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3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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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참여하는 쪽이 아니라 관람하는 쪽이었다. 감정과 의욕은 있었지만 다스리고 표현할 줄 몰라서 항상 울타리 밖을 맴돌았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직관이 발달한 케이스였다. 알다시피 직관적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쏟는 편이며, 버릇 같은 의미 부여와 습관적인 본질 파악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젠틀한 사디스트라고 볼 수 있다. 한창 성장기일 때만 해도 다들 나랑 똑같은 줄 알았는데, 말로만 들었던 잔잔한 돌아이가 나였다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나의 ‘남다름‘을 감추고 살아봤지만 정말이지 온통 나사 빠져있는 세상과 친구 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하여 나는 심신의 평화를 찾아 여기저기에 정신과 시간을 쏟았고, 얼마간은 그것들에 위로와 평안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비대해진 자아는 매번 제자리에 돌아왔고, 그렇게 번민과 해탈, 좌절과 초월을 되풀이하며 고통 중에 살았다. 여전히 방황하는 산책자이지만 지금은 정답 따윈 없다는 것과 선악의 조화를 깨달아 무던히 살아가고 있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비슷한 고민들로 절망했던 내 과거를 꺼내놓는다. 사실 헤세의 작품이 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고통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원인을 해결하러 나섰다는 점에서 박수를 주고 싶다.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힌두교 내에서 해소되지 않는 갈증 때문에, 브라만을 관두고 고행하는 승려인 사문의 길을 간다. 하지만 3년이나 사문으로 있으면서도 열반은커녕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고, 고타마(부처)를 통하여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스승이 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 그는 틀에 박힌 형식을 내려놓고 속세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창부를 만나 관능의 세계를 탐험하고, 상인과 함께 일하며 물질의 세계에 마음을 뺏겨도 본다. 속세에서도 배울 점은 많았고, 사람들은 이 되다만 고행자에게 지혜를 구하였다. 뭐가 됐든 자기만 좋으면 다 그만인 것인가.


창부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우리 같은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기에 순수한 사랑이 불가하다는 뜻일까. 그는 오직 어린아이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을 알고 싶다 해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때의 주인공을 두고 하기엔 좀 이른 말이지만, 배움을 통한 진보와 성장에는 이처럼 아쉬움이 없어야 하는 것일 테다. 아무튼 그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재산인 단식, 사색, 인내까지 모두 잃고 나서야 자신이 그토록 업신여겼던 어린아이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배움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절대 이해불가한, 내 것이 될 수 없었기에 차라리 경멸했던 그 순수의 타이틀을 마침내 획득한 싯다르타. 진흙탕을 실컷 뒹굴고 마흔에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갔으니 그 기쁨의 충동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


사람마다 자아를 인식하는 능력치가 판이하다. 똥인지 된장인지를 꼭 먹어봐야만 아는 사람이 있고, 딱 보면 모르냐며 경험 없이도 쉽게 구별하는 사람이 있다. 헌데 이 같은 지각 및 감각은 개인의 타고난 영적 수준과 크게 상관없어 보인다. 브라만, 사문, 구도자, 현인, 부처의 길을 쫓은 고차원의 주인공이 세속에 물들고 관능에 빠진 것은 그의 지능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헤세는 작품마다 ‘체험‘하는 인물의 어리숙함을 꼬집곤 한다. 물론 체험은 좋은 것이고 뭐든 경험해서 나쁠 건 없지만, 헤세처럼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 왜 항상 체험하는 인물을 다루나 싶었다. 헤세가 그리는 체험의 세계도 결국 탐욕, 관능, 타락 등의 덧없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알 것도 같다. 생각만 하는 사람은 가시에 찔릴 게 무서워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장미를 바라만 본다. 허나 행동하는 사람은 가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장미에 다가가 꽃향기를 맡는다. 내가 생각하는 헤세의 갈증은 그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는 것만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으니까.


헤세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었다면 되게 감명 깊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황야의 이리>를 읽고서 본 싯다르타의 유리방황과 각성의 과정들은 너무 생략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갑자기 번뜩했다가 시들시들해지는, 괜히 이랬다저랬다 하는 기분파처럼 그려놨달까. 아무튼 인간은 결국 자기만의 진리보다도 행복의 근원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이란 게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법이라, 쾌락 가운데서 행복을 찾는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많은 선각자들이 주장하듯 쾌락이 아닌 즐거움을 추구해야 하며, 그 즐거움이란 손해를 입더라도 넘어갈 만큼의 몰입이 가능한 ‘무언가‘여야 한다. 이제 독자들은 결과보다도 과정 자체가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깨달았을 때보다도 정답을 구하는 데서 활력이 돈다는 점을 자각하지 못했다.


빈 그릇일수록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허나 인간은 삶의 만족을 비움보다도 채움에서 얻고자 한다. 돈을 버느라 건강을 갈아 넣고, 나중 되면 돈이 있어도 건강을 되찾지 못한다는 교훈을 숱하게 듣지만 그 누구도 주의하지 않는다. 역으로는 자기 관리라는 종교에 빠져 끝없이 채워 넣기에 바쁘다. 인간이란 비워져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고, 그렇게 본인의 ‘옳음‘을 수집하지만 결코 쾌락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걸어온 날들에 회한이 드는 것이 그 증거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채워보질 않으면 비움의 가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끝없는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게끔 되어있다. 왜 그런 노래 가사도 있었지.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다던.


지혜의 왕 솔로몬이 남긴 말이 있다.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전12:12).』 싯다르타도 그리 말한다. 너무 많은 지식과 지나친 금욕, 행위, 노력이 오히려 방해였다고. 나 또한 지인들과 그런 말을 했었다. 아는 것이 힘이란 말보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더 좋다고. 다시 말해 알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다만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허나 결론을 안다 해서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차라리 모르던 때가 좋았다는 얘기다. 그런고로 싯다르타의 말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야말로 참 사랑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순수하다는 것은 쉽게 악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뱃사공으로 살아가던 싯다르타 앞에 창부 카말라와 아들이 나타난다. 뱀에 물려 죽은 창부의 아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제공하는 주인공. 하지만 그의 헌신과 정성에 욕설과 불평으로 화답하는 아이였고, 자신을 떠나버린 아이를 보며 브라만이었던 부친과 여러 스승들을 떠나온 자신을 떠올린다. 비록 실망했으나 그는 어린아이의 투정, 원망, 욕심, 자랑, 탐욕, 허영심 등의 감정들이 밉다기보다 오히려 사랑해야 할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 강한 충동들이 심장을 뛰게 하며, 죽어있는 지식과 사상이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불멸의 행위를 갖게 하였다. 결국 정답이라 생각되는 ‘도‘만을 좇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조화로움과 정반합, 그리고 욕망을 흘려보낸다는 것이 중요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늘 그 자리에 존재한다. 감정도 시간도 생각도 그렇게 순환하는 법이었다.


싯다르타는 재회한 옛 친구에게 완전함의 균형을 설명한다. 하나의 돌멩이는 모든 것을 짊어진 브라만으로써 숭배할 가치가 있다고. 불교 신자가 아닌 나님의 해석은 이러하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씨앗이다. 씨에 들어있는 dna에는 그 존재의 설계도가 담겨있으며, 다 성장한 후의 모습도 이미 새겨져 있다. 결국 씨는 과거부터 미래까지의 시간과, 존재를 발산하는 에너지가 압축된 형태로써, 그 잠재력이 깨어날 때마다 인간은 그 경이로움에 말을 잇지 못한다. 이처럼 가치와 의미는 내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으며, 그것을 발견해낼 줄 아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 더 나아가 그것들을 온전히 긍정하는 마음이 갈증을 지워준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만이 남다름과 불안함의 수렁에 빠진 나와 당신을 건져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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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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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좁혀져가는 인간관계란, 현실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온라인에서 만나 정들었던 분들도 어느샌가 소식이 끊어져, 어쩌다 한 번씩 생각날 때면 괜히 허전해진다. 블로그 활동 초기에, 이제 막 글쓰기의 매력을 알아가던 즈음에 종종 찾아와 말 걸어주셨던 몇몇 분들이 있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수준 낮았던 당시의 내 리뷰를 좋아해 준 분들에게서, 현실에서는 절대 느껴보지 못할 감사를 배웠다. 자존감이 바닥 치던 나를 일으켜준 그 은인들은 현재 전부 연락 두절 상태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을 읽으면서, 한때 나의 빛이 돼주었던 분들이 스치듯 떠오른다. 제목처럼 ‘볼 수 없는 빛‘이 된 사람들. 잘들 지내시는지. 건강은 하신지.


제2차 세계대전의 배경이고, 독일 소년병과 프랑스 장님 소녀의 시점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서 지내던 소년은 기계 수리에 재능을 보였고, 이후 독일군의 특기병으로 입대한다. 그의 임무는 정보를 전파하는 송신기의 좌표를 찾아내는 일이었고, 팀원들은 그 현장의 저항군들을 섬멸하였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소년의 눈빛은 잿빛이 되어간다. 한편 공습을 피해 작은할아버지 네로 피난 온 소녀와 부친은, 독일군의 감시망을 피해 가며 죽은 듯 지낸다. 박물관의 관리자인 부친이 챙겨온 게 있는데, 전설의 다이아몬드인 ‘불꽃의 바다‘였다. 이 보석을 지니면 영생하는 대신 주변인들이 죽는다는 저주를 품고 있단다. 그래서 부친은 보석을 감춰둔 모형 집을 딸에게 선물한 뒤 수용소로 끌려간다. 저주의 시작이었다.


무난한 가독성에 비해 진도가 매우 더딘 작품이다. 게다가 두 남녀의 접촉은 후반부에 가야 나온다. 그전까지는 꽤나 루즈한 구간이 많은데, 소녀 쪽은 숨어지내는 내용이 많아서 그렇고, 소년 쪽은 직접 총질하기 보다 정찰하러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다 폭격당한 건물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는데, 그제야 이 작품이 반전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반전의 요소가 미미했다는 말이다. 아무튼 두 사람의 접촉 전까지, 작품의 재미를 담당한 것은 보석을 찾아다니는 독일군 원사였다. 병마로 죽어가던 그는 영생의 돌을 쫓아서 소녀의 집까지 찾아왔다. 다 무너진 도시에서 홀로 멀쩡한 집 한 채가 곧 ‘좌표‘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보석은커녕 원사의 방문 의도조차 모르던 소녀는, 집 안에서 숨바꼭질을 해가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


후에 소년이 무너진 건물을 탈출하고, 원사에게서 소녀를 구해낸다는 내용이다. 그 뒤에도 더 있지만 이 정도로 하고, 두 인물의 설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앞 못 보는 소녀만큼이나 군에 복종한 소년도 눈이 멀어있다고 볼 수 있다. 소녀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위험했고, 소년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위험한 요소였다. 집안에 갇힌 소녀는 빛을 볼 수 없어 절망하고, 건물 아래 갇힌 소년은 빛이 차단되어 절망한다. 이렇듯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입장 속에서 대칭 구조를 이룬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평생을 장님으로 사는 것과 꼭두각시로 사는 것.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건 마찬가지겠지만 육체로도 모자라 영혼까지 지옥에 밀어 넣을 필요가 있을까.


평화가 찾아온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헤어졌던 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살아있기를 바랄 뿐. 생존자들의 사명은 최선을 다해 남은 생을 보전하는 일이다. 아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현생에 충실하며 살아보지만 꼭 한 번씩 정신을 낚아채는 순간들이 찾아든다. 나에게 다정했던, 그래서 고마웠던 누군가의 부재를 느낄 때마다 온 신경이 마비된다. 나 같은 인간도 관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옛 은인들이 오늘따라 많이 생각난다. 그 작은 응원 덕분에 여태껏 버틸 수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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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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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에서 김상욱 교수가 그러더라. 미래를 예측하고 싶으면 SF 소설들을 읽으라고. 과학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설자리를 뺏는 것을 항상 못마땅해하던 나님은 SF 소설을 퍽 좋아하질 않았다. 과학의 발달이 인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과학자들도 잘 알지만, 그럼에도 과학에 대한 연구와 비전은 언제나 희망적이라는 김상욱 교수. 그래서 앞으로는 국내 SF 작가들을 좀 더 주목해 볼까 한다. 물론 SF 장르와 담쌓고 살지는 않았다. 또 그중에는 제법 재밌고 유익했던 작품들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작가는 없었다. 그런데 김초엽 작가는 뭐랄까, 이제야 알게 된 게 후회가 되었다. <지구 끝의 온실>은 ‘내가 바라던 SF의 맛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대재앙 ‘더스트 폴‘이 종식된 2060년대의 이야기. 과거 한 연구소의 실패로 발생한 더스트가 자가증식하면서 전 지구를 강타했고, 항체가 없거나 생존게임에서 패한 자들은 전부 죽어버렸다. 과거 생존자들이 힘겹게 재건한 현대사회의 생태학자인 아영은, 국내 곳곳에서 무섭게 증식하는 덩굴 ‘모스바나‘를 조사한다. 그러다 에티오피아의 은퇴한 식물학자의 관련 글을 읽고서 곧장 만나러 간다. 더스트 시대의 산증인에게 전해 들은 모스바나는 복잡한 인류사와 맞물려있는 충격 그 자체였다.


말레이시아의 모 연구소 실험체였던 두 자매가 탈출하여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더스트가 전 세계를 폐허로 바꾸었으나 이곳 프림 빌리지만은 파괴하질 않았다. 소규모의 인원이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고, 마을 규칙을 세워 제법 평화롭게 돌아가는 낙원 아닌 낙원이었다. 이 마을을 꾸려온 두 사람, 기계 정비사인 지수와 사이보그 식물학자인 레이첼의 특이한 관계가 자매의 흥미를 돋우었다. 유리온실에서 실험만 하는 레이첼은, 지수의 요구에 따라 재배 작물 씨앗, 더스트 분해제 등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지수는 침입자들을 물리치는 장치와 드론을 만들면서 마을을 지켜왔다. 한편 프림 빌리지를 향해 날아오는 더스트 폴이 관측되었고, 작물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최종 수단으로 모스바나를 만들어 숲에 심는다. 죽은 나무들의 영양분을 먹고 무성해진 그 덩굴들이 방패가 돼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마을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침략자들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전부 흩어지게 된다.


프림 빌리지의 엔딩도 똑같았다. 그저 다른 마을들보다 멸망이 좀 더 연장됐을 뿐이다.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인데, 프림 빌리지를 탈출한 두 자매가 챙겨온 모스바나를 마을마다 심었고, 그 식물이 넓게 분포하면서 더스트의 분해 작용을 해나갔다. 또한 지수에게 전수받은 분해제를 만들어 환자들을 살리는 데에도 힘썼다. 두 자매는 모두에게 프림 빌리지와 모스바나를 설명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고, 더스트 협회의 대응기술과 더스트 종식으로 두 자매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 아영은 그들의 이야기를 뒷받침한 소설 ‘지구 끝의 온실‘을 출간한다.


내가 압축한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입체적인 내용의 작품이다. 보다시피 디스토피아 소설이라서 시종일관 암울한데, 오히려 그래서 더 희망을 노래한다고 볼 수 있다. 김상욱 교수의 말대로, 과학은 언제나 희망적이라는 게 바로 이건가 싶다. 약탈과 폭력, 불신이 만연한 환경에서도 인간은 의존할 만한 누군가를 기다린다. 다만 그 대상은 꼭 인간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대다수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려와 달리 성별이 문제 될만한 장면은 없었는데, 갑자기 퀴어 문학으로 전환됨에 따라 납득이 갔다. 여하튼 내가 질색했었던 ‘이과소설‘과는 여러모로 결이 많이 달라서 좋았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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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오늘의 젊은 작가 27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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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어떤 형님은 정말 뜬금없이 자신의 일과를 나한테 보고한다. 보통은 잘 지내는지, 뭐 하고 있냐는지 따위의 안부가 오고 간 뒤에 나 오늘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대화로 이어지지 않나? 그런데 이 형님은 오늘 뭘 먹을 예정이고 어느 병원에 다녀왔다는, 궁금하지도 않은 제 얘기들을 아주 뻔뻔하게 투척한다. 사회성 만렙인 나님은 아무거나 던져도 맛있게 받아주는 편이지만, 속으로는 이런 걸 왜 얘기하는 거냐고 수십 번은 묻고 싶어진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일부러 핀잔주어 무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신의 남다른 사고 회로와 방식들이 서로를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님을 각인시켜주고 싶은 한국인의 오지랖이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다름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뻔하지 않은 삶의 재미를 즐기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작품도 그런 식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친근한 척 말을 걸어오고, 주인공에게 이러쿵저러쿵 자기 얘기를 쏟아내는 상황의 연속극. 개인주의가 팽배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내가 한 20대 시절까지만 해도 국민들의 이 같은 네트워크는 분명히 존재했었다. 나 역시 타인들의 친절을 적잖게 받았었고, 곤란한 처지에 있는 이에게는 호의를 베풀곤 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길을 묻는 정도의 짧은 접촉이 아닌 이상 경계하고 무시하고 심지어 깔보기까지 한다. 그것은 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하여 극 내향인인 주인공에게 별별 사람들이 다가와 TMI를 꺼낼 때면, 이 얘기를 왜 나에게?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본투비 오지라퍼도 있겠고, 괜히 뻘쭘해서 뭐라도 얘기해야겠다 싶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뭐가 됐든지 주인공은 본인의 시간이 뺏기는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남들의 말을 들어준다.


초반까지는 뭐 하러 저 얘기들을 가만히 들어주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주인공이 막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남들에게 피드백을 부탁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배경과 상황만 바뀔 뿐, 계속해서 누군가와의 일방적인 대화가 이어지다 보니 작품의 의도를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딱히 기승전결도 없고, 어떤 메시지도 안 보이고, 어떤 독자의 말대로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에 가까웠다는. 모름지기 글쟁이들은 자기가 할 말이 있어서 글을 쓰고 책을 낸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정체 모를 작품에도 어떤 뜻이 있으리라 판단되나 아직도 파악이 안되므로 이해하기를 관두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종이가 아깝네, 시간만 버렸네 따위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의 다양성만큼 소설도 온갖 유형이 존재할 테고, 그로 인해 인간의 사고 또한 똑같아지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남들이 재미있다던 책이 내게는 꽝이고, 내가 극찬한 작품이 남들은 시큰둥할 때에 오히려 안심한다.


이 작품은 ‘들어주는‘ 행위의 다정함을 강조하는데, 사회의 때가 잔뜩 묻은 나로서는 퍽 강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기주장이 약한 주인공이 그런 상황들을 뿌리치지 못한 그림으로만 보였거든. 그래도 좋았던 점은, 본인이 적극적이지 않다 해서 타인의 다가감을 애써 밀어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사회성이 높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기준선을 넘었다 싶으면 거부반응이 일어나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한다. 시대를 갈수록 그 거부반응은 너무 빨리, 또 너무 자주 일어나고, 하다 하다 기분상해죄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우리 사회를 격리시키고 고립되게 만든다. 쓰다 보니 책 얘기는 안 하고 잡설만 가득했는데 아무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다정한 거라고 하니까, 누가 옆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하고, 개풀 뜯어먹다 체한 소리를 하더라도 으른의 마음으로 양껏 귀여워해 줍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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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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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푹 빠져있는 <알쓸신잡>에 출연하는 김영하 작가의 작품이 읽고 싶어졌다. 이분의 책은 <살인자의 기억법>, <작별인사> 이렇게 두 권 읽은 게 전부이다. 분명 글도 잘 쓰고 재미도 있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는 않았더랬다. 이런저런 선입견을 배제하고 좀 더 알아가 볼까 하는 생각에 몇 권을 대출했다. 로맨스물인 줄 알았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어떤 장르라고 딱 규정짓기가 애매하다. 현대판 영적 지도자의 방랑기랄까. 천명관의 <고래>​가 지닌 날것의 감성이 김영하 작가에게도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운.


함구증을 앓던 동규의 단짝인 제이는, 친구의 마음을 읽고 대변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제이는 어린 동규가 보더라도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아이였다. 제이는 동물과 사물의 감정이 느껴진다고 했다. 반면에 사람의 마음은 읽어내질 못했는데, 그런 모순이 오히려 주변인들을 끌어당기는 효과를 발휘했다. 아무튼 이른 나이에 거리로 내쫓긴 제이는 비행하는 떠중이들과 지내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가끔 필요에 의해서 폭력을 휘두르긴 했지만 그의 본바탕은 선해서 절대 군림하거나 착취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수많은 똥파리들이 꼬였지만 하나같이 제이는 뭔가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흔히 개과천선하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더 매력 있는 작품이다. 제이는 음지의 영역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한 삶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추종자가 점점 늘어나도 명령은커녕 간섭조차 하지 않았다. 중후반부에서는 제이가 오토바이에 빠지고, 그와 세력들의 폭주문화를 근절하려는 경찰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왜 이런 방향으로 트는지를 모르겠다가, 제이와 함께 하던 동규가 친구의 추락을 계속 암시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추종자들이 추락하고, 제이 혼자만이 세상을 이기었다.


요즘에는 오토바이 폭주족이 사라진 것 같은데, 내가 중학생일 때만 해도 학교 관두고 중국집 배달하다가 폭주족이 된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튼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괜히 반가웠달까. 리뷰를 쓰면서도 여전히 의도 파악이 안되는 작품이다. 적어도 폭주족이 되기 전까지의 제이는 최소한의 선, 윤리, 정의 같은 인간다움이 있기는 했다. 애초에 인간을 이해하는 게 불가했고, 그 자신도 인간이길 포기했다 싶은 삶이었으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은 정도는 있었다. 그러다가 제이를 따르는 사람이 생기면서, 쓸데없는 마찰이 사라지면서부터 그는 서서히 ‘신‘이 되었다. 창조도 파괴도 평화도 자유도 아닌 그저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신. 사실은 잘 모르겠다. 카프카의 소설처럼 해석을 거부하는 작품 같기도 하고.


난해하긴 해도 읽는 맛이 있었다. <알쓸신잡>에서도 느꼈지만 이 작가는 글도 참 영리하게 쓴다. ‘이렇게 쓰면 특정 독자들이 욕할 텐데‘ 싶은 대목이 꽤 있다. 그러면 보란 듯이 그 우려를 상쇄시키는 재치를 발휘한다. 시대를 관통했던 옛 거장들의 작가정신이 느껴져서 좋았달까. 아무튼 잘나가다가 갑자기 폭주족 이야기로 바뀌지만 않았어도 별 다섯은 주었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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