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조각 미학 일기 - 미학생활자가 바라본 미술, 음악, 영화
편린 지음 / 미술문화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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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친절한 미학 일기라니. 이 책을 읽다보면 역시 늘 중요한 것은 발화의 내용보다는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옆에서 조근조근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물흐르듯이 말해주는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밀려오는... 무엇인가 알 것 같다!는 착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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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만난 친구입니다."라는 EDITORIAL로 시작한다. 그런만큼 뒤늦게 정보를 접한 친구한테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 정도는 줘도 괜찮잖아? 라고 항변을 하고 싶다.

사실 알라딘에서 날라온 푸시를 회의 중간에 보기는 했다. 어..이런 게 나온다구? 하는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고, 곧 지루하고 물샐틈 없는 회의에 눌려 스마트폰을 꺼낼 따위는 엄두를 내지 못했고 잊어버렸다. 그 이후에 잠깐 광고를 다시 보기는 했지만, 작성할 제안서와 회의 자료와 협조 요청들이 연이어 들어와서 다시 기억상자 속 꺼내기 힘든 위치로 파일이 밀려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어제 선거 뉴스를 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가 뽑은 누군가가 세상을 더 좋게 바꿀까? 더 좋게...예를 들어 그러니까 더 좋은 영화를 보게 해줄까? 잠깐 생각하던 와중에 말이다. 그러든 아니든, 아무튼.. 아아 님은 이미 떠나셨군요.


늘 항상 그런 식이다. 뭔가를 생각하기는 하는데 잊어버린다. 뭔가를 작성하려고 메모를 적어두기는 하는데, 그 메모는 글이 되지 못하고 머리 속 인큐베이터 안에서 생을 마감한다. 최근에 만났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던 두 권에 대한 메모도 아마 비슷한 루트로 내 기억 속에서(아니 스마트폰 노트 앱 속에서) 조용히 잠들 것 같다.

















이대로 마치기 아쉬워 어제 선거 개표 이후에 붙여보는 짧은 의견 두 가지.

하나는 지나친 욕심은 도리어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것. 탄핵이나 개헌을 염두에 두고 200석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나는 지금의 이 정도가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언제는 200석이 없어서 탄핵을 못했나? 그리고 윤석열이 단 한가지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탄핵 또한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하나는 조금은 맞지 않았던 출구조사에 붙여진 Shy 보수라는 정말 웃긴 소리에 대해. 누군가의 말대로 Shy 보수가 아니라 Shame 보수일 뿐이다. 자기가 보수라고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슨 '보수'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는 솔직히 광화문 집회에 나가서 당당히 태극기를 흔드는 노인들이 훨씬 더 '보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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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소희>는 사실 조금 이상하다고 보일 수 있는 둘로 나뉜 듯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영화다. 영화 전반, 소희(김시은)를 둘러싼 주변을 무심하게 따라가던 영화는 소희의 죽음 후,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오유진 형사(배두나)가 소희가 죽은 어떤 일련의 메커니즘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를 취한다. 그러니까 사실 주인공 중에 한 명이라 할 수 있는 오유진 형사는 영화가 거의 1시간이 지나가서야 실질적으로 등장하며(그 전에 한 번 살짝 스치고 지나가기는 한다) 오유진 형사와 소희는 끝끝내 만나지 못한다. 오유진 형사가 대면하는 것은 이제 시신이 된 소희일 뿐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비극이 있다.


배두나가 '그알 유튜브'에서 말했듯이 사실 오유진은 형사라기보다는 사건의 메커니즘을 추적하는 시사고발 PD에 가깝다. 다만 '그알'과 이 영화가 다른 점은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그 당시의 소희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쩌면 (시사고발 다큐와 다른) 영화라는 매체가 가지는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아닐까. 그러나 물론 이 영화 <다음 소희>의 파괴력이 단지 영화라는 매체의 힘에 기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평가가 될 것이다. 이 영화의 파괴력은, 혹은 힘은, 그러한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힘을 남용하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쉬운 선택은 이것들의 순서를 뒤바꾸는 것이다. 시간을 바꾸고 가장 자극적일 수 있는 장면, 예를 들어 소희의 죽음이라든가, 아니면 소희가 콜센터에서 고통의 시간을 겪는 것을 처음으로 돌리는 선택. 심지어는 '그알'과 같은 시사고발물도 이러한 선택을 즐겨 사용한다. 가장 자극적인 장면, 가장 시청자들의 눈길을 끄는 장면을 시작부에 집어넣고, 우리는 '어우어우, 저 나쁜놈'하며 끝까지 화면에 눈길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소희>는 끝내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여학생 소희는 춤을 추고, 친구를 만나고, 학교 선생님의 추천에 따라 콜센터에 들어가고, 쉼 없이 콜을 받다가, 아니 욕설을 듣다가,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형사 유진은 그런 소희를 시신으로 대면한 후, 그녀가 왜 죽음에 이르게 되었나를 생각하며 그 과정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소희는 절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가 등장하는 것은 영화의 가장 마지막 유진이 바라보고 있는 영상 속에서다. 다 지웠으면서도 남겨둔 자신의 춤추던 모습. 그녀가 우리에게 바라봐 주기를 바랐던 것은 그 영상이었다. 열심히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던 한 인간으로의 소희.


사실 영화에서 해결된 것은 없다. 결국 유진은 소희의 시신을 부모님에게 인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교육부에 이르기도 전에 높은 벽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아니 영화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롯이 그 켜켜이 쌓인 정직한 장면들의 힘이다. 무엇인가를 덧씌우기를 거부하고, 끝끝내 참으며 기다렸던 장면들의 힘 말이다. 말이 쉽지, 참으며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영화에 무엇인가를 덧붙이기는 쉬워도 참으며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정직하게 장면들을 쌓은 영화는 정직하고 명징한 질문을 남길 뿐이다. 이러한 메커니즘 속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덧. 

긴 시간을 출퇴근을 하면서 요새 지나간 드라마들을 보고 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나의 해방일지>. 이제 겨우 4화까지를 봤다. 4화의 그 유명한 '구씨'의 멀리뛰기씬. 어쩌면 별것도 아닌 이 장면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3화까지 끈덕지게 캐릭터를 천천히 소개하며 버틴 작가의 힘일 것이다. 영화와 달리 여러 화로 구성된 드라마를 보다보니 어떤 작품이 이야기를 하게 되는 방식, 장면들을 전달하는 방식을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더 글로리>가 던질 것이라고 기대감을 주던 작은 카운터펀치들을 재빠르고 색다르게 던지며 쾌감을 쌓는 방식이라면, <나의 해방일지>는 느리게 캐릭터를 만든 다음, 그 캐릭터들이 (내 머리속에서) 헤엄치게 내버려 두는 방식이다. (물론 4화까지 본 것이니, 그 이후에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게 더 좋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의 방식을 꿋꿋이 어쩌면 정직하게 지켜가는 그 자체에 이 작품들의 매력이 있다. 아마도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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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로 가는 길 - 운명을 거슬러 문을 열어젖힌 이방인
에이미 스탠리 지음, 유강은 옮김 / 생각의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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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물러서서 누군가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건 쉽다. 하지만 쓰네노가 에도로 가는 나카센도에서 자신의 앞날을 바라보는 건 쉬웠을까. 쓰네노가 행복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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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3-04-19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론 그런 쓰네노의 삶에 대해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에이미 스탠리의 공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가 그런 쓰네노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남긴 수많은 편지의 덕이었다. 쓰네노가 후대의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읽어내릴 수 있었던 것을 알면 소스라치게 놀랐을까, 아니면 좋아했을까. 세상 속에서 영생하는 길은 어쩌면 무엇인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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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보다는 조금 더 길지 싶은데..] 혼돈 속에 어떻게든 버티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쉬운 질서로 달려갈 것인가. 간단한 문제 같지만 간단하지가 않으며, 유혹은 얼마나 쉽게 악마의 웃음을 숨기며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가. 그럼에도 오늘도 버티고 있는 그 누군가들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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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3-04-19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책 시작부의 요란한 광고는 조금 빼는 게 더 나았으리라고 보지만..그래도 겨우 이런 얘기하실려고 했어요? 라는 그런 말에는 한마디 변명을.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보면 결국 뻔한 이야기만 남는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의 문제 혹은 이야기를 하는 태도의 문제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