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패트릭 J. 드닌 지음, 이재만 옮김 / 민들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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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J, 드닌은 1964년 7월 21일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 카운티에 있는 윈저에서 태어났습니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코네티컷 주 최초의 영국인 정착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드닌 가(家) 역시, 아일랜드에서 도래했습니다. 아일랜드 인들 특유의 가톨릭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난 드닌은 1986년, 뉴저지 주의 공립 연구 대학인 럿거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박사 학위를 마치기 위해 다시 모교로 돌아오기 전까지, 그는 시카고 대학의 '존 U, 네프 사회 사상 위원회'에서 대략 1년 동안 수학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빌 클린터 대통령이 임명한 미국 정보국 정보국 (USIA) 국장인 조셉 더피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특별 고문으로도 일하는데요. 2년 뒤인 1997년부터 2005년까지 프리스턴 대학에서 조교수로 강의했고, 2005년에는 조지타운 대학의 정교수에 합류하여 2012년까지, 차코풀로스-코우날라키스 정부학 부교수를 역임합니다. 또한 같은 대학의 정부학과에 소속된 '미국 민주주의의 뿌리에 관한 토크빌 포럼'의 창립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는 노트르담 대학 교수진에 합류했고, 2018년에는 대학측으로부터 그는 정교수로 채용되기에 이릅니다. 드닌은 포괄적으로 민주주의, 자유주의, 여러 고전 및 현대 정치 사상, 그리고 미국 정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인데요. 정치적 지향으로 미국 내에서 저명한 보수주의 지식인 중 한 명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는 5권의 논저를 집필했고, 3권의 주요 공동 저자이며, 등재된 수많은 학술 논문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여름 독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던, 이 책 "자유주의는 왜 실패했는가"는 2018년에 미국 내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요. 2019년에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국 보수주의 대회 (National Conservatism Conference)에서 그는 주요 연사로 나서, 국가적 보수주의를 부분적으로 비판하고 그에 반하여 미국적 민족주의가 정치적 진보주의자들의 주요 목표이자 성취였다는 주제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드닌은 2020년에도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과 두 차례나 공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hy Liberalism Failed"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이듬해인 2019년에 번역이 되었고, 지금 서평을 쓰는 판본은 2025년 6월에 새롭게 나온 2판인자 개정판입니다.

개인적으로 2019년에 처음 번역된 판본을 통해, 서평을 남기기도 했지만 당시 부족한 이해와 그에 따른 낯 부끄러운 내용으로 말미암아, 이번에 다시 개정판을 잡게 되었습니다. 앞서 저자인 패트릭 J. 드닌의 이력을 짧게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는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보수적 지식인으로 규정되는 인물입니다. 이는 특히 미국 사회에서 종래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여러 측면에서 혼용 되어 쓰이고 있고, 일반 미국 시민들이 '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고려해 본다면, 그의 이 논저 자체는 꽤나 논쟁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저 몇 마디 말로 이 책을 쉬이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점은 저자가 바라 본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자유주의가 그 유구한 전통의 옆 길로 벗어난지 오래되었으며, 수많은 미국의 (정치학자들을 비롯) 사회학자들이 자유주의의 목표에 헌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유주의가 초래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밝히는 부분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집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목이기도 했던, "자유 의지가 배제된 인간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는가"가 던지는 질문은, 마치 그동안 자유주의가 걸어온 노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미국은 지난 1776년, '자유주의적 공화국'을 기치로 건국해, 마치 구시대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선망하는 국가가 비로소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자율성과 권력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들'이라는 기치로 새롭게 목도한 '자유주의 국가'의 탄생이기도 했는데요. 이런 국가적 체제 하에 자유주의가 증명한 부분은, "실정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사회 계약의 의미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3장에서 상세히 논증되겠지만, 이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구축했던 것은 '법을 통한 자유'였습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혹자들에 의해 존 스튜어트 밀이 마치 보수주의자의 기원으로 오역되기도 하지만 그가 원했던 자유와 그것이 보장된 사회는 지금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공동체와 관련된 부분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그 당시 단순한 상업 발전과 그로 인한 부의 증대가 시민의 자유에 이바지하게 되는 점을 중심으로 두고, 어느 정도 이를 뒷받침하는 규약들을 밀은 논했던 것처럼,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 사회적 통제가 필요했다고 이해됩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미리, "공화주의적 자유"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회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타인들의 자유를 좀 더 인식하는 자유"와 혹은 "타인의 자유는 얼마나 보장되는지"에 대한 협력과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공동체 인식에 대한 전반적인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반부 논증에서 알렉시스 토크빌이 과거 타운에서 보았던 미국인들의 공동체적 가치와 그런 협력에 대해 다소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이 자유주의가 초래한 병폐의 기본적 사항은 무엇보다 이런 '가치의 상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특별한 개인주의의 강조, 그리고 이기심과 내재되어 있는 욕망을 긍정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정치 질서가 바로 이러한 기반 위에 놓여 있기도 했는데요. 물론 권력에 제약받지 않는 개인주의적 토대는 어느 정도 중요한 얼개입니다. 마찬가지로 이기심이 자본주의적 자아 실현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는 대목 역시, 쉽게 긍정할 만한 부분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저자가 2장에서 확인하고 있듯, "보수주의자들이 그 목표를 국가가 비교적 적게 개입하는 가운데 시장의 힘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시장보다 더 공정하게 이익을 분배하고 자원을 지원할 수 있는 정부 프로그램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표면적인 대립에 있습니다. 아마도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 양자의 힘의 차이는 기울어졌다고 봐야 할 텐데요. 비록 이 책에서는 '신자유주의'가 그저 단 한 차례만 등장하지만 이 신자유주의가 오로지 "제약받지 않는 시장 자유'와 반대로 '정치적이면서 가치 지향적인 대다수 시민의 자유'에 대해서는 사실상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구분할 필요가 있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어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결국 정치적 우위를 선점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규제 완화, 세계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이행에 자유주의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굳이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애초부터 한 몸과 다름없는 상태였다고 언급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이행과 그 기조 위에 올라탔고, 그에 따라 자유주의는 아주 특별하게 '변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20년대 세계 대공황 그 이전과 혼란이 사그라드는 이후, 미국 자본주의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거나 그에 비견되는 성취를 얻은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사용하기 위해, 자유라는 관념이 무엇보다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저자의 논증 가운데 7장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두고,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변경할 뿐 아니라 유구한 정체를 사실상 정반대되는 정체로 즉 인민들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인 사적 개인(혹은 사사주의)으로서 물질적으로 안전한 삶을 누리는 데 만족하는 정체로 재구성한다는 분석"과 묘하게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이는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민주주의가 메디슨이 그 실체를 드러낸 소수의 공화주의로 덧씌워졌거나, 혹은 자유주의에 부분적으로 예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1980년대 자유 진영의 모멘텀이 되었던 신자유주의 역시,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위해,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많은 정치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이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즉, 이러한 자유주의 하에 몇 세기에 걸쳐, 함양되고 심지어 강조된 개인주의와 그 토대 위에 발현된 이기심, 욕망 추구, 남들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감정 등은 전면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조장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보수주의자적 정체를 보이고 있는 저자 역시, 시민 사회에서 만연된 이 경제적 불평등이 어떠한 파국을 일으키게 될지 우려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자유 지상주의자들의 핵심 목표이기도 한, "관습과 심지어 법까지 제거하여 우리들 개개인의 자유를 확대할 수 있다"고 믿는 관념 역시, 비틀린 시야를 많은 시민들에게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자유'라는 접두사가 붙은 이데올로기와 가치 지향 등이 시민들에게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일성을 주입하고, 그동안 자유주의적 유산이 사회와 시민들에게 끼친 병폐 및 문제점을 백안시하게 된 주요 원인이기도 했는데요. 저는 과거 지그문트 바우만의 비판과 같이, "그저 2~3세기에 불과한 경제학이 우리 삶에 강력하게 스며들어, 우리를 주인처럼 부린다."는 서사가 마땅히 자유주의에도 해당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판할 수 없는 자유주의"는 그만큼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 하에, 점진적인 인문학의 쇠퇴와 비판적 시민성을 잃은 현 체제를 일찍이 샹탈 무페도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저자 역시, 5장에서 현재 미국의 교육 현실과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은 소위 대학 교육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저자가 언급하는 '자유학예' 자체는 학문의 틀을 옥죄지 않는 인문학적 토양과 전문 분야의 교육과 함께 더불어 상생해야만 그것이 직간접적으로 고착화된 엘리트 지배체제의 보다 큰 개선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여기서 '능력 만능주의'나 '독식주의'를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주의가 개인의 능력과 그에 따른 능력주의를 긍정해온 것은 사실이고, 그러한 지향이 정치적 체제 이전에 주요 관념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개인들을 능력의 여부에 따라 서열을 나누는 것,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용인하지 않는 새로운 계급주의를 강화시켜온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역시,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편이었고 삶의 통제력을 상실한 다수의 개인들을 오로지 그들의 책임으로 치부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부조에 대한 일부 계층의 지독한 반발심과 증오는 바로 이러한 점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6장의 '새로운 귀족정'이라는 제목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증진시켜온 자유주의가 어찌됐든 배타적인 '새로운 계급'의 출현을 긍정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지금의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 하에서 사회적 상향 이동과 하향 이동이 세계화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많은 계급이 불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저자의 분석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많은 시민들이 이런 세계화 상황에서 심각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인지하고 있어야 할 부분일 텐데요. 더욱이 소위 지유주의적 지배 계급이 다수 시민들의 경계에서 거리를 두고 그들만의 요새를 쌓고 있으며, 힘과 부를 가진 소위 엘리트 지배 계급이 자신들은 그렇게 잔인한 인간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이 체제의 불안성과 부실한 토대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에는 아무런 행동도 하고 있지 않은 점은 몹시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즉, 국가가 체제의 뒷편에 있는 하층 계급과 지원이 필요한 시민들에 대한 부조 자체를 이들 엘리트 계급들이 표면상으로는 나서서 거부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위 신자유주의가 작은 정부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다수의 부유층과 경제 엘리트들의 안위와 무엇보다 직결되어 있던 2008년 시장에 대한, 막대한 공적 자금 지원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고 있는 점은 희극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정치적 포퓰리즘이 기존 정치 무대에 등장한 시점에서 이러한 논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은 저 역시,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이처럼 우리가 자유주의와 그것이 추동한 체제에 대해, 사실상 어떠한 성찰도 없었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가해진 가혹한 현실은 일정 부분은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저자의 점진적 평가대로 오늘날 자유주의가 초래한 많은 병폐와 문제들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성공했기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그것이 드러내는 우리가 잃어버린 공동체적 가치와 그로인해 부정할 수 없는, 체제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오로지 법에만 의존하는 자유주의의 한계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의 조언대로 도덕이 시민들의 덕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내에서 덕과 이기심의 배치는 실로 교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한쪽이 기세를 잃어야만 다른 한쪽이 살아갈 수 있는 전제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도 도덕감정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 조차 현대에 이르러 귀결된 이런 체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아예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경제학자들이 절로 떠오를 정도입니다.) 결국 저자는 7장에서 지목된, 정치에 있어 대중의 관여를 받아들이지 않는 '예속된 민주주의' 앞에서, 간접적으로 민주주의의 과잉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지배 계급에게 있어서도 투표는 하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시민을 옹호하는 현상을 밝히고 있었는데요. 사실 저 역시도 시민 정치를 긍정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존 듀이조차도 시민들이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점은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존 듀이를 반민주주의자라고 깎아 내릴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의 처절한 노력을 고려해본다면 이는 억측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자유주의가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자유주의 이후에 과연 무엇이 나타날 것인가는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이 책의 결론에서, "자유주의 이후 시대로 걸음을 옮기려면 우선 자유주의의 호소력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고, 자유주의가 대개 약속만 했던 감탄스러운 이상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를 변론하는 이들은 "심각한 불만, 정치적 기능 장애, 경제적 불평등, 시민간 단절, 포퓰리즘적 거부 반응 등을 체제의 원인과 무관한 부수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면모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마찬가지로 결론에서, "자유주의는 스스로를 완성해갈수록, 고질적인 병폐를 감추기 위해 미봉책과 장막을 만들어내는 역량 이상으로 빠르고도 광범위하게 병폐를 유발한다"고 대미를 장식합니다. 아주 의미심장하게 말입니다. 그동안 자유주의가 겉으로 내세우는 주장과 이론들이 결국은 과거의 공동체 관념과 덕을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한 것도 사실이고, 스스로 자유주의의 대변자라고 하는 자들 마저, 오로지 장밋빛 전망만 내세우는 데 급급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식으로 도출된 역설적 이해에서, 우리의 자유주의는 어쩌면 대적자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회를 '야만'으로 몰아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저자의 대안과 같이, 사적 목적이 더불어 공적 목적과 함께 갈 수 있을지 의문이고 막대한 불평등은 어떻게 개선시킬 것이며, 낱낱이 깃들어 있는 시장 자본주의의 냉혹한 속성은 어떤 식으로 개선시킬 수 있을지, 이는 지배 체제(사회의 주가 되어버린)의 논리에 거듭 반하게 되는 양상이니, 어떠한 전환이 가능할지 지금으로선 의문이 들 따름입니다. 이미 저의 뇌리에 박힌 인용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시초인 하이에크가 이 자유주의 사회가 기존 질서 못지 않은 끊임없는 불평등, 어쩌면 더 심각한 불평등을 낳겠지만, 끊임없는 변화와 진보를 약속함으로써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모두의 지지를 얻을 것이며, 거의 초월적인 양적 성장이 앞으로 초래될 불평등 문제를 해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아주 순진하게 기대했다는 부분은 기존의 자유주의 내지는 신자유주의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굳이 글 말미에 질베르 리스트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저자는 글에서 오늘날 보수주의자들의 한계를 갖는 의제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저 규제 완화와 세계화, 그리고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 등을 포함하는 경제적 자유주의 뿐"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 지점에서 이익에 매몰되는 것이 그저 인간의 본성인지, 아니면 금권 정치에 편승한 보수주의 정치인들의 그런 행태가 부정적인 모습의 최대치인지 아니면 더 무엇이 남아 있을지 궁금한 편인데요. 이러한 현실 모습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미력하지만 지금도 해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존 듀이의 익히 그 '좌절'을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듯 보이는 '퇴화된 시민들'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현상을 이해하는 데 아주 시의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이는 노엄 촘스키의 '분절된 시민들'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있었는데요. 이것은 단순히 교육이나 성찰의 '퇴화'로는 설명되지는 않을 겁니다. 과연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러한 수많은 위협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요. 저자인 드닌 역시, '자유주의 실패' 이후,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쇠퇴 뒤에 실질적인 '과두제'가 나타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는 미리 구상한 정치적 계획에 순응하도록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뜯어고치려 시도한 최초의 정치적 구조물이었다.

오늘날 대학 캠퍼스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나타나는 정치적 견해는 널리 퍼져 있는 이런 신념과 공명한다. 교육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실용적이어야 하고, 사고방식이 비슷한 대학 졸업생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고소득 직업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신념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힘겨운 과제는 자유주의 사회의 병폐를 더 많은 자유주의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신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할 수 없다는 신념은 비록 언제나 한결같이 인정되고 실천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중세 유럽의 철학적 성취였다.

인간의 욕구를 다스리거나 제한하려 애쓰기보다 근절할 수 없는 이기심과 물욕을 인정함으로써 그런 욕구를 활용할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자유주의의 성공 자체가, 현재 자유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요인이 자유주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을 가능성을 성찰하기 어렵게 만든다.

세계시장은 비인격적 거래의 가치 없는 논리, 이제껏 자본주의의 위기를 불러왔고 오늘날 세계시장 자체를 파탄 내고 있는 논리를 강요함으로써 다양한 경제적 하위문화들을 대체한다.

하지만 인간 본성의 이기적이고 소유욕 강한 측면을 유익하게 활용할 경우 경제적, 과학적 체제의 발전을 촉진하고 자연현상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인간의 역량을 키움으로써 자유를 확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홉스와 로크 모두 우리가 사회계약을 맺는 까닭은 단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더 안전하게 행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국가 팽창에 불굴의 적대감을 보이면서도, 공동체의 삶에서 시장의 역할을 제한할 수도 있는 지역적인 통치 형태나 전통적인 관습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 시장과 국제 시장을 보호하는 국가의 능력에 줄곧 의지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의 의제 가운데 그들이 근래에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동안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실행한 의제는 규제 완화, 세계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 등을 포함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뿐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치질서가 우위를 점하는 경우에만 역사의 시간 차원을 온전히 경험하는 삶이 쇠퇴하고, 사회에 만연한 현재주의가 삶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다시 말해 특히 소비와 쾌락주의, 단기적 사고를 특징으로 하는 인간 의지를 해방한다는 명목으로 성적 규범과 경제적 규범을 해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겨우 10년 뒤에 생명공학과 ‘인류 이후의 우리 미래‘에 관해 쓴 책에서 후쿠야마는 동일한 과학적 논리가 인간 본성 자체까지도 바꿀 수 있고, 그 결과로 이 논리가 지탱해 온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가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인정했다.

로크처럼 하이에크도 급속히 발전하며 현저한 경제적 불평등을 낳는 사회는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미 빠른 데다 가속까지 하는 발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18세기 메디슨의 견해에서 정부는 개인의 이익 추구와 그런 추구의 결과를 ‘보호‘하기 위해, 특히 불균등하고 다양한 재산 획득 정도로 나타나는 개인 간 차이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결국 퇴화된 시민들마저 자유주의 질서의 계몽된 족쇄를 벗어던질지라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원인은 특히 정부와 경제, 기술, 세계화 세력의 힘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시민들의 병폐가 자유주의 질서의 성공에서 비롯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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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이냐 삶이냐 - 팬데믹 시대의 사유
장 피에르 뒤피 지음, 이충훈 옮김 / 산현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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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장 피에르 뒤피는 유년 시절을 보낸 뒤, 1965년까지 에콜 플리테크니크 (Ecole Polytechnique) 와 에콜 데 마인 (Ecole des Mines)에서 수학합니다. 이후, 1982년에는 장 울모의 예비적 고찰을 바탕으로 장 마리 도메나흐와 함께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인지과학 및 인식론 센터 (CREA)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 대학의 언어 및 정보 연구 센터 (CSLI)에서 프랑스어 교수이자 연구원으로 재직하기도 합니다. 이와 연계되어 그는 2006년까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사회 및 정치 철학과 기술 윤리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이반 일리치와 르네 지라르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앞선 일리치와는 남다른 우정을 쌓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뒤피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의 환경 및 사회 붕괴의 위험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그러한 가운데 "계몽적 파국주의"라는 연관된 주제를 개념화 하기도 했는데요. 이것은 계몽주의가 인간 진보와 사회 발전을 위해 추동했지만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오히려 문명의 파국을 초래했다는 인식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대목에서 칼 포퍼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만 그의 이런 생각은 도구적 이성의 문제를 다룬 과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에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a Catastrophe ou la vie : pensées par temps de pandémie"로 지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2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뒤피의 이 책은 지난 코로나 펜데믹 시절인 2020년 12월 이후의 일기 내용 (펜데믹 사태에 대한 글쓴이 본인의 인문사회학적 분석 등)을 담고 있습니다. 각각의 장 서두에, 글이 쓰여진 날짜가 기록되어 있고, 뒤피 본인이 후반부에 이것이 일기 형식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다만, 여기에 실린 내용들은 펜데믹 시기에 드러난 프랑스 정부의 사실상 무능과 마찬가지로 코로나 확산 초기 트럼프 행정부의 미흡한 대응 혹은 의도된 늑장 대처로 벌어진 미국내 25만명의 희생자와 그것과 버금가는 브라질 정부의 막장 대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번역된 그의 다른 논저인, 『경제와 미래』에서도 드러나듯, "경제가 먼저이냐 정치가 먼저이냐"라는 근본적 물음과 비견될 수 있는 "생명이 먼저이냐 경제가 먼저이냐"를 비판적 사회철학자이자 동시에 과학자이기도 한 저자의 철학적 성찰이 약간 비통한 심정으로 읽히기도 했는데요. 책 중간에 언급되는 사이버네틱스 논쟁과 여러 자연 과학자들의 무지도 문제로 꼽힐만하지만 그럼에도 전세계에 자유를 방패로 삼아 몰아치고 있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지적을 무엇보다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지난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백악관의 주인이 하필 도널드 트럼프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내 극우 포퓰리스트들과 극단주의자들이 "이 코로나 펜데믹을 민주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유서 깊은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로 엄중한 펜데믹 상황에서도 사회 전반을 위한, 소위 '긴급한 보건적 조치'에 대해 이들은 극렬히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혁명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프랑스에서도 거의 예외가 없는 모습이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3장에서 비판적으로 논증되는 보편적 생명을 대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의 대표적 표징이기도 했던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을 기반으로 펜데믹 시대에서 보여졌던 민낯을 저자는 여과없이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명성을 쌓아 올린 아감벤은 보건적 조치인 격리로 인해, "인류와 야만을 가르는 억제선이 무너졌다"고 일종의 악에 바친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지난날 무솔리니의 통치에 이탈리아적 열정으로 저항하지 못한 이탈리아인들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여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뜻 보기에 일부 유럽 지식인들이 두드러기처럼 느끼는 공리주의에 대한 반감이 간접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감벤 역시도 그 위기의 시대에 '개인의 자유', '선택의 자유'를 유독 그 시기에 지고한 가치로 격상시키기에 이릅니다.

펜데믹 시대에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론 그외 단행된 격리조치는 이어지는 시민들의 '마스크 착용'이라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펜데믹 초기에 미국 시민들은 이 마스크 착용을 일종의 '국가와 사회의 강제'로 이해하기도 했는데요. 국가와 정부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간섭할 수 있느냐는 말과 함께 말이죠. 이에 저자는 개인 간에 발생할 수 있는 비말을 효과적으로 방지하는 것이 마스크이고 이 마스크를 거부하는 일부 시민들이 실제로 안전해질 수 있는 원인은 자신들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기 때문이라고 군더더기 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 그가 셰익스피어처럼 인용하여, "그것은 우리 자신에 관해 생각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도록 명령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적 바이러스이다"라는 절묘한 수사로 덧붙이고 있는데요.또한 앞선 9장에서 인용된 루소의 말인 "결과가 원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제도의 결과인 사회정신이 제도 자체를 앞장서서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들은 어떤 가치를 앞서 강조하는 테제들이 결국에는 가치전복적인 결말에 이르지 않기 위해,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을 에둘러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 어떤 미국 보건 관계자가 희생된 고령의 환자들이 "어쩔 수 없는 피해" 혹은 다른 말로 "콜래트럴 데미지"와 같은 책임지지 않는 수사를 더하는 것이 그 나름대로는 손쉬운 방책이긴 하나, 펜데믹 시기의 수많은 희생들은 진실로 비극적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앞선 양차 대전에서 도합 7천만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대목은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일반 사람 머리로는 거의 가늠이 되지 않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1961년에 전세계를 핵전쟁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쿠바 사태에서도 핵폭탄의 투발로 초래될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 역시, 이제는 그저 건조한 추정치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뒤피가 성찰하는 바는, "정치 권력이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방법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단언과 함께,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를 궤멸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종의 종말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정확한 분석에 지리멸렬한 것은 전문가들의 그 과학이 어쩌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일정 부분 드러내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히 면역 체계를 붕괴시키는 에이즈 바이러스와 유사한 병리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애써 들고 있지만 세계 의학계가 이를 쉽게 인정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추정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전세계 펜데믹에 대한 성격 규정마저도 조직과 단체의 알량한 이익과 권위가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백신 생산과 관련된 담론들에서 말이죠.

글 중간에 뒤피는 만약 이반 일리치가 살아 있었다면 이 펜데믹을 어떻게 사유했을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대로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일리치가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어떠한 말들을 읊어댔을지는 대략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결국 바이러스의 자기증식적 한계와 그 변이가 극적으로 우리의 기대만큼 우리 면역계에 덜 영향을 끼치는 쪽으로 틀어졌기에 인류는 그 고난의 시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량한 인간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죠. 이는 각 국가가 보유한 의료 체계나 성숙한 시민 의식 내지는 자기 희생적 태도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인류가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연유로 우리에게 '인간의 생명'이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펜데믹 시기, 그렇게 이행된 사회적 결과로 일종의 의미 부여를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때 희생된 사람들에게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의 자유와 원할한 경제 활동이라는 은폐된 이기심의 발현이 과연 역사에서 어떻게 쓰여질지는 앞으로 두고 볼 문제이겠습니다.



- 이미 본문에서 자의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노인들과 병에 걸린 약자들이 주로 코로나에 희생을 당했다는 식의 기사와 통계들은 여전히 본질을 가리고 있고, 오히려 2020년 3월 1일부터 8월 말까지 사망자의 25%가 45~75세라는 연령대에 집중되었다는 인용은 주목할 만합니다. 물론 앞선 사례는 프랑스의 예이기는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초래한 인명 피해와 유럽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초기 대응이 미흡했던 프랑스 정부 당국의 법적 책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자괴감까지 효과적으로 떨치게 만드는 통계적 장난으로. 이러한 편의주의를 우리는 앞으로도 쉽게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어디서나 어떤 이들을 오늘날 인류가 처한 일에 단순한 ‘독감‘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이 책 첫머리에 파스칼을 인용했지만,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미국과는 다르게 지식인들 절대다수, 특히 철학자들 절대 다수가 외곬으로 문학 교육만 받는다.

허울 좋은 논변을 내세워 재앙의 결과를 최소화하려는 시도는 정말이지 시민정신이 결여된 행동이다. 사유 능력, 그러므로 추론 능력이 없다면 진정한 시민의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삶과 경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노인들이 자기희생을 하는 것이 선과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그 원칙을 말하는 이들이 노인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복음서의 메시지가 이보다 더 나쁘게 타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희생은 그것만으로는 진리와 정의의 기준이 전혀 될 수 없다.

그들에 따르면, 펜데믹을 타개한다는 이유로 이 국가 기구들이 마스크 착용을 강요하고 이른바 ‘봉쇄‘조치를 강제하면서 기본적 자유를 제한했던 일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기사는 펜데믹의 심각성을 전형적으로 최소화하면서 시작한다.특히 노인들과 질병에 취학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 같은 전염성 독감이 정말 온 국민을 유린하는 질병들과 비교할 만하다고 할 수 있을까?

프랑스에서 한 인간 생명의 가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의적인 방식으로 결정된다. 그 가치는 오늘날 300만 유로로 고정되어 있다.

이렇게 행동하면서, 이들은 자기들이 국가 전체를 바이러스가 최단 시간 안에 퍼질 수 있는 국소세계로 만드는 데 성공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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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5-08-08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읽어 가면서 ‘이반 일리치라면?‘ 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언급이 있었네요.

베터라이프 2025-08-08 08:52   좋아요 0 | URL
일리치가 멕시코에서 일종의 보건의료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뒤피가 그것에 응했던 모양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마 두 사람만의 공감대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개인적 사연들도 소개되니 학문과 연구의 공동작업이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네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22세기 민주주의 - 알고리듬이 선거가 되고 고양이가 정치인을 대체한다
나리타 유스케 지음, 서유진.이상현 옮김 / 틔움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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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일본 도쿄도에서 태어난 나리타 유스케 (成田悠輔)는 일본의 데이터 전문가이자 기업가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 내에서 데이터 알고리즘과 관련해, 전문성을 인정 받고 있는데요. 이런 저자는 도쿄대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2011년 도미, 그로부터 5년 뒤에, 메사추세츠 공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일본 이치바시 대학의 특임 준 교수, 스탠포드 대학의 객원 조교 등을 역임하고, 2008년 여름에는 도쿄의 리먼 브라더스 일본 지사에서 인턴으로 일한 경험도 있으나 2주일 후에 리먼 브라더스는 파산하기에 이릅니다. 그 유명한 2008년 뉴욕 발 세계금융 위기의 전조였습니다. 이런 그가 대표적으로 논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요.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둘러싼 발언에서 "고령자는 더 노화가 되기 전에 집단 자결, 집단 처분과 같은 일을 스스로 하면 좋다"고 반복했고, 이는 뉴욕 타임즈의 큰 조명을 받게 됩니다. 일본 특유의 사회 분위기, 즉 타인과 사회에 누를 끼치는 것을 금기시 하는 분위기와 맞물려, 그의 발언에 많은 이들이 겉으로든 속으로든 동조를 했던 것은 명백한데요. 이는 서구의 철저한 합리주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적 여파를 끼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22世紀の民主主義 選挙はアルゴリズムになり、政治家はネコになる"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나리타 유스케는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이 책과 관련해, 스스로가 데이터와 관련된 IT 지식인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정치학자가 철저히 분석한 '민주주의 담론'이 아니라, 다른 업계에서 경력을 인정받은 비 전문가가 민주주의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쓴 글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일반적인 자본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소위 전문가 그룹에 속한 이들이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 전반을 조지프 슘페터의 생각을 기초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나리타 유스케 역시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가 조지프 슘페터를 면밀히 읽고 이해했는지는 다소 불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현재의 민주주의가 "위선적 리버럴리즘과 일부러 결점을 드러내는 포퓰리즘의 롤러코스터적 상황"에 놓여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경련'과 '열화'라는 단어를 수차례 언급하며 논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이 책이 종전의 가렛 존스와 유사한 민주주의의 양적 체제를 줄이기 위한, "과잉 민주주의"와는 그 궤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가 '민주주의의 병리적 상태'를 진단하는 방법과 분석에 문제는 있지만 민주주의를 보다 격리시켜, 자본주의적 체제 이행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는 극단주의적 발상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텐데요. 다만, 이 '민주주의의 열화 과정'에서 나리타 유스케가 명백하게 인정하고 있듯, 자본주의에 있어 승자에게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집중시키는 이런 독점적 체제가 온전히 민주주의 만의 문제라고 취급할 순 없을 겁니다. 이것은 최근 역사에서 현실 사회에 어떤 대안과 개선안을 제시하지 못한 '좌파의 무능'은 물론, 고도화 된 자본주의가 무엇보다 자본의 축적과 권력의 집중을 강력하게 용인해 왔다는 점에서, 이 체제를 원할하게 '공급'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무턱대고 비난만 하고, 그 한계를 편파적으로 수용하는 점은 그저 무지한 시민들에게만 먹힐 수 있는 아주 '손쉬운 언설'이라 생각합니다.

매우 공교롭게도 저자는 나치 독일의 '교활한 언론 선동'을 1장에서 인용하고 있지만 우리가 가히 목도하고 있는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즘 정치의 실질적인 폐해에 대해선 인식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개인의 정치적 발언의 자유 및 개방성을 실로 자기들만의 전유물인 양, 악용하는 저 선동 정치인들을 그저 민주주의 한계에 다다른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여실히 '지능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특히나 저 포퓰리스트들이 입에 발린 소리로,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점을 우리는 항시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글의 2장 이후, 저자가 선거 제도의 한계에 대해 쓰고 있는 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는데요. 여기에 소개된 브라질과 같은 문맹률이 적지 않은 국가들에게서 단순한 선거제의 운용은 현실에서 제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저자 자신이 높은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학력의 일반 시민들이, 다수의 기대에 야합하고, 쉽게 휩쓸리는 '동조 현상'을 가리키는 '중우 정치'에 반감을 갖게 되는 점은 맥락상 유사한 흐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들을 사회적 재교육을 통해, 정치적 변별력을 갖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건전성에 시급한 부분이지, 그저 이 문제를 싸잡아 교육의 제한적 기회로 몰아가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 역시 이에 쉬이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지식 독점에 준하는 소수의 학력 집중에 대해 많은 사회학자들이 우려를 표한 바가 있습니다. 특히나 전문가 정치에 따른 민주주의 하에, 엘리트 지배 체제가 더욱 일반 대중과 멀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요. 민주주의가 평등의 기초에 의거, 일반 시민들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이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닐겁니다. 결국 어느 정도는 저자가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인용하며, 체제가 이렇게 어려운 지경에 내몰린 것이, 그것을 운용하는 인간들의 문제이면서, 애초에 대다수 시민들에게 주입되는 수많은 인터넷 정보들이 그 진위 여부가 불명확하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위기에 놓여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1980년대 이후, 일방 통행의 자본주의 (이를테면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그저 시녀로 거느리고, 사회 전반을 획일화 시켰다면,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심각한 부의 불평등, 경제적 불평등은 앞선 신자유주의가 신념화했던, "아웃소싱"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3장 이후, 밝히고 있는 중국의 WTO 가입이 초래한 세계 경제의 변화, 값싼 노동력을 향해 빠져 나가는 기업들의 아웃소싱이 신자유주의의 분명한 이념과 맞닿아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더 많은 생산비 절감, 그리고 그에 따른 이윤 추구가 어떻게 민주주의의 비효율성과 연계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문제점과 그런 현안들은 애초에 분석의 근거가 명확하지 않았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정치적 비전문가가 인식하는 한계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뒤가 깔끔하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의 결말이자 소위 대안이라고 적어 놓은 4장은, 다른 데이터 전문가에게는 인정할 만한 이야기들이라고 일견 추측해 봅니다. 이익과 돈에 연관되어 있는 '데이터'가 과연 건전한 현실 정치, 내지는 민주주의에 어떠한 도움이 될 것인지는 어느 정도 자명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더구나 탈진실, 대안적 사실과 관련되어 있는 '트럼프 현상'이 아직도 여전하다는 점과, 이렇게 의도적인 진실 왜곡과 주장에 편승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전락한 소위 '만들어진 사실'들이 현실 세계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모습은 이 한 가지 부분 만으로도 민주주의의 더할 나위 없는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장 후반부에서 저자는 "2008년 리먼 브러더스로 대표되는 금융위기 초기, 자업자득으로 위기에 빠진 금융기관을 그래도 구제하는 게 옳은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거대한 무능에 빠진 금융 자본주의가 초래한 전세계적 몰락을 목도했음에도 그래도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국가의 조력이 필요했다는 저자의 간접적인 판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 거대한 도덕적 해이에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은퇴 잔치를 했던 소위 엘리트 금융인들이 머릿속에 박제되어 있는데요. 저는 그 시점에서 사실상 신자유주의는 생명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선거나 민주주의는 정보력이 부족한 빈자의 나라에만 남아 있는 비효율과 비합리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하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제휴는 기묘하다. 자본주의는 강자가 기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구조, 민주주의는 약자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터넷에 가짜 뉴스와 음모론 그리고 혐오 발언이 확산했고, 이들이 선거를 잠식하면서 남미와 유럽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늘었다.

가난한 전제정치 국가들이 부유한 민주국가를 맹추격하기 시작했다. 정치제도와 경제성장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질된 셈이다.

그동안 민주국가에서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예전보다 위축됐다는 우려가 제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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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4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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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성공회 교구의 목사였던 부친과 지역 내 저명한 가문 출신인 겸허한 모친 밑에서 자라납니다. 특히 그녀의 부모인 조지 오스틴과 카산드라 리는 결혼전에도 사적인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스티븐턴에 정착한 조지 오스틴은 1773년부터 1796년까지, 가외로 농사를 챙기로 한 번에 3명 정도 되는 소년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783년이 되자 제인과 그녀의 여동생 카산드라는 앤 콜리에게 교육을 받기 위해 옥스포드로 보내지게 되는데요. 그해 가을 두 자매는 발진티푸스에 걸려 집으로 돌아갔는데 특히 제인은 거의 죽다가 살아나게 됩니다. 이때부터 제인의 교육은 아버지가 스스로 챙기면서 독서를 통해, 그녀는 대부분의 소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문학 활동 전반은 22세 이전에 주요 작품들이 쓰여지지만 본격적인 출판은 35세가 되던 해부터 이뤄지게 됩니다. 특히,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 '맨스필드 파크', '에마'는 그녀가 살아있던 시절에 겸손한 성공을 안겨다 주지만 생전에는 위의 작품들이 그녀에게 크나큰 문학적 명셩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녀의 여러 작품들이 관통하는 주제들은 18세기 말 전근대적인 귀족 의식과 결합된 소위 영국의 지주 계층에 대한 해석과 더나아가 이들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시대의 세태, 관습 등을 여성의 시각으로 관조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Persuasion"으로 그녀의 사후인, 1818년에 출간되었고 출판사 문학동네에 출판한 이 번역본은 처음에 양장본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번역본 출간은 2010년 8월이며,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13년에 나온 1판 3쇄본입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바로 "숭고한 사랑과 영원한 절개"라는 쉽게 변색되지 않는 개인과 개인사이의 중요한 가치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에 더불어 주인공인 앤 엘리엇을 통해, 작가는 "분별력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간의 극명한 대비"를 표출하고, 자기 만족과 오만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행태를 사람간의 관계를 매개로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고전 작품들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인간의 계몽"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비슷한 연유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폭로하는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꽤 조밀한 서사 속에 드러나는 어리석고 거의 사욕에 매몰된 인물들이 보여지고 있는데요. 더욱이 오스틴의 인물 조형 자체가 매우 입체적이고 충분한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의 캐릭터들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것 자체가 고전으로 얻을 수 있는아주 사소한 이득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서머싯셔 켈린처 홀의 월터 엘리엇 경은 저물어가는 영국 귀족 사회를 대변하는 인물이자, 개인적 허영과 사람들의 시선에 자신의 인생을 저당잡혀 사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계급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계급의 표상'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각각 다른 개성의 딸이 셋이나 있습니다. 첫째인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날이 저물어가는 가세에서 예전만 못하게 누리지 못하는 삶에 대해 어느 정도 고통을 받고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세인들이 자신을 향해 말하는 "엘리엇 양" 혹은 "레이디 엘리엇"이라는 지칭에 묘한 자부심을 보이고, 그녀를 통해 당시 영국 사회를 얼추 엿볼 수도 있었는데요. 저는 앞선 월터 엘리엇 경과 그의 큰딸인 엘리자베스가 요샛말로 아주 전형적인 속물 캐릭터라고 여겨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엘리자베스의 인물 설정에 대해, 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주변에서 착안을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작품의 서사 내내 이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에 대해 묘한 기시감을 받기도 했습니다.

실제적인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앤 엘리엇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벗인 레이디 러셀이 인정했을 정도로 겸허하고 분별력을 갖췄으며, 사람을 쉽게 판단하지 않는 양식을 갖춘 인물입니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그녀의 아버지와 언니는 이 앤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특히 부친인 엘리엇 경은 노처녀로 늙어가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여전히 시들지 않는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둘째 딸인 앤은 그의 말대로, "저물어버렸다"고 언급되는 것으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겠는데요. 그저 일차원적인 삶을 사는 저 부녀가 옆에서 의미있는 조언을 하는 앤을 어떻게 여겼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은 앤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직간접적인 묘사들에 있었는데요. 물론 이런 연유에는 자신의 집안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앤의 연인이었던 프레더릭 웬트워스에 대한 반감과 딸까지 모멸차게 취급했던 과거의 행적이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오스틴의 이 작품에서 일견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로 어느 정도 각 캐릭터들을 분리해 볼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사람이 갖춰야 할 분별력을 갖고 행동하는 인물들은 바로 웬트워스 대령과 앤이었는데요. 이들은 세태에 얽히지도 않고 자신이 추구하고 인정하는 가치를 버리지 않으며, 일관된 의지를 갖고 살아갑니다. 과거 엘리엇 가를 보잘것 없다고 여긴 향사 윌리엄 월터 엘리엇이 엘리자베스와의 혼사를 거절하고 돈많은 여성과 결혼한 그에 대한 작품 내의 비판적인 평가와 입지는 아주 극명하게 프레더릭과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더욱이 후반부에서 앤에게 있어 새삼 중요한 인물로 그려지는 스미스 부인이 윌리엄 엘리엇의 '정체'를 그녀에게 폭로했을 때, 호시탐탐 월터 경의 옆자리를 노리고 있던 클레이 부인의 의도까지 덩달아 밝혀지며, 동시에 극 전반도 중요한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과거 프레더릭 웬트워스는 진정으로 앤을 사랑했지만 월터 엘리엇 경과 엘리자베스의 반대에 부딪쳐 해군에 투신하게 됩니다. 이 작품이 쓰여진 배경이 유럽 대륙에서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시점이니, 아마도 웬트워스 대령은 서인도 제도에 혹은 지중해에서 프랑스 함대를 상대했거나 아니면 스페인 등지에서 활약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부족하지 않는 군경력과 동시에 2만 5천 파운드의 당시로서는 막대한 재산을 쌓게 되는데요. 이제는 그가 더 이상 앤과 엮이지 않아도 좋은 혼처를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의도를 갖고 앤에게 접근하는 윌리엄 엘리엇과는 다르게 웬트워스 대령은 그 "영원한 절개"에 부합하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밝고 싹싹하면서 동시에 미모를 갖춘 여성의 매력에 흔들리지 않는 '평범하지 않은 남자'를 그려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레더릭 웬트워스라는 캐릭터 자체는 '남자의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인물이었기에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또한 여기에는 영국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8년이나 넘는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해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이 작품은 '노생거 사원'과 유사하게 약간 아쉬운 결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앤과 프레더릭 사이에서 다소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는 월터 엘리엇 경과 엘리자베스의 한풀 꺾인 태도는 서사에서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고, 다른 등장 인물들인 윌리엄 엘리엇과 클레이 부인의 소위 '야합'은 뭔가 개연성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리분별과 합리적인 이성을 보이는 인물들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공격과 그런 행태들에 대한 정밀한 묘사는 제인 오스틴의 강점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제인 오스틴의 다른 대표적인 네 작품들을 비교해 봤을 때, 이 설득이라는 작품이 문학적인 측면과 사회해학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의 말미에서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이는 앤 엘리엇의 모습은 한 개인의 본질이 그저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을 전체를 아우르는 선한 내면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했는데요. 사회에 스며들어 있는 온갖 인간군상들 가운데 표면적인 모습을 초월하는 진정한 본질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일관되고 남들과 다른 빛을 발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값어치가 정해지기 마련이며, 그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 외형적으로는 그럴싸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가여운 껍질에 불과하다는 고래의 교훈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인 오스틴의 이 작품은 후세에도 그 명성이 이어질 만큼 중요한 마스터피스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이 작품에서 '분별력'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적으로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세태에 대한 고발이면서 그녀가 얼마나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책 제목인 '설득'은 월터 엘리엇 경과 '레이디 엘리엇'인 엘리자베스와 같은 부류에 대한 풍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는 소위 도저히 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냉소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 일부분은 남과 다를 바 없으며, 그런 냉혹한 관계에서 가족을 이성적으로 설득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교훈으로 읽힙니다. 



따라서 레이디 러셀은 그녀가 부친의 집에서 겪는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서 벗어나 자기 집 근처에 자리잡게 된다면 크게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클레이 부인이 자리에 없을 때면 아버지는 번번이 그녀의 주근깨며 뻐드렁니, 그리고 볼품없는 손목을 심하게 흉보곤 했다.

그녀는 타고난 자질에서는 맏언니보다 나았지만 앤 같은 분별력이나 성품을 갖지는 못했다.

그의 시선이 스치듯 앤에게 머물렀다. 반짝이는 눈빛을 머금은 그 시선은 마치 ‘저 사람이 당신에게 반했나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저 역시 앤 엘리엇다운 모습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물셋의 나이에 앤 엘리엇과 같은 여자의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아본 듯했던 남자가 팔 년 뒤 루이자 머스그로브 같은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다.

상당한 재산을 가진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데! 월터 경은 이것으로 완벽히 해명이 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유연한 마음, 위안을 구하는 성향, 흔쾌히 악에서 선으로 돌아서서 자신을 잊게 해줄 일거리를 찾는 힘은 오로지 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이따금씩 아주 흥미롭고 감동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보기도 하니까요."

늘 평정심을 유지하여 단 한번의 말실수조차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이따금 경솔하거나 성급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진실성이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네. 표정이 다 말해주는걸요. 지난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호감가는 사람.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세상 사람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당신의 관심을 끄는 사람과 같이 있었다는 걸."

"겉만 번지르르하고 들여다보면 오래가지 못할 가족 간의 화합일지라도 지킬 가치는 있어 보이지요."

요즘 세상에 살다보면, 남자든 여자든 돈 때문에 결혼하는 일이 너무 흔해서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기가 힘들어요.

클레이 부인 같은 사람이 항상 눈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한데, 그보다 더 음흉한 위선자까지 더해지니 모든 평화와 안락이 깨져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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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거 사원 을유세계문학전집 73
제인 오스틴 지음, 조선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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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은 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인 조지 오스틴은 당시 스티브틴과 딘의 성공회 교구 목사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양털 모직 상업의 오래된 가문의 출신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녀의 모친인 카산드라 리는 저명한 리 가문의 출신으로 신사 계급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1783년에 제인 오스틴과 여동생 카산드라는 앤 콜리에게 교육을 받기 위해 옥스퍼드로 보내졌고, 앤 콜리는 그해 말, 이 자매를 사우샘프턴으로 데려갔습니다. 같은 해, 가을 두 자매는 갑작스런 발진티푸스에 걸리게 되고, 특히 제인은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그때부터 제인은 집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고, 이후 래딩 애비 여학교에서 언니와 함께 기숙을 하며 수학합니다. 오스틴은 적어도 열한 살 시기부터 자신과 가족을 즐겁게 하기 위해 시와 이야기를 종종 쓰기 시작하는데요. 1790년에 쓴, "사랑과 우정 (Love and Friendship)"이라는 풍자 소설이 그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793년에서 1795년 사이에 쓴 짧은 서간체 소설인 "레이디 수잔 (Lady Susan)"는 그녀의 초기 작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챠톤에 있는 동안 대체로 호평을 받은 네 편의 소설이 출판되기에 이르는데요. 이는 "이성과 감성 (1811)", "오만과 편견 (1813)", "맨스필드 파크 (1814)". "엠마 (1816)" 등 네 편의 작품입니다. 연이어 출판된 그녀의 작품들은 당시 평단과 사람들로부터 적잖은 호의와 평가를 받았지만 끊이지 않은 명성과 작품에 대한 찬사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사후 재조명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가운데 그녀와 여동생 카산드라와 오고간 편지들이 따로 알려져 제인 오스틴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Norhanger Abbey"로 지난 1818년에 출간되었고, 번역된 판본은 2006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한 원서를 참조했습니다. 그리고 을유문화사에서 번역한 이 판본은 2015년 3월, 출간되었고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17년 2월에 나온 초판 2쇄본입니다.

여러분도 짐작하고 있듯이 이 책의 제목인 '노생거 사원'은 작가가 만든 가상의 지명입니다. 오래된 영국 성공회의 기반이 녹아있는 노생거 사원 자체는 '가족 예배당'이 포함된, 대저택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작품 후반부에 남 주인공이기도 한 헨리 틸니가 여 주인공인 캐서린 몰란드를 향해, 역사적 이성관이 담긴 영국 교회의 유산을 읊는 대사에서 이 노생거 사원이 내포한 관습적 본질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캐서린 몰란드는 풀러튼에서 목회 생활을 하고 있는 목사의 딸로 태어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두 개의 목사자리를 갖고 있는데다 먹고살 재산이 상당하다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부친인 리처드는 꽤 점잖은 인물이었고 캐서린의 어머니는 현실적인 분별력을 지닌 성격 좋은 부인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가정에서 비교적 평범하게 자라난 캐서린은 그녀의 짧은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이 닥치게 되는, 바쓰에서의 6주를 시작하게 됩니다. 극중에 등장하는 바쓰는 대체로 중위 계급 이상의 교양과 적당한 지위를 갖고 있는 (소위 구 귀족 계층을 포함한) 사람들의 사교장이자 휴양지로 명성이 높은 곳이었는데요. 그녀의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앨런 부인과 그 남편의 호의로 캐서린을 포함한 세 사람이 함께 바쓰로의 동행을 하게 됩니다. 열 여덟살의 캐서린에게는 비로소 풀러튼 바깥의 세상을 접하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그녀가 바쓰의 사교장에서 처음 만나게 된, 쏘오프 일가는 그녀의 오빠인 제임스 몰란드와 작은 인연이 있던 가족이었습니다. 이 쏘오프 가의 세 딸, 그리고 이들의 오빠인 존 쏘오프와 제임스 몰란드가 같은 대학에 다니는 친구였던 것인데요. 그래서 극중 캐서린과 중요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자벨라 쏘오프가 캐서린을 보자마자 제임스와 너무나 닮았다고 경탄하고, 그 즉시 이자벨라는 캐서린에게 호감을 표하게 됩니다. 후에 그녀가 친분을 맺게 되는 주요 인물인 헨리 틸니는 캐서린을 보며, 다른 사람의 표정과 감정 표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약간의 이채를 띠기도 하는데요. 닳고 닳은 사교계에 캐서린과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어쩌면 신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타인에게 신실하고 솔직한 면을 갖고 있는 캐서린과 앞서 언급한 이자벨라는 가히 상반된 인물입니다. 이자벨라는 다른 사람의 호의를 자신의 평판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영악하게 이용할 줄 알고 때에 따라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어필하기도 하여, 특히 또래 남자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감을 그저 수용하는 것을 넘어 즐기기까지 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이 쏘오프가의 현실적 사정(재산의 여력이 부족하다는 것)과 다소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는 틸니 가를 캐서린이 겪게 되는, 사건의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이자벨라와 자신의 오빠인 존 쏘오프가 은근히 맺어지길 바라면서, 자신과 캐서린의 우정을 순수한 관계 이상의 이익으로 삼은 셈인데요. 이자벨라라는 인물의 조성은 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가히 노골적인 의도가 있기도 합니다. 일찍이 제인 오스틴은 당시 여성들의 결혼에서 남자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요건에 따라, 선택된 여성들의 삶이 안전한 구조로 이어지는 "결혼관"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이자벨라는 자신의 외모가 갖는 이점과 주위 사람들에게 보다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 어투와 행동들을 통해, 그녀 주변과 여러 인물들을 적절하게 이용합니다. 헨리의 형이자 군인이기도 한 프레드릭에 대한 이자벨라의 어정쩡한 태도는 이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캐서린의 오빠인 제임스와 공공연하게 서로의 애정을 밝히면서도 그녀에개 추근대는 프레드릭의 행동에 대해선, 소위 그 시대 '레이디'에 맞지 않는 단호함을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됩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위선'을 정확히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독자들에게 명백히 조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프레드릭과 이자벨라, 이 양 캐릭터의 존재성은 진실된 태도의 캐서린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극의 중후반을 넘어가는 지점에서, 캐서린이 헨리의 여동생인 엘레노어 틸니에게 보이는 호감은 대체로 선명한 모습이기도 한데요. 문제가 있는 부친의 슬하에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자라난 엘레노어는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노력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캐서린 - 이자벨라 - 엘레노어" 이 세 캐릭터가 각각의 고유한 개성을 보이면서도 극중 지문과 대화를 통해, 이들의 개별성이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장면들은 이 작품의 백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세 여성 캐릭터들 가운데 꽤나 긍정하게 된 인물은 주인공인 캐서린이 아니라 엘레노어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서사 가운데 아쉬웠던 부분은, 제임스와 이자벨라 간의 소위 파혼 (부친인 리처드가 그의 아들에 대한 약혼을 전폭적으로 지지함으로써)에 대한 좀 더 면밀한 후술이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틸니 가의 저택이라고 볼 수 있는 노생거 사원에 체류하고 있던 캐서린에게 제임스와 이자벨라, 양 자가 각기 다른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요. 이 가운데 이자벨라가 틸니 가에 대해 험담에 가까운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저는 후반부에 의미심장한 반전이 이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내용들은 완전히 다른 측면의 후일담이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결론을 예상하고 있던 저에게는 굉장히 어설프고 함축적인 결과물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래서 이자벨라의 역할과 그녀의 서사적 측면의 중요성은 아쉽게도 금방 사그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지금보다 젊었을 시절에 다른 이성의 눈에 들어 고백 직전의 감정적 끌림만을 추구하는 지인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예전에 지인인 어떤 여성은 다른 이성이 자기에게 고백하는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너무나 좋아한다고 했었죠. 남자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조장하고 진실된 가치와는 상관없는 감정의 오고감을 즐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앞선 사례가 옳다 그르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러한 행위 자체로 인해 진정한 관계에 대한 본질과 인간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이 이를 충분히 숙고하고 성찰하기란 아무래도 어려울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한적이지만 이자벨라와 프레드릭, 이 두 인물과 헨리와 캐서린의 지속적인 교류, 그리고 서로 간의 이해가 더욱 대비되어, 우리에게 나름의 의미를 전하는 것이겠죠. 더불어, 더욱 어리석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틸니 장군과 존 쏘오프의 인물 설정은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얼마나 멍청하고 자기 본위적인 남자를 혐오했는지 짐작하게 했습니다. 극중 존 쏘오프가 터무니 없는 이해로 캐서린을 힘들게 하는 것이나, 그런 자신의 오빠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이자벨라의 어리석음 역시, 저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용두사미라고 했던가요. 만약 이 작품이 후반부에서 견고한 서사를 갖췄다면 거의 나무랄데 없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됩니다.


- 어떤 사람의 이유 없는 호의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어떠한 지성이나 통찰이 전무하더라도 의도적인 행위와 언행들의 이면을 짐작하고 그 사람의 선함과 악함을 끄집어 내는 것이죠. 그래서 대문호들에게 진정한 순진함이 갖는 의미가 바로 이러한 본성의 분석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어리석음과 악함은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몰란드 부인은 귀족과 남작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그들의 일반적인 악행을 헤아릴 수 없었고 그들의 계략으로 딸이 위험에 빠지리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분 좋은 편지를 쓰는 재주는 여성의 고유한 영역이죠. 타고난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일기 쓰기가 도와준게 분명합니다."

사랑의 섬세함이나 우정의 의무에 대한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친구에게 어느 시점에 미묘한 농담을 적절하게 던져야 하는지 또는 어느 시점에 달라고 졸라야 하는지 몰랐다.

만약 캐서린이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더 잘 알고 또 자신의 감정에 덜 몰두했다면 오빠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자벨라의 미모에 반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마음은 순수하고 행동은 잘못이 없는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망신당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우스운 꼴을 보이고 불명예스러워지는 것이야말로 여주인공의 삶이며, 그런 상황에서 발휘하는 용기야말로 여주인공에게 위엄을 주는 법, 캐서린도 용기를 내 버텼다.

남자는 여자의 새 가운에 관심이 없다는 걸 남자나 알지 누가 알까. 남자의 마음이 비싼 옷이나 새로 산 옷에 흔들리지 않는 다는 사실.

"결혼이나 춤이나 남자가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여자는 거절할 자유만 가집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득을 보려고 맺은 약속이라는 점도 같아요."

희생은 고귀하다. 그들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친구를 불쾌하게 만들고 오빠를 화나게 만들고 그 두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계획을 자신이 나서서 망쳤다는 괴로운 자책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잉글랜드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국인의 기질과 습성을 보면 정도는 다르더라도 일반적으로 선과 악이 섞여 있다.

그의 분노가 헨리를 경악하게 했지만 위협할 수 없었던 것은 헨리가 자신의 목적에 흔들림이 없었고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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