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남자 - 개정판 폴 오스터 환상과 어둠 컬렉션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북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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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영화 제작자였던 폴 오스터는 1942년 2월 3일,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사무엘 오스터로 저지 시티에서 형제들과 함께 건물 소유했던 지주였고, 모친인 퀴니 보갓으로 평범한 가정 주부였습니다. 이 부부는 일종의 이민자들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터가 고등학교 3학년 때가 되던 해에, 부모는 이혼하여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뉴어크 위콰히크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됩니다. 다른 가족이었던 삼촌은 당시 큰 명성을 갖고 있던 번역가 앨런 만델바움이었습니다. 오스터는 뉴저지 주 사우스오렌지와 뉴어크 등지에서 자랐고, 메이플우드에 있는 컴럼비아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그는 1970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과 비교문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프랑스 문학 번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1974년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와 조셉 주베르와 같은 프랑스 작가들의 시, 에세이 등의 번역 작업을 지속하는데요. 이후 1982년에 호평 받은 데뷔작인 『고독의 발명 』으로 말미암아 『뉴욕 3부작』역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1980년대까지 꾸준하게 작품을 발표했던 오스터는 1990년대 후반 영화 제작에 확고하게 전념한 후, 남은 20년 동안은 다시 소설과 회고록으로 작품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작품 활동을 제외한 자신의 외적 활동과 관련해, 오스터는 스스로의 정치 성향을 "민주당 보다 더 좌파적이라고 설명했지만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될 것 같아 민주당에 투표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2023년 3월 11일, 오스터의 아내 시리 허스트벨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가 2022년 12월에 암 진단을 받았고, 뉴욕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 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지속적 치료에도 불구하고, 폴 오스터는 2024년 4월 30일 브루클린 자택에서 폐암 합병증으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Man in the Dark"으로 지난 200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2008년 9월에 초도 번역이 이뤄졌습니다. 제가 구입한 번역본은 개정판으로 2025년 9월, 출판된 판본입니다.

극의 주인공인 오거스트 브릴은 현재 일흔두 살로, 1984년에 퓰리처 상을 받았을 정도로 명성을 얻은 비평가였습니다. 그는 자신 스스로를 "구덩이에 밀어 넣었다"고 말할 정도로, 사랑했던 아내가 암으로 떠난 뒤, 삶이 망가지는 정도가 아니라 무너지는 단계에 이른 상황입니다. 이런 그에게는 유일한 딸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글을 업으로 삼으려는 미리엄과 그녀의 딸이자, 손녀인 카티야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자신의 손녀 역시, 이제 시작된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고통을 당하고 말았는데요. 카티야의 남자 친구였던 타이터스 스몰이라는 친구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이 타이터스 스몰이라는 청년의 죽음에 대해, 작가인 폴 오스터는 서두에 교묘한 함정을 만들어 놨습니다. "질병에 시달리는 젊은이"라는 표현이 물론 정신과 육체, 모두 해당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마치 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배경을 유지했는데요. 후반부에 드러난 정확한 그의 죽음을 통해, 왜 손녀인 카티야가 그렇게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노년의 주인공인 브릴도 말년의 큰 과제를 손녀인 카티야의 '세상으로의 복귀'로 삼은 만큼, 할아버지와 손녀라는 관계는 결국에 서로를 좀 더 면밀하게 알아가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두 사람의 크나큰 아픔을 어느 정도 상쇄시키는 위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거스트 브릴의 남은 삶을 이끄는 힘은 오로지 손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귀한 손녀는 자신과 세상을 떠난 아내 소니아와의 귀한 재결합을 가능케 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노년의 오거스트 브릴의 이야기와 또 다른 이야기인, 오언 브릭의 서사가 메타 소설처럼 이어집니다. 이 오언 브릭의 따로 이어지는 별개의 이야기는, 바로 오거스트 브릴이 쓰고 있는 작품으로 설명되는데요. 작가인 오스터에 의해 이 의미심장한 브릭의 스토리는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즉, 오언 브릭만의 세계와 사건들이 2000년대 초반의 미국 정치를 몸소 체험한 작가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인데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오언 브릭은 갑작스럽게 평행 세계로 이동하게 됩니다. 미국은 연방군과 독립군의 내전으로 치달은 상황입니다. 이것의 서사는 오스터 답지 않게 그다지 정교하지는 않지만 2000년 대선에서 대법원 판결 직후 주요 도시에서 발생한 시위가 끝내 폭동으로 이어져 유혈 사태로 번졌고, 뉴욕시와 자치구 대표들이 주도한 분리 독립 운동은 연방군의 공격으로 8만명의 무고한 피해자들을 낳습니다. 역사적으로 2000년의 미국 대선은 조지 W. 부시와 민주당의 앨 고어의 대결이었습니다. 이때 앨 고어가 승복해 최종적으로 조지 W. 부시가 백악관의 주인이 됩니다. 오언 브릭이 체험한 평행 세계에서는 이것을 아주 처절하게 비튼 것이죠.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반대하던 일부 미국 시민들이 봉기에 나섰고 여기에 호응했던 13개 주가 연방에 맞서 분리 독립하게 됩니다.

앞서 폴 오스터 작가의 고유한 정치 성향에 대해 설명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민주당보다 더 왼쪽이라고 했으니, 별개의 액자 소설로 봐도 되는 브릭이 겪게 되는 평행 세계의 '미국 내전'은 오스터 그 다운 발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선 오거스트 브릴과 여기의 오언 브릭의 복잡한 셈법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여기까지만 밝히겠습니다. 다만, 독립군의 자치 지역이 전국민 의료 보험 제도를 적용할 정도로 루즈벨트보다 더 진보적인 체제로 나아갔다는 점과 독립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조지 W. 부시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꺼려하는 모습은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더욱이 이어지는 서사에서 딕 체니와 도널드 럼스펠드를 '파시스트'라고 주장하는 장면에서는 촘스키가 말했던 "누가 이들에게 전쟁을 할 권리를 주었는가"라는 대목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오스터는 개인이 지나온 역사와 그 속에서 살았던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영위했는지를 매우 기록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는데요. 실례로 1967년 뉴어크에서 있었던 인종 폭동인 '뉴어크 폭동'이 오거스트 브릴의 가족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저 역시도 놀랐던 부분입니다. 또한, 뉴어크 폭동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뉴어크로 차를 몰로 갔던 일은 지옥의 밑부분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는 작가인 폴 오스터와 오거스트 브릴이 혼재된 나레이션은 이때의 상황을 실감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도시에 있는 흑인 새끼들은 모조리 사냥할 겁니다." 라고 말하는 전직 대령 (아마도 백인이겠죠)의 서슬퍼런 모습은 '미국의 실체'에 대해 알리려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언의 극적이고 비참하면서, 현대사의 오명이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을 앞선 타이터스의 죽음으로 극대화 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인 오스터는 극명한 '선한 사람들'과 전쟁과 폭력 그리고 증오의 시대를 건너는 이들의 삶이 과연 어떻게 무너지지 않았는가를 의식적이지 않게, 교묘하게 탐구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주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오거스트 브릴의 입을 통해, 손녀인 카티야에게 전해지는 그가 살아온 잔잔한 삶의 궤적들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어린 나이에 아내를 통해 구원을 받았다는 감정,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작은 딸, 누나와 매형의 불행한 삶, 결혼 생활의 부침을 감내하며 큰 실수를 저지르고 태어난 손녀를 통해, 두 부부가 진정 삶의 구원을 받게 되는 이야기는 작중 오거스트가 거쳐간 일상들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그토록 선한 아내를 만나게 되는 과정과 세상을 떠난 아내인 소니아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훌륭하고 아름다운지, 눈에 보이는 미사여구나 도가 지나치는 서사 없이, 담백한 시선 처리와 언어로 이를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한번 이상 '끔찍한 사랑'에 대해 회고하기도 합니다. 지독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내가 내 자신이 아니었던 시절의 맨 모습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겠죠. 여기의 다른 주인공 혹은 서사의 조력자라고 볼 수 있는 오언 브릭이 자신을 만들어낸 오거스트 브릴의 다른 자아라고 애써 해석한다면 브릭을 구성하는 모습의 대부분이 오거스트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며, 이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환경과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젋든 늙었든, 부자든 가난하든,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기습해 오듯 우리에게 닥치고, 무감각한 상태에서 깨어난다"는 브릭의 예상치 못한 결말을 설명해주는 듯한, 이 작중 금언은 마치 이디스 워튼이 자신의 작품에 녹여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쉽게 부서질 수밖에 없다"는 서사가 문득 떠오를 정도입니다. 과연 내가 내 삶에서 얼마나 통제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는 역시나 돈의 문제 아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문장 중에, 분명하게 이어지는 서사와 함께, 다음의 문장이 눈에 밟혔습니다. "오직 선한 사람들만이 본인의 선함을 의심하고, 무엇보다도 바로 그 점이 그들을 선하게 만들어준다."는 먹먹한 문단과 함께, 이들 선한 사람들은 남들은 쉽게 용서하지만 자기 자신은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층된 설명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습니다. 아마 제가 그다지 선한 인간이 아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거스트가 정말 선했던 아내에게 자신의 과오를 용서 받았기에, 그리고 아내가 자신을 남겨두고 떠난 것이 "왜 좆 같은지". 이 때문에 나는 내 삶을 궁지로 몰 수밖에 없었다는 전반부의 서사가 너무 의도적이지 않나 싶었지만 손녀를 통해, 다시 밟는 인생 경로와 그의 참회는 소시민들에게는 분명하게 충격으로 다가왔을 미국의 굴직한 그리고 부정적인 현대사와 맞물려, "당신은 이딴 세상에 왜 나를 남겨두고 갔는가"를 오거스트의 입을 그려보며,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아내를 몹시도 그리워하며 회상하는 한 어둠 속의 노인을 극에서 꺼내 그런 희한한 세상에서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희망 무언가를 찾았느냐고 되물어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여기까지 우리에게 명시를 넘어선 각인의 삶을 보여준 작가는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괴상한 세상은 굴러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의 삶도 여전히 굴러갈 것이란 말이다"라는 역사 앞에 놓인 개인의 읊조림처럼 내뱉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울릴 뭐라도 건질 수 있다면 그 삶은 그나마 온전하게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말입니다.


- 본문 226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극 중 오거스트의 출신 학교가 컬럼비아 대학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캐릭터는 작가인 폴 오스터의 모습이 투영된 인물로 짐작되었습니다. 책과 관련된 일도 그렇거니와 오랫동안 문학계에서 일한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실패와 의존성, 무질서, 규칙이 무너지는 것과 원칙이 손상되는 것을 극히 싫어했고, 그만큼이나 겁쟁이들도 싫어했다.

괴상한 세상, 만신창이가 된 세상, 주변의 온갖 곳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괴상한 세상은 굴러간다.

당신 세계에서는 그랬겠지. 프리스크가 말한다. 하지만 이쪽 세계에서 자네는 매사추세츠 7사단 상병이야. 미국 독립주 연합군 소속이지.

오직 선한 사람들만이 본인의 선함을 의심하고, 무엇보다도 바로 그 점이 그들을 선하게 만들어준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하다고 알고 있지만, 선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며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자기 자신은 용서할 수 없다.

법학대학원, 그에 이은 성공적인 변호사 활동과 점점 더 깊어지던 민주당과의 관계. 이상주의적인 좌파 자유주의자. 1960년 대선후보 지명전에서 스티븐슨 지지. 애틀랜틱 시티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엘리노어 루즈벨트 수행. 그리고 1962년 혹은 1963년 뉴어크를 방문한 케네디는 매형과 악수하며, "우리는 당신에 대해 아주 대단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그럼에도 정해진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녀는 해야 할 일을 했고, 노란색 별 장식을 소매에 두른 채 공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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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돈, 거짓말, 신 - 미국 극우는 어떻게 권력을 설계했는가
캐서린 스튜어트 지음, 안효상 옮김 / 책과함께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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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캐서린 스튜어트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출생연도와 초기 성장 자료는 구글링을 해봐도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그녀와 관련된 저자 파일과 각종 사이트에서는 스튜어트가 시카고 대학을 다녔다는 언급이 나오지만, 취득한 학위나 전공은 공개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약력이 전혀 공개되지 않는 저자는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요. (다만, 스튜어트가 미국의 우익 집단과 이들을 지원하는 부유층들을 취재하고 있기 때문에 신변 보호를 위해, 공개를 하지 않은 것으로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그럼에도 짤막하게 공개된 정보는 그녀가 유대인이고, 남편이 카톨릭 교도라는 점 정도입니다. 그녀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 종교적 민족주의의 부상 및 자유 민주주의에 반하는 미국에서의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반동 정치의 부상에 대해 비판적 취재를 하고 있는 언론인입니다. 초기 그녀의 경력에서, 미국 뉴욕시 그리니치 빌리지에 기반을 둔, 뉴스 및 문화지인 『빌리지 보이스 The Village Voice』에서,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웨인 바렛 밑에서 경험을 쌓게 됩니다. 이후 2012년에 스튜어트는 자신의 자녀가 다니는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우파 단체의 개입을 목격한 후, <굿 뉴스 클럽 : 미국 어린이에 대한 기독교 우파의 은밀한 공격>을 씁니다. 또한, 2020년 3월에는 『권력 숭배자들 : 종교적 민족주의의 위험한 부상』을 출간해, 포린 어페어스에 관련된 서평이 실렸고,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도 내용이 일부 발췌되어 게재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Money, Lies, and God : Inside the Movement to Destroy American Democracy"로 지난 202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전에 일독한 폴 하이드먼의 『극우의 시대』가 미국 공화당이 어떻게 반자유주의 정당으로 변모했고 미국 정당사에서 의회 로비로 인한 공화당의 극우화를 다뤘다면, 스튜어트의 이 논저는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사회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의 미국 부유층이 주가 된, 정치 자금 조성과 이것의 대상이 되는 각종 극우 단체와 기금, 및 싱크탱크와 마찬가지로 미국 공교육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을 벌이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극단적 교회 (개신교과 카톨릭을 포함한)들을 주요 타겟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LGBT와 동성애, 및 임신 중단에 대한 끊임없는 거짓 뉴스와 증오를 부추기고 있는 극우 포퓰리스트들과 종래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복귀를 바라고 있는 각계의 인사들의 궤변을 아주 상세히 다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이 책은 유럽의 우파 포퓰리즘을 면밀히 조사한 카스 무데와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 내부와 정치 기반에서 조직되어 행동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과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극우적 사고의 추종자들 및 근본주의에 가까운 극단적 종교인들을 분석하고 때에 따라 인터뷰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저자의 신변에 대한 걱정이 들기도 했는데요. 취재를 위한 기자 본연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저들과 관계된 자신의 인맥들을 이용하여 내부 결정권자들과도 접촉해, 이들의 본심을 분석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도 했는데요. 이런 그녀의 노력에 힘입어 르포르타주 형식이 주가 된 논쟁적이고 분석적이 글이 탄생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스튜어트의 이 글은 현재 미국의 정치와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가 현재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낸 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저도 크게 수긍하는 부분이지만 미국의 건국 이념이 무엇보다 계몽주의에 근거한 자유와 평등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권력의 압제에 대한 초기 미국 이주민들에 생각과 그리고 자신들이 과연 어떠한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지와 같이, 당시 유럽의 전제 왕정 국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아이디어를 중요시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앞선 계몽주의의 역사는 그만큼 미국이라는 국가에 있어서 하나의 유산이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 루즈벨트 행정부가 구축한 기업에 대한 과세와 복지 정책, 그리고 정부 주도의 공적 기반이 점차 부침을 거치면서, 1980년대 신자유주의로 인한 급격한 경제 기조의 전환은 사실상 저자가 동의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저자인 스튜어트는 이 글의 말미에서, 다른 저명한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제적 불평등이 결국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등장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누진과세와 폭넓게 공유되는 경제 성장"의 1950년대로, 미국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으로 갈음할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인식 하에, 미국 내부에서는 정치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적 기조가 나날이 퇴출의 압박을 받았는데 이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극단주의자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여기에 얽혀 있는 부유층의 존재였습니다. 일전의 도널드 럼스펠드와 같은 네오콘들이 자유주의의 나약한 측면이 국가를 흔들리게 만든다는 소위 레오 스트라우스식의 서사를 입에 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의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을 비롯한 미국이 온전한 자유주의적 국가를 구축하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물론 냉전의 시기였지만) 자유주의와 자유 시장의 아주 철저한 분리는 어쩌면 문화 전쟁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도입인 1장에서 이와 같은 사항이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정치와 사회에서 유지되어 왔던 '정교 분리'를 사실상 바꾸려고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문제는 여기에 더해지는 위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이 문화와 교육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정교 분리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주장을 사회에 내비치고 있지는 않지만, 몇 번의 논증을 통해 드러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끝모를 증오는 이들 말대로, 기존의 하나님이 가르친 위계와 복종, 그리고 질서에 아주 위배되는 것들로 이것이 "정교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라는 맥락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저들의 저런 주장이 어떠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바라본, 저런 극단주의자들의 논법들 가운데, '대 위선의 시대'에서 알량한 지식이나 혹은 이성의 무결주의가 아니라 '성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아주 직접적으로 말해, 무신론자들을 복음의 길로 이끄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사회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의 인식을 아예 개조해야만 한다는 과격한 목소리로 이어졌습니다. 미국 기독교의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저자인 스튜어트가 바로 '종교의 제한적 기능'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상은 이들 극단적 종교인들이 마침내 정치에 까지 자신들의 영향을 펼치려고 한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저자는 이런 미국 사회의 반동적 진행이 자유주의에 대한 배격으로 이어지는 파시즘 사회의 출현으로 디스토피아적으로 서술하고 있었지만, 기본 맥락은 앞으로 미국 민주주의 정치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엄혹한 순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극단주의적 인사들의 논법과 언어 행태가 바로 '돈과 권력을 가진 극단적 소수의 출현'이라는 단순한 서사에서가 아니라, 한 마디로 미국 정치의 위기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2장에서, 연방주의자협회의 막후 실력자인 정치 활동가 레너드 레오를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이렇게 기부자들과 활동가들의 돈이 자신들에게 밀려 들자, 미국 문화 · 정치 지형에서 사법부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수많은 극보수 싱크탱크, 법률 지원 단체, 미디어 조직, 정책 단체와 각종 행동 조직들이 이에 연합"하여 위세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라고 여겨집니다. 연방 대법원의 판사들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고자 하는 연유는 결국에는 이 문화 전쟁에서 저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 이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부유층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또한 '사회주의'라는 왜곡된 관념의 지배 하에, 자신들을 향한 어떠한 개혁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이행에서 개인의 이익과 욕망이라는 도덕적 관념의 비판을 '당당한 부자'라는 이미지로 각인 시키고, 많은 선진 국가에서 부유층들이 삼엄한 울타리와 개인 경호원들을 투입해, 일반 시민들과 철저히 삶의 경계를 유지하는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인식과 행위의 근거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이 글의 10장에서 다시 논증되고 있듯이, 이들 부유층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나 모두에게 필요한 민주 정치의 이상 따위도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안전 사회라는 틀 안에 사회를 재조직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권력을 재조정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따름인데요. 설사 사회가 과두제에 이르더라도 혹은 더 나아가, 폭력적 전체주의에 이르더라도 자신들의 기득권만 보장이 된다면 전혀 상관이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과거 히틀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던 포드와 같은 부유한 기업가의 분리된 인식과 상당히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식과 의지 하에 이들의 돈이 극단주의 세력에 살포되고 있는 상황이 지금 미국 정치가 직면한 상황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일전에 읽은 서맨사 하비의 『궤도』에서 평범한 펍에 모여 술을 나누는 3~40대 흔한 미국 남성들이 우주로 향한 우주 비행사들에 대한 동경과 질투를 보이는 장면은 마찬가지로 아메리칸 드림과 상관없이, 철저히 실패한 인생으로 여기는 많은 남성들이 그 분노의 화살을 민주당과 동성애자들, 심지어 LGBT에 돌리는 모습은 이들 계층의 역설적 자화상으로 이해됩니다. 자신들이 사회와 조직에서 낙오되었고 실패했다고 여기는 분노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이런 자신의 감정을 향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은 것이 일반 여성과 성소수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저들이 정당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8장에서, 저자는 "반민주적 반동의 자금 제공자들, 사상가들, 하사관들, 파워 플레이어들"이라는 용어로 반동적 극우 조직의 인적 설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앞선 저들은 자발적으로 '조직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는 점을 폭로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여기 더 노골적으로 말해, 저들은 극단주의 세력에 의해 쓰고 버릴 수 있는 무언가의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더해, 국내의 여러 기사에서 미국 정치가 과거 네오콘을 넘어서는 '냇콘 NatCon'의 대두를 다루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에서도 '냇콘과 워크 Woke'의 대립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가안보 대변인을 지낸 마이클 앤턴은 반 워크를 집요하게 부르짖은 인물이기도 한데요. 이들 냇콘은 작금의 워크를 핵무기보다도 더 위험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들의 증오는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에 가깝지만 이들이 자술하는 내용들은 쉽게 넘어갈 부분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중대한 위협은 핵보유국도, 기후변화도, 경제침체나 부패도, 악화되는 건강치료나 범죄도 아닌 '워크주의'다"라는 분석은 이들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깨닫게 만듭니다. 즉, 앞선 앤턴이 이 워크주의가 서방 전체를 삼킬 수 있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주장한 그 장면은, 글의 2장에서 조심스럽게 언급한 '적대적 정체성 정치'의 진면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글들을 접하지 못했던 독자들은 아니 저런 황망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으냐? 라고 되물을 수 있을 겁니다. 민주당을 악으로 규정하고 전부 일소해야 하는 대상으로 삼은 극우 단체의 인사들이나, 임신 중단에 대한 기존의 헌법적 조치를 무시하고 여성의 신체적 자기 결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임신 중단을 옹호하는 단체나 인사들을 기독교의 적인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거나 혹은 과거의 고분고분했던 여성들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피켓 시위로 옹호하는 실체적 장면은 이 모두를 포함한 사례가 과연 소수에 불과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들게 만듭니다. 저자인 스튜어트가 우려하는 지점은 앞선 열거의 속하는 자들이 조직적으로 정체성 정치와 같은 정신 무장으로 구축되어 있고 이들의 행동에 자신의 이익이 결부되어 있는 부유층의 현금 지원, 그리고 극우를 지향하는 언론인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이들에 앞서서 사상을 강화시키는 싱크탱크의 협력으로 나날이 위세를 더하고 있고, 반면에 미국 내에서 진보주의 운동과 진보적 기독교주의, 그리고 리버럴에 가까운 정치 세력이 가히 지리멸렬한 상황임을 그녀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과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의회를 점령하라고 부추긴 것을 봐도 극단주의자들의 방식은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국 정치는 저자의 말마따나 암울한 "정체성 정치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앞선 장에서 그녀는 이러한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극우 정치 자체를 우리가 알고 있듯 사상의 스펙트럼 내의 공히 인정받는 정치 사상이 아니라, 반동적 극우 단체 혹은 극우 정치로 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거의 전세계에서 이 극우 정치를 어떻게 규명하고 분석할 것인가에 대해 각계 각층의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극우 정치는 이들에게 매일 돈이 수혈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파급이 단순한 과두제의 실현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7장에서, "기부자들은 세금을 낮추고, 공공을 보호할 힘은 없지만 자기들의 사적 이익을 지켜줄 정도는 되는 작은 정부만 보장된다면 날달걀 광신, 청동기 시대를 운운하는 기행, 존넨라트, 민주주의의 종말 따위는 얼마든지 감수한다"는 핵심 요점은 충분히 충격적입니다. 더욱이 각 장에서 이들과 관련된 논증에서, "페미니스트는 강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던, 클레어몬트 링컨 펠로십 수혜자 잭 머피와의 인터뷰를 저자가 따로 언급하는 것처럼, 저러한 생각을 머리에 갖고 다니는 인사가 미국 내에서, 특히나 고학력의 백인 남성들에게서 적지 않게 보인다는 점은 이들을 같은 '인간의 범주'내에 두고 설명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또한, 워크주의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증오를 바탕으로 "페미니즘은 이 나라를 약화시키는가", "페미니즘의 해로운 궤적" 등을 아주 무분별하게 내뱉는 언사가 이들 극단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여겨진다는 점은 저에게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만듭니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함께 획책하고 있는 "동성 결혼 합법화에 대한 반대 정도가 아니라 임금에서 성차별을 허용하고, 이혼법을 70년 전으로 되돌리고, 동성애를 다시 범죄화하려는 시도"까지 나올 정도로 이들은 지극히 반동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2장 서두에서 언급된 패트릭 드닌의 "자유주의는 실패했다"는 복합적 외침은 저자의 비판적 인식대로 유구하지 않은 미국 정치에서 칼 슈미트와 레오 스트라우스의 극단적이지만 반동적인 이념을 떠오르게 합니다. 특히 칼 슈미트에게 매료된 미국 정치인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건전한 정치를 결국은 해치게 만드는 '적과 우리 편'의 대결적 개념은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기업을 일군 경제인들에게도 '아주 후련한 개념'을 도출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스트라우스의 영향력은 지금도 상당히 논쟁적이지만 이와 관련된 적지 않은 책을 읽은 저로서도 왜 이렇게 일부 미국인들이 '자신만 알고, 자신이 우주가 되는 극단주의'로 매몰되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단순히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공공의 의미가 개인주의에 맞서지 못하고 퇴락하고 이들 개인을 둘러싼 선택과 책임의 문제를 오로지 그들 자신의 문제로 획일화 시키는 과정이 교묘하게 중첩되었다고 하더라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근본주의적 성격이 강화된 오늘날의 미국 기독교가 "젠더 질서에 대한 불안, 특히 동성애 의제와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기성질서라고 간주하는 대상에 맹렬히 돌진하게 만드는 로켓 연료"다 라고 기독교적 구원 서사와 맞물려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가 따로 구술한 이 대목은 극우 정치의 이익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폭력적 사회 개조가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특히, 저들이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단어 채용이 스튜어트의 이 책에 수차례 등장한다는 점에서, 작금의 미국 기독교주의가 어느 지점에 추락하여 망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저로서는 현재의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미국 헌법의 유구한 전통인 "정교 분리"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의중에는 (캘리포니아 채프먼 대학의 법학전문대학원의 교수이자 전 학장인 존 이스트먼은 "미국 건국자들이 애초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원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공공연하게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불평등하게 태어났고 남녀는 마땅히 차별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근본 시각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적이었던 '자유주의'의 목숨 줄을 끊으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물론 저들이 왜곡해 받아들인 (시장 및 불평등한) 자유주의와 제가 생각하는 계몽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끝으로 '다양성은 미국 사회를 파괴하는 트리거'라고 여기는 극단주의자들의 범람은 그 자체로 미국 민주주의의 위협이자, 오늘날 민주 정체가 당면한 위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다수의 미국 부유층들이 배인 우월주의에 사실상 동의하고 있다는 분석에도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고 '동성애의 위협'이라든지, 워크가 핵무기보다 위협적이라는 표현 등 극단적 정체성 정치의 여파가 결국에는 민주주의를 파국으로 이끌 것이라는 점은 결코 상상의 산물이나 허접한 소설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저자인 스튜어트는 글의 결론에서 아직은 저들에 비해 우리가 절대 다수임을 표방하고 었었지만 미국 정치가 공화당의 반자유주의 정당화와 더불어, 이를 기본으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와 미국 내에서 리버럴 등에 의해 점차 요구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아주 극명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경제 엘리트들 및 부유층의 이합집산 등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미국 정치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과거 공화당이 로널드 레이건을 앞세워, 민주당과 진보, 및 리버럴 과의 문화 전쟁에 최종적으로 승리하고자 몇 십 년에 걸쳐 설계했고, 여기에 공교육에 대한 거부와 기독교 민족주의에 의한 이민자 배척 및 소수 성적 그룹에 대한 증오는 로버트 달이 강조했던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다원주의를 악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에 저자는 거듭 선거 제도를 건전하게 보존하고 극단주의 시대에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어떤 조직을 이뤄, 사실상 사회 연대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의 선명성을 차치하더라도 결국 이러한 과정이 쉽지 않아 보인다는 점은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

-미국에서의 극단주의 흐름이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신우파 New Right로 거의 통합하여 설명되고 있습니다. 저는 저자의 논증에서 도널드 트럼프 1기 하의 극우 포퓰리즘이 기존 정치 무대에서의 정치 투쟁 이후, 백인 우월주의를 비롯한 극단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함께 영합하여, 이른바 '신우파'라는 탈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즉, 거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은 모든 선거의 정당성을 무너뜨려 결국은 언제나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선거제도를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일 뿐이다.

기독교 민족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 가운데 85퍼센트가 "백인에 대한 차별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라는 주장에 동의했다.

이렇게 기부자와 활동가들의 돈이 밀려들자 미국의 문화 정치 지형에는 사법부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은 수많은 극보수 싱크탱크, 법률 지원 단체, 미디어 조직, 정책 단체와 각종 행동 조직들이 번성했다.

"보수 가톨릭이 진보적인 가톨릭보다 우위에 있는 지점은 그들이 서로 만나고 결집할 수 있는 네트워크와 기관들을 구축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빈곤, 불평등, 기후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시청자들에게 임신 중지와 여성 스포츠에서의 트랜스젠더 선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끝없이 주입한다.

레너드 레오는 연방주의자협회 출신의 보수 극단주의자들로 연방대법원을 채워 넣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우익 자금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초중등 학교뿐 아니라 고등교육기관까지 세속주의, 워크주의, 젠더 이데올로기 등 반동적 진영이 우려하는 각종 사조에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감염되어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스트먼은 건국 세대의 발언에서 맥락을 걷어낸 인용들을 줄줄이 읊으며, 건국자들이 애초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원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른바 ‘워크‘와의 전쟁이란 ‘민중‘과 ‘엘리트‘사이의 전쟁이 아닌, 상위 중산층 내부의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된 갈등에 가깝다고.

그런데 클레어몬트 연구소는 오랫동안 신중함, 덕성, 정치적 품격을 찬양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2016년 대선에 증오의 수사를 입에 달고 황금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온 남자(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공확국의 실패는 스트라우스에게 트라우마였고, 그는 이를 자유주의적 근대성 프로젝트의 실패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공학에 여성을 끌어들이여 애쓸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가 될 남성을 더 많이 모집하고,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의대와 법조계 등 다른 모든 직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엘리트 내부의 분개, 곧 사회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통로는 점점 좁아지고 무자비한 경쟁이 초부유층 바로 아래층의 진입을 가로막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감정적 손상, 다시 말해 엘리트가 엘리트에게 품는 특유한 원한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젠더 질서에 대한 불안, 특히 동성애 의제와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기성질서라고 간주되는 대상에 맹렬히 돌진하게 만드는 로켓 연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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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우리의 미래를 말하다
노암 촘스키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황금나침반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1928년 12월 7일, 미국 필라델피아 이스트 오크 레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독자적 민족 집단인, 아슈케나지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노엄 촘스키는 개혁적 지식인으로, 자신의 조국에서는 철학자, 언어학자, 정치평론가, 사회 비평가 등으로 명성을 쌓았고, 또한 분석 철학 분야의 주요 인물이자 인지 과학 분야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읽힙니다. 그는 현존하는 저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로 언어학, 전쟁, 정치, 신자유주의, 도덕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약 150권이 넘는 논저를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그의 부모인 윌리엄 촘스키와 엘시 시모노프스키는 아슈케나지 유대인들로, 부친인 윌리엄은 1913년 징집을 피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 지배하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탈출하여, 볼티모어의 열악한 소규모 작업장과 히브리어 초등학교에서 일하다 대학에 진학합니다. 모친인 엘시는 현재 벨라루스 지역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1945년, 16세가 된 촘스키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일반 학위 과정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철학, 논리학, 언어학 등의 학문에 집착합니다. 1947년 한 정치 모임에서 만난, 언어학자 젤리그 해리스와의 만남이 그의 진로를 바꾸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대학 시절의 철학자 헨리 넬슨 굿맨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촘스키는 MIT에서 모리스 할레와 로만 야콥슨이라는 두 언어학자와 개인적 친분을 쌓았는데, 이때 야콥슨의 도움으로 1955년에 MIT 조교수 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는 1965년 『구문론의 측면』을, 1966년에는 『생성문법론의 주제』를, 또한 같은 해에 『데카르트 언어학 : 합리주의 사상의 한 장』을 포함하여 10년 동안 연이어 자신의 언어학적 아이디어를 세상에 공개합니다. 이때 그는 정치적으로 1962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여 교회와 일반 가정에서 열린 소규모 모임에서 열렬히 이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1967년 뉴욕 리뷰 오브 북스 (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 기고한 글 중 하나인 "지식인의 책임 (The Responsibility)은 그에게 지적 명예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반체제 인사'라는 별명도 얻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별개로 촘스키는 오랫동안 나치즘과 전체주의 전반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는데요. 여기에 1983년에 미국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자국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지속적으로 관리 및 이용해 왔다는 주장을 펼친, 『운명의 삼각관계 : 미국,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출간합니다. 이에 1988년, 촘스키는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놓인 팔레스타인을 몸소 살펴보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방문하게 됩니다. 1990년대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 활동에 매진하기 위해 노력했고, 당시 동티모르 독립 운동에 대한 그의 헌신과 동시에 1995년, 현지에 마련된 동티모르 독립 운동에 대한 강연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이 되자, 촘스키는 MIT에서 은퇴했지만 명예교수로서 캠퍼스에서 연구와 세미나를 지속했습니다. 2011년에는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에 따른 시민들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캠프에서 연설하고 이와 관련된 논저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2015년이 되자 촘스키와 그의 아내는 브라질 상파울루에 거주할 곳을 구입하고 이때부터 브라질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 하기 시작하는데요. 2017년에는 애리조나 대학에서 단기 정치학 강좌를 열기도 했고, 이후로 언어학과에서의 강의와 공개 세미나를 포함한 업무를 수행하는 시간제 교수직을 맡게 됩니다. 2023년 6월, 갑작스런 뇌졸중을 겪은 촘스키는 아내의 조언으로 브라질로의 완전 이주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런 촘스키와 대담을 진행한 데이비드 바사미언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으로서, 라디오 방송인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촘스키와 그가 함께한 프로젝트로서의 대담집 출간은 자주 있어 왔으며, 두 사람은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과거 바사미언은 1978년, 콜로라도 볼더의 KGNU 라디오에서 방송을 시작했고 이후에도 콜로라도 주 알라모사의 KRZA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바사미언의 글(인터뷰를 포함하여)은 더 프로그레시브, 더 선, Z 매거진에 정기적으로 게재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2011년에 바사미언은 인도에서 추방되기도 했는데요. 이것의 이유는 과거 잠무 카슈미르의 인권 침해에 따른 그의 보도 때문이라는 점이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촘스키의 이 책은 원제, "Imperial Ambitions : Conversations on the Post-9/11 World"로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6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원제와 달리 번역된 책 제목이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촘스키의 이 논저는, 크게 2001년 이후 미국의 팽창적 대외 정책과 그 속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확산과 그리고 나날이 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고 있는 일종의 대담 형식의 글입니다. 언론인인 데이비드 바사미언이 원고(아마도 사전 준비된 형태로)에 따라, 주제에 맞는 질문을 촘스키에게 던지고, 이에 대해 숙고해서 바사미언에게 답을 전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바대로, 촘스키는 그 누구보다 많은 독서를 통해, 주장에 대한 촘촘한 근거를 구축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의견에 대한 근거조차 부실한 다수의 인사들과는 다르게 그의 글은 남다른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그의 유명한 논저인, "지식인의 자격'을 통해서 사회의 지적 유산(일종의 헤리티지와 같이)을 탐구하여, 남들과 다른 지적인 지위(복합적인 측면에서)에 오른 지식인들은 자신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개인적 열망이나 욕구에 따른 원초적 문제가 아니라, 지식인이 인지해야 할 마땅한 공적인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계몽주의 시대에 배운 자들의 의무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공의라는 명목으로 움직이지만, 결국은 자신의 사활적 이익이 달려 있는 정책에 매달려 있는 엘리트 기득권에 대한 촘스키의 신랄한 비판은 사회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금의 미국 민주주의 위기로서, 시민이 효과적으로 폭주하는 정부를 견제할 수 없게 만드는 현재의 프로파간다의 문제는 실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에 촘스키는 "민주 사회의 시민은 조작과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지적인 자기방어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미국 헌법의 제1조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원칙을 강조한 것이라고 봤을 때, 미국 시민은 우선 "적절한 근거에 의해 도출된 표현"자체를 객관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조언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선 지식인의 의무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시민들 역시, 사회 구성원으로서 '시민의 의무'가 있다고 저는 믿고 있는데요. 이미 많은 정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이에 동의한 바가 있습니다.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은 SNS의 구조적 확대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기반한 거짓 뉴스에 따른 선동의 문제에서 '다양한 책과 글의 필요성'을 예전만큼 요구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단순히 고등 교육을 받은 시민들의 존재가 적지 않다는 측면의 단순한 양적 지위에 국한되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을 성찰하고 또한 수많은 책과 글을 접하며, 온전히 지적 능력을 키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전무해지는 시대에 '노출'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두려운 측면의 서사이기도 합니다. 일전에 슬라보예 지젝이 광범위한 논증을 통해서, 엘리트 기득권층이 시민들 스스로 교육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취지의 서사를 꺼내 놓은 것을 접한 기억이 납니다. 따라서 그 끝에 놓이게 될 이 '어리석음의 정치'는 복합적인 양상에서, 시스템과 시민들 사이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만드는 부정적 관계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노엄 촘스키가 써 내려간 미국 정치의 비판적 단면들은 어떻게 보면 계몽주의의 유산을 스스로 짓밟고, 가장 중요한 불평등의 문제를 그저 분노의 대상을 찾는 식으로 해결한 최근의 움직임, 그리고 증오로 점철된 적나라한 서사들 가운데, 그저 일부만이 이제야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장의 핵심은 실제 교육 환경 내에서, 미래의 시민이 될 주역들에게 그저, "소극적으로 순종적인 추종자가 되라고 배우는" 그 시스템적 요구에 시민 대다수가 사실상, 반항하지 못하는 현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조지프 슘페터가 민주주의의 한계에 분명하게 언급했듯이, 투표로 인한 선출 정치의 본모습은 사실상 간접 민주주의의 한계이자, 그 기저에 있는 '교육 부족'의 시민들이 절반 정도는 스스로 자초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최근의 미국에서 조지 W. 부시와 네오콘이 만든 이라크 전쟁을 미국 국내 여론이 너무나 크게 갈려 있었다는 이번 장의 분석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야 조지 W, 부시가 딕 체니의 충견이었다던가 아니면 네오콘의 꼭두각시였다는 그의 지도력에 대한 의구심이 비틀린 수사로 전해지지만, 당시 미국 정권의 테러와의 전쟁 자체는 마크 트웨인 식으로 꾸며내자면 소위 '짙은 안개에 가려진 부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당시 이라크 후세인의 대량 살상 무기의 보유 문제가 미국이 이라크를 몸소 응징하는 근거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2장에서, "미국 국민만이 이라크를 두려워한다"는 촘스키의 극적인 언급은 이후 벌어진 전쟁 자체에 대한 수많은 희극적인 소묘를 드러내는 장치라고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물론 딕 체니의 블랙 워터로 수식되는 사적 이익 추구, 그리고 이라크를 강제로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벌였던 정치적 이행 과정 자체가 현지인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조치였음이 드러났기에 그래서 더 희극적이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에 촘스키는 미국이 다른 전제 독재 국가를 자유 민주주의로 강제하는 것은 사실상 미국의 오만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것이 그들 나라에 좋은 것이다"라고 치부하는 것이 미국 시민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새뮤얼 헌팅턴 식의 사고 방식이라 에둘러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만에 가까운 논법일 것입니다. 이 지점의 서사는 최근에 미국 정치사를 세로 쓴 게리 거스틀도 익히 동의했던 부분입니다. 더구나 이라크 포로를 다루는 과정에서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그 잔혹한 고문 사건은 미국이 그동안 지지해 왔던 인권과 자유를 옹호하는 국가로서의 도덕적 이미지를 아예 저버린 사건이기도 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도 그 윗선의 책임자를 처벌하지 못하고 그저 일개 병사 (즉, 린디 잉글랜드)를 불명예 전역시킨 것으로 끝낸, 그와 같은 일처리는 미국 정치 권력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아주 여실히 보여줬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극우들이 노엄 촘스키의 글을 전혀 읽지도 않고 좌파라고 냉소하는 것처럼, 그 자신이 남들과 다른 아주 확연한 도덕론자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의 논증 가운데 애덤 스미스를 오독한 뻔뻔한 인사들을 대충 꾸짖고 있긴 하지만 도덕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계몽주의에 대한 회복이라든지 복귀라든지 앞으로 이런 전환에 그가 아예 관심이 없다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미국이 초래한 불명예스런 여러 사건들과 이라크 전쟁에서 수많은 군인들의 생명으로 치른 전쟁의 결과에 대해 이어지는 3장에서, "도덕적 타락은 결코 계량화 될 수 없다"고 작심하여 비판합니다. 촘스키는 아주 명확하게 이 정치권에게 누가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지, 아니면 자신들은 안전한 상황에서 오로지 군인들을 전쟁에 내모는 '치킨 호크'와 같은 입만 나불거리는 정치인들의 철면피와 같은 도덕적 불감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합니다. 물론 앞선 이들은 국익의 문제를 거론하며 전쟁의 필요성, 혹은 예방 전쟁에 대한 시급한 근거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저는 과거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이 거의 목숨과 같이 여겼던 '도덕적 의무'를 망각한 현대적 하이브리드 보수주의와 비슷한 분위기로 데이빗 코츠가 비판했던 이익을 뽑아낼 수 있으면 '군사적 신자유주의'라도 좋다는 이들,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손쉽게 "결탁한 권력들"이 나쁘게 말하자면 오늘날 전쟁을 군사 무기의 경연장이자, 이것들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시험 무대이거나, 아예 새로운 산업의 부상으로 증명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분석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아무도 이들에게 '전쟁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점은 그만큼 현실의 부조화를 깨닫게 만듭니다. 이렇게 정치 권력이 전쟁에 대한 편의주의적 태도와 안일한 인식, 그리고 국익에 부합한다는 식의 근거 없는 논리들로 무장한 이들의 낯짝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여기에 "우리는 그들을 자유시장으로 인도하고, 그들에게 정직한 정치와 자유 및 문명의 산물을 안겨주고 싶었다"는 사실상 영합한 네오콘과 신자유주의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도 절로 역겨운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어지는 4장의 초입에서 촘스키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른바 '5명의 쿠바인' 사건을 정리하고 있었는데요. 이 사건의 요지는 간단히 말해, 쿠바에 대해 테러 공격을 한 테러리스트들을 미국이 교묘히 숨겨주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를들어 올랜도 보슈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자는 1976년 쿠바 항공 소속의 민간기를 폭파시켜 73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에 가담했다는 사실 관계가 언급됩니다. 그런데 조지 H. W. 부시는 아들인 플로리다 주지사 였던 젭 부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슈를 대통령 특사로 석방합니다. 2년 후, 그는 정식으로 미국 행정부로부터 영주권을 받게 됩니다. 이 올랜도 보슈 (혹은 보쉬)에 대한 기사는 꽤 많이 검색되고 특히 위키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상세히 분석되고 있었는데요. 촘스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테러리즘에 대한 확고한 반대 의사를 갖고 있는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인 올랜도 보슈를 왜 사면했는지, 이처럼 정책의 불일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조지 W, 부시 정권의 테러와의 전쟁인 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나서 대통령을 비롯한 네오콘들은 이라크가 드디어 해방되었다고 열의에 찬 비명을 질렀지만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이었는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아주 명확합니다. 이라크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던 전쟁의 도덕적 근거가 "미국이 왜 이라크에 침공을 했느냐?"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70%의 이라크인들이 이를 부정하기에 이르는데요. "자원을 탈취하고 중동을 재편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응답한 이들은 이 전쟁의 성격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글의 6장에서는 이라크 전쟁이 '미국의 더할 나위 없는 선의'였다는 프로파간다와 많은 당시 미국인들이 2001년 9월 11일 테러에 이라크가 깊숙이 관여 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확신하기도 했는데요. 이미 4장에서 촘스키는 "민주주의는 정부가 우리에게 시키는대로 하는 조건 하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체제"라는 거의 체념하는 듯한 분석을 내립니다. 이미 그는 미국의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목적의 교육이 이뤄지는 것을 뒤이어 논증하고 폭로하기에 이르는데요. 저는 이 지점에서 과거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가졌던 선명한 인상이 작금에서는 시민들이 미디어와 정치권에 붙잡힌 (인식의 차원에서) 거의 노예와 다름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의 사실상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7장과 8장에서, 무너진 미국의 교육이 어떻게 이들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대학 교육이 거의 전세계적인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미국 시민들이 보수 정치권과 이들을 추종하는 일부 언론들의 조직적인 소위 정치적 세뇌에 따라, 생각할 의지를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민중을 오직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병적인 괴물, 결국 쉽게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병적인 괴물로 전락시키려는 압박이 대대적으로 가해진다"는 것은 미국 내에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사회보장제도를 공격하는 감춰진 의도가 바로 이렇게 연결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민하고 슬기로운 시민을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삼으려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8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부자들에게는 거의 소용없는 사회보장제도가 돈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희석하고 망각하는데 (부유층의) 막대한 로비 자금이 의회에 투입되고 있는 현실은 미국의 자유주의가 과연 어느 길에 놓여 있는지 짐작케 합니다. 이는 의회 자체가 정치의 시스템적 본산이고 이러한 의회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 행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고, 또한 신자유주의자들의 화신이라 볼 수 있는 경제 엘리트들이 마찬가지로 현실 정치에서 손쉽게 권력을 쥘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까지 폴 하이드먼이나 크리스티안 마라찌가 지칭하는 경제 엘리트들의 부상에 대한 본질은 바로 이렇게 신자유주의와 얽혀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자원과 한정된 자리 배치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에 촘스키는 사회보장제도가 시민들의 연대와 상호부조에 기반하고 있고, 과거 애덤 스미스조차 동정을 인간의 핵심 가치로 여겼고, "사회는 동정과 상호부조라는 본성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스미스의 시장론에 따르면 "시장은 완전한 자유 경쟁하에서 완전한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사회를 재조직화 했을때, 앞선 애덤 스미스의 바람은 이들에 의해 철저히 도려내지는 것으로 보답 받기에 이릅니다.  

지금도 자주 읽게 되는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는, 경제적 요인이 추동되어, 과거의 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된 민주주의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러한 양상의 형태를 경제학자인 대니 로드릭도 우려했던 바가 있었습니다. 소위 신자유주의 3.0이 기반이 된 민주주의가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계화가 완벽히 이식된 자유 세계와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적 부를 쌓고 있는 주요 국가들의 소위 "시민들은 가난해지고 국가는 더 부유해지는" 양상 속에 우리의 민주주의 자체는 더 악화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평론가가 이제 우리 시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알량한 자유와 표현의 자유 (배설에 가까운) 밖에 없다는 냉소는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극우 포퓰리즘은 이 쇠퇴를 더욱 가속화 시키는 부정의 모멘텀이 되었던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사회내에서 철저하게 궤멸되었던 노동조합의 사례를 안타까운 지식인의 눈으로 그려내고 있었지만 아마도 다시는 미국 사회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시민들이 연대할 수 있었던 노동 조합의 부활은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판단됩니다. 더욱이 여기에 더해, 미국 내에서 기독교적 근본주의가 나날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황은 촘스키의 말마따나 "현대화가 진행된 여타 산업 국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비대칭과 다름없는 종교적 위세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켜켜이 진행되어 온 미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에 반하게 되는 (거의 기저에 깔린) 반동적 움직임이 도널드 트럼프라는 현상을 초래하게 된 근본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이라는 것은 거의 허구에 가까운 말놀음이고, 이들 모두는 신자유주의자들에 버금가는 나르시스트들이자 자신들의 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가차없는 무리들이기도 합니다. 촘스키가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보통 사람들을 결집시켜 자본과 권력의 집중에 대항할 수 있는 여건과 기회"가 다시금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민들 모두가 끊임없이 성찰하고 동시에 수많은 지식을 머리에 쌓아, 교묘한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않을 역량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한 두개가 아니고 또 단기간의 노력으로 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민주주의 내에서 어떠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현실적으로는 매우 비관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어리석고 오만한 정치인이 더욱 들장하면 등장할수록 무조건적으로 반사 이익을 얻는 자들이 있다는 측면에서, 체제의 뒤안길이 제공하는 수렁은 그만큼 가깝고, 우리에게는 그만큼 어려운 상황임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아마도 큰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9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본문 7장의 논증 가운데, 촘스키는 일개 시민에게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몰입하게 만들어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조장이 이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고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그렇습니다. 비대화된 자기 이익 추구의 욕구, 그리고 그것의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오직 그 자신의 책임이며, 이러한 매커니즘의 몰입된 아주 '철저한 개인'으로 만드는 과정 자체는 권력이 이들을 쉽게 다룰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아주 기본 요건이 된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현실 문제를 그의 특유의 수사적 표현으로 드러내는 대목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애치슨은 미국의 생존을 위협하지는 않더라도 미국의 지위와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에게는 방어전쟁을 할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습니다.

이란은 군사대국이기도 하지만 경제력도 상당합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이 미국에게 이란을 공격하라고 압력을 가했던 겁니다.

현 정부는 시민을 체포해서 가족이나 변호사의 접근을 금지한 채 무기한으로 구금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해, 과거 정부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권리까지 요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여간 그 6년 동안 부시 행정부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질을 현격하게 떨어뜨려놓을 것이고, 모든 결정을 공공의 장에서 개인의 손으로 넘김으로써 민주주의 가치까지 크게 훼손시킬 겁니다.

실제로 프로파간다는 몇 개월만에 성공을 거두며, 상대적으로 평화주의자이던 미국 국민을 반 독일 광란자로 돌변시켜 놓았습니다.

독립적인 기자라면 침략군의 텔레비전에서 인터뷰 하는 것이나 침략당한 나라의 텔레비전에서 인터뷰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예컨대 관타나모에서 자행되는 잔혹행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즉 그런 류의 범죄가 나치의 만행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범죄로 규정된 이후로 인권에 관련된 국제법의 기본 원칙을 철저하게 유린한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덕적 타락은 계량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타락은 틀림없이 존재하며 중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전쟁성 장관이 알제리 원주민을 절멸시키러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프랑스는 스스로를 ‘문명화를 위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라 미화했습니다.

존경받는 지식인이 되면 뭐가 유리한 줄 아십니까? 무슨 말을 하더라도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기야 민주주의는 "정부가 우리에게 시키는 대로 하는 조건 하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체제"를 뜻하니까요.

따라서 민중을 오직 자신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병적인 괴물, 결국 쉽게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병적인 괴물로 전락시키려는 압박이 대대적으로 가해집니다.

레이건에 따르면 우리 불쌍한 미국인은 캐딜락을 끌고 와서 생활 보조금을 타가는 ‘그 부자 흑인 여성들‘에게 억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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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제국 1
마이클 크라이튼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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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마이클 크라이튼은 1942년 10월 23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언론인인 존 헨더슨 크라이튼과 주부였던 줄라 밀러 크라이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뉴욕주 로슬린의 롱아일랜드에서 자랐는데, 이 지역은 아이들이 무법 행위에 휩쓸리지 않을 정도로 치안이 좋았고, 또한 좋은 교육을 받는데 있어 최상의 환경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대해 깊은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1960년이 되자, 그는 이런 열망을 안고 하버드 대학에 영문학 전공으로 입학합니다. 이후 최우수 우등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1964년부터 1965년까지 '헨리 러셀 쇼' 장학금을 받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인류학 방문 강사로 일하게 됩니다. 이런 이력에도 불구하고 크라이튼은 하버드 의대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그는 의대에 입학한지 2주만에 의학이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965년, 하버드 의대에 재학중이던 크라이튼은 첫 장편인 『오즈 온 Odds On』을 발표합니다. 당시만해도 크라이튼은 의사가 될 계획이었기에 존 랭이라는 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의대 재학 중에 몇 편의 장편을 발표한 그는 의과대학 3학년을 마친 후, 이 일과 자신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글쓰기에 진로를 바꾸게 됩니다. 이어지는 집필 활동 중에, 자신의 친구인 로빈 쿡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서스펜스 영화 '코마'의 각본과 감독을 맡게 되는데요. 쿡과 크라이튼 모두 의학 학위를 소지했고, 나이도 서로 비슷했으며, 유사한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는 점에서 그가 메가폰을 잡는 계기로 작용했을 겁니다. 1990년이 되자, 그는 '쥬라기 공원'을 출간합니다. 책이 출판되기 전, 크라이튼은 협상 불가능한 150만 달러의 원고료와 총수익의 상당 부분을 요구했고, 이 작품의 영화화 판권을 따내기 위해 워너 브라더스의 팀 버튼,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의 리차드 도너, 20세기 폭스의 조 단테가 경쟁했지만 결국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스티븐 스필버그를 위해 판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뒤이어, 1994년의 디스클로저, 1996년에 에어프레임 그리고 1999년, 전문가들이 중세로 떠나는 시간 여행을 떠나는 공상 과학 소설 타임라인을 출간합니다. 정치적으로 크라이튼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민주당 후보들에게 총 9,750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는데요. 특히 1996년 선거에서는 개혁당 후보인 로스 페로를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작품을 출간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크라이튼은 오래도록 앓고 있던 림프종이 악화되어, 결국 2008년 11월 4일, 향년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State of Fear"로 지난 200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마이클 크라이튼이라는 작가의 이름만 알고 있었는데요. 물론 영화 쥬라기 공원 시리즈의 원작자라는 점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스릴러라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크라이튼의 이 작품은 '지구 온난화'를 다룬 소설들을 찾던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제목'이었습니다. 이미 작가인 그에 관한 원문 기사들을 통해, 크라이튼이 남극 빙하 문제에 대한 뚜렷한 사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자신의 신념이 담긴 이 작품이 어떠한 말을 해줄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하여 책을 잡게 되었습니다.

도입의 몇가지 의문스러운 사건을 거쳐, 본격적으로 이 작품을 끌고 나가는 주요 행위자라고 볼 수 있는 억만장자 조지 모턴의 행적을 따라갑니다. 그는 환경 운동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로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을 어떻게 하면 의미있게 쓸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 받고 있는 미국의 유력한 행동주의 단체인 "전국환경자원기금 NERF가 등장합니다. 저는 NERF의 철자를 보고 순간 알고 있던 공상의 어떤 단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작가인 마이클 크라이튼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이 NERF는 그 어감의 불확실성답게 작중 미국 내에선 반대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이 조직의 실질적 지휘자라고 볼 수 있는 전직 소송전문 변호사 니콜라스 드레이크와 앞선 모턴의 대화와 이들을 짐작할 수 있는 언행과 일련의 과정들이, 약간의 지문을 통해 작가가 밝히는 "자신들이 선(善)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자들의 맨얼굴"을 읽는 내내, 되내이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둘러싼 급격한 서사 역시, 숨겨진 음모에 따른 본질의 어두운 측면을 다시금 떠올리며 반추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음모의 변주라고 볼 수 있을정도로 계속 이어지는 서사 가운데, 이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햇병아리 변호사인 피터 에번스가 작품 초중반 이후에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에번스는 동부에서 자라나 교육을 받고 다소 이질적인 서부로 넘어온 인물입니다. 미국 동부의 헤리티지와 반대로 서부의 이국적인 정체성이 있다면 그는 이 양자를 모두 겪어온 꽤 복합적인 캐릭터입니다. 또한 에번스는 그동안 마이클 코널리와 존 그리샴과 같은 스릴러 작가들에서 보여온 전형적인 변호사의 인상을 벗어나는 인물 조성이기도 했습니다. 작가인 크라이튼의 말대로 법이 어떤 정의를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 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여기서 그려지는 다른 변호사들처럼 노회하고 영악한 이미지로 점철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에번스를 신중하고 그래도 상식적인 인물로 만들어 낸 점은 이어지는 음모를 밝히는데 중요한 구실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작가인 마이클 크라이튼이 이 작품을 통해 아주 공개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지구의 환경 문제를 둘러싼 소위 갈등이 이제는 도덕적 선악의 대결론이 아니라, 명백하게 기업들의 이권 싸움과 다름없는 양상으로 흐르고 말았다는 폭로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앞선 NERF에서 실권을 휘두르고 있는 닉 드레이크가 추가로 1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고 있다는 에번스의 독백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는데요. 물론 진화론의 허위와 창조론의 우월성을 교육에 반영시키기 위해 미국 기독교 단체가 막대한 자금으로 의회에 로비하고 있는 사실이나, 지구 온난화가 거의 사기와 다름없다는 유사 과학 단체나 극단주의자들의 의회에 벌이는 같은 행적 역시, 상당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구 환경 문제와 관련해서도 파리 기후 협약이라든지 현재 유럽 연합이 탄소 중립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의 기후 문제가 인류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일겁니다. 그럼에도 작가인 크라이튼은 생전에 가졌던 신념대로 남극 빙하의 급격한 해빙 문제를 일종의 거짓으로 삼고, 작품의 제시된 자료를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남극의 일부 안쪽 지역에서의 빙하가 두꺼워지고 있다는 자료가 남극의 막대한 해빙이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대결 구도속에서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믿는 자들의 폭주는 충분히 경계할 만합니다. 극중에서 에번스는 극단주의자들과의 대화는 도무지 방법이 없다는 그만의 읊조림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데요. 종교적 극단주의자들과 인종적 차별주의자들, 그리고 극우적 사고에 뇌를 지배당한 자들의 오도된 신념 형태가 그것을 대의로 부풀리고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정당화한다는 측면에서, 그 자체로 사회적 관용을 붕괴시켜 더 첨예한 대결구도를 낳는다는 경고를 우리는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1권은 NERF와의 관계가 불명확한 환경해방전선 (Environmental Liberation Front, ELF)의 짐작된 테러 행위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마무리가 됩니다. 앞서 강조했던 바대로, 이런 작가의 모든 서사에 대해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온건하다고 믿는 환경 단체와 그 산하의 조직들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의 가설 자체는 무조건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문제임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도된 믿음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때에 따라 견해를 바꾸기도 했소. 가령 이산화탄소는 대단찮은 문제라고 했다가 지금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

"우리쪽이 옳다면 당연히 진실을 말해야 하는 거 아냐?"

"해마다 4만종이 멸종을 맞고 있습니다. 단 하루 동안에도 100여종이 멸종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지금의 속도로 간다면 우리는 앞으로 몇십 년 이대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종의 절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에번스는 드레이크가 재단 이사장으로서 30만 달러 이상의 연봉에 추가로 10만 달러의 수당까지 받아 챙긴다는 사실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몇몇 정부기관은 테러리스트들이 써먹을 만한 기밀 첨단기술의 매매 현황을 감시하고 있어. 예를 들자면 핵무기 생산에 이용될 수 있는 모든 물품의 동향을 파악하는 거지."

"지구 온난화 때문에 구름이 더 많아질지 아니면 적어질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환경 운동의 끄나풀이 아니다? 지원금이나 타멱으며 언론을 주물럭거리는 집단, 그 자체가 수십억 달러 규모의 경제 산업이 되어버린 집단, 공공의 이익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 수 없는 자기들만의 속셈을 가진 그 집단의 대변자가 아니란 말이지?"

이제야 깨달은 일이지만 케너도 결국 상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상식을 부정해버리는 무조건적인 반론 중독자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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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의 종말 - 국제 질서의 몰락 이후 다가오는 파국적 미래의 예언
로버트 D. 카플란 지음, 이영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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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D. 카플란은 1952년, 미국 뉴욕에서 유대인 부모에서 태어났습니다. 특히 그의 부친인 필립 알렉산더 카플란은 트럭 운전사였습니다. 모친의 이름은 필리스 쿠아샤입니다. 특히 부친은 그의 아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기도 했는데요. 카플란은 장학금을 받고 코네티컷 주, 스토어스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코네티컷 대학에 진학합니다. 당시 코네티컷 주 언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던 에반 힐에게 뉴스 작성 수업을 들으며, 이후 1973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는 졸업하자마자 여러 대도시의 뉴스룸에 지원하지만 결국 채용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렇게 진로를 바꾸게 된 카플란은 버몬트의 러틀랜드 헤럴드에서 기자로 경력을 쌓게 됩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이스라엘에 살면서 이스라엘 군대에 입대했고, 동유럽과 중동을 여행하며 취재 활동을 하다, 그리스 아테네에 정착하여 결혼을 하게 됩니다. 현재는 아내와 함께 메사추세츠 주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언론 경력 이외에 미 육군 특수부대, 해병대, 공군의 자문위원을 역임했고, 군사 대학, FBI, NPR, C-SPAN, 폭스 뉴스 등의 방송에도 출연했습니다. 이런 경력들을 바탕으로 현재 그는 외교 정책연구소 (Foreign Policy Research Institute)의 로버트 스트라우스-후페 지정학 석좌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2026년에는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석좌교수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 내의 저명한 지정학 관련 분석가로 이와 관련해, 2011년과 2012년에 외교정책 (Foreign Policy) 지의 "세계 100대 글로벌 사상가"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간혹 신보수주의자인 로버트 케이건과 혼동되기도 하는 그는, 인구증가, 도시화, 자원 고갈에 직면한 많은 개발도상국의 취약한 정부들을 분석하여, 서아프리카와 같은 지역 내의 국가들이 '체제 붕괴'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가오는 무정부 상태 The Coming Anarchy)에 대해 큰 우려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대표적인 네오콘의 비판자로 특히, "군사력에 의한 민주주의 증진"에 대해 환멸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그는 도널드 트럼프의 외교 노선과 동시에 미국의 소프트파워 축소에 대한 정책 비판을 병행하기도 했는데요. 다만, 이와 관련해, 기존 학계에서 카플란의 여러 주장들이 비판을 받기도 했고 특히 그의 논저인, 『지리학의 복수』는 '암울한 읽을거리'라는 조소를 받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aste Land"로 지난 202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가 글 말미에 밝히고 있듯, 여기에 실린 글들 가운데 일부는 "월스트리트 저널", "뉴크리테리언",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 "뉴 스테이츠먼"의 실렸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카플란의 이 글은 전체적으로 3장의 주제로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1장은 오늘날 '실질적 질서'의 부재 혹은 붕괴를 다뤘고, 2장은 강대국의 쇠퇴라는 제목하에 러시아와 미국의 쇠퇴를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 3장은 '성찰하지 않는 군중이 주도하는 군중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와 함께, 이러한 측면에서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엘리아스 카네티의 사상을 기준으로 현재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대부분의 서사가 회의주의적이고 비관적이면서, 전세계 정치경제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을 새삼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다가오는 가까운 미래 내지는 문명을 무턱대고 긍정했다가는 세계가 작금의 군벌 독재와 잦은 권력 교체에 놓여 있는 서아프리카 국가들과 유사한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을 저자는 특히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어, 굴욕적으로 맞이한 당시 독일은 튀링겐 주, 바이마르에서 극적으로 고안된 독일식 자유주의 체제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저자는 바로 이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예상대로 이 바이마르에 대한 분석은 대부분 비판적인 논조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잿더미에서 히틀러의 집권에 이르는 15년 간의, 약하고 불안했던 통치"가 작금의 러시아, 중국, 미국, 그리고 중소국가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고 저자인 카플란은 거듭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합스부르크 가로 대표되는 유럽의 전제 왕정이 참혹한 대전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소멸함에 따라, 이후 등장한 히틀러가 원인이 된 '전체주의'가 전 유럽을 다시금 두 번째 대전으로 이끌고 말았다는 역사적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유구한 역사의 과거 전제 왕정이 시회에 최소한의 질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에 대한 긍정적 기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인 카플란이 과거 전제 왕정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갖고 것은 아닙니다. 저자가 어느 정도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바와 같이,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오늘날의 형식으로 세련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었는지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풀어서 말하자면 합스부르크로 대표되는 전제주의적 왕정이 입헌제를 통해, 시민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기대할 수 있는 체제적 질서가 있었고, 어느 정도는 당시 군중들이 이러한 입헌주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치적 통제가 유지될 수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식 가운데, "초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인플레이션이 있었고, 말기에는 거의 재앙이라 부를 만한 공황"이 있었다고 저자가 언급하는 부분은, 당시 전체주의의 폭력적 부상이 어떠한 환경들로 발생하게 되었는지,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오늘날 전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이 '바이마르적 혼란'이 무엇보다 세계화의 영향임을 밝히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현재 다시금 '민족주의 대 민주주의'라는 폭력적 대결 구도를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인 카플란이 이 글을 통해, 경고하는 바는 아주 명확합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왜곡된 정치 권력은 언제든 체제를 위협할 수 있으며, 이것의 노골적인 조장은 점진적이고 누적된 '세계화의 실패'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진단 내지는 진실에 가까운 현실입니다. 1장에서 이미 저자는 히틀러가 민주주의 체제를 통해 권력을 잡고, 독일 국민을 조종하기 위한, 나치즘을 확고히 만들었듯, 지금 세기에서도 극단주의 세력에게 민주주의는 하나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일견의 진술은 우리가 깊이 새겨 들을 만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분석의 아주 극명한 서사는, "이 세상은 복잡한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소셜미디어 구호와 취약한 금융 도미노 때문에 불안정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단언은, 1장 중반에서의 오늘날 '신기술'에 대한 회의적 이미지로 점철됩니다. 이미 데이빗 코츠, 리민치를 비롯한 세계화 비판의 이론가들은, 신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영합할 수 있었지만 이들이 추동한 체제의 결과물은 약간의 앞뒤 맥락을 제하고 언급하자면, "극우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설 정치적 토양을 제공한" 심각한 불평등의 확산과 그로 인한, 시민들의 삶이 위협 받는 체제의 불안정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 가운데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더욱 확산시킨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1장의 서두에서, "개발도상국에는 상당히 많은 바이마르식 민주주의 체제가 존재한다"는 역설 아닌 역설은, 이들의 표면적인 불안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기본적으로 폭로하는 동시에, 이후 독재로 이어질 가능성이나, 이미 권위주의 독재나 다름없는 상태임을 은연중 드러내는 냉혹한 현실 인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저자는 1장의 논증 가운데,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확실히 다른 가능성 등도 존재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이를 지금의 현실에 빗대어 해석해 본다면 "체제를 불식시킬 수 있는 현저한 위기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저자의 현실 인식 자체는 그저 비관주의로 몰고 갈 문제는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논증을 통해서, 과거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정치인의 거듭된 실패처럼, 뒤에 언급되겠지만 엘리트들과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무능이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극단주의 내지는 독재 권력이 목소리를 높이는 기회가 되었다는 잠정적 분석도 그저 부정할 수 없는 지점입니다. 더욱이 오로지 국익 만을 앞세우는 행태인 "우크라이나, 대만, 가자 지구'에서의 군사적 행동이 더욱 세계를 불안정성으로 내모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인데요.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또한 사활적 이익이라 포장된 군사적 행동에 나서는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강대국의 지도자가 충분한 성찰이나 깊은 사고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등의 편협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것의 부정적 시너지는 저자가 우려하는 바대로, 질서 없음 즉, 전세계의 '바이마르화'로 조장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이런 바이마르화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분한 것이어서, 기존 체제에서의 엘리트들의 무능, "지식이 거의 없는 부분에서 자신들이 지식이 있다고 믿는 엘리트 계층 전반"과 전혀 감사를 모르는 "중산층의 존재"는 그저 표면적인 요인으로 치부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극단주의 정치의 부상 자체가 이런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초래된 결과물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가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는 전자의 "엘리트의 실태를 폭로"하는 것은 이들로 인해, 체제가 오도될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동시에, 곧 후술 되겠지만 이들 엘리트들이 쉽게 집단적 무능 혹은 무지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유념하고 더 나아가 이를 경계하는 지식인의 책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왜 노엄 촘스키가 자기 이익에 함몰된 무능한 지배 엘리트 계급을 비판하고 진정한 각성을 요구했는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2장의 강대국의 쇠퇴에 대한 논증은 특히, 푸틴의 치하에 놓여 있는 현재의 러시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금의 러시아를 과연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뿌리내린 국가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푸틴의 체제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요. 더군다나 푸틴 자신이 정적들로 규정한 '올리가르히'를 어떠한 법적 근거 없이 사적으로 권력을 동원해, 이들을 축출한 것만 봐도 명확히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영향권에 놓거나 최소한 나토와 상관없는 중립 지대로 만드는 것이 러시아의 이익이었기에 푸틴이 그 즉시 군사력을 투입한 것은 유럽의 안보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초기에 유엔이 조직되어 안정 보장 이사회를 구성할 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이 5개국이 다른 국가를 군사적으로 침략할 수 없다는 도덕적 함의를 몇 번이나 무시한, 이런 행태들이 결국에는 국제 정치의 소위 바이마르화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런 강대국들이 존재하는 전쟁 직전의 세계는 유엔을 작아지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극명한 서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국제 정치에서 어떤 일관된 질서를 기대하는 것이 다소 무리한 시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국제 정치 전반이 노골적인 세계화가 완료된 시점에서, 이러한 긴박한 연결성이 각국의 이해 관계가 보다 첨예하게 부딪칠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환경의 서사는 충분히 설득적입니다. 이러한 서사 가운데, 저자가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강대국들이 보유한 핵무기들이 지구를 몇 번이나 원시 시대로 돌려놓을 수 있고 (MAD라는 미명하에), 이러한 불안정한 평화가 정치 군사적으로 거듭 지속될 수 있는지 규명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분명 러시아가 내부적으로도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외부적으로도 쇠퇴에 이르고 있지만 '핵을 보유한 강대국의 쇠퇴'는 좀 더 다른 관점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지점은 어떻게 보면 저자의 분석 한계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는 푸틴의 존재 자체는 어떻게 보면 독재 정권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자의 일관된 논증을 저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푸틴 혹은 푸틴 현상은 질서를 찾아 볼 수 없는 바이마르화에 따른 어떤 결과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푸틴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는 핵보유국 러시아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국제 질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푸틴의 독주가 러시아를 더욱 쇠퇴에 이르게 한다는 저자의 논리는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데요. 다만, 러시아의 쇠퇴처럼 지금의 중국이 쇠퇴에 이르고 있는지는 아직 단정하기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저자는 앞선 강대국의 쇠퇴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강대국의 쇠퇴는 아무리 점진적이고 불균등하더라도 2, 3차적 파급 효과로 개발도상국과 국제 체제에 더 많은 불안정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어쩌면 이 부분의 진술은 1인에게 집중된 독재 권력으로 강화된 러시아와 중국의 기본 이해로, 이 독재적 강대국이 그저 시간이 흘러, 자연의 한 과정처럼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오판을 통한 국제정치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힘에 의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면, 가깝게는 주변국과 멀게는 이들과 별 상관없는 일반적인 개도국들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이 서두에 언급한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의 연결성 때문일 겁니다. 

이와는 별개로 2장에서, 시진핑 정권이 이른 시일 내에, 1000여개에 이르는 핵무기를 확보하려는 시도 자체가 단순히 미국을 견제하는 목적 하나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장 말미에 "고립주의는 과거"라는 최종 논법에 저 역시, 동의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형태의 트럼프식 고립주의는 '질서 없음'의 국제 질서을 더욱 부채질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 미국의 우방과 동맹, 모두를 민주주의 진영의 (함께 가는) 동반자식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미국이 지난 전쟁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무리한 민주주의 이식 (다른말로 신자유주의적 질서 이행)은 결과론적으로 군사적 모험으로 귀결된 점은 교훈으로 삼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인 카플란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에둘러 표현하거나,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일전에 브레진스키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들이 9. 11을 정치적 셈법을 위해 이용했다는 점을 명확히 했었는데요. 나중에 여러 전문가들 (예를 들어 게리 거스틀이나 브레진스키 등)이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 패권 쇠퇴를 촉진한, 한 갈래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일관되게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게리 거스틀의 진술은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 더욱 구체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백악관이 이라크의 종교와 민족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민주주의를 강요하게 만든 군정과 관련해서도 말입니다. 이제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모험주의가 남아 있지만 이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미국은 자신이 이끄는 자유 진영의 신뢰와 그 자신이 바라는 자유주의적 번영을 위해서, 적절한 개입과 균형 전략, 및 질서의 회복에 나서야 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에 국내의 전문가들은 미국이 중국과 같은 지역 내 패권국을 제대로 견제하지 않고 그저 역외 균형자의 입장에 국한된다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서태평양 지역은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곳이기에 그럼에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어지는 3장의 주된 맥락처럼, 미국의 지식인들은 과거 이데올로기 대결과 후쿠야마식의 종말, 그리고 신자유주의화에 따른 기득권 엘리트 계층의 노골적인 사익 추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토머스 프랭크와 같은 학자들처럼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보다 비극적으로 오스발트 슈펭글러를 통해 현재 우리의 정치를 조망하고 있었습니다. 슈펭글러는 정작 유럽의 종말과 다름 없는 비참한 전쟁을 목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럽 문명의 몰락에 대한 매우 중요한 예언적 통찰을 보인 지식인이었습니다. 슈펭글러와 관련해서 저자는 그가 여러 방면에 있어 매우 박학다식했고 따라가기 어려운 담론들에 대한 특유의 이해를 보이면서,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심지어 나치에 이르기까지 그들 나름의 논란을 일으킨 인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 3장에서, 슈펭글러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이를 아주 간단히 축약하자면, 슈펭글러는 유럽 문명의 거의 모든 지접에서의 쇠퇴를 예견한 인물이라고 강조됩니다. 18세기를 거쳐, 도시의 확장과 그곳에서의 교육과 자원 집중을 통해 성장한 엘리트들이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게 됨으로써, 소위 정치문화적 위계가 강화됩니다. 물론 슈펭글러의 비판처럼 이들 초기 엘리트 계급들이 제대로 된 성찰과 많은 독서를 등한시 함으로써, (자신은 주도하는 엘리트 계층이기 때문에 책 따위는 필요없다는 식으로 자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전혀 지식이 없으면서 지식이 있는 척 하는' 계급의 단면을 폭로하게 됩니다. 이는 단적으로 "이런 형편없는 판단이 인구 전체, 특히 엘리트들에게 퍼지면 셀 수 없이 많은 나쁜 결정의 잔해가 감지하기 힘들 만큼 조금씩 문명을 악화시킨다"는 슈펭글러식의 결론을 마주하게 됩니다. 정치가 왜 어리석고 우둔한 측면으로 왜곡되는지는 버틀란드 러셀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앞선 진술은 그 결과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이렇게 정치가 일반 시민들이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서 곧 등장하게 되는 소셜미디어가 결국에는 민주주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현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새삼 '군중'을 언급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는 군중 혹은 패거리들에 대한 저자의 일침은 가혹합니다. 이런 군중들이 주도하는 정치란 가히 민주주의 정치를 병들게 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무리지어 있는 군중들의 위협을 예견한 귀스타브 르 봉도 그렇거니와 여기에서 언급되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 뒤이어 나오는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론 또한 이렇게 연결됩니다. "나치와 공산주의는 군중속에 있을 때, 안정감과 순수성에 대한 열망을 공유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것은 작금의 나르시시즘적 도취에 빠져 있는 포률리스트들에 대한 강한 지지를 외치고 있는 현재의 군중에도 해당되는 논법일 텐데요. 스탈린이 군중을 소와 개처럼 관리해야 되는 대상으로 여겼던 것처럼, 극단주의 정치 그 정상에 있는 이 포퓰리스트들이 과연 성찰이 없는 이들, 즉 군중들을 위해 뭔가를 할 것이란 기대는 허구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자들은 오직 자신의 사익 추구만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에 이르는 모든 수사와 행위들은 "선한 민주주의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저자 역시, 과거의 에드먼드 버크처럼, 군중의 광기와 저항할 수 없는 극단주의적 힘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들 군중들이 '외로운 개인'을 무리에 끌어들이고 쉽게 광기에 휩싸이는 등의 통제력 상실의 광분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지독할 정도로 회의적인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를 목도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이러한 심각한 메커니즘에서 우리가 구축한 자유 민주주의 자체는 최종적이고 그것의 대안을 찾을 수 없을 일종의 이데올로기인 것은 분명하기에, 앞선 군중이 상식적인 대중, 문화를 이해하는 대중,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시민, 그리고 의무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진정한 시민에 이르게 될 수 있는 "자신을 위한 혁명"이 필요한 것도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3장 말미에, 과거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자유주의를 저자가 언급하며, "개인의 주체성과 열린 마음을 옹호하면서 대중에게 궁극적인 비판을 가하는" 일종의 합리적인 사고의 전통이 다시금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보수주의적 인상을 떠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는 군중들의 선택이 최종적으로 정치를 붕괴하게 만들고, 그 자리에 노골적인 테크노크라시와 조지 오웰식의 감시 사회로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붕괴했다"는 서사를 체념하게 될 것입니다.
               

- 카플란의 이 글은 첨예한 역사를 바탕으로 국제 질서에 대한 냉혹한 서사처럼 예견되었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이보다 더 비관적입니다. 전혀 성찰하지 않고 더이상 글을 보지 않는 엘리트 계급이 (그 무능에서 분화되어) 기술 엘리트들에 의한 야만 (예를 들어 AI에 의한 인간지배)과 그 과정에서 군중에 의한 정치 붕괴, 그리고 그런 정치 붕괴에서 테크노크라시에 의한 다수를 향한 폭력적 지배 내지는, 여기에 더해, 국제 정치에서 예견되지 않은 푸틴의 몰락이 초래할 혼돈의 무질서를 경고하고자 쓰여진 글로도 해석됩니다. 독재 국가 러시아의 정치적 쇠퇴가 마냥 기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자는 논증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역사와 정치가 혼합된 이런 식의 수많은 인용들이 이어지고, 그 흐름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된, 그 '경고할 만한' 미래는 마치 지그문트 바우만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저자는 분명하게 정치 질서와 군중이 아닌 시민의 정치를 기대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와 그것이 바탕이 되어 '통제'가 될 수 있는 세계를 원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솔제니친은 정책 결정권자나 지식 엘리트들이 때때로 피하고 싶어하는 구체적제니친은 정책 결정권자나 지식 엘리트들이 때때로 피하고 싶어 하는 구체적 실상의 가장 명백하고 필연적인 측면에 집중한다.

민족주의자인 솔제니친은 우크라이나 전쟁 초반 러시아 군대의 참해에 슬퍼했겠지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있는지 예상하는 데 있어 과연 지금의 우리가 1917년의 러시아인들이나 1914년의 유럽 전체,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의 독일인들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팔라비 왕조가 왕좌에 남아 있었다면 이란은 20세기 후반에 친서방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하고 경제적으로는 중동판 한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본질적으로 국가의 감시 밖에서 국가의 허락 없이는 인간의 모든 행동, 심지어는 생각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전체주의는 근대의 산물이다.

그런 무기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그의 언급만으로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무기의 종류에 극도로 신중을 기했으며, 궁지에 몰린 푸틴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전쟁을 끝낼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했다.

러시아는 의도적으로 대규모 유럽 민간인을 상대로 하는 한계가 거의 없는 전쟁을 추구했고, 이는 안타깝게도 조직적 대량 살상의 성향이 여전히 인간 종의 특성임을 보여주었다.

아이젠하워는 속도가 훨씬 느렸던 1950년대에도 대만이 점유하고 중국 본토가 영유권을 주장했던 대만 해협의 금문도와 마조도의 운명을 두고 중국에 핵공격을 감행할 뻔했다.

세계가 바이마르 공확국과 같은 상황으로 축소되면서, 점점 긴밀히 연결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아프리카의 이른바 오지들이 과거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목표는 실제로는 지식이 거의 없는 부분에서 지식이 있다고 착각하는 엘리트들의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20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서구 언론인과 지식인들은 자유민주주의가 그 어떤 실질적인 경쟁자의 도전도 없는 미국의 비호 아래 전 세계를 장악하는 과정에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러시아의 극심한 약세와 중국의 거대한 해군이 향후 10년 동안은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간인을 대상으로 삼은 하마스의 잔혹한 공격과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대응은 원초적인 힘이 유엔이나 G20과 같은 단계에서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정기적으로 내놓은 미온적인 결의안보다 얼마나 더 강렬한 것인지 보여주는 징후다.

국가들, 특히 민주주의 국가들은 어느 정도 국민의 수준을 반영하는 지도자를 얻는다. 인쇄물과 타자기 시대에 미국은 잘 기능하는 대중 민주주의 국가였다.

푸틴 자신처럼 개인의 자유보다 민족 정체성을 중시하는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과 프랑스의 마린 르 펜과 같은 유럽의 포퓰리즘 지도자들을 부추겨 유럽을 분열시켰다.

푸틴의 궁극적인 몰락은 안정적인 민주주의보다는 무정부 상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며, 혼란스럽고 규정하기 힘든 정치 상황으로 번질 가능성은 그보다 크다.

완전한 진실이 드러나기에 앞서 거짓말이나 반쪽짜리 진실이 군중 속에서 확산되어 진실이 밝혀졌을 때는 이미 명성을 회복하고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극도로 편협한 시각을 가진 전문가, 때문에 폭넓은 독서를 한 슈팽글러보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나치즘과 공산주의는 두 가지 결정적인 요소를 공유했다. 군중속에 있을 때의 안정감과 순수성에 대한 열망을 말이다.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오웰과 헉슬리가 묘사하는 세계는 슈펭글러가 말하는 서구의 쇠퇴이며 카네티가 말하는 군중의 폭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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