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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투맨 ㅣ 오늘의 젊은 작가 46
최재영 지음 / 민음사 / 2024년 10월
평점 :
서른 전까지의 나는 글쓰기는 고사하고 책 한 권 읽지 않는 인간이었다. 점점 인간관계가 좁아지면서 남아도는 시간을 무얼로 때울까 하다가 채택된 것이 독서였다. 말하자면 그게 가장 싸게 먹힌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독서도 독서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허전해서 기록도 같이 하기로 했다. 헌데 리뷰란 걸 써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남들이 쓴 리뷰를 눈팅으로 좀 배워볼까 했드만 어림도 없었다. 그럴수록 나 자신의 멍청함을 알게 되었고, 깨끗이 인정하며 정말 기록을 위한 글만 적었다. 아무리 길게 써봐야 고작 네다섯 줄이 다였다. 그만큼 머리 회전이 안되는 본투비 빡구였다.
글쓰기는 몰라도 독서의 매력을 점점 알아가자, 나의 뚝배기에서도 뭔가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 정체를 알고 싶어서, 또 내가 놓친 것들을 도움받고 싶어서 기존의 리뷰들을 찾아 읽었지만 대부분이 쓰나 마나 한 감상문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글들을 보면서 나 같은 건 흉내도 못 낼 대단한 글이라고 여겼는데 말이다. 이제 보니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데다 온통 칭찬 일색의 복제된 글들뿐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나의 글쓰기 욕구가 솟아난 게. 그때의 나는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리뷰를 쓰고 싶었다기보다 한국의 서평 문화에 찬물을 끼얹고 싶어졌다. 결국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반항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툴툴대는 문체가 되었고, 덕분에 남들은 차마 못 꺼내는 얘기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 셜록현준 채널에 나온 유홍준 교수님이 그러셨다. 글이란 건 내가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을 적는 거라고. 그처럼 나는 앞사람과 대화한다 생각하고 글을 써왔다. 사람마다 대화 코드의 맞고 안 맞고 가 있듯이, 내 글이 취향인 분들은 환호해 주었고 아닌 분들은 냉담했다. 매번 나의 글은 그 대비가 뚜렷했다. 반항심을 가질 때부터 대중성은 포기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았다. 참나, 누가 보면 작가 지망생인 줄 알겠네.
노잼인데 이게 왜 명작이야? 그걸 또 좋다고 난리 치는 사람들은 뭐야? 물어보면 뭐가 어떻게 좋은 지도 모른대. 한국인들은 자기감정에 이다지도 솔직하지 못한 걸까. 원래도 세상에 불만이 많았던 나는 지성인을 자처하는 무리와 가식적인 문화에 커다란 염증을 느꼈다. 어째서 책도 서평도 꼭 가치 없는 것만 주목받는 걸까.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가치라는 건 다 상대적이고, 그래서 똥글에도 인기와 명성이 주어진다는걸. 그래,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거잖아. 진정성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지. 오직 유행과 명성에 승차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부터 저항을 관두고 이런저런 타협을 시도하게 된 듯하다. 하여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의 내 글은 정말이지 형편없다.
책 리뷰는 안 하고 왜 이런 얘기나 하고 있느냐면, 주인공들의 고뇌가 남일 같지 않아서 그랬다. 이제는 진부하다는 표현도 아까운, 어지간히도 안 풀리는 작가들의 이야긴데 전혀 진부하지가 않았다. <맨투맨>은 흔한 성공신화가 아닌 실패담에 가까운 내용이며, 현대 실존주의의 철학을 그려낸다. 그래서 옆 나라 소년만화처럼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이 자주 나온다. 최재영 작가는 인생이라는 링 위에 오른 선수들과,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싸움과, 그 싸움에 흥미 없는 관중석까지 전부 나와 당신의 얘기라고 말한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영호가 한물간 ‘로키‘를 동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도 쓰레기가 아니란 걸 느끼고 싶어서이다. 계속 실패만 반복하는 자신을 그래도 증명하고 싶거든. 여튼 ‘로키‘의 영향을 받아쓴 ‘맨투맨‘의 시나리오는 대략 이렇다. 남성호르몬 과다로 건장해진 여고생 초롱이 MMA 선수가 된다는 내용. 설정은 좋았으나 시나리오는 계속 반려된다. 소위 ‘야마‘가 없다는 이유로. 결국 시나리오 수정은 그의 손을 떠나 혜진에게 주어진다. 그녀도 영호 못지않은 무채색의 소유자였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공동작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학교 선배인 옥빛 누나가 혜진을 조심하란다. 그녀는 주변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탈수기‘라면서.
혜진이 자신과 동족임을 영호는 바로 알아챘다. ‘맨투맨‘이 안 되면 이 바닥을 떠야 할지도 모르는데, 과연 혜진에게 작업 수정을 맡겨도 괜찮을까. 일단 두 사람은 ‘맨투맨‘의 주인공 초롱이의 캐릭터를 구축하기로 한다. 그러나. 초롱이에게는 이렇다 할 욕망이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요소들의 총집합으로 안전빵을 노렸지만, 오히려 그것이 초롱이의 발목을 붙잡는 셈이었다. 도전정신은 일절 없고 그저 무탈했으면 하는 영호의 무채색이 매력 있을 리가 있나.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현실 세계와는 달리, 작품 속에서는 결함 없는 캐릭터가 먼저 추락하는 법이었다.
이어서 영호의 아는 형님, 치성이 등장한다. 17년째 활동 중인 격투기 선수인데, 실력에 비해서 여태 못 뜬 비운의 사나이다. 사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매번 심판의 판정승으로 이긴 탓에 관중들이 그의 시합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영호는 치성에게 무난한 경기보다 화끈한 쇼맨십 좀 해보라고 하려다가 관둔다. 그 지적은 곧 자신을 향한 것이었고,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굴 가르치나 싶은 거다. 이런 상황은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도움이 되고 싶지만 ‘너나 잘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다가가길 멈춘 순간들. 정말 하이퍼리얼리즘이 따로 없다.
안되는 거 길게 붙잡지 말고 다른 일 알아보는 게 맞는 걸까. 여태 해온 게 아까워서, 배운 게 이것뿐이라서, 아직 희망이 없진 않아서 등등등. 여러 핑계와 변명으로 버티고 있단 걸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내 능력의 한계는 이미 드러났고, 그럼에도 때려치울 용기가 없어서 이러고 사는 걸 우리 모두가 안다. 무엇보다 이 자존심을 버렸을 때 주위에서 날아들 흉과 손가락질이 너무나도 두렵다. 현대인이라면 다 겪는 공포가 아닐까. 헌데 옥빛 누나는 달랐다. 일찍이 탈선하여 다른 길로 가서 성공한, 지금 보면 참 부럽기 그지없는 케이스였다. 사실 이런 건 시간이 지나봐야 알지, 그 당시에는 무모하다며 욕먹기 딱 좋다. 그럼에도 결단을 내리고 개척자가 된 옥빛 누나야말로 승자 중에 승자였다. 그러면 영호와 혜진, 치성이 형은? 이들은 다 패자 확정인 걸까? 정답이 없는 질문은 곧 패자뿐인 경기나 다름 없었다.
또 다른 자아라고 할지, 정신적 대필 작가라고 할지, 뭐 그런 게 영호와 혜진에게는 있었다. 종종 찾아오는 그 목소리에 자신을 의탁하면 맨정신일 땐 절대 없을 결과물이 탄생한단다. 흔히 말하는 뮤즈나 악마일 텐데, 그걸 의존하는 것은 곧 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세상과 타협한 작품을 ‘내 것‘이라고 말하기 창피할 테니까. 그래서 인간은 질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영호의 담당 피디는, 처리하기 곤란한 인물은 총으로 쏘든지 해서 빨리 퇴장시켜버리라고 했다. 과연, 링에는 제대로 붙을 의지가 있는 사람만 서있는 법이다. 영호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질질 끌다가 판정승을 하느니 차라리 화끈하게 져버리라고. 그것이 관중들에게 더 기억에 남는 시합이라고. 어쩌면 오늘날의 실존 문제는 이런 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실패라는 놈에게 맨투맨 마크를 당해온 우리의 인생. 공포의 그림자는 어딜 가든 우리를 압박 수비하며 졸졸 따라다녔다. 그 기세에 눌려 우리는 계속 숨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초롱이는 평생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인간은 결단을 하고 선택을 해야 한다. 아무것도 고르지 않는 것은 중립도 아니고 균형을 잡는 것도 아니다. 어중간한 사람은 언젠가 퇴장당하게 되어있다. 소심해서 무해한 인간으로 살아온 영호처럼, 겁이 많은 나 역시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왔다. 나의 까칠했던 예전 모습들도 ‘실패‘에게 전담 마크를 당해서 그랬던가 싶다. 예전의 나는 ‘선택‘을 했음에도 휘청였고, 지금의 나는 ‘타협‘을 했음에도 똑바로 서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승자보다 패자의 드라마가 더 그럴싸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