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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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나님은 여태까지 단편소설의 매력을 못 느끼는 중이다. 그 누가 썼든지 간에 단편은 내게 쓰다 만 미완의 원고로 느껴질 뿐. 소설을 하루 24시간으로 비유하자면, 장편은 최소 9 to 6이다. 그 정도면 개인의 일과를 충분히 파악할 만한 분량이다. 한데 단편은 뭐랄까, 가장 루즈한 시간대인 2 to 3라는 인상을 받는다. 고작 그 정도로 누군가에 대해 알면 뭐 얼마나 알겠냐는 거다. 그래서 단편은 아무리 잘 써봤자 팥 없는 붕어빵이 되고 만다.


가즈오 이시구로를 참 좋아하지만 단편집은 솔직히 그냥 그랬다. 원래도 글에 잘 힘주지 않는 양반인데, 분량이 줄어든 만큼 더 밍밍한 맛이랄까. 총 다섯 편으로, 전부 음악과 관련된 내용이다. 다 다른 인물의 이야기지만 한 사람의 연속된 내용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뮤지션이 되고픈 이들의 잡다한 고충과, 영감을 주는 주변인들과의 만남.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오가는 수만 가지 감정들. 고통과 희망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나의 선택은 도약과 미련 중에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나날들. 이제는 흔하디흔한 예술가들의 낡아빠진 이야기라서, 더욱 재미없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이시구로 특유의 잔잔 바리 감성은 볼 수 있었다만, 딱히 뭐.


막상 읽어보면 음악에 관한 내용보다는 삶에 대한 태도를 다루는 것에 더 가깝다. 사람이 한 우물만 파다 보면 시야는 좁아지고, 편협한 사고를 갖게 되고, 세상과의 단절로 고립되는 수순을 밟는다. 하는 일들이 잘 풀리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디 그러기가 쉽나. 그래서 내 신념과 부닥치는 상황이 오거나, 나의 굳건한 신조를 한 수 접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괴로움의 크기는 배가 된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야말로 자신의 아집과 편견을 깨뜨리고 한 층 더 성장할 기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 뭐, 기왕이면 실패보다는 성공을 통해서 성장하고 싶겠지. 헌데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 앞에서 뭐 어쩌겠어. 정 굴복하기 싫다면 유연하기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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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복덕방 - 신비한 공간을 빌려드립니다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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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고전문학 위주로 읽다 보니 아무래도 국내 문학을 안 찾게 된다. 국내 문학은 앞서 힘겨운 작품을 완독한 뒤에 숨 좀 돌릴 겸 읽곤 했는데 그마저도 잘 안 하게 된다. 올해는 고작 2권 읽었더라. 사실 내가 국내 문학하고 멀어지게 된 이유가 있는데, 몇 년 전부터 나오는 주류 작품들이 죄다 sf 장르여서 그렇다. 그 트렌드의 시작은 아마도 정세랑 작가였던 것 같다. 그 후로 국내 작가들이 우후죽순 근미래 sf 일상물을 찍어내는데, 일단 나님은 그 바닥을 썩 좋아하질 않는단 말이다. 한동안 관심을 끊었더니 요즘 국내 작가라는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어서, 그나마 내가 잘 아는 선우 행님의 <도깨비 복덕방>을 읽어주었다. 줄곧 묵직한 작품만 내다가 갑자기 힐링 물이라니, 결국 이 행님도 자본주의에 굴복했구나 했는데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알던 과거의 비토씨로 복귀하셨더군. 개인적으로 반갑고 기뻤다.


말 그대로 도깨비가 운영하는 복덕방의 소유지(매물)에서 단기 거주하게 된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을 다루고 있다. 어쩌다 그 복덕방을 찾게 된 사람들은 세상에 버림받아 물러날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들의 입장을 꿰뚫어 본 도깨비들은 복덕방으로 그 발걸음들을 이끌었다. 평범한 사람의 외모를 하고 있는 그들이 도깨비라는 걸 알리 없는 손님들은 뭔가에 홀린 듯이 도깨비와 계약을 맺고 소개해 준 집들에 들어가 고통에서 잠시나마 해방 받는 휴식기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만 보면 뭔가 시시한 얘기들 같지만, 이 작품의 액기스는 복덕방을 방문하기 전까지의 손님들 이야기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문제와 고충을 담고 있어, 마치 나의 일처럼 와닿고 느껴지는 그런 게 있었다. 반대로 나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아직 살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각 편의 분량이 길지 않아 줄거리는 생략하는 게 맞겠다.


한 201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과 일본에서 사회소설이 참 많이도 출간되었다. 그때는 이 같은 사회 이슈에 한 명이라도 더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 노력의 덕분일까, 이제는 갖가지 문제마다 국민의 높은 관심과 참여도를 볼 수가 있다. 헌데 그러면 뭐 하냐. 해결되거나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모든 것이 악화돼가고 있다.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경기는 더욱 침체되고, 인심은 전부 사라지고, 교육들도 다 무너지고 있다. N포세대는 NN포세대가 되었고, 근면 성실로 열심히 살아본들 보상 하나 없는 현실인데.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는 인간들마저 한숨짓고 좌절하는 오늘날, 어쩌면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다고도 생각된다. 그런 나에게 도선우 작가는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나같이 삶에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타입들은, 이제 그런 태도와 자세를 좀 내려놓긴 해야 한다. 어딘가에서 본 건데 인생이란 하나의 산책과도 같다고 하였다. 우리가 산책을 하러 나갈 때 거기에 어떤 대단한 의미를 두는 건 아니지 않냐면서. 그냥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인 산책처럼, 우리네 삶과 인생도 그럴 필요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맥락으로 선우 행님은 이 작품을 써낸듯하다.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분들은 아직도 인생을 헛살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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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을유세계문학전집 74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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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책을 고르는 기준은 없지만 올해는 비교적 네임밸류가 있는 작품 위주로 노력 중이다. 그렇게 영 손이 가질 않았던 <파우스트>를 도전했고, 이것이 올해의 가장 잘한 일중 하나가 되기를 바랐으나 어림도 없었다. 보통 어렵고 난해한 작품을 만나면 내 독서력이나 수준을 탓하는 편인데, <파우스트>는 전적으로 작품 탓을 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아무튼 이번 리뷰는 망했으니 짧고 굵게 간다.


삶이 따분해진 척척박사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는다. 악마는 하인이 되어 그의 생애 동안 향락을 제공할 것이고, 만사에 흥미 잃은 주인공은 절대 타락하지 않을 자신감으로 승낙한다. 혹여 악마의 접대가 흡족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기꺼이 파멸을 맞겠다며 악마에게 영혼의 권리를 넘긴다.


나님은 악마가 지상 최대의 똥꼬쇼 따위로 주인공의 흥을 돋워주나 했다. 허나 그런 기대와 달리 악마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일깨울 뿐이었다. 지성과 이성의 끝판왕인 파우스트한테 그딴 게 과연 먹혀들까? 아주 효과 만점이었다. 악마는 파우스트에게 에로스를 통한 쾌락을 선사하고, 사탄의 파티에도 초대하고, 섬과 궁궐로 데려가서 온갖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나마 1부는 어찌어찌해서 따라갔는데, 2부는 흐름을 놓쳐서 억지로 읽었다. 진짜 지루해서 혼났다.


내가 기대했던 건 사단에게 시험받는 욥이나 그리스도 같은 성경 속의 이야기였다. 헌데 <파우스트>는 그런 내용과 딴판에다 너무 방정맞고 산만하고 촐싹대는 분위기이다. 비록 무대를 위한 극본이라곤 해도 서사의 핵심은 두각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게 느껴지질 않았더랬다. 아무튼 1막 2부부터는 영 이해도 안 가고 상황과 흐름 파악도 안되어 내내 스킵 하다가 3막에서 하차해버렸다. 그냥 해설의 도움이나 받는 게 낫겠더군. 해설에서는 악마가 주인공을 지상과 천상과 지옥을 다 데려갔다고 나오는데, 하도 장면이 확확 바뀌어서 어느 파트가 지옥이고 천상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 그리고 뒤로 갈수록 파우스트와 악마는 쏙 들어가고 별별 인물들이 무대를 차지하여, 도무지 뭐가 뭔 내용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아오.


못다 읽은 분량은 해설로 만족하고 싶었는데, 그 해설마저도 하차해버렸다. 서사보다는 각 대사에 들어간 힘과 의미를 강조하는 작품이라 해설 또한 갖가지 해석에만 맞춰져있어 재미가 읎다. 이번에도 읽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한다. 완독도 안 하고서 이런 말 하기 민망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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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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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의 인트로를 어떻게 시작할지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그냥 쓴다. 대체 사랑이 무엇이관대 저마다의 정의가 이토록 다른 것인가. 시작조차 못 해본 사랑도, 영영 끝나버린 사랑에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 숨 쉬는 현재진행형으로 대한다. 그런즉 엄밀히 말해서 사랑의 시작과 끝을 논하는 일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다. 사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들이 다 그러하다. 그래서 한번 각인된 강렬한 기억들은 소멸치 않고 평생 안줏거리로 남는다. 그 말은 곧 그 감정의 시효가 따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째서 특정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지속될까? 나는 모든 감정이 사랑에 뿌리 두고 있어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분노, 슬픔, 허무, 괴로움, 우울 등의 어두운 감정들도 잘 보면 하나같이 사랑의 결핍과 연결돼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종말>에서는 사랑의 마침표를 신앙의 탓으로 돌리는 두 남녀가 등장한다. 모리스가 사랑하는 세라는 이미 유부녀였다. 그녀의 남편은 집안과 아내를 방치했고, 그래서 주인공과 세라는 실컷 사랑을 나눴다. 이 관계에는 반드시 끝이 있음을 알고도 뛰어들었지만 그 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평소처럼 꽁냥거리던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공습을 받게 된다. 그리고 죽다 살아난 주인공은, 그녀에게서 실망의 기색을 마주한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이들의 관계는 수년간 중단되었고, 주인공은 세라에게 또 다른 정부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서 그녀와 가까운 남정네들을 알아낸다. 역시 그럼 그렇지, 하던 중에 확보한 세라의 일기장을 통해 그만 눈물바다가 된다. 일기장에는 온통 주인공을 향한 사랑의 고백으로 가득했던 것. 진실은 이러했다. 공습 사건이 있던 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주인공을 보며 세라는 믿지도 않던 신에게 그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살아나기만 한다면 그이를 영원히 단념하겠다면서. 그리고 일어난 기적을 보자, 이제는 그를 잊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실망의 표정을 감추지 못한 거였다. 이로써 그녀가 여태 불신해오던 ‘신앙‘을, 억지로 가져야만 하는 입장이 되고만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된 주인공은 곧바로 세라를 찾아가 다시 시작하자며 힘껏 밀어붙인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녀는 세상을 떠난다. 그는 이 모든 게 신이 개입해서 그렇다며 열렬히 증오한다. 종교도 없는 세라가 억지로 신에게 했던 맹세가 훗날 저주가 되어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이에 독자들은 전혀 다른 데에 원인이 있음을 알고도 왈가왈부할 수가 없다. 세라의 죽음 이후로 주인공은 종교와 신앙, 또 그와 관련된 것들을 부정하고 비난한다. 이렇게 신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행과 사고와 재앙으로 피조물에게 늘 원망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신앙인들은 안녕과 평화, 구원을 위해 신을 찾고 종교를 갖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소망과 정반대의 결과를 얻었을 때 신앙은 하등 보잘것없어지고, 비종교인들은 덩달아 조롱할 이유가 생겨난다. 아무리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다 해도 인간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는다. 그런 존재이다.


작품의 주제의식은 이제 사랑을 가로막는 신앙 그 자체로 향한다. 주인공은 그녀가 어엿한 신자가 되고 싶어 했음을 알게 되고, 그 배신감으로부터 해방되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뒷심이 딸려서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원래는 저자가 분량을 더 붙이려다 말았다고 한다. 아무튼 <사랑의 종말>은 신앙에 포커스를 두면 재미가 덜하고, 사랑에만 집중한다면 꽤나 재밌을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저자의 일화였다는 비하인드를 듣고서, 그린의 순애보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그가 완전히 눈을 감던 날까지도 그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남은 평생을 증오로 보냈든, 후회와 미련 속에 살았든 간에 말이다. 이렇듯 진정한 사랑에는 결코 마침표가 새겨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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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와이어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2-9 링컨 라임 시리즈 9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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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올여름에 스릴러 작품을 한편도 안 읽었더라. 낼모레면 입추던데, 이건 좀 예의가 아니다 싶어 냉큼 디버 옹의 작품을 읽어주었다. 역시나 명불허전이었지만 솔직히 이번 편은 기대 이하였다. 9편의 테마는 전기와의 대결이다. 즉 전기를 자유자재로 이용해 시민들을 감전시키고 화재를 일으키는 센세이션 한 범인과의 싸움이다. 범인은 미국의 대형 전력회사에, 이 사회를 위해서 전력 소비량을 낮추거나 끊거나 하는 식의 협박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각 도시에 들어가는 크고 작은 전기를 조금이라도 낮췄다간 곳곳에서 사고가 일어날 것이다. 그걸 알기에 피해자가 발생한다 해도 범인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는 입장이었고, 이에 도파민 치솟는 우리 라임 선생이 수사에 가담하기로 한다.


범인의 정체는 금방 드러난다. 그가 협박했던 전력회사의 한 직원이었다. 조사 결과 무리한 전기작업과 노출로 질병에 걸렸고, 그에 대한 분노를 에코 테러의 방식으로 분풀이하는 듯했다. 링컨은 늘 하던 대로 사건 현장을 감식하여 범인의 흔적과 동선을 좇고, 몇 수 앞을 미리 예측하여 사고를 방지하는 데에 힘쓴다. 물론 범인도 늘 그렇듯이 수사진을 따돌리고 범행을 저지른다. 이 범인이 전기 사용에 워낙 전문가라, 전기가 흐를만한 모든 사물과 공간이 함정이었고, 심지어 텅 빈 공간에서도 아크 플래시로 공격해올 수 있어서 경찰과 FBI가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더랬다. 또한 어디서 어떻게 감전당할지를 몰라 공포에 떨게 하는, 심리전에서도 매우 불리한 게임이었다.


이렇게 기발한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영 스릴감이 약한 작품이었다. 먼저는 범인이 자신을 좇는 라임 일행과 적대적이지가 않았다. 그의 타깃은 오직 전력회사였고, 그의 목적은 지구의 환경보호였으니 빌런 같지 않은 빌런이었다 해야 하나. 아무튼 스릴러소설 좀 읽어본 독자들은 이 전기맨한테 클리셰를 느끼고, 다른 걸 의심하게 될 것이다. 다만 그 클리셰 다음에 오는 것은 절대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 자체로는 반전이 맞는데, 그 연장전의 맛을 너무 못 살렸다는 게 문제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Top 5 에는 들어갈 텐데, 너무 맥빠지게 날려먹었다고나 할까. 스포방지를 위해 이쯤 하겠다만, 팬으로서 참 김빠지네.


이번 편은 전기 관련된 용어와 설명이 꽤 많아 딱딱하게 읽혀서 아쉬웠다. 매 작품마다 색다른 테마를 들고 와서 전문적인 배경을 담느라 이해는 된다만, 유독 9편은 이과스러워서 곤욕을 치렀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메인 사건 말고도 뭐가 되게 많았다. 아무래도 차후 시리즈의 방향을 잡기 위한 징검다리 작품이어서 그런 것 같다. 7편 리뷰에서도 징검다리라고 했어서 살짝 민망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걸 우짭니까. 마지막에는 링컨이 큰맘 먹고 수술을 감행하는데 그 결과가 좋게 나왔다. 드디어 사지마비 장애인의 핸디캡을 조금씩 극복해나가려는 듯하다. 그래, 그래야지. 현재 75세인 작가의 활동이 언제 중단될지 모르니, 시리즈를 마냥 길게 끌어서는 안 될 일이다. 꼭 완결 내시고 별세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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