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는 의례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지나간 <씨네21>이나 영화 블로그들을 돌아보며 작년의 베스트 영화들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물론, 시간이 나면 그 중의 몇 편을 보기도 한다. 지난 주말에도 시간이 있어 그 중 몇 편의 영화를 보았고, <사라진 시간>은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영화 중의 하나다. (<씨네21>에서 뽑은 올해의 한국영화 4위, 물론 작년에는 코로나 여파로 개봉된 영화가 적었으니 상대적으로 순위들이 인플레이션된 경향이 있어 보인다.)


언젠가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보았을 때는 스릴러나 미스터리 영화같은 인상이 있었는데, 그런 영화는 아니다. (그래도 이 영화는 그나마 '빌미'라도 주었지만 사실은 문제인 게, 영화 소개 프로그램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모든 영화를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처럼 재구성하여 소개하는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 '소중한' 사라진 시간을 어떻게 보상할 거냐는 관객들의 볼멘 소리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아마 대부분은 이 영화를 장르 영화로 생각했을 것이고, 어떤 사건의 진실 찾기 게임을 기대했던 관객의 욕망을 이 영화는 깨끗이 배반하기 때문이다. 잘 짜인 장르물을 기대했던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황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태도는 그런 건 내 알바 아니올시다,인 것 같고 이 영화의 매력도 아마 거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아무튼 딱한 관객들은 어떻게든 황당함의 늪에서 빠져나오고자 애처롭게 버둥거린다. 어떻게든 이야기의 얼개를 짜맞춰 보려는 수많은 영화 리뷰들의 시도가 아마도 그것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말해서 꿈의 얼개를 맞춰보려는 아침의 시도는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물론 나는 이 영화가 일종의 '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런 시도는 덧없다는 말이다.) 도리어 얼개가 맞는 꿈은 급격히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꿈의 매력은 아마도 그 불가해한 이물감이 아닐까. 아니! 아니, 나는 미스터리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아무리 주장해봤자, 그런 거 애당초 없었는뎅?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진한 표정을 지으니, 화내는 이쪽만 더 화가 날 뿐이다.


아무튼 간에. 이 영화의 매력은 도리어 그 중반 이후에 있다. 사건을 둘러싼 마을의 비밀을 어떻게든 밝혀내려고 박형사(조진웅)가, 아니 사실은 관객들이 애쓸 때 영화는 시치미를 뚝 떼고 슬그머니 방향을 돌린다. (사실은 이미 방향은 돌아가 있었다.) 그런데 사실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박형사가 체념한 이후이다. 그가 전화번호를 지갑에 집어 넣고 수업 준비를 시작할 때, 이제 영화는 영화 자체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장르물을 내놓으라고!"라는 관객들의 화를 어르고 달래며 쉰 떡밥이라도 던져주었지만, 이제 영화는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투다. 아니, 나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거야, 보기 싫으면 관두던가요,라는 투랄까.


그 '영화 자체의 욕망'이라는 것을 뭐 여러 갈래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일종의 위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정진영이라는 배우 출신의 영화 감독이 계속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같은 입장의 배우들을 향해서 보내는 일종의 위로. 그러나 그 위로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위로는 이야기를 관통한 후 묘하게 조금 더 확장된다. 처음에는 선생 부부가 이상하다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코웃음치며 듣던 박형사가 뜨개질 선생님 초희(이선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거 많이 아프다고 공감하며 다들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할 때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 속 배우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위무처럼 느껴진다. (이 장면은 카메라, 그러니까 당신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박형사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사실은 우리도 다들 어쩔 수 없이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되어서 살고 있으니까. 맡고 싶지 않은 역할을 기꺼이 맡고 때로는 체념하면서. 우리가 온전한 우리 자신으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온전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좋은 삶일 수 있지만, 다른 역할을 기꺼이 떠맡으면서 적당히 체념하면서 사는 것도 꽤나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영화는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처음의 "참 좋다"와 마지막 "참 좋다"는 분명히 톤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어떤 게 꿈(소설)이고, 어떤 게 현실인가. 혹은 어느 것이 망상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 영화는 그것은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보다는 영화가 묻는 질문은 조금은 핀트가 달라보인다. 시간은 사라졌어도, 여전히 나, 혹은 나의 기억은 남잖아요? 영화는 되묻고 있다.




덧 1.

영화의 초반부 김선생(배수빈)과 그의 아내 윤이영(차수연)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다. 그 이후 등장하여 혼자말을 하거나, 마을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는 박형사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오랜 배우 경력을 가진 정진영 감독이 이 과장이 가져올 단점을 당연히 모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필요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의 영화, 극 중의 극을 보여주는 것은 촬영기법으로도 가능하겠지만, 과장된 연기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배우 출신 감독이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덧 2.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면서 즉각적으로 황규덕 감독의 2007년작 <별빛 속으로>가 떠올랐는데, 이상하게도 그 영화를 이야기하는 리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시간>의 감독 정진영은 이 영화에서 교수 역할로 출연하며, 차수연 배우도 중요한 역할로 나온다. 물론 꿈과 현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이 영화의 내용도 <사라진 시간>과 꽤나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교수로 나오는 정진영이 직접 낭독하기도 하는 이 영화의 중요한 테마인 릴케의 이 시 "파괴하는 시간이 정말 있을까?"도.


시간이 정말 있을까 파괴하는 시간이

쉬고있는 산 위에서 언제 시간이 성을 부숴버릴까

끝없이 신들에게 속해있는 이 마음에게

언제 조물주는 폭력을 휘두를까

운명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처럼

우린 정말로 불안에 찬, 깨어지기 쉬운 존재일까

유년 시절은

깊고도 기약에 찬 유년시절은

그 근원에서 말이 없는 것일까, 훗날에


출처: 영화, 별빛 속으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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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1-21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는 모습을 보면 미스터리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주 바뀌는군요 자신은 그걸 기억하는가 봐요 형사였다는 걸... 그러고 아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건지... 이런 거 언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정말 본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주 처음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시간여행을 하는 사람이 역사속 사람이 되는 것도 있던데, 그것과는 다를 듯합니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꿈일지 현실일지, 그런 게 나중에 나오지 않는군요 나오지 않는다 해도 그것도 진짜일 수 있다 생각하면 나을지...

늘 다른 사람을 연기하던 배우가 자신은 누군가 하는 생각하는 하는 영화도 있지 않던가요 갑자기 그런 것도 생각나는군요 정말 배우만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할 때도 있겠습니다 그게 힘들다 해도 그렇게 사는 것도 대단하겠지요 그런 걸 아주 못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시간이 사라져도 기억이 있다면 그건 정말 있었던 일이기도 하겠지요 기억조차 없다면 더 안 좋을 듯합니다


희선

맥거핀 2021-01-21 18:03   좋아요 0 | URL
사실 비슷한 이야기는 많죠.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고, 기억이 뒤섞이고...조금씩 버전이 다르지 비슷한 내용은 많습니다. 제목이 ‘사라진 시간‘이긴 하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사라졌다,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현실이 바뀌었다,라고 말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흥미로웠던 것은 그런 식의 이야기들은 많지만, 대부분 이걸 미스터리 같은 장르적 관점에서 접근하거든요. 근데 여기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 얼키고 설킨 실타래를 장르적으로 푸는 게 아니라, 어떤 정서예요.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의 어떤 정서. 뭐 그래서 이 영화가 싫은 사람이 더 많은 사람이 많겠지만, 저는 도리어 더 좋았습니다.

그렇겠죠. 인간을 무엇에 버티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기억의 힘이 아닐까요. 무엇인가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힘든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주 큰 힘이 되기도 하겠죠.
 



본 사람들은 대부분 욕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영화들이 있다. 며칠 전에 본 영화 <콜로설>이 그런 경우인데, 네이버에 들어가니 아니나다를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영화를 만든 거임?"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인 것 같다. 사실 스토리만 보면 그렇게 욕을 먹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느껴지는데, "내가 마음먹은 대로 조종하는 거대괴수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어린이들(혹은 낮술먹고 덜깬 어른들)의 헛소리(아니, 로망(老妄))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아마도 이 영화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colossal은 '거대한'이라는 의미이지만, 사실 나는 살짝 비슷한 collapse(붕괴)라는 단어가 내내 연상되었는데, 주인공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대 괴수가 서울(그렇다, 우리 수도 서울)을 붕괴시키는 게 꽤 마음에 들었기도 하지만(가끔 서울을 때려 부수고 싶은 거는 나만 그런거 아니겠죠?), 그보다는 이 영화가 어떤 자아의 '붕괴'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밤새 술먹고 거짓말하다 얹혀사는 남친 집에서도 쫓겨나면서 영화 속에 첫등장하는 주인공 글로리아(앤 해서웨이)도 어떤 붕괴의 양상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글로리아의 친구(이자 사실은 빌런) 오스카(제이슨 서디키스)도 마찬가지다. 즉 그녀(혹은 그)가 서울을 때려 부술 때 사실은 그들은 그들 자신의 내면을 때려 부수고 있다. 글로리아가 뉴스를 보고 경악하며 어떻게든 서울을 붕괴시키지 않으려고 애쓸 때 사실은 그녀는 그녀 자신을 붕괴시키지 않으려 애쓴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은 나는 그냥 이 영화가 어떤 은유처럼 느껴진다. B급 괴수물의 외양을 두른 이 영화는 사실 붕괴되어 가는 어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사이드 아웃'이다. 하필이면 아침 8시 5분에 동네 놀이터에 등장하여야만 괴수 분신 기제(개인적으로는 '로보트 태권브이 방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주인공 훈이의 태권동작을 그대로 따라하는 로보트 태권브이!)가 작동한다는 설정은 바로 그 시간과 장소야말로 대책없는 술꾼들이 자신의 붕괴되어가고 있는 내면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자 장소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줄줄이 학교로 향하는 그 시각(저 아저씨는 뭐야 엄마? 아유 빨리 학교나 가! 나중에 저렇게 되고 싶어?), 밤새 먹은 술이 여전히 덜깬 채로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집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노라면, 혹은 (더 최악으로는) 모래밭에 파전이라도 하나 부쳐낸다면 밀려오는 자괴감을 그야말로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영화의 마지막도 그렇게 단지 농담처럼만은 느껴지지 않는데, (혹시라도 이 쓰잘데기 없는 리뷰를 보고 영화를 보실 분을 위해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다.) 그것은 어쩌면 결국 그 붕괴를 이겨내는 길은 누군가의 위치에 서보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타인의 자리에 서서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알코올이든 혹은 자기혐오든 무엇인가에 찌든 자신을 조금은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 붕괴의 양상에서 조금이라도 기어나오는 방법임을 영화는 말해주는 게 아닐까(라는 헛소리).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나는 앤 해서웨이가 가끔은 정신줄을 놓고 이상한 짓을 하는 영화가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진지하게 각 잡고 등장하는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에서보다는 <신부들의 전쟁>이나 <겟 스마트> 같은 영화에서의 그 큰 눈을 굴리며 살짝 맛이 간 앤 해서웨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마음에 들거다. 또한 제이슨 서디키스의 연기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멀쩡한 미친 짓' 연기는 꽤나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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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1-1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에서 서울을 무너뜨리다니... 영화에서 서울이 어땠길래 그랬을까 싶네요 자신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괴수라니... 왜 이런 걸 만들었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맥거핀 님은 다른 걸 보셨군요 그것도 괜찮은 거네요 다른 데서 자신을 바라보기, 그거만큼 어려운 게 없는 듯합니다 저는 늘 제가 한심하게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제대로 못하고... 그냥 이렇게 살지 뭐 할 때가 더 많아요

일본 드라마, 만화에서는 이상한 어른이 보이면 부모가 아이한테 저런 거 보면 안 돼 하더군요 그런 건 어디나 마찬가지겠습니다


희선

맥거핀 2021-01-14 15:21   좋아요 0 | URL
원래 도쿄에서 찍으려다가 ‘고질라‘와의 저작권 분쟁(?) 때문에 서울에서 찍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사실 보다 보면 왜 쓸데없이 이런 이야기 찍으려고 돈을 쓰지? 싶은 부분이 있어요. 제작비도 1500만 달러나 들었다고 하던데...그런데 뭐 사실 그게 영화의 매력 아니겠어요. 왜 굳이 이런 걸 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주는가, 싶을 때가 있는데 그걸 보고자 하는, 보여주고자 하는 게 바로 영화의 매력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는 트랜스포머 같은 거도 그냥 자동차 변신이 다 인거 잖아요. 그냥 변신 장면 그 자체를 보고 싶어서 영화를 찍는 거죠.)

뭐 사실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요? 저도 제가 한심해요. 가끔 많이 그렇죠.
 



일 때문에 자료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뒤늦게 찾아본 기사는 이 사건에서 일어난 일들을 무심하게 나열한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근대지진 관측사상 최대 규모(리히터 규모 9.0) 지진이 일본 도호쿠 지방을 강타했다. 몇 차례의 여진이 이어졌고, 한 시간 뒤 최대 높이 40.5m의 초대형 쓰나미가 연안 지역을 덮쳤다. (중략) 사고 당일 쓰나미로 이 지역 어린이 75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74명이 미야기현의 작은 시골 마을 가마야의 오카와 초등학교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이 학교의 재학생은 108명. 이 중 78명이 파도에 휩쓸렸고 단 4명만이 살아서 나왔다. (중략)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교사 엔도 준지 뿐이다. 그는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대피하는 과정에서 파도가 들이닥쳤고, 모든 절차를 따랐지만 속수무책으로 파도에 휩쓸려 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진은 오후 2시 46분에 일어났고 학교의 시곗바늘은 3시 37분에 멈췄다. 아이들에게는 51분의 시간이 있었다. 200m 남짓 떨어진 대피소까지는 달려서 고작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51분 동안 아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국일보 기사 '동일본 대지진 당시 오카와 초등학생들은 왜 가만히 있었나' 중에서>


그러나 가끔은 사실의 무심한 나열이 더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사건을 6년에 걸쳐 취재하고 그 내용을 담은 리처드 로이드 패리의 책 <구하라, 바다에 빠지지 말라>을 읽으면서 나를 사로잡았던 정서는 그 어떤 '고도로 조작된 무심함'에서 비롯되는 무서움이다. 그는 <더 타임스>의 아시아 담당 특파원으로서 한 걸음 뒤에 물러서서 이 책을 썼다. 한 걸음 뒤에 물러섰다,라는 것은 내용을 부실하게 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아이들을 잃은 부모가 아니었고, 그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주민도 아니었고, 지방 공무원도 아니었고, 부모들을 위로한 승려도 아니었다. 그는 한 걸음 뒤에 물러서려고 어떻게든 애썼기 때문에 보다 많은 것을 들려줄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지 사실을 나열하고 그것 자체에서만 어떤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왜 교사들은 바로 학교 뒤에 있던 산으로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교통섬으로 가려 했던가, 왜 시간은 지체되었고 아이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는가,와 같은 사건의 진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그 뿐만은 아니다. 도리어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조금 다른 방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시신을 빨리 찾은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는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가 결국 얼굴을 안 볼 정도로 갈라서는가, 혹은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는 일본인의 특징이 이 사건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와 같은 사회학자적인 입장에서 흥미를 가질 이야기도 있고, 아니면 아이들과 이야기하려고 심령술사를 찾는 부모들과 쓰나미에 휩쓸린 영혼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조금은 그대로 믿기 어려운 내용들도 이 책에는 켜켜이 쌓여있다. (그러나 나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담담한 술회들은 마음을 짓누른다. (물론 그 부모들을 인터뷰한 저자의 마음도 짓눌렀을 것이다. 위에 '고도로 조작된 무심함'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책의 초반부,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 아침과 아이들의 시신을 찾던 날을 회상하는 부모들의 목소리를 담은 몇 줄의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부모들은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지진이 일어난 후 '시간이 있었다'라는 사실이다. 즉 지진이 일어난 후 쓰나미가 오기까지는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으며,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몇몇 아이들은 이렇게 살았다.) 그 공백에서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부모들의 기억은 때로 한 가지 사물이나 사실에 포커스를 맞춘다. 아이들이 그날 아침 신고간 신발이나 옷, 아침에 아이들이 던졌던 싱거운 질문.


그렇게 연말에서 올해로 넘기는 시간 동안 나는 이 책을 느릿느릿 읽었다. 코로나19라는 거대한 재난 상태에서 또다른 재난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었고 몇 가지 질문을 하게 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고 있다고만 말해지는 무서운 쓰나미. 그것은 다르지만 묘하게 닮아 있다. 재난을 겪고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은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바꾸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가 않다. 부모들은 어쩌면 '그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이들의 죽음을 다른 무엇으로 치환하려 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아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굴착기 자격증을 따고 매일 진흙을 퍼올리는 일일 것이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심령술사를 찾아 매일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는 일일 것이다.


물론 그 부모들에 비길 수야 없겠지만, 우리도 크건 작건 이 재난들을 무엇으로 바꾸기 위해 애를 쓴다. 우리는 이것들을 무엇으로 바꾸고 있는가. 내 노력 중의 하나는 이 책을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년에 만난 최고의 책. (이라고 해두자. 올해까지 읽기는 했지만 올해의 최고의 책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지나간 시간이 너무 짧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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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1-12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아이들이 피하지 못했다니,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건 나왔을지... 저는 그런 게 더 알고 싶네요 그걸 안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겠습니다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모를 테고... 이걸 보니 세월호가 생각나는군요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간 부모도 있었군요 그러지 못한 부모는 지금도 마음이 아프겠습니다 그날이 마지막이 될지 몰랐겠지요 시신을 찾으면 좀 나을지... 아무것도 없으면 아이가 죽었다고 믿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살았다고 믿고 기다리지도 못하겠네요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까요


희선

맥거핀 2021-01-12 09:34   좋아요 1 | URL
책 내용대로라면 교사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허둥지둥했던 것 같고, 패닉 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쓰나미의 위험을 과소평가했던 것도 같구요. 뭐 사실 대부분의 사건들이 그렇듯 여러가지가 중첩되었던 것 같아요.

책에 보면 책을 쓰는 시점(2018년)까지도 아이를 찾지 못한 부모가 나와요. 근데 포기를 못하고 계속 아이들을 찾으러 수색을 계속하는 이야기가 나와요. 우리 세월호 사건에서도 끝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부모들이 있었죠. 공식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한 걸로 아는데, 사실 부모의 마음이라면 지금도 여전히 계속 찾고 싶을 겁니다.
 



아무리 하루키라도 이런 편집을 한 102페이지짜리 책을

13,500원 정가를 붙여 나오다니.

많은 책들이 단지 팬시 상품으로서 기능하는 것으로 전락한지 오래지만

이런 책은 안 사는 게 맞다.


하긴 책을 팬시 상품으로 내세우는 트렌드를 만든 본진에서

이런 소리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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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0-10-21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팬으로서 저도 지금 책 받아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책값을 다시 확인했고요. 이건 너무한데요. 일본에서 하루키의 예전 책을 우리나라와 계약할 때 기억은 정확치 않은데 어마어마한 선인세를 요구했다던 기억까지 소환되네요. 그건 하루키의 문제일까요, 일본 출판사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우리 나라 출판사의 자세 문제일까요. 착잡하네요.

맥거핀 2020-10-22 12:57   좋아요 1 | URL
말씀듣고 일본판은 어떤가 싶어, 일마존 들어가서 찾아보니 일본판도 한 가격하네요. 1320엔이니까요. 책 가격을 뭐 페이수에 비례해서 매길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렇게 단편소설 분량 밖에 안되는 글을 이런 식으로 책으로 묶어내는 것은 썩 유쾌하지가 않네요. 저런 것은 작가의 명성을 도리어 깎아먹는 일로 보이기도 하구요.

다락방 2020-10-22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합니다. 저는 지난번 하루키 해피버스데이 였나, 그 책도 사놓고 너무 어이없었어요.. ㅠㅠ

맥거핀 2020-10-22 13:00   좋아요 0 | URL
요새 이런 게 일종의 트렌드인 거 같기는 합니다만, 가끔 보면 조금 심하다 싶은 게 있죠. 무거운 책을 들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춘 것일까요..? ;;;

2020-12-18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1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28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21-01-1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러스트 작가도 있으니 그 저작권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하루키도 일종의 브랜드화 되어서 살 사람은 사니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거 같아요^^;

맥거핀 2021-01-13 16:56   좋아요 0 | URL
뭐 사실 출판사만 탓할 일도 아니지요. 이런 책을 원하는 독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대세를 잘 따라가고 있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죠. 저같은 사람은 점차 올드스쿨이 되어가는 느낌입니다.
 


<나보코프 문학 강의>의 몇 대목.


그러나 기성품처럼 진부한 일반화부터 시작한다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니 책을 이해할 실마리를 잡기도 전에 책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바리 부인>이 부르주아를 비판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미리 품고서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만큼 작가에게 지루하고 지독한 일은 없습니다. 예술 작품은 언제나 새로 창조된 세상임을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 p. 43


좋은 독자는 책에서 진짜 삶, 진짜 인간 등을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압니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 사물, 상황의 현실성은 전적으로 그 책의 세계에 달려 있습니다. 독창적인 작가는 항상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죠. 어떤 등장인물이나 사건이 이 세계의 패턴에 들어맞는다면, 우리는 예술적 진실의 기분좋은 충격을 경험합니다. 한심한 하청 문사인 비평가들이 '진짜 삶'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 인물이나 사물을 대입했을 때 그들이 아무리 비현실적으로 보여도 상관없습니다. 천재적인 작가에게 진짜 삶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p. 55


문체는 도구도 아니고 방법론도 아닙니다. 단순히 단어의 선택만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인 문체는 작가의 개성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 또는 특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문체를 말할 때는, 예술가 개개인의 독특한 본질, 그리고 그것이 예술적인 작품 속에 표현되는 방식을 뜻합니다.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만의 문체를 갖고 있지만, 우리가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은 천재적인 작가들 각각의 독특한 문체 뿐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 p. 139


문학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에 대한 연구는 주로 기질이나 교육 때문에 진정한 문학의 미학적 울림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쪽 어깨뼈 사이의 그 분명한 짜릿함과 설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말입니다(몇 번이나 거듭 말하지만, 등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면 책을 아무리 읽어도 소용없습니다).

- p. 143


하지만 소설이나 시에 대해 실화냐는 질문을 던지지는 마세요. 스스로를 놀리지 맙시다. 문학에 실용적인 가치가 전혀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하필이면 문학 교수가 되고 싶어하는 특수한 경우뿐이겠죠. 에마 보바리라는 여성은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지만, <보바리 부인>이라는 책은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겁니다. 책은 사람보다 오래 삽니다.

- p. 249~250


맨 처음 이 사건들을 촉발한 사소한 요소가 무엇이든,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 어떠했든, 그가 프랑스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했든 모두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에마 보바리라는 여주인공에게 사회가 객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합니다. 플로베르의 소설은 인간의 운명이라는 섬세한 미적분을 다룬 작품이지, 사회적 조건화라는 산수를 다룬 작품이 아닙니다.

- p. 251


오스틴 폴더의 다른 메모에서 나보코프는 플롯을 "미리 생각해둔 이야기"로 정의한다. 테마, 테마의 가닥line은 "둔주곡에서 어떤 곡조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듯이 소설 속 여기저기에서 반복되는 이미지 또는 생각"이고, 구조는 "책의 구성, 사건 전개,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을 야기하는 것, 한 테마에서 다른 테마로의 이행, 인물들을 교묘하게 등장시키는 것, 또는 새로운 행동 묶음이 시작되거나 다양한 테마가 서로 연결되거나 소설을 진행시키는 데 이용되는 것"이며, 문체는 "저자의 특별한 어조, 어휘, 독자가 어떤 문장을 보았을 때 이건 디킨스가 아니라 오스틴의 문장이라고 외치게 만드는 어떤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편집자

- p. 64



앞의 몇 인용문에서 보듯이 나보코프는 작품의 사회경제적 측면이나 역사적 측면은 거의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보다는 작품에서 나타나는 플롯, 테마, 그리고 문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나보코프 문학 강의>에서 그러한 것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예를 들어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의 경우라면,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소송 테마, 미스터리 테마, 아이 테마를 쫓거나, 작품의 구조적인 특징을 살펴 보거나, 무뚝뚝한 나열이나 비유, 돈호법과 같은 디킨스의 문체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 나보코프가 보았더라면 아주 좋아했을 영화가 있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2000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타이완의 중산층 가정의 가족들이 겪는 소소한, 그러나 결코 소소하지만은 않은 며칠 간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를 두고 삶의 가치와 지향점에 대한 감독의 물음과 해답, 또는 과거와 현대가 묘하게 결합되며 가족이 재구성되는 타이베이라는 보편적이지만 특수한 공간을 다룬 것이라고 소위 비평적 관점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나보코프의 관점대로라면 그것은 집어치워야 할 것이다. 그의 눈을 빌려서 보면,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사회나 시간, 공간이 아니라 플롯이나 테마, 그리고 문체 - 영화로 치면 촬영기법이라고 해야할까 - 와 같은 것이고, 사실 그것을 빼놓고 보는 것은 영화의 10분의 1도 채 못보는 것이기도 하다. 초반의 10분을 한번 살펴보자.


영화의 시작. 짧은 암전이후 결혼식장에 서 있는 신랑 신부의 모습이 보인다. 신부는 어딘지 불만족스러워하는 듯 보이고, 남자는 그런 여자의 눈치를 살짝 본다. 그리고 음악은 어딘지 모르게 살짝 불길하다. 이것은 물론 뒤이어 등장할 다른 여자와 그 여자와 연결되어 등장할 이야기를 슬며시 암시한다.


다시 짧은 암전 후 음악이 서정적으로 바뀌며, 아이들이 등장한다. 모인 하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지만, 카메라가 집중하여 비추는 것은 아이들이다. 남자 아이를 둘러싼 여자 아이들. 뒤에 선 키가 큰 여자 아이들은 작은 남자아이의 머리를 번갈아가며 찌르는 장난을 치고 있다. 이는 나보코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가지의 테마를 가져온다. 하나는 여자 아이들에게 앞으로 계속 시달림을 받게 될 남자아이의 테마,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람은 누구도 뒤를 볼 수 없다는 보다 큰, 아마도 작품의 전체를 가로지르는 테마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앞서 등장했던 신랑 신부와 결혼식에 참석한 신랑 누나 부부와의 대화. 가장이 되었으니 앞으로 잘하라는 매형의 말이 앞서 뭔가 불만족스러워하던 신부와 연결된다. 또한 아이들이 어디 갔는지 찾는 장면이 바로 아이들의 모습과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등장인물들을 소개한다. 등장한 가족의 큰 딸인 팅팅은 할머니와 대화를 이어가는데,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은 앞으로 이어지게 될 내용을 다시 암시한다. 


그리고 다 끝난 결혼식장에 등장하는 또다른 여자 윤윤. 불편해보이는 할머니에게 자기가 며느리가 되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며 막무가내로 이야기하는 여자의 모습은 아주 극 초반부의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이는 여러가지의 효과를 불러오는데. 거침없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윤윤의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며, 동시에 이 장면 이후 불편함이 한층 가중되어 보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이후 이어질 사건에 대한 세심한 복선이 된다. 또한 이는 앞으로 이어질 아디(신랑)와 윤윤을 둘러싼 일종의 삼각관계 테마이기도 하다. 이 삼각관계 테마는 앞으로 여러 결로 여러 인물을 통해 반복된다. 


집안의 가장이자 아디의 매형 NJ와 딸 팅팅은 뒤집어진 결혼식 사진 뒤에서 대화를 나눈다. 할머니가 집에 빨리 가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하는 팅팅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길하며 뒤집어진 결혼식 사진은 그러한 분위기를 가중시킨다. 물론 이는 신랑 아디와 신부 샤오얀의 앞으로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서야 검은 화면에 제작사 등을 표시하는 오프닝 크레딧이 나온다. 그러나 이 오프닝 크레딧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샤오얀 어딨냐며, 나오라고 그러다 천벌받는다며 소리지르는 윤윤의 목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사실 이 영화는 이처럼 화면과 매칭되지 않는 목소리 또는 대화가 계속 이어진다. 즉 화면에는 어떤 이들의 모습이 나오지만 같이 붙어 나오는 소리는 그 사람들의 목소리 혹은 대화가 아닌 경우가 많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불균질해 보이지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기도 하다. 사실 우리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보고 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으니까. 물론 그리고 이는 앞의 주요한 테마를 다시 연상시킨다. 우리는 누구나 뒤를 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서야 제목이 나온다. 하나 그리고 둘(A One and A Two). 어쩌면 윤윤 그리고 아디와 샤오얀. 그러나 그것은 물론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샤오얀 그리고 아디와 윤윤. 오로지 그것은 관점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 할머니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다. 이 때 카메라는 오롯이 할머니만을 비추지만, 차에서 내리는 할머니를 팅팅이 부축한다. 아마 운전은 NJ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팅팅과 할머니가 집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을 CCTV가 비추고 있다. 왜 우리는 이 화면을 CCTV로 봐야 하는가. 카메라와 CCTV라는 이중의 화면, 이중의 필터를 거친 화면. 이는 카메라라는 어떤 절대자의 존재를 다시 상기시키며, 동시에 뒤를 보게 하는 카메라라는 거대한 테마를 다시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보다 간단하게 말하고 싶다. 즉 불길하다. 나는 불길하다는 것을 여러 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잠겨진 문.


엘리베이터를 올라오니 가족의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를 오고 있고, 옆집의 이사온 리리와 팅팅은 처음으로 만난다. 앞으로 팅팅에게 이어질 또다른 테마를 위한 시초가 여기서 자연스럽게 변주된다. 카메라는 팅팅의 집안을 느리게 비추다가 부엌을 정리하는 팅팅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화면에 쓰레기를 버리라고, 그리고 베란다에도 쓰레기가 하나 더 있다고 말하는 NJ의 목소리를 입힌다. 자, 이 쓰레기가 불러올 것.


이 말을 하는 NJ는 방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중인데, 그는 멍한 표정으로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내가 뭘 찾으러 왔더라? 그리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팅팅의 모습이 여기에 붙는다. 이것은 두 가지의 잊음으로 변주된다. 하나는 이 잊음의 테마의 반복. 잠시 후에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내가 왜 내려왔더라?라고 말하는 어떤 남자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는 무엇인가를 잊고 살아온 NJ의 이야기로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팅팅이 하나의 쓰레기는 버리지만 다른 하나(베란다에도 있다는 그 쓰레기)는 잊게 될 것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녀(팅팅)은 왜 잊어버렸을까? 쓰레기를 버리러 간 주차장에서 리리와 그녀의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며, 베란다에서 쓰레기를 정리하다가 다리 밑으로 밀회를 나누는 리리와 남자친구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잊음은 다음의 이어질 일련의 사건들과 이어진다.



결혼식장에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탄 팅팅과 아빠 NJ의 대화는 샤오얀과 아디, 윤윤의 관계를 보는 이들에게 간단히 정리해서 들려주며, 동시에 이제 늙었나보다,라고 말했다는 할머니, 그리고 그 할머니에게 일어날 사건을 다시 암시한다. 물론 팅팅이 이 말을 꺼낸 것은 단순히 샤오얀과 아디, 윤윤의 이야기를 보는 이들에게 정리하여 보여주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삼각관계가 다시 팅팅 자신에게도 비슷하게 변주될 것임을 이 장면은 묘하게 연상시킨다.


그리고 다시 결혼식장, 식당에서 극성맞게 축하를 받는 신랑 아디와 신부 샤오얀. 이어지는 장면에서 다시 처음 등장했던 작은 남자아이, 그러니까 가족의 막내 양양은 식당 밖에서 결혼식에 참석한 다른 키큰 여자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신발마저 빼앗긴다. 침울하게 다시 식당 테이블에 돌아온 양양의 모습을 카메라가 비추지만, 이 때 이 화면에 붙는 대화는 양양의 엄마(민민)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어른들과의 대화이다. 임신을 한 샤오얀이 흠이 될 게 없다는 엄마의 말에 다른 남자 하나가 '여자는 그런 식으로 남자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즉 양양의 발목에 있던 신발은 이미 여자아이들에게 붙잡혔으며, 이때 양양은 슬며시 '뒤돌아본다'. 여자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즐겁게 노는 중이다.



이게 겨우 영화의 시작 후 10분이다.

그리고 버릴 단 하나의 씬도 없이 결혼식장에서 시작하여 장례식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2시간 50분이 넘는 영화이기도 하다. 2000년에 개봉한 이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을 나보코프는 볼 수 없었지만, 그리고 나보코프가 영화를 좋아했는지도 알 수 없지만, 혹시라도 보았더라면 그는 아마도 척추에 "틀림없이 찌릿찌릿한 느낌"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장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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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20-08-27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풍이 지나가고...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 영화가 갑자기 보고 싶다. 지금 이 시간들은 끝나지 않은 거대한 태풍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바람은 잦아들고 매미는 울고 있지만..보이지 않은 태풍은 여전하다.

희선 2020-08-28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게 별일이었군요 앞으로 일어날 일 같은 거, 여자아이한테 괴롭힘 당하는 모습... 그런 건 정말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듯합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게 된다니... 결혼식으로 시작하고 장례식으로 끝난다니, 할머니한테 보이는 안 좋은 모습은 그거였나 싶네요 할머니가 죽으리라고 생각하다니, 아닐 수도 있을 텐데... 이름이 같은 글자 두번 쓰는 사람이 많네요 그건 그저 그 나라 사람 이름이 그런 것뿐이겠습니다

태풍 하나 지나갔는데 또 온다고 하더군요 2020년이 오기 전에는 뭔가 좋은 해일 거야 한 사람 많았을 텐데, 그렇지 않은 해군요 세상도 그렇고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게 세상 때문일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 영향이 있는 것도 같군요


희선

맥거핀 2020-08-31 10:23   좋아요 1 | URL
사실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더 좋아지는 영화들도 있거든요. 이 영화의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큰 울림을 줍니다. 근데 그 힘은 그 메시지 자체라기보다는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사실 그런 게 영화라는 것의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를 직조하는 방식.

뭐 물리적인 태풍도 그렇지만, 코로나가 창궐하는 지금 이 시기는 뭔가 태풍의 한가운데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대로 이런 해가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피로합니다, 피로해요. 코로나도 그렇지만, 그 코로나를 앞에 두고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이 너무 많고 필요없는 논쟁들도 많아요. 그냥 조용히 영화나 보고 싶은 요즘입니다. 바로 <하나 그리고 둘> 같은 영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