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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프레드릭 배크만의 <불안한 사람들> 때문에 읽었다. <불안한 사람들>에서 (특히 오디오북에서) 인자하고 소녀같이 수줍지만 로맨스 가득한 에스텔 할머니가 <베니스의 상인> 연극에 참여했고, 그때의 대사를 읊는 대목을 보고 몹시 읽고 싶어졌다. 에스텔 할머니는 앞집 할아버지와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책으로 인연을 맺어 서로 책을 교환해보며 노년에 하트 뿅뿅한 사랑을 한다. 책을 교환하다 마지막엔 할아버지가 자신의 집 열쇠를 준다. 그리고 끝. Nothing happened. 하지만 에스텔은 그것이 자기가 한 불륜이라고 말한다. 귀엽다. 그리고 그 열쇠 덕분에 은행 강도는 완벽하게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에스텔 할머니가 <베니스의 상인>을 거론한 곳은 다음과 같다. <불안한 책>을 다시 꺼내 해당 부분을 겨우 다시 찾았다.
<베니스의 상인>에도 출연한 적 있어요.
...
"아, 나 그 작품 좋아해요. 멋진 대사가 있어요. 불빛 어쩌고 하는 거!" 에스텔은 명랑하게 외쳤지만 어떤 대사였는지 죽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안한 사람들> p404
바로 그 순간 에스텔은 연극 대사를 기억해내고 이렇게 선포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저 불빛이 나의 집 현관에서 이글거리고 있구나. 저 조그만 촛불이 얼마나 멀리까지 빛을 비추는가! 그러니 이 타락한 세상을 선행으로 비추자꾸나."
<불안한 사람들> p405
마지막으로 에스텔이 여러 지점에서 언급한 작가들은 등장 순서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
웰리엄 셰익스피어 (405쪽)
감사의 말,
<불안한 사람들> p483
일단, 에스텔 할머니가 너무 멋있어서 저 대사도 더욱 빛난다. 그런데 <베니스의 상인>은 나는 읽었던가? 줄거리도 가물가물하다. 어디서 소개 글을 읽었던가. 그래서 언젠가 잠실 알라딘에 갔을 때 "방금 팔고 간 코너"에서 보이자마자 집어 들었고, 읽었다.
그리고 찾았다. 프레드릭 배크만이 영어나 스웨덴으로 된 <베니스의 상인>에서 발췌한 부분을 스웨덴으로 <불안한 사람들>에서 썼고, 그것을 이은선 님이 한국어로 옮겼고, 나는 문학동네의 이경식 님이 번역한 <베니스의 상인>에서 같은 부분을 찾아야 하니, 그 문장을 찾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한 문장이 몇 번의 변신을 한 것을 다시 맞추는 작업 같았다. 불행하게도 <베니스의 상인>을 한창 읽을 때는 <불안한 사람들>에서 인용한 부분을 찾아야겠다는 당초의 목표를 잊어버렸다. 나는 바보니깐. 그런데 느낌이 딱 왔다. "우리 눈에 보이는 저 불빛이 나의 짚 현관에서 이글거리고 있구나." 저건 분명히 포우셔가 남장을하고 베니스로 가서 명재판 끝에 앤토니오를 구했지만, 곧 결혼할 남편 바싸니오가 남장을 한 자신이 간곡히 부탁하자 자기가 절대 남에게 주지 말라고 했던 반지를 끝내 줘버린 것에 단단히 화가 난 채 집으로 돌아가는 대목에서 했던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포우셔: 저기 보이는 불은 우리 집 대청에 켜진 불이다. 작은 촛대가 참 멀리까지 빛을 던지고 있구나! 선행도 이와 같아서 사악한 세상에 빛을 비추고 있어.
<베니스의 상인> p141
이쯤 되면 내가 무엇을 여기에 더할지 나 자신도 안다. 원문을 보고 싶었다. 다시 미국 아이튠즈 기프트 카드를 사야 하나 고민했지만, 애플 iBooks에서 검색해보니 <베니스의 상인>이 공짜다! The Merchant of Ven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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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다음과 같다.
“That light we see is burning in my hall.
How far that little candle throws his beams!
So shines a good deed in a naughty world.”
p178
Excerpt From
The Merchant of Venice
William Shakespeare
https://books.apple.com/us/book/the-merchant-of-venice/id916363781
번역만 보면 그래도 문동이 좀 더 잘 번역한 것 같다.
<불안한 사람들>, 문동 <베니스의 상인>, 애플 iBooks 공짜 버전의 의 세 부분을 모두 보았다.
문장의 해석은?
첫 문장에서는 자신이 준 반지를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에게 줘버린 곧 남편이 될 사람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 포우셔가 반지를 바싸니오에게 주며 이 반지를 그 누구에게도 주면 안돼요라고 말할 때부터 어리석고 저주받은 모든 남자의 불행이 예감되긴 했고, 정말 일어 터지고 말았다. 이젠 죽었구나. 딱 걸렸네. 그것도 남장한 연인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두 번째 문장에서는 이 작은 책으로 세상에 많은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 셰익스피어의 의지가 엿보인다. 셰익스피어의 책이니 절대 작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문장은 선한 것을 이 무례한 세상에 넓게 펼치자는 것인데, 무엇이 선한 것일까?
무엇이 선인지의 문제 이전에 부딪히는 의문이 있다. <베니스의 상인>을 다읽고 해설을 읽으면, 독자가 굉장히 어려워했던 문제를 해설도 똑같이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주인공이지?" 모두가 어중간하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곤경에 처한 앤토니오가 주인공이기에는 너무 싱겁다. 돈 빌려주고 샤일록을 멸시한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다. 좀 극적인 것을 그래도 찾아보면 몇 줄로 나오는 그의 상선이 난파한 것 정도. 앤토니오에게 돈을 빌리고 사랑을 얻은 바싸니오는 별로 귀감을 주기 힘들다. 젊을 때 흥청망청 잘 놀다 좋은 친구 덕에 포오셔에게 갈 여비와 선물 살 돈을 얻었고, 상자 찍기를 잘해서 포오셔와 결혼하게 될 행운을 누리지만 칠칠찮다. 반지도 줘버렸고. 포오셔는 주인공이 되기에는 등장 횟수가 많지 않고 셰익스피어 자체가 여자를 아주 비중 있는 인물로는 두지만, 주인공으로는 잘 삼지 않는다고 한다. 돈에만 눈이 먼 유대인 샤일록일까? 돈을 빌려주고 이자로 큰돈을 벌었다고 온갖 멸시를 당하고 그 복수를 꿈꾸지만, 그 살 1파운드만 사람에게서 잘라내는 것은 현대의 첨단 기술로도 어림없어 결국 재판에서 대패하고 재산까지 몰수당하는 이 사람일까? 그 외 친구들은? 강남 따라 가기 좋아하는 친구들뿐이다.
주인공은 모르겠지만, 다시 '선'이 무엇인지로 돌아와 보자. 전하려는 바는 다음과 같음을 두 번 정도 생각에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이 극에서 기독교인들을 위선자들로 그리는 한편 박해받는 유대인, 인정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강심장의 샤일록을 오히려 연민을 갖고 그렸다고 볼 수 있다.
<베니스의 상인> p228
셰익스피어가 유대인이라면 몰인정한 고리대금업자로 정의되던 자신의 시대의 보편화된 유대인상을 도외시할 수는 없었을 것임을 고려해보면, 기독교인들과 유대인에 대한 이와 같은 주장은 가히 진취적이고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베니스의 상인> p230
다수가 편견에 사로잡혀 극소수인 유대인 샤일록을 매도하고, 그의 절규와 같은 계약 이행 또한 도리어 화가 되어 샤일록은 파산하게 되지만, 그 모습이 권선징악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앤토니오도 바싸니오도 그리고 그들의 모든 친구도 당당하게 그 승리의 주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모두를 구한 포우셔가 통쾌하게 재판을 이기지만, 결국 그 '반지'로 그녀는 씁쓸함을 느꼈고, 바싸니오도 앤토니오도 담백하지 않으며 비굴해 보일 뿐이다. 그런 것들이 결말 자체를 희석해주며 비열해 보이는 샤일록을 가련하게 보이게 한다.
그래서 또 한 번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