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에 가면 불문율이 얌전하게 앉아 있다. 모임 참석자들은 불문율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불문율이 깨지면 모임이 난장판이 되기 때문이다모임 참석자 중 한 사람이 불문율을 빤히 쳐다본다참석자의 귀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들어오지 않는다참석자의 눈빛이 불문율로 완전히 쏠려 있다. 다른 참석자들이 긴장하기 시작한다. 모임장은 불길한 눈빛을 멈추기 위해 참석자에게 당부한다.



독서 모임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일이니 불문율을 지켜주세요. 

절대로 그것을 말하면 안 됩니다.”



불문율을 지키고 싶지 않은 참석자는 모임장의 당부를 어긴다. 기어이 불문율을 건드리고 만다. 가만히 있던 불문율이 꿈틀거린다. 참석자의 입에 언급하지 말아야 할 것이 튀어나온다. 참석자는 심하게 요동치는 불문율을 깨뜨린다불문율이 깨지자, 고분고분하게 대화가 흐르던 독서 모임은 순식간에 싸움터가 된다. 참석자들은 서로의 말과 생각을 움켜잡아 싸운다.



당신의 생각은 잘못되었어요

책 좀 읽었다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죠?

 


흥분한 참석자들은 상대방이 틀렸다면서 야멸차게 쏘아붙인다대화 불가능한 독서 모임이 어수선하게 마무리된다.


독서 모임에 심심찮게 참석하는 불문율은 세 가지다. 첫 번째 불문율은 책과 무관한 대화를 하지 않기. 두 번째 불문율은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기, 세 번째 불문율은 종교 전도하지 않기. 이 세 가지 불문율을 하나로 모으면 완전한 성문법이 탄생한다. 독서 모임에 정치와 종교 책은 선정하지 않기.


사실 첫 번째 불문율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책 속에서만 흐르는 대화는 유익하지만, 늘 재미있는 건 아니다. 책 밖으로 이탈한 대화도 재미있다그래도 너무 멀리 나가면 곤란하다. 모임 참석자들 모두가 즐길 수 없고, 만족하지 못한 대화가 오래 지속되면 모임장은 정중하게 제지해야 한다.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열다섯 번째 모임(5월) 선정 도서]

* 피에르 다르도 · 크리스티앙 라발 · 피에르 소베트르 · 오 게강 함께 씀, 정기헌 옮김 

내전, 대중 혐오, 법치: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원더박스, 2024)





올해 들어서 나는 두 번째 불문율을 깨뜨렸다. 5월 중순에 한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선정 도서는 정치와 결합한 신자유주의를 비판한 내전, 대중 혐오, 법치였다. 나를 포함한 모임 참석자들은 과거에 신자유주의 비판서를 탐독했을 정도로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모임 분위기에 반전을 주고 싶었다. 모임 전날에 참석자들은 발제를 공개한다. 나는 발제에 정치색을 드러냈다. 나는 자유주의자이고 온건 보수주의자라고. 자유주의자로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방식을 제안했는데,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유를 독점하고, 왜곡하는 세태를 방치하면 자유의 정의가 변질된다고 주장했다그리고 개인의 자유만 찬양하는 자유 지상주의와 비슷한 신자유주의와 정반대로다원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자도 있다고 언급했다그래서 내가 언급한 자유주의 사상가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었다.

















* 에드먼드 포셋, 신재성 옮김 자유주의: 어느 사상의 일생(글항아리, 202)

 

* 헬레나 로젠블랫, 김승진 옮김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글항아리, 202)

 

* 패트릭 J. 드난 , 이재형 옮김 왜 자유주의는 실패하는가(민들레, 2025)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 전에 자유와 자유주의의 정의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분류된 고전적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가 아닌 개인의 덕성과 공동체 결속을 위한 헌신을 강조한다. 계몽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한 18세기부터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군주정과 종교를 비판했다.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둔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20세기가 돼서야 확립되었다.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자유주의의 흐름을 정리한 책을 꼽자면 스스로 좌파 자유주의자로 소개한 정치 전문 기자가 쓴 자유주의개인과 타인이 연결된 관계가 모여서 형성된 공동체를 중시했던 자유주의의 과거를 보여주는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가 있다.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개인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한 자유 학예(liberal arts)를 배우려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전근대 자유주의로 분류한다. 이 책의 저자는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적 자유주의로 발전할수록 자유주의가 퇴보(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203월 도서]

* 스티븐 레비츠키 · 대니얼 지블랫 함께 씀, 박세연 옮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어크로스, 2018)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5년 7월 도서]

* 스티븐 레비츠키 · 대니얼 지블랫 함께 씀, 박세연 옮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어크로스, 2018)





이번 달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약칭 세속’) 선정 도서는 정치적인 책이다. 지난 주 금요일에 모임이 있었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약칭 ‘극단적 소수)<세속>의 정기 독자 김성현 님이 추천한 책이다. 김성현 님은 <고라니 울고>라는 독서 모임을 이끄는 모임장이다. <고라니 울고>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모임이다. 그분은 정치적인 책을 <고라니 울고> 회원들과 함께 읽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독서 모임이 회원들에게 부담감을 줄까 봐 결정을 계속 보류했다. 때마침 내가 올해 <세속> 선정 도서 후보에 비문학적인 책도 가능하다고 허용했고, 그리하여정치적인 책을 읽는 문학 모임이 만들어졌다.







정치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에 참석했던 독서 모임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에 정치 책이 선정된 적이 있었다. 그 책이 바로 극단적 소수의 전작인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였다. 하지만모임은 취소되었다.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던 때였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면서 모임이 제한되었다.
















* 조지 오웰, 이한주 옮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25)

 

* 남태현 극우의 노래: 한국의 극우, 그들은 누구인가(오월의봄, 2025)




정치적인 책을 읽는 문학 모임’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정치와 거리를 두는 문학을 경계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을 떠올린다면 문학 작품의 정치적인 독해가 가능하다오웰은 문학 작품 속에 스며든 작가의 정치색을 비평할 뿐만 아니라 파시즘과 반유대주의에 동조하는 작가들을 비판했다.







 

모임이 시작하자마자 <세속>의 정기 독자 조약돌 님이 먼저 우리나라 정치와 관련된 발제를 제시했다. 2, 30대 남성들은 왜 극우에 열광하는가? 나는 이 발제가 나올 거로 예상했고, 우리나라의 극우화 현상을 분석한 책 극우의 노래를 소개했다극우의 정치적 행보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시작되었다경기 침체가 길어질수록 살길이 막막한 청년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졌다. 거대 양당 정치는 청년들이 만족할 만한 정책을 내놓지 못했다. 여권 신장과 성평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이주민이 증가하자 청년들은 자신들이 역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분노한 청년들은 외국인 혐오를 조장하는 극우 유튜버들을 지지한다. 보수정당은 청년들의 불만과 분노를 달래기는커녕 그들의 극우 성향을 감싸고, 정치적 의제로 삼았.












* [절판] 새 한글 성경: 신약과 시편(대한성서공회, 2021)




독서 모임 구성원에 비종교인이 많으면 종교 책이 필독서로 선정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온갖 분야의 책들이 언급되는 모임 대화에 종교 책은 끼지도 못한다. 그래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알려진 성경은 대우가 좋은 편이다. 비종교인 애서가들도 성경이 고전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비종교인 애서가가 성경을 자주 인용하는 일은 드물다왜냐하면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열여섯 번째 모임(7월) 선정 도서]

* 금정연 한밤의 읽기(스위밍꿀, 2024)




지난주 금요일은 세계 문학 모임 날이었고, 다음 날인 토요일은 <수레바퀴와 불꽃> 16번째 모임 날이었다. 모임 필독서는 금정연 서평가한밤의 읽기였다<수레바퀴와 불꽃>두 명의 애서가가 만나면서 시작된 독서 모임이다. 이중 한 분은 라캉(Jacques Lacan)과 알튀세르(Louis Althusser)에 관심이 많은 크리스천이다. 그분은 꾸준한 책 읽기를 욕망하게 한 최초의 책이 설교 비평집이라고 했다.

















* [절판] 정용섭 엮음 속 빈 설교 꽉 찬 설교(대한기독교서회, 2006)

 

* 정용섭 엮음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대한기독교서회, 2007)

 

* 정용섭 엮음 설교의 절망과 희망(대한기독교서회, 2008)




그분 바로 옆에 앉은 나는 설교 비평이 궁금해서 질문했다. 설교 비평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그분은 국내에 처음 설교 비평을 시도한 정용섭 목사가 쓴 책을 읽었다고 했다. 책 제목은 언급하지 않았고, 그 책이 절판되었다고 했다.







<수레바퀴와 불꽃> 모임을 마치고 대구로 돌아온 나는 설교 비평과 관련된 책을 찾아봤다. 운이 좋게도 알라딘 동성로 서점에 정용섭 목사가 엮은 설교 비평집 두 권이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분이 말한 절판된 책은 정용섭 목사의 설교 비평집 시리즈의 1속 빈 설교 꽉 찬 설교.








기회가 되면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독서 모임을 만들어서 꾸리고 싶다. 문학 작품을 정치적 관점으로 읽는 모임이라든가 아니면 무신론자들을 위한 종교 책 읽기 모임이다실현 불가능한 모임이 될 가능성이 크지만, 정치와 종교 분야의 책도 독서 모임에 언급할 가치가 있다



독서 모임에 환영받지 못한 책을 읽는 애서가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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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30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을 2개나 하시는군요. 심지어 서울까지 가는 모임이라니... 진짜 대단하세요. 이런 열정이면 범상치않은 독서모임도 꿈만은 아닐듯해요

페넬로페 2025-07-30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의 세 가지 불문율!
정말 맞습니다.
전에 어떤 분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너무 착한 독서 모임도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요.
좀 비틀어 책을 볼 필요도 있다면서요.
그 경계가 모호해서 어떤 선을 지킬지 어려워요^^

blanca 2025-07-3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의 불문율, 시사하는 바가 크네요. 이건 그냥 모임에서 채택해도 될 것 같은데요.

카스피 2025-07-3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을 하지 않아서 저런 불문율이 있는지 전혀 몰랐넨요.그런데 저 3가지 불문율은 일반적인 사회생활시에도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5-07-30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설교(비평)는 특정 대상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 무신론을
가지신 분이 들으시면 현실과
현격한 괴리를 느끼시지 않을
까 싶습니다.

감은빛 2025-07-30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긴 시간동안 여러 독서모임들을 다녀봤었는데,
책을 주제로 여러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는 건 언제나 너무 좋죠.
제 기억에 제가 참여한 어느 독서모임에서도 불문율은 없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책의 어떤 내용들이 일상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책과 관련이 없는 이야기로 넘어갈 때 모임의 분위기가 좋아진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유일하게 하고 있는 독서모임인,
SF 읽기 모임에서는 제가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있어요.
SF의 특성상 영화나 게임 같은 영역으로도 확장되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뿐 아니라 현실 상황과의 비교, 비슷한 주제나 상황을 다룬
다른 작품들과 자주 연결시켜요.

저는 평생 종교를 가져 본 적이 없는 무신론자인데,
한때 종교에 관련한 책들을 열심히 읽었어요.
왜 사람들이 종교라는 발명품을 만들고, 거기에 빠져들었는지 궁금했거든요.
저는 지금도 정말로 신을 믿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못 믿겠어요. ㅎㅎㅎㅎ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책 읽기 모임
한번 해보고 싶네요.

꼬마요정 2025-07-3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 불문율은 독서모임 뿐만 아니라 어떤 모임에도 해당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 구성원 모두가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라면 조심 또 조심해야 할 듯 합니다. 종교, 정치이념은 전쟁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것이니까요.
 











청계천은 여전히 푸르다. 한때 개천 주변 거리에 하얀색과 누런색이 제법 많았다. 애서가들은 두 개의 색이 활짝 펼쳐진 헌책방 거리를 걸었다보도블록에도 깔린 헌책방 거리의 색깔은 하천과 함께 흐르는 시간에 의해 씻겨 나갔다먼지를 털어내면서 책을 만지작거리던 애서가들의 손길도 줄어들었다현재 거리에 남아 있는 헌책방 가게는 열 개도 채 되지 않는다.


내가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처음으로 갔던 해는 2013년이다. 십 년이나 훌쩍 지났으니 그때 가본 헌책방 가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지난주 토요일은 독서 모임 <달의 궁전> 모임 날이었다. 아침 일찍 서울에 도착한 나는 청계천을 걸으면서 헌책방 거리로 향했다청계천 헌책방 가게들은 비좁다. 가게 입구부터 시작해서 사방에 책들이 쌓여 있어서 겨우 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내가 첫 번째로 들어간 헌책방은 <대원 서점>이다. 내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연세가 지긋한 헌책방 주인은 매입한 책들이 담긴 쇼핑백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잠시 가게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대원 서점>에 만난 책들은 미국의 추리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의 유명한 장편 소설 두 권과 고전 평론가 고미숙의 대표작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다.

















* [리커버판]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북드라망, 2023)

 

* [개정 신판-절판]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북드라망, 2013)

 

* [구판-절판]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 2003)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2003년 그린비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해 당시에 <TV, 책을 말하다>라는 책 소개 전문 프로그램이 KBS 1TV에 방영되고 있었다. 밤 열 시에 하는 프로그램이라서 매주 챙겨 보지 않았지만, 이 프로그램에 소개된 책들을 브라운관에서 만나면 그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이 가슴에 솟아올랐다. 책을 마음껏 살 수 없는 중학생인 나는 도서관에서 가서 방송에 나온 책들을 빌려 읽었다. 생각이 어린 중학생 머리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책들은 끝까지 읽지 못했다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읽다가 중간에 포기한 책 중 하나다. 왜냐하면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서양 철학들이 상당히 낯설었기 때문이다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서양 작가나 사상가들의 이름은 잊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그들이 쓴 책에 다시 도전했다.









 









* [절판] 샤를 보들레르, 김붕구 옮김 악의 꽃(민음사, 1974)




한밤중에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TV, 책을 말하다>을 마주친 나는 그 방송 프로그램 덕분에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를 알았다. 가수 조영남이 출연해서 불문학자 김붕구 선생이 번역한 보들레르 시집을 추천했다.




















* 레이먼드 챈들러, 박현주 옮김 빅 슬립(북하우스, 2004)


* [절판] 레이먼드 챈들러, 박현주 옮김 기나긴 이별(북하우스, 2006)


















* 레이먼드 챈들러, 김진준 옮김 빅 슬립(문학동네, 2020)


* 레이먼드 챈들러, 김진준 옮김 기나긴 이별(열린책들, 2020)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hard-boiled) 문체는 간결하고, 화자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갑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챈들러의 소설을 읽은 이후로 하드보일드 문체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 장 베르나르 푸이 · 파트릭 레날 · 프랑수아 게리프 · 알프레드 에벨 · 로베르 콩라트 함께 지음, 이규현 옮김 필립 말로(이룸, 2004)





챈들러가 만든 탐정 필립 말로(Philip Marlowe)코난 도일(Conan Doyle)이 창조한 탐정 셜록 홈스(Sherlock Holmes)보다 더 냉소적이면서 거칠거칠한 남성성을 드러낸다빅 슬립은 챈들러의 첫 번째 장편이자 말로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이다기나긴 이별은 말로 시리즈의 후기 작품이다.


















* 크리스토퍼 말로, 강석주 옮김 말로 선집: 에드워드 2/ 파리의 대학살 / 디도, 카르타고의 여왕(나남출판, 2011)

 

* 크리스토퍼 말로, 강석주 옮김 탬벌레인 대왕 / 몰타의 유대인 / 파우스투스 박사(문학과 지성사, 2002)

 

[대구 세계 문학 전문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첫 번째 책]

* 슈테판 츠바이크, 정상원 옮김 감정의 혼란(하영북스, 2024)

 

 


하드보일드 탐정의 이름은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에서 따왔다. 말로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와 동시대에 활동한 극작가다지금은 영국 연극사를 대표하는 작가로 셰익스피어가 많이 언급되지만, 영국 연극이 절정을 이룬 엘리자베스 1(Elizabeth I) 시대에 가장 인기가 많은 극작가는 말로였다. 당시 셰익스피어는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신인 극작가였다. 젊은 셰익스피어는 말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셰익스피어와 말로는 영국 연극사의 맞수로 거론되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중편소설 감정의 혼란이다. 소설에 나오는 늙은 교수는 셰익스피어를 찬양하고, 그를 따르는 젊은 제자는 말로를 좋아한다. 두 사람은 선호하는 극작가가 달라서 갈등을 빚는다.



















* 레이먼드 챈들러, 정윤희 옮김 살인의 예술(레인보우퍼블릭북스, 2021)

 

* [절판] 레이먼드 챈들러, 최내현 옮김 심플 아트 오브 머더(북스피어, 2011)

 

* 레이먼드 챈들러, 안현주 옮김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북스피어, 2014)




심플 아트 오브 머더》(The Simple Art of Murder)는 미국과 영국 추리 문학 작품들에 대한 챈들러의 비평이 담긴 에세이다. 그는 모든 장르의 소설은 현실을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의 첫머리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핵심이자 챈들러의 문학을 압축한 챈들러레스크(Chandleresque)’의 핵심이다. 챈들러는 영국의 추리 문학을 비판적으로 비평하면서 미국에 유행한 하드보일드 추리 문학의 매력을 알린다. 영국의 추리소설에 나오는 탐정들은 지식을 동원해서 사건을 풀어나가는 귀족이자 학자. 반면 하드보일드 탐정은 사건 해결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세계 또는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 속 세계는 비열하고 비정하다. 하드보일드 탐정은 냉정한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

















레이먼드 챈들러, 승영조 옮김 레이먼드 챈들러밀고자 외 8》 (현대문학, 2016)





원래 《심플 아트 오브 머더표제작인 에세이와 총 열한 편의 단편 소설이 함께 실린 책이다(1950년 발표). 북스피어 출판사가 출간한 심플 아트 오브 머더는 에세이와 단편 소설 스패니쉬 블러드(Spanish Blood, 1935)만 수록된 책이다. 살인의 예술 에세이는 없고,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챈들러의 몇 안 되는 단편 소설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은 단편 선집 레이먼드 챈들러: 밀고자 외 8 유일하다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편지를 가려 뽑아서 다섯 개의 주제로 묶은 서한집이다이 책에 수록된 편지들은 챈들러가 지향하는 문학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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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6-16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비교적 깨끗해 보인다. 저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나도 갖고 있긴한데 아직도 못 읽고 있다. ㅠ 청계천을 다녀왔구나.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청계천 헌책방 골목 한 번 안 나가봤으니 나는 별로 책을 사랑하는 영혼은 아닌 것 같아. ㅠ 그 사이 헌책방이 줄어도 너무 많이 줄었나 보다. 일본엔 진보초란 울나라로 치면 청계천 같은 곳인데 한 마을 또는 플레이스 개념으로 보존되어 있는가 봐. 서점계가 어렵긴 일본도 마찬가진가 본데 그래도 그런 자구책일 가지고 서로 상생 노력한다는 게 기득하더군. 읽을 헌책은 많고 시력은 떨어지고. 그러며 사는 거지 별수 있니? ㅋ

cyrus 2025-06-24 06:37   좋아요 1 | URL
책이 많이 있는 유명 대형서점이나 유명한 헌책방에 한 번도 안 갔어도 꾸준히 책을 읽으면서 산다면 책을 좋아하는 영혼이에요. 저는 서울에 자주 가면서 광화문 교보문고와 아크앤북 잠실 롯데월드몰에 한 번도 안 가봤어요. 그리고 지난 주에 종료된 국제도서전에도 안 갔어요.. ^^
 




서울에 가는 토요일은 무조건 일찍 일어난다. 그날은 검푸른 빛 아침에 달리는 열차를 만난다. 검푸른 빛 아침 하늘에 슬며시 퍼지는 햇살은 밝지 않다. 여리여리한 햇살은 두 겹으로 된 열차 유리창을 통과하지만, 눈부시지 않다.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열세 번째 모임(2025년 1월) 선정 도서]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교양인, 2023)





이틀 전 토요일은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모임 날이었다. 올해 첫 독서 모임이다모임 선정 도서는 정희진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이다이 모임 장소가 있는 동네는 서울 노원구. 모임은 오전 10에 시작된다. 새벽 6시에 서대구역을 지나는 아침 열차를 타야만 모임 장소에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다. 서울역에서 노원역으로 가는 지하철 4호선을 타면 30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작년에 해야 할 건강 검진을 계속 미루었고, 회사는 토요일에 병원에 가보라고 독촉했다. 오전에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해서 독서 모임을 불참하기로 정했다.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받았다. 오전 시간대의 열차표 전부 매진되면 서울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0시에 서대구역을 지나는 열차 자리 하나를 대기 예약했다. 다행히 자리가 생겼다. 햇살 쨍쨍한 아침에 서울로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수레바퀴와 불꽃>은 세 시간 동안 진행된다. 1시에 모임이 끝나면 참석자들과 점심을 먹는다. 모임 뒤풀이라 할 수 있다.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나는 모임 뒤풀이에 합석했다. 혼자 식사하는 일이 주말 일상이 되다시피 해서 여러 사람과 식사하는 일이 드물다. 무엇보다도 그날의 점심 메뉴가 중요했다. 모임 참석자들이 먹으려는 음식은 피자였다.


<수레바퀴와 불꽃>은 처음에 서한용 작가김지용 님, 두 분의 대화에서 시작되었다. 김지용 님은 피자를 매우 좋아하는 분이다. 단순히 피자 먹는 일을 좋아하는 분이 아니다. 다양한 형태의 피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떤 재료를 쓰는지 살핀다. 지용 님이 선호하는 피자는 대기업이 만든 피자(프랜차이즈 피자)가 아니다.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피자 전문 가게에 직접 가서 먹는다. 이런 피자는 기업형 피자의 토핑과 다르다. 그리고 만드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용 님은 정말 피자에 제대로 미친사람이다. 그분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피자 사진이 많이 있다. 그분은 직접 구매한 피자를 먹고 나서 느낀 점을 인스타그램에 글로 남긴다. 피자 맛집을 잘 아는 지용 님이 추천한 피자 가게에 점심을 먹는다고 하니,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날 내 머릿속은 책이 아닌 피자 냄새로 가득했다













, 서 작가, 지용 님, 이 세 사람이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지노피자 창동이라는 가게였다. 가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도봉구 창동에 있다. 우리가 먹은 피자는 오리지널 디트로이트식 페퍼로니 피자 미트볼 피자였다.


피자 두 판이 나오자마자 지용 님은 피자의 전체 모습이 다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이 가게의 도우는 두껍다. 두께가 얼추 토스트와 비슷하다. 도우의 식감은 겉바촉속이다. 피자의 겉부분인 크러스트는 바싹하고, 토핑이 올려진 피자의 속살은 촉촉하다. 피자 토핑이 된 미트볼은 피자 가게 사장이 직접 만든 것이다. 수제 미트볼위에 끈적하게 녹은 치즈가 있다.


우리는 피자를 먹으면서 책과 페미니즘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도 대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피자였다. 세 사람의 입과 눈빛이 피자로 향하자 김지용 교수님의 피자 강의가 시작되었다.


















[절판] 캐럴 헬스토스키, 김지선 옮김, 주영하 감수 피자의 지구사(휴머니스트, 2011)





김 교수님은 이탈리아 피자와 미국 피자의 차이점을 알려줬다. 그 전에 먼저 김 교수님은 이탈리아 피자라는 말을 자주 쓰면 다양한 피자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 지방마다 피자를 만드는 방식과 토핑 재료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만들어진 피자는 빈민층들의 주식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피자는 나폴리 피자. 나폴리 피자는 토마토와 치즈가 들어 있는 오늘날의 피자와 다르다. 나폴리 피자가 한참 유행했을 때 이탈리아에 토마토가 들어오지 않았다. 나폴리 빈민들에게 육류는 비싼 재료였다. 나폴리 피자에 먹음직스러운 토핑이 없었다. 둥글납작한 빵에 올려진 것은 마늘과 소금, 라드(lard: 고체 형태로 된 돼지기름)뿐이었다. 그래서 나폴리 피자의 별칭은 흰 피자였다고 한다미국 피자는 미국인들이 만든 피자를 뜻하지 않는다. 미국 피자를 처음 만든 사람은 미국으로 건너온 이탈리아 이민자들이다. 이들은 뉴욕, 보스턴, 코네티컷에 정착했고, 각 지역에서 나오는 특산물로 피자를 만들었다.


피자 가게에서 했던 우리의 대화는 뜨거웠다. 대화의 열기가 더욱 뜨끈뜨끈해질수록 피자는 천천히 식었다. 하루 지났는데도 내 머릿속에 여전히 따끈따끈한 피자 냄새가 진동했다. 다음날, 책에 미친 나는 도서관에 가서 피자의 지구사를 빌렸다. 피자에 미친 김 교수님도 이 책을 가지고 있었다이 책은 피자 강의의 교재였다교수님이 설명한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서 강의 후기를 못 쓸 줄 알았다. 강의 교재 덕분에 김 교수님이 설명한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

 

피자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봐서 그런가? 

여전히 피자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다

지나간 피자는 잊어버리고, 이제 책을 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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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20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피자 맛있어 보인다.
나중에 그분 피자 가게 낸 다고 할 것 같네. ㅎ
그래. 다니던 사람은 다녀야 해. 안 다니면 허전하고 뭔가 손해 본 것 같고 그렇잖아.
검진 결과는 이상무지?

cyrus 2025-01-21 06:40   좋아요 1 | URL
지용님이 책을 좋아하셔서 책과 피자를 파는 가게를 차리고 싶다고 하셨어요. ^^

자세한 결과는 2월 초에 나올 거예요. 혈압은 정상인데, 혈당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 되네요. ^^;;

cyrus 2025-01-27 09:19   좋아요 1 | URL
지난주에 결과가 나왔는데, 문제없었어요. ^^

stella.K 2025-01-28 11:49   좋아요 1 | URL
그랴. 잘 됐다. 명절에 과음 과식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보내라.^^

blanca 2025-01-2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자 얘기 재미있네요. 특히 나폴리 피자 얘기는 진짜 신기하네요. 저는 이탈리아 고급 피자인 줄 알았는데...새벽 기차까지 타고 서울 독서모임에 가시는 정열이 부럽습니다.

cyrus 2025-01-21 06:41   좋아요 0 | URL
왠지 올해는 피자를 많이 먹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서니데이 2025-01-25 2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속의 피자 맛있을 것 같아요. 미국도 지역에 따라 피자가 조금씩 다르다고 들었는데, 디트로이트 식 피자는 처음봅니다. 건강검진 결과도 좋게 나왔으면 좋겠네요.

cyrus 2025-01-27 09:21   좋아요 1 | URL
건강에 큰 문제는 없었어요. ^^
 



서한용 작가가 감사하게도 내가 진행하는 독서 모임을 위한 추천사를 썼다. 이번 달 독서 모임 선정 도서는 내가 정했지만,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려준 사람은 서한용 작가다. 서 작가의 추천사에 보르헤스(Borges)가 예술을 정의한 말이 나온다. 예술은 불과 수학의 결합이다.’ 





















* 리사 크론, 문지혁 옮김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사람의 뇌가 반응하는 12가지 스토리 법칙》 (웅진지식하우스, 2024)




2주 전에 나는 서 작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독서 모임 추천사를 써달라고 제안했다. 당시 서 작가는 소설 집필을 위해 창작 방식을 소개한 책을 읽는 중이라고 했는데, 그 책이 바로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였다서 작가는 이 책의 머리말에 언급된 보르헤스의 말을 다시 인용했다.



 독자를 사로잡는 이야기는, 독자의 강력한 기대를 계속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예술이란 불과 수학의 결합이다라고 말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중에서, 7)



불과 수학은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Tion, Uqbar, Obis Tertius)에 나오는 구절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송병선 옮김 픽션들》 (민음사, 201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황병하 옮김 픽션들》 (민음사, 1994)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는 보르헤스의 소설집 픽션들에 수록된 작품이다보르헤스가 만든 가상의 인물과 지명,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책들, 그리고 실존 인물의 이름이 나열되면서 뒤섞인 이야기는 독자에게 혼란을 준다여기에 여러 종류의 철학들도 녹아 들어 있어서 보르헤스의 글을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보르헤스의 글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꿈, 상상력, 백과사전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픽션들은 현재 두 권이다. 처음 나온 지 30년이나 된 보르헤스 전집픽션들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픽션들이 있다. 두 권의 책을 만든 출판사는 같지만, 번역자는 다르다픽션들》의 두 번역자는 불과 수학’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어느 해적판 백과사전에서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피상적인 언질을 발견했었다. 이제 우연은 내게 보다 정확하고 꼼꼼히 읽어야 할 어떤 무엇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알 수 없는 혹성에서의 건축과 놀이기구, 그곳의 신화가 가진 공포와 그곳 언어들의 흔적, 그곳의 황제들과 바다들, 그곳의 광석들과 새들과 고기들, 그곳의 기하학과 불, 그곳의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논쟁들과 함께 그곳의 전 역사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방대한 자료의 일부를 바로 내 손안에 들고 있게 된 것이었다


(황병하 옮김, 27)


 이 년 전 나는 해적판 백과사전에서 존재하지 않는 거짓 국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발견했다. 이제 우연은 보다 정확하고 보다 공들인 무엇인가를 내게 제시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알려지지 않은 행성의 전체 역사를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다룬 자료 일부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그 행성의 건축과 카드 패, 소름 끼치는 신화와 그 언어의 속삭임, 그곳의 황제와 바다, 광석과 새와 물고기, 그곳의 수학과 불꽃, 그곳의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논쟁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송병선 옮김, 19)




소설 속 화자인 보르헤스는 기억력이 좋다. 그는 동료 작가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Adolfo Bioy Casares)가 잠깐 언급한 말을 잊지 못한다그 말은 이교도 지도자 우크바르가 한 말인데,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우크바르의 말의 출처가 궁금해서 백과사전을 살핀다백과사전에 언급된 여러 편의 참고문헌까지 경유한 보르헤스는 틀뢴과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라는 비밀에 휩싸인 행성과 세계를 만난다.


두 권의 픽션들중에 딱 한 권만 읽으라고 추천하기가 애매하다. 왜냐하면 두 번역본에 있는 역자의 주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보르헤스 전집픽션들의 단점은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장이다. 비록 정확하지 않은 내용이 담긴 주석도 더러 있다. 그 예로, 실제 인물인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사망 연도를 물음표로 표시한 역주(18쪽). ‘보르헤스 전집이 출간된 1994년에 카사레스는 살아 있었고, 그는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보르헤스의 창작 의도를 알려주는 역자의 주석은 보르헤스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반면 보르헤스 전집픽션들의 문장은 읽기 수월하지만, ‘보르헤스 전집픽션들과 비교하면 역주의 양이 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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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21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고가 많겠구나. 사람들은 많이 나오나? 이런 모임은 흔들리지 않는 꾸준함이 중요한 것 같아. 몇명이 나오든 상관하지 말고 꾸준히 잘 해 봐. 벌써 지원군도 있고. 든든하겠어. ㅎ 멀리서 응원한다!
이책 나도 읽어보고 싶던 책이야.

cyrus 2024-12-22 22:41   좋아요 1 | URL
문학 읽기 모임은 많으면 (저를 포함해서) 5, 6명이 참석하는 소모임이에요. 누님은 오래전부터 저의 서재를 봐서 아시겠지만, 저의 문학적 취향이 독특하잖아요.. ㅎㅎㅎ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는 분들은 제가 추천한 문학 작품들이 재미없다고 투덜대요. 그런데도 제가 감탄할 정도로 작품 분석을 잘 해요. 문학 모임이 6월부터 시작했는데, 이번 달까지 하면 7개월째 진행했네요. 이 정도면 예상보다 오래 한 겁니다. 저는 이 모임이 길게 가봐야 3개월로 예상했거든요.. ^^;;

감은빛 2024-12-24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거리를 극복할 수 있다면 시루스님 모임에 가고 싶네요. 저도 예전부터 책 모임 여러 개를 나가다 말다 했었어요. 제일 오래 나갔던 건 아마 1년 넘게 가기도 했었죠. 요즘은 SF읽기 모임을 시작한 지 세 달 정도 되었는데, 재미있습니다. 참석자들이 모두 내가 참 좋아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연령대가 다양하다는 점이 흥미로운 포인트인 것 같아요. 제일 연장자는 60대의 공장노동자이신데, 매주 주말은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보내는 정말 책을 많이 읽고 상식이 풍부한 분이시고, 막내는 30대 후반의 예술가로 정기적인 급여를 받는 노동을 하지 않고도 어떻게든 생겨를 꾸려가면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훌륭한 활동가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유일한 여성이라 대화를 나눌 때, 여성의 시선으로 보려고 하는 흐름을 잘 이끌어 줍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훌륭한 분들인데, 각자 긴 시간 다른 분야에서 사회운동을 펼친 사람들이라, 각자의 경험과 시선이 달라서 더 재미있어요.

cyrus 2024-12-26 06:26   좋아요 0 | URL
연령대와 관심사가 서로 다른 분들이 모여서 즐거운 분위기 속에 독서 모임을 진행한다는 건 축복이에요. 제가 20대 때 참석했던 독서 모임은 감은빛 님이 말씀하신 독서 모임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라서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요즘 독서 모임은 과거 분위기만큼 나지 않네요. ^^;;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문학 작품을 디딤돌로 삼아서 철학을 펼친 철학자다. 레비나스의 문학 작품 해석은 작가의 의도를 밝히는 분석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레비나스는 문학 작품 속 인물들의 목소리에 자신의 철학적 목소리를 덧붙인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책에 언급된 문학 작품의 의미는 변하고 뒤집힌다. 정해진 해석과 교훈에 따라 문학을 흡수하는 독자들은 레비나스의 생각이 뒤섞인 문학 작품을 어려워할 수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책을 번역하려면 문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번역자는 레비나스가 참고한 문학 작품이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레비나스가 어떤 해석을 부여하면서 문학 작품을 언급했는지 정확히 밝히기 어려운 문장이 있다. 레비나스는 작품 제목을 언급하지 않고, 그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해서 설명할 때도 있다. 결국 번역자는 자신만의 해설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레비나스 읽기 모임 두 번째 도서 (8~10월)]

에마뉘엘 레비나스김도형 · 문성원 · 손영창 함께 옮김

전체성과 무한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그린비, 2018)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맥베스(민음사, 2004)




전체성과 무한에서 레비나스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비극 맥베스를 두 번 언급한다(213, 347). 그는 또 셰익스피어를 언급하는데, 이 문장은 애매모호하다.



* 399


 암시로 가득 찬 마녀들의 셰익스피어적 모임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 있다. 이것은 모든 진지함의 부재인 듯, 말의 모든 가능성의 부재인 듯, 말들의 정숙함 저편에 놓인다. 이 웃음은 양의적 이야기들의 웃음이다



번역자는 암시로 가득 찬 마녀들의 셰익스피어적 모임이라는 표현주석을 달았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경식 옮김 템페스트(문학동네, 2009)




* 옮긴이 주


 셰익스피어가 마법사를 등장인물로 내세우는 희곡으로는 폭풍(The Tempest)이 있다.

 



폭풍은 셰익스피어가 쓴 마지막 희곡이며 원래 제목인 템페스트로 불리기도 한다. 이 희곡에 나오는 마법사는 작품 주인공인 프로스페로를 가리킨다. 그런데 본문에 마녀들이라는 표현을 썼는데도 번역자는 주석에 마법사를 언급한다


마녀들이 나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맥베스. 반란군과의 전쟁을 승리로 끝낸 스코틀랜드 영주 맥베스는 귀환하기 위해 자신의 부관(副官) 뱅코와 함께 황야를 지나간다. 그곳에서 그는 세 명의 마녀를 만난다. 마녀들은 맥베스와 뱅코에게 예언을 들려준다. 맥베스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지만, 뱅코는 왕이 될 수 없고, 그 후손이 왕이 된다는 예언이다예언은 미래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암시로 가득 찬 마녀들템페스트의 마법사 프로스페로가 아니라 맥베스의 세 마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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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4-10-13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저 구절은 당연히 맥베스를 연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cyrus 2024-10-19 08:41   좋아요 0 | URL
‘셰익스피어적 모임’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낯선 데다가 본문과 주석 내용이 맞지 않아서 그냥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어요.. ㅎㅎㅎ

마녀사냥에 희생당한 사람 중에 남성도 있었다고 해요. 그들은 마법사였거나 마법사로 오해를 받은 사람들이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