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책]방
EP. 27
주책필름
(2025년 4월 4일 금요일)
4월 4일 금요일. 용산 독재자가 파면되었다. 오전 11시 22분. 그 순간 탄핵의 날이 되었다. 소리 높여 독재자에 저항한 광장의 시민들이 이겼다.

4월 4일 금요일. 서울에 갔다. 다행히 그날은 일이 일찍 마쳤다. 오후 7시 22분. 서대구역에서 출발하여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관악구로 향했다. 그곳에 희곡 및 영화 전문 가게 <인스크립트>와 비슷한 책방이 있다.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이 서점은 <인스크립트>와 다른 매력이 있다. 책을 읽으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서점이다. 당곡역에 내려서 골목길을 조금만 더 걸으면 늦은 밤에도 불빛이 흘러나오는 서점을 만날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책과 술, 그리고 영화가 있는 서점 <주책필름>이다.
주책잡기(酒冊雜記: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술을 마시는 일)의 달인인 나는 오래전부터 <주책필름>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주책필름>은 영화와 책을 좋아하는 부부가 운영한다. 아내인 여(女)사장님은 밤 12시 30분까지 <주책필름>을 운영하고, 남편인 남(男)사장님은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작당모의>를 운영한다. <극장 작당모의>는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있다.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극장 작당모의>에서 단편 독립영화들이 상영되는데, 하루에 세 편의 영화가 나온다.


<주책필름> 안에 영화와 관련된 소품들로 가득하다. 서점의 벽에는 독립영화 포스터로 채워져 있다. 책방 한구석에 비디오테이프로 만든 탑이 있다. 아날로그 텔레비전으로 비디오테이프 영화를 볼 수 있다. <주책필름>은 관악구의 ‘시네마 천국’이다.


희곡 전문 서점이라면 반드시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드라마’에서 펴낸 보랏빛 표지의 희곡들이 있어야 한다. <주책필름>에서 지만지드라마 책을 사면 사장님이 직접 비닐 책 커버를 씌워 준다. 비닐 책 커버는 책 표지의 손상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손끝에 남아있는 기름기가 책 표지에 묻히는 것을 방지한다.
* 와즈디 무아와드, 임재일 & 최준호 함께 옮김 《화염》 (지만지드라마, 2019년)
* 와즈디 무아와드, 임재일 옮김 《연안 지대》 (지만지드라마, 2019년)
* 나탈리 사로트, 이광호 & 최성연 함께 옮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지만지드라마, 2023년)
* 팔로마 페드레로, 박지원 옮김 《변신》 (지만지드라마, 2023년)
* 아리스토파네스, 이희원 옮김 《리시스트라타》 (지만지드라마, 2024년)
*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김선욱 옮김 《살라메아 시장》 (지만지드라마, 2024년)
* 세르히오 블랑코, 박지원 옮김 《테베랜드》 (지만지드라마, 2024년)
<주책필름>에 판매하는 지만지드라마 책 중에 이미 구매한 책은 총 일곱 권이다. 이 책들의 절반은 <인스크립트>에서 샀다.

<주책필름> 한가운데에 너덧 명의 손님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탁자가 있다. 혼자 오는 손님과 커플 손님들은 동네 풍경을 훤히 볼 수 있는 작은 탁자를 선호한다. 나는 커다란 책상에 앉아서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저녁 식사를 거르고 바로 서울로 간 나는 책벌레보다는 술고래가 되고 싶었다.

첫 번째 저녁 메뉴는 팝콘과 버터 맥주였다. 팝콘은 작은 그릇에 담겨 나온다. 팝콘을 아주 좋아하거나 같이 온 손님이 있으면 큰 대접의 팝콘을 주문할 수 있다. 먹다가 남으면 봉지에 담아서 가져가도 된다. 나는 큰 대접의 팝콘을 주문했는데, 밥 한 공기와 같았다. 그 자리에서 팝콘을 다 먹었다.

여사장님은 서비스로 땅콩과 피스타치오를 주셨다. 그리고 ‘탄핵의 날’ 기념으로 작은 위스키 잔에 따른 달콤한 ‘탄핵 주(酒)’도 얻어 마셨다.


저녁 식사 두 번째 메뉴는 치즈와 막걸리 하이볼이었다. 하이볼을 금방 다 마셔서 ‘아마‥… 맥주’를 주문했다. ‘아마‥… 맥주’는 아마겟돈 맥주의 줄임말이다.
커다란 탁자는 여사장님과 <주책필름>의 단골들이 주로 앉는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건너편에 멋진 수염을 기른 ‘서 씨’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주책필름>의 단골 중 한 사람이다. 나, 여사장님, 청년, 우리 세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여사장님의 고향은 포항이며 서 씨는 대학생 때 경산에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극장 작당모의> 영화 상영을 마무리한 남 사장님이 <주책필름>에 돌아오셨고, 운이 좋게도 <주책필름> 첫 방문에 부부 사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 백상현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그림으로 읽는 욕망의 윤리학》 (책세상, 2014년)
서 씨는 프로필사진을 촬영하는 사진가다. <주책필름>에 오면 주로 위스키를 마신다고 했다. 이분도 책을 좋아하는 열혈 독자다. 그분이 <주책필름>에 왔을 때 손에 들고 있던 책은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이었다.
<주책필름>이 끝나는 시간이 되자, 서 씨는 자신이 자주 가는 위스키 바가 있다면서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우리는 걸어서 위스키 바에 갔다. 자정이 지나자,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갔던 <블렌더스>라는 이름의 위스키 바는 건물 지하에 있다. <블렌더스>는 새벽 2시까지 영업하며 위스키뿐만 아니라 포도주와 커피도 마실 수 있다.

우리는 포도주 한 병 주문하여 함께 마시면서 대화했다. 우리는 독서 취향이 비슷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경험한, 크고 작은 서글픈 순간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가슴속에 눌러앉아 있던 나의 감정들을 경청해 준 서 씨가 정말 고마웠다. 우리는 포도주 한 병을 비우고 헤어졌다. 다음에 또 <주책필름>에 오게 되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서 씨는 토요일에 시간이 되면 관악구에서 가장 유명한 서점 <그날이 오면>에 꼭 가보라고 추천했다. <그날이 오면>은 1980년대에 문을 연 사회과학 전문 서점이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서점 이름만 들으면 책을 사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은 금방 녹아서 사라진다.