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의 정원 ‘풍월당(風月堂)’ 곳곳에 문학과 미술이 있다. 문학과 미술은 음악의 오래된 지음(知音)이다. 자신이 직접 지은 시를 악기로 연주하면서 읊은 음유시인은 악사 겸 시인이었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음악가들은 시와 소설을 읽었고, 미술관에 자주 드나들었다.







화가는 음악을 듣다가 떠올린 감정을 그린다. 캔버스에 닿은 선율은 사람, 동물, 식물, 건물로 변신한다. 때로는 절친한 음악가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폴란드에서 온 ‘음악의 시인’ 쇼팽(Frédéric Chopin)의 친구다. 그는 또 쇼팽과 사귀었던 소설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와도 친분이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두 사람의 초상화를 그렸다.







풍월당의 카페 ‘로젠카발리에(Rozenkavalier)’는 190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 빈(Wien)의 카페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카페 내부는 19세기 말 유럽에 유행한 유겐트스틸(Jugendstil) 양식으로 꾸며졌다. 유켄트스틸은 아르누보(Art Nouveau)의 독일식 명칭이다. 







카페 안에도 풍월당 대표 박종호 명인이 소장한 책들이 있다. 내가 오랫동안 눈맞춤한 책은 독일의 미술 서적 전문 출판사 타셴(Taschen)이 2017년에 선보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도록집이었다.















* [개정판] 자비에르 질 네레, 최재혁 옮김 《구스타프 클림트》 (마로니에북스, 2023년)

 

* [절판] 이주헌 《클림트: 에로티시즘의 횃불로 밝힌 시대정신》 (재원, 1998년)




클림트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교향곡 9번 <합창>에 영감받아 <베토벤 프리즈>라는 거대한 벽화를 그렸다.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 서거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클림트는 황금색을 좋아하는 화가, 관능적인 그림을 그린 에로티시즘의 화가, 여성 편력이 심한 화가로 유명하다. 이렇다 보니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걸작임에도 <입맞춤(kiss)>와 <유디트 Ι>에 비하면 대중의 관심도가 낮은 편이다.
















* [개정판] 제러미 시프먼, 김병화 옮김 《베토벤》 (포노, 2025년)

 

* 노먼 레브레히트, 장호연 옮김 《왜 베토벤인가》 (에포크, 2025년)



베토벤 서거 75주년을 맞이한 예술가들은 음악의 성인(樂聖)을 ‘인류의 영혼을 구원한 천재’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환희의 송가(Ode to Joy)’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합창> 교향곡 제4악장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20세기를 반가이 맞이한 빈은 베토벤을 숭배하는 도시가 되었다. 클림트도 베토벤에 경의를 표한 예술가였고, <합창> 교향곡 연주회에 어울리는 벽화를 제작했다.


로젠카발리에를 찬찬히 둘러보면서 다음으로 가야 할 곳을 생각했다. 머릿속에 서울의 책방 이름들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카페에서 혼자 서성거리다가 또 한 번 클림트 도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클림트, 클림트‥…클림트! 

가야 할 곳이 정해졌다.

회현역 지하상가에 있는 헌책방 ‘클림트’로 향했다.







회현역 지하상가에 LP 음반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클림트는 오래된 책과 중고 LP 음반을 같이 판매한다. 책방 문에 책방 주인의 야구 팬심이 붙어 있다. 책방 주인은 프로야구팀 LG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선수 이병규와 박용택을 좋아한다. 두 선수 모두 은퇴했다. 이병규는 현재 LG트윈스 2군 감독이다. 2023~2024년에 삼성 라이온즈 수석 코치, 2군 감독으로 부임했다. 박용택은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하상가에 있는 헌책방은 구멍가게와 비슷하다. 가게 안에 책이 엄청 많이 있으면 사람 한 명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비좁다. 켜켜이 쌓여서 생긴 책 탑은 천장에 닿아 있다. 이렇게 비좁은 헌책방은 대구역 근처 지하도(굴다리) 헌책방 이후로 오랜만이다.







사방이 책 탑으로 둘러싸인 헌책방에 있으면 어질어질하면서도 책을 잘 찾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집중력도 높아진다. 책방의 책 탑은 개정판에 밀려난 구판 도서들의 무덤이다. 표지가 달라지고, 집 주소(출판사)와 이름(책 제목)도 바뀐 개정판이 나오면 구판 도서는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다. 품절과 절판은 책의 죽음이다.


















* 아서 밀러, 최영 옮김 《시련》 (민음사, 2012년)

 

* 에드문트 후설, 이종훈 옮김 《현상학적 심리학》 (한길사, 2021년)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세일럼의 마녀》는 민음사 ‘이데아 총서’ 일곱 번째 책이다. 작품의 원제는 ‘The Crucible’이다. 







지금은 원제의 의미에 맞게 《시련》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서 다시 출간되었다. 구판과 개정판의 역자는 같다. 《세일럼의 마녀》 바로 아래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적 심리학 강의》가 있다. 알라딘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희귀한 책이지만, 한길사에서 출간되었다.


클림트에 절판된 철학 도서들이 숨어 있다. 이런 구하기 힘든 책들은 도서관에 있다. 그러나 출간된 지 오래되었고, 대출 횟수가 적은 책들은 사서만 갈 수 있는 창고에 갇힌다. 창고에도 책이 많으면 그중 일부는 폐기 처분 도서로 분류되어 헌책방으로 향한다. 헌책방이 없어지면 절판된 철학 도서를 구하기가 힘들어진다.
















* 발터 벤야민, 최성만 · 김영옥 · 윤미애 함께 옮김 《일방통행로 / 사유 이미지》 (도서출판 길, 2007년)

 

*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도서출판 길, 2007년)

 

* 발터 벤야민, 최성만 · 윤미애 함께 옮김 《브레히트와 유물론》 (도서출판 길, 2020년)



클림트 책방 주인은 철학 도서들이 독자들을 많이 만나지 못하고, 조용히 절판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그분은 ‘길 출판사’가 펴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선집이 더 이상 절판되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까지 출간된 길 출판사의 벤야민 선집은 총 열두 권이다. 이 중에 품절 도서는 2권이다.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 재정기의 파리 /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황현산 · 김영옥 함께 옮김, 2010년)와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옮김, 2015년)다. 《브레히트와 유물론》도 한동안 품절 도서였다. 










 







* 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년)

 

* [절판] 발터 벤야민, 최성만 · 김유동 함께 옮김 《독일 비애극의 원천》 (한길사, 2009년)



벤야민의 글을 선별하여 편집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의 초판 발행 연도는 1983년이다. 민음사 이데아 총서 시리즈에 속한 대부분 책은 절판되었거나 개정판으로 재출간되었다.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은 처음 모습 그대로이며 여전히 건재하다. 이 책에 수록된 벤야민의 글들은 벤야민 선집에도 실려 있다. 그렇지만 오래된 책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해서」가 수록되어 있다. 벤야민의 보들레르론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벤야민 선집에 포함된 책은 아니지만, 벤야민의 논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 절판돼서 아쉽다.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대학 강사가 되기 위한 자격을 얻으려고 《독일 비애극의 원천》 집필에 착수한다. 비애극은 비극과 다른 개념으로 벤야민이 고안했다. 비애극(trauerspiel)은 비애(trauer)와 유희(spiel)가 만나서 생긴 용어다. 벤야민은 독일 바로크 시대의 문학과 예술 작품들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나온 온갖 문헌들을 수집, 분석하여 비애극의 특징과 형성 과정을 밝힌다. 







책방 주인(master)은 책을 읽으면서 철학에 숙달한(master) 분이다. 나는 그분과 20분 동안 철학과 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철학을 좋아하지만, 깊이 있게 공부하지 않는 게으른 딜레당트(dilettante)다. 책방 주인의 말을 경청했다. 그분이 한 말이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견해를 검증하듯이 대화하지 않았다. 나는 정확한 지식보다는 그분의 취향과 관심사를 알고 싶었다.


책방 주인은 내가 책을 고르는 데 방해했다고 생각했는지 거듭 사과했다. 나는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헌책방 주인도 책을 좋아하는 독자다. 좋은 책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 책을 찾는 손님을 위해서 큐레이팅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blanca 2026-10-12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풍월당 리모델링한 이후로 안가봤는데 저렇게 바뀌었군요. 몇 년 전에 손열음 연주회 했을 때 갔었거든요. 클림트 서점도 재미있게 둘러봤어요. 헌책방 탐방기 대리만족합니다. 도록 저도 사고 싶을 떄 있는게 가격의 압박이 너무 심하더라고요. 요즘처럼 대화가 실종된 분위기에서 책방주인과의 대화도 정겹네요.

cyrus 2026-10-12 23:21   좋아요 1 | URL
예전 모습의 풍월당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풍월당 강연도 참석해 보고 싶은데, 시간이 안 맞네요..ㅠㅠ 강남에 갈 일이 생기면 살라 푸가에 들러보려고 합니다.

카스피 2026-10-12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 있으면서도 회현역에 헌책방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네요.시간나면 한번 가봐야 될것 같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26-10-13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
회횐역에 헌책방 있엇나요 ? 나 서울 사람인데 모르고 있었네요. 와우 !!!!!!!!
당장 가서 책구경ㅎ고 와야겠네요.요즘 헌책방 없어져서 여러 모로 상심이 컸는데 헌책방 다운 헌책방 생겨 기분이 좋네요. 알라딘 중고서점은 왠지 헌책방 분위기가 나지 않아서....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는 BBC 라디오 드라마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약칭 ‘히치하이커’)의 대본을 쓰면서 처음부터 세상이 멸망하는 결말을 구상했다. 애덤스가 생각한 드라마 제목은 ‘세상의 종말(The Ends of the Earth)’이었다. 그때 당시 세상에 좀 불만이 있었던 애덤스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이 끝장 나는, 끝내주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했다.

















* 더글러스 애덤스 · 마크 카워다인 함께 썼음, 강수정 옮김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히치하이커와 동물학자의 멸종위기 동물 추적 프로젝트》 (현대문학, 2024년)


* [절판] 더글러스 애덤스 · 마크 카워다인 함께 썼음, 강수정 옮김 《마지막 기회라니?: 더글러스 애덤스와 마크 카워다인, 두 남자의 멸종위기 동물 추적》 (홍시, 2014년)


* [절판] 더글러스 애덤스 · 마크 카워다인 함께 썼음, 강수정 옮김 《마지막 기회라니?: 두 남자의 멸종위기 동물 추적》 (홍시, 2010년)




하지만 애덤스는 냉소주의자가 아니었고, 비관론자도 아니었다. 그는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애덤스는 과학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도킨스는 애덤스에게 “과학의 어떤 점이 당신의 피를 끓게 하느냐?”라고 질문했다.


애덤스는 ‘대단히 복잡하고 풍요롭고 이상한 세상’을 과학의 관점으로 알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근사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삶이 70년이나 80년까지 지속된다면 자신에게는 ‘보람된 시간’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애덤스의 시계에 ‘보람된 시간’은 오지 않았다. 애덤스는 운동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가 와서 쓰러졌고,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50세를 넘기지 못한 이른 죽음이었다.


애덤스와 동물학자 마크 카워다인(Mark Carwardine)이 함께 쓴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게정판의 서문은 리처드 도킨스가 썼다. 도킨스는 다큐멘터리 촬영 때 애덤스와 주고받은 대화를 회상하면서, 그의 답변은 액자에 담아 전국의 모든 과학 교실에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 리처드 도킨스, 이한음 옮김 《만들어진 신: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김영사, 2007년)

 

* 리처드 도킨스, 김명주 옮김 《신, 만들어진 위험: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당신에게》 (김영사, 2021년)


* 리처드 도킨스, 김명주 옮김 《리처드 도킨스의 영혼이 숨 쉬는 과학: 열정적인 합리주의자의 이성 예찬》 (김영사, 2021년)


* 리처드 도킨스, 김명남 옮김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1: 어느 과학자의 탄생》 (김영사, 2016년)


* 리처드 도킨스, 김명남 옮김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2: 나의 과학 인생》 (김영사, 2016년)




두 사람은 과학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으며 무신론자라서 대화가 잘 통했다. 애덤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종교를 주제로 연설했다. 이 연설에서 애덤스는 ‘종교의 무오류성’을 신성하게 여기는 경향이 특권화되면 종교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종교에 도전하는 도킨스를 지지했다. 도킨스는 애덤스의 연설문(지면에 발표된 연설문의 제목은 「인위적인 신은 있는가?」다) 일부를 자신의 책 《만들어진 신》에 인용했다.

















[대구 책방 독서 모임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18년 10월 도서(67번째 지정 도서)]

*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 · 이상임 함께 옮김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18년)

 

* 리처드 도킨스, 홍영남 · 장대익 · 권오현 함께 옮김 《확장된 표현형》 (을유문화사, 2022년)

 

* 리처드 도킨스, 이용철 옮김 《눈먼 시계공: 진화론은 세계가 설계되지 않았음을 어떻게 밝혀내는가》 (사이언스북스, 2004년)




애덤스는 처음에는 불가지론자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30대 초반의 애덤스는 우연히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눈먼 시계공》을 읽은 이후로, 무신론자로 전향했다. 애덤스는 불가지론자로 오해받기 싫어서 스스로 ‘급진적 무신론자’라고 강조했다. 그래도 애덤스는 도킨스처럼 전투적인 무신론자, 반종교주의자는 아니었다. 애덤스의 종교관을 정리한 위키피디아(Wikipedia) 영문판에 따르면 그가 교회 예배당 성가대 성인 회원으로 활동했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즐겨 불렀다고 한다.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718번째 책]


[대구 독서 모임 <고라니 울고> ‘초여름 밤 SF’ 7월의 SF, 추천 독자 겸 모임장: 김성현]


* 더글러스 애덤스, 김선형 · 권진아 함께 옮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책세상, 2005년, 합본)


* 더글러스 애덤스, 김선형 · 권진아 함께 옮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 (책세상, 2004년)


* 더글러스 애덤스, 김선형 · 권진아 함께 옮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2: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 (책세상, 2004년)




도킨스는 자서전에 애덤스를 처음 만난 날, 애덤스에게 직접 팬레터를 보낸 일, 애덤스의 42번째 생일(42는 《히치하이커》에서 언급된 중요한 숫자다)에 있었던 특별한 추억을 언급했다.

 

도킨스는 《히치하이커》 2부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을 ‘어두운 유머와 심오한 철학이 담긴 글’이라고 했다. 1991년에 도킨스는 BBC에서 방영된 ‘어린이를 위한 크리스마스 강연(Royal Institution Christmas Lectures)’의 강연자로 초빙되었다. 강연 중에 그는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의 문장을 읽어줄 ‘어린 청중’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여러 명의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낭독을 원하는 어린이 청중 사이에 ‘키가 2미터 넘는 성인 남성’도 있었다. 도킨스는 그 남성을 지목했고, 이름을 물었다. 본인이 어린이라고 생각한 남성의 이름은 ‘더글러스 애덤스’였다. 도킨스는 예상하지 못한 만남에 놀라워했고, 도킨스와 어린 청중들은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을 재미있게 연기하면서 낭독하는 원작자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 P. G. 우드하우스, 김승욱 옮김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 편집자는 후회한다 외 38편》 (현대문학, 2018년)




도킨스는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의 서문에 애덤스의 익살스러운 문장을 인용하면서 ‘P. G. 우드하우스(P. G. Wodehouse) 이후로 맛깔스러운 유머 감각을 발휘한 작가’는 없었다고 찬사를 보냈다.[주] 우드하우스는 영국식 유머의 대가로, 그의 대표작 ‘지브스(Jeeves) 시리즈’는 BBC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도킨스가 애덤스를 알기 전부터 엄청 좋아한 작가가 우드하우스다. 도킨스는 우드하우스의 유머 감각을 흉내 낸 글을 썼을 정도로 좋아했는데, 자서전 1권에 우드하우스의 이야기를 즐겨 읽었던 유년 시절이 나온다. 도킨스가 가장 좋아하는 우드하우스의 작품은 ‘지브스 시리즈’에 속한 『설교 핸디캡 소동』(The Great Sermon Handicap)이다. 이 단편 소설은 1,000쪽이 넘는 우드하우스의 작품 선집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에 수록되었고, 번역된 제목은 『설교 대회』다.

















* [절판] 리처드 도킨스, 이한음 옮김 《악마의 사도: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바다출판사, 2015년)




도킨스는 애덤스의 이른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했던 과학자다. 그는 자신의 칼럼과 강연문을 모아 놓은 《리처드 도킨스의 영혼이 숨 쉬는 과학》에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의 서문을 포함하면서 애덤스를 다시 한번 추모했다. 도킨스는 애덤스가 세상을 떠난 날에 조문(弔文)을 썼고,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에도 실렸다. 이 글은 『더글러스 애덤스를 추억하며』(Lament for Douglas Adams)라는 제목으로 《악마의 사도》에 수록되었다.


대부분 독자는 애덤스를 ‘코믹 SF를 쓴 작가’로 기억한다. 하지만 애덤스의 참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도킨스는 그런 평범한 문장 한 줄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도킨스가 만난 애덤스는 매력이 풍성하다.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 과학을 과학자보다 재미있게 표현하는 작가, 과학을 전공하지 않았는데도 과학에 해박한 작가, 진화론을 잘 아는 작가, 생물다양성을 강조한 동물권 운동가, 우주로 간 우드하우스, 어린이의 호기심을 가진 어른.









[주]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는 ‘홍시’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것을 다시 출간한 책이다. 그래서 두 출판사 번역본의 역자가 같은데, 역자는 ‘P. G. 오드하우스’로 표기했다.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와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의 출판사는 ‘현대문학’이다. 전자의 책은 2024년에, 국내 유일의 우드하우스 단편 선집은 2018년에 출간되었다. 현대문학 출판사 소속 편집자는 ‘P. G. 오드하우스’를 ‘P. G. 우드하우스’로 고치지 않았을까? 


편집자가 역자의 표기를 존중한 것일까, 아니면 재출간하면서 교정을 안 한 것일까? 


아무튼 ‘오드하우스’ 표기가 너무나 신경이 쓰여서(bother) 애덤스, 도킨스, 우드하우스, 이 BBC 3S의 연결 고리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오후즈음 2026-07-15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히치하이커 사 놓고 아직 못 읽었는데 올해 도전해봐야겠네요.

cyrus 2026-08-03 06:56   좋아요 1 | URL
읽다가 중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속독했어요. 책을 여러 번 봐도 더글러스 애덤스의 유머를 이해하고 적응하기가 쉽지 않네요. ^^;;
 




인간의 학명(學名)은 ‘슬기로운 사람(Homo sapiens)’이다. 이 학명은 인간만 쓸 수 있는 별명이 되었다. 호기로운 인간은 동물들 앞에서 꺼드럭거린다. “넌 동물이고, 난 인간이야.” 우리는 지구상 유일한 이성적 존재이며 언어를 쓰고 있어서 동물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학명이 어울리지 않는 헛똑똑이다. 종종 어리석은 판단을 내려서 화를 자초한다. 가짜 정보에 잘 속는다. 우리는 항상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슬기로운 사람은 동물이 아니라는 착각. 이런 착각을 학술 용어로 ‘종차(種差)’라고 한다.


재미있게도 우리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외계 생명체를 ‘외계인’으로 가정한다. 우리가 만나고 싶은 외계인은 인간의 모습과 흡사하며 우리처럼 비슷하게 생활한다.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똑똑한 외계인을 우러러본다. 그래서 아득한 옛날에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이 고대 사람들에게 현대 문명에 걸맞은 엄청난 기술을 전수했다고 주장한다. 초고대 문명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페루의 나스카 지상화(땅에 그려진 거대한 그림들)가 외계인과 고대 사람들의 합작품으로 보인다.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718번째 책]


[대구 독서 모임 <고라니 울고> ‘초여름 밤 SF’ 7월의 SF, 추천 독자 겸 모임장: 김성현]


* 더글러스 애덤스, 김선형 · 권진아 함께 옮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책세상, 2005년, 합본)


* 더글러스 애덤스, 김선형 · 권진아 함께 옮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1》 (책세상, 2004년)


* 더글러스 애덤스, 김선형 · 권진아 함께 옮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4》 (책세상, 2004년)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는 동물보다 똑똑하다고 거만하게 굴면서 외계인을 ‘우주의 슬기로운 사람’으로 추앙하는 인간의 착오를 풍자한다. 애덤스의 대표작인 코믹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약칭 ‘히치하이커’) 1권의 23장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꼬집는 우화(寓話)다.


지구에 사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돌고래보다 지능이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돌고래가 인간보다 지능이 높다. 돌고래들은 지구가 ‘보곤(Vogon)’이라는 외계 종족에 의해 파괴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착한 돌고래들은 인간들에게 경고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언어가 없는 돌고래의 의사소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돌고래들은 지구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포기하고, 지구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남긴다. 돌고래들은 뒤로 두 번 공중제비를 돌면서 고리를 통과하고, 행진곡 <성조기여 영원하라(The Stars and Stripes Forever)>를 휘파람으로 분다. 돌고래의 마지막 메시지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하면 이렇다.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



돌고래의 마지막 메시지는 《히치하이커》 4권의 부제가 된다.


《히치하이커》가 라디오 드라마로 처음으로 공개된 1970년대 중후반에 살았던 사람들은 고래가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난 동물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그렇지만 고래를 오랫동안 관찰한 과학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칼 세이건 · 앤 드루얀 · 린다 살츠먼 세이건 외, 김명남 옮김 《지구의 속삭임》 (사이언스북스, 2016년)




라디오 드라마 버전 《히치하이커》가 방송되기 일 년 전인 1977년에 고래의 뛰어난 지능이 처음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해에 미국은 우주 탐사선 보이저(Voyager) 1호와 2호를 발사했다. 두 대의 탐사선에 ‘지구의 소리(The sounds of earth)’라는 이름이 붙여진 골든 레코드(Voyager Golden Record)가 실려 있었다.







골든 레코드는 우주 어딘가에 살고 있을 외계 생명체에게 보내는 ‘지구인들의 마지막 메시지’다. 골든 레코드에 지구와 모든 생명체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다. 한국어 ‘안녕하세요’를 포함한 55가지 언어의 인사말, 지구에 살면 들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소리, 지능이 높은 외계 생명체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녹음되었다.




























* 칼 세이건, 홍승수 옮김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2006년)

 

* 앤 드루얀, 김명남 옮김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 (사이언스북스, 2020년)

 

* 칼 세이건 · 앤 드루얀 함께 썼음, 이상헌 옮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과학, 어둠 속의 촛불》 (사이언스북스, 2022년)

 

* 칼 세이건 · 앤 드루얀 함께 썼음, 김혜원 옮김 《혜성》 (사이언스북스, 2016년)




골든 레코드 개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는 칼 세이건(Carl Sagan)이다. 기술 감독은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외계 생명체(외계 문명)의 수를 계산한 ‘드레이크 방정식’을 제안한 프랭크 도널드 드레이크(Frank Donald Drake)다. 창작 감독은 세이건과 함께 TV 다큐멘터리 <코스모스>(Cosmos)를 제작한 앤 드루얀(Ann Druyan), 레코드에 실릴 인사말을 구성하는 작업은 린다 살츠먼 세이건(Linda Salzman Sagan)이 맡았다. 







1981년에 세이건과 린다는 이혼했고, 세이건은 ‘이미 오래된 연인’ 앤 드루얀과 재혼했다. 드루얀과 세이건은 《혜성》(Comet, 1985년),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Shadows of Forgotten Ancestors, 1992년, 국역본: 김동광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8년),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 1995년)을 함께 썼다. 2014년, 드루얀은 다큐멘터리의 후속작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Cosmos: Possibl Worlds)을 만들었다. 진행자는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이다. 


















*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 노승영 옮김 《야생의 치유하는 소리: 경이로운 소리들, 진화의 창조성, 감각의 멸종 위기》 (에이도스, 2023년)




고래의 소리를 레코드에 포함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드루얀이다. 그녀는 고래를 동물이 아닌 ‘인간과 함께 지구를 공유하는 지적인 이웃들’이라고 생각했다. 드루얀은 고래들을 존중하는 의미로, 고래의 인사말을 정치가들과 외교관들의 인사말 사이에 끼워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루얀의 생각에 공감한 해양생물학자 로저 페인(Roger Payne)은 자신이 버뮤다 앞바다에서 녹음한 혹등고래의 소리가 아름답다면서 추천했다. 








로저 페인은 아내 캐서린 페인(Katharine ‘Katy’ Payne)과 함께 버뮤다에서 혹등고래의 소리를 녹음했다. 부부는 혹등고래의 소리에 인간의 소리처럼 반복 구조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혹등고래의 소리를 ‘노래’라고 주장했다. 로저 페인은 고래잡이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혹등고래의 소리를 모아서 편집한 음반을 발표했다. 음반 제목은 <혹등고래의 노래>(Songs of the Humpback Whale)다.







세이건도 드류얀의 생각에 동의했다. 골든 레코드에 실린 혹등고래의 노래는 UN 대표들의 인사말 다음에 나온다. 세이건의 표현대로 혹등고래는 ‘지구에서 우주로 인사말을 보낸 지적인 종’이 되었다.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107번째 책]

* 허먼 멜빌, 김석희 옮김 《모비 딕》 (작가정신, 2024년)


* 허먼 멜빌, 강수정 옮김 《모비 딕》 (열린책들, 2013년)




애덤스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다음으로 고래에 관심이 많은 작가다.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 나오는 흰고래 모비 딕은 실제로 포경선을 침몰시킨 ‘모카 딕(Mocha Dick)’이라는 향유고래를 모티프로 했다. 《히치하이커》 1권 18장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향유고래가 등장한다. 《히치하이커》의 향유고래는 자신의 몸을 관찰하면서 신체 부위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인다(‘이걸 내 배라고 부르자’, ‘이건 꼬리라고 부르자.’). 향유고래가 생각하면서 하는 말은 《모비 딕》의 유명한 첫 문장이자 작중 화자 이스마엘의 대사 첫 마디(‘Call me Ishmael.’)를 패러디한 것이다.

















* 더글러스 애덤스 · 마크 카워다인 함께 썼음, 강수정 옮김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히치하이커와 동물학자의 멸종위기 동물 추적 프로젝트》 (현대문학, 2024년)




애덤스는 멸종위기 동물들을 보호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환경 운동가였다. 그는 고래 도감을 만든 동물학자 마크 카워다인(Mark Carwardine)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멸종위기 동물들을 만나는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두 사람의 여행기는 《이게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라는 제목의 책이 되었다. 이 책에 중국에 간 애덤스와 카워다인이 양쯔강돌고래의 소리를 녹음하면서 겪은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을 처음 방문한 애덤스는 온갖 소음에 엄청나게 괴로워하는데, 그는 청각이 유독 발달한 양쯔강돌고래도 중국인들이 만든 소음에 괴로워할까 봐 우려한다.


















* 톰 머스틸, 박래선 옮김 《고래와 대화하는 방법: 물속에 사는 우리 사촌들과 이야기하는 과학적인 방법》 (에이도스, 2023년)

 


그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다. 고래가 소리를 내면서 주변에 있는 동족들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고래는 청각이 유독 뛰어나서 메아리 형태로 나타나는 바닷속의 소리를 감지한다. 고래를 잘 모르는 인간은 모든 고래의 소리가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귀는 고래 소리의 높낮이를 느끼지 못한다. 고래 소리의 높낮이는 사투리와 비슷하다. 고래 박사들은 소리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고래를 ‘소리 종족(vocal clan)’이라고 부른다. 바다 위를 지나가는 배와 바닷속을 돌아다니는 잠수함에서 나는 소리는 고래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소음이다. 청각이 예민한 고래는 배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소리를 동족이 내는 소리로 착각한다. 고래는 대화를 시도하려고 배에 접근한다. 고래를 잘 모르는 우리는 고래가 배만 보면 공격성을 드러내는 난폭하고 무식한 동물이라고 오해한다.







고래도 인간처럼 말한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알아볼 정도로 똑똑하다. 고래는 지구에 사는 동물이 아니다. 우리보다 영리한 지구의 동반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년 만에,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방문객도 많은 서울국제도서전(약칭 ‘국도’)에 갔다. 이 글은 출판사 부스가 있는 곳에 입장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렸을 때 썼다.















* 이창현 · 유희(그림)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계절, 2018년)

 

* 이창현 · 유희(그림)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 (사계절, 2023년)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책보다 굿즈를 판매하는 출판사들이 많아진 국도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누군가는 국도에 간 사람들을 ‘진정한 독서인’이 아니라고 했다. 어떤 기자는 국도를 겨냥해서 ‘돈맛에 매몰된 도서전’이라고 표현했다.


국도의 운영 방식을 살펴보면 출판인과 독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문제점이 수두룩하다. 그렇다고 해서 국도에 참여한 출판인을 ‘돈맛’에 빠진 사람인 것처럼 매도하는 비난은 틀렸다. 도서전 예매에 성공한 사람들을 ‘굿즈 마니아’라고 비아냥거리는 시선 또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국도에 ‘책(의) 맛’을 보러 오는 독자들이 찾아온다. ‘책 맛’을 아는 독자는 자기가 특별히 관심 있는 출판사가 만든 책들을 구매하거나 읽는다. 이런 독자들은 출판사에서 나온 시리즈나 전집을 사서 모은다.


올해 국도에 참가한 출판사 중에 내가 주목한 출판사는 ‘까치(까치글방)’와 ‘워크룸프레스’다. 까치는 1977년에 설립된 인문 ·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다. 철학, 과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만들었고, 지금도 팔리는 스테디셀러도 여러 권이다. 올해 49세인 까치가 국도에 참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까치 출판사의 책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과거의 책들은 ‘까치글방’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까치 출판사의 책들은 주로 서평을 쓰기 위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만 읽은 책들이 많다.















* [결정판] 스티븐 호킹, 김동광 옮김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까치, 2021년)

 

* [개정판] 빌 브라이슨, 이덕환 옮김 《거의 모든 것의 역사 2.0》 (까치, 2026년)

 

* [제4판] 토머스 새뮤얼 쿤, 김명자 · 홍성욱 옮김 《과학혁명의 구조》 (까치, 2021년)




까치 출판사는 스테디셀러가 된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빌 브라이슨(Bill Bryson)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토머스 S. 쿤(Thomas 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 등을 펴냈다.















* 브라이언 클레그, 제효영 옮김 《책을 쓰는 과학자들: 위대한 과학책의 역사》 (을유문화사, 2025년)




과학자들이 쓴 과학 도서들의 역사를 정리한 브라이언 클레그(Brian Clegg)의 《책을 쓰는 과학자들》에 까치 출판사가 자랑하는 스테디셀러 과학 도서 3권이 언급된다.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는 물리학 개념의 배경 설명이 부족하고 술술 읽히는 책이 아닌데도 가장 많이 팔린 대중 과학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을 깬 과학책이 2003년에 나온 《거의 모든 것의 역사》다.







까치는 과학 도서를 꾸준히, 잘 만드는 출판사다. 과학 주제가 다양하다. 물리학(아인슈타인, 양자역학), 화학(로얼드 호프만), 수학, 우주론(킵 손), 생물학(닉 레인), 동물학(데이비드 애튼버러, 데즈먼드 모리스), 의학(싯다르타 무케르지) 분야의 책들을 펴냈다. 
















* 아닐 아난타스와미, 노승영 옮김 《기계는 왜 학습하는가: AI를 움직이는 우아한 수학》 (까치, 2025년)

 

* 댄 레빗, 이덕환 옮김 《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 나를 이루는 원자들의 세계》 (까치, 2024년)

 

* 데이비드 애튼버러, 이한음 옮김 《경이로운 지구의 생명들》 (까치, 2023년)
















* 빌 브라이슨, 이한음 옮김 《바디: 우리 몸 안내서》 (까치, 2020년)

 

* [개역판] 로얼드 호프만, 이덕환 옮김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까치, 2018년)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 옌 웡 함께 썼음, 이한음 옮김 《조상 이야기: 생명의 기원을 찾아서》 (까치, 2018년)

 















* [절판] 데이비드 보더니스, 이덕환 옮김 《아인슈타인의 일생 최대 실수》 (까치, 2017년)

 

* 케네스 W. 포드, 이덕환 옮김 《양자: 101가지 질문과 답변》 (까치, 2015년)

 

* 킵 손, 전대호 옮김 《인더스텔라의 과학》 (까치, 2015년)

 













* [절판] 데이비드 애튼버러 · 에롤 풀러 함께 썼음, 이한음 옮김 《낙원의 새를 그리다: 극락조의 발견, 예술, 자연사》 (까치, 2013년)

 

* [절판] 빌 브라이슨 엮음, 이덕환 옮김 《거인들의 생각과 힘: 과학과 왕립 학회 이야기 》 (까치, 2010년)

 

* [절판] 리처드 포티, 박중서 옮김 《런던 자연사 박물관》 (까치, 2009년)



김동광, 김명남, 노승영, 이덕환, 이한음, 전대호, 홍성욱과 같은 번역 경험이 많은 번역자들이 까치 출판사의 과학책들을 만들었다. 물론, 번역자들도 사람인지라 오역하거나 오탈자를 못 고칠 때가 있다.















* 그레이엄 핸콕, 이경덕 옮김 《신의 지문: 사라진 문명을 찾아서》 (까치, 2017년)

 

* 그레이엄 핸콕, 이종인 옮김 《신의 사람들: 사라진 문명의 전달자들, “신의 지문”의 속편》 (까치, 2016년)




그런데 까치 출판사는 외계인이 고대 문명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그레이엄 핸콕(Graham Hancock)의 책들도 펴냈다. 현재 판매 중인 핸콕의 책은 그의 대표작 《신의 지문》과 속편 《신의 사람들》이다. 나머지 책들은 절판되었다. 《신의 사람들》의 번역자는 이종인이다. 핸콕의 초고대 문명설은 과학적 검증이 불가능하고, 근거가 빈약하다. 핸콕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재미있는 SF 소설로 인식하면서 읽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핸콕의 견해를 너무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과학적 사실과 역사를 모조리 부정한다. 국도 부스에 있는 까치 출판사 관계자를 만난다면 한 번 물어보고 싶다. 핸콕의 책이 지금도 잘 팔리냐고.







워크룸프레스는 그래픽 디자이너와 편집자가 함께 만든 출판사다. 그래서 전시 포스터와 다른 출판사의 책 표지를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 이 출판사가 기획한 ‘제안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비주류 문학 작품들을 모아 놓은 세계 문학 총서다.
















* D. A. F. 사드, 성귀수 옮김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워크룸프레스, 2014년, 사드 전집 1)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50번째 책]

* D. A. F. 사드, 성귀수 옮김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 (워크룸프레스, 2018년, 사드 전집 2)

 

* D. A. F. 사드, 성귀수 옮김 《알린과 발쿠르 혹은 철학 소설》 (워크룸프레스, 2025년, 사드 전집 3)




워크룸프레스는 국내 유일의 ‘사드(Sade) 전집’을 출간하고 있다. 인류애를 망가뜨리는 극단적인 에로티시즘을 표현한 사드의 문학 작품은 여전히 금서로 취급된다. ‘괴도 아르센 뤼뺑(Arsene Lupin) 시리즈’ 번역으로 유명한 번역자 성귀수가 혼자서 사드 전집 번역을 하고 있다. 








출판사가 계획한 사드 전집은 총 1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 3권이 번역되었다. 사드 사후 200주년이었던 2014년에 처음 1권이 출간되었는데, 출간 속도가 더딘 편이다.







※ TMI: 성귀수 번역의 ‘아르센 뤼뺑 시리즈’를 처음 만든 출판사가 까치다. 까치 출판사 부스 바로 옆에 워크룸프레스 출판사 부스가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blanca 2026-06-28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워크룸프레스 책 디자인 너무 좋아하는데 그래픽디자이너가 함께 책을 만들고 있었군요. 과학 쪽 책에 관심이 많아 번역자 관심 있게 보는데 까치 출판사도 과학 쪽 서적에 특화되어 있었다는 것 알아갑니다. 도서전 다녀오셨다니, 부럽습니다. 저는 엄두가 안 나던데 거기에서 사고 싶은 책들이 있어 부러워만 합니다.

cyrus 2026-07-05 22:15   좋아요 1 | URL
도서전에 처음 공개된 책들은 도서전이 끝나면 알라딘에 판매돼서 나중에 사도 되는데, 도서전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책들은 특별 한정판이라서 저는 이런 책들만 삽니다. 이번 도서전에는 딱 다섯 권만 샀어요. 이 정도면 적게 산 편입니다. ^^;;
 






M. B-V의 죽음


안나 아흐마토바

1940년



향로의 향 대신에, 무덤 위 장미꽃 대신에

여기 당신께 보내는 내 선물이 있다.

당신은 거칠게 살았고, 끝까지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장엄하게 살았다.

당신은 술을 마셨고, 아무도 못 할 농담을 즐기고,

영혼의 벽 속에서 괴로워했다.

그리고 당신은 무서운 손님을 마음속에 들이고

함께 외롭게 남아 있었다.

 

지금 당신은 가고, 당신의 숭고한 슬픈 삶에 대해

주변의 모든 이가 침묵한다.

플루트 같은 내 목소리만

당신의 조용한 장례식에서 노래 부르리라.

내가 미쳐, 죽어 버린 날들의 애도가이며,

내가 느리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 연기만 나게 하는 것을

오, 누가 감히 믿겠는가,

모든 것을 상실하고 모든 이를 잊어버린 나는

힘과 의지와 찬란한 생각으로 가득 찬,

마치 어제 죽기 전에 고통의 떨림을 감추고

나와 잡담하는 듯했던 인간을 기억해야만 한다.

 






















* [절판] 안나 아흐마토바, 조주관 옮김 《주인공 없는 서사시》 (새미, 2003년)


* [절판, No Image] 안나 아흐마또바, 조주관 옮김 《자살하고픈 슬픔: 안나 아흐마또바 시선집》 (열린책들, 1996년)




안나 아흐마토바(Anna Akhmatova)는 러시아의 시인이다. 스탈린(Joseph Stalin) 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 시집 출판이 금지당한다. 스탈린에 복종한 작가와 비평가들은 아흐마토바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한다. 설상가상 전 남편은 반혁명 분자로 처형당하고, 아들은 수용소에 갇힌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6년 2월의 세계 문학]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609번째 책]

* 미하일 불가코프, 정보라 옮김 《거장과 마르가리타》 (민음사, 2010년)

 

* 미하일 불가코프, 홍대화 옮김 《거장과 마르가리따》 (열린책들, 2009년)




혹독한 시련을 겪은 아흐마토바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미하일 불가코프(Mikhail Bulgakov)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당시 불가코프도 스탈린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작가라서 소설을 출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출판할 수 없는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아내 옐레나(Elena)와 함께 쓰고 있었다. 그래도 불가코프는 스탈린에게 완전히 버림받은 상황이 아니었고,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다. 불가코프는 아흐마토바의 아들의 석방을 바라는 탄원서를 보낸다.













아들은 스탈린이 죽은 1953년에 석방되고, 아흐마토바는 다시 시집을 출판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흐마토바를 도와준 불가코프는 1940년 3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흐마토바는 불가코프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 그를 애도하는 마음을 담은 『M. B-V의 죽음』이라는 시를 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