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그 외의 10여 개의 각기 다른 정체성을 가진 필명. 프랑수아 메르몽, 뤼시앵 브륄라르 <죽은 자들의 포도주> 등.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뭔가 꿍꿍이가 있는 이 작가는 1956년 로맹 가리로 <하늘의 뿌리>, 1975년 에밀 아자르로 <자기 앞의 생>으로 한 작가에게는 두 번 주지 않는 세계 3대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책은 이미 구입한 상태로 평을 봤는데, 가리가 이렇게 웃긴 면이 있냐는 평이 많아서 궁금했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 망자들이 남긴 포도주로 망자들을 회상하는 이야기일까?
"삶은 죽음의 패러디에 불과하다" p6
망자들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망자들이 무덤 아래에서 그들이 안와 (머리뼈 속 안구가 들어가는 공간)에 주먹을 넣어가며, 입을 벌리면 두 번에 한 번은 쥐가 얼굴을 빼꼼 내밀며, 온갖 살아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엉망진창으로 한다.
세계대전, 군인, 벌레 같은 경찰, 창녀, 창녀의 엄마, 연인, 집주인, 세입자, 관료, 관료의 비서 등의 이야기를 풍자를 넘어 정신세계가 와해되는 느낌으로 묘사한다.
‘혹시 내일 아침에 변비를 앓을 예정이신가요, 니콜라이 씨? 당신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아름다워요!’
p133
변비 때문에 고생하다 노래를 부르니 좋아져서 니콜라이 씨는 화장실 갈 때마다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그 노래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주인집 내외는 친구를 점심에 초대할 때는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부엌문을 열어두기도 하고, 급기야 금발의 타이피스트 아가씨는 평생 니콜라이 씨가 자기 옆에서 변비를 앓기를 바라며 결혼한다.
이 정도의 큭큭거리게 만드는 묘사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건 약과다.
“우리가 크게 잘못 생각했어, 나의 아가씨! 이 나락보다는 차라리 삶이 나았을 것을…… 어떤 삶이 됐건 말이야! p240
안타깝고 애틋하게 죽은 아름다운 연인은 이렇게 철학적이고 가슴 저미게 하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두 늙은 노인이 이제 갓 죽은 두 남녀의 머리를 탁자에 올려두고 자신들의 만행을 이야기할 때, 남자 머리가 한탄하며 말한 것이다. 미남인 남자의 얼굴은 온통 멍이 들었는데, 그건 늙은이가 자신 (머리만 있다)을 볼링 핀으로 삼고 정강뼈들을 핀으로 삼고 매일 볼링 게임을 해서 든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에 지저분한 갈색 얼룩들이 있는 이유는...
“그러니까 그 얼룩, 그 얼룩이 어떻게 생긴 건고 하니, 바로 내가 매일 밤 네 사랑하는 아가씨 얼굴로 엉덩이를 닦아서 그렇게 된 거야!”
“헤! 헤! 헤!” p241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대체. 책을 읽다 보면 부제 중 하나이기도 한 "마인 고트!(독일어로 맙소사)"를 연발하게 된다. 가끔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면서 연발하게 된다. 마인 고트. 마인 고트.
외설적인 내용도 서슴지 않고 나오지만, 역한 부분도 많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일견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하 묘지 밑바닥에서 펼쳐지는 익살스러운 이야기다. 요컨대 소설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제1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 유머와 부조리와 난센스와 트루피에 코미디comique troupier. 19세기 말에 유행한 카페 코미디쇼로 남자 배우들이 군복을 입고 군대와 관련된 만담과 노래를 공연했다와 풍자인형극을 뒤섞은 저 너머 세상 이야기, 루이스 캐럴식 ‘거울의 이면’ 이야기. p259
가리가 열아홉 때인 1933년부터 쓰기 시작해서 1937년까지 다음은 이 기이한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가리가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말하듯이 그의 인생 전체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열 달 동안 열렬하게 격정적으로 사랑한 크리스텔에게 이 책의 원고를 주었다고 한다.
자기앞의 생을 읽었을 때 마지막 즈음에서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슬플 수가.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독자를 무너지게 할까. 그 답 중의 하나가 <죽은 자들의 포도주> 일 것이다. 죽음, 공동묘지, 경찰, 악취, 향수, 아이, 창녀, 부모, 군인, 계단, 이 모든 재료를 로맹 가리는 묘지 아래 해골들과 함께 정말 마음껏 반죽해본 것 같다. 어떤 독자를 고려해서 의도한 것이 없이 마구 섞어 본 것 같다. 그래서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가리의 "아이디어의 실험실"과도 같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 그는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서 『그로칼랭』의 모티프와 『자기 앞의 생』의 로자 부인이 만들어놓은 유태인 동굴의 악취를 되살린다. 또한 『가면의 생』에서는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 나오는 두 구절을 글자 그대로 옮겨 온다. p255
로맹 가리 자신이 말했다. '가리'는 러시아어로 '불태운다'라는 뜻이라고. 24살의 둘째 부인이 실종된 후 그녀의 차 뒷좌석에서 죽은 채 발견된 지 (약물 투여) 1년 후에 가리는 66세의 나이로 권총 자살을 한다.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을 유언처럼 남기며 자신이 에밀 아자르였다고 밝힌다.
가리의 삶은 군인부터 외교관 그리고 작가까지 다양하고 그의 결혼 생활도 결코 평범하지 않다. 성공한 작품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아주 힘들었다고도 들었다.
그런데, 로맹 가리와 아이언 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는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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