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경제신문>에 실으려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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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날마다 먹는 밥



  우리들은 누구나 날마다 밥을 먹습니다. 밥은 쌀밥일 수 있고 보리밥일 수 있습니다. 죽을 밥으로 삼을 수 있고, 풀물(풀을 짜서 얻은 물)을 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고기를 밥으로 삼거나, 막걸리를 밥으로 삼기도 합니다. 빵이나 과자나 케익이나 피자나 햄버거를 밥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입으로 이것저것 넣어서 기운을 얻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으로 날마다 새롭게 힘을 내어 살아갑니다. 날마다 먹는 밥은 날마다 새롭게 내 몸을 이룹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한테서는 고기 냄새가 납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한테서는 술 냄새가 납니다. 밥을 먹는 사람한테서는 밥 냄새가 나고, 풀을 먹는 사람한테서는 풀 냄새가 나요. 먹는 대로 몸을 이루니, 먹는 대로 몸내음이 됩니다. 그리고, 먹는 대로 똥과 오줌이 되어 밖으로 나와요.


  어떤 밥을 먹느냐에 따라 몸이 달라집니다. 몸이 달라지는 만큼 마음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달라지는 만큼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만큼 삶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아무것이나 먹지 않습니다. 먹는 대로 스스로 몸과 마음과 생각과 삶을 이루니까, 아무것이나 먹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가고 싶은 대로 밥을 찾아서 먹습니다.


  꾸역꾸역 밥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지로 밥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골을 내거나 짜증을 부리면서 밥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허둥지둥 밥을 먹거나, 왁자지껄 어수선한 데에서 얼이 빠지면서 밥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따순 손길로 지은 밥을 고맙게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즐겁게 지은 밥을 노래하며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쁘게 지은 밥을 도란도란 어울리면서 깔깔 호호 이야기꽃 피우면서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밥은 우리 몸을 이룹니다. 그리고, 밥을 짓는 손길이 우리 마음을 이룹니다. 여기에, 밥을 먹는 매무새가 우리 생각을 이룹니다.


  일본에서 만화상을 받은 《동물의 왕국》(학산문화사 옮김)이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모두 열네 권으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라이쿠 마코토라는 분이 그린 만화책입니다. 《동물의 왕국》 12권을 보면 여러모로 재미난 말이 나옵니다. ‘밥’과 ‘삶’이 얽힌 이야기가 곳곳에 있어요. 이를테면, “난 새끼 죽이기가 왜 있는 걸까 고민하다, 깨달았어. 먹이 수가 제한되어 있으니, 살 수 있는 새끼 수도 제한되고, 결국 사자끼리 서로 죽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된 거야(78∼79쪽).”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자가 서로 죽여야 하는 까닭은 먹이(밥)가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그렇겠네요. 그러면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도 서로 죽이고 죽어요. 아무래도, 사람이든 사자이든 밥(먹이)이 모자라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느낍니다. 밥이 넉넉하다면 사람이나 사자가 싸우거나 서로 죽여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밥이 넉넉하니, 나라와 나라가 서로 밥을 나누면 돼요. 굳이 국경선을 쇠가시울타리로 세워야 하지 않습니다. 정치나 사회나 경제 얼거리가 다르대서 남북녘처럼 총부리를 맞대고 다투어야 하지 않아요. 나누거나 주고받으면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 나누려고 하는 나라나 사회나 문화라 한다면 싸움이 없고 전쟁무기가 없습니다. 서로 나누려고 하는 곳에서는 죽임이 없습니다. 서로 나누려고 하는 곳에서는 늘 ‘삶’이 있어요. 삶을 아끼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을 꽃피우려는 ‘마음’이 있어요.


  만화책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곱씹습니다. “친구라 여겼던 주위 녀석들은 모두 텅 빈 껍데기였고, 마음이 담긴 대화라곤 할 수 없었어. 풀이며 나무, 탑 외의 동물들은, 모두 ‘살아 있다’는 느낌으로 빛나는데(119쪽).” 이러한 이야기는 만화책에서만 나옴직한 이야기라고 느끼지 않아요. 우리는 서로 이웃이요 동무라고 하지만, ‘지구별 이웃’이나 ‘지구별 동무’라고 하지만, 정작 서로를 겨누는 전쟁무기를 거두지 않아요. 자꾸 더 많은 전쟁무기를 과학자가 만듭니다. 자꾸 더 새로운 전쟁무기를 기술자가 만듭니다. 우리들도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거리를 얻고, 젊은이를 군대로 보내어 ‘사람 죽이는 훈련’을 시킵니다.


  군대에서 전쟁무기를 손에 쥔 젊은이가 배우는 것은 오직 ‘전쟁 훈련’입니다. 군대에서는 사랑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학교에서도 삶이나 사랑을 가르치지 않아요. 한국에서는 초·중·고등학교 모두 입시지옥입니다. 그냥 입시학원이 아닌 입시‘지옥’이에요. 동무끼리 밟고 올라서도록 부추기는 학교 얼거리입니다.


  한국은 지구별에서 ‘학생 자살률’이 가장 높습니다. 다른 어느 나라도 따라오지 못할 ‘학생 자살률 1위’인 곳이 한국입니다. 브라질에서 벌어진 축구잔치에 마음을 쏟을 한국이 아니라, 입시지옥 때문에 아픈 아이들을 바라보아야 할 한국입니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을 나라로 가꾸어야 하고, 아이들이 전쟁무기에 시달리지 않을 사회로 일구어야 하며, 아이들이 꿈과 사랑으로 삶을 짓도록 이끌어야 해요.


  만화책에서 흐르는 “죽음을 주지 말라고 하지만, 정작 너희는 생물을 죽이고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잖아? 식물을 포함해 너희는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이며 살아왔지? 생명을 빼앗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몸으로 어째서 나의 대량학살이 정상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163쪽)?”와 같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되읽습니다. 우리는 늘 밥을 먹습니다. 밥은 언제나 목숨입니다. 쌀과 보리도 목숨입니다. 능금과 배와 수박과 포도도 목숨입니다. 배추와 무와 당근도 목숨입니다. 소와 돼지와 닭도 목숨이에요. 빵이 되는 밀가루도, 밀알이요 목숨입니다.


  목숨 아닌 밥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목숨을 먹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왜 다른 목숨을 먹으면서 내 목숨을 지킬까요. 언제나 다른 목숨을 먹어야 하다 보니,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어깨동무하는 길보다는 서로 괴롭히거나 다투거나 빼앗는 길로 나아갈밖에 없을까요. 다른 목숨을 먹더라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보살피는 마음을 지킬 수는 없는가요.


  날마다 먹는 밥으로 날마다 새 하루를 짓습니다. 날마다 밥을 비롯해서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물을 마십니다. 새롭게 흐르는 바람이 있기에 바람을 먹으면서 숨을 쉽니다. 새롭게 흐르는 물이 있어 물을 먹으면서 몸을 싱그럽게 움직입니다.


  밥 한 숟가락을 나누면 밥 한 그릇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밥 한 술을 덜어 이웃과 나누면 서로 배부릅니다. 그러나, 이웃 밥그릇에서 밥 한 술을 가로챈다면? 이웃은 굶지만 나는 두 그릇을 먹는다면? 사랑과 평화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지만, 전쟁과 지옥 또한 늘 우리 곁에 머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아름다운 목숨이 될까요. 4347.6.29.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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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나무와 함께



  자리공이라는 풀이 있습니다. 자리공이라는 풀은 나무처럼 쑥쑥 자랍니다. 어쩌면, 자리공은 나무라고도 할 만합니다. 유월에 만난 자리공‘풀’은 어른인 제 키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자리공‘풀’ 앞에 서면 그야말로 작습니다. 제법 자란 나무와 같은 키입니다.


  자리공이라는 풀은 언제부터 이 땅에서 살았을까요. 자리공이라는 풀 가운데 ‘미국자리공’은 왜 이 나라에 들어와서 들과 숲에 퍼질까요.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이 나라가 아름답다면 자리공이라는 풀은 이 땅에서 자랄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아름답게 지으면 자리공이라는 풀은 더 퍼질 수 없습니다.


  자리공을 베거나 뿌리를 뽑는다고 해서 이 풀이 안 나지 않습니다. 자리공을 불사르거나 농약을 뿌린대서 이 풀이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리공은 ‘제 힘과 빛을 잃어 망가진 흙’ 을 삶터로 삼아서 돋거든요. 제 힘을 못 내는 흙인데 자리공이 돋았대서 뽑는들 사라지지 않아요. 이를테면, 제 빛을 잃은 흙에서 돋는 달걀꽃(또는 개망초)을 아무리 뽑는들 달걀꽃이 안 돋지 않습니다. 제 힘이 사라진 메마른 흙에서 돋는 쇠비름을 아무리 걷어낸들 쇠비름이 안 돋지 않아요.


  이제 우리들은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리공이 돋은 까닭은 따로 있으니, 왜 자리공이 돋는지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자리공은 흙이 망가진 곳, ‘어려운 말’로 하자면 생태계 균형이 무너진 곳에서 돋습니다. 막개발과 도시문명을 일으킨다면서 흙과 물과 풀과 나무를 더럽히거나 들쑤시기에 자리공 같은 풀이 들어와서 돋습니다. 이 나라 흙과 물과 풀과 나무가 정갈하거나 아름답다면, 제아무리 이웃나라에서 자리공 씨앗이 훨훨 날거나 새똥을 타고 들어온다 한들 뿌리조차 내리지 못해요.


  풀을 제대로 보고, 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풀을 제대로 볼 때에, 풀을 제대로 압니다. 풀을 제대로 보면서 알 때에는 흙을 제대로 보면서 알 수 있어요. 풀과 흙을 제대로 보면서 안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을 어떻게 가꿀 때에 환하게 빛나는가를 스스로 깨달을 만합니다.


  1970년부터 이 땅에 몰아닥친 ‘새마을운동’이 있어요. 새마을운동은 이 나라 삶터를 와장창 무너뜨렸습니다. 수천 해뿐 아니라 수만 해를 이은 아름다운 ‘풀 지붕’을 없앤 새마을운동입니다. 수천 해뿐 아니라 수만 해에 걸쳐(아마 수억 해나 수조 해에 걸쳐) 이 땅에는 쓰레기가 없었지만, 새마을운동은 고작 하루만에 쓰레기를 만들었습니다. 풀로 이은 지붕을 석면(슬레트)으로 갈아치우도록 하면서, 이 석면이 엄청난 쓰레기가 됩니다. 스스로 돋은 뒤 시들어 죽는 풀을 거름으로 삼던 시골 흙일이었으나, 시골에 농약과 비료를 쓰도록 내몰면서, 엄청난 농약병과 비료푸대를 쓰레기로 만들었고, 농약과 비료로 흙을 망가뜨렸습니다. 농기계를 시골마다 쓰도록 들볶으면서 ‘낡거나 망가진 농기계’가 시골마다 쓰레기로 남습니다. ‘박’으로 쓰던 바가지와 ‘풀잎’으로 엮던 바구니가 아닌 ‘플라스틱’으로 척척 찍은 바가지와 바구니와 온갖 그릇을 시골에서 쓰도록 들볶으면서, 시골은 온통 쓰레기밭으로 바뀝니다. 여기에다가 밭두둑마다 비닐을 덮어씌우도록 떠밀어 비닐쓰레기무덤과 비닐쓰레기언덕을 만들었어요. 새마을운동 깃발은 아직도 온 나라에서 펄럭입니다. 새마을운동을 똑바로 볼 줄 모른다면, 이 나라가 자꾸 망가지거나 무너지면서 자리공 같은 풀이 자꾸 돋는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을 뿐입니다.


  로렌스 스펜서라는 분이 엮은 《외계인 인터뷰》(아이커넥,2013)라는 책을 읽으면서 새마을운동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1970년대뿐 아니라 2010년대에도 멈추지 않는 새마을운동이 한국 사회를 꽁꽁 틀어막으면서 사람들 머리를 뒤흔듭니다. 사람들은 참거짓을 옳게 바라보지 못할 뿐 아니라, 제도권 틀에서 마치 노예처럼 길들기까지 합니다. 총리 후보가 된 사람은 일제강점기를 ‘식민지 제국주의자’와 같은 눈길로 보면서 막말을 퍼붓고, 교육부장관 후보가 된 사람은 이녁 후배가 쓴 논문을 훔쳐서 목돈을 가로채기도 했답니다.


  이런 일이 왜 자꾸 잇달을까요. 사람들 스스로 참거짓을 안 보기 때문이요, 참거짓 앞에서 참길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권력자와 지도자와 지식인만 탓할 수 있지 않아요.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거스르면서 참삶을 지키려 했다면, 새마을운동 깃발이 나부낄 때에도 석면(슬레트) 지붕을 거스를 뿐 아니라 농약과 비료와 비닐을 거스르면서 흙이 참빛으로 밝도록 해야 맞습니다.


  “나는 질문에 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를 안전하게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내 임무의 일부이기 때문에 나는 인류를 구성하고 있는 불멸의 영적 존재들의 안위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를 당신에게 제공할 것이고, 그것은 지구 환경과 모든 무수한 생명체의 생존을 도와줄 것입니다(96쪽).” 같은 대목을 읽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생각을 가슴에 품는가요? 지구별을 지키거나 아름답게 가꾸려는 생각을 품는가요? 돈만 많이 벌려는 생각을 품는가요? 경제개발은 지구별과 한국을 아름답게 북돋울까요? 핵발전소를 왜 아직도 안 멈추고, 밀양 같은 곳을 왜 송전탑으로 자꾸 괴롭힐까요?


  “사실상 물질은 퇴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물질은 형태를 바꿀 수는 있지만 절대로 파괴되지 않습니다(111쪽).” 같은 대목을 읽습니다. 그렇지요. 물질은 없어지지 않아요. 늘 그대로 있어요. 우리가 쓰레기를 만들면 이 땅은 온통 쓰레기투성이가 돼요. 우리가 사랑을 지으면 이 땅은 온통 사랑으로 가득해요. 우리가 이 나라에 숲을 가꾸면서 돌보면,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도 푸른 바람이 불면서 새와 풀벌레가 싱그럽게 노래할 테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까르르 웃고 어깨동무하는 삶을 이룹니다.


  똥을 눌 적에 잘 보셔요. 바라보셔요. 고기를 먹은 날은 똥에서 고기 냄새가 나요. 풀을 먹은 날은 똥에서 풀 냄새가 나요. 꽃을 먹으면? 꽃을 먹으면 참말 똥에서 꽃빛과 꽃내음 그득 흘러요. 밥은 늘 우리 몸을 이루는 빛이면서 숨결이에요.


  “그 이전에 제작된 어떤 생명체도 외부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은 햇빛, 무기질, 식물성 물질만을 소비했지 음식으로 다른 동물을 먹는 일은 없었습니다(195쪽).” 같은 대목을 읽다가 책을 가만히 덮습니다. 우리가 해와 바람으로 넉넉히 우리 목숨을 건사할 수 있다면 우리 몸이 어떻게 될는지 그려 봅니다. 아, 바람을 먹고 산다면 우리는 바람이 되어 훨훨 하늘을 날겠네요. 해를 먹고 산다면 우리는 해가 되어 언제나 따스한 넋이 되겠네요. 나무와 함께 살며 나무를 닮고 나무처럼 우뚝 서는 숨결이라면, 우리는 늘 아름답고 푸르면서 사랑스러운 ‘참사람’이 되겠네요. 4347.6.1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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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언제나 곧게 잇는 삶



  오늘날 시골에서 삼월이 되면 무엇을 할까요? 사월이 되거나 오월이 되면, 또 유월이 되거나 칠월이 되면 무엇을 할까요?


  오늘날 시골에서 나고 자라는 분이라면, 또 오늘날 시골에서 늙은 어매와 아배가 흙일을 하는 분이라면, 달마다 무엇을 하는지 알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시골에서는 다달이 그 달에 맞게 ‘농약을 골라서 뿌립’니다. 일본 영화 〈기적의 사과〉를 보면, 일본에서는 능금밭마다 헛간에 ‘달마다 뿌릴 농약 일람표’를 붙이고는 이대로 척척 농약을 뿌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굳이 일본 영화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다 알 만합니다. 한국에서도 능금밭이건 배밭이건 포도밭이건 달마다 뿌리는 농약이 골고루 있어요. 어느 열매는 스물 몇 가지 농약을 친다 하고, 줄이고 줄여도 열 몇 가지 농약을 쳐야 한다고도 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우리가 먹는 열매는 능금이나 배나 포도는 아니지 싶어요. 우리가 먹는 알맹이는 딸기나 수박이나 참외가 아니지 싶어요. 우리는 온갖 농약을 먹고, 갖가지 항생제를 먹으며, 수많은 비료를 먹는구나 싶어요.


  유월로 접어든 시골에서는 모내기로 바쁩니다. 그러나 ‘모내기가 바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시골에서는 손모를 내지 않고 기계모를 내기 때문입니다. 모를 심는 기계를 타는 일꾼하고 ‘모심개(이앙기)’라는 기계만 바쁩니다. 기계로 논을 갈고, 기계로 논을 삶으며, 기계로 모를 심는 오늘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시골에서는 오월이든 유월이든 논노래를 듣지 못합니다. 오늘날 시골에서는 오월과 유월에 귀가 찢어지도록 시끄러운 기계 소리만 듣습니다. 게다가 시골 할배는 으레 경운기를 몹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어서 들일을 가는 시골 할배는 아주 드물어요. 소를 몰며 들일을 하려는 시골 할배는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도날드 홀 님이 쓴 글에 바바라 쿠니 님이 그림을 그린 《달구지를 끌고》(비룡소,1997)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97년에 나왔고, 미국에서는 1979년에 나왔습니다. 이 그림책은 지난날 미국 시골에서 ‘시골사람’이 달마다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를테면, “4월에 농부가 깎아 두었던 양털 한 자루. 농부의 아내가 베틀로 짠 숄. 4월에 농부가 깎은 양털을 물레에 자아 털실을 만들고, 그것을 베틀에 짠 숄이지(4쪽).” 하고 이야기해요.


  그림책 《달구지를 끌고》는 책이름 그대로, 깊디깊은 숲속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 가운데 ‘아버지’가 달구지에 짐을 잔뜩 싣고 도시로 물건을 팔러 다녀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네 식구는 한겨울에는 단풍나무 단물을 얻어서 졸이고, 삼월부터 시월까지 바지런히 온갖 일을 합니다. 달에 맞는 일을 합니다. 철에 맞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네 식구는 일을 하며 힘들다거나 고되다거나 지겹다고 여기지 않아요. 그저 이녁 스스로 삶을 누립니다.


  먹을 만큼 거둡니다. 먹고 남는 것을 달구지에 싣고 도시에 내다 팝니다. 가만히 따지면, 숲집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는 굳이 도시에 가지 않아도 돼요. 열흘에 걸쳐 천천히 걸어서 도시로 가고, 다시 열흘에 걸쳐 천천히 걸어서 시골 숲집으로 돌아오는데, 도시에서 사오는 물건이란 기껏 ‘사탕 한 꾸러미’입니다. 무쇠솥 한 벌, 주머니칼 하나, 바늘 몇을 더 장만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굳이 도시까지 나가서 사지 않더라도 시골 숲집에서 스스로 만들 수 있습니다.


  “농부의 가족 모두가 만든 양초. 아마 섬유로 짠 리넨 천. 농부가 직접 쪼갠 널빤지. 농부의 아들이 부엌칼로 깎아 만든 자작나무 빗자루(6쪽).”를 달구지에 싣고 나가서 판다고 해요. 농사꾼 아저씨는 도시로 나가서 달구지에다가 소까지 모두 팔고 맨몸으로 돌아온다고 해요.


  아하, 그렇군요. 어린 소가 자라니 늙은 소는 도시에 파는 셈이로군요. 시골살이에 알맞게 살림을 줄인 셈이로군요. 숲살이에 걸맞게 살림을 도시 이웃한테 나누어 준 셈이로군요.


  도시에서 지내는 사람은 ‘단풍나무 단물’을 손수 졸여서 먹을 수 없습니다. 도시에는 나무도 없고 나무를 벨 수도 없으니, 시골사람이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은 널빤지를 사야 합니다. 도시에서는 양배추나 감자를 심을 땅이 없으니, 시골사람이 심어서 거둔 양배추나 감자를 사다가 먹어야 합니다.


  참말 도시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참말 도시사람은 시골사람 없이 어떻게 먹고살는지 궁금합니다. 시골에서 시골사람이 흙을 일구어 곡식과 열매를 거두지 않으면, 도시사람은 모조리 굶겠지요. 대통령도 굶고 시장도 굶어요. 공무원도 굶고 회사원도 굶어요. 의사도 판사도 교수도 학자도 기자도 모두 굶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아무리 내로라하고 으쓱거린다 하더라도, 시골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밥을 안 먹고 살 수 있는 도시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오늘날 한국은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서 시골지기는 어떤 대접을 받고, 한국에서 도시지기는 어떤 곳에 우뚝 서서 시골지기를 내려다보거나 깔보는지 헤아려 봅니다.


  한국에서 정치를 하는 이들은 시골지기한테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자유무역협정을 맺습니다. 한국에서 행정을 하는 이들은 시골지기한테 한 마디도 듣지 않고 쌀값을 세우고 농협을 거쳐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거두어들입니다. 한국에서 경제개발을 하는 이들은 시골지기한테 한 마디도 여쭙지 않고 4대강사업을 밀어붙입니다.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할는지요. 경제성장은 얼마나 해야 할는지요. 공장은 얼마나 지어야 할는지요. 고속도로와 발전소는 언제까지 늘려야 할는지요. 왜 자꾸 아파트만 때려지어야 할는지요.


  언제나 곧게 잇는 삶이 아니라면, 삶빛이 피어나지 못합니다. 날마다 새로우면서 언제나 곧게 잇는 삶이 아니라면, 삶꽃이 돋아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람을 마십니다. 우리는 모두 물을 들이켭니다. 우리는 저마다 밥을 먹습니다. 우리는 늘 햇볕을 쬡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나 흙을 밟습니다. 그렇지만, 학교와 사회와 방송과 인터넷과 책에서는 ‘바람·물·밥·해·흙’을 옳게 보여주거나 바르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스스로 어떤 삶을 일구면서 아이들한테 어떤 꿈을 물려주는지 아리송합니다.


  “3월이 되자, 농부의 가족은 단풍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끓이 끓여 졸여서 단풍나무 설탕을 만들었어(32쪽).” 하고 이야기하는 그림책을 살며시 덮습니다. 우리는 삼월에 하는 일과 유월에 하는 일을 얼마나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4347.6.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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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함께 이야기하는 하루



  《내가 라면을 먹을 때》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책이 있습니다. 하세가와 요시후미라는 일본사람이 빚은 그림책인데, 일본에 있는 여느 집에서 지내는 아이가 라면을 한 그릇 끓여서 먹을 적에, 이웃집 아이는 무엇을 하고, 또 이웃집 아이는 무엇을 하며, 또 이웃집 아이는 무엇을 한다고 찬찬히 보여줍니다. 이러다가,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한국에 있는 ‘이웃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러고는, 다른 나라 ‘이웃 아이’는 그무렵 무엇을 하는지 보여줘요. 그러고 나서 다른 나라 ‘이웃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이웃과 이웃을 보여주는 그림은 어느새 전쟁난민이 모인 마을에 있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그러고는 전쟁터에서 어른이 쏜 총에 맞아서 거친 벌판에 자빠져 죽은 아이를 보여주어요.


  라면을 먹는 아이는 전쟁난민마을이 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비데에 앉은 아이나 바이올린을 켜는 아이나 야구를 하는 아이도 전쟁난민마을을 모를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 자전거를 몰며 신문을 돌리는 아이, 동생을 업은 아이, 학원에 다니는 아이, 집에서 컴퓨터게임을 하는 아이, 이런 아이 저런 아이 모두 전쟁난민마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 할 수 있어요. 더더구나 어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어른이 쏜 총에 맞거나 어른이 퍼부은 폭탄에 맞아 죽은 아이가 이웃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할 수 있습니다.


  죽는 사람은 아이뿐 아닙니다. 어른도 죽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죽습니다. 게다가 슬픈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 죽기만 하지 않아요. 어른들이 만든 입시지옥 때문에 한국에서는 해마다 수백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거의 안 나오지만, 참 많은 아이들이 입시지옥 때문에 마음앓이를 하다가 죽어요.


  우리 어른들은 왜 입시지옥을 그대로 둘까요? 우리 어른들은 왜 아이들을 대학교에 보내려 할까요? 우리 집 아이가 대학교에 붙으면 기뻐해야 할까요? 이웃집 아이가 대학교에 떨어지면 반겨야 할까요? 우리 집 아이가 대학교에 붙으려면 이웃집 아이는 대학교에 떨어져야 합니다. 대학교육을 받아야 한다면 모든 아이가 골고루 받을 수 있어야 올바른 일 아닌가 궁금합니다. 아주 마땅하거든요. 모든 사람은 똑같이 밥을 먹어야지요. 누구는 밥을 두 그릇 먹고, 누구는 굶을 수 없어요. 모든 사람은 똑같이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마시며 물을 먹어야 합니다. 돈이 많거나 얼굴이 예쁜 사람은 햇볕을 더 쬐어도 되지 않습니다. 모든 어른과 아이가 햇볕과 바람과 물을 똑같이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문구 님은 소설을 쓰다가 동시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개구쟁이 산복이》라는 동시집을 1988년에 선보였고, 2003년에 숨을 거두고 나서 《산에는 산새 물에는 물새》라는 동시집을 새롭게 선보였어요. 이문구 님은 1988년에는 이녁 딸과 아들한테 들려줄 노래로 동시를 썼어요. 2003년에 숨을 거두고 나서 태어난 동시집은 이녁 손자한테 들려줄 노래로 동시를 썼다고 합니다.


  “내가 겨우내 꽁꽁 언 채 / 눈으로 목을 축이며 / 밭에서 견디는 것은 / 내년 봄에 / 노랑 물감 같은 / 장다리꽃을 피우기 위해서지요(씨도리 배추).”와 같이 흐르는 동시를 읽으며 곰곰이 생각을 기울입니다. 도시에 있는 아이들은 김치를 먹어도, 김치가 배추에서 온 줄, 또는 무나 갓에서 온 줄 모르기 일쑤입니다. 또, 배추나 무를 먹더라도 배추꽃이나 무꽃, 그러니까 장다리꽃이 무엇인지 모르기 일쑤요, 배추나 무에도 꽃이 피는 줄 모르기 일쑤예요.


  도시에서 지내는 어른은 얼마나 알까요? 도시에서 가게나 마트에만 다니는 어른은 노랗게 피는 배추꽃을 얼마나 알까요? 아니, 생각을 할까요? 들은 적이 있을까요? 무밭이나 배추밭을 지나가다가 꽃송이를 알아보고 기뻐할 줄 알까요? 장다리꽃은 유채꽃처럼 해사하게 노란 빛물결인 줄 마음속으로 그릴 수 있을까요?


  “들비둘기가 길에서 / 집비둘기를 보고 중얼거렸네 // 쟤들을 보면 안됐어. / 우리는 맑은 공기 깨끗한 물 / 산과 들이 온통 우리 차진데 / 쟤들은 집이 좁아 한뎃잠에 / 이 눈치 저 눈치 눈치꾸러기 / 매연에 찌든 꾀죄죄한 몰골로 / 쓰레기통 수챗구멍까지 뒤져 먹어서 / 비만증으로 어기적어기적 / 자동차 등쌀에 아차 할 때도 많고 / 보면 볼수록 영 안됐어(두 비둘기).”와 같이 흐르는 동시를 읽으며 새삼스레 생각을 기울입니다. 도시에서 지내는 집비둘기는 얼마나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시골마을 숲에서 지내는 들비둘기(멧비둘기)는 얼마나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도시에 있는 비둘기는 왜 도시에서 억척스레 살려 할까요. 도시 비둘기는 왜 시골로 떠나지 않을까요.


  새는 날개가 있으니 얼마든지 도시를 벗어나 갑갑하거나 메마른 터전을 등질 수 있어요. 느긋하고 아름다우며 푸른 숲에서 마음껏 살아갈 만해요.


  그런데 말예요, 다시 생각해 보면, 도시라 해서 처음부터 도시이지 않아요. 오늘날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구이든, 처음부터 이렇게 커다랗거나 어마어마하거나 무시무시한 도시가 아니었어요. 쉰 해 앞서를 떠올려 보셔요. 백 해 앞서를 그려 보셔요. 서울이건 부산이건 지난날에는 수수하거나 투박한 시골이었습니다. 서울도 부산도 수수하면서 투박한 마을이었습니다. 제비가 날고 박쥐도 있으며, 잠자리와 나비가 흐드러지던 시골마을이었어요.


  비둘기로서는 서울이 먼먼 옛날부터 이녁 어미 새가 태어나 살던 보금자리였다고 할 만합니다. 참새와 직박구리도 그래요. 도시를 떠나지 않는 새들, 아니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새들을 보면, 아무래도 이 새들은 이녁 어미 새가 먼먼 옛날부터 살던 보금자리를 차마 못 떠나고 그대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아닐까 싶곤 합니다.


  도시를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골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시에서 너무 고달프거나 괴롭기에 맑으며 푸른 숨결을 먹으려고 시골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돈벌이가 안 되어 숨구멍을 트려고 서울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어디가 고향일 될는지요. 우리는 어디를 고향으로 삼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지요. 우리 이웃은 누구일까요. 우리는 곁에 어떤 이웃을 두는가요. 우리는 이웃집 살림을 얼마나 읽거나 헤아리는가요. 나는 우리 이웃한테 어떤 사랑이나 꿈으로 깃드는가요.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사람이 이웃입니다. 함께 웃고 춤추는 사람이 이웃입니다. 함께 아끼고 보살피는 따사로운 손길이기에 이웃입니다. 함께 꿈꾸고 삶을 짓기에 이웃입니다. 4347.5.2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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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숲 시골빛 삶노래
― 꽃이 피는 달


  삼월에는 삼월꽃이 핍니다. 사월에는 사월꽃이 핍니다. 오월에는 오월꽃이 피어요. 그리고 유월에는 유월꽃이 피어요. 그러면 칠월에도 꽃이 필까요? 그럼요, 칠월에도 꽃이 핍니다. 팔월에는 어떤 꽃이 필까요? 팔월에도 온갖 꽃이 피는데, 팔월꽃 가운데 가장 눈부신 꽃이라면 아무래도 벼꽃이지 싶어요. 한겨레가 아침저녁으로 먹는 쌀밥이 되어 주는 벼알에 돋는 벼꽃이 있어요.

  오월에 찔레꽃이 핍니다. 찔레꽃이 피는 옆으로 들딸기와 멧딸기가 익습니다. 하얀 꽃빛과 빨간 알빛이 사랑스레 어우러집니다. 딸기넝쿨에 돋은 가시에 긁히고 찔레나무에 돋은 가시에 찔리면서 딸기알을 톡톡 땁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찔레꽃이 피고 딸기알이 굵는 오월은 보릿고개입니다. 오월 들판을 바라보면 보리알이 굵지만 아직 익지는 않아요. 오월 끝무렵이나 유월이 되어야 비로소 보리를 거둘 테니, 찔레와 딸기는 배고픈 아이와 어른 모두한테 고마운 들밥이 되었으리라 느껴요.

  오월에 피는 여러 가지 꽃 가운데 감자꽃이 있습니다. 감자를 느즈막하게 심었으면 유월에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뉴월에 피어나는 감자꽃이라고 할 만해요. 일찍 심으면 오월꽃으로 만나고, 늦게 심으면 유월꽃으로 마주합니다.

  동시집 《감자꽃》(창비,1995)을 읽어 봅니다.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감자꽃).” 하고 노래하는 이야기가 깃든 동시집입니다. 《감자꽃》이라는 동시집을 내놓은 분은 권태응 님이고, 1918년에 태어나 1951년에 숨을 거둡니다. 일제강점기에 독서회 일로 붙잡혀 한 해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고, 감옥에서 폐결핵에 걸려 옥살이를 마친 뒤에도 몸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그예 서른네 살 나이로 일찌감치 흙으로 돌아갑니다.

  권태응 님은 아픈 몸으로 동시를 썼어요. “키가 너무 높으면, / 아기들 올라가다 떨어질까 봐, / 키 작은 땅감나무 되었답니다(땅감나무).” 하는 노래를 아픈 몸으로 꾹꾹 눌러서 썼어요.

  어떤 마음일까요. 아픈 몸으로 쓰는 동시 한 줄은 어떤 마음이 깃든 노래일까요. 어떤 꿈일까요. 아픈 몸이지만 씩씩하게 쓰고 또 쓴 동시 한 줄은 어떤 꿈이 담긴 사랑일까요.

  “영남에 살아도 우리 동무. / 평안에 살아도 우리 동무(우리 동무).” 같은 노래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노래는 동시라는 이름이 붙으니 동시라고 할 테지만, 동시이기 앞서 시입니다. 동시나 (어른)시라고 하기 앞서 노래입니다. 노래라고 하기 앞서 삶이고 사랑입니다.

  해방 언저리와 한국전쟁 앞뒤로는 ‘영남과 평안’을 말할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그무렵 우리 겨레는 남녘과 북녘으로 갈린 채 다투어야 했거든요. 그러나, 남북으로 갈린 채 다툰 이는 시골사람이 아닙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던 사람은 서로 다투지 않아요.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다툽니다. 총을 든 군인이 다툽니다. 칼을 찬 경찰이 다툽니다. 머리띠를 두른 지식인이 다툽니다.

  왜 남녘과 북녘으로 갈라서 다투어야 할까요? 남녘과 북녘으로 갈라서 다투니, 남녘은 남녘대로 영남과 호남으로 또 갈라서 다투는 틀이 생기지 않을까요. 북녘에서도 평안과 함경으로 또 갈라서 다투는 틀이 생기지 않나요. 남녘과 북녘으로 갈라서 다툰다면, 한국과 중국과 일본으로 갈라서 다시금 다투어야 합니다. 지구별에 평화가 아닌 전쟁만 감돕니다.

  “북쪽 동무들아 / 어찌 지내니? / 겨울도 한 발 먼저 찾아왔겠지. // 먹고 입는 걱정들은 / 하지 않니? / 즐겁게 공부하고 / 잘들 노니(북쪽 동무들)?” 하고 부르는 노래를 생각합니다. 참말 이러한 이야기를 동시로뿐 아니라 노래로 부르면서 생각합니다. 겨울이 한 발 먼저 찾아오는 북쪽에서 살아가는 동무한테 마음을 씁니다. 봄이 한 발 먼저 찾아오는 남쪽에서 살아가는 동무한테 마음을 기울입니다. 서로 어깨동무할 삶에 마음을 둡니다.

  문학은 언제나 삶을 그립니다. 어른문학도 어린이문학도 언제나 삶을 그립니다. 서로 아름답게 살아갈 나날을 그리는 문학입니다. 함께 사랑하고 돌보며 어깨를 겯을 삶을 그리는 문학입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문학입니다. 오월에 오월꽃이 피어나듯, 오월에는 오월을 밝히는 숨결을 담는 문학입니다. 찔레꽃을 노래하고 감자꽃을 노래합니다. 고추꽃을 노래하고 오이꽃을 노래합니다. 감꽃을 노래하고 창포꽃이랑 붓꽃을 노래해요. 앙증맞도록 조그맣지만 올망졸망 돋는 돌나물 노란 꽃송이를 노래합니다.

  오월에는 장미꽃도 피어요. 소담스럽게 봉오리를 벌린 장미꽃을 노래하다가, 오월에 마지막으로 꽃송이 벌리면서 작은 꽃빛을 베푸는 봄까지꽃을 노래합니다. 봄까지꽃 옆에서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는 괭이밥꽃을 노래해요. 괭이밥꽃 곁에는 토끼풀꽃이 있습니다. 토끼풀꽃 둘레에는 또 무슨 꽃이 있을까요? 토끼풀꽃 둘레에서 피고 지는 들꽃을 얼마나 느끼거나 마주할 수 있는가요?

  동시집 《감자꽃》을 새롭게 읽습니다. 우리 집 일곱 살 아이는 곧잘 이 동시집을 펼쳐서 가락을 스스로 지어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사다리를 타고서 한층 두층 / 언니 따라 지붕에 올라갑니다. / 박덩이 뒹굴대는 한옆에다 / 빨강 고추 흰 박고지 널어 놓아요(가을 지붕).”와 같은 노래는 어떻게 부를 만할까 생각에 잠깁니다. 풀로 이은 지붕이기에 예부터 어느 시골마을에서나 박꽃을 보고 박알을 얻으며 박고지를 말립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이 훑고 지나간 시골마을 어디에나 풀지붕은 없습니다. 아직도 많이 남은 새마을운동 슬레트지붕입니다. 새마을운동은 멈추었어도 새마을 깃발은 오늘날에도 펄럭여, 시골집마다 시멘트기와지붕이며 양철지붕입니다. 슬레트와 시멘트와 양철로 얹은 지붕에는 박넝쿨이 뻗지 못하고, 박꽃이 피지 못하며, 박알을 맺지 못해요.

  오월은 달력에 적힌 숫자로 ‘5’이 아닙니다. 사월도 ‘4’이 아니고, 유월도 ‘6’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도 달력에 적힌 몇 월 몇 일이라는 숫자가 아닙니다. 새롭게 뜨는 해와 함께 밝게 흐르는 하루입니다. 새롭게 부는 바람과 함께 맑게 흐르는 하루입니다. 마음에 먼저 꽃이 필 적에 들과 숲과 길에서 피는 꽃을 알아봅니다. 마음에 먼저 사랑이 자랄 적에 이웃과 동무한테 사랑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마음에 먼저 웃음이 솟을 적에 아침을 웃음노래로 열고 저녁을 웃음빛으로 닫습니다.

  꽃이 피는 달에 꽃을 생각합니다. 열매가 맺는 달에 열매를 생각합니다. 개구리가 노래하는 날에 개구리를 생각하고, 아이들이 웃고 뛰노는 날에 아이들과 함께 얼크러집니다. 4347.5.1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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