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마거릿 애트우드 페넬로피아드



2025년 1월 24일 금요일저녁 8시~10시 20분

장소: 인더가든



<읽어서 세계문학(속으로)>을 만든 독자들

김성현빅토정현정

조약돌천성은히시마최해성(모임 후기 엮은이)






고전은 단단한 껍질로 이루어진 알과 같습니다. 고전의 알은 수많은 독자의 관심을 듬뿍 받은, 아주 오래된 알입니다. 고전을 굉장히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 알을 애지중지 품습니다. 그들은 알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바라봅니다. 그래서 고전을 깨뜨리는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껍데기는 계속 두꺼워집니다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는 알은 무정란입니다. 수정(受精)이 되지 않은 알에서 생명이 태어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알껍데기를 깨뜨리는 재해석과 수정(修正)을 거부한 고전의 알 속에 무엇이 있을까요? 신선하지 않은 ‘시들시들한 과거’만 남아 있습니.


















[세계문학 작품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2025년 1월의 세계문학]

[개정판마거릿 애트우드김진준 옮김 페넬로피아드》 (문학동네, 2024)


[구판 절판] 마거릿 애트우드김진준 옮김 페넬로피아드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문학동네, 2005)



















호메로스, 이준석 옮김 오뒷세이아》 (아카넷, 2023)


호메로스, 김기영 옮김 오뒷세이아》 (민음사, 2022)


[대구 책방 <일글책서양 인문 고전 읽기 2023년 두 번째 선정 도서]

호메로스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 (도서 출판 숲, 2015)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페넬로피아드호메로스(Homeros)가 낳은 두 개의 알 중 하나인 오뒷세이아를 깨뜨린 소설입니다(나머지 알은 일리아스입니다)호메로스의 알에서 태어난 오디세우스(Odysseus)는 지혜로운 영웅입니다. 그러나 애트우드가 호메로스의 알을 깨뜨려서 나온 것은 오디세우스가 아니에요. 그의 아내 페넬로페(Penelope)가 태어납니다. 다시 태어난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이야기의 중심이었던 과거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 갇힌 페넬로페는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는 남편을 그리워하고, 구혼자들의 구애를 거들떠보지 않는 현모양처였습니다애트우드가 부활시킨 페넬로페는 남편의 그늘 속에 살아온 삶을 후회하고, 거부합니다. 그녀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없는 오디세우스 신화의 실체를 낱낱이 밝힙니다. 그리고 책 밖에 있는 현대의 독자들을 향해 소리칩니다제발 나처럼 살지 마요!” (페넬로피아드 16쪽)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책을 비판적으로 읽는 독자들이 만든 독서 모임입니다.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는 페넬로페가 우리에게 들려준 오디세우스 신화를 어떻게 바라봤을까요오뒷세이아를 안 읽은 독자들도 페넬로피아드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습니다. 오뒷세이아를 읽은 독자들은 원전에서 크게 벗어난 새로운 이야기를 예상하면서 페넬로피아드를 읽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인상적인 반전이 없어서 아쉽게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애트우드의 페넬로페는 호메로스가 묘사한 남편의 영웅적인 면모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점을 알리고 있어요. 그리고 구혼자들과 내통한 죄(호메로스의 묘사, 오디세우스의 관점)로 교살당한 시녀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합니다. 그렇지만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의 독자들은 시녀들의 변론을 묵살한 남편을 두둔한 페넬로페의 양가적 감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 [절판]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하정희 옮김 노예의 역사: 현대판 노예노동을 끝내기 위한(예지, 2015)

 



페넬로페는 시녀들을 친자식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시녀들의 부당한 죽음을 막지 못했습니다. 시녀를 사회적 약자로 대입해서 바라본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독자는 페넬로페가 시녀의 죽음을 방관적인 자세로 접근하고 있다면서 지적했습니다. 고대 사회의 시녀는 노예와 같습니다. 노예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엄청 길어요. 노예의 역사는 19세기 미국이 아닌 고대부터 시작됩니다시녀는 인간인데도 인간이 아니었어요. 죽을 때까지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소모품입니다. 건강이 쇠약해지거나 엄중한 죄를 저지른 시녀는 갖다 버려도 되고, 죽여도 되는 폐품이 됩니다. 결국 () 페넬로페(호메로스)와 신() 페넬로페(애트우드)는 여성이라는 젠더 안에서 작동되는 계급 차별을 넘어서지 못한 인물입니다.


















* 캐서린 R. 스팀슨 & 길버트 허트 엮음, 김보명 외 옮김 젠더 스터디: 주요 개념과 쟁점(후마니타스, 2024)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열세 번째 모임(2025년 1월) 선정 도서]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교양인, 2023)




페미니즘 운동의 오랜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페미니스트가 같은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니었어요. 인종, 계급, 장애, 섹슈얼리티를 중요하게 인식한 페미니스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흑인 여성, 프롤레타리아 여성, 장애 여성, 젠더퀴어(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성평등이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첨예한 논쟁들이 펼쳐졌어요페미니즘의 정의는 다양합니다. 정희진을 포함한 여러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이라는 지식 안에서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여성주의는 성별, 나이, 인종, 계급, 장애, 지역 등 여성들 간의 차이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 양상에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이 페미니즘 이론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중에서, 149)

 

 

페미니즘이 생물학적 여성만을 위한 평등과 생물학적 여성만 경험하는 차별 문제에 집중하면 인종, 나이, 장애와 연관된 또 다른 차별을 방관하는 가해자의 학문 되고 맙니다.







페넬로피아드오디세우스 신화를 모르는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고전의 알을 깨고 나온 책도 시간이 지나면 단단한 알이 됩니다. 고전을 재해석한 책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어요<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독자들처럼 책을 깊고, 넓게 파고들면서 읽는 분이라면 소설 속 인물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올해 첫 독서 모임의 후기는 여기까지 마무리할께요. 2월의 세계문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오디세우스(Odysseus)는 별명이 많다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은 여러 개다(하지만 오디세우스의 머리는 곱슬머리가 아니다)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 오뒷세이아에 언급된 별명이 모두 몇 개인지 세어보지 않았다작년에 오뒷세이아를 읽으면서 내 눈에 띈 별명들이 있었.

















[대구 책방 <일글책서양 인문 고전 읽기 2023년 두 번째 선정 도서]

호메로스천병희 옮김 오뒷세이아》 (도서 출판 숲, 2015)





신과 같은 오디세우스오뒷세이아》 1권 20행(천병희 옮김)에 오디세우스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오디세우스는 왕족 출신이다다른 영웅들에 비해 신과의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호메로스는 시작부터 서사시의 주인공이 신과 대등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디세우스는 뛰어난 지략가다. 그의 지혜로운 면모와 관련된 별명이 꾀가 많은이다그 밖의 별명은 고귀한’, ‘참을성이 많은 등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해(그리스 병사들이 숨어 있는 거대한 트로이의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 성안으로 진입하는 작전에 성공한다) 길고 긴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부하들과 함께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오는 길에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Polyphemus)가 사는 동굴에 잠시 정착한다오디세우스 일행은 동굴에 갇혀서 폴리페모스에게 잡아먹히는 위기에 처한다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만든다폴리페모스가 깊은 잠에 빠진 사이에 오디세우스 일행은 불에 달군 뾰족한 나무 막대기로 거인의 눈을 찌른다오디세우스 일행은 무사히 동굴에 탈출하지만오디세우스는 오만했다그는 배를 타고 탈출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폴리페모스에게 말해버리고 말았다폴리페모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의 아들이다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에게 오디세우스에게 저주를 내려달라고 기도한다아들의 절규를 들은 포세이돈은 오디세우스 일행의 귀환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험난한 여정 끝에 오디세우스는 20년 만에 이타카에 돌아온다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Penelope)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그러나 이타카 남자들은 페넬로페에게 구혼하기 위해 궁전으로 모여든다100명이 넘는 구혼자들은 제 집인 것처럼 주인 없는 오디세우스의 궁전에 눌러앉아 생활한다구혼자들의 무례한 구애에 지친 페넬로페는 시아버지를 위한 수의가 완성되면 새 남편을 결정하겠다고 약속한다그녀는 낮에 베를 짜고밤이 되면 낮에 만든 것을 다시 풀었다이렇게 해서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때까지 재혼 결정을 미룰 수 있었다.


변장한 채로 오디세우스는 궁전으로 돌아왔고, 어엿한 어른이 된 아들 텔레마코스(Telemachus)와 충직한 부하들과 함께 구혼자들을 죽인다페넬로페를 따르는 시녀는 총 50명이었는데그중 12명은 구혼자들의 애인이었다오디세우스의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열두 명의 시녀에게 피범벅이 된 구혼자들의 시체를 깨끗하게 정리하라고 명령한다뒷정리가 끝난 후에 텔레마코스는 구혼자들과 잠자리한 시녀들의 목에 올가미를 씌워 교살한다.

















아폴로도로스강대진 옮김 그리스 신화》 (민음사, 2022)


아폴로도로스천병희 옮김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도서 출판 숲, 2004)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묘사된 페넬로페는 정숙한 아내를 설명하거나 신화 속 악녀들과 비교할 때 자주 거론된다그러나 신화는 여러 사람이 만든 이야기다또 시간이 지나면 신화 속 내용이 조금씩 달라진다많이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작가들은 페넬로페가 다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 여성이라고 주장했다고대 그리스의 학자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비블리오테케>(Bibliotheca) 신화 모음집이다아폴로도로스는 페넬로페에 대한 다른 형태의 신화를 소개한다그가 인용한 신화에 따르면 페넬로페는 구혼자 중 한 사람인 안티노오스(Antinous)와 몰래 정분을 맺었고오디세우스는 절개를 저버린 페넬로페를 살해했다미상의 작가가 쓴 신화는 원전에서 완전히 벗어난 페넬로페를 묘사했다페넬로페와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반인반수의 목신 판(Pan)이다.
















[절판] 조반니 보카치오임옥희 옮김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 (나무와숲, 2004)





데카메론을 쓴 이탈리아의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는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총 106명의 여성을 소개한 유명한 여자들이라는 책을 썼다그는 이 책에서 페넬로페를 정절을 지킨 영원한 모범으로 칭송한다당연히 그가 참고한 글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다그리고 구혼자 중 한 사람과 부정을 저지른 페넬로페를 묘사한 글도 언급한다이 글을 쓴 사람은 기원전 3세기의 고대 그리스 시인 리코프론(Lykophron)이다하지만 보카치오는 리코프론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페넬로페는 중세와 르네상스를 지난 시점에도 순수한 도덕의 표상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신화(myth)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우리가 아는 신화의 의미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또 다른 의미는 근거 없는 믿음이다근거 없는 믿음은 주인공을 위한 스포트라이트주인공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을수록 주인공에게 향한 스포트라이트의 불빛은 더 강렬해진다. 항상 그들은 주인공의 좋은 모습만 보고 싶어 한다. 주인공의 주변 인물은 희끄무레한 조연이 되고주인공과 대립한 인물은 주인공의 팬들에게 비난받는 악인이 된다이렇게 되면 조연과 악인은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는 존재로 남는다.


















[세계문학 작품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2025년 1월의 책]

[개정판마거릿 애트우드김진준 옮김 페넬로피아드》 (문학동네, 2024)


[구판 절판] 마거릿 애트우드김진준 옮김 페넬로피아드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문학동네, 2005)

 




오디세우스 신화를 패러디한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소설 페넬로피아드는 근거 없는 믿음이 어떤 방식으로 영웅을 미화했는지 보여준다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영웅이다.”, “페넬로페는 정숙한 아내다.”, “구혼자들과 사귄 열두 명의 시녀는 나쁜 여자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디세우스 신화를 접한 독자들은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해석을 선호했다이것을 거꾸로 뒤집는 해석은 환영받지 못한다.








페넬로피아드는 신화(근거 없는 믿음)를 뒤집은 신화(이야기)이 소설의 주인공은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에게 희생당한 열두 명의 시녀다작가는 호메로스가 듣지 못한 페넬로페와 시녀들의 목소리를 복원한다그녀들의 목소리는 ()신화적이다반신화적인 페넬로페는 신분이 아주 낮은 시녀들을 자매처럼 대하면서 어울려 지낸다자신의 판단 착오로 인해 열두 명의 시녀가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자책한다반신화적인 시녀들은 외로운 페넬로페를 지켜주는 든든한 존재이다그녀들은 구혼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 알아낸다호메로스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는 유혹에 굴종한 시녀들을 용서하지 않는다하지만 애트우드의 시녀들은 페넬로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몸을 희생하면서 구혼자들에게 접근했다.


신화를 반신화적인 관점으로 읽는다면우리가 당연하다면서 받아들인 해석들이 근거 없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근거 없는 믿음이 오래 지속되면 여성이 불리해지는 남성 문화가 된다성경과 함께 가장 오래된 문학 작품인 신화는 가장 오래된 남성 문화를 낳았다영웅호색은 성적 유혹에 이겨내지 못한 남성 영웅의 모습을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포장한다여성의 몸을 마치 정복하듯이 탐하는 영웅은 남성들의 존경심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반면 여성에게 혼전 순결을 강요한다정절을 지키지 못하거나 성적 욕망을 드러내면 모든 남성에게 멸시받는 천박한 존재가 된다. 남성 문화는 아주 오랫동안 여성의 감정과 자유 의지를 포박한 올가미다.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열세 번째 모임(2025년 1월) 선정 도서]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교양인, 2023)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두 번째 선정 도서

(2017년 11~12, 3주 진행] [주1] 

마거릿 애트우드김선형 옮김 시녀 이야기》 (황금가지, 2018)

 

마거릿 애트우드르네 놀트 그림진서희 옮김 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황금가지, 2019)

 


 


여성학자 정희진은 피해자 중심주의 비판이라는 글(《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에 첫 번째로 실린 글이다)에서 남성 중심 문화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소위 남성 문화는 남성의 주관성을 보기 좋게 만들려고 보편성객관성전통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여 썼다오디세우스가 위기에 빠지면 지혜의 신 아테네(Athena)가 등장해서 도와준다오디세우스 신화는 전통과 지혜로움으로 멋있게 포장해 준 남성 문화 덕분에 고전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정희진은 여성주의 지식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여성주의 지식은 남성 문화의 한계를 해체하기 위한 지적 무기애트우드는 여성주의 지식의 장점을 활용하면서 글을 쓸 줄 아는 작가다. 2005년에 발표된 페넬로피아드이보다 20년 전인 1985년에 발표된 시녀 이야기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면서 근거 없이’ 믿어왔던 남성 문화를 해체한 작품이다.

















아즈마 히로키 정정하는 힘》 (메디치미디어, 2024)




해체라는 표현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왜냐하면 해체는 흩어짐’과 ‘붕괴’의 의미와 비슷한 단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면 해체’ 대신에 정정(訂定)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 ‘정정은 일본의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가 제시한 용어이다그가 강조하는 정정하는 행위는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고치는 일이다과거의 지식을 고치는 일은 ㅘ거를 재해석’하는 일이과거를 재해석한 견해도 언젠가 고칠 수 있다정희진은 여성의 경험도 남성처럼 주관적이라고 했다개인 또는 집단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여성주의 지식도 주관적이다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지적 무기라고 해도 세월이 지나면 녹이 슨다폐기 처분할 것이 아니라 조금씩 고치면 된다현실에 맞는 지식으로 갈고 닦는(切磋琢磨) 것이다.

 

오디세우스 신화를 정정한 애트우드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오디세우스가 귀환 여정 중에 겪은 일들을 진실로 볼 수 있는가그의 경험을 가까이서 지켜본 부하들은 모두 죽고 없다오디세우스의 증언은 주관적이다한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다단지 그가 지혜로운 영웅이라는 이유로 그의 영웅담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이다꾀가 많은’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인간적인 결점을 교묘하게 가릴 줄 안다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자신을 방해하는 적들을 만났다고 말하기그는 이 세상에 없는 적들도 만들 수 있다오디세우스의 꾀는 말재주 좋은 선동가들이 자주 쓰는 전술이다. 선동가는 무해한 사람을 위험인물’로 만든다. 위험한 인물로 잘못 알려진 사람은 악인이 되고그런 악인을 집요하게 헐뜯는 선동가는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오디세우스를 너무 믿지 마시라오디세이 구라세이[주].






[1] <레드스타킹> 최초의 모임이 진행된 날은 2017년 10월 9일이다내가 <레드스타킹> 모임에 처음 참석했던 기간은 2018년 1월 말이었다이때 페미니즘 영화를 보는 날이었고, 2월부터 책 읽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주2] 귀신을 부르는 주술인 분신사바의 주문이 지역마다 다르다가장 많이 알려진 주문은 분신사바분신사바오이데 구다사이(“와 주세요를 뜻하는 일본어)’변형된 주문 중에 내가 어렸을 때 들은 것은 분신사바분신사바오디세이 그라세이그래서 오디세이 그라세이를 패러디해서 오디세이 구라세이로 바꿔 썼다


오디세이는 오뒷세이아의 영어식 이름이다. ‘장기간 여행을 뜻하기도 한다. 구라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뜻하는 은어세이는 말하다’ 또는 발언권을 뜻하는 영단어 ‘say’따라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이자 글의 제목으로 정한 오디세이 구라세이’를 의역하면 오디세우스가 거짓말을 한다(오디세우스의 여행은 거짓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풍오장원 2025-01-2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즈마의 책이 나왔었군요^^

cyrus 2025-01-27 09:22   좋아요 0 | URL
<정정 가능성의 철학>의 후속작이라던데, 이 책을 안 읽고 바로 <정정하는 힘>을 읽어도 괜찮았어요. 저자가 글을 쉽게 썼거든요. ^^
 




보리스 사빈코프(Boris Savinkov)소련 건국사와 러시아 문학사 양쪽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무장한 이방인이다. 그는 인생의 절반을 손에 무기를 쥔 이방인으로 살았다. 러시아 황실과 고위 관료들을 암살하는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시절에는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군주의 시대가 무너졌다. 사빈코프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의 임시정부에 합류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내분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정치적 노선으로 인해 다투는 상태였고, 온건파인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이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레닌(Vladimir Lenin)이 주도한 볼셰비키(Bolsheviks)가 임시정부를 축출하고 러시아를 장악했다


사빈코프는 또다시 무기를 들었다. 그가 보기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민중의 편이 아니었다. 사빈코프는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무장 세력을 조직했다. 볼셰비키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사빈코프는 폴란드에 합류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반 볼셰비키 운동을 펼쳤다. 1921년에 폴란드는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종전 이후에 반 볼셰비키 세력을 토사구팽했다. 사빈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1922년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등을 합병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했다.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소련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세계만방에 자신들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볼셰비키에 반대한 세력을 반혁명 분자로 규정하여 모조리 체포하거나 처단했다. 심지어 소련에 반정부 세력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다면서 선동하기까지 했다. 사빈코프는 노동자를 위한 비밀 무장 세력에 합류하기 위해 소련에 돌아왔지만, 결국 비밀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사실 그에게 손을 내민 비밀 무장 세력은 반정부 세력을 소탕하려는 소비에트 정권의 미끼였. ‘무장한 이방인사빈코프는 1925년에 소련의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주]


















[대구 세계 문학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2월의 책]

* 보리스 사빈코프, 정보라 옮김 창백한 말(빛소굴, 2022)




사빈코프는 망명 생활 중에 무기 대신 펜을 쥐었다. 그는 러시아 고위 관료들을 암살하는 테러 활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상세히 기록했다. 자전적인 성격이 짙은 이 글은 처음에 <테러리스트의 수기>라는 단순한 제목이 붙여졌다창백한 말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 68절에 나오는 표현이다. 사빈코프는 회상록을 소설로 개작했고, 창백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사빈코프는 롭쉰(로프신, V. Ropshin)’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하지만 사빈코프의 글은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어울려 지낸 막심 고리키(Maxim Gorky)마저 사빈코프의 글에 부정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사빈코프가 글로 묘사한 테러리스트, 즉 혁명가는 살인을 저지른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가 함께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정신적으로 나약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못마땅했다. 테러리스트로 활동한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튜체프(N. S. Tyutchev)는 자신의 회상록에서 사빈코프의 글에 대한 견해를 밝혔는데, 소설가 사빈코프혁명가 사빈코프를 죽였다고 비판했다.

















* [절판] D. S. 미르스끼, 이항재 옮김 러시아 문학사(써네스트, 2008)




사빈코프는 생전에 소설가로서 인정받지 못했으며 죽어서도 소설가로 대우받지 못한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사빈코프 또는 롭쉰이라는 이름을 찾기가 힘들다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모든 러시아 문학사 관련 문헌을 전부 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사빈코프가 한 번이라도 언급된 책 한 권을 찾긴 했다그 책이 바로 현재 절판된 드미트리 P. S. 미르스끼(Dmitry Petrovich Svyatopolk-Mirsky

)러시아 문학사. 영국으로 망명한 미르스끼는 1922년부터 런던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했고1926년에 <Contemporary Russian Literature, 1881~1925>, 이듬해에 <A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 From Its Beginnings to 1880>를 썼다이 두 권의 책 덕분에 영미권 국가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 문학사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국역본은 두 권의 책을 요약 편집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미르스끼는 사빈코프를 드미트리 메레시콥스키(Dmitry Merezhkovsky)의 영향을 받은 테러리스트로 소개한다. 그리고 센세이셔널한 고백창백한 말은 메레시콥스키의 아내이자 시인으로 활동한 지나이다 기피우스(Zinaida Gippius)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평가한다메레시콥스키와 기피우스는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을 이끈 작가다


하지만 단편적인 수준의 내용은 사빈코프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미르스끼의 러시아 문학사》는 1920년대에 나온 책이다. <Contemporary Russian Literature, 1881~1925>는 사빈코프가 옥사한 지 일 년 뒤에 나온 책이다따라서 미르스끼의 분석은 사빈코프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 이디스 클라우스, 천호강 옮김 러시아 문학, 니체를 읽다: 도덕의식에 관하여(그린비, 2022)

 




사빈코프와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의 문학 세계를 분석한 책이 이디스 클라우스(Edith Clowes)의 러시아 문학, 니체를 읽다. 이 책은 19~20세기 러시아 지식인과 작가들이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철학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어떤 형식으로 자신들의 작품으로 구현했는지를 보여준다.


니체 철학을 접하자마자 전율을 느낀 메레시콥스키러시아 문화가 위대해지려면 종교적 의식, 즉 기독교적 의식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교적 가치의 부활을 갈망했는데, 자유로운 주체를 억압하는 기독교를 비판한 니체 철학을 미래의 종교를 창조하기 위한 사상으로 이해했다메레시콥스키러시아에 정착해야 할 새로운 기독교를 3의 성서라고 표현한다. ‘3의 성서아름다움을 최상으로 여기는 유미주의와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기독교 윤리를 모두 수용한 미래의 종교.


메레시콥스키는 러시아에 니체 철학에 관한 논문들을 출판하는 등 니체 철학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고리키와 함께 니체의 책을 번역하려고 했지만, 이들의 계획은 실패한다. 두 사람이 이해한 니체는 너무나도 달랐다메레시콥스키가 니체의 반기독교적 관점에 주목했다면, 고리키는 ‘개인의 창조적 의지에 주목했다. 그는 창조적 의지만 있으면 개인의 삶은 변화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러시아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두 사람 모두 니체 철학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통속적 니체주의자였다.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한 이후로 고리키는 니체 철학을 부르주아 철학으로 비난하면서 결별한다.


메레시콥스키는 프랑스로 피신한 사빈코프를 도와준 은인이다. 사빈코프는 은인의 영향을 받아 니체주의적 소설창백한 말을 썼다. 이디스 클라우스는 미르스끼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사빈코프와 메레시콥스키와의 관계를 알려준다. 롭신이라는 필명을 지어준 사람은 지나이다 기피우스였다.

































*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책세상, 2015)

 

* 프리드리히 니체, 김인순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열린책들, 2015)

 

*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 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창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2004)




이디스 클라우스는 자신의 책에 혁명가의 본명인 사빈코프대신에 필명이자 소설가 롭신을 호명한다. 그러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롭신은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드러난 초인(Übermensch)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접한 니체 철학은 러시아어로 번역된 니체의 저서가 아니었다러시아에 들어온 니체의 저서는 검열관에 의해 삭제되었거나 니체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편집자의 손을 거친 조악한 책이었다. 러시아 지식인들은 왜곡된 니체를 성급하게 만났고, 모방하거나 오독하는 수준에 그쳤다. 클라우스는 롭신을 문학적 개성이 부족한 작가로 평가한다. 


클라우스는 창백한 말에서 니체의 초인 사상을 모방하고 왜곡한 흔적을 주목한다. 창백한 말의 주인공 조지(George)는 테러리스트인 작가의 분신이다. 조지는 세상을 경멸한다. 사랑, 도덕, 평화도 증오한다. 그에게 테러와 살인은 혁명을 위한 일이 아니다. 조지는 살인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삶은 투쟁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자신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해야 직성이 풀리는 조지의 투쟁적 삶은 니체의 초인 사상으로 볼 수 없다. 니체의 초인은 고난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마저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용어로 알려진 운명을 사랑하는(긍정하는) 태도조지의 목적 없는 투쟁은 결국 자기 파멸에 이른다. 니체 철학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고, 자기 파멸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동적 허무주의 또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창백한 말의 테러리스트는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인물이다. 세상을 증오하는 조지는 죽을 때까지 볼셰비키에 맞서 싸운 무장한 사빈코프를 닮지 않았다. 기독교적 사랑과 도덕을 무시하는 조지는 종교에 심취한 메레시콥스키에 대한 사빈코프의 거부감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사빈코프는 생명의 은인을 등 돌릴 수 없었는지 은인의 아내가 지어준 필명으로 자전적인 소설 창백한 말을 발표했다소설가 롭신은 니체를 잘못 이해한 니체주의자이렇듯 창백한 말작가 한 사람의 분열된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이 글에서 서술된 러시아 혁명의 전개 과정은 주류 역사학계의 관점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러시아 혁명을 연구한 주류 역사학계는 케렌스키 임시 정부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가 등장한 191710월 혁명을 볼셰비키의 군사 쿠데타로 이해했다.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보수파 역사학자들은 볼셰비키를 부정적인 정치 세력으로 바라봤다


정보라 작가가 쓴 창백한 말해설문에도 볼셰비키와 10월 혁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정보라 작가는 사빈코프를 권력에 저항한 민중주의자로 소개하는데, 사빈코프가 저항한 권력이 바로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한 볼셰비키를 가리킨다.


















* [개정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류한수 옮김 1917년 러시아 혁명: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책갈피, 2017)

 

* [구판 절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류한수 옮김 혁명의 시간: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교양인, 2008)



 

하지만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개방 정책과 소련 연방이 해체된 1991년 이후에 오랫동안 봉인된 문서고가 열렸다. 그 속에 볼셰비키와 10월 혁명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사료들이 있었다. 이 사료를 주목한 역사학자들은 주류 역사학계의 보수적인 견해를 반박했고, 10월 혁명을 민주적인 과정을 거친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권력 독점을 목표로 한 다수파로 알려진 볼셰비키는 민중의 평등이 목표인 소수파였다고 주장한다. 수정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러시아 혁명 연구자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라비노비치의 저서 1917년 러시아 혁명》(구판 제목은 《혁명의 시간》이다)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군인 사빈코프의 활약상을 알 수 있는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24-12-24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글은 거의 논문 수준이네요. 아니, 늘 시루스님의 글은 그랬던 것 같아요. 암살자이자 혁명가가 쓴 소설이 궁금하기는 하네요. 그런데 또 그 책이 니체를 잘못 이해한 결과물이었다니.

교양인에서 냈던 [혁명의 시간]은 책장에 있었어요.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읽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개정판을 책갈피에서 냈군요. 두 출판사 모두 인연이 있어서 저에게는 이 사실이 흥미롭네요.

cyrus 2024-12-25 22:56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이번 주 금요일에 있는 독서 모임 때 참석자들에 들려주고 싶어서 썼어요. 참고한 책들의 주요 내용을 요약했어요.

저는 <혁명의 시간>을 살 뻔했어요. 제가 주말에 자주 가는 헌책방에 <혁명의 시간>이 있거든요. 책갈피 출판사가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주로 펴내는 곳인데, 개정판이 출판사를 잘 만났어요. ^^
 



나는 사람들이 잘 안 보는 책을 좋아한다. 이런 책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 못한다. 책을 즐겨 읽는 지인들은 내가 따분한 책만 골라 읽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만 이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의 독서 취향과 비슷한 독자들이 있다.

 

소설가와 번역가로 활동 중인 정보라 작가는 본인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국에선 아무도 모르는 작가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고. 정 작가의 소개말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괴상한 소설들을 쓴 작가들의 이름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이동신 옮김 러브크래프트 걸작선(을유문화사, 2024)


* 로드 던세이니, 정보라 옮김 얀 강가의 행복한 나날(바다출판사, 2011)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2021년 1월의 책]

* 레오 페루츠, 강명순 옮김 스웨덴 기사(열린책들, 2020)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2021년 3월의 책]

디노 부차티한리나 옮김 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2021)

 

*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유진현 옮김 거꾸로(문학과지성사, 2007)

 

* [4 개역판] 제임스 조이스, 김종건 옮김 율리시스(어문학사, 2016)

 

* [절판] 아서 매켄, 이한음 옮김 불타는 피라미드(바다출판사, 2011)

 



일단 제일 먼저 나온 작가는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 예전에 많이 읽었고, 최근에 다시 읽고 있다. 러브크래프트에게 영향을 준 로드 던세이니(Lord Dunsany).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덕분에 알게 된 디노 부차티(Dino Buzzati)와 레오 페루츠(Leo Perutz). 그 밖에 위스망스(Huysmans),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아서 매켄(Arthur Machen). 이중에 정말 유명한 작가는 조이스 뿐이다. 나는 이 작가들의 책이 흥미로웠는데, 그래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지 않다작중 묘사와 작가의 문장이 상당히 독특해서 이런 작품을 선호하는 취향이 아니면 어렵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다고 느낀 정보라 작가의 소개말이 있는 책 역시 특이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쓴 작가를 아는 독자는 드물다. 나만큼 괴상한 소설을 즐겨 읽는 서한용 작가이 작가를 알고 있었다예전에 내가 서울에 사는 애서가서한용의 서재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주1] 서한용 작가는 올해 6월 문학잡지 <현대문학> 신인 추천작 소설 부분 당선작 성대모사는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로 등단했다. 그는 다음에 발표할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다. 


















* 찰스 부코스키, 황소연 옮김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민음사, 2019)

 

* 찰스 부코스키, 로버트 크럼 (그림), 설준규 옮김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모멘토, 2015)




서 작가는 나에게 정지돈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 그리고 이 작가의 괴상한 소설이 좋다면서 여러 번 추천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2월의 책은 서 작가가 추천한 이 작가의 특이한 소설이다. 내게 이 소설을 소개한 서한용 작가의 추천사를 공개한다. 바쁜 와중에 독서 모임을 위한 추천사를 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대구 세계 문학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2월의 책]

* 보리스 사빈코프정보라 옮김 《창백한 말》 (빛소굴, 2022)




19세기 러시아의 모스크바 총독 암살 사건을 다룬 이 소설을 지금 이 시대에 읽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어떤 사람들에겐 아무 의미 없을지 모른다. 혁명? 허무와 사랑 사이의 고뇌?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지. 현실을 살아. 대형할인마트에서 쇼핑하기,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음식 먹기, 다이소에서 갓성비 아이템 사기, 쿠팡에서 로켓배송 상품 주문하기, 텔레비전으로 예능 보기,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접속하기, SNS로 남들이 올린 여행지 구경하기, 유튜브로 하루종일 쇼츠 영상 보기.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30평형 아파트에 들어와 잠을 청하기. 안온하고 안락한 하루. 이런 거, 이런 게 행복 아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작동할 여지가 얼마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열거한 것들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세계는 병들었고, 나는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고, 세계의 어떤 이도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고 믿는 사람, 우리는 세계의 압제와 폭력과 억압과 착취와 부조리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싸우는 것이 좋아서 싸우는 게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어쩌면 이 책은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될지 모른다.


















* 리사 크론, 문지혁 옮김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사람의 뇌가 반응하는 12가지 스토리 법칙》 (웅진지식하우스, 2024)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 픽션들(민음사, 201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픽션들(민음사, 1994)

 



리사 크론이야기란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잘 쓰인 소설은, 주인공이 변화하는 만큼 독자를 변화시킨다. 읽은 후의 나를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소설. 이것이 좋은 소설이다. 관건은, 그 변화가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좋은 소설이 독자를 변화시킨다면, 위대한 소설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독자를 변화하게 만든다. 보르헤스 예술은 불과 수학의 결합[주2]이라고 했다. 보리스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은 화염을 방사하는 수학의 정석이다.



보리스 사빈코프(Boris Savinkov)러시아 고위 관료들을 암살한 사회주의 계열의 테러리스트. 자신의 테러 활동을 기록한 <테러리스트의 수기>를 썼고, 3년 후에 이 글은 창백한 말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세상에 공개된다. 당시 사빈코프는 망명 중이라 ‘빅토르 롭쉰(V. Ropshin)’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에 서로 다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혁명을 꿈꾸는 테러리스트들이 나온다작가 본인의 성격과 가치관이 반영된 소설의 주인공은 감정 기복이 심하며 그의 인격은 세상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인용한 소설 속 문장은 주인공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요즘 나는 열병에 걸린 사람 같다. 나의 모든 의지는 단 한 가지, 살인하고 싶다는 열망에 집중되어 있다. (68)

 


창백한 말‘특이한 소설’이. 소설의 원형인 <테러리스트의 수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는 어디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사빈코프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다. 작가보다는 사회주의자 또는 테러리스트로 알려졌다위험한 사상을 가진 작가의 책을 독서 모임 선정 도서로 읽을 필요가 있는지 따지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창백한 말을 번역한 정보라 작가는 작품 해설에 사빈코프를 민중 해방을 위해 혁명에 몸을 바친 민중주의자로 소개했다. 그러나 사빈코프가 파시즘을 지지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달에 미국의 공포 소설 작가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선집이 세계 문학 전집에 포함되어 출간되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번역한 역자는 러브크래프트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와 우생학 지지를 상세히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 위험한 생각’이 녹아들어 있는 작가의 소설을 신중하게 읽고 비평하자고 제안한다. 창백한 말》도 비판적인 비평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창백한 말을 소설 또는 문학 작품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소설이 처음에 수기였으니 에세이로 분류할 수 있다사빈코프가 왜 수기를 소설로 고쳐 썼는지 궁금하다.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알베르 카뮈 전집 4: 여행 일기.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시사 평론(1947~1950)(책세상, 2010)

 

* [절판]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정의의 사람들 · 계엄령(책세상, 2000)

 




사빈코프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문학의 아웃사이더. 하지만 소수의 작가만이 그를 기억했다. 특히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창백한 말에 영감을 얻어 희곡 정의의 사람들을 썼다. 정의의 사람들에도 러시아의 테러리스트들이 등장한다. 그중 한 사람인 이반 칼리아예프는 도덕을 중시하는 테러리스트다서 작가의 알라딘 블로그 필명(닉네임)은 칼리아예프.[주3] 

 





[1] <...: 서울 청년 서한용 씨의 서재를 탐()하다

2023104일 등록

https://blog.aladin.co.kr/haesung/14958932


[2]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 나오는 표현이다.


[3] 서한용 작가의 알라딘 블로그 주소

https://blog.aladin.co.kr/seohy12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4-11-29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보라 작가가 동아일보에 연재하곤 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책에 대한 소개의 글이었어요. 저도 창비에서 나온 세계단편선을 읽으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 중 좋은 작품이 많구나 하고 느꼈지요. 픽션들, 제가 읽다만 책이네요. 언젠가는 완독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어요. .

cyrus 2024-12-12 06:33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의 소설 중에 봐도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있어요. 또 읽다 보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되는 날이 올 거예요. ^^;;

stella.K 2024-11-29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서한용 씨가 소설도 썼구나. 알지.
근데 방금 서재 잠깐 다녀왔는데 저 사진 뽀샵한 거 같다. ㅎㅎ
암튼 오늘 소개한 책 매력적이긴한데 난 언제 보게될지 모르겠어.
글치 않아도 <타타르인의 사막> 좋다는 사람 많던데...ㅠ

cyrus 2024-12-12 06:35   좋아요 1 | URL
<타타르인의 사막>은 처음에 지루할 거예요. 소설 중반부 지나서야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이 나요. ^^;;

칼리아예프 2024-11-30 1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 해성님 잘 읽었습니다. 추천의 글을 쓰게 되서 기쁘네요. 모임 참여하시는 분들도 <창백한 말> 재밌게 읽으셨음 좋겠습니다. ㅎㅎ 읽고나서 대화도 즐거우시길! ㅋㅋ 😆 그리고 stella.k님ㅋㅋ 서재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사진은 등단하고나서 사진스튜디오에 가서 프로필 사진 찍게 되어서 찍은 거다보니, 원본에 보정을 해주셨어요. ㅎㅎ 뽀샵을 얼마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뽀샵 한 것 맞습니다…. 😇

stella.K 2024-11-30 11:57   좋아요 1 | URL
ㅎㅎ 아,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다 사이러스와는 좀 이물없이 소통하는 편이라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등단 축하합니다. 모쪼록 건필하시고 소설집 한 번 내십시오. 읽어 보겠습니다.^^

blanca 2024-11-30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sf에 빠져서 러브 크래프트 저 단편집 읽어보려 했는데 지루한가요? 작가가 우생학 지지한지도 몰랐네요. 와, 그리고 습작 기간도 없이 첫작품으로 바로 등단이라고요? 대단하시네요. 댓글 읽고 빵 터졌어요.

cyrus 2024-12-12 06:37   좋아요 0 | URL
러브크래프트는 아무나 추천하기 힘든 작가예요.. ㅎㅎㅎ 읽어 보면 재미있는 소설도 있는 반면에 결말이 허무한 소설도 있어요. ^^;;

transient-guest 2024-12-12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P Lovecraft전집을 읽었는데 번역이 좀 이상하긴 했습니다. 최근엔 셜록 홈즈의 세계관과 이를 합친 노작 (Lovegrove란 작가입니다)을 즐겁게 읽었어요. 저는 위의 모음에 작가 하나를 더 추천합니다. 엘저넌 블랙우드라는 작가인데 아주 특이한 시리P Lovecraft전집을 읽었는데 번역이 좀 이상하긴 했습니다. 최근엔 셜록 홈즈의 세계관과 이를 합친 노작 (Lovegrove란 작가입니다)을 즐겁게 읽었어요. 저는 위의 모음에 작가 하나를 더 추천합니다. 엘저넌 블랙우드라는 작가인데 John Silence라는 occult detective시리즈가 정말 특이합니다

cyrus 2024-12-21 10:38   좋아요 0 | URL
황금가지 출판사의 <러브크래프트 전집>을 번역한 정진영 씨가 ‘미스터 고딕’이라는 예명으로 고딕 장르 전문 전자책 출판사를 만들었어요. 출판사 이름이 ‘바톤핑크’예요. 지금까지 번역한 고딕 장르 작품만 해도 양이 어마어마해요. 지금도 활동 중이에요. 이분이라면 언젠가 존 사일러스 시리즈에 속한 작품을 번역하실 거라 생각이 드네요. ^^

transient-guest 2024-12-21 11:02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합니다 찾아봐야겠네요 ㅎㅎ
 




옐로스톤(Yellowstone)엄청 뜨거운 국립공원이다. 이곳 지하 밑에 엄청난 양의 마그마 덩어리가 있다. 옐로스톤의 온천과 간헐천은 섭씨 100도에 이른다. 특히 올드 페이스풀(Old Faithful) 간헐천은 최대 50m까지 온천수를 뿜어낸다전 세계 관광객들은 지구가 내뿜는 뜨거운 분수 쇼를 보기 위해 옐로스톤을 방문한다.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열두 번째 모임(11월) 선정 도서]

* 빌 브라이슨, 이덕환 옮김 거의 모든 것의 역사(까치, 2020)





빌 브라이슨(Bill Bryson)거의 모든 것의 역사 15장 제목은 위험한 아름다움이다. 이 장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옐로스톤의 화산 지대를 연구하는 지질학자들의 이야기다. 빌은 옐로스톤에 근무하는 폴 도스(Paul Doss)라는 지질학자를 만난다. 폴은 지질학을 연구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 옐로스톤이라고 주장한다온천에 암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는데, 달걀 썩는 냄새와 비슷한 황 냄새가 나는 온천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없다고 한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262쪽). 폴은 옐로스톤을 사랑하는 지질학자다. 

















* 스켑틱 협회 편집부 SKEPTIC 23: 과학의 시대, 종교를 생각한다(바다출판사, 2020)




과학자들은 종종 자신들이 연구하는 대상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특히 수학자들은 수학 공식을 아름답다고 한다도대체 과학자들은 과학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기에 아름답다고 표현할까과학의 아름다움을 무조건 미학적 관점으로 국한해서 이해해야 할까? 


지난번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의 선정 도서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였다. 나는 앞서 언급한 폴 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아름다운 과학’의 의미를 자유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발제문을 만들었다<수레바퀴와 불꽃> 소속 회원 지용 님은 과학 잡지 스켑틱 SKEPTIC23호에 실린 글 한 편을 추천했다글 제목은 <실험의 미학에 대하여>이다. 글쓴이는 분자생리학자 전주홍 교수.


대부분 사람이 생각하는 과학 연구는 이렇다. 가설 설정으로 시작해서 가설을 확증할 수 있는 실험을 반복해서 수행한다. 이렇게만 보면 과학이 객관적인 학문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전 교수는 실제로 진행되는 과학 연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정확성이 떨어질 정도로 뒤죽박죽으로 진행된다몇몇 과학자는 가설의 오류를 보여주는 실험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이 처음으로 제시한 가설이 틀렸는데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설이 이라는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실험 단계를 수정한다. 이러면 실험 과정이 번잡스러워진다그렇지만 전 교수는 과학자들의 실패와 오류가 빈번히 생기는 비과학적인 실험이 아름답다고 말한다왜냐하면 과학자들은 실패와 오류를 즐기면서 과학을 배우기 때문이다


<수레바퀴와 불꽃> 회원 진범 님은 시를 좋아하고평소에 시를 쓰는 분이다. 진범님은 과학이 끝내 증명하지 못한 것들이 언급된 거의 모든 것의 역사가 흥미롭다고 했다. 진범 님이 느낀 과학의 아름다움과학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이해하기 위해 계속 질문하고 실험하는 과학자들의 태도.


예전에 내가 쓴 글에서 인용된 빌의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은 겉으로는 우아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너저분한 학문이다(거의 모든 것의 역사194)우리가 알고 있는 우아한 물리학은 정확하다. 우리는 실험하지 않아도 이미 증명된 법칙으로 과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너저분한 물리학은 비논리적이며 오류투성이다. 실험은 과학자의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설을 제대로 검증하려면 성능이 뛰어난 실험 장비를 마련해야 한다과학자가 처음에 지정한 실험 장비만 가지고 실험을 반복할 수 없다. 더 나은 실험을 수행하려면 연구비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이 나올 수 있다.


















김현철 세 개의 쿼크강력의 본질양자색역학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계단, 2024년)

 



입자 가속기의 한 종류인 사이클로트론(Cyclotron)의 초기 형태는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그래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실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은 입자보다 아주 더 작은 입자를 찾기 위해 사이클로트론을 꾸준히 개량했다. 그러면서 사이클로트론은 점점 거대해졌다. 사이클로트론의 변천사는 과학이 실험 장치의 개선을 통해서 발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험실의 장치화[주]는 과학자들의 연구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실험 장치가 많아지자, 과학자가 혼자서 실험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다수의 과학자가 함께 연구하고, 연구 결과가 담긴 논문도 함께 쓴다

 








 












김재영 상대성이론의 결정적 순간들세계에 대한 관점을 뒤바꾼 가장 유명한 이론의 탄생과 발전》 (현암사, 2023)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은 아프리카 프린시페섬에서 개기 일식을 관측해 태양 주변의 별빛이 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별빛이 태양의 중력 때문에 휜 것이다. 1919년 아서 에딩턴의 개기 일식 관측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관측으로 증명해 낸 역사적인 순간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관측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에딩턴이 주도한 관측대 팀이 얻은 데이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지지하는 데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프린시페섬 관측대 팀과 브라질 소브라우 관측대 팀은 같은 시간에 개기 일식을 관측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브라질 팀은 스물여섯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프린시페 팀은 단 일곱 장의 사진만 가까스로 건졌다. 관측 사진을 찍는 날에 프린시페섬의 날씨는 좋지 않았다. 아침에 심한 천둥이 쳤고, 오전 내내 하늘에 짙은 구름이 드리워졌다. 운이 나쁘게도 프린시페섬 팀이 찍은 사진 전부 화질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쓸모 있는 사진 일곱 장을 건졌지만, 이 사진들만 가지고 태양 부근에 지난 별빛은 휘어진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할 수 없었다.

 

반면에 브라질 팀이 촬영한 사진들은 화질이 좋았고, 사진으로 확인 가능한 측정값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1911년 말에 영국왕립학회와 영국왕립천문학회는 일반 상대성 이론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을 공동 발표했다. 에딩턴을 비롯한 영국 과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소원해진 영국 과학계와 독일 과학계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국 과학계는 자신들의 대선배나 다름없는 뉴턴(Newton)의 역학을 뒤집어버린 독일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양국의 평화를 위해 에딩턴이 브라질 팀의 측정값을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브라질 팀이 촬영한 사진의 측정값은 뉴턴 역학에 근접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일반 상대성 이론과 크게 차이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에딩턴의 개기 일식 관측 결과와 일반 상대성 이론이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과정에 논란이 있었으나 1979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의 효과로 별빛이 태양 근처를 지난다는 사실이 재확인되었다개기 일식 관측은 에딩턴의 임기응변이 아니었으면 실패한 실험으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수레바퀴와 불꽃> 회원이자 소설가로 활동 중인 박하신 님은 과학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정을 반복된 경험이 만든 후천적 감정이라고 했다. 과학자는 실패와 실수를 늘 반복하면서도 이를 배움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실험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과학자에게 무수한 실패와 실수는 좌절감이 기다리는 종착점이 아니라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마르지 않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과학의 미학은 간결성과 완벽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완벽하지 않아도 과학은 아름답다.




[] 전주홍, <실험의 미학에 대하여>, SKEPTIC 23: 과학의 시대, 종교를 생각한다125.





cyrus의 변명

 

이번 달 초에 있었던 <수레바퀴와 불꽃> 독서 모임의 두 번째 후기. 독서 모임 후기를 두 편 연달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후기에 모임 때 언급하지 못한 내 생각이 덧붙여졌다. 결국 두 번째 후기의 분량이 길어졌다.

 

분량이 많은 글은 지저분한(너저분한) 글’, 그러니까 한마디로 실패한 글이다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에 나온 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독자는 귀하다(이런 분이 있으면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최근에 읽은 책의 내용이 포함되었고, 이때부터 실패가 내 눈앞에 어슬렁거리면서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이 글을 썼을 때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후기를 쓰겠다고 박하신 님에게 얘기하는 바람에 안 쓸 수가 없었다. 인스타그램에 이 글을 편집해서(분량을 줄여서) 올려야 하는데, 귀찮아서 다시 쓰고 싶지 않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11-18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학을 읽는 모임인가봅니다.
흥미있는 책이 많이 있네요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오래전에 읽었는데,,, 그 후 빌 브라이슨의 책은 다 사서 보는 편입니다. 유머러스 한 사람이란 생각했습니다.^^
<우주가 바뀌던 날 그들은 무엇을 했나>도 비슷한 류, 재밌었어요.

cyrus 2024-11-19 06:51   좋아요 1 | URL
제가 요즘 과학을 주제로 한 글을 써서 <수레바퀴와 불꽃>이 과학책 읽는 모임으로 보일 수 있겠어요.. ㅎㅎㅎ <수레바퀴와 불꽃>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모임이에요. 내년 1월 도서는 페미니즘 책이에요. ^^ <우주가 바뀌던 날 그들은 무엇을 했나>는 아직 안 읽어봤어요. 과학사를 다룬 책이 의외로 재미있어요. 어려운 내용이 많지 않아요. ^^

syo 2024-11-19 1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사이러스님 글을 보니 역시 여기가 알라딘이로구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성의 있는 레이아웃하며 알찬 구성하며...

cyrus 2024-11-24 22:00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syo님. 세월에 장사 없다는 말이 있듯이 예전에 비해 독서량이 줄어들었어요. 글 한 편 쓰려면 최소 2~3일 걸릴 때가 있어요. 알라딘 서재는 글을 올릴 때만 방문하지 자주 들어오지 않아요. 서재 방문이 뜸해지니까 예전에 친했던 서재 이웃분들과 교류가 줄어들었어요. 그래도 알라딘 접속 시간을 줄이니까 독서와 글쓰기에 집중이 잘 돼서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