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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경제적 결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 지음, 박만섭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1월
평점 :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883년 6월, 영국 케임브리지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인 존 네빌 케인스는 경제학자이자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문 과학 강사였고, 모친인 플로렌스 에이다 케인스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진보적 사회 개혁가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메우 사려깊고 세심했으며, 케인스 본인은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받기도 했는데요. 더구나 그가 이튼에서, 장학금 프로그램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적인 코칭 프로그램의 지원도 부친이 도맡아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수학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면서, 1897년 케인스는 영국 버크셔 주의 이튼에 소재한 13세에서 18세 사이의 남학생들을 위한 수준 높은 기숙 교육을 제공하는 이튼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수학하게 됩니다. 그는 이 시기에 수학, 고전, 역사 등 다양한 분양에서 특별한 재능을 드러냅니다. 또한, 1901년에 그는 수학 부문에서 톰라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1902년이 되자, 케인스는 좀 더 수준높은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로 진학합니다. 물론 이곳에서도 장학금을 받게 되었는데요. 당대 가장 영향력있던 경제학자인 알프레드 마셜이 그에게 강력하게 경제학자가 되라고 조언하지만, 반대로 그는 조지 에드워드 무어의 윤리 체계를 포함한 철학에 끌리게 됩니다. 이후 학업을 마치고 케인스는 1906년, 런던에 소재한, 인도 행정을 총괄하는 인도 사무소의 공무원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같은 시기에 알프레드 마샬과 아서 세실 피구가 개인적으로 지원한 경제학 강사를 역임하면서 '확률론'을 연구하게 됩니다. 더불어 그는 1909년에 더 이코노믹 저널에서 세계 경제 침체가 인도에 미친 영향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기사를 발표하고, 이곳의 산하에 '정치경제 클럽'도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연유로 1911년 케인스는 더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자가 되고, 1913년에는 자신의 첫번째 논저인, "인도 통화와 금융"을 출간하게 됩니다. 이후 요동 치는 유럽 정세속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1월에, 영국 재무부에서 공식적인 정부 직책을 맡습니다. 1919년이 되자 비로소 대전이 종식되고 이어지는 전후 처리와 관련된 영국 재무부 재정 대표로 케인스는 임명되는데요. 바로 그의 이 논저는 베르사유 평화 회의와 연합국에 대한 독일의 전쟁배상금과 관련된 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Economic Consesquences of the Peace"로 지난 1919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을 위해 쓰인 판본은, 1973의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본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번역본의 출판은 2024년 11월에 이뤄졌습니다.
서두에서 혹여 글이 장황해질 수 있어, 케인스의 1920년 이후의 이력은 따로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평론과 해당되는 비평에 따라, 케인스의 이 글은 꽤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가 개인적으로 크게 인상받은 부분은 케인스를 향해, "당신 노골적인 친독파 행세를 하는거냐"라는 거의 인신공격과 다름 없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 베르사유 평화 회의의 결과로 나온, 독일의 징벌적 전쟁 책임은 사실상 카이저의 퇴임과 시작된, 독일 민주주의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소멸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저 오스트리아인에 불과했던 아돌프 히틀러가 (유화적으로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일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대다수 국민의 증오를 정치적으로 부채질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전을 다시 한번 답습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베르사유 회의가 비이성적인 측면으로 치달은 원인을 꼽는다면,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의 독일 제국을 향한 프랑스인을 대표하게 되는 그 증오와 혐오의 감정, 그리고 계속 파행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우물 안의 이상주의자'였던 미 연방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정치적 무능이 대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870년 보불 전쟁 이후, 프랑스인들의 마음 속에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베르사유 궁전에서 카이저와 비스마르크를 포함한, 독일 제국의 선포는 이 시점의 클레망소에게 독일을 짓밟는 매우 중요한 명분이 되었을 겁니다. 물론 연합국의 한 축으로서의 프랑스의 지위, 특히 군사적으로 역할을 한 국가의 총리라는 인물을 중재하지 못한 것은 유럽의 권력의 역학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전후 처리가 모두에게 패착이 되었던 점은 분명합니다. 이를 과거 역사에서 도출해 본다면 이런 평화는 결국, 케인스의 말마따나 "카르타고식 평화'라는 수식 자체는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에 와서 우드로 윌슨으로 대표되는 고결한 학식이라든지 종교적 신념 혹은 원초적 국제주의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의 원천으로 몰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유럽의 막대한 채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미 연방 대통령이라는 신분이라면 본인이 그리는 유럽의 미래가 미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유럽(특히 서유럽)이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국가적 이익을 따질 계재는 분명 필요했을 겁니다. 이것을 현실적인 측면이라고 본다면 윌슨이 주창했던 민족자결주의는 그야말로 현실과 이상, 어느 지점에 있는지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판단해야만 합니다. 물론 주요 강대국의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수사가 매번 이성적이지는 않겠지만 특히 윌슨의 그 우유부단한 본성 자체로 말미암아, 실질적인 유럽 평화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점은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는 다른 여타 민족들에 대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관점을 주장한 인물이 도덕을 부르짖지만 스스로의 웅변에 빠져, 현실을 도외시하는 태도로 일관한 것은 엘리트 정치인의 전형적인 무능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베르사유 회의로 도출된, 소위 14개조 조항은 일반적인 맥락에서 '전쟁 방지'를 추인하고 있습니다만 명시적으로 알자스-로렌 지역과 관련한 1871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가한 잘못을 바로잡는 것과 육상, 해상, 공중에서 연합국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에 가해진 모든 피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연합국의 '추가 주장'이 반드시 더해져야 한다는 조항 문구 등은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폴란드의 독립이 공인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와 폴란드가 왜 동맹 관계(물론 서류상의 동맹이지만)에 이르렀는지, 어느 정도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과거 나폴레옹 전쟁 당시, 곳곳에 넘치는 혁명의 기운이 폴란드인들에게 자신들의 독립이라는 목표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역사적 변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프랑스와 폴란드의 연대, 그리고 이들의 동맹이 추후에 자신들에게 어떠한 여파를 끼치게 될지 고민한 영국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조항은 그저 허망한 정치적 결과로 남은 국제 연맹 창설의 의의였습니다.
케인스가 이 글 4장에서, 전면적으로 논하고 있듯, 독일은 과거 농업 생산국이었으나 나중에는 영국을 위협할 정도로 2차 산업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루르 지역, 고지 실레시아, 자르 분지의 풍부한 탄전을 기술적으로 훌륭하게 개발하여, 놀라운 산업적 성취를 얻은 것인데요. 조약에 따라 앞서 언급된 루르 탄전이 15년 간의 국제연맹의 관리 끝에, 프랑스에 완전히 할양된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석탄과 철광이 기반이 된 산업이 국가 경제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독일 역시, 탄광을 통해 비약적으로 산업 개발을 달성한 후발국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석탄은 국민들의 난방과 취사를 위해 필수적인 자원으로 케인스는 무엇보다 '독일의 내부 수요'에 대해 주목합니다. 이는 독일 국내의 석탄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연합국 배상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밝히는 주요 논점은, 앞서 대전에서 독일이 끼친 연합국의 민간인 재산 피해에 대해 이것을 연합국이 피해 배상에 나선다면, 이미 경제적 붕괴에 이른 독일 경제가 끝내는 독일인들의 사유 재산을 통해 이를 갚을 수밖에 없다고 피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사유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주의적 연원을 갖고 있는 서유럽을 떠올려 본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게 일반적인 정의의 입장에서 독일인들에게 합당한 것이냐는 점을 되물어 보게 됩니다.
이러한 독일을 향한 모호한 전쟁 배상 책임은 '독일과 그 동맹국'의 공격이라는 문법을 내세워, "오스만 제국이 수에즈 운하에 입힌 피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이 아드리아해에서 입힌 피해와 관련해 과연 독일이 배상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케인스는 이렇듯 주장합니다. 결국 그는 이런 요망한 전쟁 배상 책임이 "독일이 그 지급 능력의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고 이 청구 총액에 대한 과학적이고 정확한 추산의 기초가 될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프랑스의 의도대로 이 사악한 독일이 후에 더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이참에 아예 이들을 회생불능의 상황으로 내몰아야 한다는 숨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물론 법학자들이나 관료들에 의해, 국가가 전쟁을 통해 감당해야 될 '배상'이 국민들에게 어떠한 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와 그렇다면 국민들 모두가 이 배상 책임에 자유로울 수 없는가에 대한 법적, 정치적 책임의 한계를 명시할 어떠한 이유가 있는지 거의 무지와 가까운 관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일반 독일 국민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을 윌슨 뿐만 아니라, 여기에 참여한 다른 정치인들도 갖고 있었겠지만 결국 그것은 그저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케인스는 여실히 밝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소극적인 정치적 접근은 당시 로이드 조지 총리가 선거를 앞두고 있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인스는 로이드 조지 총리가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무능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지적하고 있었는데요. 전쟁 배상과 조약 협약에 따른 영국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도 그 여론과 다음 권력을 위해, 다시금 표를 얻어아먄 하는 결단 사이에서 로이드 조지 역시, 무능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케인스가 당시 영국의 국내 상황이 어느 정도는 '총리가 자초한 문제'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즉, "다른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독일로부터 전쟁의 전반적 비용을 확보하겠다는 선거 공약은 역사상 영국의 정치인들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가장 심각하고 무모한 정치적 행동 중 하나"라고 케인스는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영국 수상은 이러한 국내외적 기대감과 이를 조정하는 정치적 무능에 빠져, 독일과 체결할 조약에 불공정하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경제적 근거를 내세우고, 윌슨 대통령과도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한 당시 엘리트 정치권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관되게 독일의 배상금 지급의 불가능성을 강조한 케인스는 현재의 붕괴된 독일 경제와 산업 기반 시설이 실질적으로 회복되기가 어려운 정치적 환경, 이런 상황에서 독일 국민의 사유 재산까지 쥐어짜내야 하는 문제에, "독일은행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독일 마르크화는 평가절하될 것이고, 이 평가절하는 독일의 미래 배상 전망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독일의 신용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독일 마르크화가 적정 수준 이하로 평가 절하된다면 그 자체로 유럽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는 독일 경제를 회생불능으로 만드는게 미국과 서유럽에 결코 이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추정되는 독일이 갚아야 할 배상금이 50억 파운드로 일부 제시되기도 하지만, 케인스는 이를 총체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연합국 측이 독일에 요구할 배상금이 실제적으로는 80억 파운드가 초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합니다. 이것은 독일이라는 국가의 경제 붕괴를 자의반 타의반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수치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은 이전과는 다른 산업 발전의 규모로 시민들에게 있어 삶의 풍요로움이 증대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이 미래에 대한 낭만주의적 사고가 점차 대세가 되기도 합니다. 인류의 이런 진보가 서로간에 더이상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긍정론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생산 수단의 발전과 그로 인한 소비의 증대, 시장의 발전은 이러한 경제적 관계를 통해, 평화를 촉진시킨다는 경제학자들의 완고한 아이디어와도 꽤 맞닿아 있는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참혹한 대전은 많은 사람들의 순진함을 깨뜨렸고 전후 유럽인들의 사고관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대전 가운데 정치지도자들의 아주 지독한 인명 경시는 몰론이거니와 자신들이 겪은 전쟁이 이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케인스는 과연 앞으로의 세대가 살아갈 유럽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고 예견하고 그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다시 주지되는 결핍과 분노,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와 교묘한 정치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미래의 유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전후의 대책에 있어 그만의 해법을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기도 하는데요. 일종의 '처방'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7장은, 전반적인 이 '평화조약 개정'을 제시하고, 최소한이나마 독일 산업에 기반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생계 수단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그는 조언합니다. 특히 이러한 관계 개선을 위해 민주주의 국가들의 서로간의 이해와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어느 정도 바라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당시 요건으로도 꽤나 이상적인 해법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과연 정치적 이합집산에 놓인 유럽 정치가 이를 수용할 수 있을지는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요. 조약이 철저하게 이행되었던 그 결과는 그것이 주된 요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음 대전을 초래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당시 독일인들이 바랬던 연합국의 최소한의 배려는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렇게 독일의 패전 책임은 불행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는 정치인들의 허위와 다름없는 발언과 국가간 이해관계에 매몰된 국제관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안일주의에 기반한 전후 체제는 다시금 인간을 배반하게 만듭니다.
-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독일 국내의 식량 수요에 따른 식품 수입이 연합국에 의해 전면적으로 용인되지 않아 대다수 독일 국민들이 기아 상태에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충격적인 진술이었습니다. 전쟁의 범위 그 자체를 치열한 전투 속에서 이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종전이 급박하게 이뤄졌다 하더라도 패전국의 시민들이 하루하루 먹고 자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현실이 누구보다 권력자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는 점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시대를 다른 모든 시대와 구분하는 특징은 고정적 부와 자번 개선이 대규모로 축적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부의 분배에서 존재한 불균등이었다.
다만 지금 나는, 불평등에 근거한 자본 축적의 원리는 전쟁 이전의 사회질서에서, 그리고 그 당시에 우리가 이해하던 의미의 진보 개념에서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원리가 불안정한 심리적 상태에 좌우되며 이 심리적 상태를 다시 살려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독일인은 협박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협상에서 어떤 관용이나 후회도 보이지 않고, 상대방을 기회 삼아 이득을 얻을 수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하며,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일도 서슴지 않고, 명예나 자존심이나 자비심이 전혀 없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프랑스와 클레망소의 정책은, 구질서는 항상 똑같은 인간 본성에 기초해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 그러므로 국제연맹으로 대표되는 원칙은 모두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최대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놓는 것, 1870년 이후 독일이 발전하면서 이뤄놓은 것은 모두 원상 복귀시키는 것이 프랑스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워싱턴에서 효과를 보았던 초연함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비정상적일 만큼 내성적인 그의 성격 때문에 도덕적으로 자기와 동등하기를, 또는 자신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기를 원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주요 연합국 및 관련국 사이의 조약에서 확정될 국경의 범위 안에서,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엄격히 존중한다. 독일은 국제연맹이사회의 동의가 없는 한 이 독립이 양도 불가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에 더해 독일은 연합국이 요구하는 경우 향후 5년 동안 매년 최대 20만 톤의 선박을 연합국이 지정하는 형태로 건조해 연합국에 양도하며, 이 선박들의 가치는 독일이 지급해야 할 배상금 총액에서 차감된다.
왜냐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채무 권한을 실현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게 자신들의 이익에 절대적으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이드 조지는 여러 조언자의 의견 사이에 존재하는 넓은 간극 뒤에 자신을 숨긴 채, 독일이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의 정확한 크기는 자신이 조국의 이득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다뤄야 할 미해결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이전에 영국이 엄숙하게 선언한 약속, 바로 그 적국이 무기를 내려놓을 때 믿고 있던 약속과는 다른 배상을 받아내는 것을 자신과 영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만들었다.
독일의 재정적 파탄이 너무 심해서 독일은행의 금을 제외하면 당장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양이 상당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독일을 한 세대에 걸쳐 노예 상태로 격하하고, 수백만 인간의 삶을 퇴화시키며, 한 나라의 모든 국민에게서 행복을 박탈하는 정책은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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