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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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자는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 배운다.  

- 아이스퀼로스 <오레스테이아> 중에서 -  

  

 

    

  니체, 생애 마지막 10년  

한 중년의 남자가 마부로부터 가혹하게 채찍을 맞는 말을 끌어안고 광장 한가운데서 오열하고 있었다. 마부의 눈초리도, 웅성거리는 군중도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 남자는 친구들에 의해 정신병 요양소로 옮겨진다.  

정신병 요양소로 가게 된 그 중년 남자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 신은 죽었다 " 고 외친 남자는 이렇게 속세로부터 멀어져 갔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통해서 신에 의지했던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주인공, 즉 ' 위버멘쉬 ' (Uebermensch)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 위버멘쉬 ' 는 가치의 창조자로서 풍부하고 강력한 생(生)을 실현할 수 있는 ' 힘에의 의지 ' 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가 살았던 19세기에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자살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 신 ' 이라는 하나의 관념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시도를 해내게 된다.  니체에게서 신의 존재 부정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의지를 앗아가버린 모든 억압과 우상도 부정하는 것이다. 니체의 이 같은 선언은 인간의 개별적 주체성을 근간으로 한 20세기 실존철학의 전범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니체는 생애 마지막 10년은 자신을 둘러싼 두려움과 허무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했다.  평생을 질병에 시달렸고, 정신분열증에 걸려 사실상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았다.  10대 때부터 지독한 편두통을 호소했으며 왕성한 저작활동을 하던 3, 40대에는 극심한 조울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거대한 세계를 이해하고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이나 과학에 의존한다. 그러나 근원적인 지식의 토대를 파고든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때로 정신적인 부작용에 시달리곤 하였다.    

 

 

 

  러셀은 왜 미쳐버렸는가?  

현대 수학의 금자탑이라고 불리고 있는 <수학원리>를 집필한 논리학자 버트런드 러셀 역시 정신분열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치열했던 지적 여정을 만화로 소개하고 있는 <로지코믹스>의 서론에는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 왜 유독 논리학자는 정신병에 잘 걸릴까? ” 

앞에서 언급한 니체를 ' 논리학자 ' 로 규정되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 논리학 ' 이라는 학문 자체를 '철학 ' 과 비교해서 따져놓고 본다면  판단이나 개념의 내용이 진리인 것 같은 인식을 얻기 위한 사고의 경로나 그 형태를 이성적으로 연구한다는 점은 철학과 논리학은 서로 유사하다.  무엇보다도 논리학은 애초부터 철학에서 떨어져나온 한 핏줄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로부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논리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의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으며 그 후로 뛰어난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적 인식을 올바른 것으로 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논리학 대신 모두 제각기의 입장에서 특징있는 인식론적 논리학을 설정하였다.  

어쨌든 논리학자들이 보여주는 광기에 대한 이야기의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할 줄 아는 논리학자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 논리학자 ' 에 대한 인식과 정반대라서 흥미롭다.     

특히 ' 러셀 ' 이라고 하면 대중들 사이에서는 영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손꼽히고 있다.  <수학 원리>를 31살에 쓴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며 평생에 걸쳐 감옥도 두려워하지 않고 1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등을 반대한 반전 평화운동가이자 사회학자였다.  그런 그가 정신분열증의 고통에 남몰래 시달려야만 했던 것일까?    

 

   

 

  ' 확실성 ' 이라는 이상과 모순된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

러셀은 논리학을 통해 완전무결한 수학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평생을 바치게 된다. 처음에는 수학을 통해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 했던 러셀의 지적 욕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따분한 계산에만 열중하는 수학에 염증을 느끼게 되고  그 당시의 수학에 만족하지 못한 러셀은 본격적으로 철학에 열중하게 되고, 자신은 수학자가 아닌 논리학자라는 자각을 갖게 된다. 

러셀에게 논리학자라는 자각을 심어준 결정적인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라이프니츠였다.    

 

유클리드와의 첫 만남은 내 안에 씨가 뿌려진 것과 같았고 ,,,  라이프니츠의 꿈에 대해서 듣는 것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것과 같았다.  

- <로지코믹스> p 100 -

 

어린시절 러셀은 세상의 확실성을 부여하고 증명해줄 수 있는 학문을 유클리드의 기하학이라고 반견하게 되지만 점차적으로 수학의 확실성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되면서부터 라이프니츠의 논리학에 심취하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러셀보다 수백년 전부터 이미 철학에 확고한 토대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해서 탐구하였다.    

러셀에게 라이프니츠의 만남은 유년시절의 유클리드의 만남 못지 않게 자신의 지적 영역을 한층 더 확장될 수 있었던 전환점이 되었다.  젊은 니체가 헌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하게 되면서 ' 생(生)의 의지 ' 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부여되는,  예전부터 확신하고 지배하고 있었던 가치와 신념을 자신 스스로 타파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러셀은 수학을 연구하게 되면서 겪게 되는  ' 곤경 ' 을 처하게 되는데 마음 속 깊이 품은 목표, 즉 세계에 대한 확실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예전부터 확고히 서 있는 토대의 기본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지적의 여정 속에는  ' 정신적인 ' 위험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러셀이 활동하던 당시 ' 무한 ' 이라는 개념은 수많은 수학자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셀은 수학에서 위치하고 있는 무한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지만 무한이라는 개념 역시 수학의 허약한 내면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 관념 ' 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로지코믹스> p 143 

러셀의 꿈 속에서 ' 수학의 왕 ' 가우스가 나타나  

무한의 수학적인 토대를 무너뜨렸다고 꾸짖고 있다.
 

 

 


 

<로지코믹스> p 144,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은 오랫동안 확고히 세워져 있었던 하나의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수학자 가우스가 러셀의 꿈 속에 나타나는 장면은 관념적인 존재를 부정하려는 러셀이 겪게 되는 내적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부터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상의 믿음, 가치 등이 한순간에 변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예측불가능한 변화의 시류 속에 자신이 직접 동참하고 주도하는 것 역시 쉽지가 않은 일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이 학계로부터 제대로 인정받기까지 이 두 사람은 생전에 종교적인 핍박에 시달려야 했으며 니체 역시 신을 부정한다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종교로부터 배척과 오해를 받아야만 했다.  러셀 역시 당시 학계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학문적 신념의 틀을 깨부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 스스로도 그런 시도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내면 속에 존재하고 있던 ' 정신적인 ' 위험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나서야 화이트헤드와의 기나긴 공동 연구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는 <수학원리>를 완성하게 된다.  러셀은 평생 바치게 될 학문적 시도의 본격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일생 동안 천착해 온 무결점의 수학 원리는 끝내 도출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확실성의 진리에 이르는 왕도는 없다

학문의 가장 완벽한 기초, 토대를 찾기 위해서 수년동안에 걸쳐 오로지 수와 식, 기호로 가득찬 공식을 집착했던 러셀의 입장에서는 확실성의 토대에 대한 불확실성이라는 미제의 결론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여겼을 것이다.  영원하며 절대적인 확실성으로 이루어진 진리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러셀에게 오랜 논리학 연구를 통해서 남게 된 것은 정신적인 후유증, 그것이 바로 ' 확실하게 증명하고자 했던 ' 완벽한 실체에 대한 증명이 도출되지 못함에 대한 허무와 회의감뿐이었다.  그런 정신적인 공허감과 회의감 때문에 논리학자들은 정신분열증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러셀뿐만 아니라 확실한 토대의 논리를 추구하기 위해 시도했던 수학자, 논리학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프레게칸토어는 미쳐버렸고, 괴델은 우울증에 걸렸다. 그리고 러셀의 제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살하고 만다.    

그러나 이들 논리학자들의 광기를 향해서 손가락질할 이유가 없으며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남게 된 논리학의 토대에 대해서 쓸모 없는 연구에 불과한 실패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우리는 논리학자들의 말 못하는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런 말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다나오스의 딸들> 1904년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다나오스의 딸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결혼 첫날밤에 남편의 목을 베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서 지옥에서   

구멍 뚫린 물통에다 물을 부어 채워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논리학자들의 고통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다나오스의 딸들처럼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마찬가지다.  ' 토대를 이루는 체계에 토대가 없는 ' 아이러니한 상황을 견디면서 혹은 절대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 스스로 논리학의 광기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자처하였다. 

러셀은 ' 인간사에서의 논리의 역할 ' 이라는 강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강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진리에 이르는 왕도는 없다. "  

그리고 논리학에 완벽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면 오늘날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한 세상에서도 완벽한 확실성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결국에는 확실성의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는 수많은 현실의 딜레마에 마주하게 되는 우리 인간들이 요구되어지는 것은 최소한 두 세번,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사에서 논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이기도 하다.

이성적으로 여러번 판단하고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의 행동은 수많은 고민 끝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 행동하는 자는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 라고 말한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퀼로스의 격언처럼 우리는 사유를 통한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복잡하고 험난한 세상을 이해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창조적인 생의 의지이다.  

러셀과 수많은 논리학자들이 겪어야했던 고통과 비교하면 우리가 그동안 고수하고 있었던 삶의 가치와 신념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느끼게 되는 고통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결국 러셀은 확실성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토대를 찾기 위해서 스스로 ' 행동 ' 했으며 이를 위해서 ' 광기 ' 라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려면 뼈를 깎는 고통이 필요하고,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펭귄클래식코리아, p 159 -  


러셀이 추구했던 논리학의 토대 구축은 확실성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무모하면서도 감히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지성사에서 영원히 남게 될 도전이었다.  어떻게 보면 러셀이야말로 니체가 수백년 안에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한 그 ' 위버멘쉬 ' , 자기 손으로 자기가 믿고 있던 가치를 스스로 극복할 줄 아는 초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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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4-0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마녀고양이님 밑 댓글을 보고 한 번 들어와 봤는데 너무 재밌게 읽고 가네요. 니체도 그렇고 미쳐버린 사람들에게 유독 관심이 많은데 인간의 사유 끝에 결국 해결하지 못해 그런 광기 속으로 간다는 사실이 참 납득이 가네요. 독서력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확실성이란 것을 찾기 위해 필연적으로 광기로 간다는 말은 참 무섭네요. 자주 자주 들려서 많이 읽고 배우고 가겠습니다. 너무 감사해요. ^^

cyrus 2011-04-05 07: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루쉰님 ^^

노이에자이트님 서재에서 종종 보곤 했었는데 저야말로 아직 많이
배울게 많답니다. ^^;; 저도 님 서재 자주 들리겠습니다.

루쉰P 2011-04-05 13:00   좋아요 0 | URL
하하^^ 너무 겸손하시네요. 전 이렇게 꽉꽉 차 있는 리뷰를 너무나 좋아해요. 정말 생각하시며 리뷰를 쓰신다고 느껴요. 아! 전 언제쯤 그렇게 책과 나를 몰아일체로 만들 수 있을 지 고민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4-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역시나 생각거리가 많은 좋은 리뷰네요.
제가 한때 "세상에 정답이다, 누군가 이것은 정답이니 이 길로 가야한다'고 납득할만한 진리를 알려주면 좋겠다고 소원한 적이 있었어요. 정말 절실했죠. 아마 러셀이나 니체 모두 그런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우리는 다들 생의 의미를 찾는 방랑자가 아닐까요?

로지테라피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 역시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고 말했답니다. 그러나 그는 1980년대 후반에 자살하고 말아요. 나치 수용소에서 힘들게 살아남고서 말이예요. 저는 요즘 들어 실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답니다.

cyrus 2011-04-05 07:54   좋아요 0 | URL
프리모 레비라는 소설가 역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는데 끝내
자살했다죠,, 예전에 <죽음의 수용소에서>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실존에 대한 고민,, 쉽지 않은거 같아요. ^^;;

루쉰P 2011-04-05 12:59   좋아요 0 | URL
빅터 프랭클도 자살했군요. 프리모 레비의 경우 다 늙어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을 했는데 그 끔직한 상황을 이겨내고 죽은 것은 서경식 교수의 책을 읽은 저로서는 수용소보다 더 끔직한 것이 현실의 사람들 이었다는 점인 것 같은데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네요. 암튼 실존의 고민은 저도 쉽지가 않습니다.

blanca 2011-04-0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지코믹스가 만화였던 거예요! 어마나. 그리고 저 러셀이 정신분열증을 앓았던 것도 몰랐네요. 너무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군요. 니체는 참 개인적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cyrus 2011-04-06 09:18   좋아요 0 | URL
러셀의 사상과 무한론에 대한 소개의 내용은 좀 어려웠지만 그래도
만화라서 철학적인 내용을 소개한 도서치고는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좀 약간 과장한 감도 있었지만 정신분열증이라기보다는
정신이 불안정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

2011-04-07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8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undcake 2021-11-2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빅터 프랭클 자살하지 않았습니다.휴

poundcake 2021-11-24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로지테라피도 아니고 로고테라피입니다. 혹시나 제가 다른 사람을 말하고 있다면 죄송합니다.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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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박꾼 ' 도스또예프스끼   

<죄와 벌><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책 제목만 들어도 금방 떠올리게 되는 세계적인 작가, '도스또예프스끼' .  톨스또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로 칭송된다.

그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작품들은 현대에 와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 세계적인 대문호 ' 라는 위대한 칭호의 수식어와는 반대로 항상 따라오는 또 다른 수식어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 도박꾼 ' 이라는 것이다.  그는 틈만 나면 러시안 룰렛이 있는 도박장으로 찾아가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병적인 도박꾼으로 알려져 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도박에서 손을 떼겠다고 아내에게 수없이 다짐했지만 그 약속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다시 집 안의 돈을 싹 쓸어 담고 도박판으로 달려갔을 정도이다.  도박자금 마련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결혼반지, 아내 귀걸이, 옷, 신발은 물론 낡은 모자까지 전당포에 맡기는 일은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다보니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빚쟁이를 피해 4년 동안 해외 도피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런 자신의 도박벽과 관련된 경험을 바탕으로 <노름꾼>(Igrok)이라는 소설이 탄생될 수 있었다.   그래서 도스또예프스끼라고 하면 쉽게 도박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도스또예프스끼 복권    

 

 


중후하고 엄격한 이미지의 도스또예프스끼가  

복권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복권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러시아 땅을 

하늘 위에서 바라 본 도스또예프스끼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라는 말이 있듯이 도스또예프스끼가 후세에도 자신의 도박벽이 회자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알 길은 없지만 반대로 그와 관련된 살아있는 자들은 말을 한다. 특히 ' 도박꾼 '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 때문에 한순간에 천덕꾸러기 조상을 두게 된 도스또예프스끼의 후손들에게는 말이다. 

몇 년 전에 러시아에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초상화가 들어간 복권이 발행되자 도스또예프스끼의 후손들이 복권 발행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던 해프닝이 있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복권 발행을 중지할 것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복권을 발행하는 재단 측에서는 후손의 소송에도 눈 하나 까딱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는 도스도예프스끼뿐만 아니라 유명한 황제나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가 들어간 복권을 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손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조상의 얼굴이 복권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탐탁치 않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복권이 국가가 공인한 ' 사행성 오락 ' 이라고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복권 역시 ' 도박 ' 그 자체인 것이다.  게다가 복권의 홍보 수단 때문에 ' 대문호 ' 가 아닌 ' 도박꾼 ' 이라는 이미지가 다시 한 번 부각될 우려가 있다.  

하긴, 생물 발생의 기원을 밝혀냈고 백신의 발견 등으로 과학사에서는 위대한 미생물학자로 알려진 파스퇴르와 유산균의 정체를 증명하였고 노벨상을 수상한 이력도 있는 메치니코프가 우리나라에서는 유유, 요구르트 제품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상황만 봐도 후손들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어른들의 손에 항상 쥐어져 있는 복권 속의 도스또예프스끼를 보게 된다면 복권을 장식하고 있는 그저 그런 수염 난 아저씨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대문호에서 한순간에 ' 복권 아저씨 ' 로 전락되는 것이다.  

 

 

  ' 도박꾼 ' vs ' 대문호 ' :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한 양면적인 평가 

그러나 후손들이 아무리 복권 회사에 소송을 걸어 승소를 한다하더라도 도박으로 인해 퇴색해버린 대문호로서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기에는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 대문호 ' 라는 명예는 계속 유지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러시아 자국 내의 소송 승소 하나만으로 대중들의 머리 속에 인식된 ' 도박꾼 ' 이라는 불명예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국내에 한 때 인기 연예인의 도박 사건 때문에 수많은 여론들이 도박의 심각성에 대해 거론되었을 때에도 항상 먼저 회자되는 인물이 바로 도스또예프스끼다.  도박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병적 심리 상태를 가진 도박 중독자를 빗대어 표현할 때도 제일 먼저 도스또예프스끼가 등장한다. 그만큼 도스또예프스끼는 ' 도박 중독의 심각성 ' 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도스또예프스끼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소설가로 알려지면서 지금까지도 살고 있었더라면 그의 도박 스캔들은 여론과 대중의 눈을 쉽사리 피해 갈 수 있었을까?   그 역시 ' 소설가 ' 라는 사회적 공인으로서 대중들의 지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며 추악한 스캔들은 소설 판매 부수량에 악영향을 주게 된다.  어쩌면 실제보다 더 궁핍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 글은 무척 잘 쓰는데 인간성은 글러먹었고 도박에 미쳤대. ' 라고 대중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미 수 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라서 오늘날에는 ' 도박꾼 ' 혹은 ' 도박 중독자 ' 라고만 하는 것도 다행인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 러시아 도박꾼 ' 의 소설을 읽고 있으며 그가 쓴 소설들을 불후의 고전으로 추앙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도박 중독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전세계의 독자들의 심장을 파고드게 만드는 그의 장엄한 문학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단어와 문장을 통해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소설가의 본질과 그가 탄생시킨 문학은 이토록 다른 것일까?   어떤 이들은 ' 도박꾼 ' 이 쓴 소설 - 특히 <노름꾼> - 을 굳이 ' 고전 ' 이라고 부르면서 읽을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 도박 중독자 ' 도스또예프스끼를 위한 E.H. 카의 실증적 변명    

 

 


E.H. 카 (1892~1982)
 

 

그러나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는 자칫 속물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중독을 자신의 처녀작인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을 통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E.H. 카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쓴 소설뿐만 아니라 그가 쓴 편지들, 일기 그리고 그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쓴 회상록 등 다양한 문헌 자료를 통해서 작가의 도박 증세를 보다 입체적이면서도 실증적으로 분석하였다. 

E.H. 카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이토록 도박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떤 이유를 단순히 도박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비롯된 순간적으로 나오게 되는 비정상적인 흥분 그리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강렬한 열정의 기질이 자기 자신을 극단적인 룰렛 중독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 신경은 산란하고 한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지만 피곤하다오.  그러나 동시에 원기는 왕성하오.  나는 초조하고 흥분한 상태요.  그리고 내 성질에 이것은 때대로 필요하다오.  

-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E.H. 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p 197 재인용 -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만의 방법을 통해서 언젠가는 룰렛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기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돈을 허무하게 잃어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패배의 절망 속에서도 승리라는 선물을 선사해 줄 승리의 여신이 자신에게 손짓할 것이라고 생각, 아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도르가 자신의 방법에 따르면 룰렛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완벽하게 정확한 것이었고 완전한 승리를 얻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냉혈적인 영국인이나 독일인이 그렇게 한다는 조건에서이지 나의 남편처럼 신경질적이고 쉽게 포기하며 모든 것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회상록> 중에서, E.H. 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p 195 재인용 - 

 

아내의 표현대로 순전히 ' 운 ' 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게임의 진리를 충동적인 성격이 다분히 강한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룰렛은 사실상 적성이 맞지 않았다.   그가 룰렛에 집착한 원인을 오늘날 심리적인 측면에서 보게 된다면 ' 도박자의 오류 ' 에 빠진 것과 유사하다.  ' 도박자의 오류 ' 란  실패를 거듭할수록 드디어 성공할 때가 왔다고 확신하는 도박 중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이상심리를 뜻한다. 슬롯머신을 계속 당기면서 이번에야말로 잭팟이 터질 때라고 지나친 기대심리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E.H. 카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중독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냉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노름꾼>에는 돈을 잃든 말든 도박 자체를 즐기는 사람을 경멸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소설을 읽는 독자들 - 특히 도스또예프스끼가 지나치게 도박 중독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 에게는 작가 자신의 도박벽 증세를 스스로 자기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카는 단순히 도스또예프스끼를 바라보는 단편적인 진실에 불과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중독은 단순히 돈을 얼마 많이 따느냐에 따른 일반적인 도박 중독자의 증세라고는 볼 수 없다. E.H. 카의 표현대로 도스또예프스끼에게 룰렛은 ' 깊은 도덕적 타락에 빠지고 싶은 욕망의 추구 ' 였던 것이다.  

 

 

 

  여전히 ' 도스또예프스끼 ' 가 지독한 도박 중독자라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 

객관적이고 치밀한 자료 분석으로 일가견이 있는 E.H. 카가 대문호의 일대기를 균형 있게 조명했음에도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증세에 대한 카의 온화한 관점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낀 독자도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1931년에 정식으로 출판되었다) 대문호의 도박벽을 바라본 카의 시선은 도박의 늪에 헤어나지 못하는 도박 중독자를 사회악으로 규정되는 일탈의 문제로 바라보는 오늘날의 시선과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E.H. 카는 자신의 조국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닌, 그것도 러시아의 소설가인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사람의 일생을 조명하기 위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 라는 문장이 자주 인용되는 <역사란 무엇인가>가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무엇보다도 카가 객관적이면서도 균형적인 냉철한 시각으로 역사를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처녀작인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의 도스또예프스끼 연구는 훗날 러시아 혁명과 소련의 소비에트 사회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엄정성과 객관성이 강조되는 그의 역사학에도 단점은 있다. 역사의 진보가 있다고 판단되면 지도자의 악행이나 인권 유린을 눈감아주는 맹점이 있다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증세를 평범하지 않는 성격에서 기인한 자신만의 욕망 추구라는 결론을 내린 카의 분석은 옳다 나쁘다는 식의 도덕적 판단의 배제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카가 도박 중독자인 대문호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서 평전을 쓴 것이 아니며 또 우리는 이미 수백 년에 살다가 죽은 대문호를 단순히 도박 중독자라고 해서 굳이 그의 명성을 흠을 낼 필요도 없다.   도스또예프스끼 이외에도 문학가, 미술가라고 가리키는 수많은 예술가들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많은 일탈행위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이용한 아름다운 그림과는 반대로 성격은 그야말로 통제불능이었다. 그는 항상 시비 걸기를 좋아했으며 결국에는 싸움 끝에 화를 이기지 못해 상대방을 살해한 적이 있는 전과자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행동에 대해서 선과 악의 구별이라는 기준을 내릴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예술가가 만들어낸 예술을 가지고 옳다 나쁘다고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 도박꾼 ' 도스또예프스끼를 용서해야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여곡절 끝에 도박 중독에서 스스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 후로 본격적으로 위대한 작품의 창작을 위한 불꽃을 피울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도박 중독을 치료하는데 전문의가 필요하는 마당에 도스또예프스끼는 아내의 내조 덕분에 도박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도스또예프스끼는 도박 중독에서 벗어난 것 그 이상으로 인간 승리를 맛보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을 떠난지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대문호로 그의 이름이 여전히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생전에 문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언젠가는 뿌쉬낀과 맞먹을 대작가가 될 것이라는 자부심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으며 기나긴 시베리아 유형 생활과 지독한 룰렛 중독으로 인해 몸과 정신이 피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창작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수백번이 넘는 도박장 인에서의 룰렛 게임을 수차례 패배한 인생의 낙오자였지만 소설 창작이라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올인(all-in)한 인생의 룰렛 게임에서는 끝끝내 승리할 수 있었다.   

  

 

* 사진 출처 및 인용 관련기사   

[‘ 도스토예프스키 로또복권 ’…후손들 발끈] 동아일보, 2005년 2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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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3-27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서재에 오면 뭔가 늘 새로운 사실을 하나씩 알게 되네요. (제가 워낙 무식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cyrus님이 그만큼 남들과 다른 무엇으로 글을 쓰시려고 신경쓰신다는 뜻도 되겠지요? 감사드려요. ^ ^)

도스또예프스끼, 궁극적으로는 글쟁이네요. 도박에 빠진 도스또예프스끼는 안보이고(저는 그의 아내가 아니니까요.) '노름꾼'이라는 소설을 써낸 작가만 보입니다.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내에게 붙이고 싶네요. ^ ^

cyrus 2011-03-28 08:02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저도 포핀스님 서재에 가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특히 실용 분야에 대한 책의 서평이나 글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천덕꾸러기 남편을 죽을 때까지 내조한 안나라는 아내도
참으로 대단한거 같아요, 요즘 같으면 그냥 이혼도장 쾅 찍을텐데 말이죠 ^^;;

반딧불이 2011-03-2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박에 주목해서 읽으셨군요. 도스토예프스키 복권이 있다는걸 처음 알았어요. 새로운 정보 고맙습니다.

cyrus 2011-03-28 08:03   좋아요 0 | URL
평전을 읽기 전에는 도스또예프스끼라고 하면 항상 도박이 떠올려서
도박 중독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 흥미롭게 읽었어요.

마녀고양이 2011-03-28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흥미롭네요.
도스또예프스키가 도박벽이 있었다니, 아하......
하기사 그런 글을 써내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예민했겠어요. 그리고
풍족함에서 천재성이 나오기는 힘들겠죠. 도박이란 중독이고, 중독이란 결핍이고.

화가든, 작가든, 다른 무엇이든 천재는 참 힘들었겠어요.
아니.... 인간은 다 힘든걸까요?

사이러스님, 요즘 학교에서 무지하게 바쁘시담서요? 건강 챙기시고~ ^^

cyrus 2011-03-29 00:44   좋아요 0 | URL
ㅎㅎ ' 무지하게 ' 정도는 아니구요,, 중간고사도 이제 한 달 남짓
남아서 거의 공부하는데 시간을 쓰는거 같아요,, 물론 중간에
책도 읽게 되지만요. 마고님도 건강 조심하시구요,, 열심히 하시는만큼
학업에도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요 ^^

비로그인 2011-03-2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거장처럼 써라] 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렇게 또 다른 방식으로 그를 보게 되네요.

ㅎㅎ.. 여전히 좀 시간이 들 것 같은, 이런 페이퍼를 쓰시는 걸 보면 아직 연애는 안하고 있으신 것 같네요.

cyrus 2011-03-29 00:47   좋아요 0 | URL
<거장처럼 써라>에서 바라보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한데요,, 요새 갑자기 도스또예프스끼와 관련된 책이 나오는거 같아요.

요즘은 학업에 집중하고 있어요,, 연애는 아직,, 아무래도 연애는
저의 적성과는 맞지 않는거 같아요,,^^;;

굿바이 2011-03-2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자신의 얼굴이 나오는 복권도 있고 도스또예프스끼는 참으로 복이 많은 분이십니다. 평전을 읽으면서도 느낀 점이지만, 도스또예프스키가 강조한 인간의 자유의지만큼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도박장에서 부인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쓰는 작가의 모습은 뭐랄까 자유의지를 스스로 반납한 것 같지만 말입니다 :)

cyrus 2011-03-29 14:1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서 작품 창작에 몰입한다는건 정말
대단한거 같습니다. ^^

꽃도둑 2011-03-2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커스를 확실히 맞추고 쓰신 좋은 글입니다. 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중독에 대해 좀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건 사실인 거 같아요. 저는 카가 그 도박증에 대해 일견 연민을 갖고 있지 않나 할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생활고를 탈피하고자 시작한 도박이었잖아요. 처음엔 그랬지요...하지만 중독성이 강한 도박에서 그는 헤어날 줄을 몰랐지요...
어쨌든 그의 인생은 비난과 찬탄과 연민을 한 몸에 받는 작가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cyrus 2011-03-30 13:31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점은 카 역시 도스또예프쓰끼 못지 않게 인생이 순탄치 않았답니다.
카 역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해서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고 하네요.
어쩌면 카는 위인에 대해서 조사하면서 자신처럼 순탄치 못한 위인에게 인생의 연민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맥거핀 2011-03-2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한편으로는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의 도박벽의 양상과 원인을 누구보다도 잘 분석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묘사하는 자신과 그것으로 달려가는 자신으로 분열되어 있던 것일까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노름꾼>과 같은 소설이 나왔을지도 모르지요.
자신이 왜 도박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도박꾼보다 나은 것인가요, 아니면 더 불행한 것인가요. 자신의 치부(?)를 이야기하는 <노름꾼>과 같은 소설을 쓰는 그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리뷰를 읽고나니 여러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1-03-30 13:34   좋아요 0 | URL
평전을 읽을 때 <노름꾼>이랑 같이 읽어보면 도박 중독에 대해서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거 같아요, 저는 아직 이 소설을
읽지 못했거든요,, ^^;;

제 생각이지만 자신이 왜 도박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도박에 집착하는 사람보다는 덜 불행한거 같아요.
빠져나가기 힘들다는 도박 중독에서 벗어났고 그 이후로 유명한 작품들이
탄생하는 걸 봐서는요,, 거기에다가 자신의 부끄러운 체험을
소설을 만들어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데
나름 성공적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대칭>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대칭 - 자연의 패턴 속으로 떠나는 여행 승산의 대칭 시리즈 4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 / 승산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수학 전공자들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    

 

  

 

한 달 전에 ' 대칭 ' 에 대한 탐구의 여정을 그려 낸 이언 스튜어트<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부제: 대칭의 역사)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 한 권의 책 속에는 대칭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연구를 한 유명한 수학자들의 인생 이야기에서부터 대칭 분야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 군론 ' 등 다양한 수학적 이론들이 들어차 있다.  수학 비전공인 나로서는 본문마다 하나씩 등장하는 수학적 공식과 이론들을 과감히 생략해버리고 대칭을 탐구한 수학자들 이야기 위주로 읽었다.  다행히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유명한 수학적 이론들, 즉 앞에서 언급한 군론과 같은 경우, 이름만 알뿐이지 전혀 내용은 모른다.  (하지만 수학자들이 겪은 흥미로운 일화 같은 설명하라고 하면 자신 있게 할 수 있다, 수학자들의 이야기만은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게 된 마커스 드 사토이<대칭> 역시 전자의 독서 방식으로 울며 겨자 먹듯이 읽었다.  학업에 열중하라 개인적인 활동을 위해서 몇 권의 책을 읽어야해서 이 책만큼은 속독하였다. 군론, 몬스터 대칭군 등과 같은 중, 고등학생 때 배우지 않은 전문적인 수학적 이론에 관한 애용을 수학 비 전공자가 천천히 여러 번 읽게 되면 그 중 하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독서를 하기에는 시간이 턱 없이 부족할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수학을 독학하는 것도 아니고 틈만 날 때마다 수학 공식 풀이에 열중하였다던 수학자 오일러처럼 수학 문제 풀이나 연구를 좋아하는 취향이 아닌 이상 굳이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수학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 풀이를 하는지 그 과정이 중요하지만 수학 관련 교양도서를 읽을 때에는 수학을 심도있게 알고 싶어하지 않는 이상 굳이 풀이 과정을 상세하게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학 교양도서에 나오는 수학적 내용의 가치를 수학 비전공자의 눈으로 낮추어 보려거나 수학 교양도서는 무조건 어렵다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는 전혀 없다.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수학적 개념은 공식이나마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수학 비전공자들가 이 책을 읽기에는 만만치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 책은 수학 전공자들이 꼭 읽어봐야하는 책처럼 느껴진다.  이 책 앞에서 소개되고 있는 전문가들의 서평은 이제 막 페이지 한 장을 넘기기 시작하고 있는 수학 비전공자 독자들의 기를 벌써부터 죽이고 있다.  

<대칭>의 저자 마커스 드 사토이 교수는 여행기의 기법을 이용하여, 196,884차원의 몬스터군과 같은 전문 수학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이번 봄 학기부터 대수학 수강 학생들에게 꼭 읽어야 할 책으로 권장하려고 한다.  

- 이기석 (한국교원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의 서평 -

 

  

  이언 스튜어트의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와 마커스의 <대칭>

수학 비전공자 독자들이 저런 전문가의 서평을 보게 된다면 다음 페이지를 넘겨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여기서 책을 덮어야 할 것인지 망설여질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이 신간평가단 도서가 아니었다면 책을 펴본지 1분도 안 되어 벌써 책을 덮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읽은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를 읽은 경험이 오히려 이 책을 읽어낼 수 있는 한 줄기의 작은 힘(?)이 되어 주었다.  이번에 나온 마커스 드 사토이의 <대칭>은 저자 자신이 몬스터군을 탐구하는 기나긴 여정을 수기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서술적 특징을 제외하고는 이언 스스튜어트의 책의 서술 방식과 유사하게 대칭을 탐구한 수학자들의 이야기들이 소개되고 수많은 수학적 이론들의 퍼레이드로 구성되어 있다.  이언 스튜어트의 책도 대칭을 주제로 한 내용이니만큼 마커스 드 사토이의 책에도 중복되는 내용이 많았다.  

3차방정식의 해법을 둘러싼 니콜로 타르탈리아와 카르다노의 대립, 가난에 허덕이다가 생전에 자신의 수학적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채 요절한 닐스 아벨 그리고 혁명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세상의 소용돌이에 쉽게 휩쓸릴 정도로 감정적이었으며 수학적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친 끝에 역시 요절하게 된 불운아 갈루아 등 ' 대칭 ' 의 세계를 알아내고자 했던 수학자들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들은 마커스 드 사토이의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수학 비전공인 탓에 확실한 정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읽어 본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이언 스튜어트의 책을 먼저 읽어본다거나 아니면 마커스 드 사토이의 책과 같이 읽어보면 대칭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칭의 목록화를 꿈꾸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대칭>은 마커스 드 사토이가 천착하고 있는 몬스터 대칭군에 대한 자신의 연구 과정을 순차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몬스터 대칭군은 ' 몬스터 ' 라는 괴물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져 있듯이 196,884차원(!)에서 볼 수 있는,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무시무시한 대칭군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몬스터 대칭군에 대한 개념을 상세하게 소개하기에는 서평 작성의 공간이 부족할뿐더러 내용을 소개한다하더라도 서평이 지루함의 황천포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몬스터 대칭군에 대해서 알고 싶은 독자들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 책을 읽어보는수 밖에 없다.  몬스터 대칭군이 대학원생에서 전문 수학자들 사이에서 다루어지는 어려운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커스 드 사토이의 수학적 일기를 읽어보게 되면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그것도 광대한 세상 속에서 숨겨진 대칭들을 목록화하겠다는 그의 담대한 열정은 실로 대단하면서도 존경스럽기도 하다.  일상에서는 제대로 눈여겨 보지 않는 건축물에서부터 바흐의 음악까지 마커스는 대칭을 발견하여 수학적인 접근으로 증명하고 있다.    

마커스는 수학자와 예술가들의 눈과 마음이 대칭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이유가 대칭이야말로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완벽한 형태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어린이들은 빗방울을 그림으로 묘사를 하면 일반적으로 눈물 모양으로 그리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진짜 모양은 완전한 구체다.  구는 3차원에서 가장 대칭에 가까운 형태다. 

특히 마커스가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여행 차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에 가게 되는 에피소드는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내용이었다.  마커스는 궁전 내부에 그려진 기하학적으로 표현된 아라베스크 무늬에서 대칭의 형태를 발견하게 되는데 수십 년 전에 이미 또 다른 사람이 이미 알함브라 궁전에서 대칭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M.C. 에셔의 그림, 

에셔는 알함브라 궁전의 아라베스크 무늬를 철저히 관찰, 연구 끝에  

연속적인 무늬의 변형을 주제로 한 독특한 그림이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의 형태를 표현하기로 유명한 화가 M.C. 에셔였다. 

에셔는 화가가 되기 전인 젊은 시절에 알함브라 궁전의 아라베스크 무늬를 보게 되었는데 무늬의 형식미에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오랜 관찰의 노력 끝에 연속적인 무늬의 변형을 주제로 한 독특한 그래픽이 탄생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마커스와 에셔가 알함브라 궁전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아라베스크 무늬의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장면은 인간은 대칭적 대상들에 계속 이끌려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수학자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

마커스의 대칭 목록화 프로젝트는 쉽게 마무리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움베르토 에코는 인간이 목록화에 집착하는 이유가 우주처럼 한계가 없는 세상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표현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 속성을 이용한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에코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가 찾고자하는 대칭의 세계는 끝없는 반복되는 패턴의 변주로 이어지는 에셔의 그림처럼 무한성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지금 어딘가에 마커스가 찾아내지 못한 대칭의 세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바쳐 탐구하게 될 그의 프로젝트는 그가 죽어서도 완수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집요한 탐구가 어리석게 여겨지지 않는다.  마커스에게 대칭의 목록화는 세상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수학자 폴 에어디쉬의 재치있는 명언대로 수학자는 커피를 정리로 바꿀 수 있는 기계, 즉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상식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모든 수학자들이 폴 에어디쉬처럼 괴팍한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단 한 줄의 수학 공식이나 어렵기 짝이 없는 이론에 잠과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연구하려는 수학자들의 집요한 탐구욕 때문에 우리는 수학자들을 특이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탐구욕은 단순하게 문제 풀이의 발견이 아닌 어쩌면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무한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P.S> 

사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완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학적 이론에 대한 내용을 무시한 채 속독해버린 탓에 이 책의 서평도 정작 대칭과 관련된 수학적인 내용을 심도있게 다루지 못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이 책에 내용의 오류가 발견되었는데 p 255 에 ' 1940년,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느 베유의 형제인 반전주의 수학자 앙드레 베유 ,,, '  라고 언급되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여기서 언급되는 사상가 시몬느 베유는 노동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80년대에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던 여성 사상가 시몬느 베이유를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몬느 베이유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그래서 형제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다.  앙드레 베유는 시몬느 베이유의 친동생이므로 문맥상으로는 시몬느 베이유의 친오빠라고 해야 하는 것이 올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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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
    from 男兒須讀五車書 2011-03-21 09:21 
    수학은 진리와 아름다움에 관한 공부야. 해답을 찾고 그 해답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공부야. - 이언 스튜어트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 p 25 - 불광불급 (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광적으로 덤벼들어야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불광불급의 열정 없이는 세상에 이룰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 뜨거운 열정을 마음 한 구석에 품으면서 자신감을 갖고 오랜 시간을 노력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3-2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벽한 '대칭'이란 건 자연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특히 에셔의 그림들을 보면 세상에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들의 이면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서요. 사실 대칭으로 보이지만 전혀 불균형한 것들도 많지 않을까.

전 '수학'은 정말 별루예요..ㅋㅋㅋㅋ
집요한 면이 없고 게을러서 그런 것 같아요.
반면에 수학과 출신인 제 동생은, 자기는 수학에 정말 재능이 없다며 전산쪽으로 전공을 바꾸긴 했지만 정말 집요한 구석이 여전히 있더라구요. 징그런 놈!! ㅎㅎ

cyrus 2011-03-21 23:33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은 수학 공부하는 일이 없어서 그런거지 수학을 썩 좋아하지는
않아요. ^^;; 제 생각이지만 수학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끈기 있는 성격을 가진거 같아요.. ㅎㅎ

교고쿠도 2011-03-21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시몬느 베이유...제가 꽤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대칭>은 제게 있어서 일종의 고문입니다. 왜 인문사회팀에서 이런 골치아픈 수학책을!!! ㅜ.ㅜ

cyrus 2011-03-21 23:34   좋아요 0 | URL
간혹 헌책방이나 대학교 도서관에 가면 몇 년 전에 나왔던
시몬느 베이유의 책들이 있던데,, 기회가 된다면 읽어봐야겠네요^^

저도 이 책,, 읽는내내 난감했습니다. ^^;;

blanca 2011-03-21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이 아주 체계적이네요. 게다가 수학관련책을 이 정도면 정말 제대로 잘 읽어내신 것 같은데요. 저는 수학을 정말 싫어했어요. <아름다운 수학>이라는 책을 읽고 멀미 났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수학과 음악이 상통한다는 얘기를 듣고 절망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라베스트 무늬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잘 읽고 가용.

cyrus 2011-03-21 23:35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이 읽으신 책의 제목이 아이러니하네요 ^^
이 책에서도 바흐가 작곡할 때 수학, 특히 대칭을 이용했다는 내용이
언급되는데,, 사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무척 흥미롭게 읽었어요^^;;

감은빛 2011-03-22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학에 대한 책이라니, 정말 읽기 싫을 것 같아요.
저는 중학교때 이미 수학을 포기했고,
수학 0점도 받아봤어요.

어려운 책에 대해 글을 참 잘 쓰셨어요!
부러운 재주입니다!

cyrus 2011-03-22 10:07   좋아요 0 | URL
사실 이번 선정도서는,, 거의 수학 전공자들을 위한 책이었어요.
저는 수험생 시절에 수학을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
20 몇 점 받았어요,, ^^;;

잘잘라 2011-03-2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한번도 수학을 잘하고싶다거나 수학자를 꿈꿔 본 적이 없어요. 수학자의 삶은 어떨까 하는 관심도요. ㅠㅠ

cyrus 2011-03-22 21:15   좋아요 0 | URL
저도요 ㅎㅎ 수학이 살아가는데 정말 유용한건 분명하지만,,
저에게는 친해지기 어려운 과목이에요 ^^;;

노이에자이트 2011-03-2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드레 베이유가 오빠입니다.제가 가진 시몬느 베이유 전기의 화보에 남매 사진이 있어서 알았지요.앙드레는 이미 아홉살 때 어려운 기하학 문제를 술술 풀었다는 천재였다네요.

cyrus 2011-03-22 21:1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몬느 베이유의
동생 역시 누나 못지 않게 남달랐군요 ^^

노이에자이트 2011-03-22 21:45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이신지...저는 댓글에 앙드레 베이유가 오빠라고 썼는데요.시몬느가 여동생이구요.

cyrus 2011-03-22 22:04   좋아요 0 | URL
수정했어요,, ^^;; 지금 버스 안이다보니 잘못 수정하고 말았네요.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 쓰니 눈이 아프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03-22 22:12   좋아요 0 | URL
버스 안에서도 이런 작업을 하다니...역시 요즘은 유비쿼터스 시대입니다.하지만 저는 버스나 기차 안에선 책도 못 읽어요.어질어질해서...버스 안에서는 문자메시지 오는 것도 싫더라구요.

cyrus 2011-03-23 00:21   좋아요 0 | URL
버스를 타게 되면 몹시 흔들려서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눈이 더
나쁠거 같아서 글 쓰는 작업 같은 긴 시간이 필요한 일에는
잘 안 쓰는 편입니다. 간단히 댓글 정도는 간간이 남길 수 있는데,,
댓글 한 개 쓰는 것도 조금은 힘드네요,,

그래도 차 안에서 책은 자주 읽습니다. 물론 움직이는 차 안에서
책 읽는 것도 시력을 나쁘게 하는 원인이 되지만요,, ^^;;

카스피 2011-03-22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역시 수학을 싫어해서 리뷰 내용은 선뜻 이해가 잘 가질 않지만 에셔의 그림은 참 신기해 보입니다.

cyrus 2011-03-23 00:22   좋아요 0 | URL
에셔의 그림 한 점 넣기를 잘했네요, ^^
사실 저도 많이 관심을 두지 않는 책을 읽고 서평 쓰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수학 이론들이 뭔 뜻인지도 잘 몰랐구요,, ㅎㅎ

양철나무꾼 2011-03-23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결국 이 책이 선정되어 읽으셨군요.
이 리뷰를 먼저 읽었다면 제가 이 책을 설렁설렁 넘기는 일 따윈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암튼 승산의 대칭시리즈는 다시 봐도 엄청 어렵군요.

중3아들이 학교 재량활동 시간에 어찌어찌 하여 수리탐구부에 들었는데, 거기서 배우게 되는게 고등수학이래요.
고등학교용 수학일까 고등수학일까 하며 묻던걸요~^^

cyrus 2011-03-23 08:30   좋아요 0 | URL
요즘 중학교 재량활동에도 수학과 관련된 부서가 있군요,
저는 방과후 활동이라고,, 정규수업 끝나고나면 영어, 수학 과목
중심의 심화학습을 한 적이 있었어요, 솔직히 중학생 때는
수학 공부할만했는데 고등학생이 되고나니깐 젬병이 되어버렸어요 ^^;;
 
강의 왕 -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마리노 네리 글 그림, 이현경 옮김 / 미메시스 / 2010년 11월
절판


죽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예술 작품이라면 한스 발둥 그린의 <죽음과 소녀>(1518~1520년 작)가 유명하다. ' 죽음과 소녀 ' 모티브는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단골 레퍼토리였는데 에곤 실레가 그린 <죽음과 소녀> 역시 유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필연적인 숙명인 죽음을 공감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라면 단연 한스 발둥의 그림이다.

중세 말기부터 르네상스 시대에 걸쳐 수많은 전쟁과 기근, 설상가상으로 페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전염병이 전 유럽 대륙을 휩쓸게되었는데 이 때부터 죽음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와 호기심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죽음과 소녀 ' 모티브 역시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유행하게 된 주제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눈 앞에서 목격했던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캔버스로 표현된 죽음의 이미지는 그 때의 공포가 재현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떨 수 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그림이었다.

한스 발둥 그린의 그림에는 죽음을 해골로 표현하고 있는데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으로서 해골을 표상하게 되는 인간의 일반적인 인식과 딱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죽음 앞에서 공포를 떨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연약한 나체의 소녀로 대비시켜 표현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이라는 운명의 키스 앞에서 순백의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는 젋은 소녀는 한없이 그저 울고만 있을 뿐이다. ' 죽음과 소녀 ' 라는 알레고리는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상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지만 결국에는 인생의 유한함을 받아들여하며 절대로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진리(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풍만한 육체의 소녀가 등장하는 ' 죽음과 소녀 ' 모티브의 그림을 맨 처음 보게 된다면 메멘토 모리라는 그림에서 말하고자하는 주제가 떠오르기보다는 에로틱한 분위기로 바라볼 수 있다. 한스 발둥은 이 그림 이외에도 ' 죽음과 소녀 ' 를 주제로 한 여러 가지 버전의 그림을 제작하였는데 죽음 앞에 대면하는 소녀들은 거의 누드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의 절정을 ' 작은 죽음 ' 이라고 표현한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무의식 사이에서 흐르고 있는 죽음과 에로티시즘 사이의 근친성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 죽음과 소녀 ' 모티브일 것이다.


한스 발둥 그린, 에드바르드 뭉크, 에곤 실레 등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 죽음과 소녀 ' 모티브와는 대조적으로 이탈리아 만화가 마리노 네리는 ' 죽음과 소년 ' 이라는 색다른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강의 왕>은 2006년 루체른 만화 페스티벌, 2007년 코미카첸 국제 리얼리티 만화 페스티벌에 수상하여 국제적인 예술 만화가로서 인정 받고 있는 마리노 네리의 대표작이므로 이 작품을 통해서 마리노 네리는 2008년 올해의 이탈리아 만화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리노 네리의 <강의 왕>은 78페이지라는 얇은 분량의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혀지는 것이 아니다. 브루노라는 소년이 우연히 해골을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감정의 흐름들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해골을 발견하게 된 브루노는 해골의 출처에 대한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기 시작하는데 오랜 상상 끝에 최종적으로 해골은 ' 강의 왕 ' 이 수집했던 수많은 해골들 중의 하나라고 결론을 짓게 된다. 그러다가 브루노의 마을에는 갑작스럽게 강이 범람하게 되었는데 브루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이 강물에 휩쓸려 잠길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면서 자신이 ' 강의 왕 ' 이 소유하고 있는 해골을 훔친 원인 때문에 강의 범람이 생긴 것이라고 믿게 된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줄거리이지만 이 책에서는 만화의 내용을 보다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정보의 글도 소개되고 있지 않아서 난감할 수 있다. 코미카첸 만화 페스티벌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이탈리아의 비평가 엘렉트라 스탐보울리스의 심사평이 그나마 마리노 네리의 작품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이다. 스탐보울리스는 <강의 왕>의 주제를 ' 소년의 시선으로 해석한 세계 ' 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 해골을 발견하게 되면 그 해골이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을지 생각하지 마라.

그냥 해골일 뿐이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귀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 " (p 15)


" 하지만 이건 어리석은 생각일 수도 있다. 해골도 한때는 누군가의 얼굴이었을 테니. " (p 15)



스탐보울리스에서 말하고 있는 소년 브루노의 시선이 머물고 해석하고 있는 ' 세계 ' 는 브루노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광대한 세상을 뜻하고 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브루노는 강의 범람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무시무시한 파괴의 원인이 자신이 훔친 해골 때문이라고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세상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을 그린 내용의 만화라고 말하고 있는 스탐보울리스의 평에서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과연 브루노는 단순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도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마리노 네리의 작가 노트 형식의 글이나 해설문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책의 구성 덕분에 독자는 만화를 통해서 다양한 관점의 해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있다. 브루노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처럼 말이다. 해골이라는 대상의 이미지가 곧 ' 죽음 ' 이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연상되어지듯이 나는 <강의 왕>에 등장하는 해골 그리고 브루노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란 것이 바로 ' 죽음 ' 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해골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 브루노는 해골의 유래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 죽음 ' 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며 이 때부터 죽음에 대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발현된다. 프로이트의 자아발달 단계 이론에 의하면 브루노는 잠복기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 것이다. 잠복기는 5세부터 사춘기 초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에 어린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어른들에게 질문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한 지적 욕구의 발달은 어린이가 성장하는데 점층적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다.




" 사악한 힘과 어둠 속에 살고 있는 괴물들을 무찌르자.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 (p 34)



그러나 동심으로 가득찬 어린이들에게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다. 다 큰 어른들도 해골 앞에서 공포감을 느끼기 마련인데 죽음이라는건지 잘 모르는 어린이들에게는 해골은 그저 신기한 대상일뿐이다. 브루노는 해골을 무서워하기보다는 대수롭지 않게 만지작거리면서 자신의 침대에 들여놓기도 한다. 해골을 향한 왕성한 호기심 앞에서 브루노는 해골에 대한 두려움 따위 느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해골을 사랑스러운 장난감인마냥 들고 다니면서 ' 피테코 아저씨 ' 라는 애칭을 붙일 정도로 해골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브루노의 동심은 긍정적인 메멘토 모리를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한스 발둥의 <죽음과 소녀>에서 드러나고 있는 관념적이면서도 공포심을 조장하고 있는 메멘토 모리와는 분위기가 대조적이다.




" 안녕, 브루노! " (p 65)


" 난 너무 금방 잊혀지는 그런 것들 중의 하나야... 네게도 그렇겠지.... 나하고 다른 것들이 밖으로 다시 나와 전부 다 부숴 버릴 때가 된 게 아닌지 서로 상의하고 있다 ... 네 생각은 어떠냐? (p 66)




강이 범람하고 있을 때 브루노는 해골과 상상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데 이 때부터 브루노는 생(生)과 관련된 모든 대상들을 파괴하는 죽음의 공포를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다. 해골은 강의 범람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가라앉게 되는 마을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에 마을 전부가 물에 잠기게 된다면 브루노는 ' 강의 왕 ' 이 될 수 있다고 권유하고 있다. 결국, 해골이 브루노에게 권유하고 있는 ' 강의 왕 ' 은 단순히 강의 범람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대상이 아닌 곧 세월이 흐르면 모든 생명들을 멈추게 하는 ' 죽음의 왕 ' (혹은 ' 시간의 신' 크로노스)인 것이다.


" 다시 가져가. 알아들었어? 난 이제 갖기 싫어! 내 말 들려? 이제 싫다고!!! (p 71)



그러나 자신 때문에 마을이 가라앉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즉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하게 되면서 애지중지하게 여기던 해골을 강 멀리 던져버리게 된다. 해골을 던져버리는 브루노의 모습은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고 싶어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 모든 게 정지해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강은 계속 흐르며
모든 것을 천천히 쓸어 갈 것이다." (p 77)




" 나도 모르는 어느 곳으로 ,,, 적어도 다음에 강이 범람할 때까지는 ,,, " (p 78)



브루노는 어린 나이에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유한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깨닫게 되지만 브루노가 변증법적인 탐구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삶의 진리를 터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눈여겨 볼 만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해 브루노는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의 단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 인생의 전환점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 라고 말하였다. (그의 유명한 명구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와 같아서 사람들마다 제각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구적이지 않으며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만물의 변화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항상 들고 다니는 모래시계 안에 갇혀버린 살아있는 존재들이 겪어야 할 죽음이라는 운명이다. 인간은 죽으면서 백골은 진토가 되며 웅장하고 화려했던 신전은 세월의 풍파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지게 된다. 이렇듯 시간이 흐르면서 다가오게 되는 죽음의 운명은 살아있는 세계를 파괴해버린다. 그리고 살아 숨쉬고 있는 것들을 정지해버린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곧 찾아오게 될 죽음의 신의 강림은 점점 잊혀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는 죽음의 운명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일부러 회피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브루노 역시 어른으로 자라게 되면 어린 시절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단순히 어린 시절의 기억의 일부로 묻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의 왕>을 접하게 된 어른 독자들은 시간의 기억 속에서 잃어버리고 있었던 삶의 한계성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 대면이 암울하게 느껴지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한 번 지나간 세월 다시 잡을 수 없다고 세상의 덧없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쇼펜하우어가 되지는 말자. 수천년 전부터 오랫동안 죽음을 기억하라고만 전해내려왔던 메멘토 모리의 진리만 기억하지 말고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도록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긍정적인 삶의 희망도 기억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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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3-20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읏..

갑자기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 "죽음과 소녀" 가 땡기네요. 니콜라 푸생의 그림도 좀 생각나고 말이죱. 그리고 메멘토모리 + 해서 카르페디엠도 외쳐보고요 ^^

cyrus님 학교 적응 잘 하고 있으시죠? ㅎ

cyrus 2011-03-21 08:43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바람결님. 슈베르트의 음악도 있었군요. ^^
저야 잘 지냈고 있어요, 바람결님도 잘 지내고 계신가요?

양철나무꾼 2011-03-21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가 떠올랐었는데...
슈베르트는 저 그림처럼 기괴하고 섬뜩하지는 않은데 말이죠, 오히려 경쾌하고 당돌하죠.
이젠 본격적으로 학교생활 시작하셨나 봐요? 제대로 뜸하신걸 보니...
건강하셔야 해요~^^

cyrus 2011-03-21 08:46   좋아요 0 | URL
벌써부터 전공 교수님들이 레포트를 내주시니 어제는 알라딘에 들릴
여유가 없었네요,^^;; 이번 신간평가 도서 서평도 써야하는데,,
양철댁님도 건강하셔요 ^^

책먹는인간 2011-03-2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4번째 그림밑에 오타가 있네요. '고'가 빠졌어요. 태클은 아닙니다 ^^;;
잘 읽었어요

cyrus 2011-03-28 07:59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긴 글이라서 오타 찾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펭귄클래식 2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서문,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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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아, 거울아.   

 

 

 

어린이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공주>에는 백설공주의 아름다운 미모를 시기하는 마녀가 마법 거울을 통해서 질문을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동화를 읽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어른들도 생생히 기억나는 <백설공주>에서 제일 유명한 장면이다.  

백설공주의 계모로 새 왕비가 된 마녀는 자신만의 방에 걸려 있는 마법 거울에게 질문을 하는데 거울은 마녀의 질문에 맞는 대답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왕비가 "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 " 라고 물으면, 거울은 " 여왕님이십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거울의 대답에 마녀는 자신이 이 나라의 최고의 미인된마냥 자아도취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마녀의 만족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백설공주가 어여쁜 여인으로 자라게 되면서 항상 마녀가 예쁘다던 거울은 마녀가 아닌 백설공부가 더 예쁘다고 대답을 하게 된다.   

자신보다 더 예쁜 백설공주의 미모를 향한 질투심에 불타오른 마녀는 수차례나 백설공주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마녀는 사과를 파는 노파로 변신하여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건네주면서 백설공주가 죽어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웃나라 왕자와의 극적인 만남으로 백설공주는 다시 살아남게 되고 왕자를 사랑하게 되어 이웃나라의 새 왕비가 된다.

백설공주가 죽은 줄 아는 마녀는 다시 한 번 거울에게  " 누가 가장 예쁘냐? " 고 묻는다.  거울은 " 왕비님이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러나 새로 왕비가 된 백설공주가 당신보다 천 배는 아름답습니다 " 라고 대답한다.   마녀는 거울의 대답을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백설공주를 죽였으며 분명히 두 눈으로 똑똑히 온 몸에 독이 퍼져 죽어가는 백설공주를 봤었는데,,,     백설공주가 아름답다는 거울의 대답을 듣고난 뒤 실성해버린 마녀는 거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바닥에 부딪힌 거울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에 동화 <백설공주>를 읽었을 때는 마녀가 마법 거울을 깨뜨린 이유를 백설공주가 이쁘다고 말한 거울의 대답을 듣게 된 이후 생긴 단순한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단순히 거울의 대답 때문에 마녀가 홧김에 거울을 깨뜨렸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실체를 눈 앞에 확인하게 되면서 생긴 불신과 혐오로 인한 분노였을지도 모른다.   

마녀가 제 스스로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기품이 있고 아름다운 왕비의 얼굴이 아니었을 것이다. 백설공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질투가 만들어낸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힌 주름 투성이의 중년 여성의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자기 자신을 예쁘다고 치켜세운 거울의 대답을 듣고 자란 마녀가 실제로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게 되면 큰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완벽함 ' 에 대한 인류의 환상

비록 자신의 모습이 예쁘든 못 생겼든 간에 마녀는 자기 자신을 예쁘다고 말하는 거울의 대답을 듣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미모를 갖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겨결국에는 마녀가 바라본 마법 거울은 완벽을 꿈꾸는 인간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허상적인 도구인 셈이다.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완벽하고 영원불멸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었던 마녀의 환상처럼 인간은 언제나 완전한 존재나 가치에 대해 동경해오고 있었다.  

  


 

피터르 브뢰겔 <바벨 탑> 1563년 

 

' 노아의 홍수 ' 이후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건설했던 바벨 탑은 오늘날에는 인간의 허영과 오만이 만들어낸 상징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허영과 오만 뒤에는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혐오와 불신으로 가득한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끝없는 환상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조르주 루오 <늙은 왕> 1937년

 

헤라클레스와 같은 힘이 센 장사라도 죽음 앞에는 어쩔 수 없다.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알렉산더 대왕의 대제국은 그가 33세라는 짧은 나이에 죽음을 맞는 순간부터 거대한 제국은 한순간에 붕괴되었으며 고대 중국 진나라의 시황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약인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20여 년 간 중국 대륙을 다녔지만 그 역시 죽음이라는 운명을 거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거대한 땅덩어리에다가 수많은 휘하의 군사력을 보유하였으며 머리 위에는 화려한 왕관을 씌우고 있는 권력자라고 해도 늙어가는 세월의 흐름과 죽음 앞에서는 부질 없는 것들이다.  

이런 인류의 생로병사를 바라본 인간은 불완전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감을 갖기 시작하였고 결국에는 영원불멸의 힘을 가진 완전한 존재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God)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의 발명품 신은 오랫동안 서양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니체의 사상에 대한 수많은 오해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자기 혐오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사상적 명언으로 남아 있는 ' 신은 죽었다 ' 라고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 신은 죽었다. '  

니체의 사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독자들 특히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니체의 말이 불편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니체의 사상을 몰랐었을 때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의 말이 극단적인 무신론주의자의 말처럼 들리곤 하였다.  

니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신의 죽음'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등장하는 위버맨쉬(Übermensch, 초인) 사상이다.  그러나 이런 니체의 사상들은 대중중들 사이에서는 썩 좋지 않은 이미지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이 왜곡된 사상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해하기가 수월하지 않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사상이기도 하다.  

니체의 사상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관념적으로 치우친 서양 사상의 흐름을 거부하고 있다. 특히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적 신앙을 강조해온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그 당시 유럽 사회에서 니체의 ' 신의 죽음 ' 선언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은 니체의 책과 사상이 불온하고 위험한 악마의 사상이라고 여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의 관념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자기 자신을 초극해나가는 모든 가치의 창조자로서 상징되는 차라투스트라, 즉 위버맨쉬는 한 때 군국주의 시절에는 전쟁을 찬미하는 영웅으로 왜곡되기도 하였다.  오빠의 명성을 이용하여 독일의 히틀러의 총애를 받고 싶어하던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무자비한 왜곡 때문에 니체는 ' 전쟁 옹호론자 ' , ' 독일 군국주의의 화신 '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위험한 책일까? 

사실 니체가 지금까지 남긴 수많은 저서들은 아포리즘을 모아놓은 듯한 일종의 문학적인 글을 취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한 편의 시를 보는 거 같은 느낌도 들게 된다. 그러나 니체의 문장은 읽기가 쉽지 않으며 단 한 번만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많다. 이렇다보니 니체의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들이 나올 수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1부 내용 중에는 '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 라는 소제목의 글이 있는데 제목만 봐도 전쟁을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왜곡된 인식 속에서 이 내용을 읽게 되면 언뜻 니체가 전쟁을 옹호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적을 찾아내어 자신의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그대들의 사상을 위해!  그대들의 사상이 패배할지라도 그대들의 솔직함은 아직 승리를 외쳐야 한다!    그대들은 새로운 전쟁에 대한 수단으로 평화를 사랑해야 한다. 오랜 평화보다 잠깐의 평화를 더 사랑해야 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일이 아니라 싸움을, 평화가 아니라 승리를 권한다.  그대들의 일이 싸움이고, 그대들의 평화가 승리이기를!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홍성광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p 105 -

 

엘리자베스는 니체가 역설하고 있는 차라투스트라의 위버맨쉬를 궁극적으로 승리만을 목표로 하는 영웅으로 과대포장하였고 히틀러와 같은 군국주의자들은 엘리바제스의 화려한 과대포장을 제대로 뜯겨 보지도 않은채 받아들었다. 니체의 문장을 문장 자체의 뜻대로 이해를 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 전쟁 ' 은 군국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살육의 전쟁 놀이는 아니다.  살아가는데 지금보다 보다 나은 삶의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한 치열한 자신만의 싸움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 자신만의 싸움 ' 에 임하기 위해서는 불완전함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운명과 자아에 대해서 스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우선이며(Amor fati, 운명애) 그것을 극복하여 자신의 삶을 초연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능동적인 인간이 바로 위버맨쉬라는 것이다. 그런 자신만의 싸움을 이겨낸 위버맨쉬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승리이며 평화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니체가 정말로 죽이고 싶어했던 것

그리고 니체가 신을 죽었다고 사형선고를 내림으로써 위버맨쉬야말로 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인간의 삶을 구원해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니체는 위버맨쉬를 통해 기독교적 교리를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인간을 초월하는 초감각적인 존재를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다.      

아무리 초감각적인 신 앞에서 치유할 수 없는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해봐도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유럽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교리를 바라 본 니체는 신에게 구원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이 본연한 삶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각하였다.          

 


 

수많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 빛나는 졸업장 ' 을 받게 되는 기쁨도 잠시  

치열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현빈, 김태희처럼 외모가 출중한 미남, 미녀가 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비용을 성형 시술에 투자한다.  그리고 취업을 하기 원하는 젊은이들은 삼성과 같은 굴지의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서 끼니와 잠을 거르면서 도서관에서 TOEIC과 자격증 공부를 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완벽한 사람이 되려는 목표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목표를 이루지 못한 이들 중에서는 자신의 못생긴 외모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다거나 4년제 대학보다도 못한 지방대에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장래의 취업 전선에 대해서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 인생의 낙오자 ' 혹은 ' 루저 ' 라고 규정함으로써 부족한 모습만 바라보고 자신 스스로 열등감과 욕구 불만에 가지게 된다.     

그런 열등감을 피하고 삶의 위안을 삼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신을 광적으로 믿어야하는 극단적인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한 번 빠지면 영원히 헤어날 수가 없는 이유는 부족하기만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삶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느끼게 될 허무함과 굴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 신의 죽음 ' 이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삶의 의미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자기혐오, 불신이 만들어낸 회의적인 감정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뜻을 기독교의 신, 예수, 유태교의 야훼쯤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니체의 생각을 철저히 왜곡하는 것이다. 니체는 비록 고통스러운 삶이라도 그대로 똑바로 직시할 줄 알아야 하며 어떤 부정적인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에의 의지를 통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극복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니체가 꿈꾸는 그런 인간상이 바로 위버맨쉬인 것이다.  

 

 

  즐겁지 않고 삶을 어떻게 견디랴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1818년 

 

많은 것을 보려면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산을 오르는 자에게는 모두 이런 혹독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깨달음을 구하는 자로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면 모든 사물의 눈에 보이는 근거 이상의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모든 사물의 근거와 그 너머를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자신을 넘고 올라야 한다. 위로 저 위로, 그대가 바로 별 위에 오를 때까지!     

그렇다!  나 자신과 나의 별들을 내려다보는 것, 나는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나에게 남겨진 최후의 정상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 제3부 [방랑자] 중에서, p 251 -  

 

니체의 책을 읽게 되면 어느 한 줄 버릴 게 없는 감명 깊은 구절을 만나게 된다. 그런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전기가 통하는 찌릿함 같은 전율이 가슴 속에 느껴질 정도이다.   

나약한 모습에만 안주하지 말고 삶을 긍정함으로써 자신의 삶에도 실존적인 가치를 부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니체의 아포리즘은 오늘날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원한 오아시스가 되어준다.

<차라투스트라>를 먼저 읽었거나 그 밖에 다른 니체의 저작을 먼저 읽게 되면 니체의 사상이 생각보다 어둡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니체의 생애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조숙한 성격 탓에 그리 밝지 않는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 살아 있는 종합병원 ' 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통과 위장 장애를 달고 살았다. 자신의 인생 중에서 첫 사랑이었던 루 살로메로부터 두 번이나 실연을 당한 아픔을 겪어야했고 그 후로부터 고독한 인생의 방랑자로서 살기 시작했다. 만년에는 정신 이상 증세까지 그를 덮쳐오면서 미친 사나이가 되어버린 채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가 땅 속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사람들은 니체라는 사람을 광기로 가득한 사상가로 인식하였다.    

사실 니체의 삶 속에서 그에게 그나마 즐거웠던 시간이라고 하면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 시절, 24세라는 젋은 나이에 교수가 되어 학생들 사이에서 멋쟁이로서 인기를 한 몸에 받았을 때 그리고 니체의 가슴을 한 때 불태우게 만들었던 바그너와 루 살로메와의 교제 기간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절반의 인생은 어렸을 때 생기게 된 온갖 병마와의 싸움 그리고 바그너와 루 살로메와의 결별 이후 겪은 고독의 시간들이다.    

 


 

앙리 마티스 <춤> 1910년

그러나 불행으로 점철된 삶과 다르게 니체의 사상은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주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오히려 자신의 사상에 영향을 준 쇼펜하우어와는 다르게 니체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차라투스트라는 니체가 만들어낸 자신의 아바타라고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도 마을을 떠나 산 속에서 혼자서 10년동안 지내게 되는데 니체가 교수직을 그만 둔 이후에 시작한 10년간의 방랑 생활이 연상된다.  방랑 생활 기간 중에서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집필 계획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차라투스트라>이다.  책 속 주인공 차라투스트라가 10년 간의 은둔 생활 끝에 마을에 내려와서 ' 신의 죽음' 선언과 위버맨쉬 사상을 주장한 것처럼.   

니체에게 <차라투스트라>를 위한 집필 기간은 그동안 겪어왔던 삶의 풍파를 견대내고 잊어내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니체는 ' 차라투스트라 ' 라는 고대의 인물을 자신만의 아바타로 만들어 불우한 삶을 겸허이 받아들어 스스로 극복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비유와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아포리즘으로 가득찬 그의 글이 오늘날의 독자들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니체가 쓴 아포리즘들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글이 아닐까 조심스레 상상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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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3-15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만약 '니체' 역할을 맡은 배우라면, 캐릭터를 잡는데 결정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리뷰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고는 막연할지 몰라도, 이 리뷰를 읽으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

아, 예전에 나온 책은 대부분 '짜'라투스트란데, 요즘은 '차'라투스트라군요. '차'는 왠지 어색하지 않나요? '짜'가 훨씬 친근한 느낌.. 후훗.

cyrus 2011-03-16 00:44   좋아요 0 | URL
원래 우리말 정식 표기대로 하면 '자'라투스트라인데 요즘에는
'차'라투스트라가 많이 사용되서 그렇게 쓰고 있다고 하네요.
아마도 독일어 원어 발음대로 하면 '짜' 가 되지 않을까요. ^^

마녀고양이 2011-03-15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리뷰예요... ^^

니체가 몸이 약했지요? 천재성이 번뜩이고?
사이러스님의 리뷰가 좋은 부분을 제대로 찌른거 같은데요.. 아마, 초인은
니체가 간절히 원하던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철학가든 심리학자든
자신에게 가장 모자란 부분, 절실한 부분을 체계로 세우는 면이 있대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요....)

거울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난 김에 거울의 상징에 대한 책을 뒤졌는데
못 찾았어요.. 예전부터 거울 상징을 한번 알아보고 싶었는데... 엄청 다양하더라구요.

cyrus 2011-03-16 00:45   좋아요 0 | URL
마고님 댓글이 저의 생각을 제대로 간결하게 표현하셨네요.
사실 백설공주 이야기는 그냥 그전부터 개인적으로 생각했던거에요.
거울의 상징에 대한 이야기,, 너무 궁금하네요. 시간만 된다면
이와 관련된 글이라도,,,^^;;

양철나무꾼 2011-03-16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얘기하면 되게 웃기지만, 전 니체의 저 책을 중3 겨울방학때처음 읽었어요.
그 후에 몇번 더 읽었는데...완독의 경험이 있는지의 여부는 차치해두고라도, 뜻도 아직 제대로 이해 못했었는데...님의 리뷰를 읽으니 그나마 윤곽이 뚜렷해지는걸요.

참 좋아요, 백개쯤 추천을 날리고 싶어요~^^

cyrus 2011-03-17 11:01   좋아요 0 | URL
니체의 저작을 읽을 때는 꼭 개론서랑 같이 읽으면 좋아요.
원전 그대로 읽으면 좋긴 좋지만,, 니체의 생각을 왜곡되어 받아들일수
있거든요,, 니체의 글이 운문 형식이라서 시적인 문장이 많아서
여러번 읽으면 읽을수록 감명 깊은 구절이 많은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