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오늘 고전 읽기 모임에 안 오려고 했었다. 한 주에 한 번 플라톤(Plato)의 대화편을 읽고 있다. 오늘이 플라톤 대화편 읽기 마지막이다. 1월 고전 읽기 모임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화편은 향연이다. 글은 천병희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2년 차]

* 플라톤, 천병희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도서출판 숲, 2012)

 

* 플라톤, 강철웅 옮김 향연(아카넷, 2020)




향연을 다 읽긴 했다. 그런데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 내가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향연의 주제는 사랑이다.

















* 플라톤, 강철웅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명(아카넷, 2020)




오늘 모임에 참석한 분들은 플라톤 특유의 긴 문장을 눈으로 따라가느라 힘들었지만, 그래도 사랑에 대한 향연 참석자들의 견해 일부에 공감한다고 했다. 나도 이 향연에 껴서 사랑에 대한 내 견해를 밝히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연애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 또한 지혜라고 했다(소크라테스의 변명/변론). 연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서로 다른 내 삶과 연인의 삶이 포개진 채 살아보면 사랑이라는 감정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내 몸과 정신이 건강해지는 연애관이 정립된다. 연애 경험이 없는 사람이 사랑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건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연인을 만나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느껴보지 않았으면서 사랑은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는 태도는 솔직하지 못하다. 난 아직 사랑을 모른다. 나의 무지함을 알고 있어서 오늘 모임에 참석해야 말지 고민했다.


소크라테스는 사랑꾼이다. 그는 자신과 성격이 정반대이자 정념에 쉽게 사로잡히는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를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사랑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다친 알키비아데스를 구출했다. 동료 장군들은 전쟁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알키비아데스가 상을 받아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용기에 감탄한 알키비아데스는 장군들에게 정작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소크라테스라고 건의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상을 양보한다(향연220e, : 368). 이 대목은 소크라테스의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연인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사랑꾼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 아몬드 단거, 장미성 옮김 사랑에 빠진 소크라테스: 철학자의 탄생(글항아리, 2022)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한 사람의 생애를 정확하게 기술하기가 어렵다. 여전히 소크라테스는 수수께끼에 가려진 철학자다. 비록 가설이지만, 사랑에 빠진 소크라테스는 사랑 앞에서 진지한 소크라테스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못생긴 외모육체적 욕망을 경계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노년기에 들어선 소크라테스의 모습만 보고 있다. 사랑에 빠진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과 기타 문헌들을 근거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소크라테스를 새롭게 복원한다. 젊은 소크라테스는 행동이 민첩한 군인이었고, 레슬링 선수였고,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했고, 연인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 플라톤, 이기백 옮김 《크리톤(아카넷, 2020)

* 플라톤, 전헌상 옮김 《파이돈(아카넷, 2020)




그동안 나는 크리톤파이돈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따져가면서 읽었다크리톤에서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가 나약해 보였다파이돈의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불변하다고 주장하면서 눈에 보이는 현상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그렇지만 향연을 읽었을 땐 그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만약 플라톤이 향연에 부제를 달았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향연에 들어오지 마라.’ [] 운이 좋게도 사랑을 진지하게 논하는 자리인 향연에 나는 한 수 접고 들어갈 수 있었다. 짧든 길든 연애를 하고 난 후에 다시 향연에 참석하고 싶다. 과연 그날이 올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 플라톤이 세운 학교인 아카데미아(academia)의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의 출처가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가 훨씬 지나고 나온 거라서 실제로 있었던 문구인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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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1-27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혼해서 아기도 있지만, 아직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하는거지 알수 있는건 아닌 모양입니다...

cyrus 2024-02-01 05:57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사랑을 잘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SNS에 연애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짧은 영상들이 많이 나와요. 그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사랑 전문가인 것처럼 말하거든요.

페크pek0501 2024-01-28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작가가(체홉이었는지...) 소설에서 그랬어요. 사랑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고요. 사람에 따라 달라 여러 경우가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어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 로 이해했어요.
사랑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작가로 알랭 드 보통을 꼽습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같은 소설을 읽으니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 후로 발표된 작품들 중에도 사랑에 대한 소설이 많은데 소설이면서 사랑에 대한 에세이로 읽혔어요.^^

cyrus 2024-02-01 05:59   좋아요 0 | URL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정말 유명한 책인데 아직 안 읽어봤어요. 알랭 드 보통이 쓴 다른 책들 몇 권은 읽었는데, 이상하게도 유독 이 책은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네요. ^^;;
 




지난주 목요일에 비가 조금 내렸다. 쉬는 날이면 책방이든 카페든 책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편안한 장소를 찾으러 나간다. 비가 내린 목요일이 쉬는 날이었다




















플라톤, 이기백 옮김 파이돈》 (아카넷, 2020)



[대구 책방 <일글책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2년 차]

플라톤천병희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 (도서출판 숲, 2012)




토요일 고전 읽기 모임 장소이자 책방인 <일글책>에서 읽으려고 한 책들을 가방에 담았다. 내가 읽고 있는 책과 독서 모임 참석을 위해 읽어야 할 책을 챙겼다. 플라톤(Plato) 파이돈이 독서 모임 선정 도서다. 그런데 토요일이 거의 코앞에 왔는데도 정작 <일글책>에 오면서 읽은 책은 파이돈이 아니었다.


책방 주인장이 작년에 직장인이 되면서 평일 <일글책>은 책방 주인장을 대신해 일일 책방지기 두 분이 지키고 있다. 책방지기 한 분은 책방 근처 연극 극단에 소속된 배우다. 또 다른 책방지기는 토요일 고전 읽기 모임 회원이며 별칭은 조약돌이다


목요일은 약돌 님이 책방에 출근한 날이었는데 파이돈을 읽었다. 이미 파이돈을 읽기 시작한 회원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은 자기 생각을 밀고 나가는 소크라테스(Socrates)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약돌 님은 파이돈에 묘사된 소크라테스를 상당히 어려워했다. 고전 독서 회원들의 불만을 듣고 있으니 얼른 파이돈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고 있던 책을 잠시 덮고, 파이돈를 읽기 시작했다.


아테네 법정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명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내린다. 소크라테스는 재판 결과를 받아들인다. 독약을 마시기 전에 자신을 따르는 두 명의 추종자를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지켜보지 않았다. 그래서 철학자인 파이돈(Phaedo)과 피타고라스학파에 소속된 에케크라테스(Echecrates)의 증언을 토대로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한 대화를 복원한다. 이 대화편이 파이돈이다.


대화편의 주인공은 소크라테스다.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그 사람은 바로 병에 걸려서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플라톤이다. 사실 파이돈의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에 가깝다.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개념어 이데아(idea)’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아는 모든 존재의 순수한 원형(原型) 또는 참된 실재다. 그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데아는 하늘 어딘가에 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이해하려면 자신의 영혼을 돌보라고 강조한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몸과 철저히 분리된 것으로 인식한다. 이 순수한 영혼은 몸과 결합하기 전에 이미 이데아를 알고 있다. 플라톤이 된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데아를 상기한다라고 주장한다. 쉽게 말하면 영혼은 자신이 체득한 이데아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나 역시 파이돈을 힘겹게 읽었다. 이미 이 책의 주제를 잘 알고 있어서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찬찬히 살펴보는 게 지루했다. 나는 영혼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영혼 불멸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약돌 님은 소크라테스가 박코스 신도를 올바르게 지혜를 사랑해 온 사람이고, 자신이 그들처럼 되려고 노력했다는 발언(69d~69e)이 의아했다고 말했다. 박코스 또는 바쿠스는 술과 축제의 신 디오니소스와 비슷하게 묘사된 로마의 신이다. 바쿠스 축제는 떠들썩하고 무질서하기로 유명하다. 바쿠스 신도들은 축제가 되면 미쳐 날뛴다(웃자고 한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이성을 중시하는 소크라테스는 욕망에 몸을 맡기는 바쿠스 신도들을 왜 긍정적으로 평가했을까정말로 궁금하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성을 근거로 내세워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도 안 되며 초연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토요일 고전 읽기 모임 회원인 소소은 죽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인식에 거리를 두었다. 소소 님은 살려고 하는 의지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자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기다리는 고통을 힘들지만, 그대로 어떻게든 견디면서 살아가는 태도. 살아있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소소 님의 생각은 마치 니체(Nietzsche)() 철학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니체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철학을 비판했다. 니체는 관념적인 이성과 영혼을 도덕적으로 유지하는 고대 철학보다는 몸에서 우러나오는 욕망을 발현하는 철학을 선호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김남우 옮김 비극의 탄생(열린책들, 2014)

*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비극의 탄생(아카넷, 2007)

* 프리드리히 니체, 이진우 옮김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책세상, 2005)
















*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이 사람을 보라(아카넷, 2022)

* 프리드리히 니체, 이동용 옮김 이 사람을 보라(세창출판사, 2019)

* 프리드리히 니체, 백승영 옮김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책세상, 2002)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 예술(이성, 질서)’디오니소스적 예술(감정, 무질서)’의 합일을 강조한다. 두 가지 개념이 합쳐진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비극의 특징인데, 이성을 중시한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면서부터 비극의 본질이 변색되었다고 주장한다니체는 자신이 쓴 책들을 소개한 이 사람을 보라에서 비극의 탄생》이 그리스(예술)을 와해시킨 소크라테스를 최초로 비판한 책이라고 자평했다.


플라톤의 글이 나만 지루하게 느꼈던 것은 아니다. 니체 역시 도덕과 최고선을 설파하는 플라톤에 반감을 느꼈다.
















프리드리히 니체박찬국 옮김 《우상의 황혼》 (아카넷, 2015)



 플라톤은 지루하다. 결국 플라톤에 대한 나의 불신은 깊은 곳에까지 이르고 있다.

 

(우상의 황혼중에서, 박찬국 옮김, 169~170)




몸과 정신을 철저히 구분하려는 소크라테스식 이분법을 비판한 회원들도 있었다. 나도 별로였다. 사실 난 플라톤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신이분법은 상당히 오랫동안 서양철학의 기본 뼈대가 되었다. 이분법은 또 다른 이분법을 낳는다. 이성, 정신, 영혼을 중시한 철학자들은 남성이었다. 이것과 반대되는 감정, , 욕망은 모두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혔다.


고전 독서를 즐기는 분들 대부분은 텍스트를 눈으로 읽고, 그걸 머릿속에 입력한다. 고전 한 권을 다 읽으면 입에서 텍스트가 줄줄 나온다. 그들은 스스로 기뻐한다. ‘내가 어려운 고전을 다 읽었고, 제대로 이해했어.’ 이런 분들은 고전(사상)과 한 몸이 된 상태다. 고전을 너무 좋아하면 거리를 두지 못한다. 고전을 적당한 간격으로 거리를 두면서 읽는 일은 비판적 읽기를 뜻한다. 고전에 애착을 느끼면서 읽는 건 좋지 않다. 현재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읽는 중이다. 위대한 두 철학자와 저 사이 중간에 니체가 서 있다니체 이외에 또 생각나는 철학자들을 부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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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1-25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씩 읽는 중이지만 니체나 쇼펜하우어에게 거리두기는 더 힘들게 느껴져요. 뭔가 압도적이기도 하고 와닿는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요.ㅎㅎ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겠습니다.^^

cyrus 2024-01-27 20:39   좋아요 1 | URL
저는 쇼펜하우어를 읽어보고 싶어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요. 제목만 봐도 지루함이 느껴지는 책이지요.. ㅋㅋㅋㅋ 요즘 쇼펜하우어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던데, 정작 이 철학자의 대표작을 심도 있게 언급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제가 못 본 것일 수도 있어요. 저는 쇼펜하우어를 제대로 알아가도록 노력해볼께요. ^^;;

blanca 2024-01-25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워도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열심히 읽고 토론도 하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영혼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저도 생각해 보니 믿는지...잘 모르겠어요.

cyrus 2024-01-27 20:40   좋아요 0 | URL
살다 보면 영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겠죠? ㅎㅎㅎ 일단 지금은 영혼을 믿지 않습니다.
 




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이 올해로 2년째다. 지난해는 고대 그리스 고전 문학을 읽었다면, 이번 해는 고대 서양 철학을 본격적으로 읽어 나간다. 첫 번째 텍스트는 플라톤(Plato)의 대화 편 소크라테스의 변명(또는 변론)이다. 1월 6일 올해 첫 번째 토요일이 바로 올해 첫 모임 날이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서울에 가야 해서 모임에 나오지 못했다.


















[대구 책방 <일글책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2년 차]

* 플라톤, 천병희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도서출판 숲, 2012)

 

* 플라톤, 강철웅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명(아카넷, 2020)

 



독서 모임을 위해 읽어야 할 『소크라테스의 변명번역본은 천병희 교수의 책(이하 변론’)으로 정해졌다다른 후보 번역본은 정암학당 소속 연구자들이 번역한 아카넷 판본(이하 ‘변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추천했다.


아카넷 판본의 플라톤 전집본문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옮긴이의 각주가 많은 편이다옮긴이는 변명』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뿐만 아니라 당시 아테네의 모습과 사회적 분위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나처럼 텍스트를 깊이 읽는 독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석 읽기를 즐긴다. 하지만 친절한 주석이 너무 많아도 문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주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천 교수의 변론은 각주의 양이 적다. 그래서 주석의 유혹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본문 읽기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런데 변론의 각주 중에 검토해야 할 것이 있다.

 


* 각주 9, 25쪽

 

 Leontinoi, Gorgias, Keos, Prodikos, Elis, Hippias. 이들은 이 무렵 아테나이에 와서 활동한 이름난 소피스트들이다.



출신지와 고대 철학자 이름을 같이 쓸 땐 중간에 쉼표를 넣지 않는다출신지 of 철학자 이름식으로 써야 한다. 따라서 각각 ‘Gorgias of Leontinoi’, ‘Prodikos of Keos’, ‘Hippias of Elis’로 표기해야 한다. 



















강철웅 옮김 소피스트 단편 선집》 (전 2권, 아카넷, 2023)

* 루이-앙드레 도리옹, 김유석 옮김 소크라테스》 (소요서가, 2023)




각주 10번 소피스트에 대한 천 교수의 설명은 소크라테스(Socrates)와 소피스트를 철저히 구분하는 기존의 견해를 답습하고 있다.



* 각주 10, 25

 

 소피스트는 원래 특수한 기술이 있는 지자(知者)라는 뜻인데, 기원전 5세기에 이 말은 보수를 받고 지식을 전수하는 순회 교사들을 지칭했다. 그들은 지리, 수학, 문법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으나 출세를 위하여 젊은이들에게 주로 수사학을 가르쳤다.



수사학의 핵심은 로고스(logos)’, 이다. 로고스의 중요성을 강조한 소크라테스는 직접 글을 쓰지 않았다. 고르기아스는 말이 가진 설득의 힘이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는 신적인 힘과 맞먹는 것으로 이해했다. 당시 그리스인은 설득의 힘을 신령스러운 능력으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고르기아스는 설득의 힘을 가진 로고스를 (arete)보다 중요하게 인식했다. 그러나 모든 소피스트를 덕의 기능에 무관심한 수사학 전문 교사로 규정할 수 없다. ‘첫 번째(최초의) 소피스트로 알려진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말과 덕의 기능 모두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고르기아스와 다르게 덕의 교사임을 자처했다.


천 교수의 각주 10번은 소피스트를 소크라테스와 대비되는 비 철학적 학파로 보는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소크라테스 대 소피스트는 고대 철학의 주류 견해로 오랫동안 자리 잡았으나 소피스트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거의 밀려난 상태다. 소크라테스를 묘사한 고대 철학자들의 텍스트들을 연구한 루이 앙드레 도리옹(Louis-Andre Dorion)은 자신의 책 소크라테스(소요서가, 2023)소피스트들도 소크라테스처럼 철학적 질문을 성찰의 특별한 대상으로 삼았음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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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묘사된 아테나(Athena)지혜의 신이다. 아테나는 호메로스(Homers)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주인공 오디세우스(Odysseus)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를 위해 여러 차례 도와준다.














 

 

* 호메로스, 김기영 옮김 오뒷세이아(민음사, 2022)

 

[대구 인문학 책방 일글책 - 고전 읽기 모임 두 번째 도서]

*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도서출판 숲, 2015)

 

 


멘토의 어원으로 알려진 나이 많은 현자 멘토르(Mentor)의 정체는 아테네다. 지혜의 신은 멘토르로 변신하여 방황하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Telemachus)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해준다.


한 권의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모험가가 된다독자는 글자들이 헤엄치고, 출렁이는 종이 바다를 항해한다. 모험의 목적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보물을 찾는 것그 보물은 바로 독자 본인의 진짜 모습이다그 보물을 얻으면 본인의 취향을 알게 된다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키면서 책을 읽는 독자는 해일처럼 거칠게 다가오는 수많은 책에 휩쓸리지 않는다또 지식인들이 만든 에 들어갈 수 있다.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 4, 5월의 책]

/성이론 통권 제47》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22)




4월 한 달 동안 /성이론 통권 제47를 읽었다. 내겐 너무 힘든 모험이었다이 책에 나오는 지식인들의 섬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다. 섬들에 사는 지식인의 생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지적 영토를 구축하고 있는 섬의 지배자들은 다음과 같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캐런 바라드(Karen Barad),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 등이 있다. 버틀러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들이다/성이론 통권 제47의 기획 특집으로 분류된 글들의 주제는 신유물론과 페미니즘이다. 기획 특집 첫 번째 글 신유물론()과 페미니즘, 그리고 버틀러 비판은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사상을 소개하고, 이들이 어떻게 버틀러를 비판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방 <직립보행>의 부부 책방지기는 내겐 아테나와 같은 존재이다. 특히 보행님은 버틀러, 들뢰즈(Deleuze),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로저 브라이도티 등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책을 섭렵한 분이다. 그분께 조언을 구하고 싶어서 책방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 4월 마지막 주말은 <직립보행> 휴무일이었다. 진작에 제대로 물어볼 걸 그랬어.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신유물론 페미니스트들의 섬 주변을 마냥 혼자 배회할 수 없다. 모험이 실패했으면 다음 여정을 위해 노선을 변경해야 한다/성이론 통권 제47제일 마지막에 실린 성평등 전주 예술인 전시 퇴출 사건의 쟁점들: 검열과 차별의 기준점이 된 페미니즘페미니스트들의 과도한 검열을 비판한 글이다.


소녀, 농약, 좀비는 요절한 소녀의 삶을 신유물론적 관점으로 분석한 글이다. 소녀는 경제발전이 국가 생존의 문제로 강조하던 1970~1980년대를 살았다. 10년 동안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산업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은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저임금을 받으면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쓰러지게 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자, 박정희 정권은 식량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농업 정책을 내세운다. 정부는 쌀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전국 농촌에 통일 벼를 보급했고, 농약과 제초제 사용량이 늘어났다. 일찍 노동 현장에 뛰어들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소녀는 1988년에 제초제를 마시고 자살한다


이 글에 언급된 좀비는 자본주의 체제에 밀려나거나 소외된 하층민 또는 노동자다. 그들은 국가의 부름에 응답하여 피와 땀을 흘리면서 노동력을 제공했지만,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기 위해 파업에 돌입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국민 대다수는 경제가 성장해야 내가 더 잘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부르주아는 자신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가난에 벗어났다고 확신한다. 그들의 눈에는 일하지 않고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물어뜯으려고 달려드는 위험한 좀비로 보였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건강한 부르주아는 가난한 좀비가 되고 싶지 않다.


소녀, 농약, 좀비고쳐야 할 곳이 있다.

 

 

* 63쪽 주 43

 

 DDT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에탄의 약자이며 [중략] 1874년 독일에서 처음 합성된 DDT가 살충 작용이 있다는 사실이 1939년 스위스 화학자 파울 헤르만 뮐러에 의해 밝혀진 후 2차대전 중 말라리아와 장티푸스를 예방하는 목적으로 대거 사용되었고 194510월 미국에서는 살충제로 일반인들에게 시판이 되기도 했다.



DDT의 정확한 명칭은 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이다. ‘한 글자가 빠졌다.

















* [절판] 로버트 E. 하워드 외, 정진영 엮음, 좀비 연대기(책세상, 2017)



* 64


 ‘좀비는 원래 (god)’이라는 뜻의 니제트어와 콩고어인 ‘nzambi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아이티의 민속종교인 부두교 전설에 등장하는 비약 노예이야기가 보태져 오늘날 회자되는 좀비 이미지가 탄생하였다. 부두교의 전설에 따르면 사람에게 약물을 써서 가사 상태로 만든 후 장례를 치르고 매장한 뒤 그 무덤을 파서 다시 살려내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상태지만 인지능력이 이전에 비해 현격히 떨어진 상태가 되는데 그렇게 된 사람을 농장 노예로 팔아 노예노동을 하게 만들 수가 있다. 이 이야기는 1929년에 마법의 섬(Magic Island)(윌리엄 브룩)이라는 소설에 등장했고 [생략]



작가 이름이 잘못 적혀 있다. 윌리엄 시브룩(William Seabrook)’이다. 번역된 마법의 섬은 좀비를 소재로 한 단편 공포소설 선집 좀비 연대기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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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5-02 2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후.. 어려울 건 알지만 47호 땡투하겠습니다!!!! 사놓고 안 읽겠지만 ㅋㅋㅋ 현시점의 제가 가장 읽고 싶은 사람들은 앨러이모 / 버라드 / 그로츠 거덩요 ㅋㅋㅋ 알려쥬셔서 감사합니다!!!!

cyrus 2023-05-05 09:00   좋아요 1 | URL
땡스투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여/성이론> 읽다가 어려워서 내용 정리를 하지 못했어요. 신유물론 관련 글 본문 바로 밑에 참고문헌이 언급된 주석이 있어요. 읽어야 할 책이 많던데 살까 말까 고민 중이에요. 저는 캐런 버라드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일단 양자역학부터 다시 공부해야겠어요... ^^;;

공쟝쟝 2023-05-05 11:01   좋아요 1 | URL
버라드 관련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양자역학 ㅋㅋㅋ 저는 김상욱 박사님 좋아해서 그냥 그 정도 수준으로 이해하고 읽어도 무리는 없었습니다. 벵하민 라바투트의 지적인 소설 <우리가 세상을…>도 재밌게 읽었던 터라 도움되었는데, 다 버라드 읽으려고 과거의 내가 한 거구나 해서 뿌듯함!!!

레삭매냐 2023-05-05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빡신 독서모임 중독자!

대단하십니다 고저.

cyrus 2023-05-05 09:01   좋아요 1 | URL
이번 달에 달궁 모임 하면 참석하겠습니다! ^^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os)의 대표작이다.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신들>, <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구 인문학 책방 일글책 - 고전 읽기 모임 세 번째 도서]

* 아이스킬로스, 천병희 옮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도서출판 숲, 2008)

 


[대구 책방 서재를 탐하다 & 읽다익다 - 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219월 도서]

* 천병희 옮김 그리스 비극 걸작선: <오이디푸스 왕> 3대 비극 작가 대표 선집(도서출판 숲, 2010)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만 수록되었음


 
















* 아이스킬로스, 두행숙 옮김 오레스테이아(열린책들, 2012)

* 아이스킬로스, 김기영 옮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유문화사, 2015)




오레스테이아는 오레스테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오레스테스(Orestes)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그리스 미케네(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Agamemnon)의 아들이다. 고대 그리스는 여러 개의 도시 국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가멤논은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모든 도시 국가들의 병력을 결집한다. 수많은 부대를 이끌고 출항하려는 순간 뜻밖의 문제가 생긴다. 함선들을 움직여 줄 바람이 불지 않은 것이다. 예언자 칼카스(Kalchas)아르테미스(Artemis)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제물을 바치면 출항할 수 있다고 예언한다. 그런데 칼카스가 지목한 제물은 바로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Iphigeneia). 결국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전쟁터로 향한다.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Clytemnestra)는 딸을 죽인 남편에 앙심을 품는다. 그녀는 아이기스토스(Aegisthus)를 정부(情夫)로 삼아 아가멤논을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아이기스토스의 아버지 티에스테스(Thyestes)는 미케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복형 아트레우스(Atreus)와 다툰다. 아트레우스는 아가멤논의 아버지다. 아트레우스의 아내 아에로페(Aerope)와 티에스테스의 간통 관계가 발각되면서 아트레우스는 끔찍한 복수를 실행한다. 그는 티에스테스의 세 아들을 죽인 다음 그들의 신체 일부를 음식으로 만든다. 그리고 동생을 초대해 그에게 음식을 내놓는다. 아들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 티에스테스는 인육으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이때 아트레우스는 티에스테스의 눈앞에 잘려 나간 시신 일부를 내밀면서 음식 재료를 밝힌다. 티에스테스를 추방하면서 아트레우스의 복수는 성공한다


하지만 두 형제의 복수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티에스테스의 열세 번째 아들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을 죽여서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로 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십 년 만에 미케네로 돌아온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 중 1부인 <아가멤논>은 두 사람이 아가멤논을 복수하게 된 계기를 보여준다2부부터 오레스테스의 복수극이 시작된다.


코로스(khoros, 노래를 부르면서 극의 전체적인 내용을 알려주는 사람들)의 우두머리인 코로스 장()은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비난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자신의 복수가 정의로운 살인이라고 강조하면서 코로스 장의 비난에 떳떳하게 맞선다살인은 비윤리적 행위다. 이 자명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독자는 코로스 장의 편에 서게 된다. 그래서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복수는 과연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마주한 몇몇 독자라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분노를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살인 행위를 꾸짖는 코로스 장처럼 말을 할 것이다. 나는 이 견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살인 행위를 원한과 복수, 이 두 개의 단어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결국은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꼭 잔인하게 죽였어야 했냐?’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살인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우선 1부 복수극의 발단인 아가멤논의 살인 행위에 무엇이 문제인지 따져 보자. 그러면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복수는 단순 살인이 아닌 국가 권력에 저항한 단독 행위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아가멤논은 제단 옆에서 직접 딸을 죽여야 하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트로이 전쟁 참전을 위한 그리스 동맹의 서약을 저버릴 수 없다고 고집한다. 그러면서 딸의 희생은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일이니 결코 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윽고 손위 왕이 이렇게 말했다네.

복종치 않는다는 것은 진정 괴로운 일이오.

하나 내 집안의 작은 자식을 죽임으로써

제단 옆에서 이 아비의 손을

딸의 피로 더럽힌다면,

이 또한 괴로운 일이오.

그 어느 것인들 불행이 아니겠소?

하나 어찌 동맹의 서약을 저버리고

함대를 이탈할 수 있단 말이오?

처녀의 피를 제물로 바치기를 그토록

열망하는 것도 바람을 잠재우기 위함이니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나는 만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오.”


 

(<아가멤논> 205~217, 천병희 옮김, 37)




아가멤논은 도시 국가들의 군주 앞에서 내건 약속을 지켜야 한다. 전쟁에 승리해서 평화가 찾아오면 만사(萬事)가 잘될 것이다. 아가멤논은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정당하다라고 인식하는 동시에 딸을 죽인 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낸다. 그런데 아가멤논의 진짜 문제는 이피게네이아의 죽음 이후의 행보에 있다.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기리는 만사(輓詞: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를 공표하지 않았다. 또 그녀를 공적으로 애도할 수 있는 어떠한 장도 마련하지 않았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은 점차 미케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간. 그들은 그리스군의 승리를 간절히 염원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한밤중에 사자(使者)가 불을 피운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불이 승전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환성을 지를 정도로 크게 기뻐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군의 승리라고 확신한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반응에 비웃는다.




얼마 전 불의 첫 사자(使者)가 밤중에 와서

일리온이 함락되고 파괴되었음을 알렸을 때

나는 기뻐서 크게 환성을 질렀어요.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로 나를 나무랐지요. “불의 신호를

믿고 트로이아가 이제 폐허가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쉽게 감격하는 게 여자에게 어울리는 일이긴 하죠.”

이런 말은 나를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게 했죠.

그래도 나는 제물을 바쳤고, 그들도 여자인

나를 따라 시내 곳곳에서 기쁨의 환성을 질렸어요.

신전마다 향은 머금은 불을 피우고

향기로운 그 불꽃 위에 술을 부으며 말이오.

 


(<아가멤논> 586~595, 천병희 옮김, 52)

 


미케네 사람들은 불의 신호가 정말 그리스군의 승리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신들의 속임수인지 의심한다(<아가멤논> 종가, 475~478). 이 사람들은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쉽게 감격해서 섣불리 판단하는 어리석은 여자(두행숙 옮김, 열린책들)’라고 생각한다. 어떤 현상을 이해할 때 이성적으로, 신중하게 판단하는 행위를 중시하는 미케네 사람들이 분별력이 없는 어리석은 왕비를 따르겠는가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 16번째 도서(2019년에 완독)]

* 주디스 버틀러, 윤조원 옮김 위태로운 삶: 애도의 힘과 폭력(필로소픽, 2018)




만약 아가멤논이 없었던 기간에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통치력이 생겼더라면왕비는 이피게네이아를 애도했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폭력, 애도, 정치라는 글에서 국가가 애도해야 하는 대상을 알리는 공적 부고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공적 부고에 속한 고인은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했거나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다반면 공적 부고 명단에 없는 이름들은 애도 불가능한 대상으로 돼버린다. 심지어 국가는 그들을 애도하는 시간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애도할 수 있는 공간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버틀러는 애도 대상을 차등적으로 분류하는 기준이 슬픔의 위계질서까지 만든다고 비판한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난 군인, 테러로 목숨을 잃은 무고한 시민, 일면식도 없는 타지 사람을 구하다가 세상을 떠난 외국인 등의 소식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함께 슬퍼한다. 하지만 성전환 수술 이후 강제 전역 처분을 받은 군인의 죽음, 국가가 미리 대처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재난을 피하지 못한 시민, 제대로 된 작업복을 입지 않은 채 일하다가 목숨을 잃은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뿐. 국가와 국민은 합심해서 그들만의 공적 부고 명단을 작성하고, 명단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배제한다평범한 우리도 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상을 규제하는 국가 권력의 공모자가 될 수 있다. 버틀러는 개인 또는 집단을 위한 애도와 슬픔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에 끊임없이 문제 제기해야 한다면서 재차 강조한다.



 우리는 어떤 조건하에서, 어떤 배제의 논리에 따라, 어떤 삭제와 이름 지우기를 통해서 애도가능한 삶이 결정되고 유지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폭력, 애도, 정치중에서, 위태로운 삶71)

 



이피게네이아는 잊힌 것이 아니라 지워졌다. 전쟁이 끝나면 살아남은 자들은 전사자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아가멤논과 미케네 사람들은 공적 부고에 전사자들의 이름만 빼곡히 적는다. 명단에 이피게네이아의 이름을 적을 여백이 없다. 그러는 사이 이피게네이아 단 한 사람의 희생은 애도할 수 있는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클리타임네스트라는 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는 남편의 태도에 분노했다그녀의 살인 행위는 단순히 딸을 죽인 남편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아가멤논은 불평등한 애도 분위기를 조성한 국가 권력 그 자체다. 국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가볍게 보는 권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클리타임네스트라였다그렇지만 미케네 사람들은 그녀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 허망하게 죽은 트로이 전쟁의 영웅아가멤논을 애도한다. 아이기스토스는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해 피의 복수에 동참했다. 이런 그가 원수의 딸을 알기나 할까? 만약 이피게네이아가 아들이었다면? 과연 아가멤논은 자신이 죽인 아들을 어떤 방식으로 애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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