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듣기만 해도 얼마나 벅찬 이름인가. 안똔 체호프.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다. 그의 단편은 지나치게 불친절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장황하지도 않다. 어떤 은밀한 곳을 들추어 얼굴을 불게 할 수도 있고, 인생의 공리들을 또박또박 말하기도 한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언제 읽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최근에 발췌독으로 오디오북이 올라와서 냉큼 들었다.
오래 보존하지 못하지만 달콤한 멜롯을 타닌이 풍부하고 오래 숙성할 수 있는 까베르네 소비뇽을 멋들어지게 혼합한 귀한 적포도주를 꺼내 볼록한 와인잔에 따라 마시고 입안에서 돌려 머금어 맛과 향을 그윽하게 느끼듯이 오디오북을 들었다.
오디오북에는 "어느 관리의 죽음", "자고 싶다", "6호 병동",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실려 있다.
고리끼, 부닌, 밤빨로프,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어니스트 허밍웨이, 캐서린 맨스필드, 사뮈엘 베케트 등 현재의 저명한 작가들이 체호프를 통해서 문학을 배웠거나 체호프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체호프를 읽으면 문학과 예술의 위대한 힘을 알 수 있다>라는 레이몬드 카버의 언급이나 p341
애정의 레이몬드 카버가 말한 체호프를 읽어 알 수 있는 문학과 예술의 위대한 힘은 무엇일까? 그 위대함은 우리 삶에 무엇을 그렇게도 전해주는 것일까?
"어느 관리의 죽음"
재채기를 했고, 침이 튄 장관에게 거듭 사과를 하다, 화가 난 장관의 격노에 관리를 죽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걱정과 그 걱정으로 만들어진 오해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사서 고생하고 있을까.
소심함의 제 기능은 무엇일까. 대범해지기 전의 한 단계일 뿐일까. 아니면 아직은 준비되지 않았고 강하지 않은 자신을 보호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만을 아끼는 능숙한 가면의 소심함일까.
체호프는 익숙해지고 태연하고 능청맞기 전의 조심스럽고 풋풋한 소심함이 아닌, 다 자라버린 주름진 소심함의 이야기를 "어느 관리의 죽음"으로 이야기한다.
아이의 소심함이었다면 장관의 격노에 서럽게 눈물 흘렸고 그 눈물 흘림이 안쓰러울 것인데, 성마름 이면에 이기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소심함은 그 관리를 '그런데 갑자기'의 죽음으로 몰고 갔다.
줌이나 구글밋으로 화상회의를 할 때 화상회의 중인 화면을 공유해버리면 생기는 무한 미러링 (화면 속 화면이 보이고 그 속의 화면이 또 보이는 것이 끝없는)처럼 '괜찮습니다 먼저 하세요'를 남발하며 허리가 끊어지는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서로 굽신거리기에만 바쁘게 만드는 어설픈 배려처럼 다 자란 이의 '소심한'은 꼴사납다. 그런 성품을 가진 이의 고민 상담을 해줘야 한다면 "어느 관리의 죽음"을 슬며시 내밀고 싶다.
"자고 싶다"
역자 해설은 "자고 싶다"의 살해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주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 식료품 잡화점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파산으로 경제적 곤란을 겪었고, 중등학교를 혼자 살며 돈을 벌며 마친 삶을 보면, "자고 싶다"는 반인륜적인 짓이라고 하고 싶은 고단한 삶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살해가 결코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일을 가능케 하는 현실의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을 감행하게 하는 그릇된 관념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그릇된 관념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횡행하고 있는지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그것은 바로 폭력이기도 하다. p352
바리까는 잠이 못 참을 정도로 온다고 아이를 죽여버릴 수 있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탈장이 심해져 죽고 마는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이나 주인 부부의 무리한 일들을 순종해서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바리까가 처한 상황은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자신을 해하거나 타인에게 그것을 돌리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그 극한의 상황을 목이 쉬어라 울고 있는 아이를 살해하는 것으로 타깃함으로써 더 부각했다고 보인다.
"6호 병동"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전락을 보여주는 "6호 병동"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전체 단편 중에 가장 러시아적인 단편이다. 격변하는 사회에서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고 논쟁하며 고뇌하는 인텔리겐치아의 모습들은 지적으로 매력적이다. 의사 안드레이 에피미치의 고뇌와 그와 정신병동에 있는 이반 드미뜨리치의 대화는 일품이다.
의사이지만 6호 병동에 수감되어 초라한 장례식으로 생을 마감하는 안드레이 에피미치를 보면, 무력한 지식인의 무능을 볼 수도 있지만, 반의적으로 고뇌하는 지식인들이 독야청청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고 규합하여 행동하자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 단편에 대한 역자의 해설도 마뜩잖다. 역자의 해설은 1차원적으로 비생산적이고 행동하지 않은 지식인의 초라한 모습을 재묘사할 뿐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두 개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지금 기온은 3도인데, 그래도 눈이 내리는구나."
구로프가 딸에게 말했다.
"하지만 따뜻한 건 땅의 표면이지, 대기의 상층에서는 기온이 전혀 다르단다" p336
영상 3도 땅 위의 세계와 추운 대기 상층의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는 구로프에게 어디가 진실한 세계일까? 그리고 그 '진실한'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딸의 손을 꼭 잡고 걸어도 당연한 공개된 세계와 안나의 손을 꼭 잡고 있는 호텔 방의 비밀의 세계.
우리 또한 일터와 가정과 취미 활동 등으로 여러 세계에서 같은 또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진실한'이라는 표현보다는 '주가 되는' 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일만 생각하던 삶, 좋아하는 여가 생활을 최우선으로 하는 삶, 어떤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는 삶.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여러 세계를 살면서, 생의 무게 중심을 이런저런 세계로 옮겨 다니고 있다.
의무의 세계에서는 자유의 세계를 갈망하기도 하고, 두 세계를 동시에 살고 싶기도 하고, 내가 있는 모든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갈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한 번에 한 장소에만 머물 수 있다는 점과, 하나의 세계에만 치우치면 다른 세계와는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공평함을 간과한다면, 부조리를 느끼며 고뇌하고 방황할 것이다.
체호프는 의사이다. 그래서 세상을 사실적으로 바라보고 담백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담담하게 인생의 진실들을 전한다.
체호프는 진실이 문학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강조한다. p342
<오디오북>
<종이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