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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시인들
폴 베를렌느 지음, 임민지 옮김 / 필요한책 / 2025년 7월
평점 :

3.5점 ★★★☆ B+
절반으로 갈라진 랭보(Arthur Rimbaud)의 짧은 인생은 ‘물과 기름’과 같다. ‘물’은 시상(詩想)이 홍수마냥 흘러넘치는 조숙한 시인의 삶이다. 랭보는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시를 썼다. 그의 첫 번째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출간된 해는 1873년. 이때 당시 랭보는 열아홉 살이었다.

‘기름’은 끈끈한 노동자의 삶이다. 랭보는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고국과 완전히 다른 타지의 날씨는 랭보의 연약한 몸을 괴롭혔지만, 랭보는 꾹 참고 일했다. 서커스단의 사무직원, 식민지 산물 회사의 직원, 채석장 회사의 작업반장, 건축업체의 관리 감독, 커피콩을 골라내고 포장하는 회사의 관리자, 아프리카의 무기 거래 상인. ‘기름’의 시대에 랭보는 틈틈이 시를 쓰긴 했지만,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지 않았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시인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다. 여기저기 돌아니면서 일하느라 시상이 폭삭 늙어버린 랭보. 일과 방랑에 중독된 랭보는 고향 친구에게 자신은 더 이상 문학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본인 스스로 ‘물’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랭보의 나이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시 쓰는 삶을 스스로 포기한 랭보를 여전히 ‘시인’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폴 베를렌(Paul Verlaine)이다. 랭보와 베를렌은 함께 여행하고, 토론하고, 질투심이 섞인 말다툼을 할 정도로 뜨겁게 사랑했다. 베를렌은 아내를 버리고 랭보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그러나 사랑의 여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화를 참지 못한 베를렌은 랭보를 향해 권총 두 발을 쏜다. 다행히 두 개의 총알은 랭보의 목숨을 비껴간다. 살인 미수로 체포된 베를렌은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다.
베를렌은 대중과 문단 모두에서 잊힌 랭보의 문학적 재능을 아까워했다. 그는 랭보처럼 관습에 도전하고 개성 충만한 시를 쓴 무명 시인들에게 ‘저주받은 시인’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베를렌의 시 비평서 《저주받은 시인들》은 랭보를 포함한 여섯 명의 시인의 작품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해설한 책이다. 오늘날 ‘저주받은 시인’ 또는 ‘저주받은 예술가’는 재능은 뛰어나지만,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예술가를 가리킬 때 쓴다. 하지만 베를렌이 생각하는 ‘저주받은 시인’은 세상에 편입된 삶을 거부했다. 그들은 독자의 문학 취향에 부합하는 시를 쓰지 않는다.
베를린이 찾은 6인의 저주받은 시인은 랭보, 트리스탕 코르비에르(Tristan Corbiere), 스테판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마르슬린 데보르드 발모르(Marceline Desbordes-Valmore), 빌리에 드 릴라당(Villiers de L’Isle Adam), 그리고 ‘가엾은 를리앙(Pauvre Lelian)’이다.
베를렌은 ‘가엾은 를리앙’이 가장 우울한 운명을 지닌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사실 ‘가엾은 를리앙’은 베를렌이 자신의 이름 철자를 바꿔 만든 가명이다. 베를렌은 왜 자신의 책 마지막에 ‘자기소개서’를 썼을까? 랭보 총격 사건 이후로 베를렌은 가톨릭에 귀의하여 종교적인 분위기가 강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전 연인 랭보는 종교에 헌신하는 시인으로 변한 베를렌을 비판했다. ‘가엾은 를리앙’은 가톨릭 신앙을 드러낸 시를 쓰는 베를렌의 분신이다. 베를렌은 ‘화려하고, 나른하며, 신경질적 어조’가 반영된 젊은 시절의 시들과 ‘엄숙하고 단순한 어조’로 읊는 종교적인 시는 결국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시상에 잠기는 대로 시를 쓰는 자유가 있다고 강조한다. 베를렌은 동료 시인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 ‘저주받은 시인’이다.

명예와 긍정적인 평가를 좇아가면서 글 쓰는 작가는 불행하다. 이런 작가는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한다. 본모습이 없는 글을 쓰게 만드는 저주가 작가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힌다. 정말로 저주받은 시인은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이와 반대되는 베를렌과 ‘저주받은 시인’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시를 쓴다. ‘저주받은 시인’의 유일한 독자는 시인 본인이다. 그들은 ‘독자(獨自)적으로 시를 쓰는 독자(讀者)’다.
<‘독자적인 독자’ cyrus가 쓴 주석>

* 65~66쪽
우리는 이 시의 정신을 매우 혐오하는데, 그 정신은 노년기의 불경스러운 미슐레[주1], 여인들의 더러운 속옷 아래, 그리고 파르니 뒤로 숨은 미슐레와의 불행한 만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다른 미슐레는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존경한다).
[주1] 해당 인용문에서 베를렌이 언급한 랭보의 시는 『첫 성체 배령』(1871년)이다. 《저주받은 시인들》을 쓸 무렵(1888년), 베를렌은 가톨릭 신자였다. 『첫 성체 배령』은 제목과 상반되게 가톨릭 신앙과 그리스도교를 조롱하는 시다. 그래서 베를렌은 이 시에 드러난 랭보의 ‘반가톨릭적 정신’을 혐오한다고 비평했다.
쥘 미슐레(Jules Michelet)는 프랑스의 역사가다. 그는 가톨릭의 권위주의를 비판한 볼테르(Voltaire) 계열의 반교권주의자다. 미슐레는 187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4년 전에 나폴레옹 3세 중심의 군주정(제2공화국)이 종식되고,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3공화국 초창기에 정계에 진출한 공화주의자들은 반교권주의자였다. 『첫 성체 배령』을 쓴 1871년의 랭보는 반교권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젊은 시절 베를렌은 제3공화국 출범을 지지했고, 시민 혁명 정부인 파리 코뮌(Paris Commune)에 협력했다. 랭보 총격 사건 이후부터 보수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베를렌은 모순적인 인간이었는데, 1878년부터 시를 가르치면서 알게 된 뤼시앵 레티노아(Lucien Létinois)라는 제자와 동성애 관계를 맺는다. 제자의 요절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베를렌은 방탕한 생활을 한다. 아무튼 종교에 빠져 정신이 늙어버린 말년의 베를렌은 랭보의 반가톨릭적 정신이 불경스럽게 보였을 것이고, 『첫 성체 배령』이 반교권주의의 영향을 받은 시라고 비평한다.
베를렌은 종교 비판적인 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혁명을 일으켜 국가 권력을 무너뜨린 프랑스 민중을 지지한다. 미슐레는 ‘민중’을 프랑스 혁명의 주체로 보는 역사관을 주장했다. 1846년에 발표한 《미슐레의 민중》(조한욱 옮김, 교유서가, 2021년)은 그의 대표작이며 민중 친화적인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즐겨 읽었다. 따라서 베를렌이 존경한다는 ‘다른 미슐레’는 《민중》을 쓴 역사가 미슐레를 의미한다.
[참고 문헌]
* 아르튀르 랭보, 한대균 옮김, 《나의 방랑》 (문학과지성사, 2014년)
* 폴 베를렌, 윤세홍 옮김, 《베를렌 시선》(지만지, 2013년)
* 삐에르 쁘띠필, 나애리 · 우종길 옮김, 《광인 뽈 베를렌느》 (역사비평사, 1991년)
* 롤랑 바르트, 한석현 옮김, 《미슐레》 (이모션북스, 2017년)
[주2] 베를렌이 《저주받은 시인들》에서 인용한 랭보의 시는 총 여덟 편이다. 『모음들』, 『저녁 기도』, 『앉아 있는 자들』, 『놀란 아이들』, 『이 잡는 여인들』, 『취한 배』, 『첫 성체 배령』, 『파리가 다시 북적댄다』. 이 작품들은 여러 종의 번역본이 있는 랭보 시(선)집에 수록되어 있다. 여덟 편의 시가 모두 실린 번역본은 《나의 방랑》(한대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년)이다.

※ 작품명은 번역본에 표기된 제목이며 번역본의 목차 순으로 적었다.
* 《지옥에서 보낸 한철》(최완길 옮김, 북피아, 2006년, 절판)
『깜짝 놀란 어린아이들』, 『저녁의 기도』, 『모음들』, 『이를 잡는 여인들』, 『취한 배』
* 《지옥에서 보낸 한철》(김현 옮김, 민음사, 2016년, 개정판)
『모음』, 『취한 배』
* 《랭보 시선》(이준오 옮김, 책세상, 2001년, 절판)
『모음들』, 『최초의 성체 배령』, 『취한 배』
* 《랭보 시선》(곽민석 옮김, 지만지, 2012년)
『모음들』, 『이 잡는 여인들』, 『취한 배』
* 《나의 방랑》(한대균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년)
『놀란 아이들』, 『앉아 있는 자들』, 『저녁 기도』, 『파리의 향연 혹은 파리가 다시 북적댄다』, 『모음들』, 『첫 성체 배령』, 『이 잡는 여인들』, 『취한 배』
* 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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