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을 위한 축구 교실
오수완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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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축 처지는 소설만 계속 읽었더니 유쾌한 작품이 읽고 싶어졌다. 뭐가 좋을지 둘러보다가 눈에 띈 이 작품은 기분전환용으로 그만이었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외계인이 지구인들에게 축구 시합을 제안한다. 모든 지구인은 단 한 번 외계인 팀과 축구 시합을 할 수 있고 이기면 소원을 들어주겠단다. 또한 출전할 멤버의 수준에 맞는 외계인 팀이 나올 거라 형평성은 걱정하지 말란다. 그렇게 사람들은 드림팀을 만들어 외계인들과 경기를 했고 어쩌다가 승리를 거머쥐기도 했다. 벼락부자가 되고 영원한 젊음을 얻는 등 소원성취한 자들은 전 인류의 부러움을 샀고, 너도나도 시합에 나갈 준비하느라 아주 난리가 난다. 미디어는 축구 방송만을 다루었고, 시장에서는 축구 용품만을 판매했고, 대중들의 관심사도 온통 축구뿐이었다. 이렇듯 축구는 전인류 대통합을 이뤄냈지만 축구 외에는 전부 가치를 잃어버렸다.


다신 없을 인생역전의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환자 및 노약자들은 시합에 나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까. 10년 전에 무릎 부상으로 축구선수를 은퇴한 ‘욘‘은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다. 파산하기 직전인 그는 이 기회에 동네 축구 교실을 열고 수강생을 모집한다. 그들과 함께할수록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욘의 나날들. 한편 악화돼가는 무릎을 그의 파트너 ‘리오‘가 마사지해주자 기적처럼 다리가 나았다. 그 길로 욘은 축구 교실을 접고 파트너와 함께 외계인 시합을 준비한다. 그의 기쁨이었던 수강생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고, 파트너 리오는 시합 불가 판정을 받았으며, 벤치만 지키던 욘은 팀의 패배로 모든 게 무너져버린다.


보다시피 소재와 설정만 다를 뿐 흔한 전개라서 예측이 가능하다는 게 단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패배한 주인공의 인생역전 스토리가 아니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패스, 즉 팀워크에 주목해서 읽어야 하는 작품이다. 그렇게 선수 간의 호흡을 강조해놓고 정작 일상에서는 아무도 의존하지 않는 욘. 경기장 바깥에서는 얘기가 다르다고? 과연 그럴까. 우리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강조하지만 절대 타인과 엮이지 않으려고 한다. 웬만한 일들은 혼자 처리할 수가 있고, 힘든 일들은 비용을 내고 서비스를 받으면 된다. 이 같은 일인 체제의 사회에서는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의 동의어가 되었고, 미덕이었던 관심은 대단한 실례처럼 돼버렸다. 허나 손익계산에 따라 돌변하는 인간관계로는 절대 시합에서 이길 수가 없는 법이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이들도 말 못 할 속 사정은 다 있고, 해결 못해서 끙끙 앓는 경우도 다반사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하고, 공을 패스해 주어야 한다. 세상은 절대 일인 체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외계인과의 시합 패배는 과거의 무릎 부상보다도 더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옛적 광야 생활보다 못한 시궁창의 삶이 찾아온 것이다. 완전히 녹다운 상태였던 욘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게 무엇인지 돌아본다. 그리고 자기가 버려두고 떠났던 수강생들을 찾아가 사과를 한다. 또 서로가 슬픔을 주고받으며 팀워크, 신뢰, 호흡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러면 시합은 됐다 치고 현실에서는 어떻게 패스를 주고받느냐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게임을 팀전이라고 생각 못 하고 개인전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패스하는 방법은커녕 패스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삶이 일상의 조각 모음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일상에서는 ‘스몰토크‘가 패스의 개념을 대신한다. 별거 없어 보이는 패스가 시합에서 매우 중요하듯이, 시간 낭비에 불과한 스몰토크가 인생게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팀전에 약한 사람, 즉 패스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공을 뺏긴다고 생각해서 가지고만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인생은 절대 개인전이 아니며, 혼자서는 절대 골을 넣지 못한다. 당신이 메시급 선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아직 못다 한 말들이 있지만 이쯤 해두자. 아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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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오피스 오늘의 젊은 작가 34
최유안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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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말하길, ‘노동‘이란 자발적으로 뛰어들 만큼의 매력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반대로 노동에 강제성이 요구될수록 개인은 기계의 부품이 되어 무력해질 뿐이란다. 허나 자본주의라는 공룡을 생쥐가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그냥 위에서 시키는 거나 잘해야지, 괜히 나의 이상과 뜻을 내세웠다간 찍혀서 피곤해질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음을 경험할수록 우리의 사고와 태도는 소극적이게 되고, 노동은 매력과 가치를 잃어버리고, 그렇게 개인도 기업도 사회도 다 같이 침몰하는 형국이 되고 만다. 이런 물음들 앞에서 늘 돌아오는 대답은, 너 아니어도 잘만 굴러간다는 고의성 짙은 팩트였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서있는 갈림길은 공룡과의 투쟁이나 협상이 아니다. 오직 복종과 패배만이 기다릴 뿐이다.


앞만 내다보며 달려온 사람도, 실패를 거듭하며 주저앉은 사람도 결국 같은 의심을 한다. 대관절 노동이란 무엇이며 이토록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있으면 차라리 자기 계발이나 해야 할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입 다물고 하던 일이나 잘하라고?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닐 거다. 현재의 내 모습들은 전부 나 자신의 선택으로 이뤄진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투덜거릴 자격도 없다는 말은 어쩐지 너무 가혹하다. 그 불평들은 자아실현의 단계에 훨씬 못 미치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 삶의 안정성 때문이란 말이다. <백 오피스>는 그러한 불안요소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사회를 그린 작품이었다.


대기업 태형그룹과, 태형의 신 프로젝트를 맡은 기획사와, 컨벤션 호텔의 이해관계가 얽힌 내용인데 솔직히 정신 산만해서 피곤했다. 큰 무대와 많은 인물에 비해 분량이 퍽 모자랐고, 복잡한 인물관계 구도가 오히려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건 알겠지만 욕심이 너무 과했다. 한 400p 이상의 분량으로 뽑았으면 대박이었겠는데 참 아쉽다. 인물들의 신경전, 직장인의 생존법, 업계의 명암 등 리뷰할 게 많으나 시간상 메인 요리만 다루도록 하겠다.


태형 그룹의 홍지영 대리부터 시작하자. 그녀는 교활한 사수한테 걸려서 몇 년째 시달려왔다. 세상은 순진한 토끼보다 꾀 많은 여우를 더 알아주는 법이었다. 자신의 공을 가로챈 사수의 비리를 고발한 그녀는 이번 컨벤션 행사의 총괄을 맡는다. 이제부터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사수처럼 잔머리도 없고 인간관계도 서툴다는 것. 하여 더욱 빈틈없는 책임자의 탈을 쓰려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현타가 연달아 찾아온다. 자신의 능력 부족과 고발정신과 융통성 없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직장에서, 대체 무엇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싶어진다. 일에 대한 보람은 없고, 평판은 나빠지고, 급여 인상은커녕 일거리만 늘어간다. 지금의 현대인들이 하고 있는 고민거리가 딱 이런 형태다. 그래도 잘해보겠다는 나의 의욕을 확 밟아버리는 이 거지 같은 환경을 참아내기가 정말 힘들다. 심지어 ‘빌런‘들도 자기가 피해자라며 남들과 똑같은 고민을 한다. 그걸 이상히 볼 것도 없다. 우리 모두가 기계의 부품이 되었기 때문에.


다음으로 기획사 직원 임강이를 알아보자. 업계 1위와의 경쟁을 이기고 태형 그룹의 프로젝트를 따낸 그녀. 이번 행사에 진심이었던 그녀는 이름 없는 중소기업의 신화를 새로 쓰고 싶어 했다. 아무튼 행사 기획은 좋았으나 행사 무대를 구현하는 데에는 많은 리스크가 있었다. 디데이는 다가오고, 예산은 부족하고, 세팅은 시작도 못해서 조급해지는 그런 상황.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담당 업무가 자신의 역량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그 일이 내 능력을 훨씬 초과한다면 아예 도전의 영역을 넘어가 버린다. 마치 만 원짜리 낚싯대로 참다랑어를 잡겠다는 것과도 같다. 임강이는 이번 프로젝트가 버겁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여 업계 1위의 경쟁사에서 온 스카웃에 흔들린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규모가 큰 곳으로 가면 지금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테니. 괜히 욱해서 무리하게 계획을 밀어붙인 탓일까. 우려했던 무대 사고가 일어났다. 보통 이런 경우는 불명예를 안고 떠나거나,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쥐 죽은 듯 지내야 한다. 사고가 날 줄 누가 알았겠냐마는, 의욕이 과다해서 너무 오버한 건 아닌지 등등 온갖 자책과 후회를 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꼭 이런 일들은 요령 피우지 않는 사람한테만 일어나더라. 아무튼 옐로카드를 받고도 레드카드를 받은 것처럼 좌절하거나 재기 불능의 상태가 된 현대인들이 나는 가장 안타깝다.


끝으로 호텔의 백 오피스 지배인인 강혜원을 살펴보자. 호텔에는 전반적인 사무와 응대를 담당하는 프런트 오피스 팀이 있고, 그 일들이 원활하게 처리되도록 받쳐주는 백 오피스 팀이 있다. 육아 휴직을 마치고 복귀하여 다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그녀는, 육아보다도 차라리 일하다 죽는 쪽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원래도 바빴지만 태형 그룹의 행사로 더욱 바빠진 그녀를 더 이상 참지 못한 남편은 이혼을 요구한다. 가정에 소홀하기도 했거니와 자신이 ‘아내‘와 ‘엄마‘에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나의 가족과 집을 포기할 만큼 직장 일이 나에게 중요한가? 나 자신만 챙기며 잘 살라던 엄마의 모호한 유언을 따라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행복도 보람도 잘 모르겠다는 그녀. 프런트 오피스를 위해 존재하는 백 오피스처럼 자신은 업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 가정을 외면할 의도가 없다면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러다 아수라장이 된 행사장을 보면서 자신이 망쳐버린 가정을 떠올린다. 엄청 극단적이긴 해도 일과 자신의 분리 과정을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맞아야 정신 차린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매우 꼰대스러운 발상이지만.


어디서 읽은 건데, 사람이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얄궂게도 너무 잘해보려고 해서란다. 누구나 처음에는 적당히 보다 제대로 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열과 성을 다한다. 한참을 그러다가 이내 깨닫는다. 적당히 하는 것조차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영혼까지 갈아 넣어 최대 효율을 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게 당연시되면 잘하고도 질타를 받거나 더 높은 목표를 요구받아 완전히 사기가 저하된다. 그때부터는 내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일이 나를 지배하는 구조로 바뀐다. 현대산업의 악조건과 문제점들에 대해서 쭉 살펴봤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선 괜찮은 해결책이 없다. 언론에서는 청장년들의 ‘쉬었음‘을 계속 보도하지만, 현실에서는 구직 공고마다 수십수백 명이 지원하고 있다. 어떤 취준생들은 면접을 위해 수년을 준비하는 반면, 고생해서 들어간 직장을 제 발로 뛰쳐나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누구 말마따나 중간만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현실이다. 죽을 것 같다면서도 잘 참고 사는 분들을 보노라면 내가 꼭 고장 난 부품처럼 느껴진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공룡을 이길 수 없겠지만 최소한 무기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 과제가 취업보다도 더 우선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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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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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가 읽은 최초의 퀴어 문학인 듯하다. 그걸 알았다면 굳이 안 읽었을 테지만 일단 몰랐으니까 읽어봄. 이제는 ‘커밍아웃‘이 흔하게 사용되고 있으나 그 용어의 탄생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던 기억이 난다. 금기시하던 동성애가 스멀스멀 사회 밖으로 나오더니 어느덧 하나의 문화 현상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내가 느낀 바에 의하면 우리 문화에서의 동성애는 곧 ‘남자+남자‘를 뜻했다. 더는 동성애라고 해서 놀라지 않게 된 지금에도 그건 여전히 남성들의 문화처럼 다뤄지고 있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서도 게이는 개그 소재로 사용되는 반면 레즈비언에 관련된 콘텐츠는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여자+여자‘는 수면 아래에 있었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가. ‘남자+남자‘는 꺼림직한데, ‘여자+여자‘는 별생각이 없다. 여자끼리 팔짱도 끼고 포옹도 해주고 하는 걸 많이 봐와서 그럴 거다. 그런 여자들만의 문화 속에서는 자신이 진짜 동성애자인지도 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할 듯하다. 그게 <항구의 사랑>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다.


별점이 짠 것은 순전히 재미가 없어서이다. 정체성에 눈 뜬 소녀의 학창 시절을 기록한 일기장 느낌. 그걸 덤덤하게 읽어가는 내레이션 같았달까.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조심성이 과한 탓에 이도 저도 아닌 작품을 낳았다. 차라리 ‘진짜‘ 일기였다면 훔쳐보는 재미라도 있었을 건데. 내가 ‘정보원‘들에게 들은 바로는 여중-여고는 남자에 굶주린 아이들과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아이들이 반반이라고 했다. 후자 중에는 남자 연예인이나 애니메이션 주인공을 덕질하는 걸로 만족하기도 한다. 현실 남자든 디지털 남자든 뭐라도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는 아이들은 소위 별종 취급을 받는다. 하물며 동성을 좋아한다는 건 별종을 넘어서 돌연변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것을 곱게 받아들일지 말지는 각 지역, 학교, 세대의 문화 특성에 달려있다. 다행히 주인공과 저자의 학창 시절에는 동성애를 막 걸고넘어지진 않은 듯하다. 그러니 이렇게 옛일을 추억하며 책으로까지 낸 거겠지.


주인공 준희는 2차 성징이 시작된 초6부터 대학생이 될 때까지 여러 ‘후보자‘를 만난다. 그들은 하나같이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성격이며, 외모나 행동에서 남성미를 느낄 수 있는 부류였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남자다운 남자에게 끌릴 법도 할 듯한데 그게 아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예민하고 섬세한 감정을 이해해 주지 못하지만 같은 성별끼리는 그게 되거든. 사랑과 우정을 동시에 이룬다니, 이 얼마나 가성비 좋은 전략인가. 일반적인 커플의 경우 애인 주변에 있는 모든 이성이 다 ‘적‘으로 간주되지만, 동성 커플에게는 그 같은 적들도 없었다. 간혹 동성 커플을 보며 괜히 따라 해보는 경우도 있지만 거진 한때의 철없는 불장난으로 끝나고 만다. 그걸 알기 때문에 여학생들의 동성애를 막 혐오스럽게 생각하진 않는다. 만약 다 커서도 그렇다고 하면... 취향 존중한다. 반대로 남자 커플은... 알아서 생각하시길.


이 작품은 딱히 스토리랄게 없는 작품이라서 길게 리뷰할 것도 없다. 처음 읽은 퀴어문학치고는 매우 순한맛인데 그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자들끼리 사랑에 빠지는 구조나 원리는 대강 이해했는데, 그게 남성 커플한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건가? 어쩐지 아닐 것 같은데, 그러면 대체 남자끼리 스파크가 튀는 건 어떤 이유인가? 아, 아니다. 전혀 알고 싶지 않습니다. 비록 저는 오메가 메일이지만 그래도 여자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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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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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 전쯤인가. 학생, 청년들에게 노력만을 강조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공과 행복을 거머쥐지 못한 이유는 다 노력이 부족한 내 탓이라고 믿었다. 특히 나처럼 공부 못한 친구들은 정말 그렇구나 했더랬다. 그러다 코로나 전후로 해서 안정적인 삶은 이제 노력의 유무나 질량과는 별 관계가 없어졌고, 툭하면 노력 타령하던 윗세대들과 공익광고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지름길도 없고, 정공법도 안 먹히고, 운빨조차 다 떨어졌음을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늘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지켜보던 나는 항상 생각했다. 어차피 결과가 뻔하다면 굳이 아등바등 열심히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적어도 지금은 비관적인 태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갓생에 흠뻑 취한 이들을 볼 때마다 꼭 저렇게 힘주고 살아야 하나 싶어서.


<스노볼 드라이브>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호불호가 심한 장르이지만 나님은 정말 좋아한다. 대 자연과 시스템 앞에 무력하고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열악한 조건에서도 참고 버티는 인간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어서다. 단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오만한 인간들을 향한 경고탄처럼 느껴져서 그렇다. 이젠 아무리 긍정 회로를 돌려봐도 인간 세상은 멸망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스노볼 드라이브>는 그런 종말의 바램이 현실로 나타난 이야기이다. 피부 발진을 일으키는 ‘녹지 않는 눈‘이 지구를 덮친다. 수분을 빨아들이는 눈 때문에 땅과 나무, 강이 다 말라버렸고, 인간의 모든 산업과 일상은 마비가 되고 말았다. 대강 이런 배경과 분위기이다.


6월 어느 날에 웬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운동장에 있던 중학생들은 이내 비명과 구토 증상 등 아수라장이 된다. 이때 통증으로 꼼짝 못 하는 ‘모루‘를 이사장의 아들 ‘이월‘이 구해낸다. 그날로부터 멈추지 않는 ‘겨울‘로 인해 많은 일자리가 없어졌고, 그 자리를 제설작업 및 눈 소각장 처리반이 차지했다. 모루의 엄마는 병으로 죽고, 트럭을 몰던 이모는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다. 얼마 뒤 발견된 이모의 트럭 사고 현장에서 이모는 안 보이고, 웬 스노볼 하나가 차 안에 있었다. 문득 모루는, 자신을 구해냈던 친구가 데려간 이사장실의 스노볼 컬렉션이 떠올랐다.


성인이 된 모루는 기숙사를 제공하는 특수 폐기물 처리 센터에 입사한다. 이 소각장으로 실려오는 눈더미 속에는 죽은 동물 사체와 심지어 인간 시체마저 섞여있을 때가 많았다. 하여 혹시나 이모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그녀. 그건 마치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목표로 일평생을 날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현대에 와서 ‘복수‘는 반드시 해줘야 하는 개념이 되었다지만, 정의의 실현에도 어떤 허무와 후회가 남는 걸 보면 절대 현명한 선택이라 볼 순 없다. 그렇다고 모루 같은 입장에게 잊어버리라며, 그러지 말라며 말릴 수도 없다. 미쳐버린 세상에서는 나도 차라리 무언가에 미쳐있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모루와 이월의 시점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강압적인 아빠 밑에서 자란 소년의 유일한 친구는 기르던 개였다. 그 친구가 죽고, 그나마 조금 가까워진 새엄마도 자살한다. 화장시키려는 아빠에 대한 반항으로, 이월은 운송업자에게 연락하여 시신 운반을 요청한다. 그렇게 해서 이월과 모루의 이모가 만나게 된 것. 눈 속에 묻어달라는 새엄마의 유언을 받들어 마땅한 장소를 찾다가 졸업했던 중학교로 향하는 이월과 이모. 폐교된 이곳 어딘가에 새엄마가 좋아했던 스노볼들을 같이 묻어주고 숨 좀 돌리던 차에 지역 강도들이 들이닥친다. 트럭을 타고 도주하다가 이월만 어딘가에 내려주고, 이모는 강도들을 따돌리며 떠나간다. 홀로 남겨진 이월은 그 길로 폐기물 센터에 입사하여 모루와 재회한다. 그녀는 이월이 지니고 있던 스노볼을 보면서 불안의 조각들을 맞춰보기 시작한다. 이렇듯 디스토피아의 진짜 공포는 생활의 붕괴보다도 연대와 신뢰의 상실에 들어있다.


이모에게 부탁받은 이월은 모루에게 사건의 전말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을 숨긴 채로 그녀와 잘 지내는 것도 가시방석이었다. 눈치 빠른 모루는 그를 추궁하여 자백을 듣고서 절규한다. 이렇게 될까 봐 이모는 그에게 당부했던 거겠지.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근거 없는 희망은 이 악몽을 버틸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것이 누군가를 숨 쉬고 살아가게 한다면 비록 환상일지라도 가만 놔두는 편이 옳지 않나 싶은 거다. 앞서 말했듯이 무언가에 미쳐있으면 그럭저럭 살만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헛되고 거짓된 삶이라 해도 그걸 깨뜨릴 권한이 내게 있는 건 아니거든.


냉철하게 말하면 두 주인공은 이유야 어찌 됐든 사서 고생을 자처하는 타입이다. 마치 다람쥐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쳇바퀴를 돌듯이 말이다. 그러면 이런 의문도 든다. 도전과 투쟁은 무조건 옳고 위대한가? 이월은 아버지의 권위에서 벗어나느라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다. 모루도 이모 때문에 목숨이 위험한 소각장으로 출근했다.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더 큰 위험으로 뛰어들어, 까딱하면 개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단 말이다. 압박과 시련에 굴복하느니 확 저질러보라던 인간의 도전정신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노력‘이 아직 먹혀들던 시절까지는. 허나 어떤 시도에도 같은 결과뿐이라면 ‘사느냐, 죽느냐‘ 같은 생존 철학이 의미를 잃어버려, 어떤 희망 앞에서도 회의적인 태도가 된다. 그동안 이런 유의 작품을 읽으면서 억지로라도 새 희망을 다짐하고 청춘을 응원했다지만 이제는 안 그럴란다. 오라, 달콤한 멸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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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투맨 오늘의 젊은 작가 46
최재영 지음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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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전까지의 나는 글쓰기는 고사하고 책 한 권 읽지 않는 인간이었다. 점점 인간관계가 좁아지면서 남아도는 시간을 무얼로 때울까 하다가 채택된 것이 독서였다. 말하자면 그게 가장 싸게 먹힌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독서도 독서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허전해서 기록도 같이 하기로 했다. 헌데 리뷰란 걸 써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남들이 쓴 리뷰를 눈팅으로 좀 배워볼까 했드만 어림도 없었다. 그럴수록 나 자신의 멍청함을 알게 되었고, 깨끗이 인정하며 정말 기록을 위한 글만 적었다. 아무리 길게 써봐야 고작 네다섯 줄이 다였다. 그만큼 머리 회전이 안되는 본투비 빡구였다.


글쓰기는 몰라도 독서의 매력을 점점 알아가자, 나의 뚝배기에서도 뭔가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 정체를 알고 싶어서, 또 내가 놓친 것들을 도움받고 싶어서 기존의 리뷰들을 찾아 읽었지만 대부분이 쓰나 마나 한 감상문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글들을 보면서 나 같은 건 흉내도 못 낼 대단한 글이라고 여겼는데 말이다. 이제 보니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데다 온통 칭찬 일색의 복제된 글들뿐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나의 글쓰기 욕구가 솟아난 게. 그때의 나는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리뷰를 쓰고 싶었다기보다 한국의 서평 문화에 찬물을 끼얹고 싶어졌다. 결국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반항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툴툴대는 문체가 되었고, 덕분에 남들은 차마 못 꺼내는 얘기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 셜록현준 채널에 나온 유홍준 교수님이 그러셨다. 글이란 건 내가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을 적는 거라고. 그처럼 나는 앞사람과 대화한다 생각하고 글을 써왔다. 사람마다 대화 코드의 맞고 안 맞고 가 있듯이, 내 글이 취향인 분들은 환호해 주었고 아닌 분들은 냉담했다. 매번 나의 글은 그 대비가 뚜렷했다. 반항심을 가질 때부터 대중성은 포기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았다. 참나, 누가 보면 작가 지망생인 줄 알겠네.


노잼인데 이게 왜 명작이야? 그걸 또 좋다고 난리 치는 사람들은 뭐야? 물어보면 뭐가 어떻게 좋은 지도 모른대. 한국인들은 자기감정에 이다지도 솔직하지 못한 걸까. 원래도 세상에 불만이 많았던 나는 지성인을 자처하는 무리와 가식적인 문화에 커다란 염증을 느꼈다. 어째서 책도 서평도 꼭 가치 없는 것만 주목받는 걸까.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가치라는 건 다 상대적이고, 그래서 똥글에도 인기와 명성이 주어진다는걸. 그래,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거잖아. 진정성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지. 오직 유행과 명성에 승차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부터 저항을 관두고 이런저런 타협을 시도하게 된 듯하다. 하여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의 내 글은 정말이지 형편없다.


책 리뷰는 안 하고 왜 이런 얘기나 하고 있느냐면, 주인공들의 고뇌가 남일 같지 않아서 그랬다. 이제는 진부하다는 표현도 아까운, 어지간히도 안 풀리는 작가들의 이야긴데 전혀 진부하지가 않았다. <맨투맨>은 흔한 성공신화가 아닌 실패담에 가까운 내용이며, 현대 실존주의의 철학을 그려낸다. 그래서 옆 나라 소년만화처럼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이 자주 나온다. 최재영 작가는 인생이라는 링 위에 오른 선수들과,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싸움과, 그 싸움에 흥미 없는 관중석까지 전부 나와 당신의 얘기라고 말한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영호가 한물간 ‘로키‘를 동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도 쓰레기가 아니란 걸 느끼고 싶어서이다. 계속 실패만 반복하는 자신을 그래도 증명하고 싶거든. 여튼 ‘로키‘의 영향을 받아쓴 ‘맨투맨‘의 시나리오는 대략 이렇다. 남성호르몬 과다로 건장해진 여고생 초롱이 MMA 선수가 된다는 내용. 설정은 좋았으나 시나리오는 계속 반려된다. 소위 ‘야마‘가 없다는 이유로. 결국 시나리오 수정은 그의 손을 떠나 혜진에게 주어진다. 그녀도 영호 못지않은 무채색의 소유자였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공동작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학교 선배인 옥빛 누나가 혜진을 조심하란다. 그녀는 주변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탈수기‘라면서.


혜진이 자신과 동족임을 영호는 바로 알아챘다. ‘맨투맨‘이 안 되면 이 바닥을 떠야 할지도 모르는데, 과연 혜진에게 작업 수정을 맡겨도 괜찮을까. 일단 두 사람은 ‘맨투맨‘의 주인공 초롱이의 캐릭터를 구축하기로 한다. 그러나. 초롱이에게는 이렇다 할 욕망이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요소들의 총집합으로 안전빵을 노렸지만, 오히려 그것이 초롱이의 발목을 붙잡는 셈이었다. 도전정신은 일절 없고 그저 무탈했으면 하는 영호의 무채색이 매력 있을 리가 있나.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현실 세계와는 달리, 작품 속에서는 결함 없는 캐릭터가 먼저 추락하는 법이었다.


이어서 영호의 아는 형님, 치성이 등장한다. 17년째 활동 중인 격투기 선수인데, 실력에 비해서 여태 못 뜬 비운의 사나이다. 사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매번 심판의 판정승으로 이긴 탓에 관중들이 그의 시합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영호는 치성에게 무난한 경기보다 화끈한 쇼맨십 좀 해보라고 하려다가 관둔다. 그 지적은 곧 자신을 향한 것이었고,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굴 가르치나 싶은 거다. 이런 상황은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도움이 되고 싶지만 ‘너나 잘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다가가길 멈춘 순간들. 정말 하이퍼리얼리즘이 따로 없다.


안되는 거 길게 붙잡지 말고 다른 일 알아보는 게 맞는 걸까. 여태 해온 게 아까워서, 배운 게 이것뿐이라서, 아직 희망이 없진 않아서 등등등. 여러 핑계와 변명으로 버티고 있단 걸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내 능력의 한계는 이미 드러났고, 그럼에도 때려치울 용기가 없어서 이러고 사는 걸 우리 모두가 안다. 무엇보다 이 자존심을 버렸을 때 주위에서 날아들 흉과 손가락질이 너무나도 두렵다. 현대인이라면 다 겪는 공포가 아닐까. 헌데 옥빛 누나는 달랐다. 일찍이 탈선하여 다른 길로 가서 성공한, 지금 보면 참 부럽기 그지없는 케이스였다. 사실 이런 건 시간이 지나봐야 알지, 그 당시에는 무모하다며 욕먹기 딱 좋다. 그럼에도 결단을 내리고 개척자가 된 옥빛 누나야말로 승자 중에 승자였다. 그러면 영호와 혜진, 치성이 형은? 이들은 다 패자 확정인 걸까? 정답이 없는 질문은 곧 패자뿐인 경기나 다름 없었다.


또 다른 자아라고 할지, 정신적 대필 작가라고 할지, 뭐 그런 게 영호와 혜진에게는 있었다. 종종 찾아오는 그 목소리에 자신을 의탁하면 맨정신일 땐 절대 없을 결과물이 탄생한단다. 흔히 말하는 뮤즈나 악마일 텐데, 그걸 의존하는 것은 곧 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세상과 타협한 작품을 ‘내 것‘이라고 말하기 창피할 테니까. 그래서 인간은 질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영호의 담당 피디는, 처리하기 곤란한 인물은 총으로 쏘든지 해서 빨리 퇴장시켜버리라고 했다. 과연, 링에는 제대로 붙을 의지가 있는 사람만 서있는 법이다. 영호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질질 끌다가 판정승을 하느니 차라리 화끈하게 져버리라고. 그것이 관중들에게 더 기억에 남는 시합이라고. 어쩌면 오늘날의 실존 문제는 이런 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실패라는 놈에게 맨투맨 마크를 당해온 우리의 인생. 공포의 그림자는 어딜 가든 우리를 압박 수비하며 졸졸 따라다녔다. 그 기세에 눌려 우리는 계속 숨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초롱이는 평생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인간은 결단을 하고 선택을 해야 한다. 아무것도 고르지 않는 것은 중립도 아니고 균형을 잡는 것도 아니다. 어중간한 사람은 언젠가 퇴장당하게 되어있다. 소심해서 무해한 인간으로 살아온 영호처럼, 겁이 많은 나 역시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왔다. 나의 까칠했던 예전 모습들도 ‘실패‘에게 전담 마크를 당해서 그랬던가 싶다. 예전의 나는 ‘선택‘을 했음에도 휘청였고, 지금의 나는 ‘타협‘을 했음에도 똑바로 서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승자보다 패자의 드라마가 더 그럴싸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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