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마지막 주 월요일(826)페미니즘 스쿨이 휴강하는 날이었다. 특별히 이날에 레드스타킹이 인터뷰이(interviewee)가 되어 청년인문상상프로젝트 기자단과 인터뷰를 했다.

 

 

[인문상상 인터뷰] 대구 청년들의 페미인문스쿨! ‘레드스타킹인터뷰!

https://blog.naver.com/korea-humanist/221636576950

 

 

나는 일부러 늦게 인터뷰에 참여하려고 생각했었다. 나보다 먼저 인터뷰 진행 장소(카페 스몰토크)에 도착한 멤버들이 인터뷰어의 (수준 높은) 질문들에 잘 응해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인터뷰 진행 장소에 도착해보니 인터뷰가 시작되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자기소개를 했다.

 

인터뷰에 응하기 전에 기자단이 만들어서 보내준 예상 질문들을 확인했다. 그 중에 제일 마지막 질문이 압권이었다.

 

 

레드스타킹팀에게 인문이란 무엇인가요?

 

 

멤버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질문이었다. 그래도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온 분들이 있었다. 혹시나 내게 이 질문이 올까 봐 대답할 말을 생각해봤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블로그(위에 있는 링크를 참조할 것)“‘레드스타킹팀에게 인문이란 무엇인가요?”에 답변한 레드스타킹 멤버 1’은 나다. 기자단 중에 인터뷰 내용을 노트북으로 속기한 분이 있었는데, 내가 한 말을 정확하게 잘 썼다.

 

 

 

 

 

 

 

 

 

 

 

 

 

 

 

 

* 마틴 푸크너 글이 만든 세계(까치, 2019)

 

 

 

인문학의 인문(人文)은 인간()과 글()이 합쳐진 단어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인문의 뜻은 인류의 문화. 문화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오래된 문화는 기록 문화. 하버드대 영문과 교수 마틴 푸크너(Martin Puchner)는 이야기를 하는 행위(storytelling)와 글쓰기(writing)가 교차하는 문화가 탄생하면서 문학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이렇듯 인문학의 역사가 글쓰기라는 문화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글쓰기에 중점을 둔 인문의 의미를 제고해보고 싶었다. 책을 읽은 다음에 곰곰이 생각해서, 생각한 것을 글로 기록하면 나의 내면을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까? 그게 바로 인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기록에 초점을 맞춘 인문학은 나 혼자 묻고 답하는 일을 반복할 뿐이다. 이런 인문학은 자신의 삶에만 몰두하는 고상한 개인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서 나와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인문학이 필요하다.

 

나는 인문(人文)인문(人問)으로 바꿔서 써보고 싶다. 인문의 은 기존의 인문학에서 요구하던 자성과 성찰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는 행위를 뜻한다. 기존의 인문학은 내가 생각한 것을 글로 쓰는 행위가 있는 학문이라면, 인문학(人問學)은 내가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상식과 진리를 의심하고 점검하는 학문이다. 대부분 글은 내가 생각한 것은 이렇다’, ‘나는 ~을 이해했으며 충분히 ~을 알고 있다라는 식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질문을 할 수 있다. 질문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정직한 질문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진리를 부드럽게 하거나 산산조각 나게 만든다.

 

 

 

 

 

 

 

 

 

 

 

 

 

 

 

* 김보영, 김보화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서해문집, 2019)

 

 

 

페미니즘이 인문학(人問學)이라고 하면 섣부른 확신을 배제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 절대 부동의 진리는 없다. 진리에 반기를 들고 비판하는(받는) 과정도 공부다. 다만 즐거운 공부가 되어야 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만 하는 공부는 따분하고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페미니즘을 즐겁게 공부할 수 있을까?

 

국내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그들의 진솔한 생각을 담은 책인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서해문집)에 퀴어 페미니즘 운동 그룹 페미몬스터즈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인터뷰에 응한 페미몬스터즈 멤버는 이렇게 말한다.

 

 

 

(인터뷰어 질문) 같이 살아가고 있는 페미니스트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요?

 

이 운동이 우리에게 즐거운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페미니즘을 만나는 건 자기가 깨지는 경험이기도 하잖아요.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험인데, 그게 자신을 병들거나 낙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즐겁게 하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 38, 밑줄은 필자가 그은 것임)

 

 

 

자기가 깨지는 경험은 어떠한 진리와 상식을 머리와 가슴속에 품고 살아온 를 깨뜨리는 경험이다. ‘를 조금씩 깨뜨리기 시작할 땐 아프다. 그러나 한번 깨지고 나면 머리와 가슴속에 있던 오래된 진리와 상식이 말끔하게 비워지기 때문에 상쾌하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자기가 깨지는 경험은 나 혼자서 할 수 없다. 반성의 글을 쓴다고 해서 그 마음이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글 쓰는 행위만 가지고는 나를 깨뜨리기 힘들다. 남의 손을 빌려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서 모임에 참여해서 여러 사람과 함께 즐거운 공부를 해야 한다. ‘즐거운 공부를 자발적으로 하게 만드는 활발한 모임 분위기와 크고 작은 질문과 다른 의견을 귀담아 들어주는 훌륭한 멤버들이 있어서 나는 2년 동안 레드스타킹 독서 모임에 참석해왔고, 페미니즘 스쿨을 시작할 수 있었다.

 

레드스타킹인터뷰는 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이 어떠한 모임인지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레드스타킹이 궁금한 분이라면 이 인터뷰를 참고하셔도 좋다. 이 인터뷰에 참여한 분들은 모임에 꾸준히 나오는 열혈 멤버이고, 나보다 더 오랫동안 여성학을 공부한 페미니스트다.

 

인터뷰 내용에 글을 작성한 기자단의 실수로 보이는 오류가 있다. 레드스타킹을 소개하는 내용 중에 지난해 10 팀 이름을 레드스타킹으로 지었다라는 문장이 있다. 모임 명인 레드스타킹은 지난해 10월이 아니라 201710부터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Trivia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의 인터뷰이로 참여한 페미니즘 모임 중에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모임이 있다. 줄여서 나페라고 부른다. 대구에서 레드스타킹보다 오랫동안 활동한 페미니즘 모임이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분들이다 보니 페미니즘 강연이나 행사에 참석하면 나페멤버들을 자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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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6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16 18:03   좋아요 0 | URL
그럼요. 집에서 푹 쉬었습니다.. ㅎㅎㅎ 유레카님은 추석 잘 보내셨어요? ^^
 

 

 

 

7월 22일 월요일

세 번째 강의. 퀴어와 장애의 교차

 

 

 

 

 

[레드스타킹 페미 스쿨] https://cafe.naver.com/redstocking

 

 

 

‘병리화’는 참으로 생소한 단어입니다.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단어이기도 해요. 예전에 책을 읽다가 ‘병리화’라는 단어를 몇 번 보곤 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쉽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어요. 전혜은 선생님은 병리화의 정의를 ‘정상성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기제’라고 말했습니다.

 

정상성을 생산하고 강조하는 병리화는 건강을 ‘정상’으로, 질병과 장애를 ‘비정상’으로 구분 짓게 만듭니다. 건강한 몸이 정상성의 기준이 되는 순간, 아픈 몸과 장애인의 몸은 각각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몸’, ‘결핍된 몸’으로 취급받습니다. 병리화는 환자와 장애인을 ‘불행의 아이콘’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병리화는 그들에 대한 결함, 오류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고착화하는 혐오를 재생산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병리화, 즉 정상성을 해체하는 작업은 결국 ‘정상적인 몸’과 ‘병리적인 몸’을 구분하게 만드는 위계 체계를 비판하는 일입니다.

 

‘병리적인 몸’으로 규정된 몸은 그 몸의 실제 경험과 관련 있는 섹슈얼리티도 병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리화된 장애 여성은 섹슈얼리티를 탐색하고 실험할 계기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혜은 선생님이 번역한 앨리슨 케이퍼(Alison Kafer)의 글 『욕망과 혐오: 추종주의 안에서 내가 겪은 양가적 모험』은 일종의 금기가 되어버린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앨리슨 케이퍼는 장애학과 퀴어를 연구하는 여성학자이며 장애인입니다. 이 글의 제목에 나오는 추종주의“신체 절단 장애 여성에게 성적으로 이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부분 비장애인은 추종주의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된 순간 “뭐야? 이상해. 변태 아니야?”라는 반응할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케이퍼는 추종주의자를 ‘변태’라고 규정하는 반응을 의심합니다. 만약 절단 장애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것을 ‘병리화’하여 부정하게 된다면, 절단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마저도 부정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장애 여성은 무성적 존재로 간주되고 맙니다. 케이퍼는 절단 장애 여성들의 동의 없이 그녀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해서 공개하고, 심지어 스토킹하는 일부 추종주의자들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추종주의자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가 절단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대안적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케이퍼는 이 『욕망과 혐오』라는 글에서 추종주의에 대한 자신의 양가적 반응을 솔직하게 밝힙니다. 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추종주의와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 문제를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으로 비유합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비유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유래와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아시아를 정복하려는 알렉산더(Alexandros) 대왕은 이 매듭을 푸는 대신에 칼로 매듭을 잘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케이퍼는 추종주의라는 매듭을 자르지 않습니다. 추종주의에 대한 양가적 입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스스로 질문을 하면서 천천히 매듭을 풀어나갑니다.

 

만약 제가 케이퍼의 글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추종주의를 알게 되었다면, 저는 알렉산더 대왕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추종주의는 장애 여성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거야. 그건 문제가 있어’라고 부정적으로 단정 지었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어떤 복잡한 문제를 단순 명쾌하게 해결하고 싶어 합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어버린 저 알렉산더 대왕처럼 말이죠. 하지만 케이퍼가 생각했듯이 추종주의가 얽힌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아주 복잡하며,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 쉴라 제프리스 《코르셋》 (열다북스, 2018)

 

 

 

사실 제가 추종주의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도록 영향을 준 책이 쉴라 제프리스(Sheila Jeffreys)《코르셋》(열다북스)입니다. 트랜스 여성을 배제하는 제프리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남성의 눈요기를 위해 여성의 몸이 훼손되는 행위(SM, 피어싱)‘유해 문화’라고 보는 입장에 일부 동의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케이퍼의 글을 읽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절단된 몸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마저 ‘유해 문화’로 단순하게 규정해버린다면 추종주의도 유해 문화가 되고, 절단한 몸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장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병리적인 욕망’으로 남게 됩니다. 결국 신체 절단 행위를 비판하는 제프리스의 주장은 ‘목욕물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리는’ 오류를 피하지 못합니다.

 

 

 

 

 

 

 

 

 

 

 

 

 

 

 

 

 

* 전혜은, 루인, 도균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8)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편집부 《여/성이론 통권 제39호》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8)

 

 

 

 

서로 상반된 입장으로 나누어지는 페미니즘 논제에 접근할 때 알렉산더 대왕이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처럼 되지 않으려면 양쪽 입장 중에 한쪽을 선택해서 (그 입장이 옳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양쪽 손을 동시에 잡아’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고민하는 방식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공부 방식이 혜은 선생님이 말한 ‘교차성을 사유하기 위한 기본적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 후기를 빌어서 케이퍼의 글을 번역하신 혜은 선생님께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번역한 케이퍼의 글 일부는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 수록된 『장애와 퀴어의 교차성을 사유하기』(글쓴이: 전혜은)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전문은 《여/성이론》 제39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페미 스쿨 커리큘럼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케이퍼의 글을 꼭 읽어보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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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었어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 전국장애인위원회 발대식에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의미의 말을 했었죠.

 

 

“신체 장애인들보다도 더 한심한 사람들은…‥ 아,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더 우리가 그 깊이 생각해야 될 사람들은 정신 장애인입니다. 정치권에서는 말 하는 것 보면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 장애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까지 우리가 포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출처]

 

 

이 대표가 ‘정신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정신 장애인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구분 지어서 정치인을 비판하는 발언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신 장애인을 ‘포용하기 쉽지 않은 존재’로 규정한 이 대표의 생각은 장애인을 배제하는 인식을 부추길 수 있습니다.

 

 

 

 

 

 

두 달 전에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은 대통령을 한센병 환자로 비유했습니다. 김 의원은 대통령의 행보(자기 생각과 다른 국민의 고통을 느끼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가 문제 있다면 의학적 용어를 사용하면서 비판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발언을 놓고 정치권에서 비판이 이어졌습니다만, 그녀의 발언을 두둔하는 네티즌들도 있었습니다.

 

이 대표와 김 의원은 각각 장애인과 환자를 ‘정상과 거리가 먼 사람’, ‘무능력한 사람’과 같은 의미로 설정하여 정치인을 비판했습니다. 두 사람의 발언은 사회적 소수자인 장애인과 만성 질환 환자를 ‘병리화(pathologizing)하여 그들의 비정상성, 결함, 오류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고착화하는 ‘장애 혐오’를 재생산하게 만듭니다.

 

이번 주 월요일에 진행된 페미니즘 스쿨 세 번째 강의 주제 중 하나가 ‘병리화’였습니다. 병리화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어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이 단어를 종종 보곤 합니다만, 이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전혜은 선생님은 병리화의 의미를 아주 쉽게 설명했습니다. ‘정상성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기제’라고요.

 

과거에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정신의학협회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분류했습니다. 1990년에 동성애를 질병 분류 목록에 제외됐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람은 여전히 동성애를 ‘정신 질환’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 단체들은 동성애를 질병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성애 혐오를 부추깁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내민 구원의 손길을 받은 동성애자는 탈동성애자로 ‘치유’될 수 있다면서 ‘전환치료’를 주장합니다. 동성애자를 질병으로 병리화하게 되면 헤테로섹슈얼(heterosexual: 이성애)이 ‘정상적인 섹슈얼리티’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사랑’으로 낙인찍히는 거죠. 장애 문제를 병리화하는 것은 성소수자 배제의 논리와 비슷합니다.

 

 

 

 

 

 

 

 

 

 

 

 

 

 

 

 

 

 

* 조한진희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동녘, 2019)

 

 

 

 

정상성을 강조하는 병리화는 건강과 질병을 각각 ‘정상 대 비정상’으로 구분 짓게 만듭니다. 건강한 몸이 정상성의 기준이 되면, 아픈 몸은 ‘건강관리를 소홀히 하면 일어날 수 있는’ 몸으로 취급받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지속되면 우리는 질병 문제의 원인을 사회가 아닌 개인에서 찾게 됩니다. 그리고 병리화는 환자를 ‘불행의 아이콘’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라는 부제가 달린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동녘)는 건강이 ‘성공적인 자기 관리’의 기준이 된 사회를 되돌아보게 만든 책입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아픈 몸에 대한 혐오에서 벗어나는 삶의 방식을 제안합니다. 몸이 아픈 것이 곧 불행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며, 아픈 사람은 그 불행을 극복할 힘을 가진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 피터 콘래드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 (후마니타스, 2018)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화는 정상, 건강에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 사람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기준을 내세운다는 명분상의 우위를 점하면서 자신과 타자를 구분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타자에게 무언가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상성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는 비정상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치료적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인간의 유형, 습관, 행동, 특성, 성향들을 ‘병리화’하여 수많은 진단명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후마니타스)는 기존에는 질병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증상들이 치료받아야 하는 의학적 문제로 규정 받는 ‘의료화(medicalization) 현상을 다룬 책입니다. 과잉 병리화와 과잉 의료화를 별다른 생각 없이 수용하게 되면, 장애인과 환자, 성소수자는 비정상적인 존재로 남아 비인간화됩니다. 병리화는 타자화와 맞닿아 있습니다. 사회적 소수자 개인의 삶을 제대로 보고, 각각 개인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그/그녀들을 타자화하지 않게 만듭니다.

 

 

 

 

[출처] [이해찬, 장애인 앞에서 ‘장애 비하’ 발언 논란] (프레시안, 2018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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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9-07-2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릴 때 아프다고 할 때마다 안 받아들여지거나 심하게 혼나기도 해서 ‘아픈 것‘ 자체가 나쁜 줄 알고 아파도 참고, 친구들이 아파서 학교를 조퇴하거나 양호실을 가면 그래도 되나 이상하게 생각하고, 아픈 건 나쁘기 때문에 어떤 사유가 된다고 생각하지 ‘못‘ 했거든요. 그런데 사회에 나와보니 아니더라구요. 누구나 아플 수 있고, 아픈 건 당연하고, 아프면 쉬어야 하고 그렇더라구요. 아픈 것 역시 정상인거죠. 사실 정상, 비정상 개념 자체가 무섭긴 하지만요. 지구에 사는 생명체가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많은데, 그 각각의 존재 자체가 다 특별하고 다름을 어떻게 한 두가지 잣대로 범주화 할 수 있을까요.

cyrus 2019-07-27 10:35   좋아요 0 | URL
아픈 몸은 ‘노동을 할 수 없는 몸’, ‘나태한 몸’으로 연상되기 때문에 부정적 낙인으로 찍히기 쉬워요. 그래서 여전히 사람들은 조퇴, 결근, 생리 공결, 출산 휴가 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죠. 아프다는 핑계를 내세워 일을 적게 하면서 임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말이에요. 정말 비양심적인 사람들도 있긴 해요. 하지만 그런 이유만 가지고 휴식 차원에서 일을 쉬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그만 메모수첩 2019-07-25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학이 발달하면서 개인은 몸의 주체성을 많이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언제나처럼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9-07-27 10:38   좋아요 1 | URL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의사들이 ‘질병’으로 분류하게 되고, 여기에 제약 회사들이 가세해서 약을 만들어 팔아요. 이런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되면서 아픈 사람들은 병원 치료나 약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됩니다.

Conan 2019-07-27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주째 몸이 아파서 치료를 받으며 휴가와 복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저 스스로에대한 무력감과 동료에대한 죄의식이 생기더군요... 주변의 부정적 인식도 있구요...

cyrus 2019-07-29 16:46   좋아요 1 | URL
Conan님이 느낀 그 심정, 저도 이해합니다. 우리나라는 만성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작업 환경과 근로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요. 몸이 아프면 무조건 일을 그만두어야 하죠. ㅠㅠ

2019-07-27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9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9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3년 동안 (대구) 침산동에서 자리를 지키던 책방 ‘서재를 탐하다’가 새로운 곳에 정착했습니다. 책방은 고성로(원대동)에 있는 달성초등학교 정문 맞은편에 있습니다.

 

 

 

 

 

네이버 검색창에 ‘서재를 탐하다’를 입력하면 책방의 정확한 위치와 책방의 내부 사진을 확인할 수 있어요. 사진으로만 봐서는 새 책방의 내부 크기가 예전보다 넓어 보여요(제 블로그에 올린 책방 사진은 네이버 지도에 등록된 사진입니다). 얼른 가보고 싶어요.

 

 

 

 

 

 

 

 

 

이번 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 진행될 일흔 여섯 번째 ‘나를 관통하는 책읽기’ 모임 장소는 ‘서재를 탐하다’ 책방입니다. 이번 달에 읽을 책은 웬다 트레바탄(Wenda Trevathan)《여성의 진화》(에이도스)입니다.

 

 

 

 

 

 

 

 

 

 

 

 

 

 

 

 

 

 

 

* [나를 관통하는 책읽기 7월의 책] 웬다 트레바탄 《여성의 진화》 (에이도스, 2017)

 

 

 

《여성의 진화》는 여성이 평생 겪는 몸의 변화와 건강을 진화의학에서 나온 연구 성과를 토대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진화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현재 여성들이 가장 많이 시달리는 각종 질병과 질환―유방암, 자궁암, 월경전증후군 등―이 일어난 원인을 ‘진화에 적응하지 못한 몸’에서 찾습니다. 여성의 몸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주변 환경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는데요, 문제는 급격하게 변한 주변 환경과 생활방식에 몸이 적응하지 못합니다. 진화하는 몸과 주변 환경이 서로 맞지 않아서 생겨난 것이 바로 여성들이 자주 걸리는 질병인 거죠.

 

현재 우리는 과거에 살았던 선조들보다 풍족하게 사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상황에서든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는 상황과 같은 거죠. 생활수준이 향상될수록 여성의 몸은 생활환경에 맞추어 변합니다(진화합니다). 그러면서 현대 여성의 초경이 앞당겨지고, 월경 횟수가 많아지고, 완경(폐경)이 늦어집니다. 현대 여성의 몸에 있는 여성 호르몬 수치는 과거 여성들보다 높은 편입니다. 그러나 여성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면서 유방암, 자궁암, 난소암 발병률도 높아집니다. 현재 여성들은 과거 여성들보다 더 많이 유방암, 자궁암에 걸립니다.

 

 

문과에 익숙한 독자는 《여성의 진화》가 어려운 과학 책 같아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단순히 ‘어려운 과학 책’이라기보다는 ‘나를 관통하는 과학 책’으로 느껴졌습니다. 이 책에는 여성의 건강과 관련된 최신 연구 결과뿐만 아니라 여성의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 원인과 잘못 알려진 정보들까지도 알려줍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희 어머니의 건강에 대해 좀 더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예전에 어머니가 왜 그렇게 아파했는지 이제야 알았어요. 《여성의 진화》를 읽으면 내 주변에 있는 여성(어머니, 할머니, 아내, 딸)의 몸과 건강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여성의 건강권(right of health)을 보장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우리 시대의 화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번 달 독서 모임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이 바로 저거든요. 독서 모임 발제를 정할 겸 예전에 읽은 책의 주요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봤어요. 《여성의 진화》는 내용상 두 시간 안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면 독서 토론을 한 달 동안 진행해야 돼요. 따라서 《여성의 진화》를 함께 읽고 싶은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안 읽으셔도 돼요. 각자 관심 있는 책의 내용만 골라서 읽으셔도 됩니다. 이 책에서 꼭 정독해야 할 글은 ‘들어가는 글’과 11장입니다.

 

 

 

발제는 다음과 같이 정했습니다. 발제에 대한 의견을 내주실 분은 발제와 관련된 내용이 나와 있는 책의 쪽수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제가 정한 발제를 중심으로 토론하지 않아도 되고요,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1. 우리 사회에 있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 기준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긍정적 영향, 부정적 영향)을 줄까요?

(발제와 관련된 내용: 27쪽, 101쪽)

 

 

2. 월경과 완경은 왜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생리현상으로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발제와 관련된 내용: 294~295쪽)

 

 

3. 너무나도 친숙한 단어인 ‘건강’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봅시다. 건강하게 살면 정말 성공한 인생이고, 건강하지 못하면(만성 질환에 안고 가야할 사람, 장애인) 실패한 인생일까요? 시간이 나면 ‘여성의 건강권’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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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7-2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으로 좋은 독서 모임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대구라서 갈 수 없지만...
응원합니다!!!

cyrus 2019-07-22 07: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비가 내리고 있는 오늘은 선선해서 좋네요. 이틀 전인 월요일은 산들대는 바람에 조금은 서늘했습니다. 그날은 공부하기 딱 좋은 날이었어요.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이 주최한 ‘페미니즘 스쿨’ 첫 번째 강연이 시작된 날이었거든요.

 

 

 

 

 

 

 

 

 

 

 

 

 

 

 

 

 

 

* [페미 스쿨 첫 번째 교재]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2018)

 

 

 

사실 지난주 월요일(7월 1일)에 열린 세미나가 ‘페미니즘 스쿨’의 시작을 연 첫 번째 일정이었습니다. 그날 세미나에서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인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페미니즘 스쿨에 등록한 새로운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페미니즘 스쿨을 등록한 세 명을 포함해서 총 열다섯 명이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3주 동안 읽게 될 오드리 로드(Audre Lorde)《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틀 전 월요일에 진행된 첫 번째 강연의 주제는 ‘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입니다. 이 날 강연은 교차성 페미니즘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교차성 이론을 둘러싼 다양한 정의와 방법론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교차성’이라는 용어는 1989년에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킴벌리 크랜쇼(Kimberlé Crenshaw)가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정확히 30년 전에 나온 학술 용어인데, 이 사실만 보고 교차성 페미니즘의 역사가 생각보다 짧다고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몇몇 학자들은 크랜쇼가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기 전에도 이미 페미니즘 안에서 교차성 담론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 [2018년 레드스타킹 일곱 번째 선정 도서] 패트리샤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교차성 페미니즘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고, 잊어선 안 될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1797~1883)입니다. 그녀는 네덜란드인 지주가 운영하는 미국 농장의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이사벨라 바움프리(Isabella Baumfree)였습니다. 그녀는 노예 출신 흑인 남성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1826년에 딸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하는 노예들이 많았어요.

 

노예제가 적용되지 않은 뉴욕에 정착한 바움프리는 1843년에 ‘소저너 트루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노예제 폐지 운동과 여성 인권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트루스는 1851년 미국 오하이오주에 열린 여성 권리 대회에 참가했는데요, 그녀는 이 대회에서 노예 해방 운동 역사와 페미니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합니다.

 

 

 저기 있는 저 남자 분은 여성은 마차에 탈 때 도움을 받아야 하며 구덩이에서 나올 때도 남자가 들어 올려 주어야 하고 모든 곳에서 가장 좋은 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내가 마차를 타거나 진창을 지나야 할 때 도와주지 않으며 아무도 내게 가장 좋은 곳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Ain’t I a Woman?) 나를 보십시오! 이 팔을 보십시오! 나는 어느 남자보다도 더 많이 쟁기를 끌었고 씨를 뿌렸으며 곡물을 거두어 곳간에 넣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남성과 똑같이 일할 수 있고, 충분한 음식이 있다면 남자만큼이나 많이 먹고, 채찍질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이 아이들 모두가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내가 어머니로서 슬픔에 겨워 울 때 주님 말고는 아무도 제 슬픈 울음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박미선 옮김, 《흑인 페미니즘 사상》, 44쪽, 밑줄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사회적 약자로서의 정체성을 여러 겹 지닌 트루스는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백인들을 향해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흑인 여성 인권 운동은 19세기 초 백인 여성 인권 운동과 동시에 진행되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투쟁 노선 방식이 서로 달랐습니다. 흑인 여성들은 인종 차별과 성차별의 이중 억압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예제 사회에서 흑인의 젠더는 주목받지 못한 명제였고, 먼 훗날 흑인 인권이 부각되었을 때도 ‘인종’이란 대명제에 밀려 더 음습한 곳으로 밀려났습니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여성을 둘러싼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억압 문제와 따로 분리해서 보지 않습니다. 서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죠. 교차성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되면서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에 가려져 아주 오랫동안 밀려나있던 흑인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교차성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페미니즘 스쿨’ 전담 교사인 전혜은 선생님은 교차성을 ‘차이를 사유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된 개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자, 이제 교차성이 학문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좀 더 깊이 있게 접근해볼까요?

 

크랜쇼는 인종과 젠더가 교차하는 다양한 방식을 나타내기 위해 ‘교차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녀는 이 개념을 가지고 ‘단일 축 사유’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단일 축 사유란 어떠한 대상이나 존재 또는 문제를 단일하게 바라보거나 규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과거에 백인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여성이 겪는 억압은 비슷해. 따라서 가부장제를 공격하려면 여성들을 연대하게 만드는 자매애(sisterhood)가 있어야 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자매애는 강하다”라는 구호가 나오게 됐죠. 그런데 여성이 겪는 억압을 단일하게 볼 수 있을까요? 또 이 세상의 모든 여성을 ‘자매’라는 이름으로 단일한 집단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이 크랜쇼가 교차성 개념을 제시한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크랜쇼는 ‘자매애’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백인 여성들이 겪어보지 못한 흑인 여성의 인종차별 문제를 포괄하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크랜쇼가 말한 교차성은 유색인 여성들이 겪는 젠더와 인종 문제를 설명할 수 있도록 틀을 짜는 개념입니다. 결국 교차성은 ‘차이에 대한 민감성(전혜은)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교차성의 의미를 이해했으면 ‘침묵 당해온 소수자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전혜은) 방식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금도 교차성을 주제로 여러 가지 논의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교차성을 비판하는 의견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장점이 많은 이론이라고 해서 그 이론에 단점이나 한계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일부 학자는 교차성을 ‘연구 방법론’으로 보기에 빈약하다고 지적합니다. 사실 교차성 이론은 다양한 분과학문의 틀에 맞춰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에 대해 학자들은 교차성 이론에 과연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정의와 방법론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교차성이 지나치게 분과 학문에 의존하고, 거기에 틀에 맞춰 설명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이슈를 지워버릴 수 있다고 비판합니다.

 

여기에 대해 크랜쇼는 반박합니다. “‘교차성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뭐가 중요한데?”라고 말이죠. 크랜쇼는 애초에 교차성을 ‘거대 이론’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교차성 이론을 논할 때 ‘교차성이 무엇인지’ 정의를 따지기보다는 ‘교차성이 무엇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자고 제안합니다. 즉 우리가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자는 거죠.

 

지금도 학자와 페미니스트(이제 막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들)들은 궁금해 합니다. “교차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아마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교차성의 정의는 제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념 정의조차 명확하지 않은 교차성 이론은 너무 난해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고, 페미니즘을 연구하는데 쓸모없는 이론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실번 톰킨스(Silvan Tomkins, 1911~1991)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을 ‘강한 이론(strong theory)’과 ‘약한 이론(weak theory)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강한 이론’은 문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이론이라면, ‘약한 이론’은 변동하는 문제 상황의 맥락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이론을 의미합니다. 교차성은 ‘약한 이론’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교차성 이론은 문제를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론이라기보다는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하면서 사유하는 해석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차성 페미니즘을 이해하게 되면 ‘어떤 (여성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정답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혜은 선생님은 페미니즘이라는 학문도 ‘약한 이론’에 속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페미니즘이 ‘약한 이론’이라고 해서 그것을 학문이라고 볼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페미니즘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 정경직, 최성용, 이아름, 정연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들녘, 2019)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들녘)라는 책에 수록된 『속도와 페미니즘을 사유하다』에 나온 문장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일각에서는 페미니즘의 비일관성 · 미완결성 · 다양성을 이유로 페미니즘을 비과학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사상으로 평가절하하거나, 심지어는 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주장이다. 과연 철학이나 과학은 체계적이고 일관되며, 완결된 학문일까? 답은 명백하다. 소위 ‘과학적인’ 학문의 대표로 여겨지는 물리학이나 경제학 등의 분야에서도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새 논문을 발표하고, 이질적인 가설을 제시하며, 기존의 이론을 반박하는 등 치열한 논쟁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즉, 완결되지 않고 왕성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분야는 오히려 가장 생명력 있는 학문인 것이다. 논쟁이 끝나고, 더 이상 연구할 내용이 없는 학문, 문제 제기할 것이 없는 운동, 새로운 해석 없이는 원전만을 읊어대는 교조주의는 체계적이고 일관되며 완결된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장경직, 16~17쪽, 밑줄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급진 페미니즘이든 교차성 이론이든 간에 페미니즘의 모든 이론은 ‘약한 이론’입니다. 페미니즘을 부정하는 사람들 눈에는 페미니즘이 무언가 부족해 보이고, 학문 같지 않다고 느껴지겠죠.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체계적인 학문을 그렇게도 좋아한다면 왜 다양한 이론으로 설명되는 다른 학문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하십니까? 유독 페미니즘에만 열을 내면서 학문이 아니라고 폄하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당신들 논리라면 일관적이지 않는 진화론(자연선택을 믿는 다윈주의자와 성 선택을 믿는 다윈주의자들 간의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도 학생들이 배우면 안 되겠네요.

 

어떤 사람은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혐오하는 워마드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페미니스트 탈출은 지능 순’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남성을 혐오하고 여성만을 챙기려는 페미니스트들은 지능이 부족하다’는 편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페미니스트들은 어디선가 공부를 하고 있고,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 토론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페미니즘 공부를 좋아하는 이유는 페미니즘은 ‘완결되지 않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완결되지 않는 학문’은 공부하기가 쉽지 않아요. 공부해야 할 페미니즘 이론이 많고요, 서로 대립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트랜스 여성을 여성으로 보지 않는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과 트랜스 여성을 옹호하는 퀴어 페미니스트)을 만나면 혼란스러워요. 그러나 저는 페미니즘을 계속 공부할 것입니다. 계속 공부하다 보면 나를 깜짝 놀라게 해줄(아니면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새로운 페미니즘 이론이나 담론이 나오겠죠. 그럴 때 저는 페미니즘 이론의 유용성을 배우면서, 이론의 한계나 단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논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상황이죠. 논쟁이 없고, 문제 제기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페미니즘 공부는 재미가 없어요. 그런 일관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페미니즘은 서서히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마저 사라지게 되는 거죠.

 

‘약한 이론’의 페미니즘은 가장 생명력 있는 학문입니다. 이 학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반응은 ‘학문’으로서의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닳게 만듭니다. 레드스타킹의 페미니즘 스쿨은 페미니즘을 살아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영양분’과 같은 이론들을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영양분(페미니즘 장애학,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 등)’이 엄청 어려워 보이지만, 내 삶과 페미니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 레드스타킹이 네이버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페미니즘 스쿨에 등록된 분이 아니어도 카페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cafe.naver.com/redstoc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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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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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1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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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3 0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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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1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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