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5
케네스 미노그 지음, 공진성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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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북섬인 팔머스턴 노스에서 태어난 케네스 미노그는 어려서부터 호주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남학생을 위한 중등학교인 시드니 보이스 고등학교와 호주 시드니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시드니 대학 (USYD) 에서 수학했습니다. 1950년에 예술 학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당시 시드니 대학에서 언론의 자유, 세속주의, 반공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잘 알려진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 존 앤더슨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됩니다. 이후 영국으로의 이주를 결심한 미노그는 우크라이나 오데사와 이집트의 포트사이드를 거치며 런던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잠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한 후에 미노그는 런던 교육청에서 18개월 동안 대체 교사로 일하면서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게 됩니다. 다만, 영국 정경대 (LSE) 에서 석사 논문을 거절 당하자 그는 좌절하지 않고 같은 대학의 경제학부 야간 과정에 등록하게 됩니다. 졸업 후, 그는 웨스트 컨트리에 있는 연구 대학인 엑서터 대학에서 1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고, 드디어 1956년 마이클 오크숏의 초대로 런던 정경대에서 조교수로 시작해, 런던 정경대에서의 이력을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후, 명백하게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입장을 피력했고 보수주의적 맥락에서 자유주의 역사관을 신념으로 견지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런던의 우파 싱크탱크인, SAU (Social Affairs Unit)의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미노그는 채널 4에서 진행하는 자유 시장 경제에 관한 6부작 TV 프로그램에도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2003년에 그는 호주 정부가 수여하는 '호주 연방 100주년 기념', 센터 너리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 6월, 갈라파고스의 산 크리스토발 섬에서 주최한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회의에 참석한 이후, 당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인해, 8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Politics : A Very Introduction"으로 지난 199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케네스 미노그의 이 글은 원제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일반인들을 위한 '정치'에 관한 개론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 논증되는 주요 배경은 대체로 유럽과 미국으로 한정하여 서술됩니다. 짧게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적 연원과 이후, 중세까지 기독교가 주도한 정치적 분화, 그리고 근대의 자유와 민주주의, 전체주의적 망령을 돌아보고, 지금의 정치가 미래에도 온전히 자리매김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들을 논하는 것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계몽주의자들 혹은, 합리주의에 인도된 많은 정치적 관념들은 그것의 철학적 기원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은 그리스 문화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로마의 그것도 그리스인들의 삶을 추적한 결과물이기도 한데요. 물론 고대의 인류가 한정된 사회로 구축된 '국가'라는 관념에 얼마나 신비로운 이상을 부여했는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 아니 합리적 이성이라는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는 그것의 정치적 유산이 실제로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점은 분명 사실로 보입니다. 하지만 앞선 기본적 서사보다 서두에 미노그가 필연적으로 지적한, "정치에 대해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시대의 편협성과 위험을 경고해야 하며, 이런 경고는 예전보다 오늘날 더 필요하다"는 말에 크게 공감하게 되었는데요. 아마도 그런 연유로 12장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그에게는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설득력과 근거가 빈약한 이데올로기'가 사회에 미치는 해악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는 이미 인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몇 세대에 걸쳐 세력을 확장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이데올로그화에 대한 미노그의 비판 역시, 스스로가 오랫동안 보수주의 (혹은 우파) 학자로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논증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이성적인 판단을 보이고 있는 점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 4장에서 미노그는 오늘날 우리가 여실히 인지하고 있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원천적으로 기독교에서 유추된 점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법의 유구한 역사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기독교가 종래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이성의 눈을 뜬 인간'의 관념의 시작과는 다소 그 경계가 모호하다고 볼 수 있는 '법의 필요성'이 중세의 영주와 기사들간의 봉건 계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는 16세기 역사에서 극적으로 '토머스 크롬웰이 법이 어떻게 전제 정권을 초월한 시급한 문제인지를 증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말로는 비참했지만 그 파국의 결과는 많은 이들에게 그야말로 새로운 '정치철학적 영감'을 안겨줬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누리고 있는 '자유'라는 가치는 법의 범위에서 비로소 효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미노그는 12장 이후의 논증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계에 대해 일반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자유의 본질, 즉 "자유의 역설은 자유가 오직 우리가 이미 가진 소유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다"는 주목할 만한 요점은 어쩌면 개인이 누리는 자유의 한계에 대해 조금 에둘러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평등은 다소 모호하게 언급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진정한 평등에 이르는 길은 매우 험난하며, 그것의 이상 자체는 오늘날 우리가 구축한 사회에서 현실적으로도 가능한지 매번 상대방과 다투게 마련입니다. 특히, 개인의 선호, 선택의 자유 및 경제적 자유를 포함한 모든 자유라는 이름의 지배적 체제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평등과 민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임은 역시나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일부 세인들이 평등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누명'을 덧씌운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정치의 발견과 그것의 파급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배경이기도 한, '자기 이익의 추구'는 미노그가 다소 회의적으로 보고 있기는 합니다만,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철학적으로 대치되는 관념이기도 합니다. 이 글 8장에서, 정치인들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통해, 이들이 '자기 잇속을 차리는 행위'가 비일비재하다는 현실의 폭로와 그런 와중에 우리의 공익은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 치열한 논쟁이 담겨 있기는 합니다만, 그가 말하는대로, '공정성의 관념'은 많은 변주가 존재한다는 분석 자체는 저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마도 저자는 자유 시장이라는 큰 틀안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상이고, 그런 인식의 범위에 심지어 정치인들도 비켜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지는데요. 다만, '인간의 합리적 이성' 만큼이나 깊게 다뤄지지 않는 아니 인간의 불확실성 만큼이나 그가 회의적으로 접근하는(소위 현실적인 한계 때문에) '도덕적 본성'에 대해, 모두가 한결같이 원하는 '정의'의 존재 의미를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결부지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정의라는 단어 자체가 수많은 정치학자들의 논의대로, 보다 합리적 이성의 숙고가 전제되어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세계'의 시민들이고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사회의 기본 정의 관념이 아주 못봐줄 정도는 아니라는 미노그의 언급은 이 지점에서 순진한 생각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심지어 그의 낯뜨거운 표현처럼 '자유 세계의 정의는 세간에 알려진만큼 문제가 크지는 않다'고 이해할 수도 있을겁니다. 물론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어한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미노그는 사회가 정의롭다고 여기는 쪽이나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부류가 극한 갈등에 놓일 때, 어쩌면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여기에 정의를 단순히 복리에 준하는 어떤 이득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 인식의 파급은 정의 담론 자체를 뒤집어 엎는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12장의 초입에서, "인간이 천사라면 아무 정부도 필요 없을 것이다"는 단언과 비슷한 그의 가정은 그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善)에 이르는 길은 완만하지 않다는 지난 금언과 같이, 정의 역시 우리 정치의 토대이자 근간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정치관념적인 의미로 국한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요. 현실과 이상의 명백한 괴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 차이에서도 심심잖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기의 미노그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입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홉스는 때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신중하게 펼쳐냈습니다. 물론 그의 정치적 혹은 철학적 주장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법의 지배하에 누리는 자유가 본질적인 측면에서 정확한 정의라고 판단됩니다. 이에 저자인 미노그는 지난 세기의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우리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동일시 했던 인식을 다시금 언급합니다. 우리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혼동하듯이, 자유와 민주주의 역시 그러한 궤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자유와 민주주의가 가히 한 몸이라고 강조될 필요는 없겠지만, '민주주의가 바탕이 되지 않는 자유'란 여러모로 '소수만의 자유'로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런 불평등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선 더욱 그렇겠죠.) 제가 몇 번이나 인용했지만 지지 파파차리시가 도출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라는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용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적 사고 방식으로 읽히는 10장 후반부의 논증 가운데, "일정한 부류의 사람들만이 일정한 종류의 이상을 누릴 있다"는 문장의 본질은 이미 전술 되었던 문화나 사회적 관습 이상의 '특별한 계급'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그저 전통의 수호자들이나 기존 사회 구조적 체제를 떠 받들고 사회를 보호하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저는 저들이 나날이 심각해지는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피력하고, 경제 엘리트들과 야합하는 과두제에 대해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자들과 이해 관계를 함께한 역사를 떠올려 본다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당히 뿌리 깊은 기득권 보수주의자들의 생각은 아마도 쉽게 예상되기도 합니다. 이미 일전에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자본주의가 계급을 더욱 고착화시킨다 강조했으니 말입니다. 흔히 '오프 더 레코드 상'에서 일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와 과두제가 혼합된 정치체라도 자신들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 받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다는 소위 자기 이익적 관념은 어떻게 보면 힘 있는 자들의 우선 순위라는 내심도 이 글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법의 지배를 뼛속 깊이 이해하는 민주주의는 이를 전혀 용인할 생각이 없다는 점은 이 글에서,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민주주의와 과두제의 혼합은 그것이 개인의 신념이라고 할지라도 오늘날 민주주의 정체와는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상과 사뭇 역설적인 모습이라 봐도 그리 과한 상상은 아닐 겁니다. 

끝으로 과거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에 참여한 '학자'가 말하는 정치란 과연 무엇일까하는 개인적 의문이 그동안 있었습니다. 만약 헨리 키신저를 떠올려 본다면 그에 대한 답은 어떻게 보면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유 시장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굴절된 인식으로 바라보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정치적 관념이 지배적인 다수의 기득권 세력에게 민주주의와 정치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지금도 큰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워낙 기존 정치와 과거의 유산을 다루는 많은 글들이 진실로 냉혹한 것은 사실이고, 지금도 계몽주의적 유산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극단주의자들이 기성 정치에 등장하고 있는 현실은 앞선 신자유주의자들의 뻔뻔한 얼굴 정도는 이제 참을 수 있을 정도로 느껴지니 말입니다. 결국 미노그는 자신의 글의 결말에서, 다소 의미심장하게 도덕의 재부상과 같은 근래 학계의 움직임이 어떻게 보면 현실과 이론의 괴리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일견의 '정의', 즉 시대에 뒤떨어진 이들에게 정의로운 사회가 요구하는 생각들을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끊없는 일이 미래에 주어질 것으로 예견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분명하게 자유 시장의 담론이 무력화되었던 2008년을 목도했을 겁니다. 아마도 앞선 그 미래는 신자유주의가 만든 오판의 미래가 아니라, 추정컨대 '근대 정치의 왜곡된 재림'의 비극적인 미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혁명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 개혁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는 것을 보니, 전통적인 의미에서 에드먼드 버크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로 불릴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6장에서 저자인 미노그는, "정치적 인간은 권력에 의해, 경제적 인간은 부를 향한 이기적 욕망에 추동된다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또한 간접적으로 표현된 시장 자유에 대한 인식, 그리고 정치가 도덕적이든 경제적이든 순수한 상태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석 등은 그가 여느 정치학자들과는 다른 정치철학적 관념을 드러내는 증거라 여겨집니다.

-모든 측면에서 정치는 철학자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에서야 비현실적인 인식이지만 그것의 본질적 의미는 충분히 공감이 되고 남습니다. 
    


정치는 인간의 삶의 틀을 유지시켜주는 활동이지, 인간의 삶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치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첫번째로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을 현재에 대한 비성찰적 믿음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에 대해 자기의 공적을 주장하길 원하는 정부여당과, 모든 나쁜 것에 대해 비난을 가하길 원하는 야당들이 좋고 나쁜 모든 것이 정책에 기인한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일에 공모해 왔다.

그러므로 정치에 대해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시대의 편협성의 위험을 경고해야 하며, 이런 경고는 확실히 예전보다 오늘날 더 필요하다.

폭력과 무질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롯됐다. 자기의 공동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강한 도덕적 감각과 법적 감각이 타자의 중요성에 관한 어떤 감각과도 병행되지 않았던 것이다.

권리와 자유는 먼저 귀족계급과 부유한 도시 거주자들에 의해, 그리고 보통 그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졌다.

홉스는 그런 이상주의가 젊은 학자들을 야심 있는 사람들의 앞잡이로 만들어 유럽에 엄청난 유혈참사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사람들ㅇ이 자연법에 대해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근대 정부의 이론과 실천에서 모두 핵심적인 문제에 무감각했다.

그러므로 국가는 인간화될 필요가 있다. 이 두번째 시각은 국가를 일거에 지양하려는, 그리고 정치에서 불가피한 통치자와 신민 간의 간격이 완전히 사라진 완벽한 공화국을 창조하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독자는 정치에서 그 무엇도 순수하게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을, 또는 정말로 순수하게 경제적이거나 영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익이 개인적 비용과 이익에 따라 판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익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비판하는 편과 비판받는 편이 서로의 의도를 오해한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의 행동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가정함으로써 저치학의 과학적 기획이 제한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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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 - 지금 이곳에 살기 위하여
지그문트 바우만.스타니스와프 오비레크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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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도 전세계적인 존경을 받고 있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11월,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태어났습니다. 히틀러의 나치가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전의 폴란드에서도 전유럽의 반유대주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바우만도 폴란드인들로부터 그가 유대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했는데요. 당시 포즈난은 작은 인종의 용광로로 불릴만큼 여러 인종들이 함께 모여 살고 있는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대인들에 대한 테러는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곧 1939년이 되자, 폴란드가 나치 독일과 소련의 침공을 받게 되었을 때, 바우만의 가족은 동쪽의 소련 지역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동안 그는 소련이 통제하는 폴란드 제1군에 입대하여 군에 복무했고, 이에 콜베르트 전투와 베를린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이미 소령 계급이었던 바우만은, 부친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목적으로 당시 바르샤바에 있던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근하자 갑자기 불명예 전역을 당하게 됩니다. 당연히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반시오니스트였던 바우만은 자신의 부친과 다른 정치적 지향으로 말미암아 폴란드 당국으로부터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폴란드 시민권이 제한되자,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영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는 1971년부터 영국에 거주하면서 런던 정경대(LSE)에서 공부하고, 이후 리즈 대학에서 사회학 교수로 채용됩니다. 이때부터 바우만은 특유의 비판적 사회 이론가로 근대성에 대한 집요한 고찰, 홀로코스트 문제, 포스트모던의 소비주의와 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권력화 등을 일생에 거쳐, 주요 학문 주제로 천착하게 됩니다.

스타니스와프 오비레크는 1956년생으로, 폴란드의 신학자, 역사가, 문화인류학자 및 인문학 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런 경력 가운데, 이례적인 부분은 그가 지난 30여년간 예수회에 소속된 사제였다는 점입니다. 이에 1978년부터 1980년까지 폴란드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는 도시인 크라쿠프의 예수회 신부단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83년까지, 이탈리아 나폴리에 소재한 교황청 신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또한, 그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로마의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마찬가지로 신학을 공부합니다. 오비레크는 이전부터 카톨릭 교단의 정치화와 세속 권력에 대한 문제에 일관된 비판적 인식을 보였고, 유대교와 다른 신앙을 믿는 종교인들과 심지어, 불가지론자들과도 그는 지속적인 대화에 나섰는데요. 특히 2002년과 2003년, 로마 카톨릭과 대립하는 일련의 사건 뒤에,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이후, 전임 교황을 비판한 계기로 관구장 슈토프 디렉으로부터 1년 간의 대중 매체들과의 접촉 금지 처분을 받게 됩니다. 결국 그는 2005년 가을에 수도회를 탈퇴하고 사제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합니다.

이렇게 바우만과 오비레크의 대담을 실고 있는 이 글은 전작인, "신과 인간에 대하여"에 이은 두번째 기획집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원제, "On The World And Ourselves"로 지난 201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16년 10월에 이뤄졌습니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일종의 서신을 통해 이뤄진 두 사람의 이 대담은 기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이런 환경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폴란드 내의 종교 및 정치를 포함한 주제까지 포함하고 있는데요. 그런 연유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폴란드 정치 상황과 카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종교적 배경 등을 숙지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지식은 이미 웹상에, 사실에 근접한 여러 자료들이 공개되어 있으니 필요할 때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에는 명확히 수식되고 있지는 않지만 바우만과 오비레크 두 사람은 명실상부한 '추방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두 사람이 본질적으로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의 역사로서, 유구한 카톨릭의 연혁들을 이해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여기 지면을 통해, 유동하는 근대의 문제점,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여러 사회적 파행들, 인간 소외,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현재 인류가 해결해야만 하는 사활적 조건들과 그 문제점들을 폭넓게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이와 관련해, 두 사람은 "대안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으로 대처와 레이건의 소위 "대안은 없다"는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 언급이며, 인간의 정신과 그것을 이루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일방적이고 단방향적인 사회적 이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거듭 견지하기에 이릅니다. 이미 바우만은 자신의 여러 논저들을 통해,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그 비인간적인 주장에 대해 수차례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글 3장에서, 바우만은 자신은 더 이상 경제학자들과 토론하지 않는다는 것을 거의 양심 고백처럼 하고 있었는데요. 결국 이런 배경에는 경제학에서의 경제적 논법이 사회에 어떠한 개선된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현실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이것이 경제학의 한계인지 아니면 그것에 준하는 무엇인지는 여기서 따로 논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종교적 차원이거나 혹은 자신이 항유하는 삶의 조건에서 행복이라는 담론은 사회나 인간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 종교가 인간의 삶에 끼친 영향을 논하는 과정에서, 오비레크는 행복에 대해, "진정한 행복은 장애물을 피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과 끊임없이 맞서 싸운 데서 오는 것이고, 이것이 충만된 삶의 비결"이라고 단언합니다. 이러한 인용의 확대된 의미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보다 우리의 행복은 자본주의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왔다는 것을 먼저 인지하고 더 나아가 내 자신의 행복 뿐만 아니라 "소외된 자들, 배제된 자들, 분노한 자들"이라는 우리 이웃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마도 충만된 삶의 현격한 조건으로도 읽힙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논의되는 오비레크의 여러 주장들은, 자신이 과거 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관해서도 그는 면밀하고 정확한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3장 후반부에서, 두 사람이 공통된 맥락으로 인식하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강자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든지, 이런 신자유주의적 문제와 가이 스탠딩이 도출한 '프레카리아트 계층'의 출현이 드러내는 경제적 불평등의 총체적 문제에 누구보다 평생을 천착한 지그문트 바우만에 보이는 오비레크의 경의는 그가 단순한 사제가 아님을 드러내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바우만의 저명한 논저이기도 한, '부수적 피해'는 어느 헐리우드식의 액션 스릴러 영화에 등장하는 요소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액체 근대라는 바우만의 통찰이 담겨 있지만,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소위 현대적으로 고도화된 자본주의 체제 하에, 어쩔 수 없는 (정치경제적인) 소외자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들이 이미 있어 왔습니다. 그런 지칭으로서 우리는 이 부수적 피해를 어쩔 수 없는 전근대 시대의 빈민 계급과 일맥상통한 의미로 이해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들을 '사회적 실패자'로 규정하는 보수주의자들을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죠. 어떻게 보면 이 '용어'는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인 현실이라는 고도의 책임 회피와 체제의 문제인지 아니면 인간 자체의 결함인지, 지금도 가늠하기 힘든 난해한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 바우만은 칸트로 이어지는 인간 도덕의 계보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데이비드 흄으로 대표되는 역사를 먼저 살펴봅니다. 인간 자체는 도덕적 본질의 그 무엇으로 판단했던 카를 야스퍼스의 논법에서, 이는 나치의 전체주의의 어두운 그림자인 동시에, 현재 신자유주의적 이행에서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존재라는 앞선 신자유주의자들의 매끈한 답변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들의 본색을 이미 알아챈 데이비드 코츠는 어떤 느낌이었을지 이 시점에서 매우 궁금해 집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에 바우만은 1장에서, "밀턴 프리드먼은 사회의 심리학적 중심 원리가 탐욕이라고 역설했고, 아인 랜드는 제 잇속만 차리는 목적에 가장 적합한 수단을 선택하는 '합리적인 이기주의'를 권유"했다는 식으로 이를 비극적으로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이런 이기심과 이기주의에 명백히 반하여 등장하는 '보편적 존엄성'과 '사회적 선의 필요성'과 같은 종래의 도덕주의적 가치들은 그야말로 현재로선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것으로 엄연히 치부되어 왔습니다. (혹은 조장되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겠냐"와 같은 발언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도덕적 존재인지 아닌지의 논란을 떠나 기존의 종교가 그것의 대안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의 1장과 2장이 (폴란드 카톨릭의 현실을 포함하여) 명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과거 정교 일치의 로마 교황청의 정치적 영향력 같은 역사가 아니라, 현대에 이른 종교가 자본과 성공적으로 결합한 사실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자유주의 국가들의 개신교와 돈(혹은 자본주의)이 구조적으로 혹은 계층화된 시스템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현실이나, 현재 유럽의 카톨릭이 서구 자본주의를 옹호하면서 대안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종교에 대해 점차 폐쇄성을 띠고 있는 장면과 같은 우리가 직면한 실체적 문제들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본질에서 종교의 편협화와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태도 등의 양태는 1장을 거쳐, 2장에서 더욱 확대됩니다. 이에 바우만은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정부의 무능이나 나쁜 의도가 아니라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과 정치의 분리, 그리고 그로 인한 기존 정치제도의 만성적인 권력 결핍" 등에 있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종교의 무능도 포함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 상태에서 나날이 등장하고 있는 극단주의적 선동 정치인의 사례는 약간의 논외로 하더라도 말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일절 관심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과거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에 대한 인식, 공공선에 대한 함의 또한, 이제는 교과서에서나 접할 정도로 감각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 되어본 적이 없는' 근 백년이 넘는 시간은 파국의 전체주의를 잉태했고, 또한 1세기가 채 안되는 시점에 이르러, 현대화된 극우 파시즘을 기존의 정치 무대로 끌어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기 두 명의 현인이 이끄는 대로, 종교의 총체적 부실과 더 많은 경쟁과 그에 따른 승자독식 사회를 규정한 신자유주의, 그리고 나날이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불평등의 상황은 이런 조건들이 중첩되어, 나날이 사회적 개선이 어려워지는 지경에 놓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3장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이, "협력의 가치에 냉소를 보내면서 세상으로부터의 격리와 자신만의 안락만을 추구하는 태도의 전형"이라는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어두운 본성의 표상 또한, 개선을 어렵게 하는 다른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거의 강고한 인식의 벽처럼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약간의 희화이긴 하지만, 은둔의 삶을 살고 있던 칸트를 흄이 강하게 일깨웠듯, 우리에게도 다시 예전의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무엇보다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신의 도움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겐 무엇보다 필요한 문제일겁니다. 

토크빌의 주요한 언급처럼, 인간은 지난 역사를 쉽게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거의 명백합니다. 지난 폴란드에서의 경험으로 공산주의 역사의 본질을 깨달은 바우만이나, 과거 요한 바오로 2세를 통해, 지금까지 카톨릭이 누적해 온 문제들을 직면하게 된, 오비레크에게는 그저 축소된 개인의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이들이 겪어온 지난 날의 기억은 그야말로 역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 겪으면서, 인간은 누구에게나 성장할 기회가 몇 번이나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자신의 삶과 동시에 "이 행성과 인류의 삶을 파멸로 몰아가는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점은 앞선 행복에 대한 문답에 대한 매개와 마찬가지로, 개인들의 문제와 그것에 작용하는 세계로서, 양자는 서로 불가분에 있다는 분석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바우만은 평생 동안 사회학자였지만 '사회학자들도 인간이므로 절망하고 한탄할 권리' 또한 갖고 있다 고백합니다. 물론 이러한 읊조림은 그가 생전에 가졌던 현실 문제에 대한 소회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도 좋습니다. 따라서 바우만은 그 무엇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품위있고 존엄한 삶을 위한 기회들이 부당하게 분배되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없다"는 우리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대의를 갖고 우리에게 응답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건 없다고 말입니다. 끝으로 약간의 논외지만 이 책에서는 바우만이 어린 시절 폴란드에서 몸소 겪었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혐오에 대해서도 관련한 몇 가지 일화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한나 아렌트가 왜 '어두운 시대'는 일반적이었다고 말했는지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작금의 현실에도 매우 잘 들어맞는 시민이 아닌, '인간 무리'의 습성이기도 한, "권위가 명령하고 군중이 복종하는 곳이라면 별다른 저항 없이 어디든 가는 대다수, 어떤 상황에서도 악행에 가담하지 않으려는 소수, 기회만 있으면 피에 대한 선호를 보여주는 소수가 있다."는 우리의 다른 실체는 일견 우발적 핵전쟁의 시작이라는 인류의 공멸 가능성보다도 더 쉽게 다른 식으로 파국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숱하게 듣고 있는 "비판적 인식 또는 그런 책임감"은 이처럼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대형 사고가 한반도 남쪽에서 있었습니다. 희생당한 모든 분들의 명복을 간절히 빕니다. 부디 평안하소서.

-이 책의 한가지 아쉬운 부분은 2장에서 극단주의자들을 빗댄 '외눈박이 키클롭스 (혹은 사이클롭스)와 같이 연계되어 논증되는 '자유의 독'에 대한 장면이었습니다. 후자인 자유의 독은 뒤에서 대략 유추해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명확히 이를 적시하고 있지 않은 점은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3장 초입에서,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의 표상일 뿐이다."는 주지의 문장과 함께 차근히 논증되는 내용들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표상은 관습과 계산 등에 따라 항상 바뀐다는 뒤이어 해석도 매우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작금의 문명이 과연 어떠한 본질을 갖고 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회개는 쉽지 않고, 자비는 원한다고 주어지지 않으며, 실수의 결과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저도 악의 문제를 단순히 권위와 권력에 대한 불복종의 문제, 금제와 명령에 대한 위반으로 축소해버리는 것은 부끄러울 정도로 지나친 단순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타인의 존엄성을 부정하거나 타인이 존엄성을 획들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야말로 한 인간이 타인에 댛 저지를 수 있는 최대한의 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각을 통해 경험되는 세계는 다양하고 불확실하고 다면적이고 애매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장애물을 피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과 끊임없이 맞서 싸운 데서 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충만된 삶의 비결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지금 이 시대에는 지구화와 정보혁명이 야스퍼스의 시대처럼 새로운 각성, 지역적인 각성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각성의 조건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믿음은 자유의 문제로서 결코 강요될 수 없으며, 이단(즉, 믿음의 대상에 대한 대안적 해석에 의거한 저항)은 어떠한 쇠로도 부술 수 없고 어떠한 물로도 태울 수 없고 어떠한 물로도 익사시킬 수 없는 영적 문제라는 이유를 들어 불복종을 정당화했습니다.

프레카리아트는 ‘즉자적 계급‘(누군가는 그것을 인식할 수도 있지만)에서 ‘대자적 계급‘(자신의 이익과 소명을 의식하고 하나로 결합한 정치 세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극히 미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따른 것만큼 확신을 갖고 자신의 적들을 증오했으며 가차 없이 파괴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히틀러가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발상을 하게 된 시발점이었다는 홀로코스트 역사가들의 지적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학자인 스탠딩이 대안적 해법들을 제시하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옹호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프레카리아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 지구적인 상호 의존의 시대에 타자의 이익에 대한 첵임의 짐을 벗어던지다는 것은 결국 공익에 대한 책임을 벗어던진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사적 세계‘에만 초점이 모아지는 현상, 요컨대 이타주의에 대한 이기주의의 우위는 오늘날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오히려 정치적 통제에서 벗어난 권력들과 해마다 만성적인 권력 결핍과 그로 인한 비효율성을 드러내고 있는 정치로 분열된 세계에서 시대착오적인 민족국가가 여전히 낡은 형태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 근본 원인입니다.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정부의 무능이나 나쁜 의도가 아니라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과 정치의 분리, 그리고 그로 인한 기존 정치제도의 만성적인 권력 결핍입니다.

지멜은 갈등은 서로 간의 사랑을 만들어내건 증오를 만들어내건 간에 서로를 소외시키는 황무지로부터의 출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신자유주의가 득세함으로써 초래된 법적 결과들을 통해 신자유주의가 강자들에게 얼마나 유리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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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초 대산세계문학총서 57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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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이름이 이디스 뉴볼드 존스인 워튼은 1862년, 미국 뉴욕시 웨스트 23번가 브라운스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조지 프레데릭 존스로, 존스 가문 자체는 부동산으로 많은 돈을 번 부유한 가문이었습니다. 덕분에 부친이 사망하자 워튼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부친의 사촌은 도금시대 사교계에서 이름을 알린, 캐롤라인 셰머혼 애스터로, 워튼은 이렇게 돈과 지위를 갖춘, 명망 있는 가문의 여식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작문에 재능을 보인 그녀는, 1877년, 15세가 되던해에, 비밀리에 자신의 중편을 발표합니다. 이후 1885년 4월, 워튼은 자신보다 12살 연상인 에드워드 로빈스 워튼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그의 남편은 보스턴 명문가 출신으로 워튼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유력 가문의 신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인 테디 워튼은 1880년대 후반부터 1902년까지 만성적인 우울증을 앓았고, 같은 기간에 워튼 역시 천식과 우울증을 앓았다고 알려졌습니다. 아무래도 그녀가 원하는 결혼 생활이 아니었기에 이 시기에 워튼은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이때쯤 그녀에게 평생 지기가 되어준 헨리 제임스를 만나게 되고, 동시에 왕성한 작품 활동을 지속하게 됩니다. 이런 문학 활동외에,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광적인 제국주의자로 밝힌 워튼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헌신적인 지지자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의 이에르에서 지내면서, 그녀는 1920년에 <순수의 시대>를 완성합니다. 일생동안 단편은 85편을 쓸 정도로, 장단편에 구애 받지 않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 그녀는, 1937년 8월 11일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는데요. 이후 베르사유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묻혔는데, 오랜 친구였던 월터 베리와 함께 영면에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The Reef"로, 지난 19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대산세계문학총서'의 번역 작품으로, 지난 2007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워튼의 이 작품은 생전 고통스럽지만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해주고 또한 헨리 제임스 만큼 그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모튼 풀러튼'과의 연정이 이 작품에 녹아 있습니다. 극중 주요 인물이기도 한, 조지 대로우와 소피 바이너의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어쩌면 중대한 스포일러일 수도 있으므로)인 한 호텔의 묘사가 워튼 자신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저에 궁금증이기도 했던 워튼이 왜 유독 남자 주인공들을 '지적이며 독서를 좋아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었는지, 비로소 그 정확한 연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조지 대로우 역시, 헌책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다른 여주인공이기도 한, 애너 리스의 입으로, "대로우가 자신의 세계를 넓혀주고, 생각의 차원을 높여주곤 했다"는 이 의미심장한 독백은, 대로우를 지적이면서 이성적인 캐릭터인 동시에 그 시대 여성들이 선호하는 남성상으로 그려낸 듯 보였습니다. 


이 극을 거의 좌우한다고 볼 수 있는 소피 바이너는 어떻게 보면 워튼의 중편소설, "버너 자매"에서 부분적으로 차용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그녀는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을 뿐더러, 여기에 양친까지 여의고, 심지어 자신 스스로를 위해 쓸 수 있는 어느 정도 가용할 수 있는 돈도 없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그녀를 구원해 줄 어떠한 연줄도 없고 누구에게도 금전적 자비를 구할 수도 없는 실정인데요. 그녀는 성격적으로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머릿 부인집에서 그저 잡일을 몇 년간 해왔지만, 그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도 받지도 못하고 그 집을 뛰쳐 나온 시점입니다. 바로 이 작품의 서두가 소피와 대로우의 만남으로 시작되는데요. 저는 이 장면에서 일전에 읽은 엘리에트 아베카시스의 '밀입자'가 절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대로우는 젊은 시절,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연애도 해보고 어떻게 보면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영국 외무부의 외교관입니다. 그는 고위 외교직으로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도 충실한 마음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다만, 젊은 시절 치명적인 불장난으로 인해, 자신에게 맞는 아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애너 리스와 서로 먼 길을 돌아가게 되는데요. 아마도 애너 본인이 보기에 이렇게 지적이고 사리분별이 뛰어나고, 누군가에게 훌륭한 조언을 할 수 있는 멋진 사내가 당시 사교계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여성과 염분을 뿌리고 다닐지는 꿈에도 몰랐고 그런 연유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한결 같은 연정에도 불구하고, 애너는 거의 즉흥적으로 눈에 들어온 다른 사람과 결혼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제 대로우는 스스로 인생 경험이 많이 쌓였고 또 직무에 있어서도 꽤 궤도에 올라, 연구도 해보고 외국에 나가는 기회도 얻게 됩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애너는 남편을 사별하고 미망인이 된 기간이 이미 여러 해가 지나, 두 사람의 진정한 재결합이 작품의 서사 한 가운데에 놓여집니다. 다만, 애너, 그녀 자신은 프랑스의 한적한 지역에서 스스로 고립된, 자연과 가까이 지내는 삶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작고한 남편과는 전혀 애정이 없는 결혼을 시작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한 채 원만했고, 의붓 아들인 오언을 자신의 친아들 마냥 마음을 다해 키워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그간 이룩한 성과 가운데 하나였는데요. 저는 이 장면에서 애너의 본성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조용하고 스스로에게 진지한 여성이면서 삶과 관계에 있어, 어떠한 오점도 없는 인물인데요. 그렇지만 꽤 오랫동안 자신에게 사랑을 보이는 대로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렇기에 매번 둘은 서로 엇갈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도버해협을 두고 대로우에게 보낸 전보 역시, 그런 미적거림을 다시금 반복하는 것으로 읽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이번에도 애너의 확신을 받지 못했다고 자책하면서도 그녀의 아무런 이유도 없는 전보에 크게 실망한 대로우는 억지로 쓴 남은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될지, 해협을 가운데 두고 고심을 하게 됩니다. 아주 복잡하고 실망스런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그는 몇해 전, 머릿 부인의 파티에서 우연잖게 만나게 된 소피를 우연히 재회하게 됩니다. 소피는 한눈에 보기에도 아름답고 젊고 매력적인 여성입니다. 워튼은 그녀의 모습에 대한 묘사에 꽤나 공을 들이기도 했는데요. "높고 감미로운 음성과 민첩한 몸놀림 뿐만 아니라 작은 코, 맑은 피부, 환하지만 연한 수채화 물감으로 그린 듯 가볍고 섬세한 용모"라고 묘사됩니다. 저는 서두에서 이 소피라는 여성이 대로우와 애너 사이에서 분란을 일으키는 캐릭터로 예측했지만 이 예상은 정확하게 어긋나게 됩니다. 그간 읽은 워튼의 다른 작품들에서 등장한 여러 인물들 중, 소피 바이너라는 인물의 마음과 행적을 통한, 각인은 그만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녀는 자기 희생과 사랑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절대 사람을 기만하지 않는 순수하고 절제된 성품을 가진 여성이었습니다. 아마도 작가인 워튼은, 당시 근대적인 분위기, 사회 계층에서 신분상의 계급이 많이 퇴색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상류 계층과 이들이 주도하는 관계의 여러 모습들, 그리고 하위 계층에게 보이는 역겨운 시선 등 여기에 대로우의 젊은 시절 하위 계층 여성들을 스스로 육체적 쾌락의 대상을 삼은 것이나, 반대로 결혼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의 격에 맞는 여성을 찾으려는 그런 시도에서 애너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지속하는 것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 문제만은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애너 역시 젋은 시절부터 고생이라곤 전혀 몰랐고 여기에 자신의 지위와 부에 맞는 결혼을 했으며, 지금도 사용인들을 거느리며 아무런 부족함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거듭되는 소피의 삶에 대한 진정성과 그것이 바탕이 된 좌절과 희망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대로우와 애너 두 캐릭터가 그 지위와 명예에 맞는 도덕 관념과 진실됨, 그리고 걸맞는 본성을 갖추지도 못한 점은 워튼이 소피라는 캐릭터를 통해 여실히 말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한 사람의 본성과 진실됨, 고결, 책임감, 관계의 진정성 등은 계급과 부의 유무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이죠. 바로 이 두 사람을 위해 소피가 보인 자기 희생적 결단과 배려는 대미로 향하는 지점부터 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간혹 보이는 지성과 판단력, 그리고 달변이라고 봐도 분명한 대로우의 모습은 계급적 신분도 그렇거니와 직업조차도 의미심장한 캐릭터인데요. 그에 대한 인물조성이 작가인 워튼이 공들여 썼던 만큼, 그의 허위와 가식, 그리고 위선까지도 지문 사이의 여러 상징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애너 역시, 답답하고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그 본성안에 자리한 고결 그리고 삶에 대한 한결같은 마음 등이 한낱 얼음 조각처럼 쉽게 부서지게 됩니다. 특히, 애너의 지독할 정도로 편집증적인 모습은 작가인 워튼이 지난날 경험한 마음의 편린들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라고 의심될 정도로 집요한 서사로 점철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가시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의문이 든 동시에, 작가 본인의 삶과 작품의 모습이 함께 유동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끝으로 워튼이 왜 이 작품에 대해, 그렇게 큰 애착을 가졌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약간 논외지만, 이 작품에서도 복합적인 의미로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하는 인물인, 애들레이드 페인터의 인물 조성 역시, 가히 워튼 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본문 104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귄 여자들은 모두 명백히 ‘숙녀‘였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대로우가 보기에 여자는 원래부터 그 목적으로 창조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 여기까지 진화해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이 두 부류를 엄격히 구분해서 생각했고, 이 두 인생관을 양립시키려는 중간 부류의 사람들과는 교류하지 않았다.

바이너 양이 빨대로 주스를 마시는 동안 대로우는 담배를 피우면서 다른 남자들의 눈길을 끄는 여성과 같이 있다는 사실에 원초적인 자부심을 느꼈다.

바이너 양과의 관계는 이 싸구려 호텔이나 불가피하게 진부한 결말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 세상 밖에 존재하는 미지의 영역에서 전개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삶의 모든 표현 방식을 알고 싶어 하되 그것이 아름다움과 세련된 감정을 통해 발현되기를 바라는 열정적인 아가씨는 리스가 대표하는 그런 사회에서 자신을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 행복 때문에 그 애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희생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조금씩 긁어내서 우리의 행복을 이뤄야 한다면, 얼마나 비참해요!

대로우에게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은, 오언이 자신과 바이너 양이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는 의심을 한다면, 계모의 약혼자가 그런 시간에 동생의 가정교사와 단둘이 만나고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기리라는 것이었다.

"오언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 건 상관없어! 사랑에 빠진 청년은 그런 상황에서 상대가 자기에게 싫증이 났다는 자존심 상하는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어떤 이유라도 갖다 붙일 거야."

소피 바이너의 사랑과, 그 사랑 때문에 그녀가 취한 행동이 대로우 앞에 버티고 선 채 그의 눈을 응시하며 그의 얼굴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말은, 당신이 좀 더 나이가 들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인지 알게 될 거라는 뜻이지.

지금 생각해보니 리스와의 결혼 생활은 엄격한 자제와 질서로 특징지어지는, 단조로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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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법률가들 - 법은 어떻게 독재를 옹호하는가
헤린더 파우어-스투더 지음, 박경선 옮김 / 진실의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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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오스트리아 포어베르크 주의 블루덴츠에서 태어난 헤린더 파우어-스투더는 현재 비엔나 대학의 교수로서, 오스트리아 내에서는 저명한 여성 철학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학문적 분야는 윤리, 정치 및 페미니즘 철학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1977년에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이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뒤이어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에서 법철학 연구소의 조교로 일했으며, 1984년에는 캘리포니아 대학(UC)에서 강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1996년과 1998년에 이르는 시기에는 하버드 대학에서의 연구를 거쳐, 2006년에는 풀브라이트 장학 프로그램으로 뉴욕 대학(NYU)에서 연구를 지속합니다. 이런 그녀의 연구들 가운데,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과거 나치 판사였던, '콘라트 모르겐'에 대한 훌륭한 논저와 동시대 국가사회주의 법 이론에 대한 공동 연구, 이외에 광범위한 자유와 평등에 관한 철학과 법학과 연계된 연구 활동 등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Justifying Injustice"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파우어-스투더의 이 책을 잠시 읽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과거에 일독한 제임스 Q. 위트먼의 훌륭한 보론이라 느낀 부분인데요. 단편적으로 히틀러의 제3제국의 일련의 사법 체계와 국가 사회주의가 더할나위 없는 '악의 현신'으로 이해된다면, 그녀의 이 논저는 그런 정권에 부역한 법률가들, 법사상가들, 철학자들을 인용하며, 이들의 왜곡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학문적 분석 자체가, 현상과 구조적 모순에 대한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오늘날 꽤 위대한 정치철학자로 읽히는 '카를 슈미트'의 만행은 여기에서 낱낱이 폭로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슈미트의 실체를 지그문트 바우만과 마크 릴라를 통해, 처음 접하기는 했습니다만, 그가 왜 자유주의를 혐오했는지, 또한 많은 문명 국가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주의적 관용을 왜 그리 대놓고 역겨워 했는지, 인간 카를 슈미트의 본질에 대한 단초를 충분히 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앞선 부분은 그 무엇보다 이 글의 특별한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국가 통합은 모두가 알다시피 프로이센(체제로서와 국가로서)에 의해 사실상 완성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베르사유에서 제국을 선포한, 빌헬름 1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 통합된 독일 민족의 제국은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데요. 개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대다수 독일인들이 자유주의는 자신들과는 맞지 않는 옷이라고 여겼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후 과정에서 케인스의 여러 우려와 같은 독일 내부의 지식인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경멸해 마지 않았던 점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이는 대표적으로 카를 슈미트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는데요. 이는 저자가 언급하듯, 이미 1920년대부터 카를 슈미트는 자유 민주주의와 가치 다원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감없이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독일 법학자들과 법철학자들, 그리고 다수 관료들이 좀 더 내부적으로 집중된 권력, 즉 아돌프 히틀러가 중심에 선 나치 체제를 사법적 근거를 마련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 이 책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카를 슈미트는 단호한 태도로 히틀러 정권을 지지했고, 더 나아가 이에 대한 법적 기반을 지원하고 구성하는데 노력했습니다. 이에 이 글 3장, '총통'에서, "민족사회주의 혁명의 목표는 모든 사회적 반대를 이겨낼 만큼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라고 나치 사상가들은 끊임없이 강조했다"고 저자는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결국 소위 민족사회주의 혁명의 과정에서, 나치 법률가들 가운데, 울리히 쇼이너와 오토 퀼로이터는 유대계 독일인들을 무자비하게 배제하여, 새로운 질서 하에, 국가와 민족의 유기적 연결에는 아주 극명하게 "인종적 함의"가 숨어 있다는 것을 3장 말미에 저자는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 인종적 함의란 바로, "순혈 아리안주의"였습니다.


나치 체제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법사상가들은 히틀러에 의해 수립된, 제3제국을 정치적 독단, 폭력, 테러를 초월하는 국가로 묘사하기도 했는데요. 제3제국을 특수한 종류의 통합된 국가로 지탱해 주었던 것은, '전체국가'나 '통일된 국민국가' 또는 '국가주의적 법치국가'와 같은 공식이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 정치 이론에서 '집단의지','인민주권' 등을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국가의 법적 토대를 준비했다고 3장 이후, 논증되는데요. 이미 이들은 1933년 2월부터, 악명 높은 인종 이데올로기와 총통에 대한 사실상의 신화적 지위를 포함한, 민족사회주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의 토대를 성공적으로 마련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기반에는 앞서 언급했던 대로 오랫동안 법을 연구했던, 법 이론가들과 법 사상가들이 그 이론을 제시하고 지원했던 역할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대통령과 총리의 지위 모두를 승계한, '총통'에 대한 유일무이한 입법적 권리의 부여는, 명실상부한 이 제3제국의 권력에 대한 어떠한 견제도 불가능하게 만든 초헌법적 사태를 초래했습니다. 순혈 아리안들이 주축이 된, 단일 민족국가의 영도자로서, 총통의 지위는 그야말로 확고부동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저자 역시 히틀러가 자신의 권력 의지에 대한 욕망도 지대했고, 이러한 권력 집중에 대한 요체를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고 마찬가지로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1939년 이후, 히틀러가 불법적인 영토 확장에 나서는 가운데, 저자는 이러한 변화가 이 민족사회주의 국가의 변화를 나타낸다고 직접적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시기 폴란드에서의 폴란드인들과 유대인들의 조직적인 제거를 놓고 봤을 때, 이 제3제국의 팽창은 어쩌면 배타적 단일 민족 국가를 지향하는 이런' 왜곡적 정치 이데올로기'로 인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 과거 바이마르공화국의 유산이라 볼 수 있는 상당히 체계화 된 사법 제도에서의 법해석이 앞선 법이론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이는 법에서의 자유주의적 유산이 총체적으로 거세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나치 제국의 "처벌 없는 범죄는 없다."는 노골적인 이데올로기적 지침은 이 체제의 법 감정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더군다나 사법 제도에서 공정성과 정의를 답보하는 판사들에게 이례적으로 작의적인 해석까지 가능하게 할 정도로 법 해석에서의 무분별한 '재량권'을 강화합니다. 즉, 형법에서 "범죄에 대항하는 싸움이란 곧 민족공동체에 대한 배신과의 싸움"이라는 미명하에, 저자의 말마따나 자유주의 형법에서 애지중지했던, "생명, 자유, 재산 같은 법의의 보호"같은 관념을 거의 무력화시킨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글 4장에서, 당시 저명한 법 이론가였던 빌헬름 자우어는 형법을 윤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벌의 목표가 "심화, 내면화, 도덕화"가 되어야 하므로 "범죄에 대한 사회적,윤리적 보복, 특히 속죄"를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면서 소위 "민족적 양심"을 강조합니다. 그런 연유로 제3제국 내부의 반체제 인사들과 노동운동가 등을 법적인 절차 없이 체포해 강제수용소로 불법 이송한 사례는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조직적 이론의 체계는 나치 제국의 사법 제도에서 어떻게 보면 관념적 근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배타적 민족 국가 내에서 자신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을 앞선 민족적 양심이라는 측면에 기반해, 일반적인 개인의 권리를 원칙적으로 배제하기에 이르는데요. 아마도 제 생각에는 이러한 체제 강요적 메커니즘 하에, 유대인 말살이 이들에게는 매우 사법적이면서 소위 윤리적인 근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더욱이 앞선, 판사에 대한 너무나 도가 지나친 재량권 부여는 결국 법 조항에 기반하지 않는 작의적인 판결을 내리게 되는 심각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소위 법 조항에 매달리는 계몽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일종의 왜곡된 결단주의적 함의가 짐작되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인종학자 한스 F. K. 귄터로 대변되는 '유대 민족에 대한 인종 연구'와 같은 경멸적인 작업들이 그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을 넘어, 대중들에게 널리 읽히고, 더 나아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던 점은 매우 불행한 역사의 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저작들은 나치의 인종적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이 책에서 기록되는데요. 이미 앞서 지적한대로, 이 나치 당의 목표였던 '유대인 배제'는 이미 1933년부터 계획되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막스 게르스텐하우어의 저서, "영원한 독일"로 이어지는 극명한 인종차별의 예시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주요 논점이 되기도 했는데요. 결국 윤리적, 인종적 체계의 새로운 윤리 체계가 탄생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5장 이후, "순수한 피와 순수한 민족의 특수성을 보존하는 것은 도덕적 임무이자 윤리 의무"라는 대명제가 도출되기에 이릅니다. 저는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이 인종주의에 오도된 지식인들의 작업에 의해, 이렇게 쉽게 "다른 인종에 대한 물리적 제거"에 소위 열광하게 되었는지 당연히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나 아렌트와 같은 인간 본성에 잠재해 있는 악의 문제를 떠나, 자유주의와 가치 다원주의가 철저하게 제거된 "다른 형식의 문명 국가"가 어떻게 파멸에 이를 수 있는지, 나치 국가는 이를 아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베우제츠,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아우슈비츠-비르게나우' 등지의 유대인 절멸 수용소에 희생된 죄없는 유대인들의 그 수많은 학살을 이 정도의 정치적 근거로 전부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앞선 히틀러에 동조한 독일의 법이론가들, 법사상가들, 제국 관료들이 당시도 뿌리 깊었던 '반유대주의'와 이것을 통해, 순수한 아리안 민족의 국가를 세우고, 더 나아가 후대의 순혈 아리안들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더 많은 영토를 얻겠다는 이런 일원화된 체제가 아주 조직적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자는 약간의 정치 투쟁적 시각에서 나치 체제하의, 친위대 (SS)와 게슈타포를 다루고 있지만,이들 조직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힘러의 정치적 의도와, 자신의 권력 의지로 새롭게 개편됩니다. 저자는 이 부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논점을 기존 사법 제도의 지위를 받지 않는 나치 친위대가 조직한 재판 조직과 통상 법을 초월한 이들 친위대와 게슈타포의 '조직적인 인신 구속'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1943년 이후, 히틀러의 '구두 지시', '구두 통치'와 같은 자신이 신뢰하는 일부 관료들에게 쪽지로 지시를 내리고, 그러한 지시 사항이 추후에 알려지게 되는, 소위 정실 권력과 같은 모습이 보여지고 있는데요. 이미 나치 판사였던, "콘라트 모르겐"을 통해, 실질적으로 무력화 된 사법 제도와 임의적으로 혹은 가차없이 이뤄지는 인신 구속과 작위적인 판결, 그에 따른 즉각적인 법 집행은 친위대와 게슈타포대로 무분별하게 자행됩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황이 히틀러가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보기에 따라 다소 불명확하게 보입니다만, 어찌됐던 힘러에 대한 히틀러의 신뢰 자체는 진실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이러한 이행의 맥락이 어떻게 보면, 편의주의적인 발상과 "이중 국가"라는 그 특유의 제3제국의 통치 행태 등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겠는데요. 당시 군에 대한 권력 집중과 그에 따른 내부의 치안과 질서 유지는 또 조직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어서, 믿을 만한 인사에게 이를 위임하여, 큰 틀에서 인종주의적 내부 체제를 떠받드는 가히 누구도 쉽게 견제할 수 없는 폭력적인 권력을 이들에게 가능하게 했다고 여겨집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당시 여러 법학자들과 법이론가들이 단순한 경찰 이상의 조직들에 대해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지만, 실상 "총통으로부터의 권력"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굳이 법의 도덕적 명분을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누구보다 저는 카를 슈미트에게 이러한 인종주의 국가의 왜곡된 정치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사실상 법의 유명무실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을 스스로 예견했는지 오직 되물어보고 싶을 뿐입니다.

오늘날 문명 국가의 사법제도는 법과 도덕주의의 명백한 분리가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도덕적 관점을 어느 정도 기반해 놓고 있어야 할 겁니다. 또한, 법규에 대한 충실성, 공정함을 위한 노력, 법적 안정성이 사법 제도의 요건이라는 점과, 당시 히틀러 정권의 정치화된 사법제도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없다는 점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철저하게 자유주의적 기반이 제거되고 배제된 나치의 사법 제도 및 그 체제는 인종주의로 점철되어, 당시 유럽에 두번째 대전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법은 국가를 정형화 된 이론과 제도 내에서 유지시키는 매우 중요한 틀입니다. 더욱이 사법 제도는 견고하게 그 건전성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국가에 속한 시민들까지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인데요. "오직 우리 인종만의 국가","다른 인종의 불결한 피를 미연에 방지하는", 그리고 더 나아가 유대인 말살을 하고야 말겠다는 그 비밀주의와 실행에 옮긴 치밀한 과정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자유 민주주의적 유산의 소멸 뿐만 아니라, 독일 민족의 인간으로써 마땅히 가져야 할, 인류의 기본적인 가치조차도 스스로 참담하게 궤멸시킨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참혹한 역사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만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도덕적 측면을 배제하여, 반대의 저열한 측면을 끊임없이 끄집어 내게 만드는 극단주의자들, 인종주의자들, 그리고 그것에 향수를 느끼는 자들의 면면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을 넘어, 또 다른 역사의 반복이 될 수 있다고 우려가 되는데요. 일차적으로 관용과 역사를 알지 못하는 법이론가들과 법사상가들의 지난 날 행적을 통해, 살아있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미 그런 법기술자들이 꽤나 존재하니 말입니다.  


-본문 209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나치 법률가들이 칸트의 정치철학에 기달 수는 없었으면서도 맥락에서 벗어난 채로 특정 개념들-선의지, 무조건적 의무, 정언명령 등-만 끌어다 쓰면서 윤리에 관한 고찰을 도구로 이용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량학살 명령이 친위대 법원 최고 심급인 힘러와 히틀러로부터 직접 하달되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는 점이다.

나치 성향의 법률가들은 의회민주주의를 "공허한 법적 형식주의"라 공격했고 가치다원주의와 자유주의적 관용을 "윤리적 혼란"의 원흉이라고 비판했다.

1933년 민족사회주의 정권 장악을 지지했던 법이론가들의 글에는 독일 최초의 민주정 시기에 대한 뿌리 깊은 경멸이 드러나는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시선은 당시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슈미트가 바이마르공화국의 몰락을 막으려 했다 치더라도 그는 바이마르공화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지키고자 했던 건 아니었다.

민족사회주의 혁명의 목표는 모든 사회적 반대를 이겨낼 만큼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라고 나치 사상가들은 끊임없이 강조했다.

인종 이데올로기는 제3제국 법사상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슈미트는 법과 정의의 수호자라는 규범적 기능을 공공연히 히틀러에게 부여했다. 총통은 평생직이며 해임되지 않는다는 시실 때문에 이 권력은 더욱 부각되었다.

나치 법률가들은 총통에게는 무엇이 인민에게 최선이고 어떻게 하면 독일의 연속성과 번영을 보장할지 정확히 알아내는 인식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문제를 회피했다.

나치 친위대 수뇌부는 필요시에는 즉결처형 같은 "가장 가혹한 방법"을 써서라도 점령지를 안정시키라는 히틀러의 ‘특별명령‘이 힘러를 통해 하달됐다고 했다.

특히 위험한 것은 정치적으로 왜곡된 도덕 이해의 규범적 범주가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 도덕의 규범적 범주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치 통치와 같은 현실 세계의 역사적 사건은 법체계가 단지 정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사용될 뿐 앞서 언급한 공표성, 투명성, 이해 가능성, 신뢰성, 예측 가능성, 일관성, 정합성, 자의적 소급 입법으로부터의 자유 등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할 때 실제로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확실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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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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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1948년 6월, 영국 햄프셔 주 올더숏에서 데이비드 매큐언과 릴리언 바이올렛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노동계급 출신의 군인으로 소령 계급을 달고 전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매큐언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영국이 아닌 해외에서 보내게 되는데요. 그의 가족은 그가 12살이 되던 해애, 비로소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매큐언은 영국으로 돌아오자 서퍽의 소년들을 위한 기숙학교인 울버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게 되는데요. 1970년에 매큐언은 서섹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노리치에 소재한 공립 연구 대학인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그는 등단한 이후로, 6번이나 부커상 후보에 오르게 됩니다. 1998년에는 장편, '암스테르담'으로 부커상을 수상하는데요. 이외에도 1981년에 '낯선 사람들의 위안'이, 검은개가 1992년에, 어톤먼트는 2001년에, 토요일이 2005년에, 체실 비치에서가 2007년에 각각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매큐언은 2008년 더 타임즈가 선정한,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 목록에 올렸고, 데일리 텔레그래프 지는 그를, "영국 문화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100인들" 가운데 19위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Black Dogs"로 지난 199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구입한 판본은 같은 해, 6월에 출판된 2쇄본 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과 관련해, "검은 개"에 대한 작가 나름의 설명이 대미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다 그곳으로 돌아와 우리 곁에 유령처럼 출몰해 떠돌 것이다. 유럽 어딘가에서, 언제가는"으로 매큐언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작품을 다 읽으신 분들은 이 검은 개가 의미하는 바가 어느 정도 명확하다고 여기실 텐데요. 저는 이를 "과거의 파시즘, 오늘날의 극단주의"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정치적 감수성이 예민한 "준"이라는 인물이 참혹한 대전으로 폐허가 된 어느 인적이 드문 프랑스의 오지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검은 개 두 마리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이런 그녀에게 자신을 휘감은 죽음의 기억이, 스스로의 삶에 커다란 명시적 전환점으로 각인됩니다. 여기에 그녀의 사위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극 중 제러미의 후일담과 같은 이야기들은 단순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 역사의 일그러진 단편과 뒤섞이며, 어떤 실체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그것은 그의 장모가 맞닥뜨린 그 땅에, 과거 게슈타포와 히틀러에 부역한 프랑스 비시 정부의 비밀 경찰로 이어지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굴절'이 바로 프랑스에 남긴 전쟁의 상흔이었습니다.

도저히 헤어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다시 결합할 수 없는 묘한 부부인, 준과 버나드는 주인공의 아내인 제니의 친부모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사람은 유럽의 대전 이후의 세대를 표징하는 인물들이기도 한데요. 이들은 1936년과 1946년, 그리고 1953년을 거치며, 한 눈에 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그 와중에 이 젊은 두 부부가 모종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각기 외형적으로 그리고 심정적으로 자신들의 '분리된 삶'을, 현직 기자인 사위 제러미의 눈을 통해, 반추하게 되는 시대의 상처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토록 더할 나위 없는 자유주의의 번영 속에, 오늘날의 유럽이 서구 자유 진영의 대표격으로 인식되는 시점에서,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그 땅에 수많은 시신을 묻을 수밖에 없었던 1946년의 프랑스는, 이 부부에게 세상을 온전히 그들의 눈으로 확인하는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한국 전쟁을 몸소 겪은 세대에게, 전쟁이라는 실체는 아마도 이들과 동일하게 몸과 마음에 각인 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극 중 3부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폴란드의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제러미와 제니가 겪게 되는 그 마음 깊숙이 박히는 절망은, "방문객은 이곳에 와서 절망하거나, 아니면 손을 주머니에 더 깊숙이 찔러넣고 따뜻해진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악몽을 꾸는 이들에게 한 발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라고 극명한 서사를 더합니다. 수십만 명의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영국인, 그리고 미국인이 이 수용소에서 희생 당했다고 나와있는 그 몇 글자마저도 우리에게는 먼 옛날의 뜬구름 같은 이야기로 취급하고, 그런 역사가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 작금의 현실일 겁니다.

저 역시, 매큐언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유럽이 겪은 질곡의 역사를 특정한 개인의 지나온 삶과 연계시켜, 그것을 관통한 사람과 그저 역사로만 접한 후대 간의 타협하지 못하는 인식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탁월한 문학적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이 작품의 주인공인 제러미가 지난 날 장모의 소위 좌절된 삶에 대한 본질, 그리고 왜 그녀가 프랑스 오지 마을에 은거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집요한 집착은 이러한 외형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러미가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양친을 잃고, 방황하던 십 대 시절에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던 그만의 사정, 다시 말해 그의 예민한 서사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즉, 자신이 느끼기에도 생각이 깊고 누구보다 감수성이 예민한 장모는 아내인 제니를 통해 맺게 된 인연이라는 측면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그가 자신의 모친처럼 대하는 감정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가 딸보다 더 오랫동안 별거한 장모와 장인 어른 사이를 중간에서 이들을 잇는 가교 역할을 자임했던 것은, 제러미라는 인물의 본성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만듭니다.

분명한 정치적 지향을 보였던 준은 1950년에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함으로써, 일말의 혁명적 아이디어를 삶의 지향점으로 계속 이어나가기 어렵게 됩니다. 버나드 역시, 그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본질적인 거부감을 마찬가지로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대안으로 노동당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그를 향해 정치적 변절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당시 자유 노조의 시기라는 것은 그런 함축된 의미를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버나드는 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삶을 위해, 그런 정치에 몸을 담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점에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준에 대한 원망과 동시에 두 사람 사이의 현격한 행동의 괴리가 나타나게 된 것이죠. 반대로 준이 말년에 인간의 본성에 대한 회의와 그것을 본질적으로 개선 시키기 위한 노력에 힘을 쏟은 것은 어쩌면 시대와의 온건한 타협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에 작품 속에서, "망각은 비인간적이고 위험하며 기억은 끝없은 고문이 될 터인데"라는 저의 눈을 절로 끈 문장은, 이처럼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2부 '베를린'에서 겪은, 말살된 나치즘의 망령인 초기 네오 나치의 잔재, 그리고 그 당시에도 현실에 남아 있던 파시즘의 유령을 같이 동행했던 버나드와 제러미 모두, 몸소 체험하게 되는 두려움의 실체는 1989년 그 시기에도 많은 유럽인들이 이미 역사를 오래전부터 망각했기 때문에 시작됐다는 근거로도 읽힙니다. 우리가 애써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하고, 끝없이 부정하고 망각했던 그 참혹한 역사의 잔재를 말입니다.


끝으로, 매큐언의 이 작품은 단순히 시대에 따른 이데올로기 투쟁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가 왜곡된 정치 해석과 이행으로 유럽 사회에 남긴 상흔과 그러한 배경속에 과거를 살아갔던 한때, 청안의 젊은 부부의 인생 행로를 짚어나가는 나름대로 우리에게는 의미 있는 서사이기도 합니다. 매큐언은 작품의 말미에서 콜린 크라우치처럼, 이 파시즘의 망령이 다시금 전유럽에 나타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었는데요. 검은 개를 맞닥뜨린 생전의 준이 라벤더 풀밭에서 미지의 존재에게, 생명을 위협 당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집에 라벤더 비누를 풀어 놓은 것처럼,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망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역사의 증거를 유럽의 시민 모두가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현 시점입니다. 그런 연유에서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나 체제 그 자체는 참으로 역겨운 것이기도 한데요. 모두가 언급하는 시민의 정치적 선명성이란 바로 이런 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금 곱씹게 됩니다. 매큐언의 이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오랫동안 제게 각인될 것 같습니다.     


- 요즘들어 '자유주의적 관용'에 대해 고심하게 됩니다. 권력의 정당성을 어느 한쪽에게만 몰아주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정치적 자유주의, 물론 카를 슈미트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진정한 자유주의적 관용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준의 신앙 표현이 숨막혔고, 자신들은 신앙이 있기에 선하고 신앙은 미덕이며 그러므로 불신은 무가치하거나 좋게 봐줘야 불쌍하다고 믿는 모든 신앙인의 무언의 가정이 불편했다.

준의 자식들은 자기 부모간의 차이라는 지겹도록 친숙한 주제가 얼마나 흥미로울 수 있는지 상상조차 못했다.

버나드는 벌써 수년 전 공산당을 떠나 노동당 의원을 지냈고, 기득권층이었고, 그중에서도 방송, 환경,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정부 위원회를 담당하는 자유주의적인 분파에 몸 담았다.

빛의 목격, 진실의 순간, 전환점, 그런 것들은 필시 포화상태인 옛 추억을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헐리우드 영화나 성경에서 빌려오는게 아니던가?

"그럼 왜 세상이 개혁되지 않았지? 무상의료며 임금인상, 가구마다 자동차며 텔레비전, 진동칫솔 따위가 다 갖춰졌는데, 어째서 사람들은더 행복하지 않은 걸까? 이런 개혁에 뭔가 빠진 게 아닐까?

30년대의 공개재판과 숙청, 집산화, 대규모 수송, 강제노동수용소, 검열, 거짓말, 박해, 대량학살...... 결국은 모순은 너무 커지고, 신념은 깨지지.

이런 수용소를 기획하고 짓고 그토록 공들여 집기를 들이고 운영하고 유지하고 마을과 촌락에서 인간 연료를 거둬온다는 것이. 그 정력이라니. 헌신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을 실수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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