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우엘벡의 소설 <복종>은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FN)을 경계한 프랑스의 좌우 진영이 결선에 진출한 이슬람박애당을 밀어주면서 전무후무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다는 일종의 '가상 소설'이다. 정교분리의 붕괴를 시작으로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변화하는 프랑스 사회를 그려내는 이 소설은 한편으로 발칙하면서도 섬뜩한 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국민전선으로 대표되는 극단 사상에 대해 경계하면서도 이슬람에 대한 공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프랑스인들의 무의식을 그려낸다고 생각한다.


뜬금 없이 이 소설을 이야기하는 것은 김어준 씨가 운영하는 '여론조사 꽃'과 같은 업체의 조사 결과에서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오차범위 내 지지율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아침의 뉴스가 생각나서다. 많은 사람들이 의문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왜 지금의 상황에서 국민의힘 지지가 올라가고 있는가? 


많은 분들이 보수층 지지자들의 과표집이라든가, 여론조사의 비공정성 혹은 조작 같은 부분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사회가 극우로 달려가고 있으며, 극우정당으로 달려가고 있는 국민의힘 지지로 이것이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윤석열의 계엄이라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지난 몇 주 간의 압도적인 더불어민주당 지지로 나타났을 뿐, 다시 몇 주 전으로 돌아온 지금의 이 결과는 극우화되어가는 우리 사회가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와 비슷해지는 길로 가고 있다.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1차 투표에서 지지율 1위를 차지했던(2차 투표에서 반 극우 연대에 밀려 3위가 되기는 했지만) 작년 7월의 프랑스 총선은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왜 프랑스에서 극우가 득세하는가? 민주주의가 어느 나라보다 발전했고, 왕을 단두대에 올렸던 그 나라에 말이다. 두 가지가 일단 눈에 띈다. 경제 침체와 이슬람 이민자의 증가. 그러니까 "이슬람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어요!"라는 마린 르펜의 메시지가 먹힐 수 있는 지점.


그런데. 그건 지금의 무엇과 좀 닮았다. 이슬람을 중국으로 치환해 보자. 경제 침체와 반중국. 윤석열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극우들이 중국 공안들이 경찰에 있다거나, 혹은 중국인들이 들어와서 탄핵 찬성 시위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가짜 뉴스를 주요 메시지로 선택하는 것은 그들이 바보라서가 아니다. 그게 먹히기 때문이다. 경제 침체로 고통받고 있는 일반 국민들에게. 그러니까 그들은 이번 계엄 및 탄핵을 극우 세력을 결집하는 계기로 삼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논리를 일반 국민들에게 전파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의힘도 물론 이것을 나름대로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그들이 점차 극우화되고 있는 것은, 즉 극우정당으로 거듭나려고 하는 것을 단순히 생존 전략으로 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생각보다는 효과적인, 그러나 아주 무서운 전략이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프랑스의 최근 흐름들을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실마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등 조금은 거칠고 촌스러운 장마리 르펜이 이끌던 국민전선(FN)이 그의 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으로 바뀌어 결국 꽃(?)을 피운 것은 악화되는 경제 상황도 있겠지만, 어떤 세련됨이 첨가된 부분도 한 몫했다고 본다. 지금의 전광훈 등의 극우유튜버, 국민의힘 등의 메시지는 아직 촌스럽다 못해 경악스럽지만(탄핵 반대 집회 및 어제의 서부지방법원 폭동에서도 나를 경악하게 한 것은 그들의 그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언어'였다. '개XX'를 비롯한 온갖 욕설들이 도배된 그 언어들. 탄핵 찬성 집회에서 '욕설'이 나왔던가?), 만약 그 메시지가 조금 더 세련된 형태로 바뀌게 된다면 어떨까. 그때도 우리는 그들을 비웃기만 할 수 있을까.


그냥 나로 국한해서만 말하자면, 결국 이러한 극우의 유혹 앞에서 어떻게든 싸우고 버텨내는 길 중의 하나는 오로지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윤석열 또는 김건희에게서 도무지 한 가지는 상상할 수가 없는데, 그가 어떤 소설, 예를 들어 최은영이나 김금희의 소설을 읽고 감동하는 장면이다. 왜 그것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가. 그 소설이 가진 핵심이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떠한 것의 가장 반대편에 윤석열이나 김건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되도록이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의 가장 반대편에 서려고 노력하고 싶다.  



덧.

오, 쓰는 동안에는 확실히 기침이 멎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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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1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1 1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1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2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5-01-22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쓰셨군요 요즘 한국이 답답해 보여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좋은 영화 보기와 좋은 책 읽기, 그런 걸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는 해야 할 텐데... 요즘은 영화 2배속으로 본다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 있더군요 책은 예전부터 짧게 요약한 게 있기는 했네요 그런 거라도 안 보는 것보다는 보는 게 나을지...

오랜만이어서 쓸까 말까 하다가 쓸데없는 말 썼네요 2025년 일월도 많이 흘러갔군요 맥거핀 님 설 잘 쇠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희선

맥거핀 2025-01-22 08:5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1년에 한 번 글 쓰고 있는데 그래도 잊지 않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 좋은 영화나 책을 보는 것만이 답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는 그게 조금은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 중에 아닌가 생각해요.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쉬운 답 혹은 간명한 메시지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위에 글도 왜 극우로 가는가에 대해 간략하게 썼지만, 사실은 그 안에 매우 복잡한 무엇인가가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하 수선한데, 잘 지내시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건강 잘 챙기시고 좋은 새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각조각 미학 일기 - 미학생활자가 바라본 미술, 음악, 영화
편린 지음 / 미술문화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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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친절한 미학 일기라니. 이 책을 읽다보면 역시 늘 중요한 것은 발화의 내용보다는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옆에서 조근조근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물흐르듯이 말해주는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밀려오는... 무엇인가 알 것 같다!는 착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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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만난 친구입니다."라는 EDITORIAL로 시작한다. 그런만큼 뒤늦게 정보를 접한 친구한테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 정도는 줘도 괜찮잖아? 라고 항변을 하고 싶다.

사실 알라딘에서 날라온 푸시를 회의 중간에 보기는 했다. 어..이런 게 나온다구? 하는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고, 곧 지루하고 물샐틈 없는 회의에 눌려 스마트폰을 꺼낼 따위는 엄두를 내지 못했고 잊어버렸다. 그 이후에 잠깐 광고를 다시 보기는 했지만, 작성할 제안서와 회의 자료와 협조 요청들이 연이어 들어와서 다시 기억상자 속 꺼내기 힘든 위치로 파일이 밀려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어제 선거 뉴스를 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가 뽑은 누군가가 세상을 더 좋게 바꿀까? 더 좋게...예를 들어 그러니까 더 좋은 영화를 보게 해줄까? 잠깐 생각하던 와중에 말이다. 그러든 아니든, 아무튼.. 아아 님은 이미 떠나셨군요.


늘 항상 그런 식이다. 뭔가를 생각하기는 하는데 잊어버린다. 뭔가를 작성하려고 메모를 적어두기는 하는데, 그 메모는 글이 되지 못하고 머리 속 인큐베이터 안에서 생을 마감한다. 최근에 만났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두 권에 대한 메모도 아마 비슷한 루트로 내 기억 속에서(아니 스마트폰 노트 앱 속에서) 조용히 잠들 것 같다.

















이대로 마치기 아쉬워 어제 선거 개표 이후에 붙여보는 짧은 의견 두 가지.

하나는 지나친 욕심은 도리어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것. 탄핵이나 개헌을 염두에 두고 200석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나는 지금의 이 정도가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언제는 200석이 없어서 탄핵을 못했나? 그리고 윤석열이 단 한가지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탄핵 또한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하나는 조금은 맞지 않았던 출구조사에 붙여진 Shy 보수라는 정말 웃긴 소리에 대해. 누군가의 말대로 Shy 보수가 아니라 Shame 보수일 뿐이다. 자기가 보수라고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보수'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는 솔직히 광화문 집회에 나가서 당당히 태극기를 흔드는 노인들이 훨씬 더 '보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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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는 사실 조금 이상하다고 보일 수 있는 둘로 나뉜 듯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영화다. 영화 전반, 소희(김시은)를 둘러싼 주변을 무심하게 따라가던 영화는 소희의 죽음 후,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오유진 형사(배두나)가 소희가 죽은 어떤 일련의 메커니즘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를 취한다. 그러니까 사실 주인공 중에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오유진 형사는 영화가 거의 1시간이 지나가서야 실질적으로 등장하며(그 전에 한 번 살짝 스치고 지나가기는 한다) 오유진 형사와 소희는 끝끝내 만나지 못한다. 오유진 형사가 대면하는 것은 이제 시신이 된 소희일 뿐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비극이 있다.


배두나가 '그알 유튜브'에서 말했듯이 사실 오유진은 형사라기보다는 사건의 메커니즘을 추적하는 시사고발 PD에 가깝다. 다만 '그알'과 이 영화가 다른 점은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그 당시의 소희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쩌면 (시사고발 다큐와 다른)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아닐까. 그러나 물론 이 영화 <다음 소희>의 파괴력이 단지 영화라는 매체의 힘에 기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평가가 될 것이다. 이 영화의 파괴력은, 혹은 힘은, 그러한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남용하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쉬운 선택은 이것들의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다. 시간을 바꾸고 가장 자극적일 수 있는 장면, 예를 들어 소희의 죽음이라든가, 아니면 소희가 콜센터에서 고통의 시간을 겪는 것을 처음으로 돌리는 선택. 심지어는 '그알'과 같은 시사고발물도 이러한 선택을 즐겨 사용한다. 가장 자극적인 장면, 가장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장면을 시작부에 집어넣고, 우리는 '어우어우, 저 나쁜놈'하며 끝까지 화면에 눈길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소희>는 끝내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여학생 소희는 춤을 추고, 친구를 만나고, 학교 선생님의 추천에 따라 콜센터에 들어가고, 쉼 없이 콜을 받다가, 아니 욕설을 듣다가,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형사 유진은 그런 소희를 시신으로 대면한 후, 그녀가 왜 죽음에 이르게 되었나를 생각하며 그 과정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소희는 절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가 등장하는 것은 영화의 가장 마지막 유진이 바라보고 있는 영상 속에서다. 다 지웠으면서도 남겨둔 자신의 춤추던 모습. 그녀가 우리에게 바라봐 주기를 바랐던 것은 그 영상이었다. 열심히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던 한 인간으로의 소희.


사실 영화에서 해결된 것은 없다. 결국 유진은 소희의 시신을 부모님에게 인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교육부에 이르기도 전에 높은 벽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아니 영화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롯이 그 켜켜이 쌓인 정직한 장면들의 힘이다. 무엇인가를 덧씌우기를 거부하고, 끝끝내 참으며 기다렸던 장면들의 힘 말이다. 말이 쉽지, 참으며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영화에 무엇인가를 덧붙이기는 쉬워도 참으며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정직하게 장면들을 쌓은 영화는 정직하고 명징한 질문을 남길 뿐이다.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덧. 

긴 시간을 출퇴근을 하면서 요새 지나간 드라마들을 보고 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나의 해방일지>. 이제 겨우 4화까지를 봤다. 4화의 그 유명한 '구씨'의 멀리뛰기씬. 어쩌면 별것도 아닌 이 장면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3화까지 끈덕지게 캐릭터를 천천히 소개하며 버틴 작가의 힘일 것이다. 영화와 달리 여러 화로 구성된 드라마를 보다보니 어떤 작품이 이야기를 하게 되는 방식, 장면들을 전달하는 방식을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더 글로리>가 던질 것이라고 기대감을 주던 작은 카운터펀치들을 재빠르고 색다르게 던지며 쾌감을 쌓는 방식이라면, <나의 해방일지>는 느리게 캐릭터를 만든 다음, 그 캐릭터들이 (내 머리속에서) 헤엄치게 내버려 두는 방식이다. (물론 4화까지 본 것이니, 그 이후에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게 더 좋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방식을 꿋꿋이 어쩌면 정직하게 지켜가는 그 자체에 이 작품들의 매력이 있다. 아마도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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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로 가는 길 - 운명을 거슬러 문을 열어젖힌 이방인
에이미 스탠리 지음, 유강은 옮김 / 생각의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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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물러서서 누군가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건 쉽다. 하지만 쓰네노가 에도로 가는 나카센도에서 자신의 앞날을 바라보는 건 쉬웠을까. 쓰네노가 행복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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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3-04-19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론 그런 쓰네노의 삶에 대해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에이미 스탠리의 공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가 그런 쓰네노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남긴 수많은 편지의 덕이었다. 쓰네노가 후대의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읽어내릴 수 있었던 것을 알면 소스라치게 놀랐을까, 아니면 좋아했을까. 세상 속에서 영생하는 길은 어쩌면 무엇인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