을 사건의 주요 핵심 요소로 삼고 있습니다. 특히 양자역학과 다중 우주를 이런 식으로 다룬 소설이 있을까 싶었는데요. 보통은 광속 여행을 위한 우주선의 엔진을 설명할 때 쓰이거나 워프와 같은 소재에 부분적으로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크라우치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이 뇌의 의도적 제한으로 인해, 이차원 이상의 세계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주요 설정으로 삼고, 이를 혁신적으로 뒤집은 이른바 '차원 여행 혹은 다중 세계 여행'을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또한, 작가는 이러한 백셩에서 인간의 삶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선택의 시간을 다중 우주 원리에 차용하여, 도저히 믿기 힘든 서사를 펼쳐내는데요. 물론 부정할 수 없는 SF적 외피와 그 속에 작용하는 물리학의 이론들은 일종의 'SF적 스릴러'로 이 작품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은 수많은 삶의 선택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사소한 선택들이 그의 삶 전반을 알 수 없는 인생의 행로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소중한 가족과 매일의 작은 행복에 대한 조언 등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인 제이슨이 선택의 기로와 그로 인한 삶의 분절을 대표적으로 표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주인공인 제이슨 데슨은 대학의 학부에서 기초 물리학 등을 가르치고 있는 평범한 교수입니다. 그에게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요. 29살의 나이에 그의 여자친구인 다니엘라가 임신을 하게 되자, 앞으로 쟁취할 수도 있는 빛나는 미래를 뒤로 하고, 안온한 일상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느 날 이런 그에게 낯선 이로부터 불시의 습격을 맞게 됩니다. '게이샤 가면'을 쓴 사내는 그를 오래된 발전소 건물로 납치해, 알 수 없는 약을 몸에 주입하고 모종의 장치를 통해, 어디론가 보내 버립니다. 그곳은 그 게이샤 가면의 사내가 살고 있던 다른 세계로, 바로 이 지점부터 작가인 크라우치가 차용한 다중 세계의 일면이 드러나게 됩니다. 즉, 가면의 사내는 그가 했던 29살의 선택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한 인물로, 당시에 매달렸던 중요한 물리학적 실험을 성공하고, 30억 달러의 막대한 지원금을 얻어 초유의 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흔히 알고 있듯, 다중 세계의 간단한 이론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말고, 또 다른 동일한 (혹은 약간 상이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설입니다. 양자 역학과 관련된 다중 세계 이론을 연구했던 것이 제이슨이 이었고, 여기의 오리지널 제이슨과 저쪽 세계의 제이슨2는 서로가 다른 선택을 했던 같은 인물 혹은 다른 삶에 도달한 도플갱어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다중 세계 이론에서 A라고 불리는 세계에 살고 있던 내가 B라고 불리는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면 이 B라는 세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나와는 물리학적으로 어떻게 중첩될 것인가와 아니면 상상력을 더해, 아예 별개의 요소로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이 작품은 SF적 요소를 가미한 소설이기에 적절히 타협하며 읽는다면 주인공의 어긋난 서사에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영화인『패밀리맨』의 주인공처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내가 이룰 수 있는 미래에 올인하게 됨으로써 막대한 성공을 거둔 월가의 엘리트가 만약 그때 여자친구를 선택했다면 어땠을까를 잠시 '엿보는 것'과 같은 설정이기도 합니다. 마치 "돈과 명성을 향한 충분한 성공이 과연 삶의 본질이 될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진지한 고민들을 떠올리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앞선 영화와 확연히 구별되는 부분은 소설의 주인공인 제이슨이 아내와 아들을 몹시도 사랑하고 그런 자신의 인생이 결코 실패라고 여기지 않는 부분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마땅히 수용하고 그런 삶을 애정해 마지 않는 주인공 캐릭터의 일관된 태도는 충분히 존중 받을 만합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저쪽 세계에서 위기에 처한 제이슨을 도운 어맨다 루커스에 대한 서사와 그녀의 마지막 선택으로 이어지는 이후의 이야기 없이 그대로 퇴장해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TV 드라마로의 제작이 되었을 때, 이 어맨다 루커스에 대한 분량을 재조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아직 드라마를 접해 보지 못해서 이 부분은 정확히 말씀드릴 수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극중 제이슨과 어맨다, 서로 간의 애정에 대한 가능성이 적절하게 조정된 것은 괜찮았지만, 저쪽 세계에서의 제이슨2와 어맨다의 관계가 모호하게 남게 되어, 이 부분도 서사에서 아쉬운 부분으로 남았습니다. 여기에 전체적으로 극의 진행이 중후반까지는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제이슨과 어맨다가 거쳐간 행로로 인해 벌어지는 그 후폭풍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부족한 것은 물론, 후반부에서 전개가 극명하게 긴장감을 고려하지 않는 쪽으로 이어져, 재미 자체는 개인적으로 크게 줄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의 연작 시리즈 중 하나였던,『웨이워드 파인즈』처럼 분량을 늘려, 새롭게 연작 시리즈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물리학적 기반의 다중 세계 이론이 꽤나 고유하게 느껴져, 이 때문에 더욱 아쉬움이 컸습니다. 작가 역시도 후기에서 이 작품에 들인 시간과 노고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좀 전에도 언급했지만 후반부의 서사는 너무나 급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었기에 소재의 독창성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에 대한 기회가 좀 더 주어진다면 어떨까, 글 마무리에서 곱씹어 보게 되었습니다.



-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여러 설정 가운데 크게 놀랐던 부분은, 우리의 뇌가 다중 세계를 인지할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 오로지 하나의 세계 만을 인지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고 설명됩니다. 이는 꽤나 독창적인 설정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어린 사내아이를 키우는 것과 성년을 앞둔 사람이 나에게서 지혜를 구하는 건 아예 차원이 다르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기이한 현실의 일부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필시 나는 거시적 규모로 풍부한 양자 환경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고 아마도 자기장을 통해 안쪽의 물체를 원자 규모의 양자계와 연결한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실제로는 다중 우주에 살고 있지만, 그중 하나의 세계만을 인식하도록 제한하는 방화벽을 갖출 수 있게 우리 뇌가 진화해 온 거라면? 하나의 세계선. 순간순간 우리가 선택하는 그 하나.

나는 말한다. "10억 분의 1의 희박한 확률이지만,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건 다중 우주입니다. 무한인 거죠. 당신이 살던 세계와 비슷하면서도 내가 이 상자를 결코 생각해 내지 못한 세계가 100만 개쯤 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이걸 만들어낸 세계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선명한 아침 햇살을 받으니 마치 누군가가 거울을 산산조각 낸 다음 깨진 유리 파편 전부를 열 맞춰서 똑바로 세워놓은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왜 통제적인 엄마나 부재했던 아빠를 꼭 닮은 상대와 결혼할까요? 예전의 잘못을 바로잡아 보려는 거예요.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일들을 성인이 되어서 수정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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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남자 - 개정판 폴 오스터 환상과 어둠 컬렉션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북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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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영화 제작자였던 폴 오스터는 1942년 2월 3일,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사무엘 오스터로 저지 시티에서 형제들과 함께 건물 소유했던 지주였고, 모친인 퀴니 보갓으로 평범한 가정 주부였습니다. 이 부부는 일종의 이민자들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터가 고등학교 3학년 때가 되던 해에, 부모는 이혼하여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뉴어크 위콰히크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됩니다. 다른 가족이었던 삼촌은 당시 큰 명성을 갖고 있던 번역가 앨런 만델바움이었습니다. 오스터는 뉴저지 주 사우스오렌지와 뉴어크 등지에서 자랐고, 메이플우드에 있는 컴럼비아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는 1970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프랑스 문학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1974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와 조셉 주베르와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시, 에세이 등의 번역 작업을 지속하는데요. 이후 1982년에 호평 받은 데뷔작인 『고독의 발명 』으로 말미암아 『뉴욕 3부작』역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1980년대까지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했던 오스터는 1990년대 후반 영화 제작에 확고하게 전념한 후, 남은 20년 동안은 다시 소설과 회고록으로 작품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작품 활동을 제외한 자신의 외적 활동과 관련해, 오스터는 스스로의 정치 성향을 "민주당 보다 더 좌파적이라고 설명했지만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될 것 같아 민주당에 투표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2023년 3월 11일, 오스터의 아내 시리 허스트벨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가 2022년 12월에 암 진단을 받았고, 뉴욕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 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지속적 치료에도 불구하고, 폴 오스터는 2024년 4월 30일 브루클린 자택에서 폐암 합병증으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Man in the Dark"으로 지난 200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2008년 9월에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제가 구입한 번역본은 개정판으로 2025년 9월, 출판된 판본입니다.

극의 주인공인 오거스트 브릴은 현재 일흔두 살로, 1984년에 퓰리처 상을 받았을 정도로 명성을 얻은 비평가였습니다. 그는 자신 스스로를 "구덩이에 밀어 넣었다"고 말할 정도로, 사랑했던 아내가 암으로 떠난 뒤, 삶이 망가지는 정도가 아니라 무너지는 단계에 이른 상황입니다. 이런 그에게는 유일한 딸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글을 업으로 삼으려는 미리엄과 그녀의 딸이자, 손녀인 카티야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자신의 손녀 역시, 이제 시작된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고통을 당하고 말았는데요. 카티야의 남자 친구였던 타이터스 스몰이라는 친구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 타이터스 스몰이라는 청년의 죽음에 대해, 작가인 폴 오스터는 서두에 교묘한 함정을 만들어 놨습니다. "질병에 시달리는 젊은이"라는 표현이 물론 정신과 육체, 모두 해당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마치 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배경을 유지했는데요. 후반부에 드러난 정확한 그의 죽음을 통해, 왜 손녀인 카티야가 그렇게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노년의 주인공인 브릴도 말년의 큰 과제를 손녀인 카티야의 '세상으로의 복귀'로 삼은 만큼, 할아버지와 손녀라는 관계는 결국에 서로를 좀 더 면밀하게 알아가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두 사람의 크나큰 아픔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 위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거스트 브릴의 남은 삶을 이끄는 힘은 오로지 손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귀한 손녀는 자신과 세상을 떠난 아내 소니아와의 귀한 재결합을 가능케 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노년의 오거스트 브릴의 이야기와 또 다른 이야기인, 오언 브릭의 서사가 메타 소설처럼 이어집니다. 이 오언 브릭의 따로 이어지는 별개의 이야기는, 바로 오거스트 브릴이 쓰고 있는 작품으로 설명되는데요. 작가인 오스터에 의해 이 의미심장한 브릭의 스토리는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즉, 오언 브릭만의 세계와 사건들이 2000년대 초반의 미국 정치를 몸소 체험한 작가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인데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오언 브릭은 갑작스럽게 평행 세계로 이동하게 됩니다. 미국은 연방군과 독립군의 내전으로 치달은 상황입니다. 이것의 서사는 오스터 답지 않게 그다지 정교하지는 않지만 2000년 대선에서 대법원 판결 직후 주요 도시에서 발생한 시위가 끝내 폭동으로 이어져 유혈 사태로 번졌고, 뉴욕시와 자치구 대표들이 주도한 분리 독립 운동은 연방군의 공격으로 8만명의 무고한 피해자들을 낳습니다. 역사적으로 2000년의 미국 대선은 조지 W. 부시와 민주당의 앨 고어의 대결이었습니다. 이때 앨 고어가 승복해 최종적으로 조지 W. 부시가 백악관의 주인이 됩니다. 오언 브릭이 체험한 평행 세계에서는 이것을 아주 처절하게 비튼 것이죠.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반대하던 일부 미국 시민들이 봉기에 나섰고 여기에 호응했던 13개 주가 연방에 맞서 분리 독립하게 됩니다.

앞서 폴 오스터 작가의 고유한 정치 성향에 대해 설명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민주당보다 더 왼쪽이라고 했으니, 별개의 액자 소설로 봐도 되는 브릭이 겪게 되는 평행 세계의 '미국 내전'은 오스터 그 다운 발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선 오거스트 브릴과 여기의 오언 브릭의 복잡한 셈법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밝히겠습니다. 다만, 독립군의 자치 지역이 전국민 의료 보험 제도를 적용할 정도로 루즈벨트보다 더 진보적인 체제로 나아갔다는 점과 독립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조지 W. 부시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꺼려하는 모습은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서사에서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를 '파시스트'라고 주장하는 장면에서는 촘스키가 말했던 "누가 이들에게 전쟁을 할 권리를 주었는가"라는 대목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오스터는 개인이 지나온 역사와 그 속에서 살았던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영위했는지를 매우 기록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는데요. 실례로 1967년 뉴어크에서 있었던 인종 폭동인 '뉴어크 폭동'이 오거스트 브릴의 가족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저 역시도 놀랐던 부분입니다. 또한, 뉴어크 폭동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뉴어크로 차를 몰로 갔던 일은 지옥의 밑부분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는 작가인 폴 오스터와 오거스트 브릴이 혼재된 나레이션은 이때의 상황을 실감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도시에 있는 흑인 새끼들은 모조리 사냥할 겁니다." 라고 말하는 전직 대령 (아마도 백인이겠죠)의 서슬퍼런 모습은 '미국의 실체'에 대해 알리려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언의 극적이고 비참하면서, 현대사의 오명이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을 앞선 타이터스의 죽음으로 극대화 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인 오스터는 극명한 '선한 사람들'과 전쟁과 폭력 그리고 증오의 시대를 건너는 이들의 삶이 과연 어떻게 무너지지 않았는가를 의식적이지 않게, 교묘하게 탐구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주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오거스트 브릴의 입을 통해, 손녀인 카티야에게 전해지는 그가 살아온 잔잔한 삶의 궤적들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어린 나이에 아내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감정,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작은 딸, 누나와 매형의 불행한 삶, 결혼 생활의 부침을 감내하며 큰 실수를 저지르고 태어난 손녀를 통해, 두 부부가 진정 삶의 구원을 받게 되는 이야기는 작중 오거스트가 거쳐간 일상들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그토록 선한 아내를 만나게 되는 과정과 세상을 떠난 아내인 소니아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아름다운지, 눈에 보이는 미사여구나 도가 지나치는 서사 없이, 담백한 시선 처리와 언어로 이를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한번 이상 '끔찍한 사랑'에 대해 회고하기도 합니다. 지독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내가 내 자신이 아니었던 시절의 맨 모습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겠죠. 여기의 다른 주인공 혹은 서사의 조력자라고 볼 수 있는 오언 브릭이 자신을 만들어낸 오거스트 브릴의 다른 자아라고 애써 해석한다면 브릭을 구성하는 모습의 대부분이 오거스트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며, 이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환경과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젋든 늙었든, 부자든 가난하든,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기습해 오듯 우리에게 닥치고, 무감각한 상태에서 깨어난다"는 브릭의 예상치 못한 결말을 설명해주는 듯한, 이 작중 금언은 마치 이디스 워튼이 자신의 작품에 녹여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쉽게 부서질 수밖에 없다"는 서사가 문득 떠오를 정도입니다. 과연 내가 내 삶에서 얼마나 통제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는 역시나 돈의 문제 아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문장 중에, 분명하게 이어지는 서사와 함께, 다음의 문장이 눈에 밟혔습니다. "오직 선한 사람들만이 본인의 선함을 의심하고, 무엇보다도 바로 그 점이 그들을 선하게 만들어준다."는 먹먹한 문단과 함께, 이들 선한 사람들은 남들은 쉽게 용서하지만 자기 자신은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층된 설명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아마 제가 그다지 선한 인간이 아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거스트가 정말 선했던 아내에게 자신의 과오를 용서 받았기에, 그리고 아내가 자신을 남겨두고 떠난 것이 "왜 좆 같은지". 이 때문에 나는 내 삶을 궁지로 몰 수밖에 없었다는 전반부의 서사가 너무 의도적이지 않나 싶었지만 손녀를 통해, 다시 밟는 인생 경로와 그의 참회는 소시민들에게는 분명하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미국의 굴직한 그리고 부정적인 현대사와 맞물려, "당신은 이딴 세상에 왜 나를 남겨두고 갔는가"를 오거스트의 입을 그려보며,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아내를 몹시도 그리워하며 회상하는 한 어둠 속의 노인을 극에서 꺼내 그런 희한한 세상에서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희망 무언가를 찾았느냐고 되물어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우리에게 명시를 넘어선 각인의 삶을 보여준 작가는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괴상한 세상은 굴러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삶도 여전히 굴러갈 것이란 말이다"라는 역사 앞에 놓인 개인의 읊조림처럼 내뱉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울릴 뭐라도 건질 수 있다면 그 삶은 그나마 온전하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말입니다.


- 본문 226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극 중 오거스트의 출신 학교가 컬럼비아 대학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캐릭터는 작가인 폴 오스터의 모습이 투영된 인물로 짐작되었습니다. 책과 관련된 일도 그렇거니와 오랫동안 문학계에서 일한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실패와 의존성, 무질서, 규칙이 무너지는 것과 원칙이 손상되는 것을 극히 싫어했고, 그만큼이나 겁쟁이들도 싫어했다.

괴상한 세상, 만신창이가 된 세상, 주변의 온갖 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괴상한 세상은 굴러간다.

당신 세계에서는 그랬겠지. 프리스크가 말한다. 하지만 이쪽 세계에서 자네는 매사추세츠 7사단 상병이야. 미국 독립주 연합군 소속이지.

오직 선한 사람들만이 본인의 선함을 의심하고, 무엇보다도 바로 그 점이 그들을 선하게 만들어준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하다고 알고 있지만, 선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며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자기 자신은 용서할 수 없다.

법학대학원, 그에 이은 성공적인 변호사 활동과 점점 더 깊어지던 민주당과의 관계. 이상주의적인 좌파 자유주의자. 1960년 대선후보 지명전에서 스티븐슨 지지. 애틀랜틱 시티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엘리노어 루즈벨트 수행. 그리고 1962년 혹은 1963년 뉴어크를 방문한 케네디는 매형과 악수하며, "우리는 당신에 대해 아주 대단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럼에도 정해진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녀는 해야 할 일을 했고, 노란색 별 장식을 소매에 두른 채 공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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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6-08-14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참 폴 오스터에 빠져 있을 때 열린책들에서 나온 구판으로 읽었는데요...
오래 전에 읽어서 ‘인상 깊었다‘라는 단편적인 감상만 남아 있고, 내용은 대부분 잊어버렸네요. 올려 주신 글 보면서 예전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6-08-14 16:5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예전 판본의 표지가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열린책들은 판을 바꾸더라도 꾸준히 내줘서 다행입니다. 이 작품은 오스터의 진보적 정치의식도 엿볼 수 있고 지난 미국 사회가 어떠한 길을 내딛었는지에 대한 작가 자신의 성찰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제 부족한 글이 얄리님의 예전 느낌을 해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네요 ^^; 이렇게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