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5
에밀 졸라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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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는 졸라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의 문학은 졸라 재밌고 졸라 어렵다. 해설까지 총 600장이 넘는 이 책을 미친 듯이 흡입하며 읽어버렸다. 작가주의와 장르문학이 결합된 고전소설인데, 이렇게 작품성에 대중성까지 갖춘 케이스는 정말 보기 드물다. 내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문과와 이과를 제패하고 예체능까지 마스터한 엄친아, 엄친딸인 셈이지. 이런 천재들이 부러우면서도 동시에 부담인 건, 그들만의 세계를 아무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 아무튼 에밀 졸라는 천재다. 나로서는 플롯을 소화하는 것만도 벅찬, 감당 안 되는 사이즈의 작품이어서 부분 리뷰만 간단하게 쓰기로 한다.


철도회사 부역장은 아내의 정부였던 법원장을 살해했고, 그 광경을 기관사 자크가 목격한다. 법원장의 죽음은 지역에서 큰 화제였고, 부역장과 기관사는 법원에 소환된다. 부역장의 거짓 진술로 위기를 넘겼지만, 법무부의 고위 관료는 루보 부부의 짓임을 알고 있었다. 근데도 눈감아준 것은 법원장의 과거로 인해 법원이 성추문 소굴로 찍히는 걸 피해야 했으니까. 총선을 앞둔 야당의 압박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법무부의 체제 유지를 택한 관료의 입장을 통해, 정계와 법계의 부조리 및 부패함을 꼬집는 작가의 의도를 볼 수 있다. 루보의 아내 세브린은 관료를 찾아가 아첨하면서 관료가 부부의 짓을 알고도 모른척하는 것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눈치챈다. 이런 식으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을 농락하는 놈을 갖고 노는 놈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냥 미쳤다.


부역장은 그의 범행을 모른척해 준 기관사를 아군으로 만들기로 한다. 식사도 자주 하며, 아내의 에스코트를 부탁하는 등 필사적으로 자크와 친해진 부부. 남편은 아내와 멀어져 도박에 빠지고, 세브린과 자크는 곧 정분이 나버린다. 이 남자에게는 살육을 갈망하는 짐승의 자아가 있었고, 그것은 성욕과 함께 증상을 보여왔다. 그 이유로 여자를 멀리해온 그가 세브린에게는 무증상을 보였고, 드디어 구원받은 기분으로 신나게 밀회를 즐긴다. 그의 전부였던 기관차 라리종호는 세브린에게 밀려났고, 눈폭풍을 겪은 뒤로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 어느덧 잠잠하던 짐승이 깨어나 그녀를 죽이려 하는 자신을 통제하느라 죽을 맛인 자크. 사랑하는 것들을 죽이려고만 하는데, 사랑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절규하는 그의 모습이 어찌나 짠하던지. 이렇게 살바에는 차라리 모태솔로가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짐승과 싸우던 자크는 직접 짐승이 되기로 마음 먹는다. 루보를 살해하고 세브린과의 살림을 계획한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들이 걷게 될 꽃길뿐 아니라, 그의 고질병이 고쳐질까 하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하지만 짐승이 본능대로 하는 살인과, 인간이 의도대로 하는 살인의 차이를 깨닫고 또다시 절규하는 자크. 짐승에게 이성을 뺏기지 않으려는 장면들은, 작가가 말하는 ‘인간다움‘을 깨닫기에 충분했다. 루보와 자크 말고도 짐승이 된 여러 인물 중에서 자크를 사랑한 플로르의 짐승화도 볼만했다. 자신을 버린 남자에 대한 복수심은 라리종호를 전복시킴으로 그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승객들의 떼죽음 광경에 정신이 든 플로르는 괴로워하고 결국 자살해버린다. 이렇듯 달콤한 욕망의 속삭임에 굴복하면 그 결과는 파멸뿐임을 작가는 다각도로 증명하였다. 시대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욕망을 좇아 짐승의 탈을 쓴다. 반대로 인간의 탈을 벗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이 책은 인간의 타락을 방지하기보다 인간이길 거부한 자들에 대한 경고로 쓰인 작품 같았다. 다 같이 반성합시다.


후반부에 석공의 재판 자리에서 작가는 미친 듯이 상황을 비틀고 비틀었다. 정황상 살인자가 된 석공과, 그를 히든카드로 이용한 부역장. 두 사람은 서로 진실을 말하나, 그럴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된다. 이제 거짓은 참이 되고, 선은 악이 되었으며, 짐승이 인간을 지배하는, 믿고 싶지 않은 결말이 되었다. 비록 권선징악은 아니었지만 그게 더 현실적이라서 여운이 남았다. 특히 폭주하는 기관차를 짐승으로 표현한 마지막 장면은 최고였다.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감상한 기분이다. 에밀 졸라는 ‘루공 마카르 총서‘라 하는 스무 편의 작품을 썼다는데, 국내에는 미출간된 책이 너무 많아서 짜잉난다. 빨리빨리 좀 출간해주쇼, 현기증 나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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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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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긴 싫지만 나에게도 오래된 강박증이 있다. 알림 표시를 보면 절대 가만있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메일이 오면 일일이 확인해서 삭제하고, 문자나 메신저가 오면 꼭 읽음으로 상태를 바꾸고, 각종 어플의 푸시알림들도 받자마자 지워버려야 마음이 놓인다. 나름 털털하고 프리하게 사는데 왜 유독 알림 표시는 못 참는지 모르겠다. 이 같은 강박증이 누구나가 한두 개쯤 있을 텐데, 정유정 작가는 글에서 그런 강박증이 느껴진다. 이 책을 포함한 그동안의 작품으로 받은 정유정의 느낌은 ‘프로페셔널‘이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해야 하고, 폭발 속에 절제도 있어야 하며, 동시에 글맛과 흡인력도 갖춰야만 하는, 쉽게 말해 완벽주의자 성향이랄까. 근데 전부 다 소화해는 걸 보면 강박증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듯하다. 정유정 작가는 이 책으로 문학상을 타고서 명성을 얻었는데, 스릴러의 여제가 이런 뽀송뽀송한 글도 썼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정신병원 탈출을 반복하는 희대의 빌런인 승민과 엮여 관심사병이 된 수명. 그는 자유를 갈망하는 승민을 보며 도망쳤던 세상에 다시 발을 내디디려 한다. 마침내 자신의 진짜 적이 무엇인지 알게 된 이들은 세상에 외친다. 나를 막으려거든 내 심장을 쏘라고. 


우울하고 낙담 가득한 상황에 비해 분위기는 내내 밝기만 하다. 두 남자의 쇼맨십이 절망 속에서도 명랑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일단 배경이 배경인지라 별별 캐릭터가 다 나온다. 그 덕분에 자잘한 에피소드도 나오지만 작품을 이끌어가는 승민의 분량이 가장 많다. 그만큼 비중 높은 인물인데 그의 말을 빌리면, 정신병원에는 미쳐서 갇힌 자와 갇혀서 미친 자가 있다. 승민은 전자이고 수명은 후자이다. 병원에서 점점 미쳐가는 승민은 수명이 도망쳐온 세상을 향해 팔을 뻗는다. 그는 탈출할 생각도 없으면서 자신을 돕는 수명에게 넌 무엇과 싸우고 있냐고 묻는다. 이 무슨 소년만화에 나올법한 대사입니까. 근데 오글거림은 1도 없는 이야기니까 안심하시길.


사건보다는 인물 위주의 내용이므로 캐릭터 얘기나 많이 하자. 뚜렷한 목표를 가진 타 주인공들에 비해 수명은 그런 게 없다. 그런 이유로 기를 쓰고 탈출하려는 승민이가 더 주인공 같다. 보통은 주인공이 주변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이 책은 그 반대이다. 주인공이 남들에게 영향을 받고 성장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설정은 드라마틱한 전개엔 효과적이나 수동적인 자세 탓에 인물의 매력이 반감된다. 예를 들면, 수명은 점박이의 괴롭힘과 숨 막히는 병동 규칙 속에서도 승민처럼 탈출하려는 마음이 없다. 그의 겁 많고 찌질한 모습은 독자에게 이쁨은커녕 동정받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수명의 생각과 행동들이 거슬리지 않는 것은 정신병 환자라는 설정 덕분이다. 그래서 수명에게는 목표의 부재와 수동적인 태도와 부족한 개성이 문제 될 게 전혀 없다. 그랬던 친구가 각성하더니 목표도 생기고 능동적으로 변하는 등 주인공의 조건을 하나하나 충족해나간다. 많은 작가들이 장점을 더 살리는 쪽을 택하지만 정유정은 단점을 매력으로 승화하는 쪽을 택했다. 정말 멋지심다. 이제껏 타고난 흑마법사라고 생각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나름 백마법사였네. 근데 간간이 등장하는 블랙 유머와 시리어스한 연출에서 흑화의 낌새가 보인다. 이후에 쓰신 다크한 작품들을 보면 정유정은 흑화당 출신이 확실...


다른 리뷰에도 썼던 말인데, 정유정은 글 잘 쓰는 작가는 아니다. 그리고 작가로써 재능이 타고난 쪽도 아니다. 오로지 철저한 노력으로 정면돌파하는 케이스이다. 이런 유형의 작가들은 아무래도 감성적인 맛이 약해서 호불호가 갈리기 쉽다. 실제로 정유정의 소설은 읽기 어렵다는 분들이 많은데 반대로 나는 이런 노력파의 글을 더 좋아한다. 소설은 무조건 스토리가 먼저다. 그게 안되니까 필력으로 승부차기하는 작가를 많이 봤는데, 나는 그런 걸 싫어한다. 비록 계산적이고 감성이 좀 약해도 정유정 같은 이야기꾼이 더 좋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뒤 내용이 궁금하지가 않다는 것. 주로 스트레이트한 글을 써서 속도감 있고 몰입도 잘 되는 편이지만, 곡선이 없다 보니 독자의 생각이 개입할 틈이 없다. 그녀의 작품에는 푹 빠져서 정신없이 읽었다는 평이 꼭 있는데, 이건 독자와의 소통이 결여돼있다는 말도 된다. 다른 작품들도 그랬지만 휴머니즘을 다루는 이 책은 그래선 안됐었다. 감정이입이 반 토막 나거덩. 여튼 그런 거 다 감안하고도 훌륭한 작품입니다만 아무리 봐도 정유정은 흑마법사일 때가 더 므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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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하는 마음 - 제7회 스토리공모전 대상 수상작
전우진 지음 / 마카롱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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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은 나와 맞지 않아서 거의 손대지 않았으나 이제는 편식하지 않기로 했다.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는 한국 고유의 고리타분함을 찾아보기가 힘들던데, 과연 문학계도 세대교체가 되긴 했나 보다. 암튼 내년에는 국내 문학을 많이 읽는 것이 목표이다. 이번 리뷰의 책은 있는 줄도 몰랐던 교보문고 문학 시상제의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리고 내가 식상해 하는 타임슬립 드라마였다. 개인적으로 먼 과거로 가는 설정보다 짧은 시간을 돌리는 편을 선호한다. 능력 발동시 곧바로 리스크가 생기는 후자의 경우가 전자보다 몰입이 잘 되기 때문. 단점은 능력을 쓰는 횟수가 잦다 보니 같은 장면 반복해서 틀어주는 예능 프로처럼 느껴진다는 거. 그래도 대상작이면 이름값할 거라고 믿었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 스토리는 좋았는데 주인공이 밥맛이다. 읽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나는 추천하지 않겠다.


주인공 정숙은 손바닥을 찔러 관통하면 15분 전으로 시간을 돌리는 능력자이다. 약간의 과거로 돌아가도 손의 통증은 그대로 남기에 어지간해서는 능력 없이 살아왔다. 남편의 퇴직금으로 편의점을 차린 그녀는 초 잘생긴 신입 알바생하고 바람난다. 난생처음 겪는 사랑 감정에 정신 못 차리는 정숙은 알바생 때문에 여러 번 손을 뚫고 시간을 돌린다. 그렇게 사랑에 눈먼 정숙은 알바생의 먹구름을 보지 못했고, 소나기에 온몸이 젖었을 때쯤 정신이 든다. 그러나 더 큰 먹구름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숙은 주책의 아이콘이다. 그리고 감정 컨트롤이 전혀 안되는 사람이다. 이기적이다가 급 인간적으로 변하고, 화났다가 금방 시들어버리는 참 피곤한 유형이다. 그 때문에 온갖 해프닝을 겪는 그녀가 큐피드 화살까지 맞았으니 책 제목을 ‘정숙은 못 말려‘로 수정해야 할 판이다. 알바생과의 만남으로부터 가족보다는 자신을 위한, 아니 알바생을 위한 삶으로 전환한 정숙. 그녀의 늦바람을 보면서도 그러려니 한 것은 나름의 소녀감성 때문이었다. 순수함과 순진함 사이에서 나온 그녀의 행동들이 그나마 내 이해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러나 풋풋한 감정들이 끈적끈적한 더티 러브로 바뀌면서 이해 범위를 넘어섰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이 작품의 모티브인 듯? 심지어 남편의 외도로 가정이 무너진 미용실 언니를 매일같이 보고서도 외도를 한다는 게 문화충격이었다. 그러면서도 괜히 찔려가지고 남편에게 짜증과 면박 주기를 반복하는 정숙. 그래도 중반까진 인간미가 있었는데 어쩌다 인성 파탄 비호감이 되었을까.


늦깎이 사랑꾼으로 거듭난 정숙은 알바생 때문에 수차례 손을 찌른다. 문제는 본인과 링크되어있는 딸에게도 고통이 간다는 사실. 엄마가 손을 찌를 때마다 딸은 갑자기 찾아든 고통을 참아야 했다. 그러지 말라는 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정숙은 시간을 돌리며 제 갈 길을 간다. 그러다가 미용실 언니에게 외도를 들키고, 유부남과 연애하는 언니의 딸을 알게 되고, 갑자기 임신 고백을 하는 정숙의 딸과, 편의점에서 터진 대형사고까지. 잇따라 발생한 사건들에 정신줄을 놓다가 마침내 콩깍지가 벗겨진 정숙. 이제 알바생은 퇴장하고, 정숙의 가족은 비정상회담을 시작한다. 아내의 바람을 알고도 모른척해왔던 남편은 정숙이 반성하길 바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나 반성하기는커녕 끝까지 당당한 그녀를 보면서, 이건 정숙보다 작가가 욕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인데 성깔을 고쳐주던가, 아님 참교육을 해주던가 뭐라도 했어야지. 아니면 반전을 기대한 내가 바보였나. 더 허무했던 건 내쫓자마자 바로 떠난 알바생이었다. 왜 작가는 그렇게나 비중 있는 인물을 단칼에 잘라버린 걸까. 배드 엔딩이면 캐릭터를 막 다뤄도 되는 건가.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작가의 의도가 궁금하다. 혹시나 제 글을 읽고 계신다면 댓글 좀 달아주시길.


이 작품이 왜 스토리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는지 알겠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몰라 지루할 새가 없는 플롯이다. 개인적으로 작가 본인을 완급조절 담당 캐릭터로 만든 설정이 신선했다. 작품 속 우진은 실제 작가의 프로필과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 칠칠맞은 정숙을 잡아주기도 하고, 알바생의 묘한 냄새를 감지해내는 등 분위기가 고조될 때면 한 번씩 등장해 교통정리를 해준다. 그런 역할이구나 하고 넘길 수 있지만, 우진의 개인사를 통해 작가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떤 심정으로 버텨왔는지를 알게 한다. 이 분도 고생을 많이 하셨더만. 여튼 늦게나마 대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차기작은 제발 멀쩡한 캐릭터로 커밍해주세요. 플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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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시리즈의 비밀
J.M. 에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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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풍겨대는 병맛 냄새에 끌려서 골랐건만 이건 뭐 순한 맛도 아니고 맹맛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냄새와 맛이 절대 비례하지 않는 델리만쥬같은 작품이랄까. 나는 B급 갬성을 정말 좋아하는데 어째 읽는 책마다 항상 실망하게 된다. 이왕 코믹 작을 쓸 거면 좀 제대로 망가져주고 해야 작품이 사는데, 늘 보면 적당히 웃겨주고 슬그머니 뒤로 내뺀다. 이렇게 수많은 B급 문학 작가들이 체면 생각해서인지 제대로 된 똘끼를 보여주지 못하더라. 그 바닥 사람들만의 고질병인가. 하여간 그 증상이 이 책에서는 유독 심했는데 이유는 뒤에 가서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 줄거리부터 적어본다.


주인공 펠릭스는 하루 세 편의 아류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블로거이다. 직업도 없이 방구석에서 취미생활만 전념하는 그는 오늘도 가족들의 무시 대상을 담당중이다. 어느 날 그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자는 제작자를 만나고서 시궁창 탈출 예정에 들뜬 주인공. 기쁨도 잠시, 웬 형사가 찾아와 그를 살인범으로 지목한다. 놀랍게도 그의 시나리오가 실제로 일어난 살인사건이란다. 썩은 동아줄에 매달려 부들거리는 펠릭스는 이대로 추락할 것인가.


영화계에서는 저급한 아류 영화들을 Z 시리즈라 부른다. 그런 영화의 광인 1급 루저 펠릭스는 본인의 남다른 취향을 자부한다. 한데 그 자부심이 불씨가 되어 타인의 시나리오를 뺏고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게 된다. 이런 소설들은 대부분 비슷한 컨셉과 방식으로 인생을 말아먹는 듯하다. 여튼 초반까지는 작가의 B급 갬성이 나름 잘 먹혔다. 적당한 유머와 적절한 연출, 그리고 독자와의 소통 시도까지 다 좋았다. 그런데 사건이 진행되면서 비굴한 작가 멘트가 중간중간에 계속 등장한다. 재미없어도 이해해달라느니, 딴 길로 새서 죄송하다느니.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독자에게 굽신거리는 게 정말 보기 싫었다. 미리 경고했으니까 독자들 실망에 본인은 잘못 없다 말하고 싶은 건가? 작품의 퀄리티에 실망하는 것보다, 자신의 작품을 싸구려로 만드는 그 태도가 더 실망스러웠다. 어차피 작품성으로 승부할 것도 아닌데 그냥 손가락 가는 대로 즐기면 되지, 왜 자꾸 돌 던지라는 강요 아닌 강요를 하시능교?


그의 영화 시나리오에는 요양원에서 실종된 노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내용은 이내 현실이 되었고, 노인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그러나 형사가 말하길,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살인사건을 실종사건으로 공개했단다. 죽은 노인들은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출한 채로 죽어있었고, 범인은 병원 관계자이며 영화광으로 판단했다. 하여 주인공은 영화광의 시각으로 단서를 잡아달라는 수사 협조를 부탁받는데, 사실은 의심스러운 주인공을 같은 편으로 만들어서 꼬리를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형사의 속셈도 모르고 미끼를 물어버린 주인공은 계속 내빼다가 점점 추리에 집착하여 형사를 난처하게 만든다. 이 정도면 진짜 괜찮은 플롯 아닌가? 그냥 추리소설로 갔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대체 왜 살리지도 못할 코믹물을 고집하시능교? 


몇 없는 캐릭터들이 전부 매력 넘친다. 먼저 늘 무게 잡는 형사의 허당 미가 눈에 띈다. 항상 탐정소설의 수사 법칙을 따라 하지만 건지는 게 없어 수사기록은 점점 유머 모음집이 된다. 그의 파트너이자 아들은 약간 모지리인데, 아들의 수사 일지는 부친보다도 더하다. 미행하다 삼천포로 빠지고, 길을 잃어 타국으로 가게 되는 등 전혀 형사답지 못한 모습들로 독자를 웃겨준다. 그리고 주인공을 무시하고 깔보는 아내와 친누나는 요양원에 직접 찾아가 노인협회 행세까지 해가며 범인을 잡으려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발연기는 정체를 감출 수 없었고, 노인들의 원성만 산다. 이렇듯 정신 산만한 인물들로 구성돼있지만 어떻게든 이야기가 굴러간다.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얼마든지 화끈한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겠고만, 작가님은 뭐가 그리 겁나서 MSG를 넣었다 말다 하시능교? 


사실 이 작품의 주연은 노인들이다. 대부분 나사가 풀려있지만 프라이드만큼은 대단한 요양원 노인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은 살인사건과는 별 상관이 없는데도 분량이 제법 많다. 이유는 작가 후기를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빌려 오늘날의 노인문제를 말하고 싶어 했다. 그들도 한때는 열정 가득한 청년이었으나 은퇴하면서 열정까지 강제로 밀려났다. 늙었다는 이유로 사회에 설자리를 잃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뜨거운 노인들. 이 책은 그런 노인들이 무능력, 무 쓸모가 아님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나름 건재한 신체능력과 생식기능과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아무튼 작가는 버려지고 소외된 노인이 갈수록 느는데 이대로도 괜찮은가 하는 화두를 유쾌함 속에 담아냈다. 메시지는 진중하지만 작품은 절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눈치 못 채고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태반일 듯. 언젠가 나도 나이 들면 버려질 텐데 그 소외감을 견뎌낼 수 있을까 싶네. 그때도 지금처럼 독서하고 글 쓰고 있겠지 뭐.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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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2021년 새해 연하장 서재에 놓고 가여 ㅋㅋ

새해 행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 신축년
┏━━━┓
┃※☆※ ┃🐮★
┗━━━┛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물감 2020-12-31 22:52   좋아요 1 | URL
ㅎㅎㅎ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받으세요!
 
빌러비드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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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을 통으로 날려먹었다. 낮에는 직장 일로, 밤에는 집안일로. 그렇게 독서활동이 끊어진 한 달 동안 간신히 한 권 읽었는데, 하필이면 집중력을 배나 더 요구하는 작품이라 낭패를 봤다. 사실 나는 책을 못 읽는 것보다 글쓰기를 못해서 감각이 둔해지는 게 더 괴롭다. 보통은 독서를 하면서 리뷰에 쓸 말들이 저절로 떠오르는데, 이번에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심지어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영감이 끊어진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여서 이제 나의 글쓰기는 끝나버린 걸지도 모른다는, 들어본 적도 없는 슬럼프에 갇혀버렸다. 그래서 지금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한데, 일단 손이 가는 대로 써보도록 하겠다.


토니 모리슨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흑인 여성작가다. 대단한 건 알겠는데 미안하게도 나한테는 흑인문학이 다 거기서 거기이다. 억압, 학대, 폭력, 차별이 기본 베이스라서 누가 썼든지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고만고만한 흑인문학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특유의 헤비한 감성이 나랑은 안 맞는달까. 그런데도 평점이 겁나 높은 책을 보면 괜히 또 궁금해져서 읽게 된다. 내가 봐도 참 모순이다. 이번 작품도 전형적인 흑인문학이었는데, 진심 가독성이 꽝이어서 산소호흡기가 필수였다. 근데 잘만 읽고 극찬하는 남들을 보노라면 허접한 내 독서 수준에 한숨이 절로 난다. 아직도 나는 갈 길이 멀다.


노예 신분을 청산하고 딸과 함께 살아가는 세서. 그녀를 찾아온 노예 시절의 남사친, 폴디. 그리고 이들 앞에 뿅 하고 나타난 의문의 처녀, 빌러비드. 이들의 불편함 가득한 동거가 시작되고, 빌러비드를 통해 세서와 폴디는 지금껏 덮어둔 과거의 잘못과 트라우마로 고통받는다. 자유를 얻고도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 사람, 그리고 소외감 느끼는 딸 덴버. 세서의 가족을 왈칵 뒤집어 놓은 빌러비드,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꽈.


기본 소개는 이렇지만 절반 이상의 내용이 과거에 머물러있다. 소개된 흑인들의 수난이 너무 많아서 뭐부터 적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제일 먼저 백인들의 노리개가 되어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흑인 여성들이 가장 가슴 아팠다. 아비가 없는 노예의 자식들은 백인의 사유 재산이 되어 물건처럼 사고 팔렸다. 흑인 남성들은 이유 없이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거리에는 신체의 일부가 없는 노예의 시신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숨이 붙어있는 노예들은 가축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갔다. 이렇듯 쉴 새 없이 학대 당한 흑인들의 삶은 세대를 걸쳐서 이어진다. 이 가운데서 임신한 몸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도망친 주인공 세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나긴 노예 생활에 지친 세서 가족은 철저한 계획 하에 차례차례 도망친다. 아들들을 먼저 보내고, 당시 막내였던 빌러비드와 탈출하던 세서는 백인들에게 들키면서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나는 괜찮지만 딸까지 노예가 되는 건 참을 수 없었던 세서는 제 손으로 자식의 생명을 끊는다. 이 끔찍하고 비정상적인 엄마의 사랑 방식이 꼭 틀렸다고 봐야 할까. 최근 개그우먼 모녀의 동반자살 사건이 있었는데, 자식을 따라간 모친의 위대한 사랑에 감명을 받았었다. 그와 같이 세서의 모성애도 무조건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직접 죽였던 딸의 영혼은 갑자기 여인의 몸으로 세서 앞에 나타나서 가슴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죄책감에 괴로운 세서는 빌러비드의 막무가내 행동과 요구에 전부 맞춰주었다. 몸은 야위어가고 정신도 피폐해진 세서. 그러나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고전문학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 느낀 바가 다르다고들 한다. 그래서 처음엔 별로여도 재독하면 또 다를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되는데, 솔직히 이 책은 재독할 엄두가 안 난다. 이 정신없는 플롯과 뒤죽박죽 문법들에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가 않다. 정말로 난 내가 난독증이 온 줄 알았다. 한 문단 안에서도 앵글이 수시로 바뀌므로 집중하지 않으면 나처럼 수렁에 빠져버린다. 여하튼 내 타입도 아니고 해서 그냥 넘어갈까 했는데, 타 리뷰들을 보니 아무래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막막했는데 어떻게든 리뷰를 끝마쳤다. 진짜 이번 리뷰는 의식의 흐름 속에 영혼을 모조리 갈아 넣었다. 어서 커피나 빨고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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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11-30 18: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저도 내년에 도전해보고 싶네요. 아주 예전에 제목만 보고 <재즈> 사서 읽다가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하고 포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완독하신거 축하드려요~~🎉

물감 2020-11-30 19:25   좋아요 2 | URL
이 책은 진짜 도전이란 말이 어울립니다... 너무 고생했거든요ㅎㅎㅎ 도전해보고 후기 꼭 남겨주세요^^

나비종 2020-11-30 1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 달에는 좀 나아질려나 했더니 역시나 말일에 몰아쳐서 글을 쓰게 되었네요.^^;; 어쨌든 금요일부터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어 쓴 덕분에 무사히 해냈습니다.ㅋㅋ
다른 모임 도서가 워낙 묵직했어서 퇴근 후 두어 시간 넘게 근 한 달을 매달려서 겨우 완독하고 이 책은 금요일부터 폭풍 질주를 했어요. 허술하게 넘기기에는 너무 묵직한 주제라 잠들면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을 했답니다.^^;
저 역시 글을 쓰기 위해서 책을 읽는 목적이 커서 이러다가는 한 달에 한 편의 리뷰도 쓰기 어려울것 같아 간간이 시 몇 편 쓴 것이 전부였죠.

읽은 책이 별로 없어서 흑인문학은 처음 접한 것 같기는 한데 솔직히 예전에 읽었는지 명확하게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경험과 생각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면서 같은 책을 읽는다해도 매번 새로운 기분이 들어서 말이죠.ㅎㅎ
짜증나는 가독성이 아니라서 저는 그럭저럭 읽었습니다. 마감에 맞춰 스퍼트를 내다보니 저도 모르게 내달린 걸 수도 있구요.

저는 흑인 남성의 삶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했는데 ‘가너‘씨 농장의 남자 5명의 이름부터 그렇더군요. 이름은 폴 A, D, F였잖아요. 그리고 자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너씨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성을 붙였구요. 디가 수용소에서 개처럼 목에 사슬을 걸고 구덩이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많이 답답했습니다.
이름을 붙일 때도 작가는 매우 신중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덴버가 세서의 출산을 도와주었던 백인여자아이의 성이잖아요.

모성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더군요. 물감님의 생각처럼 저 역시 누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과 이전의 수많은 서사를 생각하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게 실화였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이 아팠구요.

정신없는 플롯과 뒤죽박죽 문법들을 소설 사이 사이에 들어간 추임새로 간주하고 읽으며 그런대로 넘어갔습니다. 이성적인 정신으로 읽다보면 휘휘 돌다 꼬로록 빠져버릴 것 같아서요.ㅎㅎ
어떻게든 의식의 흐름 속에 영혼을 모조리 갈아넣은 리뷰를 ㅋㅋㅋ 잘 마치셨군요.
올해의 마지막 책이 집어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의 작품이 아니라 다행인 거죠?^^

물감 2020-12-01 13:56   좋아요 3 | URL
이걸 질주해서 읽을 수 있다니, 대단하십니다ㅎㅎ 저도 이번엔 말일되어서 다 썼거든요. 뭔가 마감에 시달린듯한 기분이었어요. 이런 숨막힘을 나비종님께선 매월 겪으셨겠군요... 역시 내공이 엄청나십니다^^

이 작품속에 나오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라는 작품도 읽었었는데요, 그 책도 참 힘들게 읽었어요. 내용이 어려운게 아닌데, 흑인소설들은 문장을 어렵게 쓰는거 같아요. 번역의 문제인지.. 물론 잘 읽히는 구간도 있지만 전체로 보면 진도가 참 안나가요. 저만 그런걸지도 모르죠 머ㅋㅋ

저는 폴디에 대해 적지는 않았지만 정말 인생 짠하더군요. 끝에가서는 사람대접을 받아본 그가 얼떨떨 하는 모습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줬어요. 제 삶에 끼여든 잠깐의 행복이 어색하기만 한 세서의 모습도 그렇고요.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들이 이들에겐 결코 당연한게 아님을 느낀순간, 저절로 반성이 되더라고요...ㅜㅜ

지옥의 악순환을 끝내기 위한 세서의 행동이 그리 잘못돼보이지 않았어요. 다른 길이 있었다면 모를까,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겠죠. 여튼 실화를 가지고 각색된 작품이라 신선하네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도 실화바탕인데 신선함은 없었거든요ㅎㅎ

저는 힘겹게 읽었지만 나비종님만이라도 잘 읽으셔서 다행입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어서 마무리가 나쁘지 않네요ㅋㅋㅋ
이렇게 올해의 모임도 다 끝났어요.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scott 2020-12-24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행복하고 따스한 연휴 보내세요.
물감님 서재에 트리 한그루 놓고 가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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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

물감 2020-12-25 16:26   좋아요 1 | URL
scott님도 행복한 연휴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