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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평점 :
리뷰의 인트로를 어떻게 시작할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냥 쓴다. 대체 사랑이 무엇이관대 저마다의 정의가 이토록 다른 것인가. 시작조차 못 해본 사랑도, 영영 끝나버린 사랑에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현재진행형으로 대한다. 그런즉 엄밀히 말해서 사랑의 시작과 끝을 논하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다. 사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들이 다 그러하다. 그래서 한번 각인된 강렬한 기억들은 소멸치 않고 평생 안줏거리로 남는다. 그 말은 곧 그 감정의 시효가 따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째서 특정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지속될까? 나는 모든 감정이 사랑에 뿌리 두고 있어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분노, 슬픔, 허무, 괴로움, 우울 등의 어두운 감정들도 잘 보면 하나같이 사랑의 결핍과 연결돼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종말>에서는 사랑의 마침표를 신앙의 탓으로 돌리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모리스가 사랑하는 세라는 이미 유부녀였다. 그녀의 남편은 집안과 아내를 방치했고, 그래서 주인공과 세라는 실컷 사랑을 나눴다. 이 관계에는 반드시 끝이 있음을 알고도 뛰어들었지만 그 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평소처럼 꽁냥거리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공습을 받게 된다. 그리고 죽다 살아난 주인공은, 그녀에게서 실망의 기색을 마주한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이들의 관계는 수년간 중단되었고, 주인공은 세라에게 또 다른 정부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서 그녀와 가까운 남정네들을 알아낸다. 역시 그럼 그렇지, 하던 중에 확보한 세라의 일기장을 통해 그만 눈물바다가 된다. 일기장에는 온통 주인공을 향한 사랑의 고백으로 가득했던 것. 진실은 이러했다. 공습 사건이 있던 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주인공을 보며 세라는 믿지도 않던 신에게 그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살아나기만 한다면 그이를 영원히 단념하겠다면서. 그리고 일어난 기적을 보자, 이제는 그를 잊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실망의 표정을 감추지 못한 거였다. 이로써 그녀가 여태 불신해오던 ‘신앙‘을, 억지로 가져야만 하는 입장이 되고만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주인공은 곧바로 세라를 찾아가 다시 시작하자며 힘껏 밀어붙인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녀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이 모든 게 신이 개입해서 그렇다며 열렬히 증오한다. 종교도 없는 세라가 억지로 신에게 했던 맹세가 훗날 저주가 되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이에 독자들은 전혀 다른 데에 원인이 있음을 알고도 왈가왈부할 수가 없다. 세라의 죽음 이후로 주인공은 종교와 신앙, 또 그와 관련된 것들을 부정하고 비난한다. 이렇게 신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행과 사고와 재앙으로 피조물에게 늘 원망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신앙인들은 안녕과 평화, 구원을 위해 신을 찾고 종교를 갖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소망과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을 때 신앙은 하등 보잘것없어지고, 비종교인들은 덩달아 조롱할 이유가 생겨난다. 아무리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다 해도 인간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다. 그런 존재이다.
작품의 주제의식은 이제 사랑을 가로막는 신앙 그 자체로 향한다. 주인공은 그녀가 어엿한 신자가 되고 싶어 했음을 알게 되고, 그 배신감으로부터 해방되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뒷심이 딸려서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원래는 저자가 분량을 더 붙이려다 말았다고 한다. 아무튼 <사랑의 종말>은 신앙에 포커스를 두면 재미가 덜하고, 사랑에만 집중한다면 꽤나 재밌을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저자의 일화였다는 비하인드를 듣고서, 그린의 순애보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그가 완전히 눈을 감던 날까지도 그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남은 평생을 증오로 보냈든, 후회와 미련 속에 살았든 간에 말이다. 이렇듯 진정한 사랑에는 결코 마침표가 새겨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