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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왕 -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ㅣ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마리노 네리 글 그림, 이현경 옮김 / 미메시스 / 2010년 11월
절판
죽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예술 작품이라면 한스 발둥 그린의 <죽음과 소녀>(1518~1520년 작)가 유명하다. ' 죽음과 소녀 ' 모티브는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단골 레퍼토리였는데 에곤 실레가 그린 <죽음과 소녀> 역시 유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필연적인 숙명인 죽음을 공감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라면 단연 한스 발둥의 그림이다.
중세 말기부터 르네상스 시대에 걸쳐 수많은 전쟁과 기근, 설상가상으로 페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전염병이 전 유럽 대륙을 휩쓸게되었는데 이 때부터 죽음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와 호기심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죽음과 소녀 ' 모티브 역시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유행하게 된 주제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눈 앞에서 목격했던 그 당시 사람들로서는 캔버스로 표현된 죽음의 이미지는 그 때의 공포가 재현하게 만드는 두려움을 떨 수 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그림이었다.
한스 발둥 그린의 그림에는 죽음을 해골로 표현하고 있는데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으로서 해골을 표상하게 되는 인간의 일반적인 인식과 딱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죽음 앞에서 공포를 떨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연약한 나체의 소녀로 대비시켜 표현하고 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이라는 운명의 키스 앞에서 순백의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는 젋은 소녀는 한없이 그저 울고만 있을 뿐이다. ' 죽음과 소녀 ' 라는 알레고리는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상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지만 결국에는 인생의 유한함을 받아들여하며 절대로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진리(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풍만한 육체의 소녀가 등장하는 ' 죽음과 소녀 ' 모티브의 그림을 맨 처음 보게 된다면 메멘토 모리라는 그림에서 말하고자하는 주제가 떠오르기보다는 에로틱한 분위기로 바라볼 수 있다. 한스 발둥은 이 그림 이외에도 ' 죽음과 소녀 ' 를 주제로 한 여러 가지 버전의 그림을 제작하였는데 죽음 앞에 대면하는 소녀들은 거의 누드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의 절정을 ' 작은 죽음 ' 이라고 표현한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무의식 사이에서 흐르고 있는 죽음과 에로티시즘 사이의 근친성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주제가 바로 ' 죽음과 소녀 ' 모티브일 것이다.
한스 발둥 그린, 에드바르드 뭉크, 에곤 실레 등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 죽음과 소녀 ' 모티브와는 대조적으로 이탈리아 만화가 마리노 네리는 ' 죽음과 소년 ' 이라는 색다른 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강의 왕>은 2006년 루체른 만화 페스티벌, 2007년 코미카첸 국제 리얼리티 만화 페스티벌에 수상하여 국제적인 예술 만화가로서 인정 받고 있는 마리노 네리의 대표작이므로 이 작품을 통해서 마리노 네리는 2008년 올해의 이탈리아 만화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리노 네리의 <강의 왕>은 78페이지라는 얇은 분량의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혀지는 것이 아니다. 브루노라는 소년이 우연히 해골을 발견하면서 시작되는 감정의 흐름들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해골을 발견하게 된 브루노는 해골의 출처에 대한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기 시작하는데 오랜 상상 끝에 최종적으로 해골은 ' 강의 왕 ' 이 수집했던 수많은 해골들 중의 하나라고 결론을 짓게 된다. 그러다가 브루노의 마을에는 갑작스럽게 강이 범람하게 되었는데 브루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이 강물에 휩쓸려 잠길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면서 자신이 ' 강의 왕 ' 이 소유하고 있는 해골을 훔친 원인 때문에 강의 범람이 생긴 것이라고 믿게 된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줄거리이지만 이 책에서는 만화의 내용을 보다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정보의 글도 소개되고 있지 않아서 난감할 수 있다. 코미카첸 만화 페스티벌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이탈리아의 비평가 엘렉트라 스탐보울리스의 심사평이 그나마 마리노 네리의 작품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이다. 스탐보울리스는 <강의 왕>의 주제를 ' 소년의 시선으로 해석한 세계 ' 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 해골을 발견하게 되면 그 해골이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을지 생각하지 마라.
그냥 해골일 뿐이다. 눈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귀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 " (p 15)
" 하지만 이건 어리석은 생각일 수도 있다. 해골도 한때는 누군가의 얼굴이었을 테니. " (p 15)
스탐보울리스에서 말하고 있는 소년 브루노의 시선이 머물고 해석하고 있는 ' 세계 ' 는 브루노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광대한 세상을 뜻하고 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브루노는 강의 범람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무시무시한 파괴의 원인이 자신이 훔친 해골 때문이라고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세상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을 그린 내용의 만화라고 말하고 있는 스탐보울리스의 평에서 무언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과연 브루노는 단순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도 아쉽게 느껴지는 점이 자신의 작품에 대한 마리노 네리의 작가 노트 형식의 글이나 해설문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책의 구성 덕분에 독자는 만화를 통해서 다양한 관점의 해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있다. 브루노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처럼 말이다. 해골이라는 대상의 이미지가 곧 ' 죽음 ' 이라는 단어와 결부되어 연상되어지듯이 나는 <강의 왕>에 등장하는 해골 그리고 브루노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이란 것이 바로 ' 죽음 ' 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해골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된 브루노는 해골의 유래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 죽음 ' 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며 이 때부터 죽음에 대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발현된다. 프로이트의 자아발달 단계 이론에 의하면 브루노는 잠복기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 것이다. 잠복기는 5세부터 사춘기 초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데 이 시기에 어린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어른들에게 질문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한 지적 욕구의 발달은 어린이가 성장하는데 점층적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다.
" 사악한 힘과 어둠 속에 살고 있는 괴물들을 무찌르자.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 (p 34)
그러나 동심으로 가득찬 어린이들에게는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다. 다 큰 어른들도 해골 앞에서 공포감을 느끼기 마련인데 죽음이라는건지 잘 모르는 어린이들에게는 해골은 그저 신기한 대상일뿐이다. 브루노는 해골을 무서워하기보다는 대수롭지 않게 만지작거리면서 자신의 침대에 들여놓기도 한다. 해골을 향한 왕성한 호기심 앞에서 브루노는 해골에 대한 두려움 따위 느껴져 있지 않다.
오히려 해골을 사랑스러운 장난감인마냥 들고 다니면서 ' 피테코 아저씨 ' 라는 애칭을 붙일 정도로 해골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브루노의 동심은 긍정적인 메멘토 모리를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한스 발둥의 <죽음과 소녀>에서 드러나고 있는 관념적이면서도 공포심을 조장하고 있는 메멘토 모리와는 분위기가 대조적이다.
" 난 너무 금방 잊혀지는 그런 것들 중의 하나야... 네게도 그렇겠지.... 나하고 다른 것들이 밖으로 다시 나와 전부 다 부숴 버릴 때가 된 게 아닌지 서로 상의하고 있다 ... 네 생각은 어떠냐? (p 66)
강이 범람하고 있을 때 브루노는 해골과 상상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데 이 때부터 브루노는 생(生)과 관련된 모든 대상들을 파괴하는 죽음의 공포를 본격적으로 깨닫게 된다. 해골은 강의 범람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가라앉게 되는 마을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에 마을 전부가 물에 잠기게 된다면 브루노는 ' 강의 왕 ' 이 될 수 있다고 권유하고 있다. 결국, 해골이 브루노에게 권유하고 있는 ' 강의 왕 ' 은 단순히 강의 범람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대상이 아닌 곧 세월이 흐르면 모든 생명들을 멈추게 하는 ' 죽음의 왕 ' (혹은 ' 시간의 신' 크로노스)인 것이다.
" 다시 가져가. 알아들었어? 난 이제 갖기 싫어! 내 말 들려? 이제 싫다고!!! (p 71)
그러나 자신 때문에 마을이 가라앉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즉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인식하게 되면서 애지중지하게 여기던 해골을 강 멀리 던져버리게 된다. 해골을 던져버리는 브루노의 모습은 인간이라면 가지게 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고 싶어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 모든 게 정지해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강은 계속 흐르며
모든 것을 천천히 쓸어 갈 것이다." (p 77)
" 나도 모르는 어느 곳으로 ,,, 적어도 다음에 강이 범람할 때까지는 ,,, " (p 78)
브루노는 어린 나이에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유한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깨닫게 되지만 브루노가 변증법적인 탐구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삶의 진리를 터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눈여겨 볼 만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해 브루노는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의 단계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 인생의 전환점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 라고 말하였다. (그의 유명한 명구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와 같아서 사람들마다 제각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항구적이지 않으며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만물의 변화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항상 들고 다니는 모래시계 안에 갇혀버린 살아있는 존재들이 겪어야 할 죽음이라는 운명이다. 인간은 죽으면서 백골은 진토가 되며 웅장하고 화려했던 신전은 세월의 풍파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지게 된다. 이렇듯 시간이 흐르면서 다가오게 되는 죽음의 운명은 살아있는 세계를 파괴해버린다. 그리고 살아 숨쉬고 있는 것들을 정지해버린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곧 찾아오게 될 죽음의 신의 강림은 점점 잊혀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지게 되는 죽음의 운명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일부러 회피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브루노 역시 어른으로 자라게 되면 어린 시절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단순히 어린 시절의 기억의 일부로 묻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의 왕>을 접하게 된 어른 독자들은 시간의 기억 속에서 잃어버리고 있었던 삶의 한계성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 대면이 암울하게 느껴지더라도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한 번 지나간 세월 다시 잡을 수 없다고 세상의 덧없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쇼펜하우어가 되지는 말자. 수천년 전부터 오랫동안 죽음을 기억하라고만 전해내려왔던 메멘토 모리의 진리만 기억하지 말고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도록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긍정적인 삶의 희망도 기억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